고목들

 

고목들

이준희

 
 

 

1

어서 오세요. 출입문 옆에 서 있던 직원이 우리에게 인사를 했다. 나는 고개를 까닥였을 뿐 눈은 마주치지 않았다. 반면 K형은 예에, 라고 큰 소리로 대꾸하며 제일 구석진 곳의 테이블로 걸어갔다.
홀과 바, 그리고 카운터가 훤히 보이는 자리에 내가 앉았고, 맞은편 자리에 K형이 앉았다. 직원이 메뉴판과 재떨이를 들고 다가오자, K형은 양해를 구하듯 말했다.
“일행이 더 있는데, 오면 주문할게요.”
“네, 그러세요.”
직원이 웃음 지으며 물러갔다.  
내가 눈짓하자 K형이 메뉴판을 펼치고 점퍼 안주머니에서 조심스럽게 소형 녹음기를 꺼냈다. 그러고는 메뉴판에 적힌 양주 이름과 가격을 조용히, 그러나 또박또박 읽기 시작했다. 나는 담배를 피워 물며 실내를 훑어봤다.
잠시 후 K형이 메뉴판을 덮었다. 녹음이 끝났다는 얘기다. 일을 반복할수록 시간이 단축되고 있었다. K형은 녹음기를 점퍼 안주머니에 넣고 이번에는 휴대폰을 꺼냈다. 연기가 필요한 일은 K형이 맡았다. 형은 걸지도, 걸려오지도 않은 전화기를 붙잡고 일부러 큰 소리로 말했다.
“뭐? 여기를 왜 못 찾아! 그래, 역에서 쭈욱 올라오면 된다니까. 왔다고? 근데 못 찾겠어? 에이씨. 알았어. 우리가 나갈게.”
우리는 슬며시 일어나 재빠르게 출입구로 향했다.
“죄송합니다. 다음에 올게요.”
대부분의 주인들이 이렇게 나가는 우리를 못마땅해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것이 우리의 일이었으니까. 가게에서 나오자마자 K형은 다시 녹음기를 꺼내 내게 건네주었다. 나는 녹음 버튼을 누르고 또박또박 말했다.
“광고물 벽에 큰 거 두 개, 작은 거 하나, 테이블 4인용 열두 개, 바에 좌석 열 석, 홀 서빙 두 명, 바텐더 두 명.”
열두 번째 술집 조사는 이것으로 끝났다. 이렇게 거리를 헤집고 다닌 지 벌써 사흘째였다. K형이 다음 장소를 찾기 위해 지도를 펼쳐 들었고, 이리저리 건물들과 지도를 맞춰 보더니 손가락을 들어 방향을 가리켰다. K형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는데, 골목 반대편에서 바람이 불어와 K형과 나를 훑고 지나갔다.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K형이 나를 돌아보며 왜 그러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나는 우리를 스쳐간 그 바람 속에서 매우 친숙한 어떤 냄새를 맡았다. 마치 언젠가 꼭 맞은 것만 같은 바람이었고, 또한 내가 모르는 아주 오래 전부터 불기 시작한 바람인 것 같았다. 세상에 관해 확신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지만 가끔 분명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있다. 나를 스치고 지나간 그 바람이 다른 세상을 돌아 결국 내게 다시 돌아올 거라는, 기억이란 또한 그런 바람과 같다는 것이다.
대답 없이 K형을 바라보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오후 아홉 시 사십 분. 아직도 들러야 할 가게가 많았다. 나는 다시 K형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2

“NASA는 지금도 지하 깊은 곳에 대피소를 만들고 있을 거야.”
시립도서관 지하식당에서 내가 먹던 우동을 젓가락으로 둘둘 말며 K형이 말했다. 1998년 여름이었다. 나는 고3이었고, K형은 나보다 한살 위로, 재수생이었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형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어쩌면 벌써 다 만들어 놓고 몇 사람씩 아무도 모르게 데려가는지도 모르지.”
나는 K형이 내 만두까지 집어먹는 것을 보며 대꾸했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내가 묻자 K형은 고기만두를 양볼에 잔뜩 문 채 말을 이었다.
“과학자들은 대학도 나오고 대학원도 나온 사람들이야. 그런 사람들이 지구가 멸망할 수 있다는 말을 재미로 했을 거 같아?”
그 시기도 여느 여름과 별반 다를 것 없이 지나가고 있었지만, 굳이 특이할 만 한 점을 이야기한다면 21세기를 앞둔 시점이어서 종말론이 하나의 화두로 떠올랐다는 것이다. 그 분위기를 증명이라도 하듯 지구와 운석의 충돌을 다룬 몇몇 영화들이 개봉되거나, 깊은 동굴 속에서 비상식량만 준비해 종말에 대비하며 사는 부부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텔레비전에서 방영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에 관심이 많았고, 지구와 부딪힐 행성에도 신경을 썼다.
지구로 날아오는 행성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근거 없는 허풍이라고 했고, 또 다른 사람들은 행성이 지구를 향해 오는 것은 맞지만 아주 아슬아슬하게 비껴갈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지구와 소행성의 충돌을 예견했던 과학자들이 다음 날이나 혹은 그 다음 날에는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말을 바꾸기도 했다.
행성과의 충돌을 염려하는 사람들은 불안해했다. 그러나 대처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지구의 궤도와 행성의 궤도 사이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조차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들은 그들의 운명이 그 사이에서 결정될 거라고 믿었다.
K형과 나도 종종 종말에 대해 이야기했다. K형은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대학생활을 일 년, 아니 한 학기라도 해 보고 죽어야 하지 않겠냐? 나중에 우리가 화석이 되어 세상에 공개됐을 때 분류 기준이 뭔지 알아? 대학생 화석인가 아니면 고졸 화석인가야.”
K형은 이번이 무조건 마지막이라고 했다. 삼수는 없었다. 노스트라다무스가 예언한 것이 1999년이었으므로 대학생이라는 명찰을 달 수 있는 기회는 마지막인 셈이었다. 나 또한 대학생이 되기 위해 에어컨이 고장난 도서관에서 땀을 흘리며 문제집을 풀거나 주말에도 새벽부터 줄을 서 가며 도서관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형은 다 먹은 그릇을 쟁반에 담으며 내게 물었다.
“그런데 너는 무섭지 않아?”
“뭐가요?”
“행성 말이야.”
형은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 말이 정말이면 어떡하지?”
문제는 반신반의하던 친구들이 아니라 나였다. 날아오는 행성의 존재를 철썩같이 믿었던 것이다. 그 시절, 나는 행성이 다가오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늦은 시각 학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집 근처 가로등 아래를 지나다가 휙, 혹은 모의고사 성적표를 받다가 휙, 하고 행성의 거대한 그림자가 불현듯 가슴속에 드리워지곤 했다. 그런 때면 기억 어딘가에 잠자고 있던 불안한 전조의 멜로디가 지체 없이 연주되어 내 몸을 휘감았고, 나는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행성의 자취를 찾아보려 했다. 언제부터 행성이 지구로 오고 있었던 것인지를 생각하면서. 그러나 그게 언제부터였든 간에, 그것과는 상관없이 결과는 늘 두 가지였다. 충돌하거나 아니면 비껴가거나. 그것은 시험문제 같았다. 정답과 오답,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 성공과 실패. 안정과 불안정. 사람들은 언제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나는 그 사이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했다. 

3

나는 지금도 가끔 불안한 전조의 멜로디를 흥얼거리곤 한다. 그 멜로디를 처음 들은 것은 1986년, 그러니까 내가 일곱 살이었을 때이다.
내게는 한 살 터울의 누나가 있었는데, 누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어김없이 학원 로고가 새겨진 가방을 들고 원생들을 나르는 봉고차에 몸을 실었다. 나는 그런 누나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했다. 집에 처박혀 있는 나와는 달리 누나는 학교도 다니고 또래들과 어울려 피아노 학원에도 다녔던 것이다. 무엇보다 부러웠던 것은 누나가 피아노를 친다는 사실이었다. 책을 펼치면 온통 콩나물처럼 생긴 음표만 가득한데도, 누나는 더듬더듬 그 음표들을 보며 하얗고 검은 건반에 손을 올려 멜로디를 만들어냈다. 그것은 누나와 피아노만 아는 암호로 소통되는 기분이었다.
나도 피아노를 배우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동시에 둘을 학원에 보낼 만큼 넉넉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런 사정은 나로 인한 것이기도 했다. 내 병원비로 지출되는 돈이 만만치 않았으니까. 그해에 나는 병원에 장기간 입원해 수술을 받아야만 했는데, 한쪽 머리뼈가 너무 일찍 여물어 뇌가 자랄 자리를 막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해 몇 달 동안 나는 종합병원을 찾아 검사를 받았고, 수술날짜가 잡힌 뒤에는 입원생활을 해야 했다.
친구들과 어울려 뛰어놀아도 시원찮을 판에 병원 침대에 누워 있으려니 좀이 쑤시는 건 당연했다. 월요일과 화요일 심야에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던 드라마를 시청하는 일과 휠체어를 타고 병원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는 일은 몇 안 되는 즐거움이었다. 내가 입원해 있던 병실에서 월요일과 화요일 밤, 열시부터 열한시까지 그 드라마를 켜놓는 데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내가 검사를 받느라 피곤해져 일찍 잠들기라도 하면 슬며시 나를 흔들어 깨우기까지 했다. 아무리 힘들어 보여도 깨우지 않으면 다음 날 심통을 부린다는 것을 병실에 있던 사람들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휠체어를 타고 병원을 돌아다니는 것도 여간 즐거운 게 아니었다.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누나들의 배려로 간신히 휠체어 하나를 빌려왔던 건데, 나는 밤늦게 잠든 엄마 몰래 휠체어를 타고 밖으로 나가 당직 중인 간호사들의 눈을 피해 병원 구석구석을 돌아다니곤 했다. 하지만 이 즐거움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어느 날인가 휠체어가 모자란다는 이유로 다시 가져가 버렸던 것이다.
휠체어도 타지 못해 더욱 좀이 쑤시던 어느 날, 누나가 멜로디언을 들고 병원으로 찾아왔다. 피아노를 가르쳐 주겠다는 거였다. 내게 피아노를 가르쳐 주기로 작정한 것은 물론 평소 피아노 학원에 다니고 싶다고 조르던 나를 배려하는 마음에서 비롯됐겠지만, 가족들이 모두 내게만 붙어 있어 피아노를 배워도 자랑할 기회가 없는 게 내심 속상하기도 해서였을 것이다.
누나는 일주일에 한두 번씩 멜로디언을 갖고 악보 읽는 법이며 간단한 음악이론들을 내게 가르쳐 주었다. 입으로 숨을 불어넣는 동시에 건반을 두드려야 소리가 나는 멜로디언 따위가 피아노에 비할 바 아님은 당연했다. 그러나 나는 누나가 가르치는 것들을 관심 있게 들었고, 궁금한 게 생기면 질문을 했다. 비록 멜로디언으로 배우는 것이지만 퇴원하면 집에 있는 피아노를 칠 수 있게 되리라는 기대감에서였다. 
누나에게 배우는 시간은 대체로 같은 병실을 쓰는 환자가 검사를 받으러 간 때였다. 아무도 없는 병실에 누나와 단 둘이 앉아 피아노 연주하는 법을 익히던 그때가 지금도 가끔 기억나곤 한다. 누나의 연주가 멈출 때마다 음악과 음악 사이로 스며들던 것들. 잔뜩 부푼 누나의 두 볼과 창가에 흩날리던 커튼, 그리고 저만치 물러난 듯 아득히 여겨지던 바깥 풍경.
누나는 고요한 병실에서 내게 피아노 치는 법을 가르쳐 주던 중간중간에 연습해 온 몇 가지 멜로디들을 내게 들려 주곤 했다. 내가 좋아하는 만화 주제가의 한 부분이라든가, 고양이가 물 위를 뛰어다니는 모습을 표현한 멜로디 같은 것들 말이다. 내가 그 불안한 전조의 멜로디를 듣게 된 것도 그때의 일이다.
“한번 들어봐. 무서운 영화를 보면 귀신 나오기 전에 불안한 멜로디가 나오잖아? 그건 이렇게 치면 돼.”
누나는 한참 숨을 모으더니 멜로디언 건반을 두드렸다.

