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묘희 미용실

강묘희 미용실

 

백영옥

 

 

 

 

예약 취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막 현관문을 열고 부엌에 들어왔을 때, 여자의 목소리와 함께 찌꺽찌꺽 밥솥에 달린 분출구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곧 엄청난 양의 수증기가 굉음과 함께 뿜어져 나왔다. 그 소릴 들을 때마다 어릴 적 보았던 애니메이션이 떠올랐다. 조팝나무의 꽃처럼 펑펑 피었을 뜨거운 밥나무, 밥솥 안에 가득 담긴 하얀 밥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집 안에 가라앉았던 스산한 어둠이 날아가 버리는 느낌이다. 뜨거운 밥알 몇 개를 입 안에 오물거린다. 씹을수록 순한 단맛이 입 안에 퍼진다.

김 팀장님. H 작가 원고, 정말 미리 좀 볼 수 없을까? 진짜 유출 안 한다. 약속할게!

문학 담당 기자 L이다. 밤 12시가 넘었는데 긴급 문자를 보낸 걸 보면 아직 마감중인 게 틀림없다. 엄마는 하루가 멀다 하고 야근을 하던 첫 직장을 노동청에 고소하겠다고 퉁박 주기 일쑤였다. 대꾸를 하느니 독립을 하겠다고 결심했고, 출판사 입사 3년 만에 월세 50만 원짜리 오피스텔로 옮겨 왔다. 잔소리 대신 참을 수 없는 침묵을 얻었지만 그땐 혼자가 아니라 나쁘지 않았다.

찬장을 열어 밥그릇을 꺼냈다. 하나만 놓여 있는 밥그릇이 휑뎅그렁했다. 모든 건 짝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엄마가 기어이 짝을 맞춰 한 벌짜리 공기를 사 놓았지만 빈자리만 차지하는 것 같아 일찌감치 치워 놓았다. 식탁은 부엌에서 이미 치워 버렸으므로 개수대 앞에 서서 나는 조용히 밥그릇을 들었다. 엄마 말대로 끼니를 서서 때우는 서른여덟 직장인의 삶보다 의대를 졸업한 아들이나 곧 만기될 주택청약 부금 때문에 행복할 수 있는 삶이 더 복된 것일지도 모른다. 커다란 6인용 식탁이 정말로 가족의 행복을 담보해 주는 것이라면 결혼할 동생에게 하나쯤 선물해 주고도 싶다.

냉장고를 열자 아침에 던져 놓고 간 빈 반찬통이 뒹굴고 있었다. 오늘도 밤을 새워야 하니 별 수 없다. 나는 찬장에서 즉석 김을 꺼내 밥 위에 올려놓았다.

밥과 김. 화려하진 않지만 나쁘지 않은 궁합이다. 15년 전, H와 나처럼.  

 

H가 내게 느닷없이 소설을 보냈을 땐 당황했었다.

꼭 당신이 끝까지(!) 봐주었으면 좋겠어. 당신이 읽지 않으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어. “습관 같은 거야.”라고 내치진 말아 줘.

교정지 맨 앞에 붙어 있던 분홍색 포스트잇엔 갈겨 쓴 H의 메모가 남겨져 있었다.

6년 만의 장편 소설은 경이로움 자체였다. 그가 처음으로 1인칭 소설을 썼다는 것도 놀라웠다. 문체, 캐릭터, 소재, 묘사 방법, 작품을 구성하는 아이디어나 전반적인 형식, 주제 의식, 그 모든 것들이 이전에는 볼 수 없던 새로운 것들이었다. H는 매해 소설을 썼고 그가 쓴 소설은 수십만 권 이상의 판매를 기록했었다. 두 번째 책을 내고 난 후 ‘신드롬’이 됐던 H는 곧 ‘문학적 현상’이 됐고 이듬해 몇몇 문학상을 탔다. 그의 행보가 이미 성공한, 앞으로 성공이 예견된 작가들이 밟았던 정석대로 간 것은 아니었다. 세 번째 소설을 발표했을 땐 권위가 인정된 문예지가 아닌 남성 패션지의 커버 모델로 등장해, 패션을 자본주의의 똥 덩어리로 분류하는 그의 신봉자들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화가 매튜 바니의 〈크리매스터〉 시리즈의 한 장면을 패러디한 괴상한 염소 인간 분장으로, 머리에 빨간색 뿔을 달고 한 손엔 성경책을 든 채로 말이다.

파격 앞엔 언제나 사람들의 질시 어린 쑥덕거림이 있었다. 혹자는 ‘문학이 패션(Fashion과 Passion)일 수 있음을 이해한 첫 소설가’란 말을 하기도 했고, ‘미친놈’ 혹은 ‘또라이’란 말로 간단히 그를 정의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독자들은 그의 소설을 기다렸다. 이번 소설이 H가 쓴 최초의 연애 소설이 될 것이란 점에 모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가 쓴 소설이 무엇이건 작품이 미치는 파장은 엄청날 것이다. 그 사이 그가 보인 파격적인 행동처럼.

