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한 상자

 

와인 한 상자



이상운




구월 십칠일 오후 세시, 몇 년 전에 내 프로필 사진을 찍어준 적이 있는 서른네 살의 사진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들어줄 사람이 없다면서 나를 찾아왔다. 나는 아파트 단지 상가의 외환은행 앞에서 그를 만났으며, 그가 밖에 있고 싶다고 하여 한강 지류를 따라 만들어 놓은 조깅 코스로 그를 안내했다. 사진작가는 강둑에 서서 이미 아래로 내려와 있는 나를 모르는 사람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더니 조심조심 계단을 내려 왔다. 그리고 나란히 서서 천천히 걷게 되자, 내가 어떤 감정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 수 없는 기묘한 얘기를 늘어 놓기 시작했다.


 

사진작가는 이 년 동안 비밀스런 연인 관계에 있었던 여자가 어느 날 ‘자기 짐을 몽땅 싸들고’ 사라져 버렸다고 말했다. 그는 여자를 만나기 위해서 여기저기 찾아다니다가 한 달 뒤에야 여자가, 서른 살 먹은 다른 사진작가의 오피스텔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진작가는 그 다른 사진작가를 그가 스승으로 모시고 있는 분의 스튜디오에서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사진작가가 왜 떠난다고 알려 주지 않았느냐고 묻자 ‘아마추어에 가까운 무명 화가인’ 그 여자는 ‘극적으로 헤어지고 싶어서’ 그랬다고 웃으면서 대답했다. 사진작가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여자는 그녀와 그가 이 년 동안 동거에 가까운 생활을 했다는 사실을 ‘그 사람’은 전혀 모른다고 말했다. 그는 역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얼마 뒤 사진작가는 그 여자를 만나 고급 와인 한 상자를 선물하고―“그 사람, 와인을 아주 좋아해, 나만큼!”―P시로 갔다. 그 도시에서 20년 전에 세 건의 정사 사건이 있었다는 걸 우연히 알게 되자 그 장소로 가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심지어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도 실천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물론, 그 여자가 내 곁에 있을 때는 단 한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사진작가가 말했다. 그는 그를 전폭적으로 믿어 주는 사람과 함께 그의 의지로 그의 삶을 마감할 수 있다면 그건 정말 대단한 일이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일은 최소한 대한민국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것보다는 훌륭한 일이겠죠.” 사진작가가 말했다. 그는 이 말을 하고 나서 처음으로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나 부자연스럽고 불편한 웃음이어서 나는 따라 웃어 주지 못했다.


사진작가가 P시에 도착하니 뒤숭숭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뒤에는 비가 내렸으며, 밤이 되자 먹구름이 도시를 뒤덮었고, 이튿날에는 갑자기 방향을 바꾼 격렬한 태풍이 다가와서 도시를 들쑤셔 놓았다. 삼일째 되던 날에도 대기가 몸부림을 쳤다. 사진작가는 꼼짝없이 실내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모텔 2층의 넓은 창가에 서서 부글부글 들끓는 회색 하늘을 보면서, 어느 순간 슬며시 떠오른 옛일을 반복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대학을 마치고 잠시 몸담았던 회사원 시절의 일이었다. 같은 부서에 그가 은근히 좋아하던 여자가 있었는데, 늘 무관심하게 대하던 그녀가 어느 날 함께 ‘닥터 지바고’를 보자고 했다. 그것도 변두리 극장에서 밤 한 시에야 끝나는 것으로. 그는 그렇게 했다. 그리고 내내 말이 없는 그녀와 동이 틀 때까지 낙엽으로 뒤덮인 밤길을 걸었다. 한두 번 포장마차에서 어묵을 먹었는데 그때도 그녀는 아무 말이 없었다. 사진작가는 그 기묘한 시간을 그에 대한 그녀의 ‘극적인’애정 표현이라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아닐 거라는 믿음이 더 컸다. 전혀 아닐 거라는. 과연, 그녀는 이틀 뒤 사표를 내더니 사흘 뒤에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해 버렸다.


“역사는,” 사진작가가 말했다. “반복된다고 하더니 정말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웃었는데, 역시 부자연스럽고 불편한 웃음이었다. 나는 그와 이 년이나 살았으면서 아무 통보도 없이 ‘극적으로’ 사라져 버린 그 여자의 일을 얘기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이고 함께 억지로 웃어 주었다.