이 짧은 멜로디가 조용한 병실에 울려 퍼졌다. 누나가 연주한 멜로디는 서로 다닥다닥 붙어 있는 네 개의 건반이 만들어낸 하나의 울림이었고, 누나의 말 그대로 공포영화에 자주 나오곤 하던 불안한 느낌의 음악과 흡사했다. 누나는 긴박감을 더하듯 점점 더 빠르게 멜로디를 연주했고, 나는 누나가 있는 힘껏 숨을 불어넣어 가며 건반을 누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여기 ‘미’랑 ‘파’ 사이에는 왜 검은 건반이 없어?”
누나는 한참을 고민하고 노트를 뒤적이더니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마 거기에 있는 ‘미’와 ‘파’ 사이가 반음이라서 그럴 거야.”
“반음이 뭔데?”
“7음계 중 다른 음들은 모두 온음이야. 그러니까 반음 두 개가 모인 음. 거기에 있는 ‘미’와 ‘파’ 사이, 그리고 ‘시’와 ‘도’ 사이만 반음이래.”
누나도 그게 뭔지 잘 모르고 말했을 테고, 물론 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짐작건대 그 순간 그 네 개의 음표 속에 병실의 고요함과 병실 밖에서 간혹 들려오는 소음과 나를 찾아온 누나와 나 자신이 흡수되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사실 나는 그때 이미 검은 건반 하나가 빠진 하얀 건반들 사이의 빈 공간에 빠져들었다. 그보다 한참 뒤에 잠시 피아노를 배운 일이 있는데, 피아노 학원의 좁은 연습실에서 혼자 연습을 하다 지루해지면, 누나가 알려 준 그 멜로디를 일부러 연주했다. 한번 들은 뒤로 그 멜로디들이 머릿속에서 가슴에서 피부에서 불현듯 되살아나곤 했으니까.
행성은 수억 광년 떨어진 곳에서부터 오는 거라고 했으니 분명 내가 수술실로 들어가던 그 순간에도 행성은 지구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을 것이다. 시속 150㎞로. 
내 팔에는 주삿바늘이 꽂혀 있었고, 나는 침대차 위에 누워 있었다. 토라진 누나가 침대차를 따라왔다. 누나는 자기도 수술실에 들어가고 싶다고 떼를 쓰다 엄마에게 한 대 얻어맞은 참이었다. 괜히 누나에게 미안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다음에는 누나가 들어가. 그때 내가 침대차 밀어 줄게. 사실 나는 누나가 해 보지 않은 색다른 경험을 한다는 데에 조금 들떠 있었다. 
그러나 들뜬 마음은 수술실에 이르자 이내 공포심으로 변했다. 문 위에는 붉은 조명이 번쩍였고, 커다랗게 ‘출입금지’라고 씌어 있었다. 그때서야 나와 누나는 결코 재미있기만 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부들부들 떨고 있는데, 누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잘 참아.”       
수술실로 들어가는 바람에 누나와 잡은 손을 놓아야만 했는데, 문이 닫혀 보이지 않을 때까지도 누나는 나를 걱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봤다. 나는 누나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내가 기억하는 한 참으라는 말을 들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참으라는 말은 수술을 말하는 것이었겠지만, 지금 생각해 보건대, 그것은 세상을 사는 데 제일 필요한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참아야 하는 것은 가지각색이었다. 하지만 나는 꽤 잘해 낸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어른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 얼굴 근육에 힘을 주는 한이 있더라도 언제나 웃는 얼굴, 공손한 얼굴을 했고, 친구들 사이에서도 내 생각을 그대로 말하기보다는 그들이 듣고 싶은 말을 한 마디 더 해 주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하나의 독립된 행성 같았다. 그들 대부분이 각자의 궤도에 따라 움직였고, 그 움직임은 다양했다. 나는 그 궤도에 따라 내 몸을 낮추거나 피할 줄 알았고, 가끔은 자전하기 힘들어하는 이들을 위해 격려할 줄도 알았다. 그것이 나 자신의 자전과 공전을 방해받지 않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서로 내두른 팔에 상처 입은 다른 이들의 모습을 빈번하게 보아 온 것이다. 여하튼 그 덕분에 나는 큰 궤적을 그리며 움직이지는 못했지만, 내 나름의 공간에서 쉬지 않고, 상처받지 않고 자전과 공전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런 내게 종말이란 충격적인 일이었고,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죽음은 내게 큰 두려움이었다. 나는 ‘언젠가 찾아올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거라면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이내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와 ‘어떻게’ 사이의 폭은 결코 작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여러 음계들 중 반음으로만 이루어진 불안한 전조의 멜로디에 빠진 것과 같았다. 내게 주어진 일반적인 역할들 하나하나가 온음이었다면, ‘왜 이렇게’와 ‘어떻게’는 반음이었던 것이다.
질문이 변하게 된 순간부터 나는 죽음 앞에 선 가련한 행성의 모습으로 다른 행성들과 강하게 부딪치게 되었다. 그 충돌은 특히 부모님과의 사이에 빈번하게 일어났다. 한 집안이라는 우주에서 가족들은 어떤 행성 하나가 갑자기 진행방향을 바꿔 자신의 궤도를 침범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 나는 학교 공부에 열중하기보다는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보는 시간이 많았고, 도서관에서도 『우주의 신비』나 『외계 생명체의 비밀』 같은 책들을 찾아 읽었다. 또한 그때그때의 기분에 따라 학원이나 학교를 가지 않은 채 혼자 산책을 즐기곤 했다. 언젠가 지구 어딘가에 떨어졌다는 외계인은 어디에서 왔을까를 생각하며 하늘을 올려다봤고, 그때마다 불쑥불쑥 스쳐 지나가는 행성의 그림자를 느끼며 내 몸속 육체의 움직임을 선명하게 기억하려고 했다. 그런 모든 과정들은 내게 새로움이었고, 적당한 일탈마저도 내게는 신선한 자극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그것이 종말을 앞둔 인간으로서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작은 부분밖에는 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종말 앞에 서 있는 나라는 행성에만 집중한 나머지, 다른 행성들과 또한 거대한 우주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1998년 겨울에도 분명, 내가 모르는 곳에서 어떤 행성이 궤도를 살짝 바꿨던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부모님과 심하게 다투고 집을 뛰쳐나와 걷고 있었다. 누나가 그런 나를 뒤쫓았다. 누나는 그때도 내게 참으라고 말했다.
“네가 참아. 부모님이 살아오신 세월이 얼마야? 방식이 좀 굳어져서 그렇다는 거 알잖니. 그런데 네가 이러면 어떡해.”
나는 누나의 말은 뒷전으로 하고 계속 나만의 생각에 빠져 걷기만 했다.
그때 어떤 행성이 살짝 궤도를 바꾸었다. 아주 조금.
그 파장이 지구에 전해졌고 몇몇 사람이 그것을 감지했다. 나를 따라 길을 건너던 누나는 그 기척에 자기도 모르게 멈춰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뭐지? 그건 누나만이 아니었다. 그 시간 트럭을 몰고 가던 운전자도 낌새를 눈치채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응, 뭐지? 라고 중얼거리면서, 길 한가운데 멍하게 서 있던 누나를 발견하지 못한 채. 
모든 일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누구도 서로를 탓하지 않았지만 실은 서로에게 책임을 묻고 있었다. 가족들이 서로에게 말을 꺼내는 일이 거의 없었음에도, 마치 언성을 높여 싸우는 것 같은 날카로운 기류가 집안을 가득 채웠다. 각자에게 어떤 균열이 생겨난 것이 틀림없었다. 그 균열은 내게도 확연하게 일어났는데, 그 균열의 중심에 누나의 눈이 있었다. 그날 날카로운 브레이크 소리에 고개를 돌렸을 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누나의 눈이었다. 트럭 밑에 깔린 채로 나를 쳐다보던 바로 그 눈. 마치 살아 있을 때처럼 나를 향해 열린 눈, 깜박임도, 눈동자의 움직임도 없이 단지 나를 향해 열려 있는 눈. 
그 이후 나는 표면적으로는 공전을 하고 있는 듯했지만 의미 없는 공전이었고, 또한 내 안에 일어난 균열은 자전마저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나는 얼어붙은 화석이 된 것만 같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지만, 지원한 대학 게시판에 내 수험번호와 이름이 붙어 있었다. 합격통지서를 받은 나는, 그것을 부모님 앞에 내놓고 여러 핑계를 들어 자취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부모님은 내 핑계를 인정해 주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확고히 반대한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결국 그해 3월에, 나는 도망치듯 집을 나와 학교로 향했다. 

4

1999년이 되었는데도 종말의 기미는 없었다. 사람들은 애초부터 잘못된 해석이었다며 새로운 가설을 내놓기도 했다. 행성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얘기가 없었다. 아직 지구 가까이 오지 않았을 뿐 행성은 여전히 지구를 향해 날아오고 있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비록 행성과 지구의 충돌은 없지만 1999년을 살던 사람들은 모두 행성을 직격으로 맞은 얼굴들이었다. 실제로 대한민국은 몇 년째 IMF 관리체제 아래에 있었으며, 뉴스에서는 구조조정으로 인해 실업자들이 증폭했고 소비심리도 위축되었으며 그에 따라 가정파괴가 급속하게 확산되고 있다고 연일 보도되었다. 공원과 길거리로 나온 사람들이 즐비했고, 그들은 마치 행성이 어디쯤 오고 있는지 보려는 듯 종종 담배를 입에 물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잘은 모르지만 그들은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이놈의 세상, 확 망해 버려라.
K형은 나와 같은 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형은 꿈에 그리던 대학생이 된 것을 진심으로 행복해하며 대학생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고 싶어 했다. 나는 국문과에 입학했다. 나는 내가 지낸 시간들을 소설로 써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정작 학기가 시작되고서는 학교에 잘 나가지 않았고, 또한 학과에서 벌어지는 일에도 무심했다.  
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입생 환영회가 열렸다. 책상을 테이블처럼 붙여 놓고 강의실에서 술자리가 벌어졌는데, 각 테이블에는 신입생 몇 명과 선배들 몇 명이 마치 조를 이룬 것처럼 앉았다. 한 테이블에서 신입생이 대표로 노래를 부르면 질세라 다른 테이블에 앉은 선배들이 자기가 앉은 테이블의 신입생을 일으켜 세워 노래를 부르게 했다.
내가 앉은 테이블에는 나 말고도 신입생 두 명이 더 있었다. 우리는 모두 선배들의 물음에 대답하고 술을 받아 마시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술자리가 흩어질 무렵, 우리 테이블에는 나와 내 동기 녀석 하나만 남게 되었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딱히 갈 데도 없었고 그렇다고 말을 걸 마음도 없었다.
“너는 혈액형이 뭐야? 혹시 AB형 아니야?”
그 상태로 얼마간 시간이 더 흐르자 답답했는지 옆에 있던 동기가 내게 말을 걸었다. 키가 작고 허리까지 내려올 만큼 머리카락이 긴 여자애였다.
“응 맞아. 맞혔네.”
내가 무덤덤하게 대답하는데 그 녀석은 내 술잔에 술을 따르더니 말했다.
“너는 이 자리가 불편하지? 겉으로는 잘 적응하고 있는 척하지만 단지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의 호감만 주기 위해서 그런다는 거 알아. 나도 AB형이거든.”
이렇게 시작한 동기 녀석의 혈액형 강의는 꽤 오래 이어졌다. AB형은 싫은 거 싫다고 얘기해 주는 사람을 더 편하게 생각한다는 것과 꾹 참고 참다가 한번에 터지는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둥, 그 녀석이 말한 AB형의 성격만도 가짓수가 꽤 되었다. 그게 맞는지는 나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그날 이후로 그 동기 녀석은 틈만 나면 “나는 너를 알아, 이해해, 나도 너와 같은 AB형이니까”라고 말하며 나에 대해 아는 체를 했다. 입학한 지 한 달 뒤 재수 준비를 한다며 학교를 그만둘 때까지 말이다.
그 경험은 내게 매우 불편한 것이었다. 그러한 감정이 꼭 그 동기 녀석을 향한 것만은 아니었다. 내 주변에 있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는 개별적인 존재로 인정받기를 원하면서 다른 사람들은 어떤 ‘묶음’으로 보았다. 신입생과 선배, 학생과 교수, A라는 동아리와 B라는 동아리…… 차라리 혼자인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더라도 동아리나 학생회 활동을 하지 않는 나로서는 늘 혼자여야 했다. 아무래도 함께하는 시간이 많다 보니 동기들도 동아리별로 나눠지는 경우가 많았고, 그들이 동아리 활동을 하는 시각이면 나는 텅 빈 과실 근처를 배회하거나 일찍 집으로 들어가곤 했다. 
학기가 시작되고 한참이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지 못했고, 대신에 학교 앞 만화방에 가 있는 시간이 많았다. 내가 잘 가던 만화방은 그리 크지 않았다. 오히려 그 맞은편 건물에 새로 생긴 만화방에 더 많은 종류의 만화책이 있었고 시설도 새로웠다. 그런데도 내가 가는 만화방에 손님이 더 많았다. 그것은 주인여자 때문이었다고 나는 확신한다. 그녀는 이십대 후반 정도로 보였는데, 특별히 예쁘지는 않았지만 신비로운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그녀의 분위기와 허름한 실내 분위기가 합쳐져 만화방의 이미지를 한층 독특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나는 그녀를 꽤 관심 있게 관찰했다.
내가 처음 만화방에 발을 들였던 때, 그녀는 창문에 코팅지를 붙이고 있었다. 구겨진 종이 몇 장이 주위에 널브러져 있었고, 그녀는 다리를 꼬고 앉아 두 손을 오른쪽 무릎 위에 가만히 올려 둔 채로 접착제 흔적이 남은 창문을 쳐다보고 있었다. 창문을 바라보는 건지 아니면 어둠이 내려앉은 창문 밖을 바라보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녀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두 눈으로 창문을 응시했다. 
손님들은 그런 그녀를 기다렸다. 만화책을 골라잡고 자리에 앉은 뒤 돈을 지불하려고 그녀를 힐끔거렸다. 책을 빌려가는 사람도 그랬다. 그녀가 창문에 코팅지를 붙이고 있으면 빌려가는 책이름과 연락처를 종이에 적고 그냥 책을 가져갔다. 이 만화방의 단골들은 대부분 그렇게 했다. 사람들은 그게 규칙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신성한 작업을 하듯 창문에 종이 붙이는 일에 집착하는 그녀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규칙.
그녀가 하는 행동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없었지만, 어느새 그 창문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어떤 의미처럼 여겨졌다. 다른 창문들은 만화책을 꽂은 책장으로 다 가려 놓았으면서 유독 햇빛이 잘 드는 저 창문만은 책장으로 가려 놓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절대 그 창문을 여는 일은 없었다. 누군가 담배연기로 가득 찬 실내를 환기시키기 위해 창문을 열려 하면 그녀는 힘겨운 왼쪽 다리-그녀는 다리를 좀 절었다-를 끌고 다급히 다가가 창문을 열지 말라고 말했다.
“환풍기를 틀겠어요.”
그러고는 절뚝거리며 의자 위에 올라가, 다 낡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환풍기를 작동시키느라 안간힘을 썼다. 환풍기를 틀겠어요. 나는 혼자 있을 때 종종 그녀의 말을 흉내내곤 했다. 
가끔 그녀에게 말을 붙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에도 시종 웃음으로만 답했다. 그녀는 창문에 종이 붙이는 일을 끝내고 나면 사람들이 적어 놓은 책 목록과 돈을 확인하느라 분주해졌다. 그녀의 동작은 공장의 기계처럼 재빨랐다. 한 손은 익숙하게 책 목록 하나하나를 짚어 내려갔고, 다른 손으로는 돈을 세었다. 하지만 그런 때에 그녀에게서는 어색함이 느껴졌다. 제대로 작동하고 아무 이상이 없는 것 같지만 실은 어딘가 한 부분이 빠져 있는 그런 기계처럼 말이다. 그것은 그녀의 눈 때문인 것 같았다. 그녀의 눈은 원래 좀 큰 편이었는데도, 눈을 반쯤 감은 것처럼 보였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녀의 눈을 볼 때마다 나와 그녀의 닮은꼴을 찾아내려 노력하곤 했다.
만화방에 있지 않을 때는 K형을 만났다. K형은 나를 자주 술집으로 불러냈는데 그때마다 K형이 속한 동아리 사람들이 그 자리에 있었다. K형은 수업에 잘 들어가지 않는 대신 동아리 사람들과 모여 어떤 문제에 대해 토론하며 술을 마시는 그런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K형은 어느새 학교 주변에 있는 모든 술집의 장단점을 파악했고, 그 술집 주인들과 거리에서 만나 인사를 나누기까지 했다.
K형이 제일 잘 가는 곳은 ‘오뎅가게’였다. 오뎅가게 주인은 IMF 때 실직하면서 받은 퇴직금으로 가게를 차렸다고 했다. 처음 가게를 열 때만 해도 부인이 나와 일을 하고 그는 곧 재취직을 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퇴직을 권고하는 시대에 다시 회사생활을 하기는 더욱 어려웠고, 결국 부인이 아닌 그 자신이 가게를 도맡아 이끌어가고 있었다.
그는 가게 문을 열고 싶을 때만 열었다. 열었을 때도 제대로 안주를 준비해 두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는 장작닭구이를 아주 좋아했는데, 안주를 준비하기 싫으면 사람들에게 닭을 사다 먹으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고는 사람들이 닭을 사다 먹으면 자연스럽게 그들 옆에 앉아 닭을 뜯었다. 가끔 안주를 좀 만들어 달라고 손님들이 통사정을 할 때가 있지만, 그런 때도 귀찮다며 국물만 아주 조금 끓여서 내줬다. 그러다가 아주 가끔씩 국물이 부글부글 끓고 있고 오뎅이 가득 채워져 있는 날이 있었다. 그러면 사람들은 놀라면서 웬일로 제대로 장사를 하냐고 묻는데 그때 그의 답변이 더 가관이었다. 
“너희들 우리 가게 이름이 오뎅가게인 거 몰랐어? 오뎅가게에서 오뎅을 파는데 그게 이상하냐?”
K형처럼 가게에 자주 들락날락거리는 사람들은 모두 그를 ‘오뎅가게 삼촌’이라고 불렀다. 
하루는 K형과 둘이 가게로 가서 데운 정종을 주문했다. 그런데 삼촌이 귀찮은 내색을 하기에 우리는 그냥 소주를 달라고 했다. 삼촌은 마침 어떤 손님과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던 중이었던 것이다. 그 손님은 방송 계통에서 일하는 사람으로 몇 해 전에 학교를 졸업한 선배이기도 했는데, 가끔씩 생각날 때마다 이곳에 들른다고 했다. 나와 K형이 그에게 인사하자, 그는 우리가 속한 학과 선배들에 대해 아는 체했다. 우리는 들어 본 적도 없는 이름들이었다.
그 선배는 우리에게 특이한 형식의 노래를 가르쳐 주었다. 바로 JAM이라는 거였다. 주위 사람들이 테이블을 치며 일정한 박자를 만들면, 여러 사람이 돌아 가며 그 박자에 맞춰 즉흥곡을 부르는 거였다.
“그런데 왜 이름이 JAM인가요?” K형이 물었다.
“그걸 하던 우리 동아리 이름이 JAM이었어.” 선배가 대답했다.
그러더니 그 선배는 젓가락으로 탁자를 때려 일정한 템포의 박자를 만들어냈다. 선배가 고갯짓으로 빨리 따라하라는 눈짓을 보냈기 때문에, 멍하니 앉아 있던 우리 모두 젓가락을 들어 탁자를 때렸다.
 