소설을 발표하지 않던 지난 6년 동안 H는 다섯 번 연애했고 두 번 결혼했다. 작품만 좋다면, 그것이 이전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새로운 것이라면, 무엇이든 용서할 수 있다. 악마에게 몸을 팔든, 친구에게 마누라를 팔든, 일단 한 번은 이해해 주겠다고 생각했다. 기꺼이! 하지만 H의 원고를 읽고 난 후, 나는 그것이 그해 최고의 문학적 재앙이 될 것임을 깨달았다. 16년차 편집자의 직감이었다. 적확하지 않은 정보들, 제멋대로인 묘사들, 캐릭터의 일관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결핍된 문장들. 한껏 폼을 잡기 시작한 주인공은 철학도 뭣도 아닌 이야기를 술주정뱅이처럼 주절대고 있었다. 당장 원고의 유출부터 막아야 했다. 떨리는 가슴으로 원고를 덮자마자 H에게 무작정 전화를 걸었다.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메시지를 남겼고 호출을 했다. 다음날, 그 다음날에도 그에게서 전화는 오지 않았다. 그 다음날에도…….

 

전화기를 자주 꺼 놓는 H와 연락이 되지 않을 때, 인터넷은 여러모로 유용했다.

12일 오전, 저작권보호법 관련 세미나에 참석, 오후 독립영화 감독들과 함께 ‘예술과 현실의 소통’에 관련된 주제로 강연회, 북 클럽 회원들과 인터넷 시대의 쌍방향 문학에 대해 토론. 그가 한 공적인 일들은 인터넷에 꼼꼼히 기록되어 있었다. 그가 말하지 않아도 나는 내일이나 모레 그가 할 일들을 알고 있었다. 이주일이나 한 달 후, 그가 나타날 제주도나 원주의 어느 거리에서 그의 모습을 멀리서 살펴볼 수도 있었다.

늘 새로 뜬 뉴스를 검색하고 블로그나 카페에 올린 네티즌들의 서평을 꼼꼼히 살폈다. 인터넷 서점의 독자평이나 새로 업데이트된 H의 새로운 사진들을 검색하고 잘못된 정보를 수정하는 것 역시 내 일이었다. H가 출간한 여섯 권의 책은 모두 내가 만든 것이었다. 무명의 신인이었던 그를 믿고 책을 계약하자고 나선 것도 나였다. 두 번째 책의 성공으로 그가 선물한 독일산 에스프레소 머신은 일찌감치 고장 났지만, 아직까지 내 방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의리란 말이 세상에서 제일 후지다고 했지만 내가 출판사를 두 번 옮기는 동안 H도 출판사를 옮겨 책을 냈다.

그를 대신해 전화를 받고, 연락을 취하고, 그의 말을 대신 전하는 사람. 소설을 쓰는 대신 소설을 고치고, 작가가 되는 대신 작가를 보필하며, 문장의 최종 마침표를 완결하는, 그야말로 완벽한 ‘대신’ 인생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때였든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던 때였든 중요치 않다. 수풀 사이 귀뚜라미가 울었든 작약 꽃 타는 냄새가 천지에 진동했든 무슨 상관이랴. 다만 언젠가 나도 내 글을 쓰고 책을 낼 수 있으리란 희망이 점점 시들어 갔다는 것, 다른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만기된 주택 청약 부금이나 의대에 들어간 아들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을 불현듯 깨닫던 순간의 밤이었던 건지도 모른다. 아…… 뱃속에서부터 한숨 같은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딱히 이유를 설명할 순 없지만 오랫동안 잊고 있던 중요한 약속을 막 기억해 낸 것처럼 정신없이 내 방 컴퓨터 앞까지 달려갔다.   

나는 내 이름을 인터넷 창 위에 쳐 보았다. 이름 석 자를 다 치기도 전에 자동으로 검색되던 H의 이름이 아니라, 강묘희, 내 이름 세 글자를. 그리고 책상에 앉아 이름의 자음과 모음을 치고 검색 엔진이 돌아가는 소리를 망연히 들었다. 광고와 뉴스로 가득 찬 포털 화면이 하얗게 흐려지더니 뭔가 서서히 부유하듯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검색되지 않으리란 예상은 빗나갔다. 그곳엔 낯선 상호 명 하나가 떠 있었다.

 

강묘희 미용실.

경상남도 사천시 선구동 801-22.

 

H와 연락되지 않은 지 한 달째였다. 책상 위에는 에스프레소 찌꺼기가 남은 커피 잔과 가위표와 밑줄로 가득한 지저분한 H의 원고 교정지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나는 들고 있던 빨간색 플러스 펜으로 교정지 끄트머리에 미용실 주소를 빠르게 적었다. 주소는 교정된 난삽한 글자들과 뒤섞여 곧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망가져 버렸다.

