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으로 가는 길에 대한 안내

 

전생으로 가는 길에 대한 안내 



임영태




시작은 이렇다.         

어느 날 아주 이상한 기운 하나가 새벽녘에 들이켠 찬물처럼 서늘하게 스며들 것이다. 무엇이었지? 처음엔 이런 되새김을 할 사이도 없이 순식간에 파장이 사라지겠지만, 차츰 비슷한 느낌이 거듭되면서 길거리 한복판에서 우뚝 걸음을 멈추게 되곤 할 것이다. 그리하여 자기도 모르게 한순간 골똘해진다. 바람이었는지, 소리였는지, 빛이었는지, 자기를 건드리고 지나간 것이 무엇인지 몰라, 아니, 외부의 자극이었는지 자기 몸 안에서 올라온 것인지조차 알 수 없어 기분만 잠시 아뜩해진다. 우두커니 서 있게 된다.

 

 

그리하여 무심코 주변을 한번 둘러보게 되면, 그때 아마 기시감 비슷한 현상이 나타날 것이다. 자신을 둘러싼 공간 구도가, 사물의 배치가, 저마다 바쁜 행인들의 발걸음이 매우 낯익다는, 전에도 언젠가 이런 식으로 몽롱하게 서 있어 본 듯하다는 그런 느낌이 다가올 것이다. 기시감이란 게 대개 그렇지만, 그 순간 그대 가슴에 내려앉는 건 아련한 그리움이거나 속절없이 무기력해지는 슬픔 그런 것이리라.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그런 현상이 몇 주 혹은 몇 달 동안 간헐적으로 반복된다. 아직 예감은 없다. 여전히 그대는 이런 현상을 몸이 피곤하거나 잠이 부족한 탓으로 돌릴 뿐 모종의 예고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한다. 그러나 차츰 심리적 파장의 농도가 강해진다. 더불어 감정의 변화도 일순간에 그치지 않고 제법 긴 후유증을 남기며 일상의 정서를 교란시킨다. 몸이 아니라 정신 상의 문제라는 생각은 적어도 분명해지고, 크게 불안하진 않겠지만 가능한 한 빨리 문제의 본질을 찾아 이것으로부터 벗어나야 하리라는 생각도 수시로 하게 될 것이다.

내 경우를 예로 들면 이렇다.

그것은 어느 날의 느슨한 오후에 시작되었다. 어떤 대수롭지 않은 모임에 참석했다가 묵지근한 피로감을 안고 귀가하던 길이었는데, 버스를 타고 원효로인가 용산 어름을 지날 때였다고 기억한다.

잠시 정차했던 버스가 막 출발하려 할 때 무심하게 흘낏 건네 본 차창 밖의 어느 점포가, 무슨 점포였던가…… 격자 유리창을 끼운 미닫이틀의 나무문짝과 그 안에 유리진열대 하나만 얼핏 보았을 뿐 정작 파는 물건이나 간판 따위는 눈에 담을 틈이 없었는데, 그러니까 내가 본 건 격자 유리창이나 나무문짝이라기보다 차라리 그 부연 유리창 안쪽의 어떤 그늘 혹은 어떤 빛살이었을 터인데, 무엇이었거나 짧은 순간 맞부딪친 특이할 것 하나 없는 그 단조로운 구도가 내 마음을 한순간 저릿하게 흔들어버렸다.

어떤 표정, 어떤 소리, 어떤 손짓을 본 듯하다는 막연한 느낌이 가슴에 남았다. 몸은 그저 무기력해져서 떠있는 듯 가라앉는 듯 무슨 깊은 구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기만 했으며, 흐득흐득! 엷은 한숨이거나 신음 같은 것이 사르르 끓어올라서는 목울대 근처에서 자박거렸다.

그 날 이후 나는 빈번히 그런 식의 느닷없는 상면을 하게 되는 것으로, 포획이랄지 포착이랄지 무심한 시선에 무엇 하나가 툭 걸려서는 우뚝 걸음을 세우게 만들고, 그것에 폭폭이 젖어 잠시 불규칙한 호흡을 고르고 나면 우선 당장엔 그것뿐이긴 했으나 그런 날의 나머지 시간은 아! 아득하고 아득하여서 허청하니 멀건 눈이나 슴벅거릴 뿐 내내 아무 일도 손에 잡을 수 없고는 하였다.

