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국이 어디에요

 

약국이 어디에요




김유진




아홉 시 이십 분이 되자, 그는 거실 오른쪽 구석에 놓인 이층 침대에 모로 누워 리모컨으로 어린이 전문 채널의 번호를 입력했다. 이십 분 전, 그는 부엌 입구에서 여행객들이 아침 식사를 끝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행객들이 숟가락을 내려놓자마자 재빨리 그릇을 개수대에 쌓아 놓았다. 대걸레로 거실을 두 번 밀었다. 간혹 화장실의 쓰레기통을 비우기도 했는데, 오늘은 하지 않았다. 직접 조립한 이케아 침대가 그의 체중을 이기지 못해 이층까지 휘청거렸다. 침대보가 우는 아이의 얼굴처럼 구겨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는 1975년에 제작된 미국산 만화 영화를 보고 있었다. 짧게 자른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두피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목살의 접힌 부분이 때에 쩐 듯 까맸다. 그는 몰래 포르노를 보는 중학생처럼 연신 키득거렸다. 만화 영화는 대사가 없었다.

 

 

장은 이마 한가운데를 중지로 꾹 누르며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실 유리창으로 햇빛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아침부터 날이 무척 더웠다. 오가 화장실에서 나오자, 장은 일그러졌던 표정을 재빨리 감추었다. 오는 화장실에 갈 때마다 스도쿠를 맞추는 버릇이 있었는데, 숫자를 다 채우기 전까지는 나오지 않았다. 오는 이미 다 푼 퍼즐을 지우개로 깨끗이 지워 처음부터 다시 풀고 있었다. 오는 너덜너덜해진 스도쿠 책 사이에 연필을 끼웠다. 장은 미리 외출 준비를 마치고 오가 나오길 기다렸지만, 먼저 문밖을 나서는 것은, 언제나처럼 오였다. 장은 늘 잊어버리는 것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장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여권을 두고 온 것을 기억해 내고 헐레벌떡 민박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여권을 챙기며 침대 뒤 그늘진 곳에 놓아 둔 사과 두 알을 가방에 넣었다. 오는 캔버스화 앞코로 벽돌색 카펫이 깔린 바닥을 툭툭 두드리며 엘리베이터 정지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장은 멋쩍게 웃어 보였으나, 오는 땅을 보고 있었다. 중국인과 동남아시아계가 주로 모여 사는 13구의 아파트에선 언제나 고수 냄새가 진동했다. 장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장은 한 달 가까이 이곳에서 지냈지만, 여전히 냄새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학원 가등록증은 챙겼어? 응. 장은 가방에서 서류 봉투를 꺼내 뒤적거리며 대답했다. 여권 복사본은? 응. 호적등본은 공증 받은 거야? 응. 학력 증명서도? 오는 걸음의 속도를 늦추지 않고 빠르게 물었다. 오의 단단히 묶은 운동화가 담배꽁초를 짓이겼다. 전날 내린 비로 여기저기 물웅덩이가 져 있었다. 오는 정면에 시선을 고정시키면서도, 능숙하게 물웅덩이를 피해 걸었다. 햇빛은 남아 있던 습기를 빠르게 걷어내고 있었다. 장은 살갗에 와 닿는 물기와 정수리에 내리쬐는 햇빛을 동시에 느꼈다. 장에게는 그런 대기의 불안정성이 불쾌하게 느껴졌다. 챙겼어. 장은 오의 뒤통수를 향해 서류를 들어 보이고는 한 박자 느리게 대답했다. 오는 은행 잔고 증명서의 유무를 확인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입을 다물었다. 장의 발 치수보다 조금 큰 플랫 슈즈가 헐떡거렸다. 장은 발가락에 잔뜩 힘을 주며 걸음을 재촉했지만 자꾸만 뒤처졌다. 역 이름이 뭐라고 했지? 장은 지하철역에 다다라, 가까스로 오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오는 장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장은 열일곱 살이 되던 해 겨울, 처음 오를 만났다. 장은 기억력이 좋지 않은 편이었지만, 그날의 기후와 자신의 머리 모양에 대해서는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장은 거울 앞에서 안경을 썼다 벗었다를 반복했다. 안경알이 얼굴에 비해 지나치게 작고 테가 얇은 것도 불만이었지만, 안경테에 닿은 머리칼이 그늘을 피해 자라나는 나무줄기처럼 밖으로 휘어졌기 때문이었다. 장의 굵고 뻣뻣한 단발머리는 습기가 차자 점점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장은 집을 나서기 직전 안경을 벗어 신발장 위에 올려놓았다. 머리칼을 필사적으로 끌어내려 귀 옆에 붙였다. 눈의 초점이 맞지 않아 연신 미간을 찌푸렸다. 앞머리를 손바닥으로 눌러 가라앉히자, 눈 밑 그늘이 도드라졌다. 장은 눈이 무척 나빴다. 문 밖을 나섰을 때, 장은 다시 한 번 고민에 빠졌다. 눈이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앞코가 뾰족한 단화 위로 눈이 떨어졌다. 싸구려 인조 가죽에 금세 물 자국이 생겼지만 장은 눈치 채지 못했다. 벌써 발끝이 시려왔다.