늦은 저녁을 먹고, 젖은 머리를 말리다가 이마에 미역줄기처럼 눌어붙은 앞머리를 바라보았다. 앞머리는 눈썹 밑으로 내려와 동공의 2/3 이상을 가리고 있었다. 침대에서 뒤척이다 문득 주방에 놓여 있던 가위로 앞머리를 덜컥 잘랐던 때가 떠올랐다. 잘게 잘린 머리카락들이 눈동자 안에 부스스 떨어져 빠지지 않고 찔러댔던 기억, 어디선가 나타난 아빠가 입을 벌려 충혈된 눈 안에 훕훕훕 바람을 불어넣던 기억과, 그때 얼굴 위에 와 닿던 도라지 담배 냄새와 알싸한 박하 냄새.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베개를 두 번 바꾸고 이불을 다시 덮었지만 한 번씩 몸을 뒤척일 때마다 끙, 소리가 절로 나왔다. 희붐하게 동이 트기도 전에, 나는 내가 미용실 주소를 이미 외워 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성인이 된 후 강릉이라거나 속초, 경주처럼 사람들이 종종 여행을 떠나는 곳에 거의 간 적이 없었다. 딱 한 번 〈2046〉을 찍은 양조위가 온다는 부산 영화제에 가 볼까 생각했지만, 그마저 내가 하지 않아도 될 마감을 이유로 포기했다. 팀장 자격으로 국제 도서전이 열리는 볼로냐나 프랑크푸르트에 가는 것 역시 몇 번의 다짐 끝에야 출장 가방을 쌀 수 있었다. 어디로 떠나고 싶을 땐 고작 차 안에서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OST를 듣는 게 전부였다. 쿠바의 ‘하바나’에서 발기한 성기보다 커다란 시가를 피우며 서서히 죽는 삶도 그럭저럭 괜찮을 것 같다고 농담했었다. 라이 쿠더의 기타 소리를 들으며 길을 달리면 2000년 식 중고 소나타로도 쿠바 어디쯤에 불쑥 도착해 있을 것 같은 기시감이 들기도 했다. 눈을 감고 귀를 열면 상상 속에서 이미 그 자리에 머무는 여행, 매일 밤 내가 떠나는 여행은 그런 실체 없는 여행이었다.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통과하고 자동차 속도를 높이자 꽁무니를 빼듯 멀어지는 어둑한 길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꺼진 핸드폰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삶이란 누구도 이해 못할 충동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란 H의 문장에 꼿꼿이 밑줄을 긋던 때의 얼굴이 떠올랐다.

계획해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얼마나 될까. 스물여덟에 결혼, 서른 살에 첫 출산, 서른둘에 서른다섯 평 아파트를 장만하고 형부를 대학 병원 스텝에 앉히겠다고 계획했던 언니가 돌연 계획에 없던 이혼을 감행했던 것처럼 말이다. 언니는 이혼을 하고 나서야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엄마는 종일 발품을 팔아 자신이 일일이 짝을 맞추어 주었던 모든 물건들이 신을 수 없는 신발처럼 한 짝만 남아 홀로 되돌아오리라곤 계획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 역시, 우연히 이름이 같은 미용실 주인에게 머리를 잘라야겠다고 결심한 순간부터 한 번도 계획하지 않았던 일을 하고 있었다.

총 거리 343.15킬로미터. 예상 소요 시간 4시간 39분. CO2 배출량 58.4킬로그램, 통행료 16,000원. 포털 사이트의 빠른 길 검색 서비스에는 이산화탄소 배출량이나 도착지까지의 예상 택시비까지 나와 있었다. 그날 아침, 오랫동안 주차장에 방치되어 있던 차를 점검하고, 출판사 이름이 적혀 있는 노란색 봉투 안에 원고를 넣어 밀봉했다. 봉투엔 온통 붉은색으로 뒤덮여 지우고, 빼고, 덜어 낼 것을 요구하는 H의 소설 교정지가 들어 있었다. 떠나기 전날 우체국에 들러 우편으로 H의 원고를 보냈다. 그리고 사무실 책상에 앉아 사표를 쓰기 시작했다.

개인적인 일로 그만두겠습니다. 쉬고 싶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하지만 사표를 보자 막상 감사해야 할 것이 무엇이었는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16년 동안이나 문장을 교정했는데도, 막상 사표에 적을 문장 몇 줄 쓰는 것이 버거워 오후 내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것이 내 한계인가. 마음을 전달하는 일은 이런 것인가, 포기하려는 순간 사표의 첫 문장을 ‘개인적인 일’에서 ‘일신상의 이유로’로 바꿨다. 거짓말처럼 그때야 비로소 회사에서의 일을 사무원처럼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서울 밖을 나가 본 적이 없다고 말하던 내게 H가 말했었다. 정말 서울을 떠난 적이 없단 소리야? 그럼 애인이 한 명도 없었단 얘기잖아. 서울을 떠난 적 없는 여자에겐 응당 애인이 없을 것이란 말은 비약이었다. 김 대리, 나랑 사귑시다. 지금 당장, 서울부터 뜹시다. 그는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볼펜을 쥐고 있던 내 손을 더럭 잡았었다. 그의 손은 땀으로 축축했지만 잘 익은 홍시처럼 말캉하고 보드라워 손바닥의 미세한 지문들이 느껴질 정도였다. 선생님, 그럼 저랑 사귀잔 말은 농담이셨어요? 너무해요! 그때 옆에 있던 편집부 K가 정색하고 묻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의 말에 ‘네’라고 대답했을지 모른다. 첫눈처럼 하얀 벚꽃 잎들이 분분히 쏟아져 내리던 아득한 저녁이었으나, 이 또한 계획에 있던 일은 아니었다.