   탁 탁 틱― 탁 탁 틱― 탁 탁 틱― 탁 탁 틱 탁― / 탁 탁 틱― 탁 탁 틱― 탁 탁 틱― 탁 탁 틱 탁―……

 

   (선배) 간만에 놀러와 식탁을 두드린다 / 학교는 변해도 사람은 그대로네
   (K형) 이 술집을 알고 나니 이거야 참 살맛난다 / 이렇게 좋은 데를 이십 년간 몰랐구나
   (주인) 그렇게 좋으면 안주 좀 사 오거라 / 소주만 축내면 나는 뭘 먹고 사냐
   (나)   안주를 만들어 파시면 되지 않소 / 닭들이 이 동네 안 오려고 퍼덕이오

그 선배라는 사람과 있는 것은 불편했지만 노래는 재미있었다. 노래의 박자는 늘 달랐다. 혼자 노래를 할 때에는 노래 부르는 사람 혼자 젓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고, 여럿이 노래를 할 때에는 모두가 젓가락을 들어 박자를 만들어냈다. 고정된 박자 위에 저마다 다른 음색의 목소리들이 넘실거리며 합쳐지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가사가 재미있어 노래에 빠지게 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 가사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다. 탁자나 손뼉을 칠 때 전해지는 둥둥거리는 파동에 몸을 맡기고 나면 혼자가 아니라 ‘모두’가 되는 것만 같았다. 그날 이후에도 오뎅가게에서 술을 마시다 틈만 나면 JAM을 했다. 그리고 그것은 시간이 갈수록 오뎅가게의 전통처럼 되어 버렸다. 
가을 학기가 이미 반이나 지나가 버린 어느 금요일 밤에도, 나는 오뎅가게에서 JAM을 하고 게임을 하면서 술을 마셨다. 그러다 적당히 취기가 올라 말없이 밖으로 나와 팔짱을 낀 채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배회했다. 하늘의 별을 쳐다보며 누나 생각을 했고, 또한 지구로 온다던 행성이 어디쯤 왔는지, 또 그 말이 정말 사실이었는지에 대해 생각하기도 했다. 밤하늘에는 별들이 반짝였고, 그 사이로 혜성의 꼬리가 길게 사라지는 것을 본 것도 같았다.
자취를 하고 또 의식적으로 사람들과 멀어지게 되자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런 상황이 이어지면서 나는 내 안의 공간에 대해 생각하는 날이 많았다. 평소에는 그 공간 안에 무수한 감정들이 넘쳐나기 때문에 어떤 결핍을 느끼지 못했지만, 그 감정들이 빠져나가는 순간 나는 공허함을 느끼곤 했다. 
그 텅 빈 공간을 다른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 채울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곤 했었다. 그래서 술집에 드나들고 그곳에 앉아 분위기를 즐기며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곤 했다.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에게 넘쳐나던 기운들이 내게 스멀스멀 밀려들었다. (비록 어떤 경우에는 그들의 넘쳐나는 기운조차도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로 굳게 닫힌 때도 있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곳을 나서면, 그들에게서 받아들이던 기운과 활력, 감정들이 도로 빠져나가면서 내 마음 속 공간은 다시 비어 버렸다. 그러면 공허함이 다시 내게 찾아와 육체와 정신을 잠식했다. 거리에도 역시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과 마주친다고 해서 내가 홀로 방구석에 처박혀 있을 때보다 나았던 것은 아니다.
그런 때에 만난 누군가가 나와 같은 상태의 사람일 경우, 꽤 곤란한 상황을 만들기도 했다. 내 속의 빈 공간과 누군가의 빈 공간이 마주하면서 어떤 공명을 일으켰다. 그 공명은 자석의 같은 극이 만났을 때 밀어내는 것처럼 자연발생적인 것이었으나, 그 공명현상 자체가 어떤 활동성을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에 때로 내게 당장 필요한 요소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니까 오뎅가게에서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와서 즐길 때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다가 문득 어느 순간 또다시 공허함이 밀려들면 그땐 함께 즐기던 그 분위기 따위는 더 이상 나 자신을 채워 주지 못했다. 게다가 가끔 나와 비슷한 상태의 사람을 만나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 혹은 그녀를 만났을 때 순간 어떤 변화를 느끼지만 결국 그것은 같은 공허함을 맛보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상대와 만나는 것이 내게 꼭 필요한, 진정 내가 원하는 만남이거나 사건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낯선 익숙함이란 시간이 지나면 그 무엇보다도 처리 곤란한 성질의 것으로 변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므로 내 안의 공허 때문에 누군가를 만나는 것은 아무 소용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런 때도 되도록 혼자 지내는 것에 익숙해지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마음먹는다고 항상 실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무엇에든 예외는 있는 법이다. 의식적이든 의식적이지 않든 간에.  
그날 그렇게 오뎅가게에서 나와 생각에 잠긴 채로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누군가 불쑥 내 어깨를 건드렸다. 돌아보니 아까 오뎅가게에서 술을 마시던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녀는 내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올해가 맞지요?”
“뭐가요?”
내가 묻자 상대는 조심스럽게, 그러나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노스트라다무스가 말한 종말의 날이 올해 아닌가요?”
그녀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지독히 투명하고, 그러나 집요하게 내 시선을 잡아끄는 눈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해원이라고 했다.  
해원은 나보다 두 살 위로 삼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쉽게 빠져들었다. 이유야 어떻든 그녀와 함께하는 시간은 점점 늘어났고, 그런데도 나는 그녀에게서 멀어지려 하지 않았다.
우리는 만나게 된 이후로 곧잘 산책을 하곤 했다. 자취방을 빠져나와 손을 잡고 캠퍼스를 거닐었다. 나는 어렸을 때 수술실에 들어가 본 경험이며 예의 바르던 어떤 아이가 종말론의 영향으로 삐뚤어진 이야기들을 들려 주었다. 누나에 대한 이야기도 해 주었다.  
이야기하며 학교 근처를 거닐다가 학교 정문 앞 광장에 앉아 맥주를 마셨다. 쓰레기통이 놓인 곳에서 일곱 발짝쯤 떨어진 자리가 우리의 지정석인 듯 여겨져서 거의 그곳에 앉곤 했다. 광장은 언제나 수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우리는 맥주를 마시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지켜보길 즐겼는데 그 방식은 매번 달랐다. 예를 들면 광장에 두 쌍의 연인이 있다고 가정하면 A라는 그룹의 남자와 B라는 그룹의 여자를 한데 묶어 그들의 대화를 이어 보곤 했던 것이다. 왜 그런 놀이를 했는지에 대해 묻는다면 별로 할 말은 없다. 대체로 그런 놀이는 해원이 제안했고, 나는 군말 없이 따랐을 뿐이니까.
대신 나는 행성들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눈을 감으면 떠오르던 행성들. 그 행성은 지구에서 아주 먼 곳에 떨어져 있고 일정한 궤도를 따라 움직이며…….
“그리고 그 별에는…….”
“토끼!”
“…….”
“토끼가 있구나!”
“그건 달에 있는 거고…… 대신, 나무가 있어.”
“나무?”
“행성에는 나무가 한 그루씩 서 있지. 그런데 그 나무들은 사람처럼 생긴 거야. 두 팔을 들고 허우적대는 사람의 형태 말이야.”
“그럼 그 나무들이 모두 만나서 포옹하는 날도 오지 않을까?”
우리의 대화는 실없거나 쓸모없는 것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서로의 생각을 무시하지는 않았다. 어떤 논리나 설득력은 없겠지만 그냥 서로의 생각과 상상을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던 것 같다. 시간이 한참 지나서 생각해 보건대 타인과 그런 순간을 공유했었다는 것 자체가 기적 같은 일 아니었나 싶다. 서로 다른 궤도를 돌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서도 기껏해야 스쳐 지날 수밖에 없는, 그런 행성에 사는 나무들이 잠시 악수하고 지나가는 것처럼.
언젠가 한번은 해원이 다른 사람들을 지켜보다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왜 그렇게 하냐고 묻자 그녀가 대답했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 서서 손으로 두 귀를 막아. 장소는 어디라도 상관없어. 골목이나 시장 통로처럼 사람들이 많은 장소라면 더 좋아. 수천, 수만 가지 행동들이 난무하고 말들이 오가는 곳이지. 그곳에서 귀를 막으면 그들의 행동이 무성영화처럼 혹은 움직이는 사진처럼 보여. 그 행동으로 미루어 그들의 이야기를 짐작하지. 그 다음에는 눈을 감고 귀를 막은 손을 떼어 보는 거야.”
“왜 그렇게 하는데?”
“나는 사람들이 하는 말들을 믿지 않아. 진실, 있는 그대로, 그것을 가리키는 말이 있을까?”
“그렇다고 그들의 움직임이 진실일까?”
“그건 아니야. 나는 사람을 보는 방식이 너무 굳어져 있거든. 그러니까 조금 다른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싶을 뿐이야.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너에게, 그리고 나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는 해원의 표정이 쓸쓸해 보였다. 그 이유는 알지 못했다.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게 된 것도 한참 뒤의 일이니까. 다만 그 순간에 약한 바람이 불어왔었는데 어쩌면 캠퍼스의 밤을 지나는 그 바람 때문에 내 감정이 일순간 감성적으로 변해서 그런 거라고 여겼을 뿐이다. 나는 그녀가 가르쳐준 대로 두 손을 펼쳐 귀를 막았다. 그런데 나를 지켜보던 그녀가 갑자기 손을 쫙 펴 보라고 했다.
“왜?”
“하여튼!”
나는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왜, 라고 되풀이하다 손가락을 펼쳤다. 손가락 펴는 일이 그렇게 힘든 일인 줄은 그때 처음 알았다. 내 손가락은 어떤 섬세한 느낌을 자아내는 것도 아니고, 촉감이 보드라운 것도 아니었다. 내 손가락은 매끈하게 잘 빠지기는커녕, 손 전체의 형태에 비해 몽톡하게 생겼다. 마치 오래도록 문질러서 끄트머리가 닳은 나무젓가락처럼 말이다. 누가 그런 이야기를 내게 해 준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내 손이 그리 자랑할 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내 손가락을 쓰다듬던 그녀는 순간 씨익 웃더니, 검지에서부터 새끼손가락까지 하나씩 짚으며 말했다.
“장, 난, 하, 냐.” 
나는 급히 손가락을 오므렸다. 그녀가 놀리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후에도 가끔씩 그녀는 내게 손을 좀 달라고 해서 오래도록 쓰다듬거나, 아니면 손가락 하나하나에 가볍게 키스해 주곤 했으니까. 그녀는 나라는 사람을 쳐다볼 때보다 손가락을 만질 때 더욱 기쁨에 찬 표정을 지었고, 공공연하게 내 손가락을 갖고 싶다고 말했다.
그녀와 있는 동안 나는 내 손가락에게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내가 손가락에 자신감이 생긴 것은 아니었다. 뒷날 그녀와 헤어진 뒤에도 나는 여전히 다른 사람들 앞에서 절대로 손을 펴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것은 그녀가 좋아한 내 손가락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기도 했다. 남들에게 보이는 순간 그녀와의 기억들이 조금씩 닳아 없어질 것만 같았다.   
해원이 내 손가락을 좋아했던 것처럼 나도 그녀를 생각할 때마다 빠뜨리지 않는 게 있었는데, 그건 바로 그녀의 눈이었다. 그녀는 눈을 깜빡이지 않고 사람을 쳐다보는 버릇이 있었다. 혹 상대와 눈을 마주쳐도 그녀가 먼저 눈을 돌리는 일은 없었다. 그녀의 눈을 보고 있으면 그 시선이 내 눈을 통과해 몸 안의 나를 직시하는 것 같았다. 그것은 아찔했고, 그런 때마다 내가 그 시선에 대응해 그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칠 수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녀가 사람들을 집요한 시선으로 쳐다봄으로써 그 사람 내면의 무엇인가를 찾아내려 했던 것인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시기 해원의 눈과 마주칠 때면 어김없이 누나가 생각났고, 또한 만화방 여자가 떠올랐다는 것이다.

