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아직은

 

아직, 아직은




이상섭




벨 소리는 끝이 없다. 지긋지긋하게 울리는 저 낡은 벨 소리. 돈이 있다면 당장 저것부터 바꿔 버리고 싶다. 하지만 그것마저 쉽지 않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다. 딩동딩동. 벨이 다시 울린다. 간밤에 마야가 난리를 피우는 바람에 지칠 대로 지친 상태다. 지금 심정이라면 일어나고 싶지 않다. 아니, 그냥 이대로 영원히 숨이라도 멎었으면 좋겠다. 그 와중에도 벨은 끈질기게 운다. 끈질긴 게 보나마나 103호 여자인 모양이다. 105호는 이사를 갔으므로 비어 있는 상태다. 마지못해 몸을 일으킨다. 103호 여자는 마야처럼 집에만 처박혀 지내는지 틈만 나면 초인종을 눌렀다. 누를 때마다 방문 이유는 다양했다. 냄새 때문에 벨을 눌렀고, 괴성 때문에 미치겠다며 찾아오기도 했다. 심지어 인기척이 없어도 호기심을 참지 못해 현관 앞을 서성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여자는 오늘도 자신의 말을 쏟아 놓기 전에는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누구세요? 혹시나 싶어 물어도 대답이 없다. 단단히 화라도 난 것인가. 현관문을 연다. 옆집 여자가 아니라 안면이 있는 관리소 직원이 서 있다. 변함없이 손에 연장통을 쥔 채다. 며칠 전에 보낸 계고장은 받으셨죠? 그녀는 알고 있다. 티브이 위에 먼지처럼 각종 고지서들과 독촉장이 쌓이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관리비마저 석 달째 밀려 있다는 것을. 이놈의 세상이 어떻게 된 판인지 갈수록 연체 가정이 늘어나요. 관리실에서 아예 학을 뗄 정도니 말이우. 반쯤 벗겨진 남자의 이마가 번쩍인다. 알겠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내일까지 납부할게요. 남자가 연장통을 열다가 미간을 찌푸린다. 그럴 거면 진작 납부를 하셔야지. 안 되면 한 달치라도 납부하던가. 미안해요, 집에 환자가 있어서 시간을 낼 수 없었어요. 마야가 듣고 있기라도 한 듯 비명을 지른다. 남자가 열린 문틈으로 집 안을 기웃거린다. 그러더니 남자는 한동안 입을 열지 않는다. 대신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두 눈만 씀벅일 뿐이다. 점점 마야의 비명이 커진다. 이윽고 결심한 듯 남자가 입을 연다. 그렇더라도 이런 식으로 사정 다 봐 줬다간 내 모가지가 날아가요. 남자가 두꺼비집으로 다가간다. 일단 단전 작업만 하고 갈 테니 그리 아슈. 이것도 다 치매에 걸린 우리 어머니 덕이우. 남자가 작업을 서두른다. 내일까지 관리비를 납부하지 않으면 단수 작업을 하러 남자는 또 찾아올 것이다. 그녀가 현관문을 닫는다. 잠시 뒤 형광등이 툭, 꺼진다.


으으으. 마야의 비명이 시작되고 있다. 이제 시작했으므로 지칠 때까지 저 소리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황급히 베란다로 나가 창문을 닫는다. 비명이라도 새나갔다가는 옆집 여자에게 초청장을 보내는 꼴이다. 안방으로 들어오는 데도 마야의 비명은 계속된다. 제발 소리 좀 그만 낼 수 없어? 너만 괴로운 줄 알아? 피차 괴로운 건 마찬가지야. 근데 왜 너만 힘든 척해? 그녀는 담뱃갑을 쥐어 든다. 그런 다음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문다. 그녀가 언제부터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그게 집에서 풍기는 퀴퀴한 냄새 때문이었는지, 그가 떠난 다음부터였는지. 그 정도로 그녀의 기억은 가물가물해졌다. 하지만 분명한 건 있다. 끼니를 굶더라도 담배는 상비약처럼 준비해 둬야 한다는 것. 담배가 없으면 하루도 견디기 힘들다는 거다. 의료용 침대에 누운 마야의 입가는 침으로 젖어 있다. 입 모양 또한 볼거리를 앓는 사람처럼 튀어나왔다. 마우스피스 탓이다. 만약 마우스피스를 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또 한바탕 자해 소동이 벌어졌을 것이다. 마우스피스는 홈쇼핑을 통해 구매했다. 서서히 굳어 가는 몸. 어쩌면 마야 자신도 그것 때문에 괴로울 것이다. 그랬기에 처음엔 살고 싶다고, 살고 싶다고 울면서 발버둥을 쳤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는 못 죽어서 발버둥을 친다. 아니다. 마야의 다리는 굳어 가고 있으므로 움직일 수 있는 건 머리뿐이다. 그래서 침대 난간에 제 머리를 들이박는다. 횟수는 마야의 얼굴에 난 생채기가 말해 준다. 어쩌면 고개마저 움직이지 못하는 날이 올 것이다. 마야의 몸은 그의 의지와 달리 점점 경직되고 있으므로.


