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멘타인

 

클레멘타인



이혜경




그가 내 기억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온 것은 내 나이 일곱 살의 이른 봄날이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그는 나의 부모들이 사는 집에 종종 들렀을 테고, 나는 머리를 꾸벅하며 그에게 인사를 건넸을 것이다. 그날, 낯선 사람들로 북적이는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엄마와 인사를 나누는 그의 회색 옷자락을 보자 마음이 놓였던 걸 보면.

볕은 환한데 바람이 날 세운 차가운 손톱으로 할퀴는 그런 날이었다. 학교 운동장엔 애 어른 할 것 없이 한데 모여 바글거렸다. 어줍은 표정으로 제 엄마의 치맛자락 뒤로 숨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서로 재잘거리는 아이들도 있었다. 손에 무슨 서류를 든 선생들이 교사 쪽에서 한꺼번에 몰려나왔다. 김정호, 김상운, 오진영, 윤영식…… 이름이 불린 아이들은 흐트러진 무리에서 빠져나와 선생님 앞에 섰다. 김순자. 네! 예! 양쪽에서 대답이 터져 나왔다. 작은 깃발처럼 반짝 손을 든 두 아이를 훑은 선생이 물었다. 화산리 사는 김순자? 한 아이가 걸러졌다. 부모들은 자기 아이 이름을 놓칠까봐 귀를 쫑긋 세웠다.

미경, 수경…… 내 이름과 비슷한 이름이 불리었지만 나는 아니었다. 집을 나설 때부터 마음에 설핏하게 드리워졌던 옅은 그늘이 점점 짙어졌다. 어수선하던 호명소리가 그쳤다. 선생들 앞에 두 줄로 섰던 아이들은 선생의 뒤를 따라 콜타르로 칠한 나무 판자벽 교사 쪽으로 향했다. 삐뚤빼뚤 줄지어 들어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이 내 마음에 울퉁불퉁한 자국을 남겼다. 텅 비어버린 운동장에 엄마와 나만 오도카니 남았다. 엄마는 곰곰 생각에 잠기더니, 단호한 표정으로 내 손을 잡아끌었다.

복도 벽을 파고 짜 넣은 신발장엔 아이들의 신발이 들쭉날쭉했다. 교실과 복도 사이의 유리창은 아래쪽을 습자지로 발라놓아서, 내 눈엔 교실 안 풍경이 들어오지 않았다. 엄마는 그 위쪽으로 교실을 넘보며 걷다가 어느 교실 앞에서 멈췄다. 드르륵, 문소리가 이렇게 크게 날 줄은 몰랐다. 교실 안 사람들의 눈길이 한꺼번에 나와 엄마에게 쏠렸다. 나는 슬그머니 엄마의 옷자락 뒤로 숨었다.

아이가 일곱 살인데 호적이 늦어져 여섯 살이다, 아직 나이가 안 차 취학통지서가 나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얘는 벌써 읽고 쓸 줄 알며 덧셈 뺄셈도 다 한다, 아이 아버지가 몸이 안 좋아서 막내를 빨리 학교에 넣고 싶어 한다…… 오빠의 담임이었던 키 큰 선생은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난감한 기색이었다. 아무도 반기지 않는 잔칫집에 찾아든 사람처럼 느껴져, 나는 자꾸만 몸을 움츠렸다. 저 사람이 여긴 왜 왔대? 그러게, 부른 사람도 없을 텐데 용케 냄새 맡고…… 전을 부치면서 소곤거리는 아낙네들의 말에서 풍기는 두려움 섞인 경멸은 고소한 기름 냄새를 지워버렸다. 그게…… 이런 경우가 없어서…… 선생이 우물거리는 소리를 듣자, 학교고 뭐고 얼른 집으로 돌아가고만 싶었다. 어디 구멍이 있으면 숨고 싶은 나를, 귀에 익은 목소리가 건져냈다. 까치발을 딛고 우물 속을 들여다보며 아아아, 소리쳤을 때의 반향 같은 궁근 목소리, 진 스님이었다. 유경이가 읽고 쓸 줄 안다니까 선생님께서 시험해 보시면 되겠구만요.

칠판에 글씨를 쓰기엔 키가 작은 나를 담쏙 안아 올린 사람은 엄마가 아니라 회색 승복 차림의 스님이었다. 낡은 회색 무명옷의 포근한 촉감 속에 은은히 배어 있는 향내가, 허공에 붕 뜬 채 많은 사람의 시선을 받는 부끄러움을 가만가만 다독였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기역 니은부터 배우던 시절, 이미 언니 오빠들의 교과서를 술술 읽어가던 내게 선생이 불러주는 단어를 받아쓰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칠판에 또박또박 글씨를 쓰는데 등 뒤의 경탄이 느껴졌다. 잠깐 우쭐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시험을 마무리하고 허공에서 바닥으로 내려섰다. 엄마와 진 스님의 대견한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둘러 밥을 먹은 언니 오빠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아침, 밥상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둔 밥풀 묻은 숟가락처럼 홀로 집에 남겨지지 않아도 된다는 걸, 그 눈이 일러주었다.