5

나는 종종 음계의 연관성에 대해 생각하듯 요일들에 대해 생각해 볼 때가 있다. 여러 요일들 중 나는 특히 금요일이 내포하고 있는 이미지에 대해 집착하는 편이다.
내가 어렸을 때 월요일과 화요일에 방영되던 특정 드라마를 즐겨 시청했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수요일과 목요일, 그리고 토요일과 일요일에 각각 다른 드라마를 시청하곤 했을 것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날짜를 구분하는 데에 자신이 즐겨 시청하는 드라마가 방영되는 요일로 구분하는 경우를 심심찮게 접할 수 있었다. 나 또한 화요일이나 목요일 어떤 드라마가 끝나고 나면 일주일을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에 아쉬움을 느낄 때가 많았다. 방송국에서 어떠한 기준에 의해 드라마 방영 요일을 그렇게 정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월요일-화요일, 수요일-목요일, 금요일, 토요일-일요일의 구분은 내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관습처럼 이어져 오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 안에서 일종의 템포와 리듬감을 느끼곤 한다.
그것은 불안한 전조의 멜로디에 포함된 네 개의 음계가 가진 마법성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가 집착했던 그 불안한 전조의 멜로디를 살펴보면 온음의 조합이 아니라 반음의 조합이다. 그 멜로디의 음과 음 사이의 거리는 다른 온음들 사이의 거리보다 좁은 셈이고 그러한 거리가 긴장을 만들어냈다. 또한 그 멜로디가 내게 어떤 정서적 효과를 가져다 줄 수 있었던 것은 음표 그 자체가 가진 음의 고유한 정서 때문이기도 했지만, 첫 음이 연주된 이후 뒤따라 연주되는 음들 사이의 조합 때문이기도 했다. 첫 음이 무엇이든 간에 그 음은 기준이 되고 뒤따라오는 음들과 충돌을 일으켜 하나하나의 음들이 갖고 있는 고유한 느낌에 새로운 느낌이 더해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드라마 방영 시간과 온음과 반음 사이의 조합과 같은 것들로 인해 금요일에서 긴장을 느끼곤 했는지도 모른다.
내가 많은 사람들이 잠든 밤에 산책하며 거리를 쏘다니기를 좋아했던 것도 같은 이유 아닐까? 긴 시간인 낮과 그에 비해 짧은 시간이어서 더 압축적이고 긴장되는 밤, 그 사이의 리듬감에 길들여져 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가끔 궁금해진다. 어쩌면 내가 해원과 함께 지내기 시작한 것도 이런 조합의 영향 때문은 아닐까 하고. 그러니까 금요일과 내 안의 텅 빈 공간과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과 그리고 해원의 집요한 시선이 겹쳐지지 않았대도 나는 해원과 함께 지내게 되었을까? 그 우연히 조합된 것들의 화음이 나를 이끌지 않았다면 말이다.
  

6

낙엽이 모두 떨어진 나무의 메마른 그림자가 창문 너머로 언뜻언뜻 비치던 초겨울 어느 밤, 해원은 내 손가락을 쓰다듬으며 잠들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녀가 내 손을 쓰다듬고 내가 그녀의 눈을 바라보는 것, 그런 행위들은 우리의 관계에 대한 암호이고 또 열쇠인 것 같았다. 그녀가 내 손가락을 쓰다듬을 때면 나는 우리의 관계가 변함없다는 데 안도했고, 그녀와 내가 있는 공간과 그 공간을 채우고 있는 어떤 감정의 파장들이 한껏 부풀어 풍요로워지는 듯했다.
그날도 나는 그런 감정에 푹 빠져 있었고, 그녀는 꿈나라의 끄트머리를 헤치며 현실과 꿈의 경계에 머물러 있는 중이었다. 그녀가 잠꼬대하듯 말했다. 
“너는 피할 수 없어서 즐기는 것 같아. 그래서 한순간에 망가져 버릴 것 같아. 그럼 너는 일어설 수 없을 거야. 너도 모르는 사이에 너 자신에게 균열이 일어나게 되는 거지.”
나는 눈을 감은 채 입술만 움직여 말하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느 날엔가는 사진을 꺼내 보여주기도 했다.
“이 풍경을 봐. 안정적이지? 평화로워 보이잖아. 네가 보는 만화들하고는 달라. 너는 이런 풍경에 익숙해져야 해. 그래야 생활도 안정적으로 변할 거라고.”
안정적이라는 단어를 힘주어 말할 때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전형적인 풍경 사진이었다. 푸른 들판, 멀리 집 한 채가 서 있고 집을 감싸듯 서 있는 나무들. 푸른빛 잔디와 하얀색 울타리에 둘러싸인 집. 나는 사진 속의 집을 쳐다봤다. 저 건물 안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정말 평화로운 나날이 지속되거나 아니면 파탄 직전이거나.
나는 해원이 잠들며 내게 한 말을 생각했다. 피할 수 없어 즐기는 것 같아. 그녀는 내가 자극적인 것들에서 빠져나오지 않는 이상, 내 삶은 계속 불안정할 거라고 했고, 언젠가 망가져 버릴 것 같은 나를 끝까지 지켜보겠다고 했다. 내가 만화방에 가고 술을 마시며 시간을 허비하는 것을 즐긴다고 여기는 게 분명했다. 그것은 사실이면서도 완벽한 답은 아니었다. 만화방에 가서 만화책을 보거나 술을 마시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내가 무기력하게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내가 만화방에 가는 것은 더 이상 자극을 느끼지 못한 채 공허하기만 한 내 상태를 다른 뭔가로 채우고 싶어서였다.
만화방은 수많은 주인공들과 그들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었다. 그 가운데 한 권을 꺼내 읽는 순간 나는 현실이 아닌 다른 곳에 와 있었다. 만화 속 세상은 현실과 비슷하지만, 명백히 달랐다. 어쩌면 해원의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만화들은 껍질이고, 나는 껍질 속에 살려 했다. 그 껍질들은 자극적이다. 나는 어느새 껍질들 속에 갇혔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내가 그 안에서 껍질들을 만들어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두껍게, 더 두껍게. 자극적으로, 더 충격적으로. 내가 닿아 있는 모든 것은 자극적이고 새로운 것이어야 했다. 해원이 그랬고, 또 만화방 여자가 그랬다.
만화방 여자가 환풍기를 틀 때나 만화책을 정리하려고 책장으로 다가갈 때 그녀의 어깨는 위아래로 크게 움직였다. 어깨가 위아래로 흔들리면서 일정한 폭을 만들어냈다. 나는 그 사이가 궁금했다. 우리들을 향해 달려오는 행성의 궤도와 지구의 궤도 사이의 거리만큼. 나는 만화방에 들러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만화책을 빌리곤 했다. 내가 반납하면 그녀는 그 높은 곳에 책을 다시 꽂아야 하고, 때문에 매우 힘들어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절대로 도와주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녀가 곤혹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만화책을 꽂기 위해 작은 사다리를 가져올 것이고, 그러면 그녀의 다리는 무방비 상태가 될 거였다. 그 다리에 입 맞추고 싶었다. 그녀가 만들어내는 그 폭이 궁금했다. 그것이 그녀의 보물상자일 것만 같았다. 내게 있어 다른 요일들과 금요일, 그리고 온음과 반음 사이의 폭과 리듬감이 그렇듯이. 그래서 나는 그 일정한 폭 사이의 공간을 좋아했고 그것을 만들어내는 그녀의 왼쪽 다리를 좋아했다. 그건 해원의 눈을 좋아하는 것과 ‘어느 정도’는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만화방에 가는 이유를 해원은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그곳에 가는 것을 해원이 싫어하는 것은 물론 그녀의 말대로 내가 안정적으로 살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을 테지만, 그것만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나를 대할 때의 해원은 늘 두 사람처럼 여겨졌다. 그녀는 흔히 말하는 안정적인 모습으로 내가 길들여지길 바랐으며 동시에 내가 갖고 있을 은밀한 욕망에 대해 의구심을 표현하곤 했다. 더불어 그녀 자신의 욕망을 직시했다. 
그녀는 혹시라도 내가 오뎅가게에서 다른 손님들과 이야기를 한다든가 만화방에 가기라도 하면 토라져 입을 다물고는 한참 동안 열지 않았다. 처음에는 다른 좋지 않은 일이 있는 건가 싶어 그 이유를 묻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이유에 대해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 좋은 분위기 속에서 함께 있다가 이유를 알 수 없는 일들로 화를 내거나 말문을 닫아 버렸다. 나는 납득할 수 없는 그녀의 행동변화 때문에 마음을 졸이거나 당황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감정의 기한과 욕망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곤 했다. 
“네가 날 사랑한다는 말을 어떻게 믿어? 그리고 정말 그렇다 하더라도 그 마음이 변치 않는다는 것을 네가 보장해?”
그것은 그녀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어떤 방송 매체에서 소개한 과학실험 결과들을 보면 남녀가 사랑할 때 생성되는 물질이 분비되는 기간이 1년 6개월이거나 2년 혹은 3년이라고 했다. 몇몇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을 예로 들며 그 사실을 증명하려 했다. 또한 나도 그녀가 말하는 그런 유한성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항상 감정의 유한성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그럼에도 사랑의 감정이 가득 차오른 그 순간만큼은 정말 기억상실에라도 걸린 것처럼 그런 의문들을 망각했다. 그것은 고의적인 것이 아니다. 대상이 앞에 있는 데다, 그 대상을 향한 감정이 엄청나 명백히 인정하고 있던 사실조차 볼 수 없을 테니. 그러다 사랑의 욕망이, 그러니까 욕망의 대상인 그 사람과의 관계가 어느 정도 안정권 내에 들어왔다고 여겨지는 순간, 사랑의 유한성에 대한 의문이나 또 다른 욕망들이 의식 속에서 서서히 고개를 든다. 그것은 의식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어쩔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정작 내가 문제 삼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사랑이 영원하지 않음을 스스로 인식한다는 것은 그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상처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된다. 나는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또 동시에 사랑의 기한이 한정적이라고 말하는 그녀의 의도를 간파할 수 없었다.
“적어도 나는 솔직하게 말하잖아. 나는 인정해. 내 욕망이라는 것이 어떻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명확히 인정한다고. 그런데 너는 아니잖아.”
“내가 너에게 거짓말이라도 한다는 거야?”
“그럼, 솔직히 말해 봐. 너 네가 만화방에 들락날락하는 이유가 그 여자를 보려는 거 아니야? 말해 보라고! 그리고 넌 내가 널 쳐다보는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며? 그럼 그 여자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거 아냐?”
나는 해원의 다그침에 재빨리 대답하지 못했다. 해원은 그런 나를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녀는 내가 변명거리를 지어내려 한다고 여기는지도 몰랐다. 한 사람의 의도하지 않은 말이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는 충분히 어떤 의미를
지닌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으니까 말이다.
오래 전에 도서관에 다닐 때 이런 일이 있었다. 사소한 볼일들을 마친 뒤 자료실을 빠져나오던 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출입문을 지날 때 경고음이 울리기 시작했고, 조용하던 도서관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직원은 급히 움직이며 내게 대출대로 오라고 지시했고, 나는 여러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몸수색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그것은 기계 오작동으로 인한 경고음으로 밝혀졌고, 나는 직원이 건성으로 던진 사과를 받은 채 도서관을 나와야 했다. 그 일이 있은 뒤로 내게 도서관이라는 공간은 매우 불편하고 꺼리게 되는 공간이 되었다.
도서관에서 책을 훔치지 않았음에도 나는 도서관을 떠올릴 때마다 입구에 설치된 기계와 그 경고음과 직원의 몸수색과 그 당시 주변에서 지켜보던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떠올랐다. 사실 도서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들락날락하고, 또한 그 일이 있었을 때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이 내가 도서관에 갈 때마다 올 리도 없었다. 정작 그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나에게 도서관이란 책을 읽고 빌릴 수 있는 장소이기도 했지만, 도둑으로 오인 받아 수치심을 느꼈던 경험이 덧씌워진 공간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래서 도서관에서 출입문을 지날 때나 혹은 직원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나는 괜히 주눅 들곤 했고, 그 현상이 사라지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번도 그런 경우다. 우리는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해원이 갑자기 만화방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해원은 종종 만화방 여자와 만화방에 가는 나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곤 했다. 그때부터 내 안의 만화방에 대한 의미가 조금 바뀌었다. 만화를 볼 수 있는 곳, 그리고 여자의 폭을 통해 자극을 얻을 수 있는 곳이라는 개념 이외에 해원이 싫어하는 여자, 그 사람이 있는 장소라는 개념이 더해진 것이다. 때문에 해원이 갑자기 만화방 이야기를 꺼냈을 때 나는 순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대체로 한 개인의 내부에서만 이해될 수 있을 뿐이다. 나는 이런 것들을 설명하는 대신 내가 해원의 눈을 떠올리는 것과 만화방 여자의 다리를 떠올리는 것은 어떤 맥락에서는 같아 보이지만, 한편으로 명확히 다르다는 것을 이해시키려 했다. 그러나 그것은 늘 불가능했다. 해원은 내 말을 무조건 변명쯤으로 생각했고,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믿지 않았다. 해원은 말이라는 것 자체를 믿지 않았고, 말의 수많은 함축적 의미들이 진실을 왜곡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오했다.
우리는 그 즈음부터 헤어진 그날까지 서로에게 상처 주고, 또 이내 화해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 모든 것이 더 나은 관계를 위한 하나의 과정이라고 여기면서. 그러나 그런 날이 반복될수록 나는 내가 좋아한 그녀의 눈을 보기 힘들어졌다. 나와 싸운 다음 그녀의 눈은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흐릿해지곤 했던 것이다. 