 

 

*

 

서울을 출발하기 전, 내비게이션에 도착해야 할 주소를 등록했다. 내비게이션은 곧장 최단거리를 지정해 사천까지 가장 빠른 길을 검색해 냈다. 반포대교에서 좌회전, 우회전, 다시 좌회전, 제한 속도 60에서 80까지를 준수하며 톨게이트에 진입하는 동안 속사포처럼 쏘아대는 여자의 목소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잠시 음악은 꺼 놓아야 했다. 고속도로에서 다시 고속도로로, 톨게이트에서 다른 톨게이트로 이어지는 주행, 혼자만의 ‘여행’을 어느 순간 수동형으로 바꾸어 버린 내비게이션은 구부러진 곡선을 빳빳하게 펴 직선으로 쪼개고, 이곳에서 저곳으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최단거리로 집단 이동시키고 있었다. 이제 국도를 헤매거나 잘못 들어선 길 때문에 엉뚱한 곳에 도착해 모험을 벌이는 이야기는 소설 속에나 존재할지도 모른다. 내비게이션이 삭제한 ‘느림’과 ‘우연’이 어쩜 우리 삶에 존재하는 수많은 행간의 진짜 의미일지도 모르는데도…….

그러나 내비게이션을 끄는 순간, 모든 게 뒤엉키기 시작했다. 이곳이 맞는 걸까, 아님 저곳이? 결국 우회전이 아니라 좌회전했어야 했나? 국도 여기저기를 헤매다 진입한 지방도로 위에선 진입 방향을 알리는 게시판을 보는 것도 쉽지 않았다. 결국 보이는 족족 휴게실에 차를 세우고, 사과나 배를 파는 상인에게 길을 물었다. 사람들마다 이야기하는 길이 제각각 다르고 방향도 달랐다. 하지만 점점 그 불규칙한 리듬이 마음에 들었다. 오늘 못 가면 내일, 내일 못 가면 모레 가면 그뿐이었다. 좁은 길을 가다 다시 큰길이 나오면 그쪽으로 방향을 틀고, 갓길에 차를 세워 2만5천분의 1로 축소된 지도 위에서 사천을 찾아보기도 했다. 새벽 3시에 출발했지만 이미 오전 11시 30분을 넘어서고 있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왕복하고 남을 시간을 길 위에 뿌려대고도 모자라, 나는 여전히 한 번도 보지 못한 길 위를 계속 달리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멍청한 짓이었지만 서른여덟에 이런 바보짓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나는 얼마간 안도했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휴게실 주차장에는 커다란 트럭 몇 대와 여객 버스 한두 대만 놓여 있었다. 버스 한 대가 주차 공간 네댓 개씩을 차지한 채 제멋대로 비스듬히 정차해 있는 모습은 이곳이 복잡한 서울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인지 실감케 했다. 화장실 앞 철제 의자에 앉은 늙은 상인은 턱을 괸 채 꾸벅대며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한 번 잠긴 귀는 시끄러운 트로트나 끔찍한 확성기 소리는 쉽게 걸러내는 모양이었다. 반쯤 열려 있던 화장실 문 앞마다 ‘손을 깨끗이!’라는 표어가 붙어 있었고, 거울 위에는 ‘기침이나 재채기는 가리고!’라는 또 다른 표어가 붙어 있었다. ‘다 드신 식기는 투입구에 넣읍니다.’라고 쓴 식당 안내문을 읽다가 나는 ‘넣읍니다’를 ‘넣습니다’로 고쳤다.

휴게실 식당에서 번호표를 들고 뜨거운 국수를 받아 들었다. 혼자 밥을 먹을 땐 늘 오른쪽에 소설을 두고 읽는 버릇 때문에 책 몇 권도 올려놓았다. 번역을 검토 중인 스페인 작가의 여행기와 소설들이었다. 천천히 국수 국물을 떠 넣었다. 헛헛했던 속에 따뜻한 국물이 들어가자 긴장했던 근육이 이완되는 것 같았다. 젓가락으로 부드러운 국수 면발을 건져 막 입에 넣으려고 할 때, 커다란 쟁반을 든 앳된 얼굴의 여자가 조심스레 앞에 앉았다. 휴게실 주차장처럼 전후좌우 할 것 없이 텅텅 빈 자리를 놔두고 하필 내 맞은편이었다.