장은 오의 농구화를 보고 나서야 자신이 지나치게 멋을 부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십이 차선 횡단보도 앞에서 장은 오에게 연합고사 점수를 물었다. 오는 대신 자신이 활동하는 PC 통신 소설 사이트의 닉네임을 알려 주었다. 장의 머리칼이 눈에 젖을수록 심하게 굽이쳤다. 장은 연신 앞머리를 손바닥으로 누르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경계를 잃은 눈송이들이 장의 얼굴을 향해 달려들었다. 놀이 공원 가자. 장은 오의 억양이 낯설었다. 장은 놀이 공원과 분식집, 노래방을 따라다녔다. 오는 노래방에서 담배와 마이크를 한 손에 잡고 생소한 발라드 곡을 불렀다. 내 소설의 테마 곡이야. 오는 사랑의 불합리, 불일치의 과정을 소상히 다룬 노래에 한껏 감정을 담아 부르기 시작했다. 장은 오의 얼굴을 자세히 보기 위해 얼굴을 찌푸렸다. 조도가 낮아 오의 얼굴에 음영이 졌다. 장은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없어 한 번도 마이크를 잡지 못했지만, 오는 신경 쓰지 않았다. 두 시간 후, 오가 밤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내려갈 때까지, 장은 오의 얼굴을 자세히 보지 못했다. 칠 년 후 공항에서 서로 다시 만났을 때 장이 오를 알아보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오는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생활 정보지를 반으로 접어 허벅지 위에 올려놓았다. 동그라미를 친 광고 칸에 크게 가위 표시를 했다. 오는 생활 정보지를 옆구리에 끼고 노란 낙타가 그려진 담배 봉투를 꺼냈다. 기름종이를 반으로 접고 엄지와 검지로 적당량의 담뱃잎을 집어, 접힌 종이 안쪽에 길게 늘어놓았다. 오른쪽 끝에 맞춰 필터를 얹었다. 오는 능숙하게 종이를 만 후 침을 발라 고정시켰다. 오의 형체가 담배연기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장은 사과를 씹으며 지켜보고 있었다. 과육이 장의 엄지와 검지 사이로 흘러내렸다. 장이 다급하게 혀를 갖다 대었을 때, 철제 고가 위로 지하철이 지나갔다. 굉음은 순식간에 주변의 공기를 집어 삼켰다. 지반이 덜덜 떨릴 정도였다. 신호에 걸린 차처럼, 장은 열차가 지날 때까지 정지 상태로 있었다. 열차는 6분마다 다리를 지났다. 이런 집에서 살 수는 없어. 열차가 지나가는 순간, 오는 부동산 중개인이 소개해 준 아파트의 창문이 덜덜 떨리는 것을 보고는 말했었다. 부동산 중개인은 금발에 붉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한차례 굉음이 지나자, 여자는 오에게 명함을 주며 이가 드러나 보일 정도로 환하게 웃어 보였다. 장은 고개를 숙이며 서툰 발음으로 감사합니다,라고 답했다. 아파트 창 너머, 두 평 남짓한 뒷마당을 사이에 두고 같은 높이의 아파트가 마주 보고 있었다. 가수가 꿈이래. 낮엔 일하고 밤엔 바에서 노래를 한다는데. 여자가 라디에이터를 가리키며 긴 설명을 하고 있을 때, 오가 장에게 속삭였다. 장은 그것이 진실인지 장난인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오는 전화 부스를 빠져나와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털었다. 전화하는 게 세상에서 제일 싫어. 오는 장의 손에 들린 사과에 시선을 던졌다. 장은 생각났다는 듯 가방에서 남은 사과를 꺼내 오에게 건넸다. 전화하는 게 세상에서 제일 싫어. 오는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가며 발음했다. 장이 별 반응이 없자, 오는 장을 지나쳐서 역을 향해 걸었다. 장은 사과를 가방에 다시 넣고 뒤를 따랐다. 기갈이 사라지지 않았다.


장은 이곳에 도착한 첫날을 상기했다. 장에게는 캐리어 하나와 노트북이 든 숄더백, 20kg과 10kg짜리 이민 가방 두 개, 그리고 오가 미리 부탁한 말보로맨솔 두 보루가 든 면세점 쇼핑백이 있었다. 오는 20kg짜리 이민 가방을 끌고 앞장서 갔다. 무빙 워크 위에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는 오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장은 7년 전 보았던 오의 얼굴을 떠올려 보려 애썼다. 오에 대한 감정이 어떤 것이었는지 기억을 들춰 보았지만 허사였다. 장은 끝끝내 자신의 우스꽝스러웠던 모습 이외에는 아무것도 기억해 내지 못했다. 캐리어의 바퀴가 말을 듣지 않았다. 오의 멀어져 가는 뒤통수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이민 가방 위에 캐리어를 얹었다. 장은 필사적으로 오의 뒤를 쫓았다. 발바닥이 차가워 뒤를 돌아보니 플랫 슈즈 한 짝이 벗겨져 저만치 놓여 있었다. 고향을 떠나기 직전 장만한 신발이었지만, 앞코에 상처가 생겨 흉측했다. 장은 곧 플랫 슈즈를 신고 온 것을 후회했다. 그것이 장이 가져온 유일한 신발이었기 때문이었다.