7

나는 방바닥에 누워 방안을 주욱 훑어보았다. 방구석에는 해원의 짐들이 쌓여 있었고, 그중에는 그녀의 가방도 있었다. 나는 그녀가 없을 때에도 가방을 열어 본 적이 없었다. 가방을 열면, 그 안에 무엇이 있든지 두려워질 것만 같았다. 어쩌면 그녀의 가방 안에 그녀의 눈이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열어 볼 만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나는 그녀의 눈을 벽에 걸어 놓을 것이다. 언제나 나를 향할 수 있게 말이다. 나는 그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겠지. 그녀가 오면 나는 그 눈을 재빨리 가방 안에 도로 넣고 시치미 떼며 그녀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볼 것이다.
해원은 나를 남겨두고 혼자 밖에 나가는 일이 잦아졌다. 연락도 없이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는 때도 많았다. 그러면 나는 혼자 방바닥에 누워 상상을 했다. 가만히 앉아 상상을 할 때면 내 심장박동과 지구의 자전과 공전까지도 느껴지는 듯했고, 만화책이나 영화, 소설을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 상상 속 인물들이 느끼는 리듬에 몸을 맡긴 것만 같았다. 그런 모든 과정은 현실에서 경험하던 리듬과 템포보다 훨씬 더 풍요롭고 화려했으며 자극적이었다.
나는 종종 1947년 4월의 로스웰을 상상하곤 했다. 그곳에서 어떤 밀담이 진행되고 있었을 거라 나는 확신했다. 그때 로스웰에서는 어느 외딴 창고를 중심으로 군인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군인들은 모두 무장했으며 인근 지역 사람들이나 외부의 기자, 야생동물들의 출입까지도 엄격히 통제했다. 그들이 에워싼 창고에서는 밤 늦도록 불이 꺼질 줄 몰랐다.
그 창고에 있던 사람은 모두 셋이었다. 미 정부와 공군의 고위층 관계자와 정부 산하 연구소의 과학자가 바로 그들이었다. 그들은 그곳 로스웰에 불시착한 어느 외계 생명체의 시신을 두고 벌써 몇 시간째 밀담을 나누고 있었다. 어떤 이는 담배를 뻑뻑 피워댔고, 어떤 사람은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이들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처음 창고에 들어와 시신을 봤을 때만 해도 엄청난 충격에 말을 잇지 못했던 그들은 이제 다른 이유로 말을 꺼내는 데에 조심스러웠다.
 
  정부 관료 : 만약 이 사실이 일반에 알려지면 엄청난 혼란을 초래할 겁니다. 이 사실은 극비로 분류하여 대책을 마련해야 하지요.
 
정부 관료의 말에 나머지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들은 로스웰에 떨어진 외계인을 놓고 그 어느 때보다 복잡한 심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우선 외계 생명체의 존재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 고민이 되었다. 미국은 지금 전 세계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 자국의 언론은 물론 전 세계의 매스컴들이 원폭 피해자들의 처참한 사진을 통해 도덕적이고 인류적인 문제들을 제기하며, 히로시마에 핵을 투하한 미국의 행위에 대해 거세게 비난했던 것이다. 그들의 눈을 돌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것은 자극적이고 충격적인 새로운 사건을 그들 앞에 내놓는 것이었고, 그러기에 적당한 사건이 바로 그들의 눈앞에 있었다.
하지만 외계인의 존재를 완전히 또 온전히 공개할 수는 없었다. 외계 생명체의 존재와 대면한 인간들과 사회의 혼란을 염려해야 함은 물론이고, 더불어 소련의 핵개발이 눈앞에 있는 때에 미국은 더 강력한 기술력을 갖춰야 했다. 그러므로 UFO의 존재를 세계에 공개하는 것은 미국으로서는 그다지 실리적인 방법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두 가지 이득을 모두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바로 UFO에 대한 자료들을 사회에 흘리는 것이다. 그들은 외계 생명체의 존재로 눈을 돌릴 것이며 그 증거를 찾으려고 눈에 불을 켜겠지. 그러나 그들은 절대 증거들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이미 구체적이고 명확한 증거들은 모두 처리를 끝낸 시점일 테니. 그들이 온갖 추측을 통해 파편화된 자료들을 맞추려 한들, 그것은 증거가 될 수 없는 자료일 뿐이다. 그 창고에 있던 사람들은 슬며시 미소 지었다.
관료는 다시 한 번 강조하고 동의를 얻기 위해, 그러나 너무 강경하게 말하면 나머지 사람들이 강요당하는 느낌을 받고 반발할 수 있으므로 최대한 중얼거리듯 다시 말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철저히 비밀로 해야 합니다, 인류를 위해.” 그러한 관료의 어법은 효과를 거두는 듯 보였다. 군부 관계자와 과학자가 동시에 대답했다. “그래야지요.”
그들은 자신들이 내뱉는 모든 언어가 하나의 소리를 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면 음계 ‘도’ 같은. 그것도 한 옥타브 낮은 도.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불투명한 소리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완벽히 선명한 울림의 소리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게 ‘도’임에는 분명했다. 그 소리는 일종의 집합 같았고, 서로 다른 세 사람이 같은 소리를 낼 수 있던 데에는 일종의 연대감이 작용했다.
정부 관료가 다시 한 번 자신에 차 거듭 강조했다. 우리는 이 일이 절대 새어나가지 않게 해야 합니다. 군부 관계자와 과학자는 나지막하게 그러나 힘 있게 대답했다. 그래야지요. 
그런데 대화 시간이 길어지고 의견을 나눌수록 그들은 묘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들의 언어가 연주하는 게 분명 ‘도’이면서도 서로 제각각 다르다는 것을 은연중에 눈치챘던 것이다. 분명 같은 ‘도’일 텐데도 그 느낌이 미묘하게 달랐다.
과학자는 어째서 자신이 이 자리에 올 수 있었는지에 대해 계속 의문이 들었다. 사실 이러한 자리에 참석하는 것은 늘 정부 출입 국장이었지 자신이 아니었다. 그는 늘 진급을 꿈꾸고 있었다. 그러나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그의 앞에 있는 것이 무엇인가. 오래 전부터 미지에 쌓여 있던 외계 생명체가 바로 저기, 두 발짝 앞에 있지 않은가! 그는 이런 기회가 다시는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고, 이 자리에 국장이 아닌 자신을 참석시킨 정부 관료에게 내심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그는 지난번 연석회의에서 그의 상관인 국장이 정부 관료의 심기를 상하게 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때문에 되도록 정부 관료의 의견에 토를 달지 않기로 작정했다.
미 공군 고위층 관계자도 당당하게 대답했다. 그래야지요, 라고. 그는 외계 생명체가 추락한 곳이 소련이 아니라 바로 이곳이라는 사실을 신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그리고 동시에 낮에 입었던 셔츠를 바꿔 입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그는 더위에 약한 편이었다. 그리고 땀을 많이 흘렸다. 아직 4월인데도 완전히 폐쇄된 이곳 공간은 전열기구들이 잔뜩 들어와 있어 후덥지근했다. 웃옷을 벗을까 잠시 고민했지만 셔츠의 겨드랑이 부분이 축축하게 젖어 있을 것이 뻔했다. 그는 진지하게 대화하는 그들의 모습을 상상했다. 진지하고 숙연해야 할 분위기에 땀에 젖은 셔츠, 특히 그 부위가 겨드랑이라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그것은 자신의 체면을 깎아내리는 일이기도 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 자리가 어서 빨리 끝나길 기도했다. 그런데 저 관료는 똑같은 이야기를 자꾸만 반복했다. 책상머리에만 앉아 있는 놈들은 이래서 안 되는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결단성이 없었다. 반복되는 이야기. 그는 그래서 이 자리가 어서 끝나길 바라는 마음에 정부 관료가 물을 때마다 성실히, 그리고 완전히 동의한다는 말투로 단호하게 부르짖었다. 그래야지요.
그들은 자신들이 갖게 된, 일종의 비밀을 안고 있다는 연대감에 대해 입으로 말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갖고 있던 연대감에는 어떤 비밀을 공유하고 있다는 데에 있었지만, 또한 각자의 이익을 위해 서로 도와야 할 사람들끼리 모인 집단이라는 생각도 동시에 들어 있었다. 그 생각들은 어떤 경계를 기준으로 동시에 작용했지만 그 경계에 뿌연 안개가 깔려 있어 스스로도 구분 짓기 힘들었다. 마치 ‘도’가 무수히 많은 진동으로 이루어졌으나 우리가 단지 ‘도’라고 부르는 것처럼.
그러므로 그들이 내는 소리가 같은 소리라고 하더라도 그 ‘도’는 절대 같은 ‘도’일 수 없었다. 게다가 같은 건반을 눌렀다고 하더라도 ‘솔’ 다음에 온 ‘도’와 ‘파’ 다음에 온 ‘도’는 음의 전이로 인해 그 느낌이 서로 다르지 않은가. ‘도’를 이야기함에 있어 ‘도’ 자체만을 이야기하거나 ‘솔’ 혹은 ‘파’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느 하나도 충분치 않았다. 이들 음계의 존재성은 ‘파-도’나 ‘솔-도’ 일 때에만 그나마 가깝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점은 사람의 내부에서만, 그것도 간신히 이해될 수 있는 것들이기에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았고 또 확신하기도 어려웠다.
그들은 자신들이 내뱉은 ‘도’가 미묘하게 다른 것에 대해 침묵했다. 다만 근엄한 표정으로 엄청난 짐을 지고 있어 어깨가 무겁다는 표정으로, 그러나 미소 지으며 “그래야지요”를 반복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나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방구석에 던져놓은 휴대폰이 어두운 방안에서 알록달록한 빛을 뿜어냈다. 어둠의 저쪽 어디쯤에서 관료와 군부 관계자와 과학자가 마치 갑자기 움직인 외계인을 본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지켜봤다. 전화를 받으러 느릿느릿 움직이던 내 머릿속에서 상상 속 세 인물과 그들의 대화가 지워지는 데는 삼 초도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로스웰을 상상할 때면 늘 저 세 인물이 등장하곤 했고, 어느 때부턴가는, 그들의 이야기가 내 상상 속에서 펼쳐졌던 것인지, 우연히 어떤 기사나 영화를 통해 알게 된 이야기가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8