언제부터 이런 증세가 있었나요? 의사가 고개를 갸우뚱거리기며 물었다. 다니던 회사의 창고에서 사고를 당한 다음부터요. 쌓아 놓은 전자 제품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면서 동생의 몸을 덮쳤죠. 그래서요? 직원들은 비명 소리가 없어 사람이 깔린 것을 몰랐대요. 그래서 구조에 더 늑장을 부렸고요. 그게 척추 손상이 더 심해지게 만든 꼴이 되어 버렸군요. 그녀는 낮게 신음을 토했다. 하지만 다행입니다. 그나마 신경이 다 죽진 않았으니까요. 그럼 이제 어떡하나요? 글쎄요, 천천히 경과를 지켜보는 수밖에요. 의사의 말대로 경과를 지켜보았지만 헛일이었다. 보상비는 바닥났지만 진료비 청구서는 어김없이 날아들었다. 참다못해 할머니가 말했다. 긴 병에 효자 없다고 했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할머니의 말에 그녀가 되쏘았다. 그래도 죽은 건 아니잖아요. 내 손으론 절대 퇴원 신청 따윈 못해요. 저 아이 때문에 우리가 죄다 매달려 굶어 죽을 수는 없잖냐. 우리가 왜 죽어요? 동생이 뭔 살인자예요? 그녀의 말에 할머니는 가슴을 싸쥔 채 한숨을 내몰았다. 그녀는 믿었다. 정성을 다하면 동생은 언젠가는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서리라고. 하지만 그녀의 바람은 철저히 빗나갔다.


불행은 한꺼번에 온다고 했던가. 동생의 병상에서 계약 해지 통보를 받았다. 매서운 구조 조정의 칼바람이 그녀가 다니는 은행에도 불고 있던 때였다. 계약직이었던 그녀는 하소연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그가 있었으므로 다른 여직원보다 덜 섭섭했다. 그는 장래를 약속한 사이였으므로, 아니 은행의 투자 업무 파트에서 열심히 펀드 매니저로서의 경력을 쌓아 가고 있었으므로, 불행 중 다행이라고 여겼다. 세상에 모든 과일이 다 과수원에서 익는 건 아니잖아. 힘내! 까짓 거 네 실력이면 다른 직장 못 구하겠어? 그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던가. 하지만 그의 말이 거짓임을 깨닫는 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바다가 보이는 집이면 좋겠어. 퇴원을 앞두고 모처럼 동생이 웃으며 말했다. 마치 옛집 앞바다를 다시 바라보게 된다면 자리를 털고 일어날 것처럼. 하지만 눈만 뜨면 보이던 바다는 그들에게 금지 구역이었다. 그들이 이사할 곳은 정해져 있었다. 비록 지대가 높았지만 베란다에 서면 손수건만한 바다를 볼 수 있다는 게 다행이긴 했다. 게다가 복도식 낡은 아파트 일층이라 비상시를 위해서도 그리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 다만 그녀가 바라보아야 할 곳이 북향이라는 점만은 어쩔 수 없었다. 하긴, 알았더라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담배를 물고 베란다로 향한다. 문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이 차가운 바람이 달려든다. 바다에 떠 있는 대형 크레인들과 어선들이 보인다. 눈을 조금 더 들면 아득하게 펼쳐진 망망대해. 그녀는 그 바다를 보며 수많은 길을 만들었다 지웠다. 부동산 사무실의 뚱보 여자는 수평선을 볼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수평선을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바람을 맞자 정신이 살아나는 기분이다. 발밑에 놓인 피라칸사스 분재가 보인다. 언젠가 동생의 월급날 사 들고 왔던 화분. 그때 동생이 말했던가. 나무의 꽃말이 알알이 영근 사랑이라고. 그러나 아무리 꽃말이 좋아도 이젠 그녀의 맘에 들지 않는다. 어쩌면 그건 돌덩이를 품은 나무의 형상 탓이 클 터였다.


통장의 잔고는 이미 바닥이다. 동생의 의료용 기저귀며 파우더도 사야하고, 밀린 관리비며 각종 고지서의 대금도 납부해야 한다. 하지만 통장을 보니 눈앞이 아득하다. 그렇다고 이대로 있을 수도 없다. 싫지만 봉제 공장 사장을 만나는 것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녀는 천천히 마야의 침대로 향한다. 동생이 눈치 챘는지 또 괴성을 지르기 시작한다. 그녀는 익숙하게 동생의 몸을 옆으로 세운다. 예전 같으면 마야를 침대 밖으로 안아서 옮겼을 것이다. 하지만 먹고 운동을 하지 않는 몸은 무게만 늘어갔다. 게다가 이젠 나무토막처럼 굳어져 움직일 엄두도 못 낼 정도다. 그녀는 바지를 벗기고 기저귀를 빼낸다. 배변이 뒤섞인 기저귀에서 울컥 냄새가 솟구친다. 흡, 그녀도 모르게 숨이 멎는다. 역한 냄새를 맡을 때마다 정말이지 마야의 소원대로 해주고 싶다. 하지만 성기를 볼 때마다 생각이 달라지곤 한다. 이게 살아난다면 다른 것도 회복될 수 있으니까. 버릇하던 대로 젖은 수건으로 성기를 닦는다. 손길이 스칠 때마다 벌떡 일어서곤 하던 성기는 이전 같지 않다. 그녀는 그게 더 두렵다. 식물도 환경이 나빠지면 위기를 느낀 나머지 꽃을 틔우는 것처럼 마야도 그런 것일까. 동생의 입에서 비명이 터진다. 그녀는 알고 있다. 같은 소리를 내지만 그게 어떻게 감정의 차이를 드러내는지를. 그녀는 부러 성기 주변을 닦는 척 그것을 자극한다. 그런 다음 봉제 공장 사장의 요구처럼 위아래로 쓰다듬기도 한다. 후회하지 않을 멋진 사랑을 하고 싶다던 마야. 그 사랑의 욕망은 대체 어디서 솟아난 것일까. 여성이 가슴으로 사랑한다면 남성은 주름 주머니로 이뤄진 고환과 이곳이 아닐까. 비록 몸은 사위어 가지만 끊임없이 정액을 만들어 내는 성기. 어쩌면 여기가 진정한 남성의 실체일지 모른다. 손바닥에 끈적이는 액체가 묻어난다. 벌써 사정을 한 모양이다. 예전처럼 푹푹, 허공을 향해 쏟아내던 그 힘이 그립다. 마야가 그런 힘을 되찾았으면 좋겠다. 천천히 성기를 닦는다. 동생의 입에서 신음이 가라앉고 숨소리도 가늘어진다. 이제 마야는 다시 잠들 수 있을 것이다, 몇 시간 동안은 편안하게.


