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적가리 판타지

 

노적가리 판타지



박상우




밤 10시 53분, 하행선 마지막 열차가 떠난다. 출구를 빠져나온 서너 명의 여객들이 지친 기색으로 역사를 빠져나가자 대합실에 무거운 냉기가 감돈다. 열차가 떠난 뒤에도 그는 개찰구 옆의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본다. 저녁 7시경부터 그때껏 근 네 시간 가까운 집중이다. 개찰구를 닫고 대합실 안으로 들어온 역무원이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그에게 묻는다.

 

 

“기다리는 사람이 안 왔나 보죠?”

돌연한 물음에 그는 막막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젓는다. 일주일 이상 깎지 않은 수염이 평상적인 생활을 접은 사람의 몰골을 연상케 한다. 뿐만 아니라 대합실의 흐린 불빛이 그의 낯빛을 납빛으로 가라앉게 만든다.

그는 역사를 나서 몇 개의 나트륨등 빛이 내려앉는 광장을 가로질러간다. 우측의 골목으로 접어들자 몇 군데의 식당에서 희붐한 형광불빛이 흘러나온다. 맞은편 터미널 주변도 불이 꺼져 선뜩한 느낌을 주지만 그나마 포장마차에서 밀려나오는 불빛이 이정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는 포장마차 안으로 들어가 소주 한 병과 우동 한 그릇을 시킨다. 그녀가 오겠다던 7시부터 지금껏 내내 대합실에 있었으므로 이제는 허기를 지나 속이 쓰리고 신물이 넘어올 지경이다. 그는 우동이 나오기 전에 소주를 맥주 컵에 부어 단숨에 반을 비운다. 우동이 나온 뒤에 숟가락으로 따뜻한 국물을 몇 번 뜨고 나머지 술을 마저 비운다. 몇 젓가락 면발을 빨다 말고 그는 고개를 들고 오십대 주인에게 묻는다.

“오늘이 며칠이죠?”

“오늘이 장날이니까…… 구일이네요, 구일.”

주인여자의 말을 듣고 그는 고개를 숙인다. 우동그릇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른 김이 그의 얼굴을 축축하게 만든다. 그는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고 계산을 한다. 왜 다 먹지 않고 가느냐고 주인여자가 묻지만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포장마차를 벗어난다.

밖으로 나서자 건너편 강 쪽에서 매운 칼바람이 불어온다. 터미널 앞에서 무단횡단을 하고, 경사진 인도를 따라 10분쯤 걸어 올라가 강마을로 진입하는 다리를 건넌다. 거기서 강마을까지는 아무리 빨리 걷는다 해도 30분은 족히 걸릴 터이다. 가로등도 없는 캄캄한 시골길이니 시간이 훨씬 더 걸릴 수도 있다. 고개를 숙이고 걸으며 그는 중얼거린다.

“안 오면…… 날더러 어쩌라는 건가.”


그가 강마을에 당도한 건 9일 전이었다. 그날 오후 늦게 그곳에 당도했을 때 세상은 온통 백설 천지가 돼 있었다. 주먹만 한 함박눈이 쏟아져 강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마을 공터에서 몇 마리의 개들이 겅중거리고, 어린 동네아이들이 눈을 뭉쳐 던지는 풍경이 흐릿하게 보일 뿐이었다. 역에서 내려 강마을까지 택시를 타고 가는 동안 그는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깊은 오지로 들어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지리적인 오지가 아니라 마음의 오지였다.

몇 년 전 그는 강마을을 지나쳐간 적이 있었다. 영화 촬영 장소 헌팅을 위해 스태프들과 그곳을 잠깐 둘러보고 간 것이었다. 물론 그곳은 적합한 장소로 선정되지 않았지만 마을에서 건너다보이는 작은 섬은 유난스레 그의 기억에 오래 남아 있었다. 반경 50미터도 채 안 돼 보이는 섬은 강 하구에 모래가 퇴적돼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라 했다. 하지만 잡목림만 무성해 동네사람들도 그곳으로는 건너가지 않는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섬 안에 돌무덤이 하나 있어 누군가 그곳에 발을 들여놓으면 반드시 나쁜 일을 당한다는 기이한 미신까지 생겨 있었다.

