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거래를 위한 지침서

 

공정거래를 위한 지침서




서유미




봄이지만 햇빛이 쨍하고 바람이 불지 않아서 한여름 날씨 같다. 놀이공원에 도착한 모준과 민지는 화창한 날씨와 끝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행렬에 탄성을 질렀다. 

“사람 정말 많다. 오늘 너무 신날 것 같아.”

선글라스를 쓴 민지는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어깨를 들썩거렸다.

“오늘 놀이기구 아주 질릴 때까지 타고 가자.”

모준은 민지의 어깨에 슬쩍 팔을 둘렀다. 가만히 있는 걸 보니 싫지 않은 눈치였다. 모준은 두른 팔에 살짝 힘을 주었다.

 

 

놀이공원은 봄나들이 나온 가족들과 연인들, 친구들로 북적거렸다. 모든 놀이기구에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어디에 가도 사람이 넘쳐났다. 모두 놀이공원에 몰려와서 도시가 텅 비어 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와 놀이기구를 탄 사람들이 지르는 비명소리, 줄을 선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 유모차에 타거나 목마를 탄 아이들이 울고 보채는 소리가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모준과 민지는 놀이기구를 하나씩 공략해 나가기 시작했다. 사귄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같이 놀이공원에 온 것도 처음이라 가끔씩 어색한 순간이 있었지만, 덕분에 줄을 서서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았다.

“목마르지? 뭐 마실래?”

“글쎄.”

목도 마르고 입도 심심했지만 민지는 그냥 얼버무렸다. 절대 먼저 나서지 말고 좀 여성스럽게 굴어. 혜주의 조언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일단 저쪽에 가서 좀 쉬자.”

모준과 민지는 잡은 손을 앞뒤로 흔들며 파라솔이 늘어서 있는 분식 코너로 걸어갔다. 오랫동안 햇빛 아래 서 있었더니 뺨이 화끈거리고 살짝 어지러운 것 같기도 했다.

“너무 덥다. 겨우 세 개밖에 못 탔는데 힘이 쫙 빠졌어.”

“뭐 먹고 힘내자. 재미있는 건 아직 하나도 못 탔잖아.”

그 때 꼬마 아이가 모준과 민지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뒤뚱거리며 걸어왔다.

“어머. 얘 좀 봐. 귀엽게 생겼다. 너 몇 살이니?”

민지는 아이의 볼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사실 전혀 귀엽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아이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지 민지의 옷을 잡아당기며 뭐라고 소리를 질렀다.

“애들이 나 진짜 좋아하는데. 야. 일루 와 봐.”

모준은 손뼉을 치며 아이를 자신의 쪽으로 불렀다. 질 수 없다는 듯 민지도 손뼉을 치며 아이를 불렀다. 아이는 모준과 민지를 번갈아가며 쳐다보더니 민지에게 다가가 폭 안겼다.

“얘가 사람을 알아보네. 꼬마야. 잘했어.”

하지만 모준이 먹을 것을 사러 간 후에도, 음식이 담긴 쟁반을 들고 와서 둘이 먹으려고 하는데도 아이는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얘 아직도 안 갔어?”

“응. 얘네 엄마 아빠 어디 있지?”

아이를 엉거주춤하게 붙잡은 채로 모준과 민지는 파라솔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은 모두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먹는 일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어떡하지?”

“일단 먹어. 여기 있었으니까 부모가 찾으러 오겠지.”

모준과 민지는 아이를 옆에 세워둔 채 떡볶이와 튀김과 음료수를 먹었다. 처음에는 잘 몰랐는데 먹기 시작하자 배가 고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는 손가락을 입에 문 채 모준과 민지가 먹는 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얘도 배고픈가 봐.”

“이거 줘 볼까?”

접시 위에는 음식이 별로 남아 있지 않았다. 모준은 작은 튀김 조각을 아이에게 내밀었다. 튀김을 먹으려고 입을 벌린 아이가 모준의 손가락까지 깨물었다. 결국 얼마 남지 않은 음식은 모두 아이의 입으로 들어갔다. 민지는 좀 더 사 먹자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모준은 뭔가 더 사 올까 하다가 놀이공원에서 나간 후에 민지와 저녁 먹을 생각을 하며 참았다. 아이는 아직 배가 차지 않는지 또, 또, 하며 입을 벌렸다.

모준과 민지는 먹은 것을 치우고 새로운 놀이기구를 타기 위해 걸어갔다. 몰래 빠져 나오려고 노력했는데도 아이가 뒤에서 쭐레쭐레 따라오고 있었다.

“모준아. 얘 좀 봐. 계속 따라와. 어떡하지?”