왼쪽 발이 땅에 닿자마자 오른쪽으로 겅중, 무게중심을 옮겼다. 자연히 오른발은 무용시간에 배운 투스텝을 밟았다. 왼발에 무게중심이 가지 않도록 질질 끌면서 겅중거리는 이상한 걸음을, 문구점 앞에 누워 있던 누런 개가 눈곱이 낀 눈으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아파서 그러는 거야. 알아듣지도 못할 개에게 종알거렸다. 발보다 더 아픈 것은 마음이었다.

담임의 말을 들은 것은 우연이었다. 주번이라서, 6교시 마지막 시간 무용 수업을 교실에서 할 것인지 아니면 운동장에서 할 것인지 무용 선생님께 물으러 교무실로 들어서는 참이었다. 담임이 늘 입고 다니는 베이지색 점퍼의 단단한 등판이 한눈에 들어왔다. 첫눈에 반한다는 말이 뭘 뜻하는지 내게 알게 해준 담임이었다. 그가 교실 문을 밀고 들어서는 순간, 난데없는 확신이 가슴을 짓눌렀다. 이 사람이다. 열세 살짜리의 가슴에 빗돌처럼 단단하게 자리 잡은 확신과 기대는 담임과 한 학기를 보내면서 더 단단해졌다. 담임은 덤덤하면서도 자상했고, 학생들을 차별하지 않았다. 첫 만남에서 잠자리 날개처럼 하르르해진 내 가슴은 담임을 볼 때마다 장대 끝에서 바람을 맞는 것처럼 파르르 떨렸다.

담임은 의자를 돌리고 앉아 단짝인 사회 선생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글쎄,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병원에 가야 한다는데도 가불을 못해 주겠다는 거야. 굵고 나직하던 담임의 목소리가 쇠파이프를 긁는 듯 높고 뻑뻑했다. 날선 감정을 풀어내듯 담배를 빨아대는 담임의 등 뒤를 지나치는데 가슴이 매캐해졌다. 

어머니가 아픈데 병원으로 모시고 갈 돈이 없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사랑하는 사람이 홀로 곤경에 처해 있는데 아무것도 도울 수 없다는 무력감에, 체육복을 입고 운동장에 나간 아이들이 의자 등받이에 함부로 걸쳐놓은 교복 치마처럼 축축 처졌다. 담임의 마음에 어린 울분, 그 이야기를 들으며 어쩔 수 있느냐는 듯 체념 어리던 사회 선생의 표정. 아무도 돕지 못한 채 홀로 감당해야 할 누추함이 끼어드는 순간이 있다는 것. 그 앞에서 어른들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도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는 것. 이런 생각들이 갈퀴에 긁힌 가랑잎처럼 바스락거렸다. 울먹울먹한 마음에 수런거림이 점점 커지더니 기어이 눈물이 흘렀다. 나는 책상 위에 엎드렸다. 눈초리를 타고 흐른 눈물이 귓구멍으로 차갑게 흘러들었다. 한 시간 내내 울고 나니 뭔가 끝없이 게워낸 듯했다. 청소시간, 허정거리는 걸음으로 걸레 빤 물이 가득 든 양동이를 들고 나가다 발이 비끗했다.

엄마는 내가 발을 질질 끌고 들어서는 걸 보더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네 걸음이 왜 그러냐? 삐었나봐. 어쩌다가…… 마침 잘 됐다. 스님 오셨으니 침 놓아주시라고 해야겠다.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던 스님은 바랑에서 스테인리스 침통을 꺼냈다. 크고 작은 침들이 탈지면 위에 나란했다. 어쩌다 이렇게 되셨나. 마음을 어디다 두고 다니셨나. 알코올 솜으로 발목을 닦은 뒤 침관에 침을 찔러 넣으며 불쑥 던진 스님의 말에 찔끔했다. 좀 아플 거라. 그래도 죽은 피 빼내야 하니 참으소. 스님은 그새 소복이 부어오른 발등에 재봉틀로 누비듯 침을 찔렀다. 아파서 쩍 벌어지려는 입을 앙다물었다. 침이 꽂혔던 자리에서 검붉은 피가 송송 솟아났다. 똑같은 침으로 찔렀는데도 피가 솟구치듯 나오는 구멍, 진득하게 흐르는 구멍, 송글 맺히다 마는 구멍…… 다 달랐다. 어금니를 꽉 깨물고 있는 내 얼굴을 힐긋 들여다본 스님이 잘 참네, 한마디 하고는 아버지에게 나 때문에 끊어진 이야기를 건넸다. 아, 자기네 절이라고, 자기네가 관리하겠다는데 어쩝니까? 내주고 나가야지…… 갖고 노는데 싫증난 장난감을 마침 탐내는 누군가에게 주어버리는 듯한 말투였다. 그래 이젠 아예 성미산 골짜기로 들어가려고 봐놨소. 거기야 비키라고 하지 못하겠지. 스님이 찔러 넣은 침을 핑글, 돌렸다. 척추를 타고 전류가 흐르는 듯한 아픔에 입을 쩍 벌렸다. 절을 비워줘야 한다고?