동생이 자살했을 때 어째서 그의 뇌리에 섬이 떠올랐는지 모를 일이었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거의 자동적인 것처럼 섬이 떠올라 그는 동생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그것이 그에게는 너무도 다행스럽게 여겨졌다. 조문을 받는 동안에도, 장례를 치르는 동안에도, 화장을 하는 동안에도, 그는 내내 섬에 사로잡혀 있었다. 당연한 절차처럼 그는 장례가 끝나자마자 주변을 정리하고 허겁지겁 이곳을 찾아왔다. 오직 한 사람, 동생의 여자에게만 자신의 행선지를 밝혔다.

-섬이 자꾸 날 불러요. 어쨌거나 난 그곳으로 가야 할 것 같아요.

-그럼 나는요?

-지금으로선 아무것도 말할 수 없어요. 그곳에 가서 다시 연락하죠.

5일 동안 그는 민박집에 틀어박혀 낮과 밤이 바뀐 생활을 했다. 낮에는 방에 틀어박혀 잠을 자고 밤에는 밖으로 나와 강마을을 배회하며 건너편의 섬을 건너다보곤 했다. 강마을이 끝나는 곳에 두어 척의 나룻배가 묶여 있어 바람이 불 때마다 유혹하듯 일렁거리곤 했다. 마을에는 작은 식당과 구멍가게가 있었다. 민박집 두 채를 제외하고 이십여 호의 가옥들은 산비탈 곳곳에 듬성듬성 분산돼 있어 딱히 마을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어두워진 뒤에 밖으로 나가 식당에서 한 끼 밥을 사먹고 구멍가게에서 몇 병의 소주를 사들고 오곤 했다. 그리곤 밤을 새워 결빙의 속삭임을 들으며 견딜 수 없이 맑은 정신으로 소주를 마시곤 했다.

사흘 전, 그는 동생의 여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밤을 새운 뒤, 처음으로 돋을볕이 세상으로 퍼져나가는 이른 시간에 구멍가게 앞으로 가 공중전화를 건 것이었다. 강마을로 들어올 때 그는 이미 모든 걸 처분하고 온 터라 휴대폰 따위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전화를 받은 여자는 그의 목소리를 듣자 대뜸 울음을 터뜨렸고,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죽고 싶다는 말을 했다. 그가 맞받았다.

-나도 당신과 생각이 같아요. 그러니 당신도 이리로 와요.

흐느끼던 끝에 여자는 그러마고 했다. 모든 걸 정리하고 3일 뒤에 그가 있는 곳으로 오겠다고 했다. 그는 침묵했고, 여자는 계속 흐느꼈다. 전화를 끊은 뒤에도 여자의 흐느낌은 집요한 여운이 되어 그의 귓전을 맴돌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선택과 권유를 후회하지 않았다. 어쩌면 처음부터 모든 것이 그렇게 결정돼 있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음이 편안했다. 여러 해 전, 그가 섬을 처음 보던 무렵부터 이미 모든 것은 예정돼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지금 모든 것이 섬을 향해 가고 있지 않은가.

        

다리를 건넌 뒤부터 바직바직 얼어붙은 눈이 발에 밟힌다. 사람이 별로 다니지 않는 길이고 날씨가 추우니 지난번에 내린 눈이 고스란히 얼어붙은 것이다. 컹컹, 주변의 인가에서 개 짖는 소리가 한껏 깊어진 어둠을 뒤흔든다. 그는 걸음을 재촉하며 안 오면 날더러 어쩌라고, 날더러 어쩌라고…… 하는 말을 되풀이한다. 그렇게 몇 걸음 걸어 나가다 갑작스럽게 걸음을 멈추고 그는 쪼그려 앉는다. 그러고는 허억, 헉, 산소가 결핍된 호흡기 질환자처럼 가슴을 양손으로 짓누르며 고통스러워한다. 이제는 한 마리가 아니라 여러 마리의 개들이 서로에게 자극을 받은 듯 사방의 어둠 속에서 극성스럽게 짖어댄다.

동생의 여자가 어긴 약속에 대해 그는 아무런 대책이 없다. 애초에 그와 그녀가 주고받은 말이 약속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도 이제는 모호하게 느껴질 뿐이다. 처음부터 그와 그녀는 약속으로 맺어진 사이가 아니다. 그러니 여자가 오늘 기차에서 내리지 않은 게 약속을 어긴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도 그는 명확하게 판단을 내릴 수 없다. 그저 오지 않았다는 사실만이 그를 어둠 속에 주저앉게 만들고 어둠보다 더욱 깊어지게 만들 뿐이다.

어쩌란 말인가.

