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의 블루베리 케이크

 

아리의 블루베리 케이크




윤효




1


“네 위가 안 좋아서 먹지도 못할 텐데 아무래도 괜한 짓을 하는 것 같애. 어떤 재료를 써도 케이크는 몸을 달래 주는 음식은 못 되는데. 달래 주기는커녕 몸 구석구석을 침처럼 자극해서 모든 감각을 일깨워 버리지. 난 모양도 맛도 마음에 쏙 드는 케이크를 먹고 나면 뱃속이 봄꽃들이 잔뜩 핀 남한강처럼 출렁거리는 것 같아. 그걸 달래 주려면 또 칼칼하게 개운한 무언가를 먹어 줘야만 해. 뭐, 그래도 한 끼 굶는 걸 감수할 정도의 매력은 있지만.”

“다 먹으면 되지. 살이 쉽게 찌는 체질도 아니면서.”

“아, 아냐, 내가 얼마나 쉽게 부푸는데…… 우리 언니가 지어 준 별명이 오래 찐 호빵이야. 요기, 요 아래가 염치도 없이 볼록해질까 봐 주스도 하루 한 잔 이상은 절대 안 마셔.”

 

 

아리는 손등이 도톰하게 부풀었으면서도 긴 손으로 자신의 아랫배를 톡톡 두드리며 명랑하게 웃었다. 한참을 웃고 나선 모양 칼을 집어 들더니 갓 구워낸 스폰지 케이크에 눈뭉치처럼 흰 생크림을 정성껏 바르기 시작했다. 깔끔한 성미이면서도 구불구불한 긴 머리카락은 잘 묶지 않는 아리는 작업 중인 조각가라도 된 것처럼 생크림의 표면을 정교하게 다듬어서 큼직한 흰 꽃잎의 형체를 만들어 갔다. 아리는 말했다.

“있잖아, 먹거나 요리를 하는 행위와 사랑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 같아. 사랑에 빠진 사람은 처음엔 심하게 살이 빠진대. 사랑에 빠져 버린 것 자체가 스트레스거든. 신경전을 할 만큼 하다 서로의 믿음을 확인하고 한동안 헤어지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면 그때부턴 둘이 맛있는 것을 먹으러 다녀. 신혼인 남편들을 봐. 아내가 열심히 배워 해 주는 요리들을 기쁘게 먹어 주느라 삼십대에도 배가 뽈록해져 다니잖아. 또 영화를 봐도 그래. 자살한 장국영이 나오는 옛날 영화 <해피투게더>에서 양조위가 장국영에게 끊임없이 음식을 해 먹이는 것 봤지? 그건 동성애자인 두 남자 중 양조위가 여자 배역을 맡고 있다는 증거야. 또 <브로크백마운틴>에서도 두 목동이 산 속에서 둘이서만 살 때 늘 프라이팬을 끼고 사는 쪽도 여자 배역을 맡은 남자야.”

정말 그러네. 터키풍의 청록색 소파 위에 길게 엎드린 채 붉은 실크 쿠션에 한 쪽 뺨을 묻은 그녀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두 영화 모두 본 적이 없다는 것이 조금 찜찜했지만 이미 태연하게 아는 척을 해 버린 뒤였다. 그녀는 거실 바닥에 놓인 리모컨을 주워 아무 번호나 꾹꾹 눌러댔다. 케이블 채널인 5번에서 출연자들의 옷차림으로 보아 시즌이 지난 듯한 오락 프로그램을 방영하고 있었다. 여배우들과 개그맨들이 나와 남녀관계를 두고 말장난 비슷한 토론을 하는 프로그램인데 꽤 재미있었다. 여자 개그맨이 짓굳은 얼굴로 한 남자 개그맨의 얼굴을 가리키며 스릴 있고 공격적인 외모라고 품평했을 땐 그만 그녀의 입에서도 웃음이 터졌다. 가스가 꽉 찬 탄산음료 캔의 뚜껑이 열려 버리듯이.

그리고 그 순간 그녀는 위를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그녀의 상체를 지탱해 주는 두 어깨와 두 팔을 잇는 뼈가 서서히 탈구되어 가는 듯한 불쾌하고 두렵고 익숙한 느낌도 곧 따라왔다. 이주일 전 집으로 날아온 남편 명의의 신용대출 확인서를 보고 난 직후 시작된 증세였다. 시댁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어 간접적으로 그 돈이 적어도 그의 가족들에게 쓰인 건 아니라는 걸 확인한 후 처음 열어 본 그의 휴대폰 속의 수신 메시지들은 그녀의 위 내부를 완전히 산화시켜 버렸다. 오늘은 언제 끝나요? 기다릴까요? 그냥 갈까요? 팀장님, 사랑해요. 날씨가 너무 추워요. 내일은 꼭 까망 코트로……. 발신인이 이은주로 돼 있는 그 메시지들은 저장된 팔십여 개의 메시지들 중 삼분의이를 차지하고 있었다. 또 평균 하루에 세 번쯤 보낸 것 같았다. 그것은 명백하게 그와 연애하고 있는 여자가 아니면 보낼 수 없는 메시지들이었고, 그녀는 통속적이고 너절한 고민을 껴안기엔 너무 빠른 결혼 팔개월째 된 서른 살 여자였다. 배신임이 분명한 상황 앞에서도 팔 년째 연애해 온 그와 헤어져 버리겠다고 단언할 순 없지만 결혼 전에 알았더라면 그와 결혼하지 않았을 거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녀는 통증을 지긋이 삼키면서 거실 안을 둘러봤다. 대형 텔레비전과 독일제 하베스 오디오, 흰 대리석 드레스 같은 호화로운 물건들이 오늘따라 더 낯설어 보였다. 장난감 바다처럼 꾸며진 수족관 속에서 작은 입을 무표정하게 뻐끔거리며 헤엄치고 있는 금붕어들조차도 그녀를 조롱하고 있는 듯했다. 이 화려한 집은, 당신의 결혼은 넌센스야, 라고.

단지 민트색으로 거칠게 칠한 원목 싱크대와 거실 사이에 긴 조리대가 놓여 있는 아일랜드식 주방과 레이스 프릴로 장식된 흰 셔츠를 입은 아리만이 한 세트로 제작되어 이 집으로 온 것처럼 잘 어울렸다. 냉장고 옆면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아리가 여성 잡지들에서 오려내거나 인터넷에서 다운받아 붙여 놓은 원색의 요리 레시피들도 영화 세트 속의 부엌처럼 청결하고 한적했던 주방에 생생한 현실감을 불어넣어 주고 있었다. 엄마의 욕망과 감시, 계속되는 과외에 넌더리를 내면서도 그럭저럭 따라가서 간신히 치의대를 졸업하고 개업의가 된 공모자로서 할 말은 아니지만, 그녀는 엄마가 마련하고 치장해 준 이 아파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서양 앤틱과 중국 고가구, 거창한 오크 서가로 꾸며진 이 집은 남의 시선에 과민한 관료인 아버지의 눈치를 보느라 못해 본 사치들이 집대성된 엄마의 별장이었다. 가끔은 거실 한 쪽의 붉은 포인트 벽지 속의 큼직한 흰 목단꽃 무늬들이 집에 들어앉아 아이들과 씨름이나 하기엔 아까운 엄마 같은 여자들의 미련과 뒤틀린 욕망이 흘리는 굵은 눈물처럼 보이기도 했다.

옅은 안나수이 향수 냄새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어느새 눈앞에 커다란 청보라색 꽃잎 같은 케이크가 떠 있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무기력하게 이완되어 있던 감각들이 너무 아름다운 사물을 보자 놀라 깨어나 버린 것이다. 아리가 속삭였다.

“케이크 전체에 블루베리 가루를 듬뿍 뿌려 준 뒤 청포도알과 화이트 초컬릿으로 토핑을 해 준 거야. 생크림의 달콤함과 블루베리의 새콤함이 결혼을 한 셈이지.” 

그녀는 대꾸를 하지 않고 한숨만 길게 내쉬었다. 비록 먹는 음식이라 해도 너무 아름다운 것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냄새를 맡거나 만지거나 먹거나 부숴뜨릴 수 없는 무엇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녀는 아리를 올려다보며 웃다 고개를 저었다.

“너무…… 너무 예쁘다. 이런 걸 어떻게 먹니?”

실제로 케이크의 주성분인 밀가루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통증이 배 위쪽을 할퀴고 가는 것처럼 쓰라렸다. 문제는 위 안을 산화시켜 버린 강력한 스트레스가 계속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약을 꾸준히 먹고 식사도 조절하고 있지만 스트레스 역시 그 못지 않게 지속적이어서 상태가 나아지질 않고 있는 것이다. 상대가 전폭적인 반응을 보여 주지 않으면 심하게 위축돼 버리는 타입인 아리는 잽싸게 두 손으로 케이크를 받쳐 들고 주방으로 갔다. 아리는 케이크에 랩을 씌워 양문형 냉장고의 냉동실에 넣으면서 말했다.

“네 위가 다 나으면 꺼내 먹자. 아, 이걸로 크리스마스 파티를 해도 되겠다. 열흘쯤 남았나?”


  

2 

   

“단 한 달 사이에 어떻게 이렇게 환자가 줄 수 있어요? 전엔 이간호사와 저 둘이서도 감당을 못해 돌려보낸 스케일링 환자도 많았는데”

때가 조금 묻은 연분홍색 제복 때문에 검은 피부가 더 칙칙해 보이는 윤간호사는 계속 투덜거리며 산만한 동작으로 진료실 안을 오갔다. 가끔 자신도 모르게 툭하면 월권을 하지만 악의도 꼼수도 없는 처녀라는 걸 알면서도 요즘은 그녀의 존재 자체가 스트레스가 되고 있었다. 꽤 엽렵하고 활달한데도 의외로 몸 동작은 둔한 그녀는 창가 쪽으로 가서 로만쉐이드를 올리고 밖을 내다봤다.

“어떻게, 굳이 내다보면 치위생사들의 옷 색깔까지 보이는 곳에 개업을 할 수가 있어요? 대단지도 못되는 아파트의 한 상가에서. 그런데 원장님. 이안 치과 두 원장 중 한 분은 육 개월 전까지 S아파트 상가에서 병원을 했던 분이라면서요?”

그녀는 대답을 하지 않은 채 고개만 끄덕였다. 더 이상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다는 사인으로 알아주길 바라면서. 처녀다운 활기와 호기심까지 죄 쏟아부어 분노를 과장하고 있지만 사실은 두 간호사 모두 다른 병원을 알아보고 있을 거라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녀들의 판단은 맞았다. 게임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고 그 휴유증은 소유주인 그녀 혼자서 껴안아야 할 것이다. 너처럼 하찮고 서투른 존재는 한 방에 눕혀 버릴 수 있어, 하고 으름장을 놓는 상대의 마인드에 아무리 치를 떤다 해도 상황을 바꿔 볼 역량 같은 건 없었다. 당연히 치과 역시 환자들이 경험이 적은 젊은 의사를 꺼리는 분야라는 걸 알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일하면서도 동문이나 지역 치과 의사들 모임에 꼬박꼬박 드나들며 정보를 모으고 좋아하지도 않는 골프에까지 끼느라 휴일도 반납했던 지난 일 년도 물거품이 될 것이다.