하기야 흔한 일이다. 어느 대문, 어느 골목, 혹은 주변의 어떤 정황이나 어떤 구도가 매우 낯익다는 느낌에 사로잡히는 경우란 누구에게도 종종 있는 법이어서 일컬어 경험의 순환이라거나 더 심오한 표현으로는 몽중일여라고도 하는 것이지만, 삶은 그렇듯 시시각각 되풀이되는 것이지만, 어쨌거나 나는 좀 더 심각했다고 할 만한 것이 그 몇 달 시도 때도 없이 거리 곳곳에서 부지불식간 야릇한 낯익음에 취했던 것으로, 까닭을 알 수 없는 조바심만 휘리릭 차오르곤 했던 것으로, 그러면 그 깊은 서늘함, 마침내 정서적 공황이 시작되면서 한순간 나는 희읍스레한 주황색 기운에 둘러싸이기도 했던 것이니, 그런 날의 주황색이란 어찌도 슬프고 기이하던지 차츰 나는 무엇을 보거나 안 보거나 온통 사무치게 쓸쓸하여 갔다.

결국 그대 또한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이 예감의 현현이었음을, 자기 생에 스며든 어떤 다른 생이었음을, 돌아가 만나야 할, 끝내지 못하고 온 전생의 호출이었음을.

대개 그것은 그대 입에서 불쑥 내질러지는 어떤 말 하나로 시작된다. 그 말이 어디로부터 날아왔는지는 아직 불분명하겠지만, 그것이 가지고 있는 의미심장한 상징성, 그 말이 전해주는 절박한 호소만큼은 가슴 전체로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이윽고 그대는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떻게 떠나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조만간 스스로 알게 되리라는 것도 알게 된다. 그대는 이미 그 생의 문 앞에 서 있는 것이다.

낭하! 하고 어느 날 나는 중얼거렸다. 툭 튀어나온 말이었다. 그 한마디가 열쇠이고 통로이며 마지막 바람소리였다. 나는 내가 막 예감의 긴 터널을 빠져나왔으며 새로운 한 생 앞에 서 있음을 알았다.


종각 전철역에서 1번 출구로 나와 교보빌딩 방향으로 오십 미터쯤 가면 이른바 청진동 해장국 골목이라고 부르는 칠팔 미터 너비의 나른한 도로가 나온다. 시절이 다 하여 지금은 두어 곳의 해장국집만 저마다 ‘원조’로 남아 있는 이 길을 죽 걸어올라 종로구청이 맞은편에 보이는 네거리에서 오른쪽 모퉁이로 꺾어지면 바로 횡단보도가 나타나는데, 그 횡단보도를 건너 하나은행 담을 끼고 다시 좁은 골목으로 들어서면 조계사가 저 앞에 보인다.

전에는 골목으로 들어서자마자 한국일보사 사옥 꼭대기의 원통형 탑이 저만치 일직선으로 바라보여 이정표 구실을 했으나 지금은 석탄회관과 대한화재보험 빌딩에 가려 한참이나 걸어 들어가야만 보일 것이고, 또 전에는 숙명여중?고와 중동중?고등학교가 그 안쪽에 있어 조계사 주변으로 문방구가 여러 개 있었고 학생들의 발길이 그치질 않았지만 지금은 두 학교 모두 강남으로 옮겨가 주로 근처 빌딩의 양복쟁이 샐러리맨들과 먹물옷 걸친 스님들만 오간다.

이 길로 삼십 미터쯤 들어가 수송장모텔을 끼고 다시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서면 모텔 맞은편에 조계종참선회와 노래방이 들어 있는 조금 허름한 건물이 있고, 이 건물을 지나쳐 삼오모텔 앞에서 왼쪽으로 돌면 대중사우나 바로 뒷길 안쪽에 한눈에도 백년은 묵었구나 짐작되는 3층짜리 붉은 벽돌 건물이 있다.

그 앞에서 나는 길고 어두운 복도를 생각하였다.

늘 침울하게 닫혀 있는 몇 개의 문들, 길가에 면한 작은 격자창으로 스며드는 엷은 햇빛, 걸을 때마다 투웅 투웅 발끝에 튕겨오르는 가벼운 공명, 문 안쪽의 나지막한 수군거림, 웃음소리, 걸상 끄는 소리, 복도 저 끝에 괴어 있는 적막한 그늘.