저기요…… 혼자시죠? 여행하시나 봐요? 어디로 가세요? 막 자리를 옮기려던 순간 여자가 내게 말을 걸었다. 연이어 세 개의 질문을 내뱉은 여자는 접시 가득 담은 김밥과 만두를 내 앞에 불쑥 내밀었다. 드실래요? 식어서 좀 맛이 없긴 하지만. 쥐고 있던 젓가락이 X자로 휜 걸 보니 어지간히 젓가락질을 못하는 모양새였다. 날씨에 어울리지 않게 두꺼운 외투를 입은 그 여자를 바라보다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 앞에 놓인 만두는 식어서 이미 겉 표면이 하얗게 말라 있었다.

비어 있는 자리를 놔두고 굳이 사람이 있는 곳을 찾아 앉는 무신경함이나, 다른 사람의 형편을 멋대로 짐작해 떠드는 것이나, 드라마 줄거리는 줄줄 꿰고 있어도 책 한 줄 읽지 않을 것 같은 얼굴만으로 나는 내 앞에 앉은 여자를 다 알아 버린 기분이었다. 그때 여자가 내 얼굴을 바라보며 다시 말을 꺼냈다. 혹시…… 어디까지 가세요? 나는 고기만두와 단무지를 한꺼번에 밀어 넣은 여자의 불룩한 볼을 쳐다보았다. 죄송한데요. 저 좀 태워 주시면 안 돼요? 꽤나 절박한 얼굴이었다. 여자는 누군가 자길 보고 있는 것처럼 자꾸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 진짜 쪽팔린데, 남자친구가 절 버리고 날라 버리는 바람에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구요, 나쁜 새끼! 차비는 드릴게요. 제가 진짜 급해서 그러거든요. 저 돈도 있어요. 여자는 황급히 주머니를 뒤지더니 꼬깃꼬깃한 만 원짜리 지폐 두 장을 보여 주었다. 만 원짜리 두 장이 그녀의 전 재산이라면, 또 여자가 가야 할 곳이 서울이라면 편도 교통비로도 모자랄 돈이었다.

사천까지 갈 거란 말은 하지 않았다. 여자의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날 버리고 날랐다’란 말은 ‘나를 내려 두고 사라졌다’란 말로 고쳐야 했다.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왜 안 돼요? 그냥 빈자리에 태워 주시면 되잖아요! 차표를 쥐고 있는 승객이 운전기사에게 항의를 하듯 갑자기 여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도 어이가 없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다시 여자의 눈빛이 애면글면해졌다. 정말 태워 주시면 안 돼요? 진짜 빨리 나가야 돼서 그래요. 한 번 만요!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여자를 향해 다시 고개를 저었다. 휴게실에서 히치하이킹 하던 여자는 그제야 빈 접시를 들고 일어났다. 그녀는 또 다른 포획물이 없는지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나는 반납대 쪽으로 가기 위해 옆에 놓아둔 보고 있던 소설책을 왼쪽 겨드랑이에 끼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때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한껏 풀이 죽어 있던 여자의 얼굴이 일순간 일그러졌다. 대체 그런 걸 왜 읽으세요? 정말 형편없는데. 여자는 분명 내 팔에 끼어 있던 소설책을 보고 있었다. 그 남자가 쓴 소설에 왜 섹스 신이 없는 줄 알아요? 내가 보기엔 그 작가는 게이에요. 사람들은 마초라고 생각하지만 전 그 사람을 잘 알거든요. 분명해요. 제가 가진 2만 원을 걸고 맹세해요. 그리고 그 책 마지막 페이지에 오타도 있다구요!

여자가 가리킨 것은 분명 H의 첫 번째 소설집이었다.

 

여자에겐 늘 시간이 많았다. 어떤 날은 시간이 믿을 수 없을 만큼 느리게, 또 어떤 날은 너무 빠르게 간다고 했다. 시간이 느리게 간 날은 하루 종일 책을 세 권도 더 읽게 된다고, 책 속의 따옴표나 쉼표의 숫자까지 외워 버릴 지루한 날도 있다고 했다. ‘지루하다’란 말을 할 때 여자의 표정은 콧구멍 두 개로 숨 쉬는 것까지 지루해서 돌아 버릴 것 같단 얼굴이었다.

왜 형진이 매일 데리고 자던 리얼 돌(Real Doll)이 진짜 여자가 되는 장면 있잖아요. 축 늘어졌던 검정색 실이 음모처럼 부슬부슬 일어나는 거. 그거 홀랑 깨요. 여자는 조수석에 있던 자일리톨껌을 마음대로 꺼내 질겅대며 쉬지 않고 떠들어댔다. 인형에 부착된 실리콘 질을 못 쓰게 만드는 바람에 망해서 업소 문 닫게 생겼다고 인형방 업소 주인이 세상의 변태들에게 저주 퍼붓는 장면도 있잖아요. 크하하. 어찌나 웃기던지. 실리콘 질을 남자들이 이빨로 물어뜯고 담뱃불로 지지고 후벼 파는 거, 일반 사람들은 잘 모르거든요. 근데 언니도 이 소설 읽으셨어요? 호칭은 어느새 ‘저기요’에서 ‘언니’로 바뀌어 있었다.