쪼그리고 앉아 그는 끈끈한 타액을 밀어낸다. 포장마차에서 서둘러 마신 술이 쓰디쓴 쓸개즙처럼 밀려나온다. 눈물을 글썽거리며 으헉, 컥, 그는 헛구역질까지 해댄다. 주머니를 뒤져보지만 손수건도 없고 화장지도 없다. 지폐 몇 장만 마른 낙엽처럼 버석거릴 뿐이다. 손바닥으로 땅을 짚으니 차디찬 얼음의 기운이 느껴진다. 거기에 손바닥을 비비고, 거기서 생겨난 물기로 입을 닦는다. 그러고 나서 칵, 마지막으로 힘을 모아 침을 뱉는다.

자세를 풀고 일어나자 깊은 현기증이 몰려와 눈앞이 아찔하다. 허벅지를 손으로 짚고 잠시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는다. 개들은 이제 막 줄을 끊고 집밖으로 뛰쳐나와 잔혹하게 그를 물어뜯기라도 할 것처럼 발악적으로 짖어댄다. 흰 눈 위에 붉은 선혈을 흘리며 개들에게 물어뜯기는 주검을 떠올리자 입가로 비죽이 웃음이 번진다. 그래, 죽을 이유가 분명한 자들은 그렇게 죽는 게 마땅하지. 안 그래?       


동생은 유서를 남기지 않았다. 유서를 남길 만큼 여유를 회복하기 전에 죽음을 감행한 때문이었다. 그는 그렇게 단정했다. 아마 자신이라도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그는 동생의 입장을 이해했다. 동생은 섬이었다. 아니, 동생이 죽었으므로 이제는 그가 섬이었다. 그의 눈앞에서, 뇌리에서, 기억에서 섬이 미친 듯 술렁거리고 있었다. 동생이 유서를 남기지 않고 자살한 것에 대해 동생의 여자도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주변 사람들은 동생의 죽음을 장애를 비관한 자살로 단정했다. 동생이 다니던 교회 사람들이 그런 결론을 내렸다는 건 기막힌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동생의 밝고 경쾌한 성격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교우들이 아닌가.

동생은 어릴 때 앓은 소아마비로 인해 다리를 심하게 절었다. 그가 스물이고 동생이 열다섯이었을 때 홀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그 뒤로 동생은 작은집에서 생활을 했고 그는 혼자 독립해 대학을 다녔다. 아르바이트, 조교 일 따위로 대학생활은 정신없이 흘러갔다. 방학 때나 한 번씩 동생의 얼굴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동생은 신학을 공부하고 신부나 목회자가 되고 싶어 했지만 작은아버지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동생은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취직도 하지 않은 채 교회 일에만 매달렸다. 목회자들보다 교회에서 하는 일이 더 많고, 목회자들보다 교회에 있는 시간이 더 많고, 목회자들보다 훨씬 밝은 표정으로 동생은 장애의 나날을 살았다.

하늘이 감복했는지 동생은 여자도 교회에서 만났다.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 약속을 했다고 했다. 여자는 교회 장로의 딸이라고 했고, 약대를 졸업하고 종합병원에서 조제 약사로 근무하고 있다고 했다. 동생은 결혼을 하면 여자와 함께 약국을 개업할 거라고 했다. 물론 동생의 입을 통해 전해들은 말이었을 뿐 그는 동생의 여자를 직접 만나본 적이 없었다. 그가 근무하는 영화사의 일만으로도 하루가 48시간이나 80시간쯤 되기를 빌어야 할 형편이었다.     

그가 동생의 여자를 처음 본 건 지난여름 어느 날이었다. 토요일 저녁 무렵에 동생과 여자가 그가 사는 아파트를 방문했다. 여자와 첫 대면을 하는 자리였다. 해질 무렵, 석양을 등지고 나타난 여자를 보고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배경의 노을이 역광으로 작용하고 있었지만 동생의 여자는 육감적인 실루엣으로 그를 놀라게 했다. 저렇게 늘씬하고 아름다운 미인이 어째서 장애를 지닌 동생과 결혼을 하려고 작정한 것일까. 근원을 알 수 없는 불길한 예감이 첫 순간부터 그를 사로잡았다. 

그가 준비한 음식과 와인으로 셋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그는 동생의 여자에 대해 점점 더 이해할 수 없는 심정이 되어갔다. 동생은 술을 입에도 대지 못하는데 여자는 정도 이상으로 많은 술을 마셨다. 많이 웃고, 많이 말하고, 많이 움직이는 모양새를 보며 그는 은근히 동생을 걱정했다. 장애를 지닌 동생이 저런 여자와 어떻게 평생을 사나.