아파트는 7층이었다.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입구는 술집과 카페 사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좁은 쪽문이 전부였다. 아는 일본 여자애가 쓰던 집이야. 일주일 동안 지내도 좋데. 오는 장에게 자못 뿌듯한 어조로 말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또 하나의 철문이 있었다. 천장은 가뭄이 든 땅처럼 갈라져, 페인트가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덜렁거렸다. 일주일이면 숙박비가 280유로나 줄어드는 거야. 오는 철문 옆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장은 붉은 글자로 휘갈겨진 이름들과 녹슨 우편함을 보며, 고개를 연신 끄덕거렸다. 좋아. 고마워 정말. 오와 장은 이민 가방을 열어 물건을 나눠 들고 여덟 차례에 걸쳐 짐을 옮겼다. 계단이 지나치게 좁고 가팔라 가방이 지나갈 수 없었던 탓이었다. 원룸은 부엌과 화장실을 합쳐도 4평이 되지 않았다. 짐을 쌓아 두고 나니 잠잘 곳이 없었다. 화장실에는 휴지통도 없었다. 장은 변기에 휴지를 버리고 나자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물이 모두 내려갈 때까지 레버에서 손을 떼지 않고 지켜보았다. 휴지는 구멍으로 빨려 들어가기 직전, 녹아 없어졌다. 오가 접이식 소파를 펼쳤다. 두 사람이 간신히 누울 만한 공간이 있었다. 나쁘지 않네. 오의 목소리는 여전히 밝았다. 장은 간이 화장대 위에 놓인 가죽 수첩을 보았다. 그 여자애 이름이 수자(秀子)야? 오는 코웃음을 쳤다. 히데코(秀子)라고 불러.

둘은 저녁으로 장이 가져온 햇반 두 개와 아시아 식당에서 산 고추잡채, 기네스 두 캔을 먹었다. 이틀 후, 장이 숙박비의 3분의 2를 내는 조건으로 민박집으로 숙소를 옮겼다. 새벽이면 장의 얼굴 바로 위 천장에서 물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그거, 뭐, 맛있어요? 무슨 맛으로 먹어요, 향 나는 거를.

그가 오의 손에 들린 6개들이 호가든 세트를 보며 말했다. 탁자 위에는 750ml짜리 칭따오 병맥주 두 병과 말린 소시지가 있었다. 그는 말린 소시지의 껍질을 칼로 벗겨 얇게 썰었다. 이리 와요, 이거 함 마셔봐요. 그가 유리잔에 맥주를 따르며 장과 오에게 손짓했다. 장은 그의 말을 한 번에 알아듣지 못했다. 익숙하지 않은 억양 탓이었다. 장은 멀뚱히 서서 그가 무슨 말을 했나 곱씹어 보았다. 뒤편 주방에서 그의 누나가 숙주나물에 참기름을 들이붓고 있었다. 참기름은 붓고 또 부어도 좀처럼 향이 나질 않았다. 오는 이미 방으로 들어가 버리고 없었다. 남자는 7년 전 누나를 따라 배를 타고 이곳에 왔다. 7년을 살았지만 아파트 주변을 벗어난 적이 거의 없어, 이 나라 말을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그는 종종 민박집을 이용하는 여행자들이 지리를 묻거나, 여행지 추천을 부탁할 때, 뒤통수를 긁으며 누나를 부르곤 했다. 관공서에서 전화가 오면 망설임 없이 끊어 버렸고, 곤란한 얼굴이 찾아오면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그는 누나보다 훌륭한 요리 솜씨를 갖고 있었지만, 대체로 요리는 누나에게 양보했다. 종종 몸이 아프면 중국인 침술사를 불러 침을 맞았다. 장은 인사치레로 입꼬리만 살짝 올려 보이며 다음날 숙박비 40유로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장은 이층 침대의 아래층을, 오는 위층을 썼다. 오가 조금만 꿈틀대도 아래층 매트리스 전체가 울려댔지만, 천장에서 물이 떨어지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장은 일기장을 꺼냈다. 일기장은 장이 직접 만든 첫 번째 노트였다. 장은 여러 종류의 갱지들 중 가장 얇은 것을 골라 직접 실로 꿰매고 천을 덧씌웠다. 그 일기장을 만드는데 꼬박 이틀이 걸렸다. 장은 일기장 맨 뒤에 붙여 놓은 편지봉투를 열어, 지하철 정액권과 전화 카드가 잘 있는지 확인했다. 20유로짜리 전화 카드를 산 것이 3주 전인데, 아직 한 번도 쓰질 않았다. 장은 오늘 한 일을 세세히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날의 감상은 절제하고 사실을 기술하는데 중점을 뒀다. 사과 하나로 끼니를 때웠으므로, 오와 나누어 낸 맥주값 2.7유로가 오늘 지출의 전부였다. 장은 침대 밑에 깊숙이 넣어 둔 캐리어를 꺼내 남은 현금과 여행자 수표를 세어 보고 그중 10유로를 지갑에 넣었다. 한 달 가까이 집을 구하지 못할 것이라고는 장과 오 모두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집을 구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장애 요소가 있었는데, 오가 모든 일을 떠맡아야 한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오는 날이 갈수록 짜증이 늘어 갔지만, 장이 오를 대신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장은 아직 간판도 제대로 읽지 못했다. 장은 일기장을 덮으려다 말고, 문득 무언가를 적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를테면 누군가에게 편지나 엽서를 보내는 일 따위가 하고 싶어졌던 것이다. 장의 타지 생활에는 낭만이 없었다. 지금의 고생을 글로 옮긴다면, 약간의 수사만으로도 낭만성을 얻을 수 있는 누군가에게는 낭만적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장은 침대 위에 드러누워 누구에게 편지를 써야 할지 곰곰이 떠올려 보았다. 침대 모서리에는 까맣게 때에 전 껌, 찢어진 견출지 따위가 들러붙어 있었다. 그때 오가 인기척 없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저녁 안 먹어? 장은 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일어나 방문을 나섰다. 떠오르는 얼굴이 하나도 없었다.