그녀의 가슴을 훔친 건 그가 아니다. 마야다. 어릴 적부터 마야는 이상한 습관을 지니고 있었다. 아빠와 엄마가 이혼한 이후부터였을 것이다. 마야는 그녀의 품만 파고들었다. 할머니의 품은 죽어라 싫다고 했다. 막 돋기 시작한 그녀의 가슴을 만지작거릴 때마다 심한 통증이 몰려왔다. 하지만 참았다. 뻑 하면 울어대는 동생을 울리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런 마야가 언제부터인가 그녀의 가슴 대신 제 성기를 움켜쥐고 잠들었다. 바지춤에 손을 넣지 않고는 잠들지 못할 정도였다. 그녀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동생이 뒤척거릴 때마다 자신의 손을 바지 속으로 밀어 넣어 주었다. 그런 어릴 적 습관을 마야도 잊지 않은 모양이었다. 괴성을 지를 때마다 바지춤의 성기를 만져 주면 자연스레 비명은 멎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마야는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다. 그런 탓에 꽤 오랫동안 성기를 주물렀을 것이다. 깜빡 잠이 들었던가. 그녀의 손바닥이 축축하단 걸 깨달았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것과 똑같은 정액이었다. 놀라운 것은 마야는 그런 사실도 모른 채 아이처럼 쌔근쌔근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는 점이다. 이후 그녀는 젖은 수건으로 마야의 몸을 닦을 때마다 부러 성기를 자극하곤 했다. 마야의 편안한 잠자리를 위해.


큰길로 접어든다. 도로를 질주하는 차량의 빠른 속도에 현기증이 날 정도다. 햇살도 눈부시다. 그녀의 눈앞에 사진관 간판이 보인다. 그녀는 잠시 망설인다. 그러다가 곧장 사진관을 향해 걷기 시작한다. 인기척이 나자 주인남자가 소파에서 졸다가 눈을 뜬다. 혹시 이렇게 작은 사진도 확대 가능한가요? 사진을 받아 쥔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사진이 너무 낡았군요. 게다가 너무 어릴 때 사진이구요. 남자는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본다. 순간, 그녀가 숨긴 침묵이 읽힐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녀는 시치미를 떼고 입을 연다. 어릴 때 동생의 모습을 간직하고 싶어서요. 너무 귀엽잖아요. 안 그래요? 아, 네. 보아하니 지금쯤 멋진 청년이 되었겠네요. 네, 너무 멋져서 괜히 제가 질투가 날 정도로요. 남자가 살풋 웃음을 짓는다. 언제쯤 찾으러 오면 되죠? 한두 시간이면 되니까 이후로는 언제든지요. 은행에 못 들러서 그런데 혹시 찾으러 올 때 돈 드려도 되죠? 남자의 눈이 커진다. 그녀의 입성에서 지독한 가난 냄새를 맡은 걸까. 남자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입을 연다. 사실 요즘은 디카 때문에 손님이 없어놔서요. 꼭 찾아가기야 한다면 굳이 선불 받을 필요도 없죠, 뭐. 그녀는 시위하듯 부러 손목을 들어 시각을 확인한다. 아닌 게 아니라 약속 시간이 임박하다. 서둘러 몸을 돌려 세운다. 출입문 손잡이를 쥐는 순간 남자가 소리를 지른다. 잠깐만요! 그녀가 힐끗 뒤돌아본다. 설마 영정 사진으로 쓸 건 아니죠?


나마저 짐이 되면 안 되는데, 안 되는데. 할머니가 가슴을 싸쥔 채 말했다. 할머니가 왜 짐이야? 그깟 숨 쉬는 게 힘겹다고 이상한 말 좀 자꾸 하지 마. 내 병은 내가 안다. 다만 죽어도 자는 잠에 살포시 가야 하는데, 그렇게 해줄라나 천지신명께서. 할머니가 끙끙 앓는 이유가 집 때문인 줄 알았다. 아버지의 목숨과 바꾼 집. 그런 집을 팔았으니 할머니는 마음이 아팠을 것이다. 그랬기에 할머니가 자리보전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그녀가 봉제 공장에서 돌아왔을 때, 할머니는 딴 세상으로 향한 다음이었다. 손자의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다가 숨이 졌는지, 마야 쪽으로 눈을 부릅뜬 채였다. 그래도 가족 중 유일한 자연사였다.