사진작가의 말에 의하면 20년 전 P시에서 세 건의 정사 사건이 있었다. 그때 P시는 지독한 해무로 뒤덮였다. 해무는 황혼의 끝자락에 시작되어 어둠과 함께 도시의 일부를 점령했다. 일주일 동안. 그리고 세 쌍의 남녀가 바다가 보이는 강의 다리 위에서 뛰어내렸다. “그들의 손과 팔과 얼굴을 만져 주는 짙은 안개를, 함께 죽음으로써 그들과 무관하게 세상에 미만한 시간과 공간을 그들만의 것으로 절대화하는 그 존엄한 사업에 아름답게 이용하면서.” 사진작가가 말했다. 어쩐지 신파극 대사 같았다. 그는 도서관에서 우연히 펼친 옛날 주간지에서 그 기사를 보았다고 했다. 주로 문학과 영화를 중심으로 가벼운 읽을거리를 제공하는 타블로이트판 주간지였는데, 윤심덕과 김우진의 정사를 다룬 기사의 말미에 P시의 경우가 ‘수 년 전’의 사건이라면서 간략하게 곁들여져 있었다. 하지만 안개 속에서 다리 아래로 몸을 던진 사람들의 사연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도 없이, 단지 일주일 동안 저녁마다 찾아온 안개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그 이전에는 그 다리에서 투신한 연인이 없었다는 것을 그런 추정의 근거로 들었다.


사진작가는 P시에 도착하자마자 택시를 타고 현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는 바로 벽을 만났다. P시 역사(驛舍)를 빠져나올 때 그는 ‘이유는 모르겠지만’이미 정사 따위는 전혀 믿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서 요즘도 해무가 있느냐고 택시 기사에게 물어 보았다. 60쯤 되어 보이는 기사는 화가 난 듯한 얼굴로 그런 일 없다고 대답했다. 사진작가는 빗방울이 달라붙은 차창 너머로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는 긴 자동차 행렬을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20년 전에 일주일간 지독한 해무가 있었다고 하던데요?” “20년 전에요?” 기사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예, 세 쌍의 남녀가 뛰어내렸다고 하던데.” “세 쌍의 남녀요?” 기사는 또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정말 화가 난 것인지 말버릇인지 알 수가 없었다. “20년 전에 발간된 주간지에 그런 기사가 있었습니다.” “그런 일,” 기사가 다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가 이곳 토박이인데 내 평생에 해무 같은 건 없었어요. 다리에서 뛰어내린 사람들이야 혹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사진작가는 기분이 나빠져 입을 다물었다. 혼자서 뭐라고 중얼대던 택시 기사가 문제의 다리에 도착할 즈음 또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왜 뛰어내렸답니까?” 사진작가는 깜짝 놀라 기사를 쳐다보았다. 기사는 정면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건,” 사진작가는 조그맣게 말했다. “저도 모릅니다. 뭔가 사연이 있었겠죠.” “젊은 사람들이었답니까?” 택시 기사는 가래를 뱉듯이 말을 뱉어냈다. “예.” “음, 시체는 바다에서 발견했을 테고…… 20십 년 전이면 내가 마흔쯤이었고, 나야말로 죽고 싶었을 때인데…….” 기사는 처음으로 목소리를 낮춰서 중얼거렸다. 감상에 잠겨든 탓인 듯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해무 같은 건 없었어요, 결단코!” 사진작가는 화가 치밀었다. “아니, 왜 자꾸 화는 내시는 겁니까, 네?” 그가 소리를 질렀다. 마침 목적지에 차를 대던 택시 기사가 움찔했다. 그는 말없이 사진작가가 내민 돈을 받고 거스름돈을 주었다. “나야 너무 외롭고 적막해서 죽고 싶었다지만,” 택시 기사가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 사람들은 둘이 함께 있으면서 왜 그랬을까 궁금해서 그랬소이다.” “그렇다고 소리를 지르세요?” 사진작가는 뒤늦게 버럭 화를 냈다. “미안합니다, 젊은 양반.” 택시 기사가 말했다. “왜 그렇게 예민하시죠? 누굴 죽이기라도 하셨나요?” 사진작가가 말했고, 택시 기사가 어이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는 댁이야말로,” 그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누굴 죽인 것 같은데, 아니요? 허허, 참. 하여간 멀리서 오셨는데 좋은 시간 보내고 가세요. 휴, 날씨 한번 개 같네…….”


택시가 떠났다. 사진작가는 우산을 쓰고 횡단보도를 건너 강둑으로 걸어갔다. 두 개의 다리가 건너편 공장지대로 뻗어 있었다. 하나는 다리 난간 위로 아치형 철골 구조물이 솟아 있는 신식 다리였고, 다른 하나는 초라하고 낡은 옛날식 다리였다. 20년 전에는 공단이 없었다고 하니까 그때는 낡은 다리 하나만 있었을 것이고 거기서 안개에 쌓인 남녀가 뛰어내렸을 것이다. “아아.” 사진작가가 말했다. 황량하기 그지없는 풍경이었다. 강 건너에는 거대한 굴뚝들이 그로테스크하게 솟아 있었고, 강 이편에는 잡초가 무성한 빈터에 녹슨 컨테이너 박스 몇 개가 놓여 있었다. 모든 것을 감춰 버리는 안개가 없다면, 그 어떤 어두운 사연에 떠밀렸다고 해도 결코 남녀가 투신할 만한 장소가 아니었다. 사진작가는 몇 장의 사진을 찍었다. 그때, 시간을 찰나로 분할하는 카메라의 셔터 소리가 그에게 영감을 주었다.