민박집의 장기 투숙자는 오와 장을 포함해 총 세 팀이었다. 2인실 도미토리룸엔 오와 장이 묵었고, 남부에서 올라와 온통 구릿빛으로 그을린 남녀 한 쌍이 거실 이층 침대의 위층을 함께 썼다. 가족실엔 출장 온 회사 직원 셋이 묵었다. 그들은 모두 하나의 욕실을 이용했고, 두 개의 화장실을 나누어 썼다. 아침밥은 7시 30분에서 9시까지 먹을 수 있었다. 저녁 식사는 대체로 오후 8시면 끝이 났다. 좀처럼 해가 지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자주 모여 맥주를 마시거나 베트남 국수집에서 야식을 먹었다. 그들은 주로 이곳의 풍광이나 물가, 기후와 국민성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가 붉은 미니스커트를 입은 부동산 중개업자와 보증금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을 때, 장은 창 너머 맞은편 집 발코니를 보고 있었다. 아르누보식 녹색 철제 난간 안쪽으로, 역시 비슷한 양식의 흰색 탁자와 의자가 있었다. 그 주위를 잎이 푸르른 제라늄과 팬지, 양란 화분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장의 눈길을 끈 것은 발코니 천장의 전등에 매달려 빙글빙글 돌아가던 CD 한 장이었다. 디스크는 실에 매달려 미풍에도 쉽게 흔들렸다. 햇빛은 디스크 주변으로 몰려들어 바람개비처럼 돌다, 장에게로 곧장 달려들었다. 장은 눈이 부셨지만,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디스크는 바람의 세기에 따라 천천히, 혹은 격렬히 장의 얼굴을 향해 빛을 반사했다. 장은 그것이 자신에게 보내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장은 눈을 감았다. 그 신호는 따듯하고, 끊임없었으며, 아무런 의미도 없어 더욱 마음에 들었다. 그때 열차의 진동이 장의 몸을 뚫고 지나갔다. 그 신호는 부산스럽고도, 무척 고요했다. 장은 그 아파트가 마음에 들었지만, 오에게 말하지 못했다. 