혈육 하나를 잃었다는 걸 마야도 안 것일까. 그때부터 마야의 괴성은 시작되었다. 처음엔 저러다 말겠거니 했다. 하지만 비명은 끊일 줄 몰랐다. 더군다나 낮에는 그렇다고 쳐도 밤에 듣는 마야의 비명은 스산하다 못해 무서울 정도였다. 견디기 힘들었다. 그에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같이 집에 와서 지내면 안 돼? 할머니도 없는 집에 혼자 있으려니 두려워. 그는 알겠다며 다음날 짐 보따리를 싸쥐고 나타났다. 그리고 이어진 그와의 동거. 동거를 통해 그야말로 그녀가 가장 원하는 체온을 가진 남자라는 사실을 알았다. 낮이면 마야를 위해 헌신했지만 밤이면 기꺼이 그를 위해 팬티를 벗었다. 하지만 몇 개월이 지나지 않자 그는 연락도 없이 늦기 시작했다.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도 있었다. 그는, 그녀의 것이 아니었으므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술에 취해 늦게 들어온 그가 가방을 꾸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고 싶진 않았어. 하지만 냄새 때문에 어쩔 수가 없어. 사무실에서 다들 나만 가까이 다가가면 코를 싸쥘 정도니까. 그녀가 할 말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미안해, 앞으로 청소 깨끗하게 할게. 퇴근하기 전에 방향제도 뿌려 놓고. 그가 한숨을 내쉬며 되받았다. 냄새뿐인 줄 알아? 마야의 비명만 듣고 있으면 이젠 내가 미치겠어. 진짜 내 동생 같았으면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로. 이러다간 내가 살인자가 될지 몰라. 그 순간 그녀는 깨달았다. 붙잡을 수도 같이 있을 수도 없는 사람이 그라는 존재임을.


거리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평온하다. 지금쯤 마야는 깨어났을 것이다. 어쩌면 배변으로 아랫도리는 짓뭉개졌을지 모른다. 은행 건물이 보인다. 한때 그와 근무했던 은행을 보자 그가 떠오른다. 그와 함께 지냈던 몇 개월. 이제 그때처럼 행복한 날을 맞을 순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보고 싶은 걸까. KTX역 앞까지 가려면 바쁘다. 지하철역으로 종종걸음을 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마음만 앞설 뿐 걸음은 느려질 뿐이다. 그가 보고 싶다. 미치도록 보고 싶다. 한 번 만이라도 얼굴을 본다면 소원이 없겠다. 전화라도 하면 그가 반겨 줄까. 알 수 없다. 그녀는 다시 걸음을 재촉한다. 조금 걷자 숨이 턱턱 막힌다. 이게 다 지나친 흡연 탓일 것이다. 늘 만나던 곳, 1시. 봉제 공장 사장의 문자 메시지는 지극히 건조하고 사무적이었다. 하긴 남자의 저간 사정을 생각해서라도 장소를 바꾸는 건 곤란하다. 그런 장소야말로 누구한테 들켜도 사업상 바이어를 만났을 뿐이라고 둘러대기 편할 테니까. 게다가 근처가 ‘모텔숲’이니 그곳보다 나은 입지 조건을 갖춘 곳도 없다. 봉제 공장에서 그녀가 만든 건 날개 달린 천사였다. 만들어진 천사에게 날개를 달 때마다 그녀는 천사가 되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크리스마스를 앞둔 시점이라 공장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랬으니 그녀에게도 일거리가 생겼을 것이다. 그녀는 마야를 목욕시키고 한 차례 정액을 뿌리게 한 다음 공장으로 향했다. 비록 파트타임이었지만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사장 또한 그녀의 저간 사정을 감안해 꼬박꼬박 수당을 챙겨 주었다. 시급 삼천 원에 불과했지만 그녀에게는 과분한 돈이었다. 주문이 밀려 밤늦게까지 일할 때도 있었다. 일하는 게 즐거워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였다. 더군다나 늦게 작업이 끝나면 사장은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주는 친절을 베풀기도 했다. 크리스마스이브에는 동생 약값에 보태라고 상여금까지 얹어 주기도 했다. 그런 그의 배려에 모처럼 살맛이 났다. 노동의 기회가 곧 행복임을. 그런데 무엇이 잘못된 걸까. 언제부터 잘못된 걸까. 사장의 자상함에 마음을 풀어 버린 게 화근이었을까. 아니다. 그이 때문일 것이다. 그의 결혼 소식만 듣지 않았다면 자신을 배려해 수당을 올려 주고 집까지 바래다주는 너그러움에도 마음을 열지 않았을 테니까. 그가 곁에 있었더라면 한밤중에 마야가 자해 소동을 벌였을 때 사장에게 전화를 걸지도 않았을 것이다. 혀가 반쯤 끊기고 입 안 가득 피를 머금은 동생을 업고 병원으로 내달리던 사람은 사장이 아니다. 그다. 나는 지금 그를 만나러 가는 것이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