“정사란,” 사진작가가 말했다. “순간을 절대화하는 미학이라고 생각되더군요. 모든 것을 허물어 버리는 시간에 저항하여 오로지 함께 죽는 그 순간만을 인정하기로 하는 것, 바로 그것이 정사라는 사건이 아닐까 하고요. 그러니까 만약 내가 누군가와 함께 죽기로 하고 정말 함께 죽는다면, 우리가 함께 죽는 그 순간 세상의 모든 시간은 우리에게서 쫓겨나 버리지 않을까, 그 순간 세상의 모든 시간은 무의미하고 불순한 것이 되어 버리지 않을까, 공간 또한 마찬가지 신세가 되어 버리지 않을까, 세상의 모든 공간도 우리에게서 쫓겨나 버리지 않을까, 그래서 오로지 우리 둘의 시간과 공간만이, 즉 우리가 손잡고 죽음의 계곡으로 낙하하는 그 절대적 믿음의 순간만이 존재하게 되지 않을까, 그래서 그 외의 모든 세계는 무가 되어 버리지 않을까…….” 나에게 묻는 질문이 아니었으므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진작가는 강둑에서 내려와 근처의 상가 쪽으로 갔다. ‘음식 가게, 자전거 가게, 오토바이 가게, 낚시 가게’ 들이 강둑 아래 좁은 포장도로를 따라 일렬로 쭉 이어져 있었다. 그는 두 시간 동안 여덟 군데 가게를 찾아 ‘그 해무와 정사’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그들은 불친절하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당신 참 한가한 사람이 아니냐는 반응을 보였다. 그런 일은 없었다고 그들은 말했다.


사진작가는 모텔에서 샤워를 하고 1층 카페로 갔다. 여름 성수기가 막 끝난 시기여서 모텔의 객실에는 물론이고 카페에도 손님이 없었다. 그는 거리가 훤히 내다보이는 창가 자리에서 맥주를 마시며 비바람에 흔들리는 가로수들을 바라보았다. 빗물로 번들거리는 텅 빈 주차장으로 빨간 승용차 한 대가 들어와 속도를 줄이더니 천천히 반원을 그리며 다시 차도로 나갔다. 그는 맥주 두 병을 더 시키면서 벌써 졸음에 겨운 얼굴로 카운터 옆의 소파에 앉아 있는 두 여자에게 말을 걸어 보았다. 무슨 한가한 소리냐는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들도 그의 정사 이야기를 믿지 않았다. 알고 보니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 들은 게 아니라면 애초에 그 일을 알고 있을 수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50대 초반의 주인은 그 도시에 산 지가 이제 5년이었고, 젊은 여자는 사건 당시 갓난아기였을 20대 초반이었다. 그래도 그들이 눈을 반짝이며 그의 자리로 와서 관심을 표하기에 그는 일주일간의 해무며 세 쌍의 연인에 대해서 얘기해 주었다. 두 사람은 사뭇 다른 반응을 보였다. 그 나이에 어울리는 미인이라 할 만한 두 사람은 처음엔 이구동성으로 무섭다고 하더니 곧 견해를 달리했다. 중년 여자는 차라리 그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쪽으로, 젊은 여자는 자신은 끝까지 살아남을 거라는 쪽으로……. “나와 함께,” 사진작가가 두 여자에게 말해 보았다. “죽을 생각 없어요?” 두 사람은 깔깔대며 웃었다.


사진작가는 객실로 올라가 침대에 누웠다. 잠이 오지 않았다. 그는 20년 전 안개 속에서 다리 아래 강물로 뛰어내렸다는 그 연인들을 생각했다. “언제였을까? 두 손을 꼭 잡고 다리를 떠난 그들은 과연 언제 죽었을까?” 그가 독백을 하듯 말했다. 아니, 그의 말은 처음부터 끝까지 독백이었다. 사진작가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오후에 본 그 다리는 아주 낮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위협적일 만큼 높지도 않았다. 그리고 강둑 아래 물가의 잡초밭에 농구 골대가 세워져 있는 것으로 보아 한때는 거기서 아이들이 농구를 하기도 했을 테니 강물의 깊이도 위험한 수준은 아니라고 추정할 만했다. “그렇다면 다리를 떠난 그들은 금세 그리 깊지 않은 강물에 닿지 않았을까, 그래서 어쩌면 사람 키를 조금 넘는 깊이의 물 때문에 오랜 시간을 끌면서 고통스럽게 죽어가지 않았을까, 강물에 몸이 닿기까지 수 초 동안 온 우주를 그들의 것으로 만든 벌로써, 그들이 버리기로 한 이 자연으로부터 참으로 모욕적인 앙갚음을 당하면서…….” 사진작가는 혼란스런 졸음 속으로 한 길 더 내려가면서 우중충하게 비를 맞으며 말없이 강을 가로지르고 있던 다리를 떠올렸다. 그리고 20년 전의 그 연인들이, 그들의 몸을 던진 즉시 이 세계를 벗어나 버렸기를 빌었다. 하늘도 강물도 보이지 않고, 서로에 대한 믿음으로 죽음을 희롱하는 두 사람 외에 아무것도 없는 그 절대적 순간의 세계가, 곧바로 시간도 공간도 없는 무한세계로 이어졌기를.