일제시대 신사였던 스님의 절은 읍내를 에워싼 산자락, 경사가 가파른 돌계단 위에 있었다. 초파일이나 백중날이면 나는 엄마를 따라 스님의 절에 올랐다. 절에만 오면 보살이라는 이름을 얻는 아주머니들과 함께 엄마가 전을 부치거나 인절미 반죽을 썰고 콩고물에 굴릴 때, 심심해진 나는 절 마당으로 나오곤 했다.

절 마당 한가운데에 있는 전각은 공포를 갖추고 단청을 칠한 팔작지붕이어서 작으나마 위의가 있었다. 띠살문은 말수 적은 사람의 입처럼 꽉 닫혔고 커다란 맹꽁이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자물쇠가 채워진 여닫이문을 양쪽에서 잡아당기면, 내 손가락 굵기만큼 틈이 벌어졌다. 눈을 대고 들여다보면 문틀 양쪽이 아물거리고, 나란히 세워진 하얀 위패들이 보였다. 묘지 앞의 비석처럼 오롯한 위패들.

그 문이 사람들 앞에서 활짝 열리는 날은 현충일 하루뿐이었다. 읍내의 초중고교에서 온 학생들이 전각을 에워싼 오전, 뚜우우, 10시 정각에 울리는 사이렌 소리에 머릿속이 하얗게 비는 듯했다.

문틈으로 위패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머릿속에서 쌔 하고 바람이 불었다. 아물거리고 시큰거리는 눈을 떼면, 바람에 나뭇가지들이 서로 스치며 내는 바스락 소리가 들려오고, 요사채에서 음식을 만드는 아주머니들의 왁자한 웃음소리가 절 마당에 굴렀다. 다시 눈을 문틈에 대고 눈시울을 좁히자 모든 걸 빨아들일 듯 어둑한 적막 속에 하얗게 떠 있는 위패에는 무슨 비의가 어린 듯했다.

뭘 그렇게 보시나. 어느 날, 여전히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다가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놀라 몸을 뗐다. 스님이 눈꼬리에 부챗살 같은 주름을 잡은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래, 그 안에 뭐가 있던가? 나쁜 짓을 하다 들켰을 때처럼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 안에서 뭘 보셨나? 스님은 전각 앞에 쪼그려 앉으며 내게 옆자리를 가리켰다. 나는 그 옆에 가서 쪼그리고 앉았다. 나뭇잎들 사이로 연둣빛 논이며 읍내의 집들이 아스라하게 보였다. 부모님이 늘 살아계실 거 같지? 그러나 사람은 한번 태어나면 언젠가는 죽는 거야. 사람이 죽으면 몸은 흙과 물과 불과 바람으로 흩어지고, 영혼만 저기 머물렀다가 부처님 나라로 가는 거야. 땅에 묻으니 흙이 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물? 상한 채소나 생선에 어리던 물기 같은 걸까. 그러나 불과 바람은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의 몸이 어떻게 불이 되고 바람이 되지? 바람이, 응답하듯 우수수 절 마당을 쓸고 지나갔다. 살아 있을 때 좋은 일 많이 하면 다음 세상에서도 사람으로 태어나고, 나쁜 짓 많이 하면 벌레 같은 걸로 태어나 닭한테 쪼아 먹힐까 겁내야 하고…… 쏴아아, 다시 불어온 바람결에 스님의 목소리가 흩어졌다. 나뭇잎들이 서로 쓸리며 쏴아아, 소리를 냈다. 구새 먹은 나무 둥치에 시선이 머물렀다. 절반쯤이나 알아먹을까 싶은 스님의 말씀에 집중하는 동안, 속을 파먹히는 나무처럼 우묵한 고통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 고통 속에는, 스님이 무언가 깊은 뜻을 전해주려 하신다는, 인정받는다는 기쁨이 있었다.

그 절을 누구에게 내주시는 걸까. 처자식 있는 사람은 중도 아니라는데 어쩌겠소. 물러나라면 물러나야지. 씨억씨억한 스님의 말투에 어린 체념에, 무력하게 처졌던 담임의 어깨가 겹쳐졌다. 담임은 엄마 때문에 아프고, 대처승이라서 법명 대신 성씨로 불리는 진 스님은 처자식이 있다는 것 때문에 어디론가 밀려나는 모양이었다. 침을 찌르는 스님의 손등에 퍼렇게 도드라지는 정맥이, 사람들의 발길에 흙이 쓸려 땅 위로 드러난 나무뿌리 같았다. 속수무책, 송글송글 맺혔다가 주르륵 흐르는 피를 바라보는 내 머릿속에서, 속수무책이라는 단어가 핑글 돌았다. 