“아무래도 미아보호소에 맡겨야 될 것 같은데.”

미아보호소라고 말했지만 사실 모준은 아이를 그냥 따돌리고 놀이기구나 타러 갔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아이를 챙기며 걷는 민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미아보호소를 찾기 시작했다. 햇빛은 점점 강렬해져서 조금만 걸어도 땀이 줄줄 흘렀다. 아이는 사람들이 먹는 아이스크림을 손으로 가리키며 칭얼거렸고 아이스크림을 파는 가게를 발견하자 그 앞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모준이 팔을 잡아끌자 바닥에 주저앉아 소리를 지르며 울기 시작했다. 민지의 얼굴도 덩달아 울상이 되었다. 모준은 아이를 번쩍 안아 들고 공중에서 흔들었다. 그러자 아이는 내려 달라고 발버둥을 치며 더 크게 울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 같아 민지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냥 내려놓고 아이스크림 사 주자.”

“이상한 애네. 힘들게 안아 줬더니 울기나 하고.”

모준은 아이를 아무렇게나 바닥에 내려놓았다. 결국 모준과 민지와 아이는 손에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든 채로 잠시 그늘에서 쉬기로 했다.

“미아보호소는 놀이공원 입구에 있대.”

“그래? 그럼 한참 걸어가야겠네?”

모준과 민지는 한숨을 폭 쉬었다. 그 사이에 아이는 입과 손과 옷에 아이스크림을 잔뜩 묻힌 채 정신없이 먹고 있었다. 모준과 민지가 다 먹고 나서 움직이려고 하자 아이는 필사적으로 민지의 옷소매와 손을 잡아 당겼다.

“아. 끈끈해. 더워서 짜증나 죽겠는데. 뭐야. 옷에 다 묻었잖아.”

민지는 아이의 손을 홱 뿌리쳤다.

모준과 놀이공원에 오기로 약속하고 나서 민지는 잔뜩 들떠 있었다. 아직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모준이 꽤 괜찮은 애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첫 키스를 하게 되지 않을까, 이제 어색함은 사라지고 좀 더 가까워지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다. 친구들은 민지에게 내숭은 필수, 진도를 나가도 쉽게 보이지는 말라고 충고했다. 날씨도 좋고 놀이기구도 재미있고 말도 잘 통하고 다 잘 되고 있는 것 같았다. 아이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이를 빨리 미아보호소에 맡기고 다시 모준과 신나게 놀이기구를 타고 싶은 마음에 민지의 발걸음은 빨라졌다.

모준이야말로 오늘 할 일이 많았다. 이제 손을 잡거나 어깨에 팔을 두르는 정도의 가벼운 스킨십은 자연스럽게 할 수 있게 됐으니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했다. 민지는 눈에 확 띄게 예쁜 것은 아니지만 볼수록 귀여운 구석이 있다. 그래서 오늘 가슴 정도는 만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어디서 거지같은 애가 따라붙어서 자꾸 시간만 흘러가고 있다. 모준은 밀려들어오는 사람들을 피해 곡예하듯 걸어갔다.

“반대 방향으로 걸으려니까 너무 힘들다.”

“그냥 아까 거기 파라솔에 두고 올까? 어차피 처음부터 거기 있었잖아. 부모가 그쪽으로 오겠지.”

모준은 민지가 비난할 것을 감수하고 그냥 말해 버렸다. 도저히 덥고 힘들고 시간이 아까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될까?”

적극 찬성하고 싶은 것을 꾹 참고 민지는 슬쩍 말끝을 흐렸다. 사실 진작부터 애를 아무 데나 앉혀 두고 놀이기구나 타러 가고 싶은 것을 모준 때문에 억지로 참고 있었다.

그때 아이가 목에서 무언가를 잡아 꺼냈다. 그것은 햇빛을 받아 반짝, 하고 빛났다.

“얘 좀 봐. 금목걸이 했어.”

“꽤 묵직한데? 좀 사는 집 앤가 보다.”

“목걸이 예쁘다. 어린 왕자 펜던트야. 나 이거 갖고 싶었는데.”

민지는 아이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나 이거 가질까? 라고 물으려다가 참았다. 모준은 그냥 빼서 너 가져, 라고 말하려다가 관뒀다. 민지는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다가 펜던트 뒤에 새겨진 아이의 이름과 휴대폰 번호를 발견했다.

“모준아. 여기 전화번호 있어.”

“그래?”