장은 또 길을 헤매고 있었다. 장의 양손에는 열 개들이 요거트 한 팩과 설탕에 절인 사과 한 병, 냉동 피자 두 판, 냉동 라자냐 네 판, 코카콜라 블랙 여섯 병이 들려 있었다. 장은 길 한가운데에 비닐봉지를 내려 두고 지도책을 꺼냈다. 어디서부터 길을 잘못 든 것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골목의 이정표들을 여러 차례 확인하고 비교 대조했다. 장은 동쪽으로, 서쪽으로 위치를 바꾸어 보았다. 등 뒤로 땀이 흘렀다. 곧 비가 올 듯 습한 바람이 불었다. 장의 머리칼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한 무리의 청년들이 장을 향해, 니하오! 라고 외쳤다. 장은 지도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마트가 있을 법한 골목의 위치와 숙소 사이의 길들을 꼼꼼히 살폈다. 구획된 도시를 점과 선과 면으로 나타내는 기본 원리, 기준점의 위치에 따라 자연스럽게 변동하는 방위 표시들은 장에게 대단히 불규칙적이고 추상적으로 느껴졌다. 장은 도리어 지도책이 제멋대로 세계를 나누고 있다고 생각했다. 장은 그 길을 오와 함께 열 번도 넘게 왕복했었지만, 지도를 보자 풍경이 더욱 생경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장은 바로 숙소를 찾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마트로 거슬러 올라가기로 했다. 눈에 익은 길, 주변 건물을 보며 기억을 더듬어 가는 편이 한결 쉬울 듯했다. 장은 내려놓았던 비닐봉지를 들었다. 양손에 들린 짐의 무게로 장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장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 고등어의 흰 배를 닮은 비행기가 먹구름 사이로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히데코는 장의 생각보다 무척 어렸다. 그녀는 열여덟에 이곳에 와 2년을 살았다. 대학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실패하고 모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장은 또 다시 그 쪽문을 열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히데코가 쓰던 물건들을 물려받으면 나중에 상당한 돈을 아낄 수 있다는 오의 설득에 넘어가 버렸다. 오는 아침부터 들떠 있었다. 아마 프라이팬이나 냄비도 얻을 수 있을 거야. 오는 평소에 잘 메지 않던 배낭을 멨다. 장과 오가 7층에 도착하자,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히데코의 집 문은 열려 있었다. 장은 연신 손부채질을 했다. 오는 큰 목소리로 히데코를 불렀다. 집 안은 가져가기 위해 쌓아놓은 짐들과 버리기 위해 쌓아 놓은 짐들로 아수라장이었다. 장이 어디를 디뎌야 할지 몰라 문 밖에서 서성이고 있자, 오가 장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녀는 오와 장을 한 번 힐끔 쳐다보고는 짐 정리를 계속했다. 오는 장을 대하는 태도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로 히데코와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목소리는 밝고 웃음기가 묻어 나왔다. 오와는 어울리지 않는 사교적인 어투였다. 장은 집 안을 둘러보다, 지난번 보았던 수첩이 소파 위에 뒹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수자. 장은 괜히 웃음이 나왔다. 사라지고 싶데. 오가 장에게 말했다. 응? 히데코가 여기에서 사라지고 싶데. 히데코는 밑위길이가 아주 짧은 카고 바지에 몸에 달라붙는 면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히데코가 짐을 줍기 위해 허리를 숙일 때마다, 구릿빛 엉덩이와 자주색 티 팬티가 드러나 보였다. 장은 히데코의 팬티와 커다란 가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잠시 후 그녀는 간헐적으로 오에게 물건들을 던졌다. 오는 물건들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가져갈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했다. 그러나 히데코가 오에게 건네 준 물건들 중에서 유용한 것들은 별로 없었다. 그녀는 해골이 규칙적으로 인쇄된 흰색 니트 목도리와 모서리가 깨진 시계라디오, 낡은 후추통과 소금통, 지퍼백에 나눠 담은 갖가지 종류의 향신료들을 던져 주었다. 장과 오는 앉을 만한 공간을 찾지 못해 내내 서 있어야 했는데, 히데코는 개의치 않고 좁은 부엌과 화장실을 쉴 새 없이 들락거렸다. 그녀의 행동에는 다소 짜증이 묻어 있었다. 자신들이 이곳에서 환영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자, 장은 더욱 안절부절 못하기 시작했다. 오는 멀뚱히 서서 히데코가 다른 물건들을 던져 주기만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여기서 사라지고 싶다. 장은 생각했다.

오는 히데코가 준 물건 중 해골 무늬 목도리를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 지하철 안에서 오는 길지 않은 목도리를 펼쳐 보이며, 자 봐. 여기 목도리 끝에 주머니도 달려 있어,라고 자랑스레 말했다. 장은 피로했다. 하루를 버린 기분이었다. 오가 목도리를 메느라 이리저리 고개를 돌릴 때마다 짧은 머리칼이 살랑거렸다. 머리칼이 유난히 얇아 가볍게 흔들렸다. 장은 오의 뒤통수가 어린아이의 것 같다고 생각했다. 몸에 비해 큰 편인 뒤통수가 고집스럽게 튀어나와 있었다. 장은 실소가 터져 나왔다.

  

장은 한 번 오의 소설을 본 적이 있었다. 오는 스물한 살이 되던 해 한 웹진의 판타지 소설 공모전에 당선되었다. 장은 한정식집의 서빙 아르바이트를 위해 지배인과 면담 중이었다. 지배인은 다짜고짜, 아가씨 눈두덩이가 원래 그렇게 시퍼래?라고 물었다. 장은 면담 내내 눈꺼풀을 손으로 문질렀다. 손가락 끝에 묻은 푸른색 아이섀도를 허벅지 안쪽에 비벼 닦았다. 문지르면 문지를수록 눈두덩은 광범위하게 푸르러졌다. 지배인이 세부적인 업무와 접대 예의에 대해 설명하고 있을 때, 장은 오의 연락을 받았다. 4년 만이었다. 장은 오의 전화를 구실삼아 한정식집을 뛰쳐나왔다. 장은 과장되게 목소리를 높이며 당장 읽어 보고 감상을 말해 주겠다고 답했다. 오의 소설은 판타지의 형식을 띤 연애 소설이었다. 장은 광범위한 사랑의 행태들, 시간과 공간, 성별, 나이와 종을 초월한 가장 순수한 개념으로서의 사랑의 양태들을 읽어 내려가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당혹스러웠다. 장은 끝내 오에게 연락하지 못했다. 장과 오가 다시 연락을 주고받은 것은 그로부터 3년이 지난 후였다.