저 스님 혹시 간첩 아닌가 몰라. 스님이 볕이 들끓는 마당을 휘적휘적 걸어 나간 뒤, 오빠가 말했다. 쓰르르르르, 오빠의 말에 대답하듯 쓰르라미가 한꺼번에 울어댔다. 하필 이 염천에 신도가 수술해서, 문병하러 왔다가 들렀다는 스님이 오빠와 나를 앉혀놓고 말씀하시는 동안에도 쓰르라미는 울어댔다. 내년 여름에 이북에서 시끄럽게 일면 전쟁이 일어나니, 쓰르르르, 그땐 학교고 뭐고 책가방만 들고 내려오라고. 이번 전쟁이 일어나면 서울은 불바다가 되고, 쓰르르르, 서울 사람은 다 죽어요. 아 목숨 있고 공부 있지 공부한다고 남아 있다가 나 죽으면 그게 다 말짱 헛거 아뇨? 쓰르르르, 비결서를 펼쳐놓고 한자의 파자 풀이를 해가며 형형한 눈으로 바라보던 스님의 당부를 복기하는 동안에도 쓰르라미는 울어댔다.

전쟁까지는 아니더라도, 무슨 일이 있어났으면 싶은 지루한 여름이었다. 대학생활은 시들했다. 입학한 해 3월, 광화문 지하도에서 길을 잃었다. 사방으로 뚫린 지하도에서 길을 잃는 것은 지상에서 길을 잃는 것보다 한결 공포가 짙었다. 사방으로 뚫린 길이, 제대로 길을 찾지 못하는 사람에겐 막힌 거나 다름없다는 걸 그때 알았다. 두려웠다. 내 서울생활이, 대학생활이 꼭 그 모양이 될 것 같았다.

학교에도 서울에도 적응 못한 나는 버스에 실려 유리창 밖의 세상을 내다보기만 했다. 학교 앞에서 하숙하던 내 유일한 취미는 시내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갔다가 되돌아오는 것이었다. 밤이면 차창 밖의 풍경은 다른 빛깔을 띠었다. 사람들로 붐비는 한낮의 대도시가 빨랫줄에 내걸린 삭은 천처럼 숨을 곳 없이 비친다면, 밤의 대로변엔 불 밝힌 상가 사이로 어둠 고인 좁은 골목이 틈틈이 숨겨져 있었다. 그 어둠 속으로 일단 발을 디디면 다시는 대로로 나서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런데도 그 속으로 숨고 싶었다. 숨고 싶은 마음이 턱까지 차오르면 고향으로 향했다.

막상 고향에 내려오기 위해 서울역에 들어서면, 나는 나를 벗어두고 아무개네 집 몇째 딸이라는 허울을 입어야 했다. 사지가 붙들린 채 억지로 입는 구속복 같은 그 허울은 그러나, 일단 입기만 하면 나도 모르게 조신한 몸가짐을 하게 하는 힘을 갖고 있었다. 캠퍼스를 걷다가 문득 신발을 벗어들고 맨발이 되는 나는 서울역 어느 귀퉁이에 꿍쳐두고, 슬리퍼 바람으로는 대문 밖도 나서지 못하게 하는 집안의 조신한 딸이 되었다.

첩반공반. 새삼스럽게 인 의심으로 스님의 내력을 묻는 오빠에게 아버지는 상세히 알지는 못하는 듯 말끝을 흐렸다. 원래 평안돈가 함경돈가 이북 사람인데, 전쟁 통에 혼자 내려왔다더라. 듣기로는 큰 지주 집안 외아들이라고도 하고, 그냥 나무 장사 하던 사람이라고도 하고…… 충녕사도 해방 뒤에 버려지다시피 한 것을 스님이 들어가 다듬어 저만큼 정비해놓았으니, 그만 해도 인물인 셈이지.

그 즈음, 스님은 읍내 뒤편의 충녕사를 내주고 읍에서 벗어난 성미산 자락에 있는 폐사지에 작은 절을 세웠다. 오랜 옛날, 절이 흥성했을 때엔 시주를 나갔던 승려들이 절 앞에 이르러 신을 벗어 턴 흙이 쌓인 것이라는 작은 언덕이 있을 만큼 너른 절터였다. 절터 앞을 흐르는 개울물은 한때 절에서 흘러나온 쌀뜨물로 하얬다는데, 성미산 탄전에서 캐낸 탄가루들이 날려 시꺼맸다.

쓰르르쓰르르. 스님은 버스에 실려 그 절로 돌아갈 것이다. 대학생이 된 내 눈에 스님은 여느 비구보다도 스님다웠다. 어쩌다 절에 가서 묵는 날 새벽이면 어김없는 도량석 소리가 선잠 깬 머릿속에 서늘하게 흘러들었다. 공과금처럼 연등값을 매겨서 고지하고, 고액의 등은 더 크고 화려하게 만들어 불상 가까운 자리에 걸어두는 다른 절과 달리, 스님은 형편 닿는 대로 내면 주는 대로 받았다. 액수에 따라 연등에 차별을 두지도 않았다. 소맷부리가 닳은 승복에 여름엔 고무신, 겨울엔 운두에 댄 털이 털갈이하는 동물의 그것처럼 빠져나간 방한화 차림으로 일관하는 스님. 검정 물이 흐르는 그곳. 어쩐지 내게는 비결서나 참언에 대한 스님의 몰두가, 세상의 온갖 것과 등지고 흙더미 속에서 빛나는 광석을 찾는 일처럼 느껴졌다. 파자 풀이하듯, 삶도 그렇게 간명하게 간추릴 수 있는 거라면 얼마나 좋을까. 쓰르르쓰르르. 얼마 안 있어 한 생을 마감할 쓰르라미들이 공포를 느낀 듯 맹렬히 울어댔다.