그날 세 사람은 새벽 세 시까지 함께 있었다. 적당한 시기에 자리를 파하고 싶었지만 여자가 그것을 거부하며 계속 술을 마시겠다고 고집을 부린 때문이었다. 동생과 그는 도리 없이 여자의 의견을 존중했다. 결국 여자는 앉은 채 잠이 들었고, 동생과 그는 여자를 부축해 침대에 눕혔다. 여자를 눕히고 나서 동생이 그에게 말했다.

-형, 미안해. 난 이제 교회로 가야 해. 새벽 기도에 참석해야 하거든.

-여자를 버려두고 교회로 간다고?

-괜찮아. 그냥 자게 둬. 내가 아침에 다시 올게.

동생은 아침 여덟 시경에 다시 아파트로 왔다. 하지만 그때 이미 여자는 아파트를 떠난 뒤였다. 동생은 그것이 오히려 당연한 일인 것처럼 여겼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동생이 자리를 비운 동안 그는 여자와 다시 술을 마셨다. 동생이 아파트를 떠나자마자 여자가 멀쩡한 모습으로 거실로 나온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여자와의 대화를 통해 동생과 여자 사이의 모든 걸 알게 되었다. 그는 동생의 여자로부터 엄청난 말들을 전해 들었다.

여자가 동생과 결혼하려는 건 교회 장로인 자기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 때문이라고 했다. 그녀가 대학 때부터 사귀어온 남자가 있었는데 단지 가난하다는 이유 때문에 아버지가 극구 결혼을 반대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불구인 동생을 결혼 대상으로 선택함으로써 장로인 자기 아버지의 이중인격을 폭로하겠다고 작정한 것이었다. 교회에서 가장 신임이 두터운 동생과의 결혼을 그녀의 아버지가 반대할 경우, 그녀의 아버지는 더 이상 장로로서 인격적인 대접을 받기 어렵게 되리라는 걸 여자는 교묘히 역이용하고 있었다.

-동생이 성불구라는 거 아시나요?

어느 순간, 여자는 싸늘한 미소를 머금고 그에게 물었다. 그가 모른다고 대답하자 불구라고 그녀는 단정적으로 잘라 말했다. 그럼 왜 결혼을 하려고 하냐고 묻자,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그녀는 대답했다. 그러고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가 불현듯 이렇게 물었다.

-육체는 형과 살고, 정신은 동생과 살면 안 될까요?


자정 무렵의 강마을은 무덤 속처럼 고적하다. 역에서 거기까지 걸어오는 동안 걸린 시간이 몇 천 년은 되는 것 같다. 한 생을 꿈처럼 보내고 어느새 다른 생으로 접어든 것이라면 얼마나 다행스러울까. 그는 터무니없는 안타까움으로 치를 떤다. 하지만 운명의 결빙이 풀리기엔 아직 어둠이 너무 깊다. 어둠만 깊은 게 아니라 눈까지 흐려지고 있다. 어찌된 일인지 길이 보이지 않고, 어찌된 일인지 생각에 가닥이 잡히지 않는다. 이것이 하나의 문장이라면 모조리 지우고 처음부터 다시 써야 옳을 터이다. 하지만 아무리 다시 써도 달라지지 않는 게 인생의 문장이다. 고쳐도 또 고치게 만드는 마술, 얼마나 끔찍한가.

그는 구멍가게 공중전화 앞으로 간다. 구멍가게는 이미 문을 닫아 주변이 막장처럼 어둡다. 주머니에 남겨진 대여섯 개의 동전을 꺼내 모조리 투입구에 넣고 번호를 누른다. 그녀에게 해야 할 말들이 문장으로 만들어지다 지워지고, 단어로 떠오르다 스러지고…… 이 번호는 없는 번호이거나 결번이오니…… 후크를 당기자 와그르르, 동전이 한꺼번에 반환구로 쏟아져 내린다. 그것들을 꺼내 다시 한 번 투입구에 넣고 번호를 눌러보지만 결과는 마찬가지, 그녀는 끝내 연결되지 않는다. 그녀가 행방불명되었거나 미아가 되었거나 납치되었거나 자살을 한 모양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무책임한 멘트가 되풀이될 수는 없을 터이다. 처음부터 없던 존재인가, 갑자기 사라진 존재인가.

