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거리의 우수와 신비

 

어느 거리의 우수와 신비



박주영

 

나는 서른하나, 그리고 독신주의자이다.


나는 꼬박꼬박 월급과 보너스를 주는 직장이 있고, 목돈 마련을 위해 저축과 투자에도 열심이고, 위험에 대비한 보험과 노후를 위한 연금도 차곡차곡 준비해두고 있으며, 내 명의로 된 27평의 아파트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른한 살에 독신주의자라고 말하는 것은 섣부른 주장처럼 여겨질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결혼을 할 테지만 서른한 살에는 결혼을 미루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점점 더 많아지고 있으니까. 한 서른다섯 살쯤, 혹은 마흔 살쯤 그렇게 말하면 세상 사람들은 당연한 듯 믿어줄지도 모른다.

내 주변의 사람들조차도 나의 독신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한낱 객기로 받아들이고, 아직 임자를 만나지 못해서 뭣 모르는 소리나 지껄여대는 철없는 여자 취급을 한다. 뭣 모르는 철없는 삼십대 여자가 정말 나라면 진짜 결혼 가능성이 없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 누구도 그런 불가능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았다.

오늘은 내 생일이다.


그러나 나의 서른한 살 생일을 기억하는 사람은 내 부모밖에 없었다. 그리고 또 한사람 재경이 전화를 걸어왔다. 하필 나는 샤워 중이었고, 엄마가 전화를 받았고, 그래서 재경은 내 생일을 기념하기 위한 저녁식사에 초대되었다. 나는 이런 식의 한심한 격식 차리기에 연연해하는 내 부모에게 질렸다.

재경이 굳이 내 생일에 와야 할 이유도, 그것이 어떤 의미는커녕 위로조차도 되지 않음을 그가 제일 잘 알 텐데도 재경은 왔다. 재경은 생일 케이크를 사들고 와서는 서른한 개의 초에 불을 붙이고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는 어릿광대짓을 마다하지 않았다. 재경이 바리톤으로 부르는 해피버스데이투유가 끝날 무렵, 열한 살도 아니고 스물한 살도 아닌 서른한 살이나 먹은 나는 내 부모가 시키는 대로 촛불을 불었다. 촛불은 단숨에 꺼지지 않았고, 몇 번이나 반복된 나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가물거리다가 꺼지지 않는 촛불이 계속 남았다. 결국 재경이까지 거들어서야 서른한 개의 촛불은 꺼졌다.

긴 초 세 개와 작은 초 한 개를 받아오지 않고 서른한 개의 초를 챙겨온 재경이 은근히 얄미웠다. 재경은 어떤 한 해도 그냥 지나가지는 않는다면서 십년을 한 개로 묶어버리는 건 불공평하다고 말했지만, 이건 아무래도 그의 장난기가 발동했음이 틀림없었다. 어릴 때부터 장난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재경이었다. 미용실 놀이를 한다며 재경이 휘두른 가위에 찢긴 내 오른쪽 귀에는 아직도 흉터가 남아 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는 흉터였지만, 그리고 귀를 자세히 들여다보는 사람이나 관계도 흔치는 않겠지만 어쨌든 나는 그날 이후로 귀를 드러내놓고 다니지 않게 되었다.

오늘도 엄마가 나의 오른쪽 귀에 남은 그 흉터 얘기를 꺼냈다.

“재경이, 너 때문에 아직도 우리 지나가 머리카락을 귀 뒤로 안 넘기잖아.”

“아직도 흉터가 있니?”

하면서 재경이 내 머리카락을 넘기며 귀를 보려고 했다. 나는 움츠려들며 징그럽게 꾸물거리는 벌레를 털어내듯 재경의 손을 뿌리쳤다.

“아무래도 귀의 흉터 때문에 제가 지나를 책임져야 할 거 같은데요.”

“그래, 그러면 좋지. 뭐.”