P시에서의 둘째 날, 사진작가는 택시와 버스를 이용하여 마치 비바람 속을 방황하는 취미를 지닌 사람처럼 이곳저곳 찾아다녔다. 그러나 ‘내가 바보가 아닌가’라는 느낌 외에 소득은 전혀 없었다. 경찰서 민원실의 심심해 보이는 50대 남자는 사진작가의 말을 한참 듣고 있다가 갑자기 ‘그렇게 오래된 그런 사건’의 기록은 찾을 수 없다고 느릿느릿 말하더니 입가에 묘한 미소를 머금으며 ‘정말 기자가 맞느냐고 헛소리를’ 했다. 그는 경찰이 사용한 ‘그런’이라는 단어가 무슨 뜻일까 생각하면서, 그는 기자가 아니라 사진작가라고 다시 한 번 말해 주었다. 그리고 시장에서 김이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뜨거운 곰탕으로 점심을 먹고 오래된 동네의 경로당 두 곳을 찾았으며―“무슨 영문인지 노인들이 다 취해 있더군요.”―오후 늦게 P시 문화센터에서 소개받은 ‘향토사가’를 만나러 갔다. 60쯤 되어 보이는 향토사가는 멋을 부린 하얀 장발에 개량한복을 입고 있었는데, 파이프 담배를 입에 문 채 ‘고가’라는 이름의 민속주점 처마 아래에서 그를 맞았다. 향토사가는 그 주점의 주인이었다.


사진작가는 노란 창호지등이 은은한 불빛을 퍼뜨리는 카운터 근처 탁자에 앉아서 가야금 선율을 들으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사진작가가 건네준 사진 에세이집의 저자 소개를 한참 들여다보더니 목차를 찬찬히 살핀 다음 다시 저자 소개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의 부인이 파전과 동동주를 내왔다. 그제야 남자는 책을 덮어 옆으로 치운 다음 ‘눈웃음을 치며’술을 권했다. 사진작가는 술잔을 기울이고 파전을 먹으면서 처음 전화 통화를 했을 때 이미 얘기했고, 고가에 마주앉아 다시 한 번 얘기한 20년 전의 정사에 대해서 ‘빌어먹을’ 또 다시 늘어놓아야만 했다. 향토사가가 매끈하고 탄력 있는 얼굴에 ‘빌어먹을’ 사람 좋은 미소를 가득 담고서 한번만 더 들려 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이었다. “일주일간 황혼녘에 지독한 해무가 있었고, 그때 세 쌍의 연인이 다리에서 뛰어내렸지요.” 사진작가가 아는 것이라고는 그것뿐이었지만―“난 이미 가짜 기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요.”―똑같은 말을 하고 싶지 않아서 다자이 오사무와 김우진과 윤심덕의 정사 얘기에 ‘그 무명 연인들의 죽음을 곁들이는 식으로’ 다시 그 얘기를 들려주었다.


향토사가는 파이프 담배를 뻑뻑 빨면서 흥미진진하다는 듯 사진작가의 말을 경청했다. 그리고 날씨가 어떻다느니 신경통 때문에 미치겠다느니 따위의 말을 주절대며 그에게 술을 권하고 자기도 마시고 했다. 향토사가는 그런 식으로 시간을 질질 끌면서 사진작가를 알딸딸하게 만들어 놓은 다음에야 그 사건에 대해 그가 해줄 수 있는 말을 내놓았다. “왜 좀 더 의미 있는 걸 찾지 않고 그런 하찮은 걸 찾아다닙니까?” 향토사가가 말했다. 그의 말은 20년 전의 정사에 대해서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고백이었다. 사진작가는 잔주름이 가득 잡힌 눈으로 생글생글 웃고 있는 그를 향해 ‘빌어먹을’ 웃음을 터뜨려 주었다. 그리고 즉시 마음을 비워 버렸다. 하얀 장발에 파이프 담배를 피우는 그 남자는 단지 멀리서, 그것도 서울에서 찾아온 사진작가와 술잔을 기울이고 싶었던 것으로 보였다. 그는 그 조그만 해변 도시에서 일상적으로 만나는 문인, 화가, 음악인, 공무원 등의 ‘문화적인 술꾼들에게’ 지독한 권태를 느끼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사진작가가 전화로 ‘나는 탐정이고 죽은 연인의 갈비뼈 하나를 찾으러 서울에서 왔다, 라고 헛소리를 했다 하더라도’ 당장 주점 ‘고가’로 오라고 했을 것 같았다. 사진작가의 느낌대로 정사는 즉시 잊혀져 버렸다. 세 항아리의 동동주를 비우는 동안 향토사가는 다시는 그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향토사가는 ‘향토사가의 그 사가라는 말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사진작가가 꺼낸 ‘역사란 거짓 이야기가 아닐까’라는 문제 제기에 대해서도 전혀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어느 순간 인기척이 느껴져 뒤돌아보니 사진작가가 모르는 사이에 두 사람 뒤쪽 탁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던 향토사가의 아름다운 부인이 싱긋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다. 그게 그녀의 남편을 보고 그런 것인지 사진작가를 보고 그런 것인지, 둘 다를 보고 그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순간, 사진작가는 그 여자와 함께 죽고 싶었다. “하하하.”