그리 넓지 않은 시가지를 이리저리 쏘다니는 바람에 추위도 잊었다. 볼은 금방이라도 틀 것처럼 아려왔다. 고향에 오겠다고 마음먹은 나를, 비웃고 싶어졌다. 하염없이 걷다가 길가 나무 그늘에 발 뻗고 앉아 쉬는 한순간, 고향을 떠올리며 가당찮게 이런 것을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향집에서 기다리는 것은, 발 뻗고 앉을 자리가 아니라 삼십대 중반이 되도록 결혼하지 않는 딸의 신용등급과 교환가치를 형편없이 낮게 쳐서 마침내 똥친 막대기가 된 듯한 기분이 들게 하는 아버지의 푸념뿐이었다.

그때 너만 좋다면 당장이라도 혼인하자던 조합장네 아들은 벌써 애가 학교에 들어갔다더라. 임성원이 둘째 아들은 제 부모 고생한다고 아파트 사놓고 그리로 옮기게 했다고 하고. 그 좋은 자리들 다 놓치고…… 혀를 끌끌 차던 아버지의 한탄을 귀가 솔도록 듣다가 나는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지, 저 시장 좀 봐올게요. 고향집에 들를 때마다 살림에 필요한 게 있는지 살피고 사다놓곤 했지만, 장을 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 자리를 모면하고 싶어서였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부터 내게 들어오기 시작한 중매는 대개 읍내의 한다하는 집안에서 건네 온 것이었다. 읍의 여러 기관에 자문위원이라는 직함을 걸어두고 있는 아버지와 비슷한 지방 유지들. 건강하고, 2세의 지능을 위해 머리에서 깡통소리가 나지 않고, 남에게 내세우기에 민망하지 않을 만큼 예의도 갖출 줄 아는 며느릿감. 그 중 하나와 성사했더라면, 나는 ‘아무개네 딸’에서 ‘아무개네 며느리’로 자리를 옮기는 것뿐이었다. 읍내 사람들은 그 ‘아무개’가 지닌 권력에 비례해 나를 정중하게 대우하고, 과일가게 아주머니는 내가 말하기도 전에 비싼 제철 과일을 권하고, 정육점에선 최상급 등심이나 안심만을 내놓을 것이다. 삼사십대엔 청년회의소, 좀더 나이가 들면 라이온스 클럽이나 로타리 클럽의 회원이 되겠지. 고아원이나 양로원 같은 델 방문할 때면 미장원에 가서 머리부터 만지고, 방문한 시설에서 찍은 사진을 보며 도덕적 만족감을 느끼는 그런 나날. 큰 건물을 짓기 위해 판 기초공사에 퍼부은 콘크리트 반죽에 빠진 것처럼 온몸이 욱죄는 듯했다. 그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은 자신의 족적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아버지가 선물처럼 내민 혼담 앞을, 감사히 받기는커녕 손을 내저어 거절한 대가라면 나도 치를 만큼 치렀다.

몇 년 동안 일한 출판사가 망한 뒤 들어간 월간잡지사는 야간과 밤샘으로 이어지는 나날이라서, 나이를 자각할 겨를도 없었다. 한 달 단위로 분절해서 살다 보면 어느새 눈이 내렸다. 그 바쁜 나날이 준 것 가운데 하나는, 워낙 바쁜 나머지 도덕적인 부담 없이 고향에 내려가지 않을 구실을 마련해준다는 것이었다. 명절 무렵이면 아예 미리 다녀와서 일가친척을 피하고, 건강 보조 식품이며 계절 옷을 사서 부치는 것으로 딸 노릇을 하고 있다고 자위했다. 명절도 아닌데 뜬금없이 고향에 와서 아버지의 말폭탄에 갈기갈기 찢긴 것은 일종의 감상 때문이었다.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야지 하고 발길을 돌렸다. 시외버스 승강장의 벤치에 스님이 앉아 있었다. 희끗희끗한 머리칼이 맨살 위로 비주룩히 돋아 있었다. 그새 흰머리가 저렇게 느셨나. 혀끝으로 핥던 고드름을 무심결에 삼킨 듯했다. 그 고드름을 녹이기 위해 나는 짐짓 명랑하게 입을 열었다. 스님, 안녕하세요? 뉘시지? 하는 표정으로 돌아보던 스님이 곧 나를 알아보았다. 유경이 아닌가. 집에 오는 길인가? 예, 어제 왔는데 잠깐 일 보러 나왔어요. 그래, 부모님은 잘 계시고? 지난번에 왔을 때 집에 들렀는데 어머니 위장이 안 좋으시다더니…… 조금 나아지셨어요. 늘 갖고 계신 병인걸요. 지금 절에 들어가시게요? 스님이 앉은 자리 위쪽에 붙은 시각표는 스님의 절로 가는 버스가 하루 넉 대밖에 없다고 일러주었다. 내내 버려두었던 폐사지를 대학 발굴팀이 발굴하면서, 스님은 다시 그곳에서 더 깊은 골짜기로 들어갔다. 읍내에서 성미산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신도 수가 줄었다는 이야기를 아버지에게 들어서 알고 있는데, 그보다 더 교통이 불편한 곳으로 들어갔으니 절 살림이 넉넉지 않을 것은 빤했다. 다음 버스는 삼십분을 더 기다려야 했다.