이런 식의 농담이 특별한 의미를 갖지는 않는다. 한두 번도 아니고, 재경이 가위로 내 오른쪽 귀에 상처를 낸 그날 이후 우리들 사이에는 이런 식의 농담이 오가고 있었다. 우리 엄마는 내가 재경과 결혼하길 은근히 바랄지도 모른다. 나쁠 것이 없었다. 지나치게 좋은 조건일 수도 있었다. 귀찮고 번거로운 가족조차도 없으니까. 하지만 나는 천상 독신남처럼 보이는 재경이 싫었다.

재경은 차갑고 건조하고 냉정했다.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도 재경은 그러했고, 그래서 나는 재경이 끝내 독신으로 살아남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혼자 살기에는 너무 큰, 재경의 저택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재경의 저택은 늘 이 동네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곤 했다.


저택이 있는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 높은 담 너머를 상상하곤 했다. 그 높은 담 너머에 있는 아름다운 저택에는 아버지와 어머니와 소년 하나가 산다고 했다. 좀처럼 만날 기회가 없었던 소년은 또래 아이들의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그 소년은 새하얀 얼굴에 휠체어를 타고 다닌다는 소문이 있었고,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아서 학교를 다니지 않는다는 소문도 있었다. 열한 살이 되던 해 봄 나는 그 담 높은 저택을 처음으로 방문했고 소년을 만났고 그로부터 어느덧 이십년의 세월이 지났다.

이기적인 재경과는 태어날 때부터라면 어쩔 수 없지만, 일부러 가족이 될 이유는 없다. 그리고 재경은 절대 결혼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재경에게는 나처럼 결혼을 독촉하는 부모도 없다. 재경의 부모는 교통사고로 한날한시에 죽었다. 우리는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고 재경의 건들거림이나 바람기를 그 여파로 이해하고 있기도 했다. 어쨌든 재경은 사춘기를 뒤늦게 앓는 듯한 이십대를 보냈다.

“지나만 좋다면야 저야 내일 당장이라도 날짜를 잡고 싶지만…… 지나 같이 멋진 여자한테 제가 당키나 하겠습니까? 지나는 만나는 남자가 정말 없습니까?”

뻔뻔스런 얼굴로 재경이 우리 엄마에게 물었다.

“없어. 인연이 따로 있겠지.” 

“예, 그렇겠지요. 그런데 정말 신기하지 않습니까? 지나 같이 완벽한 여자에게 남자가 없다는 게.” 

“뭐 얘가 일밖에 모르고 도통 남자한테 관심이 없으니까, 그렇지.”

아버지는 너털웃음을 웃으며 그렇게 말했고, 엄마는 미소로 가볍게 동의했다. 그 저택을 방문했던 열한 살 봄부터 이십 년 동안 재경과 나는 친구였다. 재경의 부모가 죽었을 때 재경이 가장 믿고 의지한 것도 실은 우리 부모였다. 사람들은 나와 재경을 연인 사이로 오해하거나 결국은 결혼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나름의 상상을 하고 있겠지만 우리의 실체는 그렇게 가족에 가까웠다.

재경이 머리카락으로 굳게 가려진 내 오른쪽 귀에 대고 속삭였다.

“어쩌면 자식을 제일 잘 모르는 건 부모일지도 몰라. 안 그래?”

우리 부모는 내 연애사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나는 한 남자와 아주 오랫동안 연애를 했지만 우리 부모는 그의 존재를 모른다. 그들은 내가 학교 다닐 때는 얌전히 공부만 하고, 지금은 직장에서 일하느라 바빠서 연애는 생각도 못하고 있으며, 일 욕심 때문에 결혼을 미루고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 내 편에서도 그렇게 생각하면 속이 편할 테지만 사실이 그렇지 않았다. 나는 남들보다 빠른 성공을 하고 있었지만 남들이 오해하는 만큼 일중독도 아니고 출세지상주의자는 더더구나 아닐뿐더러 요즘은 이 일이란 게 점점 더 소모적으로 느껴지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나를 제일 잘 모르는 건 내 부모가 아니라 어쩌면 나일지도 모른다.


꺼놓는 걸 또 잊었는지 휴대폰이 울렸다.