도시는 태풍의 습격에 속수무책으로 떨고 있었다. 격한 비바람이 지상의 사물들을 모두 떼어내어 허공으로 끌고 올라가려는 듯했다. 사진작가는 아랫도리를 흠뻑 적시며 간신히 택시를 잡아타고 부러진 우산을 꼭 거머쥔 채 모텔로 돌아갔다. 바닥에 빗물자국을 남기며 계단 쪽으로 걸어가는데 카페에서 나온 젊은 여자가 인사를 했다. 무슨 이유인지 그녀의 새까만 단발머리도 젖어 있었다. 그녀는 하얀 이마와 뺨 위에 엉겨 붙은 젓가락 굵기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면서 생긋 웃었다. “뭣 좀 찾았어요?” 그녀가 물었다. 사진작가는 꼭 쥐고 있던 망가져 쓸모없게 된 우산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은 뒤 두 손을 펼치면서 활짝 웃어 보였다. 그녀는 콧등에 주름을 만들며 어색한 웃음을 머금더니 다시 젖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흠뻑,” 그녀가 말했다. “젖었네요. 감기 걸리겠어요. 참, 혹시, 케이크 드시고 싶으면 내려오세요.” “케이크요?”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내려오라는 건……?” “네? 아, 그건…….” 사진작가는 손을 들어 알겠다는 시늉을 했다. “올라가서 발가벗고 샤워한 뒤 옷 갈아입고 나서 말이죠?” “네.” 그녀는 수줍게 웃었다. “알았습니다. 발가벗고 샤워한 뒤에 옷 갈아입고…… 그런데, 혹시 나랑 함께 죽을 생각 없어요?” 여자는 얼굴이 굳어지더니 이내 입술을 벌리고 소리 없이 웃으며 말했다. “어휴, 자꾸 그런 말 마세요. 무섭단 말예요.”


사진작가는 객실로 올라갔다. 그는 침대에 드러누워 카페의 젊은 여자를 생각했다. 젖은 머리카락과 하얀 얼굴이 그의 속에 에로틱한 구름을 만들어냈다. 그 여자가 보여준 영문 모를 친절이 고마웠다. ‘지금 당장, 이라면’ 그녀와 함께 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그리고 타는 듯한 갈증으로 물을 찾아 헤매는 꿈을 꾸었다. 동시에 천둥소리도 들었다. 그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자정이 지나 있었다. ‘벌컥벌컥벌컥’ 냉수를 마신 뒤 눅눅한 옷을 모두 벗고 벌거숭이로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았다. 사람은 물론 자동차 한 대 보이지 않았다. 멀리 교통 신호기의 노란 불빛이 어둠 속에서 절망적으로 깜박이고 있었다. 돌연한 충동으로 사진작가는 자위를 하기 시작했다. 얼마 뒤 먼 곳의 허공에 꼬불꼬불한 하얀 실 같은 금이 가는 게 보였다. 몇 초가 지나자 운명의 신호 같은 둔중한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연이어 그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모텔 뒤편으로부터 환한 불빛이 번쩍이더니 분노한 거인이 철판을 찢는 듯한 고통스런 절규가 들려왔다. 그는 부러진 플라타너스 가지 두 개가 달리기를 하듯 물보라로 가득 찬 주차장을 가로질러 가는 것을 보면서 사정을 했다.


사진작가는 욕조의 더운 물 속에 몸을 담그고 눈을 감았다. 문을 닫아 놓았는데도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그 아늑한 북소리를 들으며 ‘극적으로 헤어지고 싶어 한 그 여자’를 생각했다. 새로운 사진작가 연인과 함께 그가 선물한 ‘그’ 포도주를 마시고 있을지 정말 궁금했다. 그는 잠시 졸았다. 의식이 들었을 때 어느 곳인가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표정 없는 그 여자의 옆얼굴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는 시간이 멈춘 그 영상의 장소도 때도 알 수 없었다. 사진작가는 생각했다. “세월이 더 지나면 그녀의 영상은 더 단순해지겠지. 그러다가 언젠가는 까만 눈동자의 검은 점 두 개와 내가 쓰다듬기를 좋아했던 통통한 뺨의 곡선, 그리고 한두 개의 짧은 직선과 동그라미로만 남게 되겠지.” 사진작가는 몇 방울의 눈물을 흘렸다.