왜 이렇게 늦은 거야! 봉제 공장 사장은 그녀가 차에 타자마자 불평부터 쏟는다. 미안해요. 볼일 좀 보느라고요. 그녀가 할 수 있는 말은 그뿐이다. 벌써 주위를 세 바퀴나 돌았다구. 내가 돈 놈도 아니고 말이야. 남자는 확실히 변했다. 처음 그녀를 안았을 때의 머뭇거림 따위는 온데간데없다. 그때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두려워하지 말라고. 당신의 가정을 뭉개지도 않고 업무에 지장을 주지 않겠다고 말이다. 따지고 보면 이런 악연도 마야 때문일지 모른다. 마야만 아니었다면 봉제 공장에 가지 않았을 것이고 이런 악연도 만들어지지 않았을 터이므로. 차는 골목골목을 돌아 모텔 주차장으로 들어선다. 주차장은 조명등이 어두워 마치 밤 같다. 그들과 같은 커플들이 많은지 주차장은 만원이다.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그가 서두르기 시작한다. 그녀를 안고서 잽싸게 그녀의 가슴을 움켜쥔다. 아파. 비명이 터질수록 악력은 더 세진다. 연애도 경제 활동이야. 효율적으로 시간을 즐기자구. 남자가 거칠게 그녀의 블라우스 단추를 풀기 시작한다. 남자가 차라리 그녀의 목을 움켜쥐었으면 싶다. 그러면 이 힘든 세상에서 놓여날 수도 있으므로. 사실 널 안 만나려고 하는데도 그게 잘 안 돼. 이제 마누라하고 하면서도 네 생각만 한다니까. 나이가 들어 그런지 몰라도 물도 말라 뻑뻑한 게 맛도 안 나고. 근데 넌 폭포잖아. 촉촉한 게 쪼아 주기까지 하니깐 네 속에 들어가 있을 때면 마치 천국 온 기분이거든. 빨랑 샤워하고 와. 오늘도 널 죽여 줄 테니까. 그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바지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한다. 연분홍인 것으로 보아 비아그라보다 성능이 좋다는 씨알리스인 모양이다. 남자가 저 약을 복용하기 시작한 건 그녀 때문일지 모른다. 나 좀 죽여 줘, 죽여 줘 해댔으니까. 다만 남자는 그 말을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남자는 약을 복용한 뒤, 약기운을 아끼듯, 아끼듯 사정을 참고 또 참는다. 그러다가 끝내 내장까지 쏟듯 으으윽, 소리를 지른 후에야 고꾸라진다. 그런 점에서는 이전의 그가 한결 부드러웠다. 사정 시 아, 하고 가벼운 소리를 냈으니까. 고꾸라진 다음에도 사장은 남은 약기운을 뽑아내려고 성기까지 빨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의 청을 무시할 수 없었던 건 그가 건네는 돈 때문이었다. 그것이 아니었다면 그를 만날 이유도 없으니까. 샤워를 하고 나오기 무섭게 남자가 달려든다. 생살이 찢어지듯 아프다. 이렇게 살아야 하나. 죽고 싶다. 정말 죽어 버리고 싶다.


야, 오늘은 왜 이리 뻑뻑해? 죽여 달라는 소리는 더 많이 하면서? 남자가 옷을 입으며 말한다. 시계를 다시 확인하는 걸 보니 꽤 바쁜 모양이다. 아니나 다를까 남자의 휴대폰이 울린다. 어, 여보. 나, 지금 호텔 주차장이야. 거래처 박사장 만나 차 한 잔 한다고 늦었네. 사장의 아내가 뭐라 하는지 남자는 한동안 휴대폰만 싸쥐고 있다. 그녀는 갑자기 마야처럼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다. 하지만 남자를 위해 숨소리조차 죽이고 만다. 이 사람, 돈 많이 버는 게 싫은 거야? 그래, 그러면 먼저 가 있어. 생일 선물 챙겨 갖고 곧 갈 테니까. 응, 그래그래. 남자의 말을 듣고 있자니 오늘이 마야의 생일임이 떠오른다. 아, 왜 생일을 깜빡했을까. 언젠가 얘기를 하다가 아내의 생일과 동생의 생일이 같아서 이것도 인연이라며 깔깔거리지 않았던가. 그는 넥타이를 매자 돌아선다. 그런데 오늘따라 지갑을 꺼내지 않는다. 순간 그냥 나갈까 싶어 두려움이 몰려온다. 관리소 남자가 떠오른다. 돈 좀 주고 가. 동생도 생일인 거 잘 알잖아. 남자가 눈을 치뜬다. 미친 년. 그럴 거면 왜 시체처럼 분위기도 띄울 줄을 몰라? 다음에 또 그럴 거면 재미없다, 너! 남자는 사정없이 문을 열고 나간다. 잠시 뒤 복도에서 뚜벅거리는 소리가 난다. 그녀의 입에서 욕지기가 터진다. 이렇게 떠날 거면 날 죽이고 떠나라구, 이 좆같은 새끼야! 남자의 발자국 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그녀는 알몸으로 일어서서 핸드백을 연다. 담배도 몇 개비 남지 않았다.


아파트 앞에 위치한 슈퍼가 보인다. 이사 온 후 유일하게 말을 터고 지내는 주인여자가 있는 곳이다. 그녀는 주저 없이 슈퍼 안으로 들어선다. 주인여자가 먼저 알은체를 한다. 어디 갔다 와? 시내에 볼일이 있어서요. 동생은 좀 어때? 만날 그렇죠 뭐. 주인여자가 혀를 찬다. 여자는, 남편이 뇌졸중으로 쓰러졌을 때 하늘이 노랬다고 했다. 더더욱 힘들게 만든 건 산소 호흡기였다고. 아무리 뇌사상태이지만 산사람을 제 스스로 죽이는 것 같아서 차마 그 결정만큼은 할 수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끝도 없이 들어가는 치료비가 쌓이면서 절망도 쌓여 가자 호흡기를 떼지 않을 수 없었다고. 주인여자가 한숨을 섞으며 말한다. 에이구, 아파 본 년이 아픈 년 마음 안다고 처자가 불쌍해서 어쩌누. 주인여자의 말에 딱히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도 그녀를 위해서 의료용 기저귀만큼은 갖다 놓던 양반이다. 그 작은 배려가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마울 뿐이다. 그녀는 담배 한 갑과 소주 한 병 그리고 초코파이에 성냥 한 통을 산다. 여자가 비닐봉지에 물건을 담으며 입을 연다. 참, 일감 구한다고 그랬지? 요 아래 파라다이스 모텔 청소하고 빨래할 사람 구한다는데 혹시……. 주인여자는 말해 놓고 보니 무안한지 표정이 굳어진다. 아니, 내 말은 그냥 오후에 잠시 나가 일하는 것도 보탬이 될까 싶어서 말이야. 하지만 입에서는 엉뚱한 말이 튀어나온다. 알아요, 그 마음. 생각해 보고 좀 있다가 연락드릴게요. 그녀는 비닐봉지를 쥔 채 밖으로 나선다. 동생이 알아서 빨리 뒈져 주든지 해야지 원, 결혼도 못하고 저게 무슨 꼴이람. 여자의 넋두리가 들린다. 못 들은 척 그녀는 걸음을 재촉한다. 맞은편에 관리소 남자가 보인다. 여전히 연장통을 쥔 채다. 또 어딘가 단전이나 단수 조치를 취하러 가는 모양이다. 남자가 힐끗 그녀를 훔쳐본다. 그녀는 못 본 척 집을 향해 걸음을 내딛는다.