H 팬이라면서 아까는 왜 재미없다고 말했어요? 나는 여자에게 물었다. 여자는 너무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깔깔대더니 정색을 하고 내게 말했다. 재미있다고 말하는 건 아무 소용없어요! 남들이 다 재미있다고 할 때, 나 혼자 재미없다고 말해 주는 센스. 실은 그게 눈에는 더 확 띄거든요. 이래봬도 제가 인터넷에선 꽤 유명한 악플러랍니다.

여자는 뭐가 그리 웃긴지 킥킥대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마치 귀에는 보이지 않는 MP3라도 꽂은 것 같았다.

충동적으로 여자를 차에 태운 건 소설 이야기가 나온 후였다. 여자의 입에서 H의 세 번째 소설 『낙오자』의 에피소드가 흘러나왔을 때, 어쩜 이 여자가 나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단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그런 예감은 꼭 틀린 게 아니어서 “예전에 출판사에 오타 수정하라고 항의 메일 보낸 적도 있어요!”라는 말이 나왔을 땐 운전을 하다 말고 머리가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언젠가 100부 한정 사인본을 판매했을 때, ‘H의 사인이 아니니 책값을 당장 반환해 달라’란 터무니없는 항의 전화를 받았던 기억도 떠올랐다. 아무리 그것이 H의 진짜 사인이라고 얘기해도, 끝까지 아니라고 우겨대는 독자 앞에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근데 언니, 진짜 말 없으시다. 제가 왜 휴게실에 남겨졌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제 남자 친구 얘기 안 들어 보실래요? 여자는 억지로 웃는 걸 포기했는지 이내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물론 ‘궁금하지 않아’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말을 꺼내기도 전에 어두운 터널이 연달아 이어졌다. 사천행을 알리는 표지판 두어 개를 더 지나갔다. 설령 여자에게 내가 사천에 가는 진짜 이유를 말해 준다 한들 그녀가 이해할 수 있을까. 나는 껌 뱉을 종이를 찾다가 찢어진 영수증에 껌을 대충 말아 차 안에 버리는 여자를 바라보며 독백하듯 중얼거렸다.

사천에 왜 가냐고. 머리 자르러 가. 머리가 무겁거든. 난 늘 머리가 무거웠어. 머리를 잘라 배낭에 넣고 다니면 얼마나 좋을까. 자동 조립식 인형처럼 머리만 떼어 개수대에 넣고 헹구면 얼마나 시원할까. 난 늘 그런 생각을 했었어. 머리가 무거우니까. 그러니 자를 수밖에 없다고. 머리통을 자를 순 없으니까 머리카락이라도 잘라야 하는 거잖아. 너 따위가 이해할 수 없는 세상도 있어.  

터널을 지나자 뺨 위로 와랑와랑 햇볕이 쏟아졌다. 무표정하던 여자가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제가 한번 맞춰 볼까요? 퀴즈라면 저도 일가견이 있거든요. 언니는 아마도…… 사천에 애인을 만나러 가는 걸 거예요.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트렌치코트를 입고, 이렇게 머플러를 두른 여자라면 애인을 만나러 가는 걸 거예요. 전 그냥 그렇게 생각할래요. 그 애인은 키가 크고 잘 생겼는데 언니보다 나이가 많아요. 언니는 그 남자를 사랑하지만 그 남자는 언니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걸 까맣게 모르고 있어요. 그래서 언니는 의기소침해져 있지만, 저 같은 길 잃은 방랑자를 태워 줄 만큼 친절한 사람이죠…… 친절이 몸에 밴 사람들에겐 특유의 미소가 있어요. 얼굴의 특별한 근육은 연습으로만 만들어지거든요. 밥을 먹을 때 책을 읽는 사람들은 책이 친구인 경우가 많아요. 그런 사람들은 사람보다 책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외로운 사람들이죠. 저처럼요.

나는 힐끔 여자를 바라봤다. 여자는 이제껏 목까지 올리고 있던 외투 지퍼를 천천히 내리고 있었다. 더운데 좀 벗어도 되겠죠? 여자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윗옷을 벗는 동안, 나는 그녀의 자주색 조끼 위에 달린 명찰을 보았다. XX 휴게실 조명희. 여자는 한숨을 쉬더니 창문을 잠시 열었다.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과 명찰을 건드렸다. 전 그냥 아무 버스 정류장에 내려 주세요. 편하실 대로요. 여자가 창문에 얼굴을 내밀며 머리끈을 풀었다. 펄럭거리는 그녀의 머리카락이 외투의 모자 속에 움직이는 조형물처럼 가득 담겼다.

실은…… 애인 같은 거 없어요. 유명한 악플러란 애기도 뻥이에요. 사실 애인 비슷한 게 있긴 했는데 헤어진 건 아니고, 차인 건지도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그 애는 주유소에, 전 스낵 코너에서 근무했었는데 싸우고 나서 그 애가 얼마 전에 일을 그만뒀거든요. 둘이 휴게실에 딸린 직원 기숙사에서 생활했었어요. 주중에는 휴게실 공원 뒤에서 같이 데이트도 했구요. 여자는 잠시 긴 한숨을 쉬더니 말을 멈추었다.