어느 날 ‘낭하’라고 처음 중얼거렸을 때, 누가 던져준 것처럼 그 단어가 툭 튀어올라왔던 그 때, 예감으로 서늘했던 지난 몇 달 간의 긴장감이 일시에 녹아내리며 무엇 하나가 내 속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누군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나는 일점 의혹도 없이 단숨에 알아차렸다. 벼락같은 해찰이라지만 사실 뒤이어 떠오르는 다른 기억은 전혀 없었고 다만 길고 어두운 복도 하나가 선연히 추억되었다.

그것이면 되었다. 삶은 언제나 모호하지만 숙명은 결국 단 한순간으로 접촉되는 법.

예컨대 낭하였다고, 길고 어두운 복도 하나가 선연히 추억되었다고 내가 말하고 있는데, 단숨에 무얼 알아차렸다고 또 말한 것 같은데, 차마! 그렇듯 차마라고 말해야 할 삶들이 결국엔 있는 것이어서, 그러니까 어두운 복도의 흔적 하나로 그 순간 내가 자지러지게 슬퍼하며 내 또 다른 생의 종료되지 못한 운명과 상면했다고 나는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이겠다.

그 상면 이후 며칠을 흐느적거리며 돌아다닐 때에 나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하기야 들리는 것도 보이는 것도 없어 마음은 오직 길고 어두운 낭하에만 붙잡혀 있었고, 거리 한 모퉁이를 꺾어 돌 때마다 무언가 조금씩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고, 말하자면 나는 무작정이 아니라 무언가에 이끌려 걸음을 재촉했던 것으로, 사흘이 지나자 마침내 그 건물 앞에 세워졌다. 나의 낭하는, 이라고 말해도 좋다면 나의 낭하는, 바로 그 건물 안에 길게 누워 있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담배 한 대를 빼물며, 마지막? 서른 몇 해를 살아와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이 도시의 습습한 밤공기와 낭자한 소음들을 호흡하였다.

참으로 낡았구나. 황망한 우울이구나. 지금은 밤인데도 붉은 벽돌의 희끗희끗 벗겨진 속살들이 눈에 시리고, 세월의 권위보다 먼저 저 황망한 우울이 차게 일어서는데. 연민인 것인데, 연민은 가끔 꿈보다 그윽한 것이건만, 이 연민은 무엇을 향하여 솟는 것인지…… 달빛만 츠르렁 걸려 있는 낡은 건물 앞에서 나는 그처럼 담배 두 대를 연거푸 피지 않았겠는가. 결단의 시간이었던 것이다. 

무슨 장난처럼 현관은 턱 하니 열려 있어 나는 소리 없이 스며들어 계단을 올랐고, 그리하여 스스로 마치 유령인 듯한 착각마저 들었는데, 저 밖으론 길 건너 모텔의 붉은빛 네온이 번질거리고 큰길에 내달리는 자동차소리도 심심찮게 들려오고 있었다.

침울히 닫혀 있는 몇 개의 문들을 스름스름 건네보고 희부연한 바닥을 눈길처럼 찍으며 저기 끝방으로 걸어갔다. 이미 다른 세상인 것을 알았다. 여전히 내 몸체는 무엇 하나 변하지 않았고 방금 전에 걸어 오르던 계단을 또 생생히 기억하지만, 이제는 저 문 안으로 들어서는 것 말고 내게 다른 길은 마련돼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문을 열고 한 걸음 디뎌 이윽고 눈을 떴을 때, 그러니까 나는 아마 잠깐 눈을 감았던 것 같은데, 안구 이식 후의 환자마냥 조심스레 눈꺼풀을 들어올리자 시커먼 어둠이 훅 몸에 덮쳐왔다. 

얼마 후에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면서 어둠 저 안쪽으로부터 몇 개의 물체들이 슬그머니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것들은 마치 덮씌워져 있던 여러 겹의 천이 하나씩 벗겨지듯, 처음엔 그저 어스레한 윤곽뿐이다가 차츰 무엇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하나의 모양으로 드러나면서 찰카닥 찰카닥 자기 자리를 잡았다.