사람은 누구나 어떤 선택이나 행위를 할 때, 자신만의 기준이 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살아가면서 어떤 기준을 정해 놓는 것만큼 위험한 일도 없다.       
전화를 받고 오뎅가게로 가니 삼촌과 K형, 해원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벌써 여러 잔을 마셨는지 그들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출입문으로 들어서는데 그 짧은 순간 그들이 앉은 모양새가 눈에 들어왔다. 삼촌이 제일 끄트머리에 앉았고 그 옆에 해원, 그리고 K형이 앉아있었다. 내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K형이 한쪽 옆으로 당겨 앉으며 해원 옆에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나는 잠시 멈칫했다. 삼촌은 들어온 내 얼굴을 힐끔 쳐다보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해원에게 이야기했다. 내가 머뭇거리자 K형이 어서 앉으라고 재촉했고, 자리에 앉기 위해 움직일 때까지 해원은 아무 표정 없이 나를 올려다봤다.   
오뎅가게 삼촌은 욕망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자신만의 방법을 말하고 있었다. 그는 평소에도 그 이야기가 자신을 대변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인 듯 장황하게, 그리고 자주 펼쳐 놓곤 했다. 누구에게나 해 보지 않은 것, 새로운 것에 대한 욕망이 있고, 그도 마찬가지라는 요지의 이야기였다. 그 욕망의 대상은 늘 형수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었다. 
“만약 내가 어떤 여자들에게 특정한 질문을 던졌는데, 그때 그들이 내뱉은 말이 의례적인 답변이면 나는 더 이상 고민할 것도 없지. 그런데 만약, 약 2, 3초간 아무 말도 없다 나를 쳐다보고 다른 이야기를 하거나 내가 찍어 둔 어떤 동선에 따라 걷는다든가 하면 당장은 아니더라도 우리에게 복잡하고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뒤섞인 사건이 찾아올 거라고 확신해.”
그러나 그는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변하는 게 없을 거라는 사실을 알았다. 어떤 결과가 찾아오든 자신의 인생이 눈에 두드러질 만큼 변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혹 변화가 찾아오더라도 어떻게든 풀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런 생각들을 하며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그는 그런 때마다 몸 깊숙한 곳에서부터 어떤 떨림이 전해 오는 것을 느끼곤 했다.
그것을 초조함이라고 그는 불렀다. 그러고는 이 단어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에 아주 적절한 단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 ‘초조함’이라는 단어가 어째서 적절한지를 따지는 것은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리거나 아니면 아예 불가능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게 얼마나 적절한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 자신의 느낌이었다. 그는 그런 것들 이전에 분명한 한 가지는 앞으로 닥칠 상황이 미지의 것이며, 또한 자신이 그 미지의 상황에 무방비 상태로 놓여 있다는 것이었다. 기다리는 동안 그의 안에서는 평소보다 더 많은 생각, 중얼거림, 어떤 느낌의 허밍, 감정 등이 풍부하고 무한하게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그 생각들 자체가 매우 비극적이거나 충격적인 것이라고 해도, 그 생각들이 배출되는 과정만큼은 아찔하고 쾌락적인 것이었다.
“일상의 나는 불완전해. 이런 시간들이 합쳐져야 비로소 나는 완전해질 수 있거든.”
그리고 그는 그런 행위를 즐기는 게 형수와의 관계를 지속시키기 위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그 또한 한 사람과의 관계가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인간 본연에 내재한 욕망, 마구잡이로 분출될 경우 또 다른 사람과 갈등을 일으킬 수도 있는 바로 그 욕망 때문에.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내부에서 들려오는 욕망의 목소리를 거부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세운 기준이 바로 그것이다. 아내에게 미안할 일은 하지 않고 더불어 욕망의 목소리에도 귀 기울이는 것. 그는 형수가 아닌 다른 여자들에게 선배로서 친한 가게 주인으로서 도와주고 싶은 사람으로서 다가갔다. 그리고 그 ‘초조함’을 마음껏 즐겼다. 단, 자신이 세운 도덕적 기준을 충실히 지켜 나가면서.
하지만 그 기준이라는 것은 늘 위태롭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모든 문제를 종교적 가치관 안에서 생각한다고 가정해 보자. 신이 지켜보고 있으므로 그 교리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행동규범에 관한 기준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게다가 실제로 생활의 상당 부분을 그러한 기준에 의해 살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다.
종교와 연관된 행동기준이 그들의 행동을 규제하거나 통제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기준을 한번 넘어섰을 때, 그리고 그러한 일이 반복될 때 그 기준은 더 이상 과거의 그것과 같지 않다. 흔히 무뎌진다고 말하는 것처럼.
자신이 종교의 교리 안에서 행동해야 한다는 신념과 잘해 왔다는 신념은 그들이 자신의 ‘기준’에 합당한지 합당하지 않은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저지른 우연적이고 우발적인 일들과 공존하면서 혼란을 겪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혹 그들의 기준과 어긋나는 일을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그게 너무 급작스럽게 일어난 일이어서 판단을 내리는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면, 그 행위를 옳은 것으로 인정해 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 행동을 함에 있어 자신의 도덕관을 거스르거나 어긴다는 사고 과정을 겪지 않았기 때문에, 그 우발적 행위들을 반성하거나 되짚어 볼 기회도 겪지 않고 원래의 기준과 함께 그 어느 것도 훼손되지 않은 상태로 공존하는 것이다. 그것은 기준을 세우지 않는 것보다도 위험한 일이다. 종교적 신념이 훼손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이 정한 그 기준에서 벗어난 우발적 행동들이 당연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인정되기 때문이다.
삼촌의 이러한 욕망에 대한 연설은 그의 이야기에 공감하는 몇몇 사람들이 있을 때에만 이루어졌다. 그것은 일종의 연대감이고 또한 모종의 집단성이었다. 삼촌이 말할 때에는 누구도 반발하는 사람이 없었고, 동조하는 분위기가 펼쳐지면 삼촌은 더욱 힘을 얻어 말하는 데 열중했다. 오뎅가게라는 그 공간을 지배하는 것은 늘 그렇듯 삼촌이었다. 누군가가 삼촌의 의견에 반발하는 광경은 보기 힘들었다. 그러나 사실 사람들 모두가 동조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사람들은 진정 공감하는 때에는 그래, 라고 대답했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분위기를 깨뜨리는 일은 없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저 로스웰에서도 그랬듯 미소와 침묵이었다. 그들은 비록 하나의 구호를 외치고 있었지만 그들 각자의 속셈은 제각각 달랐다. 서로의 다른 입장을 확인하더라도 그들은 그것을 걸고넘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외친 하나의 구호란 그들 각각의 욕망을 결속시킨 것은 물론, 그 이외에도 무한히 넓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으니까. 결속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 그들이 택한 방법이 바로 ‘미소’와 ‘침묵’이었다.
목적이 없는 일상의 대화라도 다르지 않다. 누군가의 이야기에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있어도 “네 이런 의견에는 동의하지만 그것은 그게 아닌 것 같아.”라고 말하는 사람은 그런 기질을 가진 몇몇의 경우에서만 볼 수 있다. 우선 토론장이라는 멍석이 펼쳐지지 않는 한 누군가의 의견에 반박하는 것에 익숙지 않을뿐더러, 그런 식으로 발화자의 말에 반발할 만큼 큰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또한 그것은 귀찮은 일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그 짧은 순간들을 미소와 침묵으로 넘어가곤 했다. 그리고 오해란 늘 이러한 순간에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연대감으로 뭉친 집단의 이러한 오해와 어긋남을 모두에게 확인시켜 바로잡으려는 사람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K형은 어느 순간부턴가 오뎅가게 삼촌의 그러한 논리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K형이 데리고 온 여자 후배들이나 여자 친구들에게 오뎅가게 삼촌은 ‘K형의 절친한 삼촌’으로서, 그리고 그런 ‘K형이 데리고 온 후배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입장’이라는 충분히 자연스러운 관계를 내걸어 그들에게 다가갔던 것이다. 누가 보아도 자연스러운, 오히려 그게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쪽이 우스워져 버리는 그런 ‘관계’라는 기준. 그러고 보면 세상의 모든 기준이라는 게 얼마나 유동적이고 자의적이며, 또 수많은 의도들을 내포하고 있는가!
게다가 나는 얼마 전 K형이 내게 했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삼촌이 자꾸 해원이에 대해 물어 보더니 요즈음에는 연락까지 하는 눈치야. 이야기를 하는 게 맞는지 고민되어 망설였는데, 해원이 쟤도 좀 맞장구치는 분위기인 것 같아. 너 전혀 아는 바 없어?”
물론 삼촌에 대한 반발심으로 내게 동의를 얻겠다는 의도가 배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K형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내 머릿속에는 해원과 나누던 ‘의지로는 어쩔 수 없는 욕망’에 대한 대화와 오해란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거라는 생각이 뒤범벅되어 떠다녔다. 하지만 말이라는 것, 그리고 예상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그리고 그것들이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주범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런 생각에 빠져 있는데, 삼촌이 단정짓듯 말했다.  
“욕망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게 절대 나쁜 게 아니라고 생각해. 그건 나 자신을 사랑하는 유일한 방법이거든.”
그러면서 삼촌은 해원과 내 얼굴을 번갈아가며 쳐다보더니 마치 미 정부 관료처럼 확인하고 확신시키려는 말투로 재차 물었다.
“그렇지 않아?”
그때 내 머릿속으로 절대 해원의 얼굴을, 특히 눈을 쳐다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만약 그러지 않을 경우 무엇인가가 영영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산산조각나고 말 것만 같았다. 어째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분명히 말할 수 없다. 다만 나는 시선을 삼촌과 해원 사이에 못박아두고, 오래 전 로스웰의 창고에 모여 대화하던 사람들이 사용했던, 지상에서 제일 함축적이고 다의적인 언어인 ‘미소’와 ‘침묵’을 동시에 선택했다. 
 

9

해원과 나는 서로 참아내기 위해 나름의 기준을 세웠지만, 자신의 내부를 지탱하기 위해 세운 그것들이, 그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밖으로 어떤 힘을 방출할 수밖에 없는 경우를 만들기도 했다. 오래 전 내가 인류의 종말을 염려해 나 자신을 지탱하려고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준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해원이 원하는 것을 알았지만 내가 그렇게 행동하지 못한 것처럼, 해원 또한 내게 필요한 것을 알았으면서도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것이 서로를 지탱하는 한계선을 끊임없이 건드렸던 것이 분명하다. 
나는 한동안 만화방에 가지 않았다. 얼마 전 여자가 내 생각에서 완전히 벗어난 행동을 했던 것이다. 나는 계획한 대로 책장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만화를 빌렸고, 반납하기 위해 그것을 그녀의 책상에 올려놓았다. 준비는 모두 끝나 있었다. 그리고 그녀를 기다렸다. 그녀가 일어나 그 책을 확인한 뒤에 간이 사다리를 가져와 올라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녀의 다리는 내 눈에 확연히 드러날 것이었다. 나는 긴장했다. 하지만 그녀는 의자에 앉은 채로, 영업시간이 끝날 때까지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때문에 만화방 안은 매우 정적이었다. 그건 불쾌하고 두려운 일이었다.
만화방에 가지 않고 초조해하는 나를 한참 동안 지켜보던 해원은 내 손을 잡아끌었다. 우리 무너지러 가자. 이제는 한꺼번에 무너져 버리자. 버티지 말고. 그녀가 내게 말했다.
해원은 나를 데리고 지하의 한 술집으로 갔다. 거친 음악이 스피커에서 터져 나왔고, 많은 사람들이 홀 중앙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겨울인데도 그곳은 뜨거운 열기가 가득했다. 그녀가 나를 구석의 테이블에 앉혀 놓고 술을 주문했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술을 마셨다. 그녀가 내 어깨에 기대왔고, 나도 그녀에게 기댔다. 그녀가 물었다.  
“내 눈을 보면 누나가 생각난다고 했지? 눈 모양이 닮았나?”
“자세히 보면 그런 건 아니야. 그래도 충분히 자극적이지. 아주 마음에 든다고.”
그러자 해원이 무표정하게 나를 쳐다보며 속삭였다.
“나는 네 누나와 같은 눈을 할 수는 있지만 네 누나가 될 수는 없어.” 
해원과 내가 술을 들이켰다. 그러는데 그녀가 홀 쪽 누군가와 손짓을 주고받았다. 그쪽을 쳐다보니 오뎅가게 삼촌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삼촌이 해원에게 말을 걸었다. 아니, 어쩌면 잘못 들었는지도 몰랐다. 음악 소리가 아주 컸고 사이키 조명이 쉴 새 없이 번쩍여 그들의 말소리를 정확히 듣지도, 표정을 제대로 볼 수도 없었으니까. 오뎅가게 삼촌이 앞서 홀로 나가자 해원이 뒤따라나갔다. 나는 그녀를 잡지 않았다. 그녀가 나가자 오뎅가게 삼촌 말고도 웬 남자 둘이 해원을 둘러싸고 같이 춤을 췄다.
나는 테이블에 놓인 술을 들이켰다. 시원한 액체가 몸속으로 흘러들었다. 한 잔을 더 들이켰다. 한 잔 더, 또 한 잔 더. 하지만 그녀는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붉은 조명이 짙어지자 분위기가 더욱 고조되었다. 한참이 지나 춤을 추던 남자와 해원이 서로에게 밀착했다. 그러고는 음악에 맞춰 춤을 줬다. 나는 술이 올랐고 그녀를 보기 싫었다. 그녀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기는 처음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추고 있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내가 다가왔는지도 모르고 춤을 추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눈을 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아찔한 시선은 나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그녀의 눈을 찾을 수 없었다. 내가 좋아하던 그 눈이 사라졌나보다고 생각했다. 나는 해원을 뒤로 하고 술집에서 나와 버렸다.
거리에 쌓인 눈을 밟으며 나는 만화방으로 달렸다. 해원이 오뎅가게 삼촌과 춤을 추는 모습을 본 순간 만화방 여자가 떠올랐다. 한달음에 만화방이 있는 건물로 달려가며 그곳에 있을 여자를 상상했다.
아마 이 시각이면 마감시간일 테고 사람들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거세게 문을 밀치고 들어서는 나를 보며 여자가 움찔한다. 그녀는 창가에 앉아 있고, 그 옆에 빈 술병들이 서 있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아주 조금만, 조금만 앉아 있다 가겠다고 얘기한다.
평소에 이런 기회가 생기면 무슨 말이라도 하겠다고 생각했으면서도 막상 말을 꺼내려 하자 입 안에서만 맴돌 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침묵 속에서 여자는 일어서서 평소 자신이 앉던 그 의자를 들고 내 곁으로 다가온다. 여자의 어깨는 여느 때보다 더 가냘프게 흔들린다. 그러면서 빈 공간을 만들어낸다. 내가 사랑한 공간. 나는 그녀의 다리를 쳐다보고, 내 시선을 느낀 그녀는 자신의 다리를 한번 내려다보더니 조용히 입을 열겠지.
“내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이 가게도 그의 것이었어요. 우리는 저 좁은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기도 했지요. 나는 그를 사랑했고 그도 나를 사랑했어요. 어느 날 저 창문으로 따스한 햇살이 넘어 들어왔죠. 우리는 그 햇빛을 보고 드라이브를 가자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게 잘못이었어요.”
나는 그녀를 쳐다본다. 평소처럼 감정 없는 표정. 그녀는 창문으로 고개를 돌린다. 조금 전에 그녀가 붙인 검은색 코팅지가 외부와 실내의 공간을 단절시키고 있다.
“창문을 열었던 게 실수였어요. 햇살이 가게 안으로 넘어오지 않았다면, 우리는 사고를 당하지 않았겠죠. 나는 모든 걸 잃은 거예요. 그도 없고, 나는 그에 대한 기억이 너무 버거워요. 그는 항상 나와 있는데 나는 그를 지탱하기가 참 힘들어요.”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고 또 그녀의 다리를 쳐다본다. 그녀는 평소처럼 또다시 검은색 코팅지를 만지작거린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니 이상하게 가슴 속에서 화가 치밀어오른다. 또다시 창문을 가리려는 걸까? 무엇을 가리고 싶은 걸까? 나는 벌떡 일어나서 그녀를 지나 창문 앞으로 다가갈 것이다. 그리고 그녀와 창문을 번갈아가며 바라보다 창문을 향해 손을 뻗는다. 그녀는 갑작스러운 내 행동을 저지하기 위해 창문을 꽉 잡고는 안 돼, 안 돼 라고 외친다.
만화방 건물 앞에 다다라 뜀박질을 멈췄다. 뛰는 동안 머릿속에 가득 차 있던 상상들이 허연 입김과 함께 순식간에 사라졌다. 나는 허리를 굽히고 숨을 몰아쉬며 만화방을 올려다봤다. 그런데 만화방 간판 불이 꺼져 있었다.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조심스럽게 계단을 올라 만화방으로 향했다.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불 꺼진 계단 통로에 내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가게 앞에 도착했을 때에,