그래, 지금은 무슨 일을 하시는가? 따뜻한 캔 녹차를 한 모금 마신 스님이 물었다. 잡지사에 다녀요. 거기서 무슨 일을 하시는데. 사람 만나서 이야기 듣고, 그걸 글로 쓰고 그러는 일요. 그래 그 일이 재미있으신가. 결혼은 영영 안 하고 그냥 혼자 늙으시려는가. 스님은 딱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야근과 밤샘으로 거칫해진 피부가 켕겼다.

일엔 나름대로 재미도 있었다. 취재거리를 정하고 만나서 이야기를 듣다보면 배우는 것도 많았다. 그런대로 재미있어요, 라고 대답하는 내 목소리는 후줄근했다.

미안합니다. 하지만 난 내 사생활이 잡지에 실리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한창 주가를 올리다 나이 차 많은 유부남과 연애해 마침내 결혼에 이르렀던 여자 무용가. 그러나 결혼한 이듬해 급작스러운 병으로 남편을 여읜 여자는 말했다. 전화선 너머로도 그 침착함 바닥에 고인 묵직한 슬픔이 느껴졌지만, 나는 단념할 수 없었다. 두어 번 더 통화하고 나자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녀의 집으로 무턱대고 찾아갔다. 하필 올해 들어 가장 춥다는 날이었다. 상계동 고층 아파트의 12층 복도엔 알루미늄 새시가 없었다. 아파트들 너머로 검게 보이는 도봉산을 쓸고 온 바람이 사정없이 옷깃을 후볐다. 자정이 넘자 눈 아래 보이는 아파트에 켜진 불빛들이 점점 줄어들었다. 싸늘한 발을 타고 오른 냉기가 머리끝까지 싸늘하게 만들었다. 채칼로 긁는 것처럼 볼이 쓰라렸다. 너 여기서 뭐하고 있니. 겨울 덕장의 황태처럼 뻣뻣해진 채 가만히 자문하는데 엘리베이터 쪽에서 땡, 소리가 났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왔을 땐 새벽이었다. 택시를 타고 시가지를 가로지르는데 문득 속에서 아까의 물음이 치밀었다. 너 여기서 뭐하고 있니. 대학 시절, 밤에 버스를 타고 차창에 코를 박고 구경하던 때처럼 자릿한 감상이 일고 문득 고향에 가고 싶어졌다. 마감을 하자마자 월차를 써서 내려왔다. 차라리 로맨틱 코미디 비디오나 쌓아놓고 깔깔거리며 보내는 게 나았을 것이다.

남의 이야기 백날 써내면 뭐 하나. 그냥 공기 맑은 절에 내려와서 나랑 불경이나 번역하며 지내는 게 낫지. 스님은 내가 국문과를 나왔으니 한문 실력이 엔간하려니 믿는 투였다. 저 한자 잘 몰라요. 한자야 옥편 찾아가며 하다 보면 늘 테고…… 부모님 곁으로 내려와 있는 게 낫지. 부모님이 언제까지 살아계실 줄 아는가. 녹차 캔은 손바닥 안에서 점점 미지근해졌다. 스님이 문득 왼손바닥을 내밀었다가 조금 오므렸다. 보라고, 여기 이렇게 임금 왕(王)자가 뚜렷하지 않은가. 감정선과 두뇌선, 그리고 두뇌선과 생명선 사이의 가로금을 세로로 난 굵은 선이 이어주어, 임금 왕자 모양으로 보이긴 했다. 인간 세상의 임금은 대통령이지만 진정한 왕은 부처님이다, 인생은 잠깐이다, 그러니 부처님 나라에 와서 부처님 법을 알리는 일을 하는 게 가장 근본적인 일이 아니겠는가. 스님은 방점을 찍듯이 말했고 나는 네, 네, 하며 고개만 끄덕였다. 해가 낮아지면서 날씨가 점점 싸늘해졌다. 사람들은 몸을 옹송그리고 종종걸음으로 지나다녔다. 누빔질을 했다고는 하나 재질이 면일 스님의 장삼으로 스며들 추위가 걸렸다. 스님은 버스에 오르면서 말했다. 내 말 잊지 마시오. 언제든 절에 한번 놀러오고. 다짐을 두고 버스 안으로 들어가는 스님의 낡은 승복 소맷부리의 기운 자국이 눈에 아프게 박혔다.