내 휴대폰으로 걸려오는 전화는 열에 아홉은 일 때문이다. 비록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생일이지만 이런 날까지 일과 관련된 전화를 받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이미 누군가가 나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 휴대폰의 발신번호를 보니, 예상외였다. 전화를 건 사람은 친구 선영이었다. 열에 하나의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그 열의 하나 중 열의 아홉은 선영이니,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지나야, 나, 오늘 또 선봤어.”

“그래? 잘 됐니?”

“아니. 몹시 우울하다. 어디냐?”

“부모님 집.”

“넌 맨날 집 아니면 회사냐? 알면서 매일 물어보는 내가 바보지. 나올 수 있어?”

“지금 재경이가 와 있는데.”

그때였다. 재경이 자기는 상관없으니 선영이한테 가 보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와 동시에 저 너머로 들리는 선영의 생뚱맞은 말.

“재경이? 왜?”

“지금 나갈게. 어디로 가면 돼?”

재경은 나를 선영이 있는 곳까지 데려다 주었다. 어릴 때부터 친구였던 탓에 나는 재경의 친구를 대략 모두 알고, 재경도 내 친구들을 모두 알고는 있었다. 이리 섞이고 저리 섞여서 이제는 서로가 서로의 친구가 되었고, 그들 중 몇은 어떻게 엮이다가 연애를 하기도 했고, 그렇게 또 살아남은 몇 커플은 결혼까지 했다.

선영과 나는 예전에는 이렇게 친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나이가 되고 보니 사정이 달라지고 있었다. 누굴 불러내서 신나게 미친 듯이 놀지 않으면 돌아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날이 있다. 그런데 그럴 때 불러내면 달려올 사람이 얼른 생각나지 않았다. 얘는 결혼을 해서 저녁식사 전에는 들어가야 하고, 얘는 주말이니 애인이랑 있을 거고, 얘는 너무 멀리 있고, 얘는 유학 갔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럴 때 내가 선영을 불러내는 것처럼 선영도 나를 생각해내는 것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를 이렇게 맘껏 불러낼 수 있는 것도 조만간 끝날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건 선영이 때문일 것이다.


선영은 한눈에 보아도 꽤 신경 쓴 모습이었다.


눈가에 자리잡기 시작한 주름을 가리기 위해 섬세하게 화장을 하고 분홍색의 입술에는 이지적으로 보이도록 베이지색 립스틱을 발랐다.

“이번에는 어떤 남자야?”

사실 들어봤자 뻔한 얘기겠지만 달리 할 얘기도 없었다. 선영과 나는 벌써 십일 년을 알고 지냈고 궁금할 시간적 틈이라고는 도무지 없을 정도로 연락이 되는 사이였다. 선영이 가출했던 육 개월의 기간을 제외하고는. 그때 선영의 나이가 스물아홉 살이었으니 가출이란 말은 어찌 좀 어울리지 않기는 하지만, 그건 분명 가출이었고, 그 원인은 분명 남자였다.

“대기업 계열사에 다니는 남자지, 뭐. 그런데 이 자식이 어찌나 건방진지. 키나 용모도 그 정도면 겨우 평균이고,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차도 겨우 국산 중형차 타고 다니는 주제에, 그렇다고 회사에서 승승장구할 타입도 아니더구먼. 뭘 믿고 그렇게 잘난 체를 하는 건지.”

돌아서면 약간 정도의 차이가 있었지만 모든 남자들이 같아진다. 그냥 선봤던 남자들에 속하게 될 뿐이다. 그러나 어쩌면 그가 선봤던 여자들 중에 선영은 최악의 조건일지도 모른다. 나이도 많고 살림 그런 거 관심도 없고 회사는 꽤 오래 다녔지만 모아둔 돈도 물론 없다. 그만둘 수 있을 때까지만 다니겠다고 악착같이 버티고 있는 직장이 자랑스러운 이력이 될 수 없는 것도 물론이다.