전화번호가 있다고? 모준과 민지의 눈이 마주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그 짧은 순간에 뭔가 많은 말이 오고 간 느낌이었다. 좀 사는 집 애라면, 우리가 연락해서 부모를 찾아준다면……. 벌써 계산이 착착 나온다는 표정이었다. 모준은 하마터면 사례비, 라는 말을 할 뻔했고 민지는 고생한 보람이 있다고 말할 뻔했다.

“빨리 부모한테 전화 걸자.”

“그래. 얼른 부모 찾아 줘야지.”

모준이 핸드폰을 꺼내어 번호를 누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거 7이야, 9야?”

“7 같은데?”

모준은 7과 통화 버튼을 누르고 상대가 받기를 기다렸다.

“여보세요. 여기 놀이공원인데요. 혹시 여기서 아이 잃어버리셨어요?”

“아니래. 놀이공원에 안 왔대.”

“그럼 9로 걸어 봐.”

두 사람 다 말과 행동이 민첩해졌다.

“안 받아.”

“혹시 버리려고 여기 두고 간 거 아닐까? 요즘 그런 사람들 많다고 하잖아.”

“목걸이가 있는데. 그럼 이걸 남겨뒀을 리가 없잖아.”

“잊어버렸을 수도 있지.”

모준과 민지는 능숙한 파트너처럼 말을 주고받았다. 어색함 같은 건 이미 다 사라진 것 같았다. 그 사이에 아이가 똥을 쌌는지 냄새가 진동했다. 아이는 민지의 손을 잡아끌며 새 기저귀로 갈아 달라고 보챘다.

“하필이면 지금 똥을 싸니. 냄새 진짜 장난 아니다. 모준아. 빨리 전화 좀 걸어 봐.”

“여보세요. 혹시 놀이공원에서 아이 잃어버리지 않으셨어요?”

민지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전화기 안으로 들어갈까 봐 열심히 아이를 달랬다. 그래도 아이가 계속 울자 풍선을 사서 손에 들려주었다.

“부모 맞대. 아까 거기 파라솔 있는 데로 온대.”

모준의 목소리는 아이의 손에 들린 풍선처럼 둥둥 떠 있었다. 모준과 민지는 발걸음도 가볍게 사람들을 헤치고 걸어갔다.

파라솔에 다다르자 저쪽에서 웬 여자가 헐레벌떡 달려와 아이를 부둥켜안고 울기 시작했다. 옆에 서 있던 남자도 달려와 아이와 여자를 한꺼번에 껴안았다. 세 사람은 그렇게 한바탕 포옹과 울음의 의식을 거행했다. 옆에 서 있던 모준과 민지는 멀뚱히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한참 울던 여자가 눈물을 닦으며 아이를 품에서 떼어내었다.

“얘 그새 똥 쌌나 봐. 기저귀도 몇 개 안 가져왔는데.”

“그거 좀 제대로 챙겨서 다니라니까.”

“오늘 이렇게 많이 쌀 줄 알았나 뭐.”

여자는 아이를 들쳐 안고 화장실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남자는 휴지에 코를 여러 번 풀더니 담배를 한 대 피워 물었다. 그때까지 모준과 민지는 상봉한 가족들 옆에 어색하게 서 있었다. 억지로 연출한 훈훈한 미소를 잃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말이다.

“정말 감사합니다.”

드디어 아이의 아빠가 입을 열었다.

“저희가 금방 발견해서 다행이죠.”

“배가 고픈 것 같아서 밥도 먹였는데…… 애가 아무 거나 잘 먹던데요.”

모준과 민지는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 온 파트너처럼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웃었다.

“얼마나 놀랬던지, 미아보호소에도 두 번이나 갔다 왔고. 미아보호소에 맡겼으면 금방 찾았을 텐데……. 괜히 이 넓은 공원 안을 다 뒤지고 다녔습니다. 아무튼 정말 십 년 감수했습니다.”

기저귀를 갈은 여자가 아이를 데리고 나왔다.

“정말 감사드려요. 저희는 여기 있는 줄도 모르고 이 더운데…….”

아이의 아빠가 헛기침을 했다.

“아무튼 감사합니다.”

“뭐, 당연한 거죠.”

세수도 하고 옷도 새로 갈아입은 아이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방긋 웃고 있었다.

“아이가 아이스크림도 잘 먹고 순하더라구요. 어. 풍선은 어떻게 했어? 풍선도 사 줬는데.”

모준과 민지는 다시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 모준은 민지가 좀 오버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귀여운 줄만 알았더니 은근히 아줌마 같은 구석이 있는 것 같았다.

“애 때문에 고생 많으셨네요. 고마워요.”

네 사람은 두 사람씩 나누어 서서 인사를 했다. 고맙다는 말을 듣는데도 민지는 뭔가 어색하고 구걸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모준은 좋은 일을 하고서도 이렇게 처분만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는 게 영 찝찝했다.