그녀가 페이닥터 생활을 빨리 접은 이유는 간단했다. 이자가 나가는 은행 대출부터 갚은 뒤 엄마가 과천 아파트를 담보로 대출해서 빌려 준 돈을 빨리 갚고 완벽하게 자유로워지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맥빠지게도 지금 인정하게 되는 건 엄마의 충고를 듣는 쪽이 훨씬 나았다는 것이었다. 엄마는 초기에 버티는 것이 힘들더라도 경험 많은 고용 의사를 쓰고 인테리어도 눈에 확 띄게 하고 까페 비슷한 휴식 공간도 마련해 주어야 한다고 집요하게 주장했었다. 그건 네 실력 못지 않게, 아니 어쩌면 더 중요해! 하고 핏대를 올리면서. 체질이 되다시피 한 반항심 때문에 무슨 충고든 무시부터 하고 보는 딸과 마주칠 때마다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요즘 세상엔 애초에 남다르지 않으면 추월당하기 마련이야!

오래된 습관 때문에 디카페인 커피 믹스들이 담긴 유리통을 계속 만지던 그녀는 한참 더망설이다 통을 아예 싱크대 위쪽의 서랍장 안에 넣어 버렸다. 가운을 벗어 옷걸이에 걸고 손을 씻을 때 누군가 대기실과 진료실 사이의 간이 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천연 여우털인 듯한 부드러운 연회색 털이 달린 칼라 속에 파묻힌 아리의 선해 뵈는 동그란 얼굴이 생긋 웃고 있었다. 석양 직전의 햇빛들이 마지막으로 힘을 모아 아리의 작은 얼굴 속으로 스며들어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환해서 눈이 부셨다. 그녀는 힘없이 웃었다.

“웬 일이야?”

“네가 위염 때문에 좋아하는 자판기 타입 커피를 못 마신다고 했잖아. 그래서 칡과 대추를 꿀에 재서 한방차를 만들어 왔어. 꿀은 어른의 위와 장 모두에 좋거든.”   

아리는 쇼핑백에서 잘게 채 썬 대추들이 잠겨 있는 황갈색 액체가 담긴 유리병을 꺼내 소형 냉장고 위에 얹었다.

“빨리, 자주 마실 거면 냉장고에 넣지 않아도 돼. 꿀과 대추 모두 항산화작용이 강해 쉽게 변하지 않는 약재들이거든.”

“아는 것도 많아. 대체 사람에게 필요한 거라면 모르는 게 뭐야?” 

“많고도 많지. 그런데 오늘 약속 있어?”

“모임이 있었는데 빠질 거야. 첫 개업에서 실패할 확률이 백퍼센트가 돼 버린 사람이 불처럼 번창해 가고 있는 사람들 틈에 옹색하게 끼어 앉아 있고 싶겠어? 시장이나 봐서 들어가자. 아, 그런데 넌 집에서 나오는 길이어서 곧장 들어가기 싫겠다.”

“아 아냐. 뭐, 행복해지기 위한 방법들 중 하나를 써 먹으면 되지.”

아리는 얼굴을 붉힌 채 어깨를 으쓱했다.

“작고 예쁜 화분을 사는 것도 그 중 하나일 테고…….”   

“너 정도면…… 재능이야. 행복학이라고, 학문 같은 것으로 체계화시켜 봐야 하는 거 아냐?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학문이 되겠지. 그런데 우리, 오늘은 좀 먼 백화점으로 가자.”  

“안돼. 백화점은 비싸.”

“마감 시간이 닥쳐서 가면 괜찮아. 자, 내가 돈도 줄게. 이거 일 주일치 생활비!”

그녀는 지갑에서 십 만원권 수표 세 장을 꺼내 아리에게 내밀었다. 멍한 표정으로 보던 아리가 한참 후 색다르게 재미있는 게임 하나를 발견했다는 듯이 까르르 웃으며 수표들을 받아 들여다봤다. 그것들을 빨간 루이비통 지갑에 담아 핸드백에 넣은 뒤에도 쿡쿡 웃던 아리는 뭐가 그리 우스운지 그녀와 팔짱을 끼고 병원을 나올 때도 손등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백화점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는 아리를 일층 한 귀퉁이에 있는 화원으로 들여보낸 후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사층에서 오층으로 올라가면서 팔층에 있는 백화점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 이은주가 어디에서 근무하느냐고 물었다. 잠시 후 가늘고 화사한 목소리를 가진 여직원은 이은주가 두 사람인데 한 사람은 팔층에 있는 주방용품 매장에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오층 숙녀복 매장인 진에 근무하고 있다고 친절하게 말해 주었다.

그녀는 먼저 8층에서 내려 주방용품 매장을 기웃거려 봤다. 팔층의 이은주는 삼십대 중반의 기혼자로 보였는데 이름처럼 평범하고 화사하면서도 조금 나태해 보였다. 습관처럼 크고 작은 불만들을 말로 토해낼 순 있어도 대담하게 일탈을 해 버릴 만큼의 갈증이나 배짱은 없어 보였다. 그녀는 자신의 느낌이 우습다고 생각하면서도 망설이지 않고 오층으로 갔다.

젊은 여점원들의 가슴 위의 명찰들을 한참 훑어보다 찾아낸 이은주는 희고 깡마르고 평범한 듯하면서도 평범하지만은 않아 보였다. 그녀는 남편의 연인으로 짐작, 아니 확신이 되는 처녀를 눈으로 보는 것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전감각적인 안테나로 집요하게 관찰했다. 불안해하면서도 그것을 지겨워하는 크고 퀭한 눈, 쉽게 속을 내비치지 않을 것 같은 작고 얇은 입, 약간 각이 진 윤곽으로 이루어진 이은주의 얼굴은 까다롭고 왠지 위태로워 보였다. 또 담백한 무생물의 아름다움을 한껏 자랑하는 색색의 옷과 마네킹들 틈에서 초라하고 쓸데없이 복잡해 보였다.

그녀는 멍하게 서있는 처녀 쪽의 매대로 가서 블라우스를 고르기 시작했다. 당황한 처녀는 습관적인 친절함이 담긴 말투로 설명을 해 주었다. 언제부터인가 그녀는 매장의 왼쪽 벽에 붙은 큰 거울을 통해 처녀와 자신 사이에 닮은 점이 있는가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녀와 처녀가 남편의 일관된 취향의 대상들인지 아니면 그가 분열된 취향을 갖고 있는 남자여서 그녀는 어릴 때 만난 풋사랑일 뿐 사실은 처녀 같은 타입이 그의 원형이었는지 아니면 정반대인지 궁금해졌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곧 자신의 호기심이 혐오스러워졌다. 머리와 뒷 목덜미 사이의 부위가 삐긋하더니 위에 통증을 느낄 때마다 뒤따르던 양 어깨의 뼈들이 탈구되어 가는 듯한 느낌도 다시 몰려왔다. 블라우스들이 모두 엇비슷해 보이기 시작했을 때 그녀는 한 손으로 이마에 밴 식은땀을 닦아내며 매장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에스컬레이터가 아닌 엘리베이터를 타고 일층으로 갔다. 그녀는 몸을 끌다시피 하며 화원을 향해 걸어갔다.

키 작은 눈의 여왕이라도 된 것처럼 흰 빛에 가까운 연회색 코트를 입고 종아리에 착 달라붙은 긴 회색 부츠를 신은 아리는 진열대 앞에 서서 화분들을 두고 주인과 흥정을 하고 있었다. 보얀 여우털 속에 묻힌 아리의 옆얼굴이 웃을 때마다 반짝반짝 빛이 나는 걸 보고 있자니 서양 동화 속의 물정 모르는 공주가 놀이 삼아 상거래를 해 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또 조그만 화원 안에서 종종걸음치는데도 사뿐사뿐 걷는 것처럼 보였다. 이상하게도 체구가 작고 상당히 예민해 뵈는 여자인데도 아리는 가끔 아주 크고 풍성해 보였다. 또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참새처럼 수다스러운데도 가끔은 연기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아리를 오래 보고 있으면 어린 짐승을 배불리 먹고 늘어져 자는 육식 동물이라도 된 것처럼 태평스러워진다는 점도 이상했다. 그녀가 다가가자 아리는 흥정 중인 관엽 식물들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이건 화장실의 암모니아 가스를 제거해 주는 관음죽이고 저건 새 집이나 새 가구의 냄새를 없애주는 싱고니움, 또 저쪽에 있는 애는 가스렌지가 뿜는 일산화탄소를 없애 주는…… 아, 맞다. 스킨답서스! 그리고 이 잔털 투성이 선인장은 최고의 전자파 킬러야.”

“쉽게 들고 갈 수 있는 것들이면 다 사자.” 

그녀는 지갑을 꺼내 화분 값을 계산한 후 화원의 간이 의자 위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아리가 그녀의 지친 얼굴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녀는 힘없이 씩 웃어보였다. 그리곤 눈짓으로 지하에 있는 마트로 가는 하강 에스컬레이터를 가리켰다. 아리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화원을 떠났다. 그녀는 상체에서 완전히 힘을 뺀 채 감자 자루처럼 주저앉아 멍한 표정으로 백화점 안을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을 봤다.



3


집에 돌아오자마자 아리는 화분들을 각기 맞춤한 자리라 생각되는 곳에 놓아 준 뒤 주방으로 가서 빈 델몬트 주스병을 찾아 깨끗이 씻었다. 거기에 화원 주인에게 얻어 온 분홍빛 개량 백합 두 송이를 꽂아 준 뒤 시장을 봐 온 식료품들을 씻기 시작했다. 이미 녹초가 된 채 소퍼 위에 길게 누워 있던 그녀는 리모콘을 찾아 아무 번호나 눌렀다. 홈쇼핑 채널들과 일일 드라마들이 휙휙 지나갔다. 그녀는 기능성 한방 샴푸들이 꽉 찬 화면으로 채널을 고정시켰다. 잠시 후 기름지고 사근사근한 쇼호스트의 음성에 아리의 음성이 섞여들었다. 

“네가 전복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큰 생합을 사 왔어. 어린 굴과 다진 야채를 함께 넣어 죽을 끓여 줄게. 네가 위만 나쁘지 않으면 해 주고 싶은 요리가 많은데. 음, 파스타에 크림소스를 부은 뒤 데친 토마토를 넣어 함께 볶아 준 스파게티도 일품이고 또 안심을 우려낸 국물에 온갖 야채를 넣어 끓인 스프도 맛보여 주고 싶어.”