저녁노을을 밟는 것은 실로 오래간만이었다. 오와 장은 히데코가 짐을 다 쌀 때까지 기다려 물건을 받아오느라 저녁 식사 시간도 놓쳤다. 오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배낭에서 달그락 소리가 났다. 오는 끈질기게 기다린 끝에 테팔 프라이팬 하나를 챙겼다. 멀지 않은 곳에서 마늘 볶는 냄새, 고기 굽는 냄새가 풍겨 왔다. 오와 장은 처음으로 나란히 걷고 있었다. 오가 피곤해진 탓이었다. 둘의 그림자는 가로등을 따라 길게 늘어졌다. 방향을 바꾸었다. 키가 낮은 건물들 사이로 지는 해를 볼 수 있었다. 장은 1유로짜리 맥도널드 햄버거를 씹으며, 막연한 그리움을 느꼈다. 그러나 그 그리움에는 구체적인 대상체가 없었다. 장은 이곳에 온 이후 종종 그런 막연한 그리움을 느껴 왔었다. 그러나 무엇을 그리워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으므로, 장은 그것을 관습적 그리움이라고 단정 지었다. 우리 그 아파트 들어갈까. 오가 말했다. 아파트는 지리적으로 커다란 단점이 있었지만, 장점도 있었다. 보증금이 아주 낮았던 것이다. 일반적인 아파트는 열 달치 집세를 보증금으로 내야 했는데, 오와 장 모두 그만한 돈이 없었다. 그곳은 3개월치면 충분하다고 했다. 며칠 안으로 집을 구하지 못하면 둘 다 민박집에서 학교를 다녀야 할 판이었다. 매일 나가는 40유로의 방세도 대단한 부담이 되고 있었다. 창문을 닫으면 괜찮을 것도 같아. 이중창이었잖아. 오는 스스로를 설득시키고 있었다. 장은 안심이 되는 기분이었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 나는 상관없어. 장은 늘 그랬듯 오에게 결정을 떠넘겼다.


남부에서 올라온 아가씨는 발바닥을 제외한 온몸이 새까맸다. 그녀는 종종 식사를 함께하며, 이곳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한 햇빛과 지중해를 묘사하곤 했다. 그녀의 옆에는 쌍둥이처럼 닮은 남자가 함께했는데, 누구도 애인 사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들은 나체로 해변을 누비고, 책을 읽으며 늦봄과 여름을 보냈다고 했다. 그날 아침, 장은 민박집 남자와 함께 만화 영화를 보고 있는 아가씨를 보았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그녀는 잎담배를 말고 있었다. 아주 말끔하게 말린 담배 열 개비가 일렬종대로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장이 탁자 근처로 다가가자 그녀가 자리를 내어 주었다. 오빠가 귀찮아해서 미리 말아 놓는 거예요. 남부 아가씨는 항상 늘어진 티셔츠와 치렁치렁한 치마, 몸에 비해 지나치게 큰 바지 따위를 입고 있었는데, 대부분 동네의 옷 수거함에서 골라온 것이라고 했다. 목둘레가 한껏 늘어난 무지개색 니트 아래로 여자의 마르고 작은 가슴이 언뜻 보였다. 민박집 남자는 그 옆에 앉아 색색의 종이들을 1cm 간격으로 길게 잘라 동그랗게 이어 붙이고 있었다. 그는 덩치와는 다르게 손놀림이 아주 섬세하고 조심스러웠는데, 만화 영화를 보면서 하느라 조금 더딘 것 같았다. 이 사람들 애기 낳으면 달아 줄 거래요. 둘은 아침부터 기분이 매우 좋아 보였다. 장은 조심스레 물었다. 아 부부셨구나. 남부 아가씨는 자신의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여전히 밝게 대답했다. 아뇨. 우린 애인 사이도 아닌걸요. 텔레비전에선 종이 다른 두 동물 캐릭터가 반목과 냉전을 반복하고 있었다. 장은 잠시 동안 함께 만화 영화를 보다 방으로 들어왔다. 오는 긴 잠을 잤다.