남자가 아이를 들어 올려 품에 안았다. 여자는 아이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민지와 모준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끝까지 미소를 지으며 아이의 부모를 쳐다보았다.

“그럼 남은 시간 즐겁게 보내고…… 어떻게, 이쪽으로 가요?”

“네? 아…… 저희는 저쪽으로 가는데.”

“그럼 잘 가요. 정말 고마웠어요.”

부부와 아이는 총총히 멀어져 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모준과 민지는 발이 땅에 붙기라도 한 것처럼 그대로 서 있었다.

“뭐야? 저 사람들?”

부부가 멀어지자 모준이 볼멘소리를 냈다.

“감사하면 다야?”

민지도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

“아 씨. 교묘하게 말로 때우고 가 버리네.”

“저 여자 팔에 금팔찌 봤어? 두께가 내 시계만 해.”

“하여간 있는 것들이 더 하다니까.”

모준과 민지는 테이블에 앉아 인상을 잔뜩 구겼다. 맥이 탁 풀려서 놀이기구고 뭐고 탈 기분이 나지 않았다.

“솔직히 우리가 사례비를 바라고 한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애를 찾아 줬는데 어떻게 입을 싹 씻냐.”

“똥 밟았다고 생각하고 잊어버리자. 시팔. 다음부터는 옆에서 애가 울든지 사람이 죽든지 신경 안 쓰면 돼. 이래서 안 된다니까, 대한민국은.”

모준은 거칠게 바닥에 침을 뱉었다. 민지는 그런 모준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물론 화가 나는 건 이해하지만, 침 뱉는 폼을 보니 좀 놀았던 애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봐 왔던 것과 달리 성격이 급하고 성질도 장난 아닌 것 같았다. 배려를 잘하고 착해 보여서 마음이 끌렸는데 계산도 지나치게 밝은 것 같고 핑계도 잘 대고 말도 좀 함부로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모준이 싫어졌다고 단정할 수는 없었지만 호감이 떨어진 건 확실했다. 첫키스에 대한 기대도 사라졌고 그냥 집에 가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오늘은 다 망친 것 같았다.

“그러게. 세상 인심이 이래서 사람들이 착한 일을 안 하나 봐.”

민지는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모준은 그런 민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귀엽고 여성스럽다고 생각했는데 가만히 보니 말도 많고 짜증도 잘 부리는 것 같았다. 따지기도 좋아하고 은근히 남에게 떠넘기기도 잘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를 싫어하는 티도 확 나고 목걸이 같은 데만 관심이 많아 보였다. 자세히 보니 얼굴도 별로인 것 같고 좀 주책맞은 구석이 있는 것 같다. 아직 가슴도 안 만졌는데 이미 하룻밤 자고 난 것 같다고나 할까. 최선을 다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오늘 어떻게 할래?”

침묵을 깨고 모준이 말했다.

“글쎄. 좀 피곤하긴 한데.”

민지가 다시 내숭을 떠올리며 얼버무렸다.

“그럼 그냥 집에 갈래?”

“뭐 그러든지.”

서운한 마음이 들긴 했지만 민지는 별다른 여지를 남기지 않고 일어서 버렸다. 순식간에 모준과 민지는 집에 돌아가기로 합의해 버렸다. 왠지 아주 오래 사귀어서 볼 장 다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민지는 실컷 자고 일어나서 혜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사이에 모준은 전화도 문자도 하지 않았다. 자존심이 상하고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지금 들어온 거야? 어땠어? 오늘 날씨 죽여줬는데 진짜 재미있었겠다.”

“몰라. 진짜 열라 재수 없는 날이었어.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

“뭔 일인데 그래?”

민지는 놀이공원에서 있었던 일을 다 말했다. 혜주는 처음에는 키득거리며 웃다가 아이의 부모가 그냥 돌아가고 모준과 민지도 집으로 와 버렸다는 대목에서는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서 그냥 왔단 말이야?”

“그럼 어떡해.”

“한 가지라도 확실히 하고 왔어야지. 연애면 연애, 사례금이면 사례금.”

역시 고수는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어떡하지? 걔가 전화 안 하면 나도 계속 하지 마?”

“당연하지. 하지 마. 메신저에서도 먼저 말 걸지 말고 문자도 하지 마. 안 오면 그냥 끝인 거야. 남자가 걔 하나냐? 목 맬 시간에 다른 애 찾아봐.”