찰카닥 찰카닥, 그런 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싶게 물체들의 출현은 조금 생급스러웠다는 느낌이다. 물론 찰카닥 소리 따위는 없었다. 하기는 어둠 속에서 나타날 때면, 안개라거나 강물이라거나 구름이라거나 하는 것들 속에서 나타날 때면, 그 존재가 기껏 미풍에 눕는 풀잎 하나일지라도 그처럼 자기 현현을 알리는 소리 하나쯤은 깔고 나타나는 법이다. ‘찰카닥’은 그러니까 소리가 아니라 소릿줄의 공명이겠다.

물체는, 방의 반을 차지하고 있는 침대와 조그만 원형 탁자, 다섯 자 높이의 책장이 각각 하나였다. 아이들 그림에 나올 만한 밭 전(田)자 모양의 창 하나가 바로 맞은편에 보였고, 창턱에는 놋쇠주전자 옆으로 수석 서너 개가 가지런했으며, 어지러이 흩어진 편지지와 필기구 몇 자루가 꽂혀 있는 컵 모양의 둥그스름한 필통이 덩그마니 놓여 있었다.

창문 밖은 온통 새카만 어둠인데 천장으로부턴지 바닥으로부턴지 푸르스름한 빛살이 연하게 새어나오고 있어 보이는 것 모두가 허공에 잠시 떠 있다는 느낌이었다.

나는 일 분쯤 가만히 서 있었다.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닫았던가, 문은 어느새 닫혀 있었다.    

이윽고, 기억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눈앞에 보이는 평범하고 단출한 집기들 하나하나가 제 안의 세월을 추스르며 소리없이 되살아나 내게 무언가 말을 하기 시작했다. 아니다. 그보다 먼저 푸르스름한 빛살의 입자 하나하나가 어떤 소리와 빛깔과 냄새를 품은 채 내 몸 속으로, 그러니까 내 살과 뼈와 피와 정신 속으로 가차 없이 밀려들었다. 하나의 전이(轉移)라는 걸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기억의 전이였고, 존재의 전이였고, 다른 생(生)의 전이였다.

처음엔, 기억은 기억으로만 다가와 그저 툭 떨어진 도토리 한 알처럼 생경하고 낯설더니, 차츰 기억은 무늬와 색깔과 소리로 형상화되어 내 안의 이전 기억들을 소멸시키며 그 빈자리를 차지했다. 처음엔, 나는 그 기이한 전이 작용에 남의 일처럼 덤덤했다. 아주 잠깐 동안은 그랬다. 하! 가벼운 탄성을 내지르며 나는 그저 낯선 기류에 내 몸이 감싸이고 있다는 느낌에만 집착했다. 그래서 나슨하게 조여오는 긴장감에 몸을 맡겨둔 채 멀거니 서 있기만 했다.

그러나 이내 무서운 속도로 모든 게 변하기 시작했다. 기억이, 기억의 입자라 말할 수 있다면 기억의 입자들이, 제각각 생생한 정서로 치환되며 내 안으로 스며들었던 것으로, 그러자 소리는 소리대로, 색깔은 색깔대로, 냄새는 냄새대로, 구체적인 자기 시간과 공간을 가지고 내 안에서 되살아났다.

나는 차츰 헐떡거렸다. 치환의 매순간 팽팽한 긴장으로 가슴이 뻐근했으며, 이내 어떤 다른 생각의 여지도 없는 아주 생생한 동요가 나를 뒤흔들었다. 그런가? 그런가? 라고 숨가쁘게 되뇌면서 나는 몸서리치는 전이의 한가운데에서 파들파들 떨었다. 온통 사무쳤다. 사무치게 고독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갑자기 모든 게 분명해졌다. 나는 나의 또 다른 생으로 건너와 있었다. 한때 내 영혼이 자기 숨결을 의탁했던 또 다른 시간, 단순히 시간만의 과거가 아니라 온전히 자기 우주로 정지돼 있어 그 자체로 유일무이한 또 하나의 삶, 내 영혼의 또 다른 거푸집, 일컬어 전생이라 말하는 그 시공간으로 복귀해 있음을 나는 알아차렸다.

어슴새벽의 차가운 공기가 선득했다. 창문이 열려 있었다. 멀리 가스등 하나가 보였고, 뾰족한 지붕도 보였고, 하수구에서 올라오는 듯한 시큼한 냄새가 방안에 가득했다. 비로소 내 눈앞의 사물과 정경은 푸르스름하고 아득한 영상이 아니라 구체적인 실존의 자태로 선명해지고 있었다.