여길 왜 찾아오고 난리야. 꼴도 형편없이 해 가지고? 그는 맞은편에 앉자마자 딱딱한 소리를 냈다. 그냥 지나가다가 전화해 본 거야. 결혼 생활은 어때? 뭐 그저 그렇지. 사는 게 재밌는 사람 어디 있냐? 그는 성가시다는 듯 퉁명스레 말했다. 옛날과 달리 턱살이 올라 중년 티가 났다. 당신 얼굴 한번 보고 싶었어. 그녀가 말하자 그는 얼른 주위부터 두리번거렸다. 당신이라니, 너 혹시 미친 거 아냐? 미안해, 입버릇이 돼서 그만. 그녀의 말에 그는 정색을 하며 되묻고 들었다. 근데 왜 바쁜 사람 불러낸 거야? 그녀가 대답한다. 너무 서두르지 좀 마. 지점장이면 한 시간 정도는 뺄 수 있잖아. 모르는 소리 마. 옛날 은행 분위기하고는 달라. 요즘은 카드며 펀드며 대출금 회수 때문에 피가 마른다구. 말을 하면서도 그는 안절부절 못했다. 그러더니 말 매듭을 짓듯 차갑게 쏘아붙였다. 왔으니 차나 한 잔 하고 가. 난 바빠서 먼저 일어설 테니까. 서두르는 게 봉제 공장 남자와 닮았다. 그게 아니라, 하다가 그녀의 말꼬리가 잘리고 말았다. 갑자기 그가 매서운 눈매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 뭐? 혹시 돈이 필요해서 온 거야? 그럼 내 대출 담당 직원에게 얘기해 놓지. 그게 아니라니까. 그냥 마지막으로, 얼굴 한번 볼까 싶어서 왔어. 그럼 얼굴 봤으니까 됐네, 뭐. 남자가 기어이 몸을 일으켰다. 마야가 보고 싶지 않아? 마야가 아주 보고 싶어 하는데. 남자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린다. 아직도 마야라고 부르는 거야? 게다가 내가 식물인간 같은 병신이나 볼 정도로 한가하다고 생각해? 너 정말 단단히 미쳤구나! 그녀는 미쳤다고 대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못했다. 대신 도망치듯 커피숍을 빠져나가는 그의 뒷모습만 오랫동안 지켜보았을 따름이었다. 그가 떠난 뒤에도 그녀는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설 수 없었다. 괜히 그에게 전화했다 싶었다. 하지만 곧 후회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잘 살고 있으므로, 얼굴을 봤으므로 다행이다. 마야도 결코 그의 불행을 원치 않을 것이다.


현관 앞에 103호 여자가 서 있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한 게 예사롭지 않다. 아니, 집구석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어디를 싸댕기는 거야. 내가 미치겠다니까, 아주! 그녀의 귀에도 마야의 비명이 선명하게 들려온다. 미안해요. 아프니까 저런 거잖아요. 이웃에 사시니까 좀 이해해 주세요. 그럼 아가씨는 왜 우리를 이해 못해 줘? 이해해 준다면 차라리 저 병신을 어떻게 해야 할 거 아냐. 여자는 참고 참았다는 듯 말을 멈추지 않는다. 우리 남편 잘 알잖아. 이번 주에는 밤에 일하고 낮에 잔다는 거. 미안해요. 미안하다고 끝날 문제가 아니잖아, 지금! 그렇다고 산목숨을 어떡하겠어요. 그럼 우린 어쩌라구. 이렇게 밤낮없이 비명이나 듣고 냄새에 찌들어 살란 말이야? 여자는 흥, 하고 콧소리까지 보탠다. 그럼 제가 목이라도 조를까요? 아니, 이 아가씨가? 그럼 나더러 쳐들어가 목이라도 조르란 말이야, 뭐야? 듣기 싫으면 문 열어 드릴 테니까 가서 죽여 보세요. 저도 죽이고 싶으니까요. 아니 이 처자가 점점? 누군 죽이고 싶지 않은 줄 아세요. 그런 맘 하루에도 수백 번 먹는다구요. 그런 고통을 댁은 알아요, 아냐구요! 그녀의 비명에 여자는 입만 벌리고 있다. 네, 죽여 드리죠. 그러니 내 앞에서 꺼지세요. 지금 당장! 여자는 어이없다는 듯 씩씩거린다. 살다 보니까 별 미친 것들하고 이웃을 다하네, 정말! 여자는 그러고도 분이 안 풀리는지 계속 구시렁거린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핸드백 속에서 현관 열쇠를 찾아 쥔다. 그녀의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현관문이 열리자 마야가 기다렸다는 듯 더 앙칼진 비명을 질러댄다. 제발 조용히 좀 안 할래? 정말 죽고 싶어 그런 거야? 죽여줄까? 그녀도 모르게 거친 말이 쏟아진다. 내가 늘 네 곁에 있어야만 하니? 나도 살아야 하잖아. 너만 바라보고 있으면 어떻게 먹고 살아, 이 병신아. 차라리 죽고 싶으면 죽어 버려! 나도 네 뒤치다꺼리에 이제 신물이 난다구. 마야가 알아들은 것일까. 거짓말처럼 마야의 비명이 툭 끊긴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들고 온 비닐봉지에서 소주를 꺼낸다. 울 생각도 없는데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흐른다. 요즘 부쩍 눈물이 잦다. 그녀는 소주병을 움켜쥔 채 베란다로 향한다. 거기서 술병이라도 껴안고 통곡이라도 하고 싶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다. 어둠이 내리면 저 아래 거리는 다시 빛날 것이다. 이 세상의 더러움은 없다는 듯이 화려하게.