“선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들어. 살면서 내가 오만해서 혹은 부주의해서 실수를 많이 한 거 같아. 선을 보기 위해 나온 남자들은 예전에 내가 연애하던 어떤 남자보다 나을 게 없어. 게다가 결정적으로 그들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야. 사랑해서 결혼하게 될지도 모를 사람이 아니라 결혼하기 위해 사랑해야 할지도 모를 사람이잖아. 빨리 어떻게든 이 지루한 반복을 끝내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어.”

“그래서 또 추억을 더듬었니? 그 화려한 추억.”

솔직히 예쁘장한 선영은 학교 다닐 때 인기가 많았다. 그리고 지금도 도무지 그 나이로는 안 보이는 탓에 집적거리는 남자들이 많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모두 선영과 결혼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이유? 나도 모른다. 나는 그 남자들이 아니지 않은가. 그렇지만 솔직히 나라도 선영이랑 연애면 몰라도 결혼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을 것 같다.

“예전의 그 많던 애인들은 지금 어디서 뭘 할까, 그런 생각을 가끔 하긴 하지. 하지만 지나간 것에 미련을 떨기에는 내 기억력이 형편없다는 걸 너도 알잖아? 많은 것을 잊었고, 이미 돌이키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러니까 다만 후회할 뿐이지.”

선영은 다만 후회할 뿐이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 흔한 후회조차 하지 않는다. 후회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내가 후회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와 헤어진 것이 아니라 애초에 그를 만난 것이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나를 너무 몰랐다는 것이다.

그와 헤어지고 삼년이 지났다. 나는 그의 삶이 하나도 궁금하지 않다. 가난한 집안의 장남인 그의 삶을. 결혼이 만약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면 나는 그와 결혼했을 것이다. 그것도 아주 오래전에. 그를 사랑했지만 그의 가난하고 늙은 부모와 함께 살면서 열심히 벌어서 그의 동생들이나 뒷바라지하고 싶지는 않았다. 과장이라고? 과장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 사람들과 모두 함께 가족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원하는 건 그 남자였지, 그의 가족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남자가 원한 건 예쁜 애인, 나아가 착한 아내였지, 자신보다 한 수 위인 나는 결코 아니었다.

“더 이상 시간 낭비하지 말고 이쯤에서 서로 불쾌하지 않게 접자, 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이 남자가 선수를 치는 거 있지. 회사일이 남아 있다고 정말 미안한데 이쯤에서 헤어져야겠다고, 하나도 미안하지 않은 표정으로. 뒤통수를 맞은 거 아냐. 연락처를 물어보는 최소한의 예의도 없었어. 나쁜 놈! 거지같은 자식! 돌아서서 속으로 이런 저런 욕을 하다가 나중에는 허탈해서 웃음만 나오는 거 있지.”

선영은 그 이야기를 하면서 얼굴이 약간 일그러졌다. 자존심이 어지간히 상한 모양이었다. 어쩌면 선영의 얘기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남자가 꽤 괜찮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일은 일 년에 한 번 있을까말까 한 일이다.

“그런데 재경이는 왜 너희 집에 온 거니? 너희 혹시……”

선영이 무슨 상상을 하는지 알 것 같다. 나한테 애인이 있을 때에도 가끔 친구들에게 그런 오해를 받고는 했는데, 지금이야 어떻겠는가. 상상력 풍부하고 입 가벼운 선영의 오해는 일파만파로 퍼져나갈 것이었다.

“너, 오늘 며칠인지 아니?”

“오늘? 오늘이 며칠이지?”

“됐어.”

“아, 미안해. 네 생일이었구나. 정말 미안해. 내가 며칠 전까지도 생각하고 있었는데, 정말이야.”

선영에게는 미워할 수 없는 어떤 점이 있다. 저 유난스런 호들갑. 사람을 깜박 넘어가게 만드는 애교. 내가 선영을 만나는 이유는 심심하고 외로워서, 혹은 처지가 비슷해서 뿐만은 아닐 것이다. 선영을 만나는 일은 즐겁다. 내가 남자라면 즐거움을 주는 저런 여자를 선택하는 것도 한번 고려해볼 만하다고 다시 고쳐 생각한다.