강마을로 내려와 그녀에게 전화를 걸던 며칠 전 아침이 떠오른다. 강마을에 당도해 엿새째 되던 아침에 처음 본 주변 풍경은 그에게 깊은 충격으로 각인돼 있었다. 그날 아침, 여자에게 전화를 걸고 나서 그는 강변으로 나갔다. 7시 40분, 강 건너편에서 작은 동력선 한 척이 수면에 긴 사선을 그으며 하구 쪽으로 내려갔다. 수면에서는 얇은 망사처럼 수증기가 피어올라 일제히 강 건너편으로 몰려갔다. 그때, 수면에 선명한 물길을 만들며 청둥오리 몇 마리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동을 하고 있었다. 물이 아니라 얼음 위로 미끄러지는 것처럼 녀석들의 동작에는 아무런 꾸밈이 없어 보였다. 이윽고 산봉우리 위로 강렬한 햇살이 터져 오르고 건너편 마을에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하지만 수면에는 금빛 물비늘과 붉은 물기둥이 생겨났다. 순간, 그는 붉게 타오르는 물기둥을 부둥켜안고 섬으로 건너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치를 떨었다. 섬으로 건너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섬으로 건너가야 모든 게 종료될 것 같은 예감이 번개처럼 뇌리를 스쳐간 때문이었다. 붉게 타오르는 몸, 붉게 타오르는 영혼…… 아아, 한 줌 재로도 남겨지고 싶지 않은 순수한 저주!


그날 동생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의 아파트를 찾아왔다. 물론 그날 그는 혼자 있지 않았다. 동생은 몹시 어색한 표정으로 잠시 문 앞에 서 있었다. 그것은 마치 자신이 염려스러워하거나 의문스러워하던 것을 차분하게 확인하는 절차처럼 보였다. 그때 동생의 여자는 알몸에 그의 체크무늬 남방을 걸치고 있었다. 이윽고 동생은 모든 걸 확인해서 아주 편안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하지만 그 순간 동생이 목격한 것은 아마 그의 인생을 통틀어 가장 끔찍스런 장면이었을 것이다. 두 계절이 흐르는 동안 그런 관계가 지속됐으리라는 걸 동생도 넉넉히 알아차렸을 터였다. 동생은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지르기라도 한 것처럼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애매하게 웃었다. 그런 뒤에 아주 천천히 등을 돌렸고, 다리를 절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그게 그가 본 동생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처음 만나 술을 마신 직후부터 동생의 여자는 그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원치 않고, 어떤 식으로도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제발 자신을 내치지만 말아 달라고 여자는 부탁했다. 그리고 동생의 여자이기 때문에, 라는 유치한 이유 같은 것도 내세우지 말아 달라고 강요했다. 어이없는 일이었지만 그로서는 여자를 내칠 만한 용기도 없었다. 그것은 용기의 문제가 아니라 양식의 문제라고 그는 생각했다. 이 사람에게는 이런 양식이 있고 저 사람에게는 저런 양식이 있는 것이지 모든 양식이 다 통일되어야 하는 건 아니라고 치부한 것이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여자가 동생을 농락하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고, 그럴 바엔 차라리 결혼을 못하게 하는 게 나을 거라고 단정한 것이었다. 그것이 동생을 위하는 길이라고 나름대로 치부한 셈이었다. 치부야 자유가 아닌가.

여자는 그에게 치명적인 독이었다. 독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것을 물리치지 못했으므로 그는 패륜의 열락을 만끽할 수 있었다. 영혼이 고통의 늪지에서 허우적거릴수록 육체의 쾌락은 강도를 더해갔다. 하지만 그와 여자는 그때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종말,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파국,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감각의 몰락에 대하여.

동생이 자살했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도 두 사람은 함께 있었다. 자정 무렵, 동생은 교회 본당 십자가 밑에서 발견되었다고 했다. 그가 전화를 끊고 여자에게 사실을 알리자 여자는 눈을 말끄러미 뜨고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길게 한숨을 내쉬자 여자가 얼음장처럼 냉랭한 어조로 모든 걸 압축했다.

-한숨 쉬지 말아요. 놀랄 만한 소식이 아니잖아요.     


어둠 속에서 그는 동생처럼 다리를 전다. 한쪽 다리를 먼저 내밀고 상체를 뒤로 젖히며 힘겹게 걸음을 완성한다. 그렇게 몇 걸음을 옮기자 몸에서 열이 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고 마을이 끝나는 지점까지 내처 걷는다. 그래, 네가 이런 동작으로 세상을 버텼구나, 그는 이를 악물고 동생의 자세를 유지한다. 순간, 오른발을 지탱하기 위해 따라가던 왼발이 미끈하며 몸이 공중으로 떠오른다. 퍽, 하고 둔중한 진동이 지나간 뒤부터 등판에서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그는 다시 동생의 자세로 걷는다. 동생의 여자에게 전화를 걸던 그날 아침 이후, 그는 줄곧 동생의 자세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어떻게든 동생의 동작으로 저 섬까지 건너가리라, 다짐했다. 