나는 방을 질러가 창문을 닫았다. 하수구냄새가 엷어졌다. 수석 한 개를 들어 잠깐 쓰다듬었고, 그 섬뜩한 한기에 진저리치며 얼른 놓아버리고는 원형탁자 앞으로 가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나무로 된 의자가 생생하게 삐거덕거렸다. 그러니까, 모든 게 생생했다.

친구는 어디 갔을까?

가장 먼저 내가 생각한 건 그것이었다. 그러니까, 한 친구가 있었던 것이다. 한 삶이 있었으니 하기야 어찌 친구 하나만 있었으랴. 몇 명의 억센 남자들과, 아이와, 노인과, 휘파람소리와, 흐느낌과, 전차소리와, 바닷가의 태양과, 찬 새벽이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 죽었다.

나는 불현듯 알고 만다. 전생도 또한 추억이지만 그러나 과거라는 시간은 따로 없음을. 다만 시간의 층위로 갈라지는 무수한 생이 있음을. 매순간, 아주 사소한 조바심이거나 나락 같은 절망이거나, 갈등하는 그 순간마다 다른 시간이 펼쳐지고 그리하여 한 영혼은 무량대수의 생을 받는 것이니, 존재는 시간 없이 존재할 수 없어 각각의 실존은 스스로의 시간에 남고, 신은 각각의 시간에 불멸로 현존하고, 숙명은 그리하여 시간마다 다시 시작된다는 것을. 

친구는 어디 갔을까? 다시 그런 생각을 한다.

수없이 이 방을 드나들었다는 걸 좀더 분명하게 실감하며, 창으로 들어온 햇발이 우울하게 머물던 자리와, 이웃 방들의 말소리, 그 가랑가랑한 속삭임까지 선연히 귀에 담는다. 내 삶에 속한 무늬들이여. 너무 친숙하여 불쑥 소름마저 돋지 않는가. 

그러니까 나는, 들어와 있으면서 여전히 밖에 있기도 하다. 두 개의 다른 삶이 물결처럼 하나로 섞였다가 엷은 막으로 갈라지고는 한다. 이제 말하는데, 한 생은 각기 자기 시간 안에서 스스로 완결되며, 존재는 시간 밖에서 영속한다. 존재의 결핍감이란 그러니 시간에 대한 그리움으로, 존재는 각각의 생에 자기 성숙을 의탁하며 스스로는 한없이 유예의 날을 지켜간다.

아아! 실존의 사무침이여, 시간을 타고 도는 떠돌이여.


결단의 시간에 대해 한번 언급한 것을 기억할 것이다. 몇 주 혹은 몇 달에 걸친 몽롱한 설렘의 시간을 지나 마침내 전생으로 통하는 입구와 마주쳤다면 이제 그대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그것은 소풍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기야 소풍이라는 말도 꽤 그럴싸하긴 하여 생을 되돌리는 그 기이한 나들이에 짐짓 유쾌한 기대감을 담아 소풍이라 말해보는 것도 나쁠 건 없지만, 이것 하나는 분명히 알아두어야 한다. 그대는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

이제 사람이 삼계육도를 돌며 생사를 거듭하는 윤회의 의미를 알아둘 때가 되었다. 업의 정화를 위해서가 아니다. 업은 쌓이고 또 쌓일 뿐, 정화되어야 할 그 무엇이 아니다. 사람은 끝없이 업을 쌓고, 그 업 위에서 존재성을 갱신한다. 사과나무에는 매년 새로운 사과가 열린다. 올해의 사과는 지난해의 사과와 다른 존재이지만 지난해의 사과와 연결돼 있다. 간단히 말한다. 사람은 배우기 위해 생사를 거듭한다. 무엇을 배우는가? 지난 생에서는 배울 기회를 갖지 못했던 것들이다. 그리하여 윤회란 학년이 올라 새로운 교과서를 받아드는 것과 같은 일이다.

그러나 알아야 한다. 사과는 매년 계속해서 더 맛있어지지는 않는다. 사람도 그러하여, 이번 생이 지난 생보다 완성에 더 가까운 건 아니다. 지난 생에 배우지 못한 걸 배울 뿐이다. 그리하여 배우고 또 배우면 언젠가는 더 이상 배우지 않아도 될 때가 오는가? 그것은 아직 말할 때가 아니다. 지금은 그대가 돌아가게 될 전생을 말하는 시간이다.