휴게실은 사람들이 쉬러 오는 곳이잖아요. 근데 전 그곳이 일터니까 하루 종일 서서 쉬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볼 수밖엔 없잖아요. 언니는 그게 어떤 기분인 줄 아세요? 여자는 위험할 정도로 차창 밖으로 왼손을 늘어뜨리며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 망설이듯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혹시 호두과자 좋아하세요? 여자가 호두과자의 갈색 표면을 하얗게 비추던 얇은 시스루 종이를 천천히 벗겼다. 잘 구운 동그란 호두과자가 그녀의 손안에 있었다. 전 세상에서 호두과자가 제일 싫어요. 정말이에요. 여자가 희미하게 웃었다.

휴게실에 오래 근무하다 보면요. 휴게실에 들르는 사람 얼굴이나 차만 봐도 어디로 갈 건지 알 수 있거든요. 트럭을 타고 온 운전수들은 대부분 부산에 가구요, 진주로 가는 차들은 대개 자동차들이구요. 관광 온 사람들은 이런 작은 휴게소엔 잘 들르지 않거든요. 여긴 편의점도 없고 프랜차이즈 커피숍도 들어오지 않았구요. 굳이 이런 곳에서 차를 세우고 혼자 국수를 사 먹는 사람이라면 관광지가 많은 통영이나 거제로 가는 게 아니라, 멀지 않은 사천에 가는 거예요. 참, 언니…… 사천에 주유소가 많다는 거 알고 계세요? 그 애도 근처 주유소에서 근무한 적이 있거든요. 사천은 정말 주유소의 도시에요. 톨게이트에 진입하면 수십 개가 넘는 주유소들이 길 양옆에 은행나무처럼 우거져 있거든요. 누군가 거기에 불이라도 지르면…… 정말 모든 게 다 터져 버리겠죠? 불꽃쇼 같을까요?

여자의 눈은 불이 뿜어져 나오듯 호화로운 조명등이 설치된 분수의 물줄기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 열기를 식히려는 듯 그녀는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어 한참 동안 바람을 맞았다. 그녀는 한 손에 꼭 쥐고 있던 호두과자를 내게 내밀었다. 버린 줄 알았던 껌 종이는 그녀의 왼쪽 손안에 꼬깃꼬깃 접혀 들어 있었다.  

 

 

*

 

햇볕이 차 한 대 지나가지 않는 앙상한 길을 데우는 동안, 배를 드러내고 누워 있던 개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며 일어나 누군가 밤새 게워 낸 토사물을 뾰족한 혀로 열심히 핥아대고 있었다. 아마도 아내가 사 준 외투나 새 구두를 놓고 갈 수 없으니 속안의 것을 전부 쥐어짜 남겨 두고 사라진 것인지 모른다.   

 

매주 화요일은 쉽니다.

 

미용실 불은 꺼져 있었다. 독일빵집 옆, 문 닫힌 미용실 앞에 서서 제멋대로 돌아가는 회전식 입간판을 바라보았다. 밑이 삭아빠진 간판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왼쪽으로 돌다가 어느 순간 오른쪽으로 방향을 바꿔 제멋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1995년 강묘희 원장 세계 미용대회 동상 수상. 최고의 장인이 여러분을 품격 있게 모십니다.’ 권투 챔피언의 벨트만큼 큰 사진 속 동상 트로피는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고데기로 말아 동그랗게 부풀린 올림머리는 커다란 박을 뒤집어쓴 모양새였다. 원장인 듯한 나이 든 여자가 모델인 듯한 젊은 여자와 웃고 있는 간판 속 사진은 지나간 과거의 한때를 간신히 붙들고 있는 듯 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14년 전 간판 사진 속 강묘희 원장은 지금 어떤 모습일까. 뱃속의 겨자씨만 하던 아이를 조금씩 키워 결혼시키고, 예식장 첫 번째 줄에 앉아 질금질금 비어져 나오는 눈물을 찍어 내고, 그 아이의 아이가 터뜨린 첫울음 소리를 듣고 또 울었겠지. 그녀는 어느새 겁 많은 어린 손자의 머리카락을 눈 깜짝 할 사이 잘라 주는 도통한 미용사 할머니가 되었을까. 만기된 보험을 타고, 그 보험금으로 아들의 사업 밑천을 대 주고, 추석이면 도시에서 내려올 아이들이 입을 잠옷과 새 칫솔을 숫자대로 사  놓는 노인이 됐을까. 문득 14년 전의 내 얼굴이 떠올랐다. 출판사에 입사한 막내 편집자가 자신의 책을 출판해 줄 출판사를 찾아다니던 H의 젊은 얼굴을 마주하던 그때가.

가방에서 담배 한 대를 꺼냈다. 나는 시골 촌부처럼 나무 그늘 아래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빨아 물었다. 한숨 같은 연기가 열심히 바닥을 핥고 있는 건너편 개에게 도달할 수 있을지 가늠하면서. 새벽녘 누군가의 구토가 다른 누군가의 점심이 될 수 있단 생각에 자꾸 눈물이 나려 했다.