여자에게 동생의 동작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가 먼저 보여주면 여자도 따라 할 것이라 믿었다. 그래야 마땅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런 동작으로 섬까지 여자와 함께 갈 작정이었다. 섬에 들어가 돌무덤을 하나 더 만들고, 자신도 스스로 돌무덤에 묻힐 작정이었다. 그러면 모든 것이 끝나리라, 그는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하지만 여자는 오지 않았고, 이제는 현실에서 사라진 존재가 되어 버렸다. 몸은 형과 살고 정신은 동생과 살고 싶다던 반인반마 같던 여자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눈앞이 침침하다. 어둠이 공기가 아니라 벽처럼 견고하게 느껴진다. 두 눈을 부릅뜨고 어둠 속을 노려본다. 우측 둔덕 위, 어둠보다 더 깊은 어둠 속에서 희미한 등빛이 밀려나온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그는 다리를 절며 그곳으로 간다. 하지만 곧이어 경사가 시작되고 둔덕이 미끄러워 몇 번씩이나 중심을 잃고 나동그라진다. 다시 시도할 때마다 경사가 점점 심해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는 거의 기다시피 둔덕을 올라 이윽고 평지에 이른다. 생각보다 넓은 평지가 나타나고 불빛이 선뜩하게 시야로 밀려든다. 가만히 살펴보니 산자락을 배경으로 이엉지붕에 황토로 벽을 두른 작은 주막이다. 지난 며칠 동안 강마을에 머물며 이곳까지 와 본 적이 없어 외관이 전체적으로 낯설다.

마당에 깡마르고 왜소한 노인과 네다섯 살쯤 돼 보이는 남자아이가 어정거리고 있다. 손을 잡고 있긴 하지만 노인과 아이의 대조가 왠지 기이해 보여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춘다. 그러자 노인이 그를 발견하곤 재빨리 아이를 들어 올려 뒤란으로 사라진다. 나무로 만들어진 출입문을 밀자 안에서 황토냄새가 후끈하게 밀려나온다. 그 냄새가 역했지만 그는 다른 방도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내처 안으로 들어선다. 그러자 검은 휘장이 내려진 주방에서 키가 작고 얼굴이 유난히 흰 삼십대 초반쯤의 여자가 쥐색 털 스웨터 차림으로 밖으로 나온다. 늦은 시각이지만 그녀는 태연한 표정으로 묻는다.

“밤낚시 오셨나요?”

“아니, 아뇨. 그냥…… 술을 좀 마실까 하고 왔는데요.”

“앉으세요. 술이야 원하면 아무 때나 마실 수 있죠.”

여자는 검은 휘장 안으로 들어가 술과 안주가 담긴 쟁반을 내온다. 마시고 싶은 술 종류를 묻지도 않고, 먹고 싶은 안주의 종류를 묻지도 않는다. 그냥 술, 하면 모든 것이 통하는 모양이다. 그녀가 내온 쟁반에는 몇 가지의 전과 견과류, 그리고 과일과 호리병이 놓여 있다. 항상 이런 식으로 준비해두었다가 손님이 오면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대로 내오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녀가 보여주는 일련의 행동이 너무 자연스러워 어느 누구도 그것을 문제시할 수 없을 것 같다. 

묻지도 않고 그녀는 그의 앞에 앉아 술을 따른다. 첫잔을 받아 입안에 부으니 후끈하면서도 묘하게 깊은 맛이 입안과 목구멍을 달군다. 곧이어 내장이 훈훈해지고 온몸이 따뜻해진다. 무슨 술이냐고 물을까 하다가 부질없다는 생각에 궁금증을 접는다. 여자에게 술을 따를 때 마당에 다시 노인이 나타나 안쪽을 들여다본다. 여자는 등을 보이고 앉아 노인을 보지 못하지만 노인의 표정은 사뭇 불안정해 보인다.

“누구죠?”

그가 턱짓으로 묻자 여자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본다. 하지만 그때 이미 노인은 창에서 사라진 뒤. 방금 본 것이 노인이 맞나,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한다.

“시아버지예요.”

여자가 별 일도 아니라는 표정으로 입을 연다.

“그럼 아까 같이 있던 아이가……”

“그래요. 아들이죠.”