실에 꿰어 걸어놓은 감잎은 월계관처럼 보였다. 코를 가까이 하고 냄새를 맡으면 떫은 기운 어리는 독한 풋내를 냈다. 풋내는 감잎이 마르면서 점점 옅어졌다. 오랜 단식으로 체지방을 태워버린 몸처럼, 감잎은 바싹 마르면서 날카로워졌다. 아버지의 칠칠재 때 스님의 절에서 따온 감잎이었다.

언제 한번 가봐야지 하면서도 나는 스님의 절에 가지 못했다. 서울살이가 바빴고, 어쩌다 고향에 들러도 그곳에 머무르는 시간을 최소화하기에 바빴다. 쫑파티에서 물에 젖은 걸레처럼 술에 전 동료들을 택시에 태워 보내고 내가 타고 갈 택시를 기다리는 밤거리, 가슴에서 이는 바람 소리 사이로 익숙한 속삭임이 들려오는 날이면 스님을 떠올리기도 했다. 너 여기에서 뭐하니? 그냥 산골짜기의 작은 절 뒷방에서 옥편을 뒤져가며, 글자 한 자에서 세상의 이치를 깨달으려 애쓰면서 생을 흘려보내는 게 낫지 않을까. 하지만 다음날이면, 나는 어김없이 출근해서 신문을 뒤적이며 다음호 기획거리를 찾고 있었다. 면허를 따고 첫 번째 사고를 친 날에도 스님을 떠올렸다. 강변도로를 타기 위해 지하도로 내려가는 순간부터, 초보운전자에게 너그럽던 자동차는 안면을 바꿨고, 가까스로 지하도를 빠져나와 고가도로로 올라서며 얼음판 위에서처럼 팽그르르 돌더니 꽉 밟은 브레이크에 걸려 난간을 받고 멈춰 섰다. 차에서 나와 내려다보니 난간에서 바닥까지는 한참 깊은 허공이었다. 삶과 죽음이 그렇게 순간적으로, 사람의 의지와 상관없이 가름된다는 생각에 오스스 한기가 돋았다. 겨우 차를 돌려 큰길로 나왔을 때, 머릿속에 아주 작은 불빛 하나가 가물거렸다. 호롱 모양의 작은 사기그릇에 꽂힌 촉광 낮은 꼬마전구, 장명등이었다. 스님 절에 갔는데 네 인등이 있더라. 네가 부탁했니? 집에서도 부탁한 사람이 없다는데. 언젠가 절에 다녀온 언니가 전해주었다. 스님이 문득 어느 날 내가 마음이 쓰여 그랬을 거라고 짐작했다. 언제 한번 가야지 하면서도 갈 수 없었던 절에 가게 된 것은 아버지의 사십구재 때문이었다. 

도대체 스님이 얘를 왜 그렇게 예뻐하는지 모르겠어.

언젠가, 너만 생각하면 똥 싼 바지를 입은 것처럼 개운하지 않다,며 장마 뒤끝의 개울물처럼 이어지는 아버지의 푸념 끝에 엄마가 말했다. 스님이 지난번에 오셔서 혼인 말 꺼내시더라. 스님? 아버지가 내게 운도 안 떼고 거절한 유일한 혼사는 나의 동기동창인 스님의 장남과 오갔던 혼담이었다. 스님의 말에 아버지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고 들었다. 말은 안 했지만 그 혼담은,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만 있었더라도 그러마고 하고 싶었던 유일한 혼담이었다. 나는 어리둥절했다. 걔, 결혼했잖아요? 큰애 말고 둘째. 왜 독일에서 박사 따고 얼마 전에 돌아왔다더라. 걘 나보다 어린데요? 그러게. 나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스님이 정말 그러셨어요? 그동안 내게 퍼부은 말로 치면 당장이라도 대문을 활짝 열고 사주단자를 받으러 나설 기세였어야 마땅한데, 아버지는 시큰둥했다. 둘째가 키도 크고 인물도 제 형보다 낫긴 한데…… 거기라도 괜찮으냐? 나는 괜찮지 않다,는 표정으로 물은 아버지가 갑자기 골똘해지더니 엄마에게 말을 날렸다. 도대체 스님이 왜 그렇게 얘를 예뻐하는지 모르겠어. 도무지 알 수 없다는 듯 아버지의 말투에 짜증이 섞여 있었다. 배울 만큼 배웠으면 그 배움으로 지위든 돈이든 거머쥐려 하는 게, 실용을 중시해 온 아버지에겐 당연한 질서였다. 돈을 많이 벌지도, 명성을 얻은 것도 아닌 채 어느새 아이를 갖기에도 안전하지 않은 나이에 이른 나를, 스님이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온, 게다가 연하인 당신의 아들과 맺어주려 한다는 게 아버지를 혼란스럽게 했다. 쓸모없고 거추장스럽기만 해서 미련없이 내다버린 낡은 가재도구를, 누군가가 보물을 얻은 것처럼 소중히 챙겨가는 걸 보면서 느낄 법한 의혹이 아버지의 양미간에 진 세로주름을 깊게 했다. 내가 버린 물건이 혹시 내가 모르는 가치를 지닌 골동품은 아니었을까 하는 의혹이 아버지의 양미간에 어려 있었다. 나는 조금 쓸쓸한 득의를 느꼈다. 아버지는 끝내 그 궁금증을 풀지 못했을 것이다. 모르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스님이 나만 특별하게 여긴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스님이 누군가를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아준다는 믿음이 있을 뿐이었다.