죽을 데운다. 운동을 하지 않자 소화력마저 현저히 떨어졌다. 심지어 토하기까지 해댄다. 아니, 어쩌면 그건 마야가 먹는 것까지 거부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게 마야의 마지막 의지일 수 있으니까. 사람답게 죽고 싶다고, 이렇게 사는 게 더 치욕스럽다고. 그래서 죽기를 작정한 행동임을 그녀도 이미 눈치 채고 있다. 그걸 알고도 악착같이 끼니를 먹여대는 것은 어쩌면 그녀 자신을 향한 학대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 결정해야 한다. 먹이는 일도 이제 고통스런 일과이므로. 죽이 덥혀지자 분말로 갈아 놓은 약을 섞는다. 약이래야 소화제에 피부과에서 타 온 약이 전부이다. 하지만 오늘은 한 가지 약을 더 추가한다. 그녀는 약이 골고루 퍼지게끔 젓기 시작한다. 약이 알맞게 섞이자 죽이 든 그릇을 들고 침대로 향한다. 그녀가 다가오자 마야는 고개부터 외로 꺾는다. 그녀는 의료용 침대 각도 조절용 손잡이를 쥔다. 천천히 돌리기 시작하자 동생의 상체가 일어선다. 절반쯤 앉은 자세가 되자 그녀는 숟가락을 쥔다. 예상했던 대로 숟가락이 닿자 입을 굳게 닫는다. 예전 같았으면 이쯤이면 동생의 입에 물린 마우스피스를 빼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런 무모한 짓은 하지 않는다. 마야가 뭐라고 웅얼거리기 시작한다. 그녀는 알고 있다. 그걸 잘 알기에 그녀도 몇 번이나 고통을 멎게 하고 싶은 충동에 빠지곤 했다. 하지만 산목숨을 제 손으로 끊을 용기가 나지 않았을 뿐이다. 어차피 혀까지 굳어 가고 있으므로 마야는 곧 죽을 것이다. 화려했던 마야 문명이 폐허로 변했듯이. 마야가 지난날을 회복할 수 없음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랬으니 마야라고 부르자고 했겠지. 그녀는 입을 벌리기 위해 애쓴다. 하지만 입을 벌리기가 쉽지 않다. 다시 한 번 빈 숟가락을 이빨 틈 사이로 힘껏 밀어 넣는다. 그래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몇 번 시도해도 마찬가지다. 결국 그녀는 숟가락을 방바닥에 내팽개친다. 그래, 그렇게 죽고 싶어? 그럼 소원 들어 줄게. 그녀는 담배를 꺼내 물고 베란다로 향한다. 정말 이 지긋지긋한 삶을 이제 더 이상 미루고 싶지 않다. 끝장내고 싶다. 당장 마우스피스를 빼 버리고 싶다.


인간은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을 때, 위엄을 지닌 채 죽기를 희망한다. 그래서 스스로 자살을 택한다. 만약 당신이 흡연, 음주, 단것이나 기름진 음식을 즐긴다면 당신도 이미 자살을 택한 것이다. 다만 ‘느린 자살’의 형태를 택했을 뿐. 물론 자살 자체를 칭찬하거나 격려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비난할 수 있는가. 시간적 차이가 있을 뿐이지 어차피 우리는 다 죽는다. 우리 모두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으므로. 그렇다면 생을 맘껏 즐기다가 죽고 싶다는 그의 의사를 존중해 주어야 한다. 헌데, 한 개인이 자신의 삶 자체가 너무 초라하고 비참하다고 여겨질 때, 아니 비참한 상태가 끝없이 지속되고 있는데도 자살을 택할 수 없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그가 이렇게 구차하게 연명하는 것보다 최소한의 의식을 갖고 인간에게 어울리는 모습으로 죽고 싶다면 가족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편안하게 임종하도록 도와준다면 그게 과연 비난받을 만한 일인가.


피라칸사스 화분 앞에 쪼그리고 앉는다. 지난해까지 빨간 열매를 선보였던 나무. 하지만 올해는 열매를 맺지 못했다. 풍매화답게 개화 시 바람을 쏘여야 하는데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몇 개 열렸던 열매마저 시들시들하더니 익기도 전에 죄다 떨어졌다. 북향이라 모자란 일조량도 한몫했을 것이다. 잎도 점점 생기를 잃어 가는 중이다. 아무리 물을 줘도 생기는 되살아날 줄 모른다. 죽음을 재촉한 건 어쩌면 저 돌덩이 때문인지 모른다. 돌을 타고 내려온 저 드러난 뿌리들. 언젠가는 물기를 잃은 채 죽어 갈 것이다. 그녀는 천천히 화분으로 손을 뻗는다. 그런 다음 조심스럽게 돌덩이를 빼낸다. 피라칸사스 나무는 부르르 진저리치듯 몸을 흔든다. 돌은 무사히 빠져나와 그녀의 손에 쥐어져 있다. 이제 둘은 한 몸이 아니다. 그녀는 천천히 소주병을 입으로 가져간다. 몇 모금 마시자 속이 금세 홧홧해진다. 창밖을 본다. 점점 어두워지고 있다. 저 너머 어디쯤에 검은 바다가 넘실대고 있을 것이다.