여자는 단숨에 잔을 비운다. 그리고 스스로 잔을 채우고 냉랭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본다.

“얼굴에 죽음의 기운이 가득하군요. 사람이라도 죽였나요?”

“술장사하면서 점도 보나요?”

당황한 표정으로 그가 동작을 멈춘다.

“점이 아니고 기운을 느끼죠.”

그때 창에 노인의 모습이 다시 나타난다. 그는 여자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창을 주시한다. 이번에는 노인이 아이를 가슴에 안고 와 안을 들여다본다. 아이가 똑, 똑, 창을 두들긴다. 여자가 거의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번개같이 밖으로 달려 나간다. 그러고는 시아버지라는 노인네의 따귀를 거침없이 올려붙인다.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고 노인이 울상을 지으며 그녀의 손을 잡고 뭔가 하소연을 한다. 그러자 여자가 거칠게 노인의 멱살을 잡고 흔든다. 기막힌 광경을 보며 그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낀다. 한 잔, 다시 한 잔, 자신도 모르게 거푸 잔을 비운다. 이게 도대체 무슨 부조리극인가.

잠시 뒤, 노인과 아이가 사라지고 여자만 안으로 들어온다. 여자는 벽에 걸린 거울 앞에 서서 매무새를 다듬고 다시 자리로 돌아온다. 그가 물끄러미 그녀를 보자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잔을 비운다. 그런 뒤, 잔을 들어 그에게 따라달라는 시늉을 한다. 그가 잔을 채워주자 피식, 하고 허공을 올려다보며 헛웃음을 짓는다.

“왜 남편 얘기는 안 묻죠?”

“남편……?”

“보통은 정해진 공식대로 묻는데 당신은 마음을 많이 다스리는군요.”

여자가 눈을 가늘게 뜨고 관찰하듯 그의 얼굴을 주시한다.

“그렇군요. 깜빡했네요. 다시 묻죠. 왜 남편은 보이지 않나요?”

“그 사람은 들러리라서 벌써 세상을 떠났어요. 술 처먹고 저 앞강으로 나가 새벽에 빠져죽었어요. 내가 아이 낳고 한 달쯤 지났을 때였죠. 그래서 아이는 아비를 잡아먹었다는 누명을 쓰고 살죠.”

“자살을 한 건가요, 아니면……”

“자살도 되고 타살도 되죠. 시아버지가 나를 덮치는 걸 본 뒤부터 날마다 술을 마시고 괴로워 하다가 죽은 거니까…… 그냥 죽었다고 하기는 좀 그렇죠?”

풋, 웃고 나서 여자는 단숨에 잔을 비운다.

“그럼 남편이 그렇게 죽었는데 지금 시아버지를 모시고 이렇게……”

“모시고 사는 게 아니라 죽지 못해 데리고 사는 거예요. 그러니 저 영감탱이가 손님만 오면 안절부절못하고 나를 감시하느라 들락날락하는 거죠. 정말 팔자 한번 더럽죠?”

“데리고 산다는 건……”

“뒈진 아들 대신 저 영감탱이가 내 남편 노릇을 한다는 거죠.”

“……”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말을 무의식중에 꺼내려다가 그는 화들짝 놀라 말문을 닫는다. 그때껏 까맣게 잊고 있던 자신의 일이 되살아나 돌연 가슴을 짓누른 때문이다. 하지만 여자는 자신이 처한 운명에 대해 너무나 담대하고 당돌하고 당차 보인다. 죽은 남편 대신 시아버지와 함께 살아가는 여자, 자기 아들의 할아버지를 아버지로 만들어버린 여자. 그것도 모자라 영감을 함부로 대하며 남편의 한풀이를 대신해 주는 여자…… 순간, 그는 동생의 여자를 떠올린다. 몸은 형과 살고 정신은 동생과 살고 싶다던 여자, 그녀가 다른 모습으로 자기 앞에 앉아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는 두 눈을 부릅뜨고 여자를 노려본다.

가끔 개 짖는 소리가 들리고, 산자락에서 우수수 나뭇잎들이 바람에 휩쓸리는 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숙이고 앉은 여자가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리는 소리가 아주 먼 데서 들려오는 여음 같아 그는 신경을 집중하고 한껏 귀를 세운다. 하지만 말이 이어졌다 끊어졌다, 그러다가 바람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밀려들곤 한다.  

“사람 인생은 사람이 만드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난 모든 걸 받아들이죠…… 껴안기 위해서가 아니라 버리기 위해, 오직 버리기 위해……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세상을 겪기 시작하죠. 어차피 겪는 게 인생이니까…… 겪는 것 말고는 별달리 할 게 없죠. 안 그런가요?”