그녀는 기운이 없어 대답을 못하고 희미하게 웃기만 했다. 자신이 웃고 있다는 것만은 알아 주길 바라면서. 수족관 속을 유유히 헤엄치는 열대어들처럼 무심한 눈으로 한방 샴푸들을 보던 그녀는 한참 후 위의 통증이 누그러져 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언제부터인가 연기처럼 부옇고 따뜻한 막이 자신의 몸을 에워싸고 있는 걸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뜻밖에도 기분도 바닥에 떨어져 버렸다고 할 수 있을 만큼 나쁘지 않았다. 뭐랄까, 아찔하도록 높은 곳에서 떨어졌는데 누군가가 받쳐 놓은 쿠션을 깔고 누워 있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또 타인이 그녀를 위해 조용히 음식을 만들고 있는 이 상황도 감동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그녀가 베푼 호의의 댓가와도 같은 것이라 해도 감동이 희석되진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호의가 순수하지만은 않았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십일 년 만에 아리를 만난 건 흔하지 않은 남녀공학인 P고교 졸업생으로서 동문 모임에 갔을 때였다. 어릴 때 만나서 순수하고 허물없는 데다 의사들의 모임과는 달리 다양한 직업들을 엿보는 재미까지 있어서 이해 관계와 상관 없이 일년에 두 번쯤 통풍하는 기분으로 나가고 있는 모임이었다. 또 유력 일간지 사회부에 있다 자매지인 여성 잡지 편집장으로 옮긴 권선배가 빠트리지 않고 연락하고 출석 체크를 하는 바람에 그의 사정거리를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간부들의 인사말이 끝난 뒤 처음 모임에 나온 아리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됐을 때 권선배는 잠깐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그녀를 일으켜세웠다. 그는 그녀가 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하고 향수 용기들을 디자인하다 요즘은 휴식 겸 한국 소비자들의 욕망 패턴 파악을 위해 자기네 잡지 모니터로 활약하고 있다고 거창하게 소개를 해 주었다. 술자리에서 사람끼리 소개시켜 줄 때마다 적당히 뻥을 섞어대는 권선배의 습성을 알기에 아리의 경력도 얼마쯤 깎고 들었지만 그것과는 상관 없이 그날 밤 그녀는 아리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사실 아리는 그녀가 일학년 가을에 전학을 와서 조금 친해졌다 이, 삼학년때는 한반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복도나 급식실, 등하교 길에서 마주쳤을 때의 인상이 더 강하게 남아 있는 아이였다. 윤곽이 또렷하진 않아도 모세 혈관이 비칠 만큼 투명한 흰 피부와 몸에 꽉 붙는 교복을 거북해하지 않는 가냘프고 곧은 체격도 늘 다이어트 강박증에 시달리는 여고생들에겐 선망의 대상이었지만 그녀를 유독 돋보이게 했던 건 그녀가 그린 그림들이었다. 특히 삼학년 가을축제에서 그녀가 장원을 하는 바람에 전교생에게 공개된 수채화는 독특했다. 온갖 형태와 색깔의 국화들을 한데 모아 놓은 그녀의 정물화는 채도가 유난히 높으면서도 색감이 신비로워서 모든 부분에서 훈련을 받은 흔적이 역력한 미술반 아이들의 그림들과는 달랐다.

또 그다지 공부를 잘하는 편이 아닌데도 자신만으로 당당하고 스스럼없는 그녀가 풍기는 은근한 우월감도 불쾌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일상에서 함께 지내다가도 불쑥불쑥 일탈해서 어떤 사태에 대해 엉뚱한 시각을 내비치며 꿈을 꾸는 듯한 말투로 말하는 그녀를 다른 시대 다른 공간의 사람쯤으로 간주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그리고 십년이 넘게 흘러 서른 살이 돼 버린 그녀의 눈길을 끈 것도 역시 아리가 줄기차게 간직해 온 과장되고 몽환적인 분위기였다. 아리는 삼차로 간 와인바에서 잠깐 구석 자리에 둘만 남게 됐을 때 여전히 자신과의 우정에 대해 희미한 미련을 품고 있는 그녀 앞에서 대단한 비밀이라도 들려 주듯이 자신의 근황을 알려 주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 줄곧 일본에서 살고 있는 언니에게 소개받은 남자 친구는 도쿄에서 건축 설계사무소를 운영하고 있어. 노출 콘크리트로 거의 종교적인 감정을 표현해내는 건축가 안도의 열렬한 추종자지. 그이와의 결혼 이야기가 오가면서 일본으로 직장을 옮기는 일을 검토해 왔고 실제로 시세이도에서 스카웃 제의를 받기도 했어. 그런데 마침 부모님도 모든 것을 정리하고 일본으로 들어가겠다고 하시는 거야. 두 분 모두 어린 시절을 일본에서 보낸 적이 있으시거든. 그냥 그렇게 내 인생이 강물처럼 유유히 흘러가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부모님과 함께 인천 공항에 도착한 순간 이상한 생각이 드는 거야. 이대로도 나쁘진 않지만, 어쩌면 간절히 원해 왔던 일이지만 과연 이것이 전부인가? 이대로 내 인생이 냉동실의 각얼음처럼 굳어 버리고 마는 건가? 문득 찬 물을 뒤집어쓰기라도 한 것처럼 전신에 소름이 돋았어. 부모님과 함께 스낵바로 가서 샌드위치를 사먹는데 두 뺨 위로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더라. 당장 화장실로 가서 남자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지. 딱 삼년만 나 혼자서, 서울에서든 외국에서든 무언가를 더 찾아보고 싶다고, 그리고 남은 인생에선 당신을 퍼스트로 놓고 살고 싶다고. 침묵이 얼마나 흘렀을까. 둘 모두 말도 못하고 전화를 끊지도 못한 채……. 난 힘겹게 말했어. 당신 얼굴을 보면 헤어나올 수 없을 것 같아서 이렇게 무례하게 전화로 하는 거라고. 한참 후 그가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해, 라고 말해 줬어. 그리곤 덧붙였지. 삼 주 뒤에 당신을 보러 서울에 들를게. 그건 괜찮겠지? 그때 난 말야, 정말 그만을, 적어도 남자는 그만을 사랑하기로 맹세했다. 그것이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일지라도. 부모님께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공항을 빠져나오는데 와, 날아갈 것 같더라. 삼십분 전에 봤던 공항 앞 풍경이 완전히 달라 보이는 거 있지? 미국에 처음 유학을 갔던 스물두 살때로 되돌아간 것 같더라구!’

할리퀸 로맨스의 스토리 못지 않은 완벽하고 로맨틱한 이야기들이 신비 소녀였던 아리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훨씬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그만큼 그녀는 누군가가 진흙탕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자신을 건져올려 주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어쨌든 그녀는 그날 밤 아리 옆을 떠날 수가 없었다. 당연히 아리를 몇 번 더 만나 보면서 놀이공원의 풍선처럼 활기찬 그녀가 뿜는 공기를 마셔 보고 싶다는 욕심도 생겼다. 건배도 없이 잔을 비운 그녀는 불쑥 물었다.

“그래서 지금 혼자 서울에서 살고 있어?”

갑자기 아리가 제 의자를 조금 뒤로 젖히더니 두 손을 코트 호주머니에 찌른 채 깔깔깔 웃었다.

“아이, 그 모든 것이 불과 오늘 하루 동안 일어난 일이라니까. 아, 그런데 잡지사 가까운 곳에 세를 들 만한 오피스텔이 있겠지?”

“너…… 우리 집에 있을래? 집을 구할 때까지.”

충동적으로 제안을 해 버리고 나자 문득 결혼 팔개월째인 산혼 부부가 사는 집에 여자 친구를 들인다는 것이 좀 꺼림칙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 회의는 곧 무섭도록 공격적이고 차가고 사악하기까지 한 감정에 의해 압도당해 버렸다. 만약 남편이 그녀의 짐작대로 흔들리고 있다면 그가 얼마나 흔들릴 수 있는지 두 눈 똑똑히 뜨고 봐야 할 것 같았다. 그녀 안에 터무니없이 굳건하고 무지한 사랑이 살고 있다면 죽은 꽃나무 구근처럼 덜렁 뽑아 버려야 할 것 같았다. 자신의 충동의 실체를 인식하고 나자 아리가 제법 매력적인 여자라는 것도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훨씬 더 선명한 리트머스 시험지 역할을 해 줄 것 같았다. 남편이 셋이 함께 하는 일상을 거북해하고 불편해할 수 있다는 건 별로 고려하고 싶지 않았다. 오로지 한동안 남편과 함께 하는 일상을 불편해할 수밖에 없는 자신에게 나쁘지 않은 일이라는 것만 생각하고 싶었다.

아홉 시 뉴스가 시작됐을 때 아리가 그녀를 주방으로 불렀다. 식탁 위엔 연두색 면기에 담긴 생합죽과 참기름을 발라 구운 듯한 송이버섯이 놓여 있었다. 슴슴하면서도 고소한 죽이 인후와 식도를 타고 내장 안으로 솔솔 넘어가자 몸 전체가 진정되어 가는 듯했다. 툭하면 탈구되려 하던 두 어깨뼈도 서서히 접합되어 가는 것 같았다. 메마른 건기의 땅바닥이 단비를 빨아들이듯이 너무 많이 먹게 될까 봐 겁이 나서 속도를 조절하고 있을 때 녹색 체크무늬 앞치마를 두른 채 서있던 아리가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어때? 맞있어?”

그녀는 어린애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식탁을 꽉 짚고 있는, 물에 약간 부풀어 더 희어 보이는 아리의 길고 조금 통통한 손이 인상적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녀는 아리를 올려다봤다.

“그런데 내가 너 이렇게 부려 먹어도 괜찮은 거니? 네 남자 친구나 가족들에게 야단맞을 것 같아. 나야 생각지도 못한 호사를 누리고 있지만”

“하고 싶어서 하는 거니까 내버려둬. 사실 요리하는 거 굉장히 좋아하는데 그동안 너무 바빠서 실컷 못했어. 나한텐 어린애의 소꿉놀이 같은 거야.”

“너도 먹어야지.”

그녀는 가스렌지 위의 투명한 갈색 남비에서 죽을 떠와 막 건너편에 앉은 아리 앞에 놓아 주었다. 두 사람 모두 죽을 반쯤 먹었을 때 아리는 문득 녹색 앞치마를 벗어 대강 접어 그녀 앞으로 내밀었다.

“이 앞치마 말야. 낡았는데도 근사하지? 엄마가 나에게 물려 주신 거다. 엄마는 평생 하루에 두 번쯤은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생선을 요리하셨어. 그런데도 난 엄마의 몸에서 비린내를 맡은 적이 없다. 왜냐하면 늘 새벽에 수산 시장에 가서 산지에서 막 올라온 신선한 생선만 사셨거든. 고니나 알 같은 내장조차도 싱싱해서 기분 좋은 은근한 단 맛을 냈어. 처녀 시절 결핵을 심하게 앓은 적이 있다는 엄마는 유난히 몸이 약했어. 언뜻 보면 이슬만 먹고 살 것 같은 타입인데도 고기를 무척 좋아하셨지. 그런데 늘 아빠가 좋아하는 생선만 요리했으니 만성적으로 굶주리셨을 거야. 아내의 허기를 잘 알고 있던 아빠는 개를 잡은 집에 초대받아 가면 가장 담백한 맛을 내는 수육을 얻어 와서 엄마에게 먹였대. 또 일년에 한 번은 큰 흑염소를 사서 직접 씻어 약재들과 함께 큰 솥에 넣은 뒤 종일 화덕 앞에 앉아 고고 또 고셨대. 고기는 고기대로 건져 썰고 국물은 맑게 걸러 섞어서 큰 그릇에 담아 주며 당신이 보는 앞에서 먹으라고 하셨대. 엄마의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들을 쓸어올려 주며, 계속 맛있냐고 물어보면서. 그럼 우리 엄마는, 그 큰 솥에 담긴 고기를 한 달 내내 혼자서 다 드셨단다.”