엄마가 보고 싶지 않아? 저 바다로 계속 가면 엄마가 있는데? 그녀가 묻자 동생이 한동안 머뭇거렸다. 그러더니 나직이 말했다. 사실 많이 보고 싶어. 근데 엄마한테 가면 누나랑 헤어져야 하잖아. 누나는 다 컸으니까 괜찮아. 그래도 누나랑 간다면 몰라도 혼자는 안 가. 그럼 평생 누나랑 살 거야? 동생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누나는 결혼해야 하는데도? 동생의 턱을 올려 세웠다. 누나는 나랑 결혼하면 되잖아! 풋, 어이없어서 그녀가 웃었던가. 너, 말도 안 되는 억지 쓸래? 그러면 누나는 나 안 사랑해? 그녀는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당연히 사랑하지.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결혼하는 거잖아. 못하는 사이도 있어. 내가 돈 많이 벌어 줄게. 누나 행복하게 해줄게. 지금처럼 누나 회사 안 나가고 집에만 있게 해줄게. 그럼 됐지? 야, 듣기만 해도 벌써 행복해지는 기분이야. 그래, 결혼하게 빨리 크기나 해. 누난, 내 곁을 엄마처럼 절대 안 떠날 거지? 그래, 절대 안 떠나. 어떻게 이렇게 귀여운 동생을 두고 떠나니? 아빠처럼 절대 죽지도 않을 거고? 그럼, 너 죽기 전까지 누나는 절대 못 죽지. 너를 돌봐야 하니까. 누나, 약속하는 거지? 나랑 결혼한다고 약속한 거지? 그래, 약속할게. 그럼 손가락 걸고 지문 찍고 복사해! 철없던 동생과 나누던 대화. 오늘따라 왜 이리 오롯이 기억나는 걸까. 그 바닷가에 다시 한 번 마야와 거닐고 싶다.


초코파이를 꺼낸다. 돈이 있었다면 멋진 생일상을 차려 주고 싶었다. 하지만 직장을 갖지 않는 이상 이제 그런 작은 일마저 꿈이란 걸 그녀는 잘 안다. 그래서 마야에게 미안할 뿐이다. 그녀는 쟁반 위에 포장을 뜯은 초코파이를 하나씩 쌓는다. 바닥에 네 개, 그리고 그 위에 두 개, 마지막 하나를 뜯어서 맨 위에 올린다. 그런 다음 성냥개비를 꽂는다. 하나에 열 살씩 도합 두 개를 꽂고 하나는 절반을 툭 꺾어 세운다. 이제 촛불만 켜면 된다. 미안해, 더 멋진 생일잔치를 해주고 싶었는데 형편이 그렇질 못해. 그러니 네가 이해해 줘. 마야가 화답하듯 웃는다. 그녀는 성냥을 그어 불을 붙인다. 그런 다음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우리 마야, 생일 축하합니다. 그녀 혼자 노래를 끝내고 박수를 친다. 그런 다음 쟁반을 들어 동생 앞으로 가져간다. 후욱, 하고 불어야지. 마야는 눈을 감고 있다. 할 수 없이 그녀가 대신 불어 준다. 오늘은 네 소원을 들어 줄게. 그리고 선물을 준비했어. 어쩌면 마지막 선물이 될 수 있으니 거부할 생각은 마. 네 소원이 뭐였어. 누나랑 결혼하는 거였지? 그렇지? 그러니까 가만히 있으면 돼. 누나가 알아서 다 할 테니까. 마야의 바지를 벗긴다. 좀 전에 씻긴 탓인지 파우더 냄새가 난다. 그녀는 동생의 성기를 어루만진다. 동생의 성기가 부풀어 오른다. 동생은 아직 모른다. 죽 속에 봉제 공장 남자의 주머니에서 훔친 약을 섞었다는 것을. 약이 효력을 발휘하는지 예전의 탱탱함을 회복하고 있다. 다행이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성기를 감싸 쥔다. 그런 다음 천천히 입으로 핥기 시작한다. 성기에서 봉제 공장 남자의 냄새가 난다. 역겹다. 이제 더 이상 봉제 공장 남자를 만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입 안에 들어간 성기는 방금 튀겨 낸 핫도그처럼 따뜻하다. 그녀는 입으로 핥으면서 브래지어를 풀고 치마를 벗는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팬티마저 벗겨 낸다. 나신이 된 그녀가 침대 위에 올라선다. 마야의 눈에 눈물이 그득하다. 울지 마. 어차피 죽을 거면 사랑은 한 번 해보고 가야지. 그래야 덜 억울하잖아. 마야의 입에서 비명이 터진다. 제발 소리치지 말라고 그랬지? 이게 누나가 네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야. 넌 내 진심을 왜 그렇게 몰라 줘.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넌 누나의 마음을 알아 줘야 하잖아.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진다. 떨어진 눈물이 하필 마야의 눈 속을 파고든다. 사랑해, 마야. 초인종이 울린다. 옆집 여자인 모양이다. 벨 소리는 끝이 없다. 그녀가 엉덩이를 움직이기 시작한다. 창밖은 더욱 어두워졌다. 그래도 그녀의 눈에는 마우스피스가 분명히 보인다. 이제 곧 마우스피스를 뽑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 아직은 아니다.《문장 웹진/2008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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