다음 날, 사진작가는 늦게 일어났다. 창밖은 여전히 비바람의 세계였다. 도로 위로 차들이 물보라를 일으키며 달리고 있었지만, 주차장은 텅 비어 있었다. 그는 여행을 떠날 때마다 챙겨 다니는 비상식량으로 요기를 하며 오후 늦게까지 방을 나서지 않았다. 창밖의 비바람에 눈길을 얹어 놓은 채, 그는 저녁별처럼 떠오르는 옛일들을 되새기며 그 우연한 고립을 즐겼다. 오후 늦게 내려가 보니 카페도 텅 비어 있었다. 주인 여자가 분에 넘치게 반가워했지만, 사진작가야말로 그 카페가 영업을 하고 있다는 게 고마웠다. 그녀는 맥주를 가져다주더니 탁자 옆에 선 채로 어젯밤에 젊은 여자가 그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래, 뭣 좀 찾았어요?” “뭐, 별로요.” “혹시, 케이크 좀 드릴까요?” “아, 참, 케이크…….” “드릴까요?” “네, 좀 주세요. 그런데,” 그는 카페 안을 휘둘러보았다. “그 아가씨는 안 보이네요?” “그만뒀어요. 지난봄에 여름이 지나면 떠나겠다고 했는데, 그게 어제였어요.” “아아.” 사진작가는 망각의 허공으로 흩어지려 하던 사소한 의문 하나가 해소된 것이 기뻤다. “그 순간, 이런 것이 이 작가님 같은 소설가들이 은밀히 즐기는 희열이로구나 싶더군요.” 사진작가가 말했다. 사진작가는 추정했다. 카페의 젊은 여자는 창밖을 내다보다가 택시에서 내려 빗물을 맞으며 모텔로 뛰어 들어오는 그를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가 그가 로비를 다 가로질러 갔을 때 뛰어나와 케이크를 먹으러 내려오라고 했을 것이다. 작별을 앞둔 사람들은 흔히 근처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 뭔가를 나누고 싶어 하니까. 그런데 그녀의 머리카락은 왜 젖어 있었던 것일까? 사진작가는 물었다. “그래서 어젯밤에 둘이서 이별파티를 한 모양이죠?” “오모, 어떻게 아세요?” “케이크를 주시겠다고 하니까 그냥 짐작으로 하는 말이죠.” “맞아요. 그런데 손님은 언제 떠나세요?” “태풍이 지나가면요.” 그는 여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씩 웃었다. “나랑 함께 죽겠다면 안 떠나죠.” “정말이세요? 자신 있어요?” “아뇨, 없습니다.” “내 그럴 줄 알았다니까. 그런 장난치지 마세요. 나 같은 나이의 여자한테 그런 장난은 치명적일 수 있어요.” “어이쿠, 죄송합니다.”


다음날 아침, 하늘은 거짓말처럼 맑게 개어 있었다. 그러나 사진작가는 P시를 떠나지 않았다. 맑고 파란 하늘과 찬란한 햇빛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는 푸른 하늘과 맑은 공기와 따사로운 햇빛을 즐기면서 철 지난 해변의 풍경을 잡아보고 싶었다. 그는 역전의 택시 승강장에 차를 대놓고 솜사탕을 먹으면서 빈둥거리고 있는 젊은 기사와 흥정했다. 그리고 해변의 끝에서 끝까지 훑어보았다. 네댓 차례 차에서 내려 20분쯤 머물렀는데도 해안을 따라 길게 형성된 도시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데 채 세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해변은 도시의 ‘역사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세 구역으로 뚜렷이 분할되어 있었다. 먼저 최근 10여 년간 조성된 도시의 북부 지역에는 나지막한 뒷산을 배경으로 공원처럼 꾸며진 고층아파트 단지와, 그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고 화려한 유흥가와 백사장을 거느린 완만한 곡선의 해안도로가 있었다. 그러나 거기서 남쪽으로 고만고만한 낡은 주택이 밀집한 거리를 지나면, 해변은 ‘마치 시간의 터널을 통과하여 마주친’ 다른 고장 같았다. 그곳은 공단이 생기기 전에는 해수욕장이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지연되고 있는 재개발 계획 때문에 황량한 폐허로 변해 있었다. 빈 상가 건물들은 거의 허물어졌고, 길지 않은 백사장에는 쓰레기와 해초와 흙이 쌓여 있었으며, 바닷물은 첫눈에 인상이 찌푸려질 정도로 혼탁했다.


사진작가는 사진을 찍었다. 그동안 젊은 기사는 강아지처럼 그를 졸졸 따라다니며 공단 때문에 도시가 반쪽으로 나눠졌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택시 기사의 얘기로는 공단이 들어선 뒤 그 해변을 포함한 원래의 도시 지역이 점점 외면당하다가 결국 몰락해 버렸다는 것이었다. “보세요,” 택시 기사가 말했다. “여기다가 온 가족이 함께 놀 수 있는 공원 같은 걸 만들겠다고 해 놓고는 이 년이 다 돼가도록 손도 못 대고 있어요.” 무슨 이유 때문이냐고 묻자 그는 불쑥 언성을 높였다. 불쑥 언성을 높이는 건 그 지역 남자들의 특징인 것 같았다. “잘은 모르지만 건설업자들이 손을 뺀 거겠죠. 저 바닷물 보세요. 저런 구정물 앞에서 가족들이 놀 수 있겠어요?” 그러면서 젊은 기사는 비슷한 내용의 말을 주절주절 덧붙이다가 살짝 웃음을 머금더니 “씨팔” 누군가가 고발기사 같은 걸 써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사진작가는 눈썹에 매달린 땀방울을 훔쳐냈다. 정오를 향해 달려가는 태양이 빛의 폭포를 퍼붓고 있었다.