아리는 잠시 숨을 고른 뒤 여전히 꿈을 꾸는 듯한 말투로 말을 이어 갔다.

“두 분의 금슬이 유난히 좋았던 건 친척 어른들도 다 아시더라. 우리 엄마가 어떤 여잔 줄 아니? 새댁일 때 제사를 지내러 아버지와 함께 큰 집에 가시잖아? 그런 날엔 왜,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아이는 아이대로 모아서 잠을 자잖아. 그런데 큰어머니가 새벽에 깨서 엄마가 안 보여서 찾아보면 어느 틈엔가 남자 어른들이 자는 방으로 살짝 건너가서 아버지 허리께에서 새우처럼 몸을 구부리고 자고 있대. 우리 엄마, 대단하지 않니?”

그녀는 눈을 감았다. 듣다 보면 단 음식을 잔뜩 먹은 것처럼 속이 거북해지거나 겨드랑이가 간지러워지던 다른 이야기들과는 달리 아리 부모의 이야기는 머릿속에서 그림이 선명하게 그려졌기 때문이었다. 아예 먹는 일을 잊어 버린 채 자신의 이야기에 빠져 헤엄치고 있는 아리의 얼굴엔 사춘기 소녀의 그것 같은 산뜻한 홍조가 피어 있었다. 특이하게도 아리는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도 직접 보거나 영화에서 본 것처럼 생생하게 묘사해내는 재능을 갖고 있었다.    

“엄만 육십을 넘긴 지금도 소녀 같은 모습을 간직하고 계셔. 삼십 년 가까이 주단 가게를 해 오시다 최근에야 정리했는데도 전혀 닳지 않았어. 어쩌면 장사도 늘 진심으로 사람을 대했기 때문에 괜찮았던 게 아닐까. 그리고 늘 그렇게 사람에게 관대할 수 있었던 건 아버지와의 사랑 때문이었을 거야. 이제 세상에서 물러난 두 분에게 남은 건 사랑뿐이야. 내 눈에, 늙어 가는 두 분은 진정한 승리자처럼 보여.”

그 순간 그녀는 부모의 사랑을 한사코 완성시켜 주려 하는 아리에게 심한 반감을 느꼈다. 곧 아리의 도그마를 깨 버리고 싶다는 충동도 뒤따랐다. 그녀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한 손으로 싸늘해진 유리컵을 꽉 틀어 쥐었다.

“그럼 말야, 두 분은 평생 한 번도 서로를 배신한 적이 없겠네.”

그 순간 아리의 얼굴의 홍조가 싹 가시더니 전신이 창백해졌다. 잠시 후 아리의 얼굴 피부 안쪽에서 붉은 기운이 서서히 올라오더니 두 눈이 발광체처럼 번뜩거렸다. 

“배신? 믿는 것 따위가 뭐가 그렇게 중요해? 상대를 믿지 못하는 건 곧 상대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믿지 못한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야.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상대 탓이라고 비겁하고 치사하게 몰아붙이는 거라구. 어쨌든, 그는 네 옆에 있잖아.”

그녀는 기가 막혀 입을 벌리고 아리를 봤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은 아리의 눈을 보자 모든 것이 혼돈스러워졌던 것이다. 분명히 남편과의 관계에 대해 적어도 말로 한 적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저렇게 전모를 알고 있는 것 같은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걸까. 그러나 더 어처구니가 없는 건 그녀가 어떻게든 시치미를 떼 보기로 결심했을 땐 이미 아리의 얼굴에서 좀전에 그녀를 위축되게 하던 매섭고도 근본적인 표정이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탈진해 버린 것 같기도 하고 상황 자체를 몹시 지겨워하는 것 같기도 한 그 심드렁한 얼굴은 좀전에 그녀를 비난하고 단죄하던 아리가 아니었다. 잠시 후 아리는 조그만 손으로 하품이 새어나오는 입을 가볍게 두드리며 일어섰다. 아함, 오늘 모니터링 작업을 너무 많이 한 것 같애. 꼭 한꺼번에 몰아서 하고야 마는 이 습관, 정말 고쳐야겠어.



4


다음 날 그녀가 잠에서 깨어 협탁 위의 알람 시계를 봤을 땐 오전 열한 시 반이 넘어 있었다. 몸을 일으키다 불쑥 오늘이 일요일이라는 사실을 떠올린 그녀는 다시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이불 안쪽의 화려한 장미꽃 무늬들을 보고 있자니 어젯밤의 상황이 선명하게 리와인드되기 시작했다.

CGV에서 하는 일본 영화를 보다 소퍼에서 잠이 든 그녀가 인기척을 느끼고 눈을 떴을 때 전신에 빗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침울해 뵈는 남편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어깨 위에 걸려 있는 것처럼 보이는 벽시계는 새벽 두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라기보다는 그의 유령처럼 느껴지는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만지려 하자 그녀는 용수철처럼 튀어 일어나서 침실로 갔다. 그녀가 침대 위에 누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을 때 남편이 따라 들어왔다. 그녀는 찬바람이 일어날 만큼 이불을 세게 젖히고 침대에서 내려와 현관 문 쪽에 있는 서재로 가 버렸다. 이번엔 남편은 따라오지 않았다. 그러자 머릿속이 겨울 강물처럼 맑아지면서 그를 비롯해 주위의 모든 존재에 대한 분노가 유전처럼 펑펑 솟았다. 세상 사람 모두가 그녀에게 등을 돌리고 배신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한참 동안 울다 씩씩거리다 하다 새벽녘에야 겨우 침대 위에 엎드려 잠이 들었다.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거실을 가로질러 침실 앞으로 가서 문을 열어 봤다. 남편은 없고 흐트러진 침구들만 눈에 들어왔다. 그의 수면의 흔적임에 틀림없는 아이보리색 베개 위에 묻은 그의 짧은 머리카락들을 보자 그의 성격의 나쁜 부분을 봤을 때처럼 거슬렸다. 그녀는 몇 곳을 더 살펴보다 주방에서야 그를 발견했다. 냄새로 보아 생선 요리인 듯한 뜨거운 무언가를 맛보고 있는 아리와 그녀 옆에서 전기밥솥의 뚜껑을 열고 밥을 푸고 있는 남편을 보자 다시 비위가 상했다. 두 사람이 얼핏 사이가 나쁘지 않은 신혼부부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질책하듯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이제야 일어났네. 앉아. 늦었지만 아침 먹자.”

“싫어. 안 먹어.” 

“고춧가루를 거의 넣지 않아서 지리에 가까운 은대구 찌개야. 운 좋게도 알을 밴 녀석이 딱 걸렸어.”

“먹기 싫다니까. 왜 이렇게 매번 못 먹여서 안달이니?”

그때 아리의 얼굴 저 안쪽에서 또다른 아리가 파랗게 질리면서 망연해하는 것이 보였다. 짧지만 분명하게, 상처 입은 짐승의 표정을 본 그녀는 아차, 싶어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그녀가 사과할 틈도 없이 아리의 어두운 연약함은 그녀의 피부 속 깊은 곳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뒤이어 어김없이 나타난 건 어떤 사람이든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은 환하고 탄력적인 미소였다. 아리는 강아지처럼 쪼르르 달려와서 그녀를 의자 위로 주저앉혔다.

“네 위는 하루에 세 번 음식을 먹고 소화시키고 비우는 일에 새롭게 적응해야 해. 너처럼 자신의 몸을 홀대하면 나중에 몸이 기어이 복수를 한다니까.” 

나란히 앉게 된 그녀와 남편 앞에 뜨거운 은대구탕과 밥, 두 가지 나물을 놓아 준 아리는 끔찍하게도 제 휴대폰까지 갖다댔다. 남편은 그녀에게 바짝 다가앉아 습관적이면서도 따뜻한 동작으로 한 팔을 아내의 어깨 위에 걸치고 해맑게 웃었다. 오랜만에 실감하는 그의 팔과 어깨의 감촉은 꺼림칙하면서도 여전히 따뜻해서 그녀 속의 의혹들이 눈처럼 죄 녹아 버릴 것 같았다. 아리는 부부 앞에 놓여 있는 그릇에 살이 적당히 부서진 흰 살 생선과 알, 따뜻한 국물을 퍼 주었다.

“얘가 결혼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남편이 어떤 남자일까 무척 궁금했었어요. 왜, 그런 애들 있죠? 안정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불안정한. 얜 아주 나쁜 습관을 갖고 있어요. 자기가 가진 것들을 우습게 보고 시큰둥해하는. 너 내가 너 싫어했던 거 아니?”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훈계까지 하려 하는 아리를 말려 보려고 눈살을 찌푸렸지만 아리는 아예 묵살하고 바짝 다가앉았다. 

“들어 봐. 결혼을 유지시키는 호르몬엔 두 가지가 있대. 도파민과 옥시토신. 알다시피 도파민은 남자와 여자 간의 열정에 불을 붙이는 호르몬이고, 옥시토신은 남녀의 친밀한 관계를 평생 지속시켜주는 호르몬이야. 실제로 옥시토신은 아기가 엄마 젖을 빨 때 분비되는 호르몬인데 중독성이 도파민보다 훨씬 강하대. 바로 이 옥시토신 덕분에 남자와 여자는 서로를 가족이라 생각하며 평생 살아갈 수도 있다는 거야.”  

“내가 궁금한 건 말야, 다른 여자의 도파민에 반응하는 도파민을 가진 남자를 보면서도 내 몸에서 옥시토신이 분비될까 하는 거야. 믿을 수 없는 남자를 사랑할 수 있을까? 결혼이 단지 가족을 만들기 위한 절차는 아니잖아!”

별 수 없이 식탁의 분위기는 싸늘하게 식어 버렸다. 남편은 예의로라도 웃어 주지 않았다. 아니 웃을 수가 없는 듯했다. 아리도 맥이 풀리는지 지쳤다는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자 정작 판을 깨 버린 그녀 쪽에서 덜컥 겁이 났다. 사람들이 자신을 포기해 버릴까 봐 두려워진 것이다. 그녀는 적어도 반성으로 비치진 않기를 바라며 표정을 누그러뜨리고 일상적인 대화를 끌어내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시간이 흐르자 자신이 특히 아리에게 고통을 핑계 삼아 많이 잘못하고 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식사 분위기는 점차 부드러워졌고, 아리도 다시 대화에 끼여들었다.