“솔직히 나, 너 잘 나가는 거 눈물나게 부럽지만 그보다는 자랑스러움이 앞서. 사람들한테 너랑 친구라고 자랑했더니 나 같은 날라리한테 너 같은 훌륭한 친구가 있냐고 다들 놀라더라. 뭐, 나도 한때는 너랑 그리 다르지 않았다고 얘기했지. 아무도 안 믿지만. 그렇지만 나도 남들이랑 똑같이 생각해. 그래도 네가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해서 편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너, 차라리 재경이랑 잘해보지 그래?”

“재경이랑? 내가? 미쳤니?”

“왜?”

“너, 걔 어떤 애인 줄 몰라서 그래? 바람피우는 꼴 보면서 평생 살란 말이야?”

“왜? 너도 바람피우면서 그냥 그렇게 누릴 거 누리면서 살면 되잖아? 너, 혹시 아직도 사람들이 사랑 때문에 결혼한다고 생각하니? 아니, 일부 그렇기도 하겠지. 그렇지만 그 사람들이 사랑 때문에 결혼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건 아닐 걸.”

“그렇게 잘 아는 애가 왜 이 모양이니?”

“나? 너무 잘 알기 때문이지.”

나도 내 이론에 모순이 있다는 걸 안다. 그리고 사랑 운운하는 결혼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사랑했으나 결혼이 무서웠다. 아니, 사랑밖에 없는 그 결혼이 무서웠다. 정말로 무서웠다. 사랑밖에 없었으니, 그 사랑이 사라진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 건지 상상만 해도 무서웠다.

사랑 때문에 결혼한 이들은 말한다. 사랑이 뭐 그리 대단한 거냐고, 경제적 능력을 보라고. 가난 때문에 지지고 볶고 싸우는 동안에 그 사랑은 소리 없이 사라져버린 지 오래라고. 차라리 사랑하는 그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온전히 그 사랑이 추억으로 남아 있을 거라고. 그리고 경제적 능력 때문에 결혼한 이들은 말한다. 사랑하는 사람이랑 결혼하라고, 돈은 절대 공허를 메워주지 못한다고. 그들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 결핍에 대해 말하면서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간과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나야, 나이 든 우리보다 어린 것들이 잘하는 게 뭔지 아니?”

“글쎄?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사랑에 빠지는 거. 세상의 다른 모든 일들은 대부분 나이 든 사람들이 잘하게 되어 있지만 사랑에 빠지는 일만은 겁없는 어린 것들이 더 잘하잖아. 안 그래?”

짐작하자면 선영은 별로 젊지 않은 스물아홉이란 나이에도 사랑에 빠진 적이 있었다. 그리고 미안한 말이지만 선영은 평생 저런 후회 비슷한 소리나 하면서 살지도 모르겠다. 사랑을 하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아주 잘 알게 된다. 그러나 사랑에 빠지면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는 종종 잊어버린다. 그리고 그걸 알았을 때 몹시 당황하게 된다. 인간은 이기적이다. 자신을 가장 사랑하고 미워한다. 미움조차 사랑이 있을 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사랑하는 상대를 보라. 그 속에 당신이 사랑하고 증오하는 극단적인 것이 있다. 사랑은 사랑이고 결혼은 결혼일까? 그렇게 생각하니 결혼상대로 재경이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는 합리적인 인간이고 자신을 지독히도 사랑하는 이기적인 인간인 만큼 타인에게도 그리 간섭하지 않는 족속이었다.


내 예상과는 달리 재경은 결혼이 가능한 인간인 모양이다.