지난 생에 배웠어야 하나 배우지 못해, 모든 이에게 그런 혜택이 주어지지는 않는 매우 희귀한 기회가 지금 그대에게 허락되었다. 그대는 돌아가 다시 배울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배우면 돌아와 이 생의 나머지 몫을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시 돌아간 그 생에서 이번에도 역시 배우지 못한다면, 그것은 죽기 전엔 알 수 없다, 그리하여 돌아간 그 시절 거기에서 생을 마감하게 될 것이다.

이번 생, 지금의 기억과 존재감, 지금의 그대 삶을 이루고 있는 모든 인연과 여전히 가슴 속 어딘가에 박혀 그대를 그대이게 하는 기쁘고 슬펐던 날의 기억들, 이 시대의 골목길에 내리는 빗소리와 빌딩 유리창에 반짝거리는 오후의 햇살과 아침 출근길의 저 부산하고 생동감 넘치는 풍경들, 대중사우나의 안온한 휴식과 월드컵의 흥분과 인터넷 서핑, 오늘 거울에 비치는 그대 얼굴마저 순식간에 아스라한 추억으로만 남게 될 것이다.

결단이 필요한 까닭이 그것이다. 자신 없으면 전생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좋다. 우리의 삶의 늘 그렇듯 어떤 불행도 희열도 외부에서 오지 않는다. 사람은 자기 운명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돼 있다. 이번 길 역시 그런 수많은 선택 중의 하나일 뿐. 결단하라.

문제는 또 있다. 그대가 만약 제대로 배워 그 생의 의미를 완성시키게 된다면, 그리하여 오늘 이 자리에서처럼 이번 생으로의 회귀의 문 앞에 서게 된다면, 그때 역시 그대는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될 터이다.

그때 돌아오는 일은 지금 떠나는 일과는 다르다. 지금 떠나는 건 희미한 가능성이나마 기약을 두고 떠나는 일이다. 의무를 다하기 위해 거친 바다로 나서는 뱃사람처럼, 꼭 돌아오리라는, 돌아와야만 한다는 다짐을 가슴에 품고 비장하되 희망과 기다림의 여지를 두고 떠나는 여정이지만, 그때 눈앞에 보이는 문은 다시는 돌아서지 못할 문이다. 지금은 이 생을 버린다는 마음 없이 갈 수 있지만, 그때는 그 생의 세계와 완벽히 작별하여야 한다. 그대는 다시 가지 못한다. 기억은 통렬한 고통이 되어 화인으로 남을 것이다. 두 개의 생을 저울질하고 싶지 않다면 얕은 호기심 따위로 전생의 문을 두드릴 일이 아니다. 말하건대, 사람은 사실 두 개의 세계를 감당할 만한 존재가 처음부터 아닌 것이다. 신조차 하나의 세계만 가지고 있다. 오직 악마만이 두 개의 세계를 희롱한다.

아무튼 그대가 전생으로 돌아간다면 그 즉시 인생의 전이가 시작될 터인데, 예컨대, 그대의 기억과 감정과 성격과 사소한 버릇까지도 전생의 그것으로 완전히 바뀌어서는 도착해 있는 그 시공간 이후의 삶을 다시 반복하게 될 것이다. 반복은 아니다. 한번 살았던 일들과 이번 생의 경험까지 더해 그대 영혼의 주체의식은 무언가 달라져 있을 터, 그것이 작용을 미쳐 그대의 정서적 반응과 행위들은 미세하게나마 조금 다르게 움직여 갈 것이다. 물론 전생의 삶을 100% 그대로 답습할 가능성도 여전하다. 행위가 또 행위를 만들고, 감정이 또 감정을 만들고, 그 사이사이 틈새에 영혼의 주체의식이 얼마만큼 작용하고 어디로 이끌어 갈지는 신도 모르는 일이다. 예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를테면 나는 어떻게 돌아왔을까?     


얼마 후에 친구가 방으로 들어왔다. 친구의 얼굴을 보자 그에 대한 감정이 선명해졌는데, 그는 내가 그다지 호감을 갖고 있는 친구는 아니었다. 그러나 함께 어울리는 데에 큰 부담도 없는 친구여서 맥주를 마시다가 조금 취하기라도 할 때면 별로 비밀도 없는 내 생활에 대해 주절주절 들려주기도 할 정도로는 가깝게 지내고 있는 사이였다.