택시는 20년 전에 지독한 해무와 세 건의 정사가 있었다는 다리를 지나 연탄가스 같은 냄새가 떠도는 공단 지대를 통과했다. 그리고 과수원이 펼쳐진 들판의 좁은 포장도로를 한참 달리다가 비포장도로로 꺾어 들어 10분쯤 달리더니 아직은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바다 앞에 사진작가를 데려다 놓았다. 병풍처럼 길게 이어진 구불구불한 바위산 기슭이 먼 데서 달려오는 파도와 바람을 온몸으로 맞이하고 있었다. 사진작가는 바다가 보이자 바로 차를 세우게 했다. 그는 물기를 머금은 흙길 가장자리를 따라 걸어갔다. 택시 기사는 풀숲에서 소변을 보며 휴대폰으로 시끄럽게 통화하기 시작했다. 그 길은 우연한 축복이었고 우연한 성찬이었다. 사진작가는 그 풀냄새를, 그 흙냄새를, 몇 올의 머리카락만 건드릴 뿐인 있는 듯 없는 듯한 그 바다의 공기를, 풀밭에 배를 깔고 엎드려 되새김질에 열심인 암소를 연상시키는 그 검은 바위들을, 그리고 20여 미터 발아래 놓여 있는 또 다른 차원의 대지 같은 그 초록빛 바닷물을, ‘마시고, 씹고, 삼켰다.’


사진작가는 ‘어쩔 수 없이’ 그 여자를 생각했다. 여행길에서 그런 축복에 마주칠 때마다, 사진작가는 한 시절 그의 연인이었다가 ‘극적으로 사라져서’ 다른 사진작가의 연인이 된 그 사람에게 전화를 하곤 했었다. 그는 그때그때의 상황에 맞게, 예컨대 태풍이 지나가는 해변이면 긴박하고 소란스럽게, 제 부피를 견디지 못하여 쩍쩍 소리를 내면서 갈라터지고 있는 한겨울의 달빛 어린 호수라면 고요하고 적막하게, 그 풍경들을 묘사하곤 했었다. 그러면 그녀는 잠에 취한 듯한 귀여운 목소리로 꾸며낸 얘기가 아니냐고 묻고 나서 꿈에 그 풍경을 보았으면 좋겠다고 했었다. 그런데, ‘빌어먹을’ 그는 생각했다. 포도주를 좋아하는 그녀는 그가 준 ‘그’ 포도주를, 그녀만큼 포도주를 좋아한다는 새로운 그 연인과 함께 마셨을까?


다음날 꼭두새벽, 사진작가는 갑자기 잠을 깼다. 그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어 잠시 기다려야만 했다. 아마 10초도 안 되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짧은 몇 초 동안 그를 집어삼키는 까마득한 영원을, 끝없이 떨어지고 있는 듯한 두려운 추락을 경험했다. 그는 그의 몸을 저만치 떨어져 있는 어떤 사물을 보듯이, 마치 죽은 듯이 멈춰 있는 어떤 곤충을 보듯이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의 내부에 차오른 밀물 같은 두려움에 떠밀려 벌떡 일어나 창가로 갔다. 기이한 푸른빛이 텅 빈 주차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는 마치 정지된 고체 속 같은 그 풍경 속에서 안장이 하얀 자전거 한 대를 보았다. 그는 그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그가 바로 그 자전거를 타기 위하여 그 낯선 도시의 낯선 모텔에서 나흘 밤을 보낸 것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사진작가는 조금의 주저도 없이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안장이 유난히 하얀 그 자전거를 타고 퇴락한 해변을 향해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도시는 파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사진작가는 자동차도 사람도 없는 텅 빈 도로를 마음대로 달려갔다. 파출소를 끼고 돌아 강 하구로 연결된 작고 더러운 하천을 따라 한참 달린 끝에, 그는 성냥갑 같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바닷가 마을로 들어섰다. 샛길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사람이 있을지 알 수 없어 그는 속도를 줄이고 구불구불 이어진 골목길을 통과하여 마침내 물가에 닿았다. 해변은 한낮에 보았을 때와는 사뭇 달랐다. 모든 것이 형태도 색깔도 알 수 없는 청회색 어둠에 잠겨 있어서 허물어진 상가도, 쓰레기와 해초로 뒤덮인 백사장도, 혼탁한 호수 같았던 바닷물도 먼 옛날 얘기처럼 아득했다. 그는 자전거를 타다가 끌다가 하면서 얼어붙은 호수처럼 미동도 없는 바닷물의 경계를 따라 나아갔다. 그리고 백사장의 끝에 이르러 담배를 피우려고 주머니를 뒤지면서 의문에 사로잡혔다. ‘이 해변에는 왜 아무도 없는 것일까?’ 그 의문은 순식간에 그를 모텔에서 눈을 떴던 순간으로 끌고 갔다. 그가 영원한 추락의 도정에 있음을 알려준 그 짧고, 깊고, 넓은 시간 속으로…….