그 상대는 사람들의 무궁무진한 상상력이나 내 어설픈 기대와는 달리 내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재경의 결혼 소식을 들었을 때 첫 번째 궁금한 것은 그가 도대체 왜 결혼을 하려고 하는 건가 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 궁금한 것은 어떤 여자이기에 재경에게 결혼까지 할 생각을 하게 만들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토요일, 나는 쉬는 날이고 재경은 근무하는 날이다. 쉬는 날 일부러 나오는 짓은 별로 하고 싶지 않았지만 재경이 결혼할 여자를 보여준다고 해서 기꺼이 외출했다. 그런데 집을 나서서 차에 타자마자 휴대폰이 울렸는데 재경이었다. 늦을 거 같다고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사실 별 상관이 없었다. 첫인상에 신경을 쓰느라 이미 좀 늦은데다가 또 차도 막힐 것 같았으니까. 그러나 내 예상 밖으로 차는 신호 한번 안 걸리고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더구나 원래 약속시간보다 15분이나 일찍, 그런데 재경은 늦는다고 했으니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몰랐다. 들어가서 시원한 뭐라도 한잔 마시고 싶었다.

분명 카페는 내가 먼저 들어왔다. 그러나 웨이터는 나보다 나중에 들어온 여자에게 먼저 가서 주문을 받는 것이었다. 까맣고 동그란 선글라스로 얼굴 전체를 가리다시피한 여자는 실내에 들어와서까지 선글라스를 벗지 않았고, 새까만 원피스에 새까만 샌들에 분위기가 묘해서 들어올 때부터 내 눈길을 사로잡았었다. 웨이터의 행태야 솔직히 좀 불쾌했지만 뭐 그럴 수도 있지, 싶었다. 나이를 먹어간다는 게 좋은 것은 쓸데없는 노여움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반드시 지켜줘야 마땅한 것도 없어지고,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 같은 것도 없어지는데, 그러니까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가 있을까 하면서 놀라고 당황하고 흥분하면서 신경 쓸 것들이 점점 사라져버린다.

“블루베리 주스 없어요? 없군요. 그럼, 오렌지 주스로 주세요.”

웨이터가 그 여자에게 주문을 받고 있는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찰나 재경이 카페로 들어섰다. 아는 체를 하려는데 재경은 나에게 잠깐 손짓을 하더니 그 선글라스 여자에게 가는 것이었다. 아직도 정신 못 차렸군. 네가 그러면 그렇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여자를 데리고 재경은 내 테이블로 왔다. 그렇다면, 저 여자가 그 여자. 여자는 선글라스를 벗고 나에게 인사를 했다. 그녀는 소름끼치게 새하얀 흰자위와 커다랗고 새까만 눈동자를 가졌고 빼빼 말랐으며 몸집에 비해 가슴은 컸다. 담배나 술에 찌든 사람처럼 어울리지 않게 가늘고 찢어지는 거친 목소리, 절대로 빗 같은 건 사용해본 적이 없는 것 같은 엉클어진 머리카락, 굳게 다문 허연 입술. 그녀를 마주 하고 있는 순간 나는 주뼛주뼛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기묘하게 꾸물거리는 발이 많이 달린 벌레나 색깔이 울그락푸르락하는 파충류나 어디로 날아갈지 모르는 날개를 푸닥거리는 나방 같은 것, 그건 그러니까 전혀 알지 못하는 낯선 생명체를 마주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인사랍시고 이름을 겨우 말하고는 곧 다시 선글라스를 꼈다.

“햇빛알레르기가 있어.”

재경의 변명에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재경은 진심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녀에게 나를 가장 친한 친구로 소개한 모양이었다. 지독히 말도 없고 무엇에도 관심이라고는 없는 듯한 태도로 일관하는 그녀가 나는 좀 많이 불편했지만, 어쨌든 친구로서의 예의는 다하고 싶었다. 어쩌면 나는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눈치 볼 게 없는, 그런 종류의 사람을 가장 두려워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두려움은 싫음이나 혐오와는 다른 종류였다. 대범한 척 독신주의를 주장해왔지만 나는 늘 사람들 속의 나를 생각하는 소심한 사람이었고, 그래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즉흥적인 시간을 사는 사람들이 싫었는지도 모른다.

재경은 그녀에 대해 나에게 계속 말했다. 가족도 아닌 내가, 그렇다고 그녀와 친하게 지낼 생각도 없는 내가 왜 그녀에 대해 이것저것 다 모두 알아야하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냥 들었다. 달리 할 것도 없었고 하기도 싫었다.