남편은 두 여자의 이야기 모두에 매번 표정으로 반응하며 최대한 성실하게 대답하고 또 물어주었다. 그녀가 아는 그는 늘 이랬다. 그는 어떤 공간에 들어선 순간 그곳의 공기를 예민하게 감지하고 최대한 맞춰 주려 애쓰는 타입이었다. 그가 대화에서 확인하고 싶어하는 건 교감이지 우월감이 아니었다. 목표만을 생각하며 차갑고 사악한 공기를 오래 견딜 수 있는 사람이 못 되는 그에게 애정 부족은 산소 부족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것은 지극히 계산적인 그녀의 엄마가 그를 싫어하는 이유이면서 동시에 그를 딸의 짝으로 묵인한 이유이기도 했다. 서울의 중상위권 대학 출신에 편모 슬하의 외아들, 대기업 유통업체의 사원이라는 조건이 눈에 찰 리 없는데도 엄마는 그와의 연애나 결혼에 많이 반대하진 않았다. 자신이 능력 불문하고 몰아붙이는 딸이 유일하게 숨 쉬고 휴식하는 공간이 그라는 걸 예민한 촉수로 알아차린 듯했다.  

이제 보니 남편과 아리 둘은 상당히 비슷한 사람들인 것 같았다. 체온의 온도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신경전 없이 담소를 나누는 모습은 그녀가 보기에도 좋았다. 문득 아리가 있으면 두 사람이 훨씬 더 잘 지내게 될지도 모른다는 어처구니없는 생각마저 들었다. 적어도 아리에겐 그것이 이상한 일이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한참 후 그녀는 아리에게서 묘한 섹스 어필을 발견했다. 아무 계산 없이 여자에게든 남자에게든 아이에게든 본능적으로 잘 보이고 싶어하는 그녀가 언뜻언뜻 풍기는 섹스어필은 전형적으로 섹시한 여자들의 그것과는 좀 달랐다. 집중된 것들 특유의 배타적이고도 신경질적인 속성이 없었다. 햇빛을 듬뿍 먹어 가며 성숙한 꽃잎들이 조용히, 흐뭇하게 벌어질 때처럼 부드럽고 천연덕스러워서 남자는 물론 여자도 아이도 무람하게 그녀를 들락거려도 될 것 같았다. 어쩌면 나도 가끔은, 슬쩍 드나들고 싶은 게 아닐까 생각하면서 그녀는 피식 웃었다.

오후 두 시쯤 두 사람은 대청소를 시작했다. 소퍼에 길게 누운 채 베란다에서 면바지를 무릎까지 걷어 부치고 열심히 유리창 청소를 하는 남편의 일거수 일투족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팔년 동안 남편은 그녀에게 외부로부터 집을 보호하는 견고한 전면 창 같은 존재였다. 적어도 심리적, 정서적 면에선 확고한 키다리아저씨였던 것이다. 어쩌면 그녀가 지금껏 감정을 감추지 않고 살았던 건 늘 기다리고 봐 주는 그가 뒤에 버텨서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가 식물처럼 까다롭게 굴며 흔들리고 있다. 심지어 그가 그녀가 옷을 입혀 키워 온 아바타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지금 그는 여전히 그일 수 있을까? 혹 그녀는 그녀일 수 있을까? 그녀는 혼돈스러워서 신문으로 얼굴을 덮어 버렸다.



5


오후 진료가 시작되는 낮 한 시 반에 뜻밖에도 권선배가 병원에 왔다. 충치 치료를 위해 들른 회사 근처의 치과에서 치은염의 기미가 있으니 먼저 잇몸 치료를 해 주어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는 권선배는 텅 빈 진료실을 둘러본 뒤 대기실 쪽의 의자에 앉았다. 이 간호사에게 스케일링을 받는 내내 입을 크게 벌리는 순간을 제외하곤 어김없이 농담을 툭툭 던져 처녀들을 즐겁게 해 주는 선배에게 주의를 주고 있을 때 대기실 쪽에서 언제 모여들었는지 중년인 듯한 여자들이 얘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이 병원 임플란트 시가…… 아세요? 이백이라고 말들 하지만 실제론 이백오십에서 삼백이라던데? 병원에 따라 천차만별이라는 얘기도 들었어요. 참 이상하지? 대중화되면 오히려 싸져야 하는 거 아닌가? 난 요즘 임플란트 성공률이 50%밖에 안된다는 말도 들었는데. 어머 그건 곧 그 정도로 까다롭고 어려운 기술이라는 얘기네. 결국 임상 경험이 중요하다는 얘기기도 하고. 그럼, 당연히 여기보단 건너편 이안 치과가 훨씬 나은 거 아냐? 그곳의 두 원장들은 모두 사십대 안팎이잖아. 아, 그거 알아요? 안원장이 일년 만에 투탑체제로 컴백한 이유? 난 알아! 일년 뒤 시의원 후보로 나올 거라는 얘기가 있던데. 아하, 그래서 그렇게 한결같이 친절하구나. 치위생사들도 하나같이 예쁘고 꼼꼼하고 싹싹하고. 아, 일주일에 한 번 무료 스켈링 타임도 있어. 무슨 요일 몇 신데?

치료가 끝난 후 엽렵하게 대기실 쪽을 향해 눈까지 흘겨 준 권선배는 양치를 하고 의자에서 내려와 특유의 둔한 동작으로 양복 상의를 껴입었다. 

“너 무슨 대책을 강구해야지 안 되겠다. 혹 네 라이벌인 아저씨들이 중년 아줌마들이 좋아할 만한 부드럽고 촉촉한 손이라도 가진 거 아냐?”

“내 손도 충분히 부드럽고 촉촉하거든. 나이가 믿게 해 주는 경험은 차치하고라도 일단 저쪽 치과는 치위생사들이 많아서 회전이 빨라. 그리고 선배, 제발 목소리 좀 낮춰라.”

“허, 의사와 정치라……. 거참 어색하군. 대체 의사들이 왜 정치를 하려 하지? 문과와 이과, 전혀 다른 분야잖아.”

“심심해서.”

“뭐?”

“정말이야. 권태 때문이라니까. 개업해서 대출 갚고 안정이 되구 그렇게 십년을 넘기다 보면 한 번쯤 인생을 바꾸고 싶어지는 모양이더라……. 특히 치과 의사들이 심해.”

“하긴 종일 사람 입속만 들여다보는 거 지겹기도 하겠다. 큰 차 사고 아파트 바꾸고 연애하고 때론 와이프를 바꿔 봐도 안 되는 막강한 권태 땜에 돈이 왕창 깨지는 것도 감수한다 이 말이지?”

선배는 세면대에서 손을 씻은 뒤 거울을 통해 자신의 입속을 점검한 뒤 자신을 보고 있는 거울 속의 그녀에게 말했다.

“너, 우리 잡지에 칼럼 하나 연재하자. 성장기 어린이 치아 교정, 임플란트 성공을 위한 조건 등등의 테마로.”

“둘 다 칼럼 쓸 정도는 아냐. 누구 말대로 임상 경험이 부족해.”

“너 대학 동문 모임 열심히 나가고 있잖아. 말 그대로 간접 경험을 활용하면 되지. 선배들에게 이것저것 들어 재구성하면 그걸로 충분해.”

“뭘, 짜깁기를 하면서까지.”

“언론 효과를 한 번 보고 나면 다신 자존심 따위 땜에 뭘 하고 안 하고 할 게 아니라는 걸 인정하게 될 걸. 왜냐하면 보여지는 게 다거든. 내가 말야, 방송 잡지에 자주 나오는 의사치고 진짜 실력 있는 의사 못 봤거든. 또 언론에 노출된 뒤 돈 못 버는 의사도 못 봤다.”

“생각해볼게.” 

“빨리 결정해야 돼.”

권선배는 여전히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 주고 돌아섰다. 진료실과 대기실 사이의 칸막이 노릇을 해 주는 발을 들추고 나가던 권선배가 문득 걸음을 멈추더니 천천히 그녀를 돌아봤다.

“아리는 잘 지내지?”

“왜, 선배는 안 봐? 걔랑 일로 얽혀 있잖아.”

“자주 보기야 보지. 내 말은 느이 집에서 잘 지내고 있냐는 거야.”

“이상하네. 꼭 아리의 보호자처럼 말하네. 걱정 마. 걘 보호받아야 할 만큼 약한 아이가 아냐. 오히려 내 보호자 노릇을 해 주고 있지. 처음엔 내가 아리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언제부터인가 거꾸로 돼 가고 있더라. 걔랑 함께 있으면 내게 부족한 게 무엇인지가 다 보여. 그런데 이상하게도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아. 참 특이한 아이야.” 

“다행이다. 잘 지낸다니……. 워낙에 감수성 풍부하고 머리 좋고 무엇이든 잘 할 수 있는 얜데 저렇게 마음을 못잡고 떠돌고 있으니.”

“아, 아냐. 선배, 걘 지금 모색하고 고민하는 시기일 뿐이라니까. 가닥이 추려지기만 하면 누구보다 열심히 살 아이야.”  

“그래? 하긴 요즘 상태야 니가 더 잘 알겠지.”

권선배는 그답지 않게 그녀의 시선을 황망히 피하더니 발을 들추고 나가 버렸다. 그러나 그때부터 그녀의 머릿속은 완전히 헝클어져 버렸다. 능청스러움과 치밀함이 공존하는 평소의 눈과는 달리 묘한 열기가 배어 나오는 데다 난처해하는 기색이 역력한 권선배의 눈 속엔 분명히 무언가가 있었다. 분명히 그만이 알고 있거나 오해하고 있는 무언가가 과연 무엇인지 따라나가서 물어볼까 고민하고 있는데 다시 발이 들춰지며 권선배의 얼굴이 나타났다.   

“오늘 내 얘기 신경쓰지 마라. 뭐 걔가 큰 피해를 입히는 애도 아니고.”

머릿속의 실타래를 풀어 주기는커녕 더 헝클어 놓은 뒤 사라져 버린 권선배 때문에 한동안은 마음이 심란했지만 곧 그녀는 두 사람을 의심하는 일을 그만두기로 결정했다. 그럴 만한 정신적 여유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권선배와 아리 사이에 소통이 부족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안경을 썼다.

  

오후 여섯 시 반에 병원 문을 닫은 그녀는 차를 몰고 B백화점으로 향했다. 혼곤한 악몽에 시달리다 눈을 뜬 새벽 남편과의 관계에 어떻게든 칼을 대야겠다고 결심했을 때 그녀가 내린 결론은 남편의 얘기가 아닌 이은주의 얘기를 먼저 듣는 쪽이 나을 거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두려운 일이어서 종일 자신이 유리처럼 얇고 위태로워져 가는 걸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결국 그녀는 백화점으로 가는 도중에 휴대폰으로 아리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아리는 아침에 헤어질 때와 똑같은 활기찬 목소리로 청담동에서 수입 명품 화장품 회사 사람들을 만나 모니터링을 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말 없이 전화를 끊었다. 번잡한 시내를 더듬더듬 달려 B백화점에 도착했을 땐 일곱 시가 넘어 있었다. 지하 삼층에 있는 주차장 한 구석에서 차 안에 멍하게 앉아 십오 분을 보낸 그녀는 다시 휴대폰을 꺼내 아리에게 문자를 날렸다. 일이 끝나면 B백화점으로 와. 저녁 먹고 같이 들어가자.