개인 사정으로 가게를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가게를 찾아 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만화방에서 나와 한참을 돌아다녔다. 눈은 잠시 그쳤고, 거리에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돌아다녔다. 평소에, 그리고 가게로 향하던 순간 내 안을 들락날락했던 기쁨과 불안, 예상과 결심 들이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던 여자에 대한, 나에 대한, 그리고 해원에 대한 수많은 이미지들과 결합했다. 그것들은 그 무엇보다 풍성하게 부풀었고, 하지만 대상을 잃은 그것들은 눈송이보다도 가벼워 어디에도 안착하지 못하고 내 주변을 맴돌았다.
해원이 집에 돌아와 있었다. 그녀는 이불 속에서 막 잠들려는 참이었다. 그녀의 얼굴과 마주하자 아까의 미웠던 감정은 모두 사라지고 그녀를 안아 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어디 갔다 와?”
그녀는 잠이 잔뜩 묻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는 잠시 나를 응시하더니 평소와는 달리 이내 시선을 떨어뜨리곤 힘없이 “그냥 자” 라고 말했다. 나는 잠든 그녀의 목 언저리까지 이불을 끌어 덮어 주었다. 그러자 그녀가 이불 안으로 내 손을 끌어들여 손가락 하나하나에 가볍게 입 맞추고 쓰다듬었다. 늘 그랬듯 해원이 내 손을 좋아해 주면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안심이 되었고 또 평화로운 기분에 빠져들었다. 아까 술집에서 느꼈던 감정들과 만화방에서 느낀 일종의 상실감은 해원과 내가 있는 방으로 들어오지 못한 채 모두 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것만 같았다. 나는 비록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다 잘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밤새 눈이 왔다. 요란한 바람 소리가 방안으로 새어들었다. 창가에 흩날리는 눈 그림자를 보며 잠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인기척을 느껴 눈을 떴더니 창문 앞에 선 해원의 실루엣이 보였다. 그녀는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눈바람이 휘몰아치며 방안으로 들이닥쳤다. 나는 작게 입술을 움직여 그녀를 불렀다. 그녀는 듣지 못한 듯했다. 쏟아지는 잠에 다시 눈감으려 하는데, 그런데 그녀가 갑자기 밖을 향해 소리치기 시작했다.
“넌 누구야. 도대체 넌 누구야!”
그녀의 앙칼진 목소리에 나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녀에게 다가갈 엄두는 내지도 못했다.
“넌 누구인데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해!”
폭풍 같은 그녀의 외침은 잠시 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더니 그 절규가 수그러들면서 그녀의 실루엣이 힘을 잃고 점차 무너지는 듯보였다. 털썩 주저앉은 데다 어둠에 가려 있어 그녀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 상태로 한참이 지났다. 장막 같은 어둠 속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꿈을 꿔. 나는 너를 찾아가는 길이지. 네가 사는 집 문을 여니 너는 다른 사람과 함께 있네. 너는 웃고 있고, 그 여자도 웃고 있어. 그런데 나보고도 웃으라고 그러네. 나만 웃고 있지 않다고, 그러니 웃으라고. 내가 웃었어야 할까?”
“…….” 
“그래, 네 이야기가 아니야. 아주 오래 전 일이지. 오래 전에 남자 친구와 싸우고 화해할 생각으로 걔네 집에 찾아간 적이 있어. 한참 문을 두드려도 나오지 않다 결국 문이 열렸는데…… 우연히 알게 된 여자라고 하더군. 글쎄, 그 순간에는 충격적이었지만 이내 괜찮아질 것 같았어. 별일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그냥 재수가 없었던 거라고 생각하면서 말이야. 흔하잖아, 그런 얘기들. 누구나 한번쯤은 겪었을 경험이고. 그런데…… 집으로 돌아오는데 그 여자애 모습이 떠나질 않는 거야. 막 화장을 하고 있던 중이었어. 짙은 빨간색 립스틱을 입술에 바르고 있었지. 그 애는 내가 들어온 걸 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더군. 오히려 나를 불쌍하다는 듯 쳐다보는 거야. 자기는 절대 내가 겪은 일 따위는 겪지 않겠다는 얼굴로 말이야.”  
어둠 속에 부유하듯 퍼지는 그녀의 목소리를 나는 가만히 듣기만 했다. 그녀는 슬픈 표정이었을까, 아니면 나를 외면하고 있었을까. 
“그 뒤로 누군가를 만나면 그 일이 꼭 꿈으로 재현돼. 어김없이, 사람만 지금 만나는 사람으로 바뀐 채로 말이야. 꿈속에서도 누군가 말하네. 다시 해. 다시 하도록 해. 나는 어리둥절해하지. 무엇을? 무엇을 다시 하라는 거지? 내 모든 것을 지우고 다시 시작하라는 말일까? 내 머릿속에 박혀 버린 단어들, 기억들, 모조리 지우고 다시 시작하라는 말일까? 그래, 다시 시작하면 좋지. 다 잘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하지만 막상 다시 시작하면 또 그 꿈이 시작되는 거야. 난 어떡하면 좋지? 나는…….”
그녀의 말소리가 조금씩 작아졌고, 이윽고 그녀는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안고 토닥여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팔만 뻗으면 닿을 곳에 그녀가 있고 내 손으로 그녀를 쓰다듬을 수는 있겠지만, 우리 사이의 잴 수 없는 거리는 절대 넘어서지 못한다는 것을 막연하게나마 깨닫고 있었다. 우리 사이의 그 거리가 뒤틀린 각자의 시간으로 인해 얼마나 아득히 떨어져 있는지를 말이다.
“다시 시작할 수 없는 거라면…… 다시는 그런 경험 하고 싶지 않아. 차라리 내가 먼저 누군가를 그렇게 만들면 만들었지 내가 당사자가 되고 싶지는 않아.”
나는 어둠 속 그녀가 앉아 있을 장소를 집요하리만치 오래도록 쳐다보았다. 창 밖으로 하얀 눈이 휘날리고 있었다. 나 그냥 갈게. 그녀가 천천히 일어나 현관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를 향해 손을 들었지만 정작 입에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잡지 못했다. 그녀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고, 그리고, 그것이 그녀와의 마지막이었다. 

10

그리고 나는 지금도 가끔 꿈을 꾼다.
음악도 대사도 없다. 하나의 삽화 같다. 여러 색을 뭉개어 서로 섞어 그린 일종의 유화 같다. 혹은 서로 다른 색의 물감들이 섞이지 않도록 정밀하게 그린 점묘화 같기도 하다. 나는 통로를 지나 문 앞에 서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내가 아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한데 모여 우스꽝스러운 몸짓을 하고 있다. 그 몸짓들을 그들은 춤이라고 부른다. 사람들이 모인 그곳은 화려하게 눈부신 어떤 술집 같기도 하고 오뎅가게 같기도 하고 만화방 같기도 하다. 내가 들어간 그곳은 분명 건물이었는데 사람들 머리 위에는 퍼런 달이 떠 있다. 내가 건물로 들어간 것인지 건물에서 나온 것인지 확실치 않다. 그곳은 시간이라는 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속과 겉, 사람과 사람, 말과 몸짓의 경계들이 거미줄보다 촘촘하고 복잡하게 짜여 있다. 그 사이에 눈에 확연히 보이지는 않지만 희뿌연 안개가 깔려 있다. 안개는 말로는 표현되지 않는 것들과 안착하지 못한 무수히 많은 언어들과 자의적인 기호들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그들 사이에서 전혀 소통되지 않는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기 시작한다. 해원이 춤을 춘다. 오뎅가게 삼촌이 춤을 춘다. K형이 춤을 춘다. 만화방 여자는 그들 사이를 넘나들며 절룩거리며 춤을 추고 있다. 제각각의 자전속도와 공전속도가 교묘히 겹쳐지면서 언젠가 탁자를 치며 노래를 불렀던 그때처럼 가슴을 울리는 리듬과 박자를 만들어낸다. 우리는 모두 푸른 달빛을 받으며 일정한 궤도에 따라 춤을 춘다. 저 멀리, 우리가 사는 지구를 향해 달려오는 또 다른 행성들의 모습이 선명히 보인다.
나는 해원과 만화방 여자를 번갈아 쳐다본다. 비록 그들 각자와 내가 유지했던 거리는 같지 않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렇다고 해서 그 둘 중 누군가를 더 잘, 혹은 더 많이 이해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생각한다. 꿈에서 깨어나면, 이 광경을 제대로 기억해 낼 수 없을 거라고.

11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여전히 행성은 다가오고 있었고,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행성의 궤도와 지구 궤도 사이의 비어 있는 공간 안에서 무언가를 참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해원과 헤어진 다음 해, 나는 한 학기만 다니고 휴학했다. 부모님이 사는 집으로 들어가기로 했는데, 자취방 계약기간도 끝난 데다 집으로 들어오는 게 어떻겠느냐는 아버지의 권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시기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군대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아버지는 그때까지라도 가족과 함께 보내자고 했다. 집으로 들어가던 날, 현관문을 여는데 어머니가 달려나와 눈시울을 붉혔다. 거의 일 년하고도 반년 만의 재회였다. 곧 이사를 간다. 아버지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후 부모님과 누나의 묘소에 갔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앞장섰고, 나는 뒤를 따랐다. 수술실 앞에 토라져 서 있던 누나의 표정이 떠올랐다. 아버지가 술을 꺼내 놓자 애한테 무슨 술이냐고 어머니가 눈을 흘겼다. 모두가 묘지 앞에서 아무 말 없이 한참 앉아 있었다.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리는데 누나의 비석 앞에 있는 무언가가 눈에 띄었다. 메모지였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벌써 저만치 내려가고 있었다. 메모지에는 이사 갈 집의 약도가 그려져 있었고, 옆에 자그맣게 ‘우리집’이라고 쓴 글씨가 보였다. 아버지의 글씨체였다. 나는 먼저 내려가던 아버지의 뒷모습을 볼까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대신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관심을 갖지 않으면 절대 인식할 수 없는 변화. 마치 지구를 향해 날아오는 운석이 어디쯤 오고 있는지 아무도 모르듯이.
입대를 앞두고 해원을 찾아간 적이 있다. 오랜 만에 연락이 된 그녀는 내가 군대에 간다고 하자, 자기가 사는 곳으로 한번 찾아오라고 했다.
나는 가끔 그녀를 떠올렸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그녀에 대한 기억이라는 것이 그녀에게 빌리고 ‘돌려주지 않은 펜’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인가를 막 쓰다 보니 내 손에 들린 펜이 내 것이 아니고, 또한 자세히 보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녀가 떠오르는 것. 비록 지금은 내게 있지만 내 것이 아닌 게 분명하고, 그녀의 것 또한 아닌 것이다.  
나는 해원이 사는 곳으로 찾아갔다.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자 정면에 계단이 보였다. 별다른 보수공사는 하지 않았는지 낡은 건물 안에는 오래 전 여관이었을 때의 흔적이 군데군데 보였다. 조명 없이 그늘진 실내에는 냉기가 어려 있었다. 나무재질로 된 계단 손잡이를 쓰다듬으며 한 발 한 발 움직였다. 계단을 오르다 잠시 벽에 기댔다. 콘크리트 벽의 차가운 기운이 등에 와 닿았다. 슬며시 눈을 감자 건물 밖에서 매미 소리와 풍향계 돌아가는 소리, 나뭇잎들이 부딪쳐 서걱대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그것들은 무대 장막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소리들도 들려왔다. 건물 내부의 하수관 소리, 그리고 건물 자체가 삐걱대듯 어디선가 녹슨 쇳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녀가 사는 층의 복도 끝에 옛날 병원이나 교회에서 사용했을 법한 긴 나무의자가 놓여 있었다. 나는 발소리를 죽이고 의자로 다가갔다. 그녀는 가끔 이 의자에 앉아 바깥을 내다보았겠지. 그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귀를 막고 건물 아래를 지나는 사람들을 쳐다봤을까, 아니면 또다시 꾸기 시작한 꿈 때문에, 다시 찾아온 어떤 기억들 때문에 여전히 힘들어했을까.
나는 그녀의 집 현관문을 두드린다. 쿵쿵대는데도 집안에서는 기척도 없다. 내가 소리지른다. 문 좀 열어봐. 그녀는 내 말을 듣지 않는다. 대신 알 수 없는 말을 소리친다. 봐. 이 건물을…… 그리고 나를 좀 봐. 굳어가고 있어. 점점 갈라지고 있어. 다 말라가고 있어. 나는 소리친다. 내 말 좀 들어 봐. 문을 좀 열라고. 하지만 그녀는 내 외침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빨리 가. 찾아오지 마. 내 몸을 좀 봐. 언제 너도 딱딱해져 말라 버릴지 몰라. 아니, 너도 이미 말라 가고 있어. 결국 말라죽을 거야. 너도 나도. 그러니 어서 돌아가. 나는 그녀에게 타이르듯 말한다. 네 말이 맞을지도 몰라. 그래, 말라 가고 있어. 우리의 모든 것들이 말라 버려서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지도 몰라. 그래도, 문 좀 열어 봐, 제발. 나는 계속 문을 두드리고 그녀는 소리지른다. 그녀의 집 문은 굳게 닫혀 있고 나는 그 문을 두드리고 있다. 한때 여관이었던 건물은 문을 쿵쿵 두드리는 소리와 그녀의 목소리로 가득 찬다. 그리고 마른 건물이 바스러지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온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복도는 여전히 고요했고 나는 복도의 긴 의자에 앉아 상상했을 뿐이다. 슬며시 눈을 떴다. 그리고 창 밖으로 얼굴을 내민 채 눈을 감았다. 바람이 불어왔고 그 바람에 몸을 맡겼다. 세상을 가로질러 불어오던 바람이 내 얼굴을 쓰다듬고 지나갔다. 나는 그 바람 속에서 옅게 타오르던 대학 캠퍼스 광장의 열기를 느꼈고, 낡은 건물 구석진 곳에 있던 만화방 책들의 퀴퀴한 종이 냄새를 맡았다. 그렇게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리는 것을 느끼며 오 분쯤 서 있는데, 그냥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정류장 앞에 섰을 때, 문득 해원이 어디선가 나를 지켜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바람이 그렇고 기억이 그러하듯, 삶의 곳곳에는 절대 잡을 수 없는 것들이 도사리고 있는 법이니까.
 