시험도 얼마 안 남았는데 모준은 교수님이 설명하는 내용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자본주의와 경제 질서’ 같은 과목 열심히 수강해 봤자 다 소용없다. 모준은 놀이공원에서 있었던 일을 친구들에게 말했다가 욕만 잔뜩 먹었다.

“그래서 자유 이용권 끊어 놓고 그냥 와 버렸단 말이야? 너 바보지? 그냥 자본주의와 경제 질서 재수강해라.”

“휴대폰만 찾아 줘도 2만 원인가 3만 원이야. 그거 정해져 있는 금액이라니까. 그리고 휴대폰도 좋은 거는 주인이 알아서 쳐 줘. 고맙잖아. 그냥 삼킬 수도 있는 건대. 근데 그 사람들 뭐냐. 애 잃어버리고 나서 찾으려면 돈 장난 아닐 텐데. 그냥 갈라 그럴 때 애 들고 확 날라 버리지 그랬어.”

“으이그 꼴통아. 네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 여자애한테 쪽팔리지도 않았냐?”

같이 욕이나 하려고 얘길 꺼냈다가 완전히 바보 취급만 당했다. 친구들이 자기를 보고 웃을 때면 저런 병신, 하며 놀리는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만만하게 보면 큰 코 다친다는 걸 보여 줄 작정이다.


 민지는 다리가 돋보이도록 미니스커트를 입었다. 모준이 이틀 만에 전화를 해서 만나자고 했기 때문이다. 휴대폰에 뜬 번호를 확인했을 때 민지는 벨이 좀 더 울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전화를 받았다. 전화가 안 올 거라고 장담한 혜주의 코를 납작하게 해 줄 생각에 신이 났다. 이제 나한테 완전히 넘어온 거야. 민지는 글쎄, 좀 바쁜데, 하며 몇 번 튕기다가 결국 만나기로 했다.

“놀이공원에서 있었던 일 말이야. 내가 쭉 생각해 봤는데…….”

그 날 일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먼저 얘길 꺼내는 걸 보니 많이 반성한 모양이다. 사과하면 다 용서해 줘야지. 민지는 우쭐해지는 기분을 감추고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그 날 뭐?”

“아무리 생각해도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어.”

모준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버렸다. 어차피 그 날 다 끝난 거 아닌가? 이제 잘 보이려고 애쓸 필요도 없고 그냥 말해 버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 사람들 말이야. 날 너무 우습게 봤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 자기 애 때문에 우리가 돈, 시간 다 버렸는데 지들이 그냥 가?”

이제야 상황 파악이 된 민지는 짜증이 나서 고개를 옆으로 확 돌려 버렸다. 은근히 뒤끝 있는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내 휴대폰에 그 남자 전화번호 남아 있거든. 걸어서 따질 거야. 두고 봐. 얼마라도 꼭 받아낼 테니까.”

“안 준다고 하면 어쩔 건데?”

모준은 테이블 앞으로 바짝 다가앉으며 민지에게도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했다. 민지는 얼떨결에 의자를 당겨 앉았다. 모준의 코가 바로 앞에 있어서 닿을락 말락 했지만 이상하게 아무 느낌도 들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 만나자고 한 거야. 네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른단 말이야.”

“내 도움?”

모준의 계획은 이랬다. 아이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서 양심에 맞는 성의 표시를 요구한다. 만약에 그 상황에서도 남자가 말로 때우려고 한다면 본때를 보여 주겠다는 것이다.

“뭘 어떻게 할 건데?”

“자기 자식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해 주는 거지. 내가 남자랑 협상하는 동안 너는 아이랑 놀아 주면 돼.”

“유괴를 하자는 거야? 말도 안 돼.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심하잖아.”

“왜 말이 안 돼. 너도 그 날 봤잖아. 그런 인간들은 응징할 필요가 있어. 애를 어쩌자는 것도 아니고 그냥 혼만 내 주자는 거야. 그리고 사례비 받으면 무조건 5대 5. 어때?”

모준은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5대 5라면 민지가 확실히 승낙할 거라고 생각해서 그러는 건지, 사례비를 받아낼 자신이 있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민지는 살짝 흔들렸다. 그렇지 않아도 머릿속에는 사고 싶은 물건들이 잔뜩 저장되어 있었다. 혜주는 남자친구를 잘 둬서 기념일이다 생일이다 선물도 척척 받아내는데, 자신은 이제 모준과도 끝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 말이야. 애랑 놀아 주는 경우에만 5대 5로 나누는 거야? 그 전에 전화로 해서 받아내면 어떻게 되는 거야?”

일이 성사되기만 하면 방법에 상관없이 5대 5로 나누기로 한 후에 일을 진행시키기로 했다.