그녀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오층으로 갔다. 오늘따라 백화점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물건들이 유난히 화려하고 섬세하고 눈물이 나도록 아름다워 보였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물건들만 보인다고나 할까. 눈물도 타액도 배설물도 없는 물건들만의 투명함과 견고함, 일관된 체온이 너무도 편안하게 느껴져서 다시는 살아 움직이고 쉽게 변하고 앙칼지게 복수하고야 마는 사람들 틈에서 살아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껏 살아오며 맺은 모든 관계에서 실패해 버릴 것만 같은 공포를 느꼈다. 그녀는 자신을 낳아 준 사람인 엄마와도 끊임없이 불화해 온 사람이 아닌가?  

이은주는 매장에 있었다. 열흘 전에 봤을 때와는 달리 그녀는 훨씬 예쁘고 생기 있고 또렷해 보였다. 전보다 화장을 조금 짙게 하기도 했지만 단지 그것만은 아닌 듯했다. 평범한 이십대 초중반 처녀의 생기에 맹랑한 구석이 있는 천성이 만들어냈을 약간 퇴폐적이고 뻔뻔스럽기까지 한 기운이 섞이자 느낌이 독특했다. 왠지 압도당하는 느낌이었다. 그녀가 매장 정면에 서 있는 마네킹이 입고 있는 아이보리색 원피스를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 이은주가 다가왔다.

“직접 입어 보세요. 잘 어울릴 것 같은데요.

그녀는 한 발짝 물러서서 이은주를 똑바로 봤다. 티 없이 웃는 적의 화사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는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아가씨가 한 번 입어봐 줄래요?”

처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뒤로 물러섰다.

“아, 내가 입을 옷이 아니라 아가씨 또래의 처녀에게 선물할 옷을 고르고 있거든요.”

이은주는 난처해하는 표정으로 매장의 카운터에 앉아 있는 나이가 훨씬 많아 뵈는 매니저를 봤다. 상황을 모두 지켜본 여자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상한 손님 하나쯤 적절히 처리해서 빨리 보내 버리면 그만이라는 듯이. 이은주는 마네킹에서 벗겨낸 원피스를 들고 탈의실로 들어가더니 한참 후에야 문을 열고 나왔다. 섬세한 니트 조직과 레이스 장식이 잘 배합되어 낭만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원피스는 이은주에게 잘 어울렸다. 얼굴 표정의 반을 장악해 버린 크고 반항적인 눈 때문에 얼핏 팀 버튼의 영화에 나오는 유령 처녀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녀는 카운터 쪽의 매니저를 향해 소리쳤다.

“저 옷 선물용으로 포장해 주세요.”

이은주는 다시 탈의실로 들어가서 옷을 벗어 들고 나왔다. 매니저가 옷의 분위기에 맞게 앙증맞게 포장한 분홍 상자를 내밀었을 때 그녀는 더 큼직한 쇼핑백이 있느냐고 물었다. 매니저가 백을 구해 오겠다며 매장을 잠시 떠났을 때 그녀는 십초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했던 나쁜 충동을 느끼고 그것에 자신을 맡겨 버렸다. 그녀는 옷 상자를 이은주의 품에 냉큼 안겨 주었다.

“이 옷 아가씨가 입어요. 마음이 바뀌었어요.”

이은주가 오물을 피하기라도 하듯이 진저리를 치며 상자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대체 왜 이러세요? 누구세요?”

“난 김우석 팀장 와이프예요. 김우석씨, 모르는 사람이라곤 말 못하겠죠?”

처녀는 곧 모든 것을 알았다는 듯이 냉소적이고 공격적인 얼굴이 되었다. 어이없는 방식으로 자신을 모욕한 상대를 비웃어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잠시 후 이은주의 얼굴을 뒤덮은 건 뜻밖에도 그녀를, 그리고 그녀의 남편을 포함해 셋이 연루된 이 상황 자체를 귀찮아하고 짜증스러워 하는 표정이었다. 

“이 백화점에서 팀장님을 모르는 사람은 없어요. 또 최근 한 달 동안 본 사람도 없을 걸요. 저도 삼주 전부턴 못 뵜어요. 팀장님, 한 달 전에 퇴사하셨거든요.”

그 순간 그녀의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불 붙은 솜방망이 같은 것으로 뒤통수를 엊어맞아 버린 것처럼 머리가 멍했다. 이은주는 잔인한 감정들을 발산한 뒤의 도자기처럼 담백하고 마알개진 표정으로 창백해진 그녀를 지켜보다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선물은 고맙습니다만, 너무 뜻밖의 일이어서요. 느닷없이 이런 일을 회사에 물어볼 수도 없구요.”       

이은주는 두 손으로 깍듯하게 옷 상자를 내밀었다. 그녀는 그것을 받지 않고 돌아서서 매장 밖으로 걸어나왔다. 그녀 혼자만이 증발해 버린 세상은 온통 부옇게 빛이 바래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꼭 깨물면서 매장에서 오 미터쯤 떨어진 에스컬레이터를 향해 걸었다. 에스컬레이터에 겨우 몸을 실었을 때 갑자기 한 쪽 무릎이 푹 꺾여 버렸다. 하마터면 밑으로 굴러 떨어질 뻔한 그녀는 간신히 오른 손으로 난간을 붙들고 중심을 잡았다. 그러나 위험보다 더 끔찍한 건 매장 안에 있던 어린 계집애가 그녀의 휘청거리는 뒷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봤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절대로, 죽을 때까지 남편을 용서할 수 없을 분노 때문에 앙다문 입 안에서 이빨들이 사납게 부딪혔다. 그 소리가 그녀의 귀에도 선명하게 들렸다. 그녀는 이층과 일층 사이에서 아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 있니?…… 지하 수퍼마켓?…… 그냥 주차장으로 와. 지하 3층…… 아, 아냐. 무슨 일은?…… 제발

그녀는 지하 3층 주차장 한 구석에 놓인 자신의 차 안에서 실내등도 켜지 않은 채 한참 동안 앉아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누군가가 툭툭 창을 두드렸다. 그녀가 문을 열자 아리가 조수석으로 들어와 앉았다. 아리는 얼굴을 파지처럼 구기면서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는 그녀를 보자 깜짝 놀라 두 손을 그녀의 두 뺨에 갖다댔다. 그녀의 손의 온기가 뺨 전체에 퍼져 가자 그녀의 몸 깊은 곳에서 다친 짐승의 신음 같은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곧 그녀의 몸도 그녀보다 작고 가벼운 아리를 향해 무너져 버렸다. 울음소리가 주차장 안을 괴기스럽게 울리고 있다는 것도 알았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또 그녀는 자신이 무슨 말인가를 격렬하게 쏟아내고 있다는 것도 알았지만 그 역시 멈출 수가 없었다. 이미 하나의 화산이 폭발해 버린 것이다. 작고 암팡지면서도 한없이 늘어나면서 친근하고 꽉 찬 소리를 내 주는 아코디언처럼 널찍한 품을 가진 아리는 그녀를 어미 새처럼 안아 주며 계속 등을 다독거려 주었다.



6


인천 공항은 최대 열흘이나 된다는 구정 연휴에 해외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여행사마다 미국과 유럽 여행 상품들이 일찌감치 동이 났다는 기사를 신문에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공항 밖의 흐리고 써늘한 늦겨울 날씨와는 어울리지 않는 여행객들의 산뜻한 옷 색깔들이 금속성으로 꽉 찬 건물 내부에 생동감이 돌게 하고 있었다.

막 환전소에 다녀온 아리의 옷차림도 다른 여행객들의 그것 못지 않게 화사했다. 체리 핑크라고도 불리우는 진분홍색 바바리 덕분에 아리의 흰 얼굴이 더 화사해 보였다. 오늘 새삼 느끼는 것인데, 아리는 체구도 작고 마른 편인데도 혈색만큼은 유난히 좋았다. 어쩌면 아리의 육체 특유의 왕성한 혈액순환이야말로 아리만의 생에 대한 열정과 타인에 대한 배려에 할애되는 에너지의 원천인지도 몰랐다. 아리의 절대적으로 많은 헤모글로빈이 아리의 유독 넓은 혈관 안을 열심히 순환하는 한 아리의 생에 대한 경배와 왕성한 식욕도 계속될 것이다. 단지 음지 식물처럼 파리하거나 쇳소리를 내는 금속처럼 강팍하거나 한 자신만이 아리 없는 일상에서 시들어버릴까 봐 걱정스러울 뿐이었다. 아리는 스낵바의 벽에 붙은 작은 거울을 통해 제 얼굴을 샅샅히 들여다봤다.    

“그 사람이 공항에 마중나오는 거야 상관 없는데 미국에 사시는 누나 부부가 중국 여행 중에 잠깐 들르셨대……. 함께 나오신다는데 나, 괜찮니?”

“예뻐. 좋아 보여.”

“고마워어.”

“널 보면……. 누구든 너와 인생을 함께 하고 싶다고 생각할 거야. 함께 있다 네가 없으면 견딜 수 없이 허전해질 거구.”

“에이, 칭찬이 너무 심하다.”

아리는 눈을 살짝 흘기면서 두 손으로 들고 있던 샌드위치를 답싹 베어 물었다. 한동안 골똘히 빵을 씹던 아리는 갑자기 샌드위치 빵을 열어 속을 살펴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오이 피클을 너무 많이 넣었어. 빵도 지나치게 축축하고. 게다가 드레싱도 상큼하지가 않아. 그냥 커피나 마셔야겠다.”

“넌 음식을 먹어 보면 바로 재료를 알아맞출 수 있니?”

“대부분은.”

“신통하네.” 

“음, 요리는 신선한 재료 반 상상력 반으로 이루어지는 무엇이야. 요리할 때의 재료들의 배합과 거의 연금술에 가까운 화학 작용을 잊지 않고 있다면 거꾸로 거슬러 가며 하나하나 분해하는 것도 가능하지.”

“한국에 나오면……. 꼭 우리 집으로 와라. 응? 꼭 연락해야 해.”

그녀는 머그 컵에 담긴 묽은 커피와 수퍼 사이즈 컵에 담긴 오렌지 주스를 번갈아 마시면서 천진한 눈으로 공항 안을 둘러봤다. 그녀의 제안엔 대답을 하지 않고 얼굴을 살짝 붉힌 채 딴 곳을 보는 아리는 에너저틱한 삼십대 여자가 아닌 부끄러움 많은 십대 소녀 같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자존심만은 넘치게 소유하고 있는 그녀가 아리 앞에선 아직 안과 밖의 경계를 모르는 어린애처럼 불쑥불쑥 무너져 버리곤 한다는 것이. 이주일 전의 지하 주차장에서의 격렬하고 전폭적인 감정 노출 이후 아리는 신비감의 원천을 넘어서서 하나뿐인 친밀한 친구가 돼 있었다. 

그날 저녁 아리의 품에 안겨 남편과의 관계에서 흘릴 수 있는 눈물의 반을 쏟아 버린 그녀는 아리와 함께 집으로 왔다. 둘은 편의점에서 사 온 만두와 김밥을 먹는둥 마는둥 하며 거실의 소퍼에 앉아 깜빡깜빡 자다 일본 영화를 보다 하며 저녁 시간을 다 보냈다. 새벽 두 시 쯤 술에 잔뜩 취한 남편이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 일어났다. 그녀가 그를 집어삼킬듯이 노려보자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린 아리가 얼른 제 방으로 들어가서 파카를 껴입고 나왔다. 아리는 두 사람을 향해 제 휴대폰을 들어보였다.