사진작가는 전신을 옥죄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마치 그가 맞닥뜨린 그 기묘한 공포를 해소시켜 주려고 준비해 놓은 것처럼 작은 바위 너머 좁은 모래판에 벌거벗은 남녀가 나타났다. “정말입니다.” 사진작가가 말했다. 사진작가는 놀라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어두워서 그들의 얼굴은 알아볼 수 없었다. 그들은 물가에 나란히 서서 멀리 수평선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참으로 아름답고 평온해 보였다. 그는 거의 황홀경에 빠져서 삼각형으로 예쁘게 솟아 있는 여자의 젖가슴을 응시했다. 그러다가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수평선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아득하게 이어진 캄캄한 바다 위로 검은 유리 같은 하늘이 맞닿아 미세한 선을 긋고 있었다. 하늘에는 별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심야의 폐허가 된 해변에 갑자기 나타난 벌거벗은 남녀에 대해서도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있었다. 그는 그들이 아름답다고 생각했고, 그들이 그의 두려움을 없애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얼마나 시간이,” 사진작가가 말했다. “흘렀는지는 나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10초였거나 그보다 더 짧은 2, 3초였을지도 모르지요.” 벌거벗은 남녀가 바위를 타고 넘어 소나무 숲을 향해 춤추듯이 걸어가기 시작했다. 사진작가는 가슴이 미어지는 안타까움으로 그들을 바라보다가 큰 소리로 외쳤다. 그의 입에서 ‘그 여자의 이름’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벌거벗은 여자도 벌거벗은 남자도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뛰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마치 춤을 추고 있는 것처럼 행복하게 보였다. “행복하게 보였다는 건,” 사진작가가 말했다. “아아, 빌어먹을, 나의 기만적인 희망이었을까요?” 여자와 남자의 하얀 팔다리와 여자의 긴 머리카락과 여자와 남자의 하얀 엉덩이가 파란 어둠 속에서 황홀한 무늬를 만들고 있었다. 사진작가는 입을 다물고 그들이 어두운 숲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망연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제기랄!” 사진작가가 말했다.


사진작가는 눈부신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모텔 침대 위에서 깨어났다. 그는 그가 거의 날다시피 달려서 돌아왔다고 ‘생각’했다. 안장이 하얀 자전거를 타고 해변을 떠나 모텔까지 돌아오는 동안에도 도시는 인적 없는 파란 정적에 잠겨 있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노크소리가 났다. 두려워하며 살며시 문을 열자 푸른 상의를 입고 머리에 수건을 쓴, 인상 좋은 뚱뚱한 아줌마가 서 있었다. 청소부였다. 그녀를 보니 어젯밤 프런트에서 미리 체크아웃을 한 것이 생각났다. 방을 비워 줘야 하는 12시가 지나 있었다. 그는 샤워도 하지 않고 서둘러 짐을 챙겨 객실을 나섰다. 그는 안장이 하얀 자전거가 세워져 있던 가로등 옆에 섰다. 폭포처럼 떨어지는 투명한 가을 햇살을 맞으며 그는 그가 자전거인 양 한참 동안 서 있었다. 사진작가는 아주 오랫동안, 어쩌면 황혼이 질 때까지, 날마다 새벽이 올 때까지, ‘나와 함께 죽어 줄 빌어먹을 누군가를 만날 때까지,’ 오래오래 그곳에 서 있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곧 택시가 왔기에 그는 택시에 몸을 실었다. “하하하.”


나는 굵고 짧은 웃음을 그친 사진작가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일부러 계산이라도 한 것처럼 처음 계단을 내려갔던 그 자리로 되돌아와 있었다. “이게 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무슨 얘기죠?” 사진작가는 아무 말도 없이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다 오르고 나서 우물 안을 들여다보는 아이처럼 무서워하며 고개를 아래쪽으로 조금 내밀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부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어한다고 느껴졌지만 그게 뭔지는 알 수 없었다. 사진작가는 슬며시 돌아서더니 그대로 가 버렸다. “이게 다 무슨 얘기죠?” 사진작가가 해 주지 않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며칠 뒤 H신문이 해주었다. 구월 이십일 H신문 사회면에 다음과 같은 조그만 기사가 있었다. 구월 십구일 오후 세 시, 서른 살의 사진작가와 그의 애인으로 보이는 서른셋의 여인이 남자의 오피스텔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두 사람은 옷을 벗고 있었는데, 경찰은 사망한 지 최소한 일주일은 넘은 것으로 추정했다. 경찰은 특별한 외상이 없고, 사랑을 나눈 흔적이 있으며, 그들이 마신 ‘한 상자의’ 포도주 병에서 수면제가 검출된 것으로 보아 동반자살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경찰도 신문기자도 사진작가가 사용한 ‘정사’라는 말은 쓰지 않았다.문장 웹진/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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