모준은 나가자마자 공중전화 부스에서 남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번에 놀이공원에서 아이 잃어 버렸다가 찾으셨죠? 그때 아이 찾아 준 사람인데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좀 말이 안 되는 거 같아서요. 휴대폰만 찾아줘도 사례금이 3만 원이라는데, 그렇잖아요. 우리가 그때 아이 밥도 사 먹이고 안전하게 데리고 놀아 줬는데……. 입장을 바꿔서 생각하시면…….”

미리 연습을 많이 했는지 모준은 이런 저런 예까지 들어가며 제법 조리 있게 설득하는 것 같았다. 민지는 모준의 뒤에 줄을 선 척 하며 엿들었다. 잘하면 일이 쉽게 풀릴 것 같았다.

그때 갑자기 모준의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저희도 돈하고 시간이 남아 돌아서 그런 게 아니거든요. 자본주의 사회라는 건 말이죠. 공짜라는 게 없는 거예요. 시간과 노동력이 바로 돈이라구요.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어야죠. 안 그래요?”

제법 센 말투였다. 민지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지나가는 사람은 없었다.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오시면 저희 식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거든요. 그건 아실 거 없구요. 아무튼 세상 그렇게 사시면 안돼요. 왜 남의 시간과 노동력을 날로 먹으려고 들어요.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사람이. 다시 전화할 테니까 잘 생각해 보시라구요.”

모준은 전화기를 내리꽂았다. 제대로 갚아 줘야지. 열이 뻗쳐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뭐래? 절대 못 주겠대?”

“말이 통하질 않는 인간이야. 세게 나가야겠어.”

모준은 허공 어딘가를 노려보았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그때는 경황이 없어서 그랬다고, 얼마라도 고마움을 표시하겠다고 나오게 마련이다. 그런데 재수 없게 완전 몰상식한 놈한테 걸려 버렸다.

모준은 앉아서 담배를 한 대 핀 후에 다시 수화기를 들었다. 민지는 혜주의 문자에 어떻게 답을 보낼까 고민 중이었다. 모준과 다시 잘 해 보기로 했다고 말하기도 그렇고 끝났다고 털어놓기도 애매했다.

“아…… 아무리 생각해도 성의 표시는 못하겠다고요? 애를 찾아 줬는데 절대 못하시겠다. 아, 그러시구나. 네, 네, 알겠습니다. 기대하세요. 아주 눈물이 쏙 빠지게 해줄 테니까.”

모준은 다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이렇게 된 마당에 물러설 수는 없었다. 이 와중에도 민지는 휴대폰으로 열심히 문자를 날리고 있었다. 그걸 보고 있자니 괜히 5대 5로 나누기로 했다는 후회가 밀려왔지만 나중을 위해서 참기로 했다.

“야. 일 진행시키자. 내가 주소 알아내서 전화할 테니까 그때 봐.”

“애 유괴해 버릴 거라고 확 말해 버리지. 그러면 줄지도 모르잖아.”

“아니야. 그런 놈은 뜨거운 맛을 봐야 돼.”

이젠 돈이 아니라 자존심이 문제다. 막 대해도 되는 놈이 아니라는 걸 보여 주고 말테다. 모준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이의 가족이 산다는 아파트에 들어섰는데도 민지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정말 뭔가 하기는 하는 건지 이렇게 해서 돈을 받을 수는 있는 건지. 손에서 땀만 배어났다.

“나 너무 떨려.”

“걱정할 거 없어. 너는 그냥 애랑 놀아 주기만 하면 돼.”

모준은 007시리즈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온 몸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미션을 수행하지 못하면 큰 일이라도 벌어질 것처럼 비장한 표정이었다.

모준과 민지는 일단 놀이터 근처의 벤치에 앉았다. 벤치에 앉아서 웃고 떠드는 평범한 대학생 커플로 위장하는 게 목적이었다. 아이가 놀이터에 나오면 슬슬 접근해서 경계심을 없앤 다음 데리고 가겠다는 게 모준의 계획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민지는 이렇게 해서 유괴를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유괴를 할 거라고 경고한 건 아니지만, 며칠 전에 아이를 잃어버릴 뻔한 사람들인데 놀이터에 막 내보낼 리가 없다. 게다가 어른이 따라 나온다면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았다.

“무작정 기다리는 건 좀 무모한 것 같아.”

“그래도 이게 제일 안전해. 좀 더 기다려 보자.”

2시를 넘기자 배가 찢어질 것처럼 고팠지만 자리를 비울 수 없어 꾹 참아야 했다.

“집 주소 말고 다른 건 알아낸 거 없어? 할머니가 봐 준다든가, 뭐 그런 정보.”