12

K형을 만난 것은 얼마 전의 일이다.
나는 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도 소설 한 편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늘 버리지 않았고, 틈만 나면 하얀 노트에 연필로 무엇인가를 쓰려고 노력했다. 그날도 나는 무엇인가를 메모하다 인터넷으로 여러 신문기사를 검색하고 있었다. 그날따라 인터넷에는 내가 관심을 가질 만한 신문기사들이 여럿 올라와 있었다. 60년 전 로스웰 사건 당시 직접 일 수습을 맡았던 미 장교가 ‘로스웰 사건은 사실’이라는 유서를 남겼다는 기사와 2036년 지구와 소행성의 충돌을 예상하여 만든 시뮬레이션이 떠돌았다. 인터넷에서는 유서가 사실인지 아닌지에 대한 의견들, 그리고 지구와 행성의 충돌과 관련한 여러 지식과 의견들이 오갔다. 예전의 나처럼 지구와 행성의 충돌과 외계인에 대해 관심을 갖는 사람의 개인 홈페이지에는 관련 기사들이 잔뜩 스크랩 되어 있었다. 인터넷을 통해 사람들은 엄청난 양의 정보를 얻을 수 있었지만, 너무 많은 정보들이 떠돌아다녀서 정작 어떤 것이 사실이고 또 거짓인지 더욱 불확실했고 불투명했다.
먼저 연락을 해 온 것은 K형이었다. 한참 만의 연락이어서 나는 놀라움 반, 반가움 반의 심정으로 호들갑 떨며 전화를 받았다. 형은 내 반응에 웃으며 근황을 묻더니 시간 좀 되냐? 라며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말했다.
형이 일을 하는데 파트너가 펑크를 내어 사람이 좀 필요하다고 했다. 시내 유명 유흥지역에서 영업하는 업소들의 현황을 파악하는 일이었다. 주류업소에 대한 물품 공급을 위해 회사에서 자체적으로 갖고 있어야 하는 자료들이 필요했고, 그래서 그 정보를 수집하는 일이었다.
“이미 여러 팀으로 나눴어. 홍대에 다섯 팀, 역삼에 두 팀, 강남에 네 팀, 뭐 이런 식이야. 골목마다 돌아다니며 캠코더로 촬영한 다음에 대상 업소의 지도를 만들어 둔 상태야. 이제 가게들을 직접 돌아다니면서 세부 정보를 파악하는 일만 남았는데, 우리 팀 한 녀석의 아버지가 갑자기 입원하셨대. 이 일이 혼자서는 힘들거든. 적어도 둘 이상의 되어야 하지. 뭐, 그렇다고 그냥 도와달라는 건 아니야. 일이 일이니 만큼 보수가 짭짤해.”
대학 졸업 후 연락한 횟수는 몇 개월에 한 번 정도로 뜸한 편이었지만 그래도 주변 사람들로부터 몇 다리 건너 K형의 소식을 듣곤 했다. 누군가에게서 K형이 곧 취직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는데, 아마 그 일인 듯했다. 나는 형의 일을 돕겠다고 했다.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이후 나는 대학원에 진학할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금전적으로 수입이 될 만한 일들은 어지간하면 마다하지 않고 맡고 있던 터였고, 무엇보다 일을 하는 동안 K형과 함께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고등학교 시절에 만나 대학까지 함께 다닌 K형을 떠올리면 어쩐지 마음이 동하는 데가 있었다.
하지만 정작 일을 하면서 나는 내 예상이 엇나갔다는 느낌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K형과 일하는 내내 어떤 어색함을 시종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약속장소에서 오랜만에 형을 만났던 순간에도 K형은 간단한 인사말만 건넬 뿐이었다. 그동안의 공백기가 있으니 어쩔 수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것 말고도 다른 뭔가가 우리 사이에 크게 작용하는 것만 같았다. 술집 주인들을 상대로 능청스럽게 말하고 또 정보 수집을 하는 동안 어느 정도 예전 관계를 회복한 듯 느껴졌지만, 그럼에도 남아 있는 쓸쓸한 기분은 지울 수가 없었다.
스무 번째 가게에서 나오는데 K형이 쉬면서 라면이나 먹자고 했다. 첫날 서른다섯 군데, 둘째 날 서른두 군데, 그리고 오늘 지금 막 스무 번째 가게까지 돌았으니 사흘 동안 이 구역 술집만 87개 가게를 돌아다닌 셈이다. 유흥가로 유명한 이곳에 BAR 형태의 술집이 많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많을 줄은, 게다가 한 번씩 다 들어가 보리라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또한 그런 만큼 지치기도 했다.
“홍대에는 이런 가게만 이백 군데가 넘는다.”
K형이 비밀을 가르쳐 주듯 조용히 말했다. 형의 목소리는 마치 한숨을 쉬는 듯했다. 홍대 쪽을 맡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이백 군데가 넘는 가게에 들어가 다음에 올게요 라는 말만 하고 나오는 것은 분명 유쾌한 일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소란스러운 번화가를 벗어나 한적한 골목에 있는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사발면 두 개와 소주 한 병을 사서 밖으로 나와 건물 외부 계단에 걸터앉았다. 거리상으로 조금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데도 골목을 메우던 소음들이 마치 장막 밖으로 밀려난 듯 수그러들었다. 한참 말없이 라면을 먹는데 K형이 소주를 한 모금 마시고 내게 병을 건넸다.
“괜히 미안하다.”
나는 뭐가 미안해, 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이상하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보수 받고 하는 일인데 뭘, 이라고 간신히 말했을 뿐이다. 형은 다시 소주를 마시더니 병을 땅바닥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지금 하는 일은 형이 취직하려던 회사에서 취직 조건부로 내놓았던 일이라고 했다. 이 일을 형이 맡는 것으로 하고, 어느 정도 진행된 시점에서 정식 입사처리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본격적인 일을 위한 사전 작업을 마치고 나니 형의 위치가 계약직도 아닌 아르바이트 수준으로 바뀌어 있었다. 약속된 자리에는 사장 의 지인이 대신 들어갔는데 K형이 준비해 온 일도 그가 담당하게 되었다. K형은 그 자리에서 욕을 퍼붓고 나올까 생각도 했지만 이내 고민하게 되었다. 사장이 꽤 괜찮은 금액을 제시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취직은 물 건너간 상태였고, 이미 사전준비가 다 된 일에 며칠 발품만 팔면 상당한 액수의 돈을 받을 수 있었다. 형은 뭘 어쩌겠냐는 듯 씁쓸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그래도 어쨌든 이렇게라도 얼굴 보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내가 내뱉자 K형이 허탈하게 웃으며 소주를 들이마셨다. 나도 내 말을 되뇌며 웃음 짓는데, 형이 라면국물을 마시더니 손등으로 입을 닦으며 물었다.
“해원이 소식은 좀 들어?”
튀어나온 이름에 나는 K형을 쳐다봤다. 형은 나를 쳐다보지 않고 라면 면발만 건져먹었다. 문득 이렇게 K형과 앉아 라면을 먹으며 그녀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 마치 이미 지나간 어떤 일을 다시 떠올리는 것만 같았다. 
“왜 형은 무슨 소식이라도 들었어?”
내가 묻자 K형은 나를 힐끗 한번 쳐다보고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걔 결혼한다더라.”
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어색한 웃음 소리를 내고 말았다. 형은 그런 나를 쳐다보더니 왜 웃느냐며 장난기 어린 말투로 물었다. 나도 왜 그랬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 물음에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런데 더 알 수 없는 것은 그 다음 내 말이었다.  
“오래 전부터 어쩐지 이렇게 될 것 같았어.”
K형이 뭘? 이라고 물으며 쳐다봤다. 나는 그런 K형의 얼굴을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말해 놓고 더 알 수 없는 것은 형보다도 나 자신이었다. 뭐가 이렇게 될 것 같았다는 말일까? 내뱉어 놓고 나 스스로도 답을, 또한 무엇에 대한 물음인지조차도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우리, 몇 군데만 더 끝내고 학교에 가 볼까? 오랜만에 가고 싶네.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하기도 하고. 너 보니까 더 그런 거 같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별로. 나는 학교 가고 싶다는 생각 들었던 적 한 번도 없는데. 졸업한 뒤로는 후배들을 생각해도 어째 예전처럼 정이 안 가. 이제 걔네들이랑 관심사가 같을 거 같지도 않고, 소속이 달라져 버려서 그런가?”
“다들 그렇지 뭐.”
하늘을 올려다보며 K형이 씁쓸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그건 사실이었을까?”
“뭐가?”
내가 묻자 K형은 오래 전 도서관에서 내 우동을 뺏어먹던 그때의 표정으로 조용히 대꾸했다.
“행성 말이야. 정말로 지구랑 부딪힐 가능성은 있는 거야?”
나는 대답하지는 않고 씨익 웃었다. 대신 하늘을 올려다보며 조용히 K형에게 물었다.
“그런데 형. 우리 예전에도 언젠가 이렇게 골목 어디쯤에서 이런 얘기 하지 않았어?”
 

13

K형에게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사실 졸업한 뒤 언젠가 혼자 학교를 찾은 적이 있다. 갑자기 그러고 싶은 생각이 들어 누구에게도 연락하지 않고 혼자 학교로 향했다. 몇 년 만에 찾은 학교였다. 보지 못한 건물들과 상점들이 많이 생겨났다. 예전에 만화방이 있던 건물은 헐리고 새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나는 편의점에서 할인행사 중인 캔맥주를 사서 정문 앞 스탠드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짝을 지어 앉아 있었고, 학교 앞 상점들의 불빛이 풍경에 색을 입히고 있었다. 학생들은 중간고사 시험이 어땠고, 대동제 준비를 시작한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을 왁자지껄 나누고 있었다. 다들 제각각의 표정이었지만, 그들에게서는 어떤 일관된 경쾌함이 보였고, 때 묻지 않은 힘 같은 것이 느껴졌다.
학교 근처 오뎅가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밤 열 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오뎅가게만은 변한 게 거의 없었다. 인테리어도 그대로였고, 벽에 붙은 수많은 사진들도 그대로였다. 그러나 주인은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입구 옆쪽 벽에 붙은 사진들 중에서 나와 K형과 해원을 찾아냈다. 사진은 빛이 바래 잔뜩 흐릿해져 있었지만, 흘러간 시간과는 무관하게 셋 모두 앳된 얼굴로 앉아 있었다.
노래를 부르는 전통은 여전한지 어떤 남자가 기타를 들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그 사이에 앉아 여러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중에 여자 친구와 함께 온 사십대 남자가 있었다. 대학 시절이 그리워 이곳에 왔다고 했다. 그 손님이 음악에 도취되어 흘러간 노래를 따라 부르는 동안, 그의 여자 친구는 내내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뭐 저런 노래를 부르며 사람들과 어울리나 하는 표정으로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한 사람의 개인적인 감상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쉽게 동감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새삼 새롭게 다가왔다.
오뎅 국물이 끓으며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고, 얼큰히 취한 남녀의 대화만 가끔 이어지며 간신히 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여자 : 왜 멍하니 있어요?
  남자 : 당신과 나 사이에 아득히 펼쳐진 것들을 보고 있어요.
  여자 : ……그게 뭔데요?
  남자 : 사막이요.
  여자 : ……사마귀요?

 
나는 그 사이에서 창 밖을 내다봤다. 그리고 내가 앉아 있는 풍경을 상상했다. 왁자지껄 떠들던 사람들의 대화 소리와 노래 소리가 사라진 자리에 어느새 침묵이 무겁게 들어앉았다. 술을 마셔서 그렇게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정말 그 자리에 다른 무엇인가가 들어차 있는 것 같았다. 함께 앉아 있던 사람들 각자의 지나간 시간 따위가 찾아온 것처럼 말이다.
다들 불콰한 얼굴로 앉아 국물이 말라붙은 빈 접시만 쳐다보고 있었다. 순간 또다시 불쑥 불안한 전조의 멜로디가 떠올랐다. 몇 년 만의 일이었다. 나는 그 멜로디가 아직도 오래 전 내가 느꼈던 그 상태로 남아 있는지 비교해 보려 했지만, 술에 취했기 때문인지 잘 떠올릴 수가 없었다.
그러는데 내 앞에 앉은 어떤 여자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혼자 와서 소주를 마시고 있었는데, 내내 말없이 앉아 있더니 드디어 입을 연 것이었다.

   당신이 내게 맡긴 작고 하얀 새
   내 마음 깊은 곳에 웅크려
   낮고 긴 노래, 소리 없이 부르네
   내 안에서 날갯짓하며 이리저리 헤매더니
   주인은 가 버렸는데 혼자 남아
   임자 없는 빈 깡통 같은 내 마음 속에서
   퍼덕임도 없이 쉬지 않고 노래하네
   낮고 긴 구슬픈 노래를……

가사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대략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여자의 목소리가 우리를 짓누르던 공기 사이로 스멀스멀 스며들었다.
나는 노래를 듣다 문득 창밖을 내다봤다. 그런데, 술 때문일까, 아니면 노래 때문일까…… 새벽이 어스름이 다가오는 가게 창 너머로 어둠 속에 빛나는 행성 하나를 보았다. 그 행성에는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생명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죽어 가는 나무. 푸르스름한 광택이 비치는, 혼자만의 행성에서 일정한 궤도를 돌 때마다 더욱 굳어진, 석화된 나무. 나무는 마치 두 팔을 벌린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내가 졸린 눈을 비비며 자세히 쳐다보니, 그것은 해원이고, 만화방 여자이고, 오뎅가게 삼촌이고, K형이고…… 그리고 나였다.  《문장웹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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