영정사진 속의 아버지는 이맛살을 약간 찌푸려 집중한 표정이었다. 독경을 하던 스님이 딱, 하고 목탁을 두드리면 일상복 위에 상복을 걸친 식구들은 우르르 일어나서 떼그르르, 하는 목탁의 리듬에 맞춰 절했다. 영정사진 속의 아버지가 그런 식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중음에 떠돌 아버지의 혼도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재를 올린 식구들은 점심을 먹고 절 마당으로 나와 감나무 아래 무연히 앉아 있었다. 오랜 비로 씻긴 하늘은 맑았다. 두 번만 더 모시면 사십구재였다. 각자 자기 생각에 잠긴 식구들 곁에서 왁스를 바른 듯 반짝이는 감잎을 바라보다 나는 문득 스님의 아내인 보살에게 물었다. 보살님, 저 감잎 좀 따도 될까요? 따 가. 감잎은 뭐하게? 나이 때문에 몸이 많이 쪼그라든 보살이 물었다. 나를 바라보는 보살의 눈길에서, 보살의 눈에 비친 내가 여전히 몸집 작고 허약하던 초등학생일 거라는 짐작이 들었다. 내가 주름살 쪼글쪼글한 보살에게서 어린 시절에 인절미 반죽에 콩고물을 묻히며 여자들끼리의 수다에 깔깔거리던 중년 여인을 보듯. 감잎차 만들려고요. 감잎으로도 차를 만드남? 예, 비타민이 많대요. 겨울에 드시면 좋을 거예요. 그려, 여긴 농약도 안 치고 했으니까 마음 놓고 따 가도 돼. 짙은 초록빛 감잎에서는 탱탱한 독기마저 느껴졌다. 톡, 가벼운 소리와 함께 감잎이 나무에서 떨어져 나왔다. 톡, 톡, 톡, 나는 가지를 잡아당겨 모양이 반듯한 걸로만 잎을 땄다.

북향방의 방문 틀 양쪽에 압핀을 단단히 박고 씻어서 마른 행주로 닦은 감잎을 실에 꿰어 걸었다. 감잎은 월계관 같기도 했고, 언젠가 동남아시아를 여행하다가 본 어느 부족의 집을 장식한 물소 뿔 같기도 했다. 세상을 떠난 이를 보내는 장례식을 가장 중요한 행사로 여기는 그 부족은 물소를 몇 마리 잡았는가로 장례식의 규모를 판단했다. 그건 곧 고인을 저세상으로 보내는 정성의 척도이기도 했다. 장례기간에 잡은 물소의 뿔을 배 모양의 고상주택 지붕을 받친 기둥에 매달아 놓음으로써, 그 집이 죽은 이에게 얼마나 융숭한 대접을 했는가를 자랑했다. 어쩌면 나도, 아버지에게 자랑스러운 딸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평생 걸려 파낸 광맥에서 나는 쓸데없이 거추장스럽기만 한 버력이었다. 감잎은 마르면서 오그라들었다. 바람이 불어오면 바스락거렸다. 칠칠재의 마지막인 사십구재를 올리고 돌아온 날, 실을 끊어내고 주방용 가위로 감잎을 잘게 오렸다. 얌전히 가윗날에 순응해서 실오라기처럼 썰리는가 하면, 엄살 심한 아이가 병원 문 앞에서 지레 자지러지듯 가위만 대도 바스러지는 것도 있었다. 감잎을 써는 동안, 단순한 일을 계속할 때면 그러하듯 마음이 가라앉았다. 어떤 사람은 평생 살 것처럼 생에 집착하고, 어떤 사람은 또 끊임없이 생으로부터 달아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느 쪽이든, 저마다 자기의 광맥을 찾는 것이다. 누군가가 운 좋게 빛나는 금을 찾은 산등성이 너머, 누군가는 끊임없이 나오는 버력을 쌓고 있을지도 모른다. 버력뿐인 것처럼 보이는 나날에도 잘 뒤져보면 반짝 빛나는 광물질이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 다 썬 감잎에 김을 세 번 올리고, 선풍기로 습기를 날려 한지로 곱게 쌌다. 내게 몸을 주신 아버지의 저승길을 닦아 주신, 언제 다시 만날지 기약 없는 스님께 부쳐드릴 것이었다. 《문장 웹진/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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