“오빠, 나 잠깐만.”

하더니 그녀는 자리를 떴다. 움직일 시간이 된 것 같았다. 나는 빨리 집으로 돌아가 남은 주말을 나답게 아무 짓도 안 하고 조용히 보내고 싶었다.

“그만 일어날게.”

“밥 먹고 가.”

“싫어. 내가 눈치 없이 왜 같이 가?”

재경은 낮에 돌아다니는 거 싫어한다는 그녀는 순순히 보내주고, 피곤하다는 나를 억지로 끌고 밥 먹으러 갔다. 밥은 먹어야 쉬어도 쉴 거 아니냐고 재경은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밥보다 휴식이었지만, 더 이상은 내 뜻을 주장할 수 없었다. 재경의 고집에 대해서 나는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내 오른쪽 귀에 상처를 낸 그날도 재경의 놀이에 순순히 응했다면, 아니 조금쯤 수긍이라도 해주었더라면 피까지 보고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

“궁금한 게 있는데, 너의 그녀는 도대체 몇 살이니?”

“스물네 살.”

스물네 살이었다. 생각보다 작은 나이이기도 했고 상상보다 많은 나이이기도 했다. 그녀의 모습으로만 보자면 스물네 살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결혼을 하겠다는 걸로 보아서는 적어도 스물일곱은 넘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스물네 살, 그녀는 너무 어리고 그래서 무모한 것일까.

내가 스물네 살이라면 절대 결혼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스물네 살이기에 결혼을 함부로 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나도 스물네 살에는 아무것도 상관하지 않고 오직 사랑만으로, 단지 같이 있고 싶어서 그와 결혼할 수도 있었을 것 같았으니까. 그랬더라면 나는 후회했을까. 어차피 후회하는 건 마찬가지일 텐데 그 편이 훨씬 아름답지 않았을까. 스물네 살의 나는 내가 원하는 건 뭐든지 가질 수 있고 가져도 된다고 함부로 생각했다. 어쩌면 지금도 그리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재경의 결혼은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부모가 없는 재경을 위해 내 부모는 기꺼이 그 결혼의 준비과정을 도왔다. 엄마는 어린 것이 영악하게 괜찮은 남자를 채가는데 서른 살도 넘은 너는 이러다가 좋은 남자 다 놓치는 게 아니냐고 나를 닦달했다. 그러면서도 엄마는 한편으로는 자신의 딸이 잘나고 훌륭해서 충분히 자랑스러운 결혼을 할 수 있다고 믿고자 애썼다. 내 부모의 조바심과 희망 사이에서도 나는 담담했다. 어차피 나와는 상관없는 세상의 일이었으므로.

결혼식 날 친구들은 모두 재경의 신부에게 관심을 쏟았다. 빈혈기가 있어서인지 약간은 창백한, 그래서 투명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녀는 정말 묘하게 예뻤다. 저렇게 어리고 예쁜 애가 뭐 하러 벌써 결혼을 한다니, 나 같으면 실컷 더 놀다가 결혼하겠다, 라면서 선영이 내 옆에서 쫑알거렸다. 아무것도 아닌 어린 것이 재주도 좋게 돈 많은 남자를 잡았다고 대놓고 말하는 이도 있었고, 바람둥이인 재경이 얼마나 가겠냐고 돈 많으면 뭐하냐고 마음고생을 할 거 생각하니 참 안 됐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선영을 비롯한 이들의 비난은 질투에 지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가끔 나에 대해서도 그런 견해들을 보인다. 그들은 내가 남들보다 빨리 성공한 것을 미혼이기 때문에, 그리고 미모가 있기 때문이라고 싸잡는다. 그 얘기는 일에 결혼을 희생했다는 얘기일 수도 있지만, 내가 미혼인 점을 이용한다는 얘기일 수도 있다. 웃긴다고 생각한다. 나처럼 제법 잘나가는 여자가 그럴싸한 남편이 있을 경우 남편 덕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가지지 못한 것에 미련이 많고 변명이 많고 남들이 가진 것은 비난하기 좋아한다. 일이 없는 여자는 일하는 여자의 커리어를 부러워하면서도 그들의 고단한 일상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안온한 삶에 안심하고, 일이 있는 여자는 일없는 여자의 휴식을 부러워하면서도 자신의 일에 대한 성취감을 주장하고 싶어 한다.