“집 주소도 겨우 알아냈어.”

민지는 슬슬 짜증이 났다. 수업도 빼먹고 왔는데 아무래도 가능성이 없는 것 같았다. 민지는 벤치에서 일어나 주변을 서성거렸다. 난 그냥 빠질래, 라는 말을 하고 싶어서 속이 근질근질했다. 그때 어린이집 버스 한 대가 아파트 안으로 들어와 아이들을 내려놓았다.

“봐봐. 저기 있어. 그 애.”

모준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정말 놀이공원에서 보았던 그 아이가 서 있었다. 여전히 귀여운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이제 네가 가서 애를 데려와. 빨리.”

민지는 얼떨결에 아이에게 달려갔다. 아이는 집 쪽으로 걸어가다가 민지가 다가가서 손을 내밀자 그냥 따라왔다. 경계심은커녕 민지를 보고 웃기까지 했다. 애들이 좋아하는 얼굴이라니, 기분이 이상했다.

“꼬마야.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세 사람은 모준의 자취방으로 갔다. 아이는 울지도 않고 먹을 것을 주면 잘 먹고 잘 놀았다. 부모의 애를 태워야 한다며 모준은 하루 정도 지나서 전화를 하겠다고 했다. 한 방에 같이 있으니 무슨 가족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밤이 되자 모준이 혼자서 애를 못 보겠다고 징징거려서 어쩔 수 없이 민지는 집에 전화를 걸었다. 과제 때문에 학교에서 밤을 샌다고 둘러대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해 주는데 너 정말 협상 잘해야 돼.”

“당연하지. 걱정하지 마.”

민지는 잠에서 깨어난 아이의 기저귀를 갈아주었다. 그 모습을 보며 모준은 방밖으로 나왔다. 하루 사이에 아이의 기저귀와 간식거리가 방 한구석을 차지해 버렸다.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전화하고 올 테니까 애 잘 보고 있어, 라고 말하자 민지는 상냥하게 응, 이라고 대답했다. 어쩐지 책임감 비슷한 것까지 느껴졌다.

아이를 데리고 있다고 하자 남자는 어제 집에서 본 거 같은데, 하며 말끝을 흐렸다. 도대체 자기 애가 집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놈이라니 기가 찼다.

“아무튼 애는 우리가 데리고 있으니까 허튼 수작 하지 마. 그러게 처음부터 성의 표시를 했으면 좋았잖아. 약속 장소는 저녁에 알려줄 테니까 현금으로 2천만 원 준비해 둬.”

칼은 이쪽에서 쥐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반말이 술술 흘러나왔다. 모준은 천만 원으로 뭘 할까 생각하며 방으로 돌아왔다. 이 정도 금액이면 괜찮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갖고 싶은 것들을 떠올리다 보니 너무 적게 부른 것 같았다.

방에 돌아오니 민지는 아이와 함께 잠들어 있었다. 모준은 어젯밤부터 한숨도 자지 못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낮잠까지 자다니 정말 천하태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됐어? 돈 언제 준대?”

일어나자마자 민지는 그것부터 물었다. 화장기가 다 지워져서 아줌마 같은 얼굴이었다. 더러운 일은 자기가 다 하는데 똑같이 천만 원씩이라니 좀 불공평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따가 전화해서 약속 장소 정하려고. 천만 원 달라고 했어. 너무 많이 요구하면 골치 아파질 수도 있잖아. 어차피 사례금 정도만 원하던 거니까.”

“그럼 오백 만원씩이네.”

민지는 실망한 것 같았지만 다행히 의심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내가 이쪽으로 가서 남자를 만날 거야. 돈을 받고 나서 확인한 다음에 너한테 전화를 걸게. 그러면 너는 건물 지하에 있는 슈퍼 앞에 있다가 애를 데리고 나오면 돼. 알았지?”

모준과 민지는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해서 동선을 짰다.


민지는 대형 슈퍼마켓 앞에 서서 모준의 전화를 기다렸다. 아이는 슈퍼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지 자꾸만 민지의 손을 잡아당겼다. 돈을 받든 못 받든 늦어도 5분, 빠르면 3분 후에 전화하기로 했는데 모준에게서는 10분이 지나도 전화가 오지 않았다. 설마 경찰에게 잡힌 건가? 그렇다면 최악의 경우다. 모준이 잡혔다면 민지도 안전할 리가 없다. 공범으로 밝혀져 감옥에 갇힐 것이다. 겨우 스무 살인데 학교 생활도 인생도 다 끝이다. 어떻게 하지? 손톱을 물어뜯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모준이었다.