“오늘 친구 집에 가서 자기로 약속했는데 깜빡 했네. 자정 넘어서 문자를 두 번이나 보냈어. 무슨 일이 있나 봐. 나 가 봐야 할 것 같아.”

그녀가 밤 늦은 시각에 어딜 가느냐며 주저앉히려 애썼지만 아리는 한사코 빠져나가려 했다. 나중엔 친구 부부의 불화의 폭발을 싫어하고 또 피하고 싶어 하는 기색까지 느껴지자 놓아 줄 수밖에 없었다.  

아리가 집을 나간 뒤 그녀는 남편을 거실 바닥에 앉혀 놓고 추궁을 했다. 맥이 풀리게도 남편은 모든 것을 순순히 실토해 버렸다. 오년 동안 끊임없이 회의하며 노력했지만 유통 관련 직종은 적성에 맞지 않아서 퇴사를 했다. 얼마 되지 않는 퇴직금으로 혼자 생활해 왔다, 한 달 전부터 도서관으로 출근하다시피 하며 변리사 시험 준비를 하고 있다. 심지어 그는 그녀가 신용대출 확인서를 꺼내 그의 눈앞에서 흔들어 보였을 때도 많이 당황하지도 않았고 적극적으로 해명하려 하지도 않았다. 모든 표정들이 휘발해 버린 듯한 남편의 얼굴을 보고 충격을 받은 그녀가 이은주와의 관계를 추궁했을 때도 남편의 표정은 덤덤했다. 맞아, 그 아이에게 빌려줬어……. 그 후 기가 막히게도 남편의 얼굴을 장악해버린 감정은 피로였다. 많이 지쳐 있고, 이제 자신의 인생쯤 어떻게 돼도 상관 없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짐작하게 해 주는 피로. 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꽤 오랫동안 못한 그가 침묵으로 말한 부분들을 혼자서 앓아낼 수밖에 없었다.        

아내에게 타격을 주고 난 후에야 묘하게 생기를 회복해 가는 남편과 말 없이 지낸 지 열흘째 되는 날 밤 맥주를 마시고 거실에서 쓰러져 자다 새벽에 깨어 엉겁결에 교합을 해 버린 뒤에야 그녀는 머리가 조금 맑아졌다. 그녀는 아침에 남편이 도서관에 간 뒤 한참 동안 창 밖을 내다보다 간호사들에게 전화해서 하루 병원 문을 닫겠다고 통보한 후 모임의 선배에게 전화를 해서 패이닥터 자리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어차피 정리할 수 밖에 없는 병원이라면 가능한 한 빨리 정리하는 쪽이 나을 것이다. 엄마의 돈은 말할 것도 없고 은행 대출도 반은 남아 있다는 사실도 그다지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쉽진 않지만 생각만 바꾸면 달라질 수 있는 일인 것이다. 물론 마음이 가벼운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어쩌면 후회할지도 모른다고, 차라리 고름을 짜내듯 서로를 덜어내고 각자 가는 것이 훨씬 나았다고 악을 쓰는 순간이 와 버릴지도 모른다고. 그러나 그녀의 발목을 붙든 건 아직 무언가 끝나지 않았다는 느낌이었다. 정체를 알 순 없지만 둘 사이엔 무언가가 더 있었다. 그래서 아직 힘이 남아 있는 한, 설사 남아 있는 것이 환멸뿐이라 해도 더 가볼 수밖에 없었다.

남편과의 관계에 대해 잠정적인 결론을 낸 직후 신기하게도 아리와 연락이 됐다. 아무리 문자를 날려도 반응을 보여 주지 않았던 아리가 먼저 전화를 걸어 온 것이다. 둘 사이에 모종의 텔레파시가 작동해서 그녀 스스로 답을 찾아내 보도록 아리가 시간을 준 것 같기도 했다. 실제로 다음 날 홍대 앞 까페에서 만났을 때도 아리는 어떤 결론을 냈느냐고 묻지도 않았다.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그리고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는다는 듯이. 함께 그녀의 집으로 와서 제 짐을 챙길 때에야 비로소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듯이 덤덤하게 제 얘기를 했다.

“나 일본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결혼은 조금 늦게 하겠지만, 그냥 그이 옆에서 새 일을 찾아 보기로 했어. 아님 하던 일을 계속할 수도 있고. 직종을 바꾸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니!”

“그럼 아예 일본에 정착해 사는 거야?”

“모르지. 또 육개월 후엔 한국으로 나와 새로운 일을 알아보겠다고 할지.”

그녀는 다시 깔깔깔 웃었다. 두 경우 모두 크게 상관이 없다는 듯이. 

탐승을 권하는 안내 멘트가 건물 안에 울려퍼지기 시작했을 때 아리는 저보다도 커 보이는 여행용 가방을 챙겨 들고 일어섰다. 탑승구를 향해 걸어가던 아리는 잠깐 돌아보더니 두 개의 가방 중 하나를 내려놓고 손을 흔들었다. 커다란 진분홍 꽃잎 한 장이 팔랑거리는 것 같았다. 그 순간 그녀는 어떤 일상, 운명의 무게도 이겨낼 수 있다는 듯이, 아니 적당히 무시해 줄 수 있다는 듯이 팔랑거리는 저 산뜻한 존재감만큼은 꼭 배워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리가 탄 비행기가 이륙했겠다 싶을 때까지 기다렸다 건물 밖으로 나와 주차장을 향해 걸어갈 때 코트 호주머니 속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전화를 받자마자 권선배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귀를 찢었다.

“너 혹시 김아리랑 같이 있냐?”

“왜? 같이 있다 방금 헤어졌는데……. 공항에서.”

“공항? 누가 출국했어? 아리가?”

“으응. 선배 몰라? 걔 일본으로 아주 들어가잖아. 거기서 일하겠다고. 조금 있으면 결혼한다는 연락도 오겠지.”

“뭐? 일? 결혼? 마감이 코 앞인데 원고는 안 주고 어딜 가? 뷰티 파트 메인 기사를 써 보겠다고 사정사정해서 기껏 남의 꼭지를 뺏어 줬더니, 뭐? 지금 이 타임이 다른 팀 짜서 투입해 볼 수 있는 타임이냐구? 이게 그래도 일에선 펑크를 안 내서 봐 주고 또 봐 줬더니. 뭐? 일본? 니가 걔 일본행 비행기 타는 거 봤어? 흥, 정말 갔더라도 기껏 지하철 타고 도쿄 시내나 싸돌아다니겠지.”

잠시 후 권선배는 조용해졌다. 그녀는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녀는 한참 동안 팔짱을 낀 채 차체에 기대 서 있었다. 갑자기 공항 주변의 기온이 오도 이상 떨어져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전신이 와들와들 떨렸다. 입안에서 어금니들이 딱딱 부딪혔다. 오른 손으로 움켜쥐고 있는 휴대폰은 계속 신경질적으로 진동하고 있었다. 한참 후 그녀는 전화를 받았다. 권선배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만나자. 지금 어느 쪽으로 움직일 거냐?” 


홍대 앞의 작은 백반집 구석 자리에서 마주앉았을 때도 권선배는 선뜻 입을 떼지 못했다. 정오쯤 눅눅한 흙빛 얼굴을 하고 식당 문을 열고 들어올 때도 그녀와 눈을 맞추지 못했던 그는 순두부찌개가 나온 뒤에도 계속 눈을 내리깐 채 혼자 소주만 부어 마셨다. 속이 쓰린지 뜨거운 국물을 떠마시다 입천장을 덴 그는 짜증을 내며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처음 네가 걜 데리고 있겠다고 했을 때 말려야 했는데, 걔가 너랑 꼭 있어 보고 싶다고 해서……. 물론 그때문만은 아니었지. 사실 있을 곳도 마땅치 않은 것 같더라구. 걔가 거짓말이 심하긴 하지만 못된 것도 아니고 또 실질적으로 해를 입히는 애도 아닌데 알고 나면 절교를 선언하는 친구들이 많은 것 같더라구.”

“다…… 거짓말이라구요, 모두?”

그녀는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아리의 미소도 활력도 순수한 위로도 요리에 실린 감정들도 모두 진짜가 아니라구요? 갑자기 위 안에서 위산이 와락 분비되면서 위벽을 깎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통증인지 환통인지 모르는 아픔 때문에 그녀는 얼굴을 찌푸렸다. 권선배는 다 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상에 관한 말들 중 상당 부분은 거짓말일 거야. 과대망상 증세가 좀 있어. 물론 어찌 보면 터무니없지만은 않지만…… 걘 정말 재주가 많은 아이거든. 사람 마음도 잘 알아보고, 일단 일을 맡으면 추진력도 좋아서 야무지게 해내고. 정말 맘 잡고 터 잡고 하면 일을 낼 수도 있는 아이지. 그런데 오늘은 녀석답지 않게 일까지 펑크내는 바람에 내가 뚜껑이 열려 버렸지만.”

권선배는 다 식어 버려 느끼해진 순두부 국물만 몇 숟가락 떠먹은 뒤 다시 잔에 술을 부었다. 그녀의 빈 잔에도 술을 채워 주었다.

“물론 저 정도로 나빠진 데는 이유가 있지. 모든 파일이 날아가 버릴 수도 있겠구나 싶을 만큼의 충격이…… 너, 걔 고등학교 3학년 때 부모님이 돌아가신 거 아니?”

“일 학년 이후론 같은 반이었던 적이 없어요.”

“내가 군대를 안 가는 바람에 느이들이 고삼이었던 해에 A일보 사회부 수습이었잖냐? 요즘 같으면 인터넷 포털사이트마다 하루쯤은 떠 있었을 사건이었지. 치정살인사건이었어. 아리 어머니가 아리랑 좀 비슷했던 것 같더라. 곱고 자그마하면서도 에너지가 많고 공상, 망상도 많고. 부부 사이가 그다지 나쁘진 않았는데 아버지의 사업이 망하고 생활이 힘들어지면서 균열이 간 모양이야. 그 무렵 혼자가 된 첫사랑 남자와 재회하고 불 같은 불륜에 빠지고……. 왜, 그런 타입들 있지? 쉽게 환상에 빠지고 그걸 집요하게 완성하려 하는……. 결국 첫사랑 남자와 결혼하겠다고 작심을 하고 이혼해 달라고 조른 모양이야. 처음엔 아버지가 능력이 없으니 아리도 데려가겠다고 했는데 아리 아버지가 줄 수 없다고 하자 자신만이라도 보내 달라고 했대. 결국 아리 아버지가 아내를 미행해서 모텔에서 남녀가 통정하는 현장을 덮쳐 준비해 간 칼로 둘을 처참하게 살해하고 자신은 달리는 버스에 뛰어들어 자살했지. 혼자 남은 아리는 그해 겨울 대학에 떨어졌고 다음 다음 해에 이모들의 도움으로 학교를 다니기도 했는데 그조차도 이학년 말에 그만뒀다더라.”    

그녀를 똑바로 보는 권선배의 눈은 약간 충혈되어 있으면서도 서늘하고 또렷했다. 그것은 드물게, 그리고 아주 힘겹게 소심한 사람이 상대에게 전폭적인 이해를 구할 때의 눈이기도 했다. 그러나 상대의 마음을 감당할 여력이 없는 그녀는 고개를 숙여 버렸다.