그날 오후, 장이 어학원 등록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장은 지하철을 갈아타기 위해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환승 가능한 지하철은 5호선 6호선 7호선이었다. 장은 길을 잃지 않기 위해, 7호선의 이정표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장이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려 다시 7호선 환승 계단의 입구로 들어서려 할 때, 개찰구 앞에 줄을 선 한 여자에게 시선이 닿았다. 여자는 검은 모직 코트를 입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어두운 갈색이었고 어깨에 닿을 정도의 길이였다. 여자는 빠른 속도로 개찰구를 빠져나갔다. 장은 가슴이 심하게 뛰는 것을 느꼈다. 아는 사람 같았다. 장은 망설임 없이 여자의 뒤를 쫓았다. 그녀가 자신과 어떤 관계인지, 어떻게 이 먼 곳에서 마주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장은 그녀를 알고 있다고 강하게 느꼈다. 자신이 알고 있다고 믿는 얼굴이 누구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장은 뛰기 시작했다. 개찰구를 지나느라 여자와의 격차가 더욱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여자는 역사 밖으로 통하는 계단으로 빠르게 올라서고 있었다. 7cm 정도의 통굽 구두가 경쾌하게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그녀의 뒷모습이 자신을 부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장은 어쩌면 이곳에서 느꼈던 관습적 그리움이 제 주인을 찾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장은 걸음의 속도를 올리고 싶었지만, 신발이 커 제대로 뛸 수 없었다. 출구 계단 입구에 도착했을 때, 여자는 터질 듯 쏟아지는 빛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밖으로 나오자, 역 안에서 보았던 터질 것 같던 빛은 없었다. 대신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장의 안경에 물방울이 맺혔다. 장은 몇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 사람들 사이에 섞였다. 여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아직도 심장이 심하게 요동쳤다. 그때 누군가가 뒤에서 다가와 장의 귓가에 속삭였다. 장은 불에 덴 듯 놀라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금발머리를 단정히 올리고 가죽 재킷의 허리띠를 한껏 졸라맨 여자가 낮고 우아한 억양으로 말했다. 2유로만 주세요. 그녀는 장의 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동자는 투명한 녹색이었다. 2유로만 주세요. 그녀는 오른 손바닥을 펼쳐 장 앞에 내 보였다. 장은 거칠게 숨을 내쉬며, 그녀의 손바닥과 눈동자를 번갈아 바라볼 뿐이었다. 장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녀는 미련 없이 장을 지나쳤다. 천천히 앞서 걸어가 행인들에게 똑같이 말을 걸었다. 왼쪽 팔의 핸드백이 시계추처럼 천천히 진동했다. 그녀의 행색은 2유로가 없어 구걸하기에는 지나치게 깔끔했지만, 온몸에서 피로와 권태가 뚝뚝 묻어 나왔다. 누구도 그녀에게 2유로를 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실망하지도, 매달려 애원하지도 않았다. 포기하지도 않았다. 2유로만 주세요. 장은 사라져 가는 목소리를 들었다.


부동산 중개인은 사흘째 연락이 닿질 않았다. 집주인과의 약속이 이틀 전이었지만, 아무도 그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오는 여자의 사서함에 민박집 전화번호를 알려 주고는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다. 오는 방 침대에 드러누워 있다가 전화벨이 울리면 방아깨비처럼 뛰쳐나갔다. 장은 이 상황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상황인가를 따져 보았지만 쉽게 답이 나오지 않았다. 남부 아가씨와 그의 동행은 어제 집을 구해서 민박집을 나갔다. 민박집 남자는 그들을 위해 저녁 식사로 연어와 참치, 굴을 내놓았다. 그들은 장에게 각각 다른 회사의 컵라면 3개와 일본식 카레가루 3봉지, 사과 다섯 알을 주고 갔다. 오와 장은 사람들이 버리고 간 것, 주고 간 것들로 처음보다 짐이 30%쯤 늘어나 있었다. 바캉스 기간이 지나자, 날씨는 가을로 접어들었다. 매일 비가 내렸다. 사흘 동안 단 한 번도 거실에 햇볕이 들지 않았다. 민박집은 비수기에 들어갔다. 이제 곧 새 학기가 시작될 것이었다. 장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숙소는 15층이었다. 고층 아파트가 밀집되어 있는 지역은 도시에서 이곳이 거의 유일했다. 손수레를 끌고 지나가는 늙은 노인을 보았다. 빵이 비에 젖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장은 오래전 보았던 오의 소설 중 한 대목을 떠올릴 수 있었다.