“뭐야. 놀랬잖아. 어떻게 된 거야. 지금 애 데리고 나가면 돼?”

“그럼. 지금 데리고 오면 되지. 아가씨 남자 친구는 우리가 데리고 있으니까.”

민지는 아이를 데리고 나가다가 멈춰 섰다. 느끼한 목소리였다. 어쩐지 경찰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누구세요? 경찰이에요?”

“민지야. 나야. 무조건 아저씨들이 하자는 대로 해. 안 그러면 큰일 날지도 몰라. 무슨 조직인가 봐. 완전히 잘못 걸렸어.”

모준이 울면서 애원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자 아이는 거기 그대로 두고 가고. 남자친구 찾고 싶으면 내일까지 이천만 원 준비해. 우린 경찰하고도 끈이 닿아 있는 사람들이야. 그러니까 허튼 수작 하지 말고 돈 제대로 준비해. 인생 종치고 싶지 않으면. 내일 10시에 그 슈퍼 앞에서 교환하자고.”

아저씨들은 낄낄거리고 모준은 아직도 우는 것 같았다. 전화를 끊고 나서 민지는 멍하게 서 있었다. 아이는 여전히 민지의 손을 잡고 있었다. 애를 데리고 있어야 유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다. 경찰하고 닿아 있다는데, 아이를 데리고 있으면 꼼짝없이 유괴범이 되는 거다. 아이는 그냥 두고 가면 된다. 민지는 아이의 손을 놓았다. 그런데 모준까지 구할 필요가 있을까? 진짜 남자친구도 아니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은 없는 앤데. 이 일을 계획하고 밀어붙인 것도 모준이고 운이 나빠서 납치된 것도 모준이다. 그냥 모르는 척 하면 된다. 하지만 구해주지 않으면 모준이 민지를 끝까지 물고 늘어질지도 모른다. 이천만 원보다는 아직 인생이 더 소중하다. 그런데 그렇게 큰돈을 갑자기 이디서 구하지? 민지는 다시 손을 잡으려고 버둥대는 아이를 뿌리치고 걸어갔다.

휴대폰을 뒤져봤지만 친구들이라고 해 봐야 다들 학생이라 그런 큰돈은 갖고 있을 리가 없었다. 모준의 방에 뭔가 돈이 될 만한 게 있었나, 떠올려 보았다. 겨우 컴퓨터와 책상뿐이었다. 집에 있는 물건 중에 뭔가 값나가는 게 없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런 게 있을 리 없었다. 아빠 엄마에게 뻥을 쳐서 뜯어낸다 해도 백만 원 이상은 무리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엄마나 아빠의 카드를 훔치는 방법밖에 없었다.

어떻게 훔칠까, 고민하면서 걸어가는데 딩동, 하고 문자 메시지가 왔다. 쓸데없는 스팸 문자였다. 학교에 가지 않았는데 연락해 오는 인간은 하나도 없었다. 짜증이 나서 삭제하려다가 대출이라는 말에 바로 삭제 취소를 눌렀다. 긴급 대출, 신불자 대출, 무보증, 무담보. 카드를 훔치지 않고서도 돈을 마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민지는 통화 버튼을 꾹 눌렀다.


모준은 몇 대 맞은 것 같기는 했지만 다친 데 없이 멀쩡해 보였다. 봉고차에 탄 남자들은 돈을 받아서 신속하게 확인하더니 바로 가 버렸다.

“고맙다. 네가 돈 안 가져올까 봐 걱정 많이 했는데. 너 안 오면 장기(臟器) 다 떼다 판다고 협박했었어. 그러고도 남을 놈들이야.”

모준은 또 울려고 하는 것 같았다. 민지도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대출해 준 남자들은 얼굴에 칼자국이 있고 몸에 문신을 새긴 사람들이었다. 지장을 찍어야 하는 각서가 열 장도 넘었다. 슬쩍 계산을 해보니 이자가 어마어마했다.

“돈 구할 때가 없어서 사채 빌려 썼어. 이것도 못 갚으면 장기 떼어간대.”

“우리가 애 아빠를 너무 쉽게 봤어. 비겁한 새끼. 조직의 힘이나 빌리고.”

모준과 민지는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겨우 스무 살인데 아주 오래 살아서 볼 장 다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빚 말인데…… 네가 갚을 거지?”

민지가 침묵을 깨고 말했다. 모준은 놀라서 민지를 쳐다보았다.

“어? 내가 다? 그것도 5대 5로 나누는 거 아니었어?”

민지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모준을 쳐다보다가 다시 한숨을 쉬었다. 세상에 만만한 일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한 모준과 민지였다.《문장 웹진/2008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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