그리하여 나는 그가 나에 대하여 어디까지 알고 있는가를 물론 아는 것인데, 내가 평범한 하급 샐러리맨이라는 것과 얼마 전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받아 회사에 이틀 간 휴가를 내고는 3년 동안 양로원에 머물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룬 일과, 그 이튿날 해수욕을 즐기고 희극영화를 보며 함께 낄낄거리고는 한바탕 정사를 치룬 여자를, 그 여자와 결혼해버릴 수도 있었던 일들을 그는 아는 것이다.

친구와 나는 바닷가로 놀러갔다. 거기에서 친구가 한 아랍 사람과 말다툼을 하는 것을 보았고, 어쩐 일인지 내 주머니에는 권총이 들어 있었는데, 태양이 너무 따가워서, 미치도록 강렬하여서, 나는 그만 아랍 사람을 쏘아버렸다. 곧 체포되었고, 이후 지루한 일들이 계속되었지만 나는 재판관에게도, 검사에게도, 변호사에게도, 권총을 쏜 일에 대하여 태양 말고는 어떤 이유도 말할 수 없었다.

그들은 어머니의 장례식 이후 내 일련의 행위들을 이해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곧, 살인동기를 밝혀내기 위하여 검사는 내가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룬 이후부터 바닷가에 놀러가 살인을 하기까지 내 감정과 행위 사이의 인과관계를 면밀하게 유추하였다. 배심원들은 그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내가 했다는 행동과 검사가 법정에서 재구성한 나의 범죄 사이에 아무런 연관성도 찾아낼 수 없어서 그저 방관자가 되어 사람들이 나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을 지켜보는 수밖에는 없었다.

도무지 모르겠다던 사람들이 갑자기 나를 다 알아버렸다. 사람들에게 나의 행위는, 이 세상에서 가장 이해하기 쉬운 단순하고 명백한 것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사형 판결을 받았다. 회개를 도와 줄 교화신부는 부르지 않았다.

사형 전날, 나는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았다. 내가 불행하지 않다는 것이 사람들을 더욱 분노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상관없는 일이었다. 남들의 기분에 조바심치는 사형수는 없다. 이상한 것은, 장례식에서도 떠오르지 않았던 어머니의 젊은 날의 얼굴이 불쑥 떠올랐다는 것이다. 그러자 나는 문득 무엇 하나를 알아차렸는데, 어머니가 나를 사랑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그 여인은 더욱 불행했을 것이다. 사랑은 사람을 슬프게 만드니까. 

사형이 집행되기로 한 날 새벽, 차가운 벽돌 사이로 문이 나타났다. 복귀의 문이 열렸을 때, 믿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나의 시대를 끔찍이 사랑하였다. 그 세상에서 생을 마감하고 싶었다. 

자기 시대를 사랑하지 않는 이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사람들은 종종 잊어버린다. 자살자라도 그러하다. 세상을 경멸하는 사람은 결코 죽지 않는다. 사람이 죽는 것은 늘 무언가에 대한 사랑 때문이다. 사형수라도 그러하다.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사형수를 구경하러 모여든 군중들의 증오와 경멸에 찬 표정을 그 세상에 남아 보았어야만 했다. 하기야 이미 보았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두 번째 사형이었는지 모른다. 나는 아마 배우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복귀의 문은 대체 어떻게 열린 것일까?


시작은 이렇다.         

어느 날 아주 이상한 기운 하나가 새벽녘에 들이켠 찬물처럼 서늘하게 스며들 것이다. 무엇이었지? 처음엔 이런 되새김을 할 사이도 없이 순식간에 파장이 사라지겠지만, 차츰 비슷한 느낌이 거듭되면서 길거리 한복판에서 우뚝 걸음을 멈추게 되곤 할 것이다. 그럴 때 만약 그대가 남다르게 예민하다면 어디선가 들려오는 울음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호출은 늘 그대가 미처 듣지 못했던 울음소리로부터 시작된다. 《문장 웹진/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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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일기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것인지..나이를 먹으면서 사랑의 가치를 더 신실하게 깨닫습니다그 사랑의 과정속에 녹아 볼 수 없는 향기를 어떤 실체로 느낄 수 있게해 주는 작가의 감성과 감춰진 고뇌와 고단한 수고를 함께합니다.작가의 어여쁨만큼 오래오래 뇌리에 맴도는 더 좋은 작품 향한 발돋움을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