J는 사막 한가운데에서 태어났다. 우기였다. J에게는 두 명의 남자 형제와 어머니, 아버지, 삼촌과 할머니, 그리고 삼십여 마리의 양떼, 양떼를 지키는 두 마리의 개가 있었다. 그들은 7일에 한 번씩 목초지를 따라 이동했다. 그들은 구름에 가려진 달그림자만으로도 사막의 길을 찾을 수 있었다. 그들은 어둠 한가운데 텐트를 치고, 내부를 반으로 나누었다. 램프를 단 쪽이 남자들의 방이었고, 나머지가 여자들과 아이들의 방이자 부엌이었다. 그들은 양탄자를 깔고, 목침을 두었다. J는 천 너머로 비치는 희미한 램프 불빛 아래서 자라났다. J는 민트 잎을 씹으며 양떼를 몰고, 양치기개의 등에 올라타 사막을 달렸다. J의 사막은 고대의 영화를 간직한 거대한 오아시스였다. J는 종려나무 숲 사이를, 고대 로마인들이 만들고, 또 스스로가 부셔 버린 신전 사이를 뛰어다녔다. J의 발바닥은 개의 것처럼 튼튼했다. J는 미세한 구름의 흔들림, 바람에 섞인 소량의 습기만으로도 비의 조짐을 읽을 수 있었다. J는 한 달에 한 번, 할머니를 따라 도시에 갔다. 할머니는 J에게 한 달에 한 번, 꿀을 바른 밀가루 빵을 사 주었다. J는 설탕을 잔뜩 넣고 끓인 홍차를 빵과 함께 마셨다. J는 일찍이 이빨이 새까매졌다. 건기가 닥치면, J의 가족은 종종 여행자들을 받아들여 저녁을 먹이고 돈을 받았다. 구운 양고기 요리와 마른 쌀, 풍성한 민트 잎과 레몬, 피타, 그리고 다디단 차를 대접했다. 일곱 살이 되던 해, J는 양산을 쓰고 찾아온 여행자와 사랑에 빠졌다. J의 영혼은 성숙했다. 눈이 어두웠던 여행자는 밤이 오면 공포에 떨었다. 밤, 사막은 달도, 그림자도 길도 없었다. J는 그런 여행자의 눈이 되어 주었다. 그에게 바람의 냄새를 읽는 법과 양 치는 법을 가르쳤다. 한 밤중 잠이 든 양떼들 사이에 그를 가두고 밀어를 속삭였다. J는 자신을 이끄는 보이지 않는 목소리의 존재를 믿었다. J는 그것이 여행자일 것이리라 굳게 믿었다. 그리고 여행자는 사막을 떠났다.


장은 오랜 시간 자신의 여권을 보았다. 뒤쫓았던 여자를 떠올렸다.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미래를 보지 못했으면서 볼 수 있다고 믿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장은 닥쳐오는 그 어느 것도 짐작할 수 없었다. 장은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있는 오를 보았다. 오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운명 공동체가 되었다는 사실이 낯설었다. 그들은 7년간 단 한 번 만났고, 고작 세 통의 전화를 했을 뿐이었다. 장은 왜 이곳에 왔는지, 스스로에게조차도 답을 줄 수 없었다. 장은 오에게 한숨을 쉬며 물었다. 우리, 다시 집을 알아보는 게 어떨까. 오는 장에게 등을 돌리며 쏘아붙였다. 원하면 네가 직접 구해.


중국인이야? 일본인이야? 여행 온 거야? 영어할 줄 알아?

장은 쏟아지는 질문에 어느 것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키가 크고 배가 나왔다. 줄무늬 티셔츠가 터질 듯이 부풀어 있었다. 난 밤이 되면 친구들이랑 다리 밑에서 기타 치며 놀 거야. 너도 올래. 장은 오의 말에 민박집을 뛰쳐나왔다. 그러나 혼자서 집을 구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장은 자신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았다. 장은 마트로 발길을 돌렸다. 이봐, 마트에 갈 생각이구나. 같이 장 봐 줄까. 장은 멈춰 서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잠시 후 그는 알겠다는 듯, 소리 내어 웃으며 자신의 볼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알았어. 그럼 인사 해줘. 그는 장의 어깨를 붙잡고, 볼이 뚫어질 듯 키스했다. 장은 뒤돌아서서 한참 동안 손바닥으로 볼을 닦았다.

장은 마트의 입구에서 주류 코너의 위치를 살폈다. 오가 좋아하는 맥주인 펠포스와 고기잼을 사 갈 요량이었다. 장이 습관적으로 과일 코너에서 서양 배 두 개를 집고 주류 코너로 발길을 돌리는 순간, 오른쪽 발바닥에서 섬뜩한 고통이 느껴졌다. 묵직한 것이 살을 파고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정수리 끝까지 전기가 오르는 것 같았다. 장은 신발을 신은 채로 발을 들어 보았다. 못이었다. 못은 얇은 플랫 슈즈의 바닥을 뚫고 발 깊숙이 박힌 듯했다. 못의 머리 부분이 붉게 녹이 슬어 있었다. 토요일이었으므로 마트 안은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장은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치였다. 장은 차마 못을 뺄 엄두도 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쇼핑 카트를 끌고 계산대를 향해 빠르게 걸었다. 누구든 붙잡고 싶었으나, 누구도 붙잡지 못했다. 장에게는 여권도, 늘 갖고 다니던 교통 카드도 없었다. 조금 전 자신을 쫓아왔던 남자를 보내 버린 것을 후회했다. 장은 무언가를 말하고 싶었지만, 입술 끝에서만 맴돌 뿐 입 밖으로 터져 나오지 못했다. 장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언제나 알지 못했다. 장은 공포로 몸을 덜덜 떨었다. 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상상했다. 장은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 단순한 문장이 무엇인지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퉁퉁 부운 채 잘려 나간 오른쪽 다리만이 머릿속을 떠다녔다. 대신, 장은 모국어로, 살려줘,라고,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향해 속삭였다.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도록.《문장 웹진/2008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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