여자를 버스 터미널에 내려 줬을 때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고 나를 바라보았다. 고마워요. 정말이에요. 그녀는 주머니 속에서 꼬깃거리는 2만 원을 꺼내 내게 내밀었다. 휴게실에 들르게 되면 호두과자 먹으러 오세요. 주임님 몰래 많이 드릴게요. 차에서 내리려는 여자에게 돈을 받는 대신 H의 책을 건넸다. 만약 오타가 보이면 책 뒤에 있는 메일이 아니라 여기로 보내 줘요. 나는 여자에게 명함을 건넸다. 이건 H의 첫 번째 책이고 초판본이에요. 희귀 사인본이기도 하고. 정말이요? 그녀의 눈이 하루에 1000개씩 굽는다는 호두과자만큼 커졌다.

여기까지 태워 준 것도 고마운데, 이런 선물까지! 너무너무 고마웠어요. 그녀는 내가 건네준 책을 봉긋하게 솟아오른 자신의 가슴에 꼭 끌어안았다. 삼천포 빠진 것 같은 날이었지만 재밌었어요. 즐거운 여행 되세요! 정말 즐거운 여행 되세요! 휴게실 직원의 고객 매뉴얼에 적혀 있기라도 한 듯, 그녀가 반복해서 ‘즐거운 여행 되세요’라고 말할 땐,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흘렀다.

참, 언니. 사천이란 지명이 원래 삼천포였던 건 아세요?

여자가 책을 든 채 눈을 찡긋대며 손을 흔들었다. 그녀의 손이 아니라 H의 책이 나를 향해 마지막 인사를 하는 듯 이리저리 흔들렸다. 내가 만든 첫 번째 책, 내가 만든 첫 번째 작가의 책, 내겐 첫 남편이었던 남자의 첫 번째 소설, H의 의미는 내게 그런 것이었다. 그러므로 내가 H였다면 아마도 건네준 그 책의 첫 장에 사인 대신 이렇게 썼을 것이다.

 

조명희님께.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그런데 어쩌지요.

저는 게이가 아닙니다.

다음 번 작품에선 섹스 신이라면 원 없이 읽으실 수 있을 겁니다.

2009년 10월 15일.  

 

H가 내게 말했었다. 차갑지 않은 건 수박이 아니라고. 수박이란 모름지기 시원해야 한다고, 자신이 좋아하는 건 ‘그냥 수박’이 아니라 ‘차가운 수박’이라고 말이다. 넌 내게 ‘차가운’이란 형용사야. 그런데 이젠 차갑지 않아서 견딜 수가 없어. 그건 작가가 편집자에게, 소설 속 여자가 소설 속 남자에게 할 수 있는 ‘수사’일진 몰라도, 남편이 아내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내가 얼마나 뜨거운 사람인지, 어디까지 뜨거워질 수 있는지 알았더라면, 내게 차갑고 시원한 따위의 말은, 더구나 너는 스스로 존재하는 ‘명사’가 아니라 누군가를 치장해 주는 ‘형용사’일 뿐이란 말 같은 건 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 보여 주지 못한 건 내 잘못이며, 전부 보길 원치 않은 건 그의 잘못이므로 이것은 우리 모두의 실패일 것이다. 아무리 그릇의 짝을 맞추고 황실 장미가 새겨진 커피 잔을 계절마다 사들여 유리 장식장 안에 넣어 놓는다 해도, 우리는 행복해서 죽을 것 같은 표정의 황실 귀족들처럼 살 수는 없으니까.  

핸드폰의 전원 버튼을 누른다. 미세한 진동이 느껴지고, 기지개를 켜듯 묵묵히 잠겨 있던 과거의 메시지들이 밀려온다. 12개의 메시지. 28통의 부재중 전화. H의 메시지가 3개 남겨져 있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얘기해야 할까. 당신의 일곱 번째 소설은 무엇부터 고쳐 나가야 하는 걸까. 소설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내 얘길 전부 없애 달라고 할까, 당신의 첫 번째 이혼은 8월 10일이 아니라 9월 14일이었다고, 당신의 그 고리타분한 문장들은 전부 삭제해야 한다고, 소설의 첫 번째 문장인 ‘이혼을 했다’는 ‘이혼을 당했다’로 고쳐져야 함을, 분명한 어조로 말해야 하는 걸까.

늘 ‘그럭저럭, 겨우겨우’라고 말해 왔지만 한 번도 희망 비슷한 것을 포기한 적은 없었다. ‘잘 될 거야, 괜찮아지겠지, 사실 꼭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라고 중얼거렸지만 거기엔 늘 비릿한 바람이 담겨 있었다. 다시 담배를 꺼냈다. 바람이 불고, 간판이 찌걱거리며 내 쪽으로 뱅글 돌았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휴게실 여자가 건네준 호두과자를 쥐었다. 그리고 천천히 오후 네 시의 햇살 같은 투명한 시스루 종이를 벗기고, 입 안 가득 호두과자를 넣어 우물거렸다. 입 안에 왈칵, 침이 고였다. 닫힌 미용실 간판은 여전히 계속 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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