“똑바로 서 있기가 힘들어서 저리 된 거 아니겠냐? 그래도…… 너무 놀랬지? 끔찍하다면 끔찍하고. 미안하다……. 그래도 네가 이해해라. 넌 걔가 못 가진 걸 다 가졌잖니?”

그녀는 옆의 의자 위에 개켜 둔 코트를 집어 들고 일어섰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서서 빨리 걸었다. 선배가 계속 불렀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식당 밖으로 나와 힘겹게 심호흡을 한 그녀는 한참 동안 정처 없이 걸었다. 잠시 후 또다른 식당 건물의 벽에 기대선 채 다시 심호흡을 했다. 강펀치를 맞고 겨우 추스르고 있던 상태에서 또다른 강펀치를 정통으로 맞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정말, 이 상태에서 한 방만 더 맞으면 가건물처럼 와르르르 무너져 버릴 것만 같았다. 동시에 인생 전체가 해독해 볼 수 없는 격렬한 태풍의 눈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도저히 운전을 할 자신이 없어서 마침 그녀 앞에 서는 택시에 올라타 버렸다.

  


7

 

“어이, 안녕……. 어, 어이쿠 그때 그 콩알만하던 녀석이 벌써 이렇게 컸냐? 어, 어부인께선 혹 둘째까지…….  어이구, 저출산 고령화 시대의 애국자 부부구먼. 그래…….”

홍대 앞에서 헤어진 지 이주일 만에 고교 모임의 한 후배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마주친 권선배는 그녀를 보자마자 몹시 당황했다. 마침 자리가 없어서 옆 테이블에 앉게 된 그녀가 계속 딴 곳을 보며 음식을 먹자 권선배는 아예 방향 감각을 잃은 열차처럼 탈선하기 시작했다.

“혹시 너희들 집시들이 결혼할 때 어떤 서약을 하는지 아냐? 먼저 부족의 연장자가 남편이 될 남자한테 맹세를 요구해. 이 여자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이 여자를 떠나겠습니다. 우리네 서약과는 정반대지. 물론 여자에게도 똑같은 맹세를 시켜. 그렇게 맹세를 나눈 남자와 여자는 팔에 상처를 내고 두 팔을 같이 묶어. 두 피가 섞이고 둘은 그 이후부터 평생의 친구가 되는 거야. 그건 곧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떠나면 그때부터는 피가 섞인 오누이의 관계로 남게 된다는 의미야. 어때? 쿨한가?”

이미 낮술에 잔뜩 취해 버린 권선배는 오버하는 듯하면서도 교묘하게 사람들 간의 갈등을 봉합해내던 평소의 센스를 어디 두고 왔나 싶을 만큼 실수를 연발하며 피로연의 분위기를 망쳐 가고 있었다. 그녀가 계속 아는 척 하지 않고 웃어 주지도 않고 있다는 것이 보기보다 예민한 사람인 권선배를 심약하게 만든 듯했다. 전체 분위기를 위해서라도 표정을 바꿔 보고 싶은데 얼굴 근육이 마음대로 움직여 주질 않았다. 사실 그녀는 권선배가 생각하고 있는 만큼 그를 원망하고 있지 않았다. 아리는 어딘가 다른 곳에서 만났더라도 한 번쯤은 단단히 얽히고 말았을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알 리 없는 권선배는 점점 더 불편해지는지 점점 더 오버를 했다.

“바로 이 유한한 한계 땜에 우리네 사랑이 그토록 아름다워 보이는 거 아니겠냐? 생각해 봐. 사랑이 안 변한다. 그럼 누가 잠깐이라도 사랑에 목을 매겠냐?”

나중에 권선배가 애원하듯이, 아니 노골적으로 화해를 청하는 눈길을 던지자 그녀는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권선배가 좋아하는 과일들을 접시에 담아 화해의 사인으로 그 앞에 놓아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과일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던 그녀는 곧 흠칫 놀라 멈춰섰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홀의 왼쪽 구석의 창가를 봤다. 수국 무늬 테이블보가 깔려 있는 원형 테이블에 가족과 함께 앉아 있는 여자는, 정혜였다. 한 번도 서클에 속했던 적이 없는 그녀가 왜 여기에 왔을까? 그러나 곧 정혜든 그녀의 남편이든 오늘 결혼한 부부와 어떻게든 닿을 수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잠깐 망설이던 그녀는 얼굴을 깊이 숙이고 걸어서 과일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녀는 건성으로 과일들을 골라 접시에 담으면서 정혜를 봤다.

숏커트에 약간 올드해 뵈는 베이지색 정장을 입은 정혜는 좋아 보였다. 그녀보다 조금 어려 보이는 남편과 까만 양복에 나비 넥타이까지 맨 서너 살 된 아들은 그녀와 기묘하게 어울렸다. 처녀처럼 앳되 보이는 요즘 엄마가 아니라 푸근하면서도 엄격하고 헌신적인 옛날 엄마, 즉 현모양처로 보이는 그녀는 옛날처럼 나이보다 두 살쯤 많아 보였다.

그녀에게 십대 후반의 베스트프렌드였던 정혜의 이미지는…… 거짓말쟁이, 그것도 지독히 성실한 거짓말쟁이였다. 즉 그녀의 인생에서 불성실한 부분은 거짓말밖에 없었다. 그때 정혜는 집이 서울인데도 집을 나와 오빠들과 함께 작은 아파트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정혜가 다섯 살 때 엄마가 돌아가신 뒤 새어머니가 들어와 낳은 이복 동생들이 많다는 가족 사항이 많은 것을 설명해 주는 듯했다. 고삼 일학기 말에 모의고사를 망쳐 엄마에게 맞은 뒤 가출을 해서 정혜 집에서 이주일간 살 때 그녀는 정혜의 완벽한 살림 솜씨에 놀랐다. 그녀가 외로운 세 식구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지 잘 알 수 있었다.

정혜가 완벽하게 재료를 갖춰 발에 꼭꼭 말아 주는 예쁜 김밥들을 집어 먹으며 정혜가 자신의 오빠들에 대해 해 주는 이야기들을 듣곤 했다. 정혜의 말에 의하면, 큰오빠는 한국 최고의 국립대학을 나온 수재로 국책 은행에 입사해서 승승장구하는 중인데도 과묵하고 따뜻하고 겸손한 남자였다. 실제로 매일 한두 번은 보게 되는 정혜의 큰오빠는 왜소하지만 청결하고 반듯해 보였다. 반면 정혜와 함께 사는 동안 딱 한 번 본 둘째 오빠는 키도 크고 서늘하게 잘생긴 미남이었다. 정혜에 의하면, 그는 대학을 스스로 그만뒀고 클래식 음악에 조예가 깊었으며 못하는 운동이 없고 반항적이었다. 정혜는 그가 육체를 쓰는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어 가며 세계 오지를 여행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때 그녀는 완벽한 보호자와 매력적인 자유인인 정혜의 두 오빠들에게 각기 다른 종류의 경외감을 느꼈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 그 경위는 기억나질 않지만, 어느 날 다른 친구를 통해 정혜가 말한 정혜의 오빠들이 정혜가 각색해낸 인물들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현실의 정혜의 큰오빠는 시립 대학을 나와 제 2금융권인 은행에 다니는 평범한 샐러리맨이었고, 둘째 오빠는 대입은 엄두도 못 낼 건달이었다. 일치하는 건 큰오빠가 두 동생의 완벽한 보호자라는 것뿐이었다. 그때 그녀는 정혜에게 엄청난 배신감을 느끼고 절교했고 한동안 그녀를 피해 다녔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정혜를 보며 십일년 전 정혜가 했던 거짓말들이 단지 거짓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거짓 혹은 진심의 차원을 넘어선 갈망이 아니었을까. 놀라운 건 지금 정혜가 자신의 말대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죽은 엄마를 재현해내고 있는 듯했다. 굳이 다가가서 물어보지 않아도 그녀는 정혜의 가족이 완벽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환상 속에서 만들어낸 가족을 지금은 현실에서 만들어냈다는 것만 달랐다. 아마 앞으로도 정혜의 가족은 완벽할 것이다. 강박을 넘어 환상을 만들어낼 만큼 강한 정혜의 갈망은 세월의 힘쯤 너끈히 싸워 이겨 버릴 것 같았다.

그녀는 접시를 제 자리에 놓아두고 자신의 자리로 가서 코트와 핸드백을 챙겨들고 나왔다. 웨딩홀 정문 밖으로 걸어 나오면서 겨우 그녀의 존재를 잊고 진짜 농담에 열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던 권선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난 괜찮아요. 

번잡한 주차장에서 차를 찾고 있을 때 호주머니 속에서 휴대폰 메시지 사인으로 짐작되는 소리가 들렸다. 권선배일 거라고 생각하며 그녀는 희미하게 웃었다. 겨우 자신의 차를 발견하고 걸어가고 있을 때 호주머니 속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그녀는 깜짝 놀라면서 기계를 꺼냈다. 지나치게 놀란 자신에 대해 어이없어 하면서.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발신인은 아리였다.

“안녕?”

“그래……. 안녕?”

“내 목소리 잊진 않았네.”

아리는 그녀 특유의 약간 들떠 있으면서도 상냥한 목소리로 잠깐 그녀의 근황을 물어본 후 자신의 근황을 들려 주기 시작했다. 아주 상세하게. 이상했다. 하필이면 지금 이 순간 아리가 자신에게 전화를 했다는 것이. 보지 않는 듯하면서도 결정적인 것은 다 보고 있던 특유의 안테나로 적어도 오늘 하루만큼은 종일 자신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아차려 버렸을까? 십년 만에 우연히 정혜를 본 것이 아리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라는 무슨 사인처럼 느껴지는 이 타임에 말이다. 아리는 한결같이 성실하고 치밀하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없는, 아니 가짜임에 틀림 없는 얘기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녀는 사이사이 그래? 응, 응? 하고 반응도 보여 주면서 아리의 이야기를 들었다. 나중엔 인생의 온갖 탁하고 끈적한 것들이 휘발되어 버리고 꿈의 바삭거림만이 남아 있는 그 이야기들이 그녀의 귓속으로 파고 들기도 전에 공중으로 흩어져 버렸다. 귓속으로 파고들든 흩어지든 별 상관이 없는 것 같았다. 

문득 이개월 전 아리가 만들어 냉동실에 넣어둔 청보라색 케이크이, 그것의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이 떠올랐다. 위가 안 좋아서 맛보지 못했던 흰 생크림의 달콤함과 블루베리의 새콤함이 조화된 맛을 맛보고 싶다는 욕구를 느꼈다. 비록 완성됐을 때의 맛만큼은 못해도 그 화사한 파티의 맛을 최소한 반 넘게는 보존하고 있지 않을까. 그녀는 입 안에 고이는 침을 삼키면서 꼭 오늘 밤엔 잊지 않고 꺼내 맛을 봐야겠다고 결심했다.《문장 웹진/2008년 2월호》

kakao

댓글남기기

  Subscribe  
Notify o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