“……”

“당신도 뭔가를 겪으며 세상을 살아왔을 거고, 뭔가를 겪다가 여기까지 온 거겠죠. 안 그런가요?”

“……그렇죠.”

“겪는 과정은 지랄 같지만…… 겪고 나서 얻게 되는 건 종교보다 더 성스러워요. 난 그걸 알죠. 저 시아버지는 진짜 시아버지가 아니고, 나와 살던 남편도 진짜 남편이 아니고, 내 뱃속에서 빠져나온 아들도 진짜 내 아들이 아니죠. 세상을 겪게 만들기 위해 각자에게 주어진 배역…… 우리는 다 등장인물들일 뿐이죠.”

“비극이로군요.”

“비극처럼 희극적인 게 어디 있나요? 그게 정말 웃기는 거죠. 나에게 주어진 배역이 비극의 주인공처럼 보이나요?…… 후, 나는 말이죠. 이제는 겪는 일도 아주 자유롭게 즐겨요. 겪는 일을 허공에다 매달아버렸거든요. 그러니 난 몸이 바람이고 마음이 바람이죠. 아무것도 날 흔들지 못하고 때리지 못해요. 겪는 일의 실상이 헛것이라는 걸 알았거든요. 겪는다는 건 겪는다는 마음일 뿐이에요. 그러니 그렇게 한심한 표정 짓지 말고 어서 여길 떠나요. 당신은 절대 이곳에서 죽지 못해요. 이미 죽음에 지배당하고 있으니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어요. 당신의 연기, 너무 과장된 거 아닌가요?”

“무슨?”

“진정 몰라서 묻는 건가요?”

“연기라니요!”

“연기가 아니면?”

“……”

“고통을 겪는 시늉을 하는 네 행동이 동생의 죽음을 더 우습게 만들잖아! 그걸 몰라서 하는 말이야!”

여자가 벽력같은 소리를 지르며 손바닥으로 탁자를 내리친다. 순간, 그는 걷잡을 수 없는 구토가 치밀어 입을 가리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정신없이 밖으로 뛰쳐나가 어둠 속으로 내처 달린다. 이윽고 무릎을 꿇고 미친 듯 땅을 향해 구토를 한다. 오장육부가 한꺼번에 치밀어 금방이라도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다. 하지만 구토는 좀체 가라앉지 않는다. 마땅히 밀려나오는 게 없어 혈관이 부풀고 현기증까지 느껴진다. 그렇게 얼굴이 비틀리고 목이 비틀리고 사지가 비틀리는 와중에 그는 서서히 의식을 잃어간다. 의식을 잃어가는 게 아니라 세상이 바뀌기 시작한다.

서서히 시야가 열리고 또 다른 세상이 드러난다. 희미한 안개 속에서 수면이 열리고, 강 건너편의 산이 거뭇한 형체를 드러낸다. 푸른 여명의 기운이 차츰 낮게 내려앉고 이윽고 수면에서 물안개가 피어오른다. 오래잖아 건너편 산마루로 태양이 솟아 돋을볕이 온 세상으로 퍼져나가리란 예감이 그를 강렬하게 사로잡는다. 그는 비로소 자신이 겪은 일들이 하나의 물길을 이루며 어디로인가 흘러가고 있음을 느낀다. 산다는 것, 겪는다는 것, 그리고 흐른다는 것.

순간, 뭔가 떠오르는 게 있어 그는 뒤를 돌아본다. 하지만 그가 확인하고 싶어 한 무엇, 그가 되살리고 싶어 한 무엇이 그의 시야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저기쯤이 아닌가, 하고 그의 시선이 머문 산자락에는 초가집을 방불케 하는 커다란 노적가리 하나가 세워져 있을 뿐이다. 설마…… 두 눈을 부릅뜨고 다시 한 번 살펴보지만 그것은 볏짚으로 만들어진 노적거리가 분명하다. 설마 내가 저 노적가리에서 자다가 여기까지 온 건 아니겠지, 하면서도 그는 그것의 형체가 오래오래 누적된 옛날이야기 같다는 생각을 하며 천천히 그곳으로 발길을 옮긴다. 옛날에, 옛날에…… 그가 겪은 일들이 이미 누군가에게 가서 옛날이야기의 노적가리가 되고 있을지도 모를 일. 따뜻한 이야기의 공간, 노적가리 속으로 그는 사라진다.문장 웹진/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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