그들이 자기만족으로 재경의 부부를 씹든 말든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 아무리 애써도 우리는 그녀의 나이로 돌아갈 수 없고, 그녀처럼 선택할 수 없고, 그녀처럼 선택받을 수도 없다. 그러니까 어디 가서 비록 바람둥이이긴 하지만 재경이 같이 멋진 남자를 만나겠는가 말이다. 그리고 남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저렇게 예쁘고 어린, 미래가 창창한 여자애가 앞으로의 가능성을 대뜸 버리고, 혹은 더 이상은 없다고 단정짓고 한 남자를 선택하기가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그리고 또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다.


재경의 부부는 집들이라는 걸 하지 않았다. 물질적으로 부족함 없는 재경이 세제나 휴지나부랭이, 나아가 전자레인지, 청소기 따위를 받으려고, 혹은 우리 행복해서 미칠 것 같아, 라는 자랑을 하려고 그런 고리타분하고 귀찮은 행사를 할 리 만무했으나 그 덕분에 우리는 그들 부부의 집을 엿볼 기회를 잃어버렸다. 그리고 재경은 결혼한 이후로 친구들과의 모임에도 잘 나오지 않았다. 어릴 적처럼 담장 높은 그의 저택은 다시 비밀에 휩싸였다. 재경이 어여쁜 아내에게 빠져서 두문불출한다는 추측도 있었고, 그들 부부 사이가 영 소원하다는 악의적인 루머도 떠돌았다.

스무 살 남짓의 한 여자가 서른을 넘게 살아온 한 남자의 습성을 바꿀 수 있으리라고는 여기지 않는다. 나도 다른 사람들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들 부부의 관계가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지 내기를 거는 심정이었다. 다만 그런 내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낼 만큼 나는 세속적이지 않았고, 특히 내 입장에서는 그런 약간의 내색조차도 어설픈 질투로 비추어질 우려가 있었다. 그런 이유들로 나는 그들 부부 사이를 옹호하는 아주 특별한 사람이 되었다. 누군가는 그것을 나와 재경의 특별한 우정이 빚어낸 이야기라 믿었고, 가끔 나에게 재경의 소식을 물었다. 나라고 뭐가 답답해서 남의 남편의 소식을 시시콜콜 꿰고 있겠는가. 하지만 재경은 전보다 뜸해졌지만 여전히 가끔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그리고 그 전화의 용건은 이런 것들이었다. 한번은 여자들은 무슨 선물을 좋아하느냐, 하는 것이었고, 또 한번은 여자들에게 좋은 약이나 음식 같은 것은 없냐는 것이었고, 여자들이 이유 없이 화를 내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이상한 질문을 한 적도 있었다. 아주 웃기는 질문이었고, 솔직히 짜증나는 상황이었다.

재경은 나보다도 여자를 잘 알고 잘 다룬다. 그리고 결혼 전에 재경은 종종 남자가 보는 여자의 모습이 진짜라는 주장으로 나를 아연질색하게 만들고는 했었다. 그런 재경이 누군가의 조언을 구한다는 건 그만큼 아내를 특별히 생각한다고 볼 수도 있고, 아직 아내에게 자신이 없다는 얘기일수도 있었다. 천하의 재경에게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나. 그 전화로 봐서 재경의 부부가 소원하다는 건 악의적인 소문이 분명했다.

재경은 오늘도 별로 다르지 않은 이유로 나에게 전화를 했다. 자신의 아내가 나에게 전화를 해도 되겠냐는 얘기였다. 왜? 라고 물었더니 나도 몰라, 라고 했다. 그녀가 나에게 전화할 이유도 없었지만 전화하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그리고 솔직히 좀 궁금했다. 그녀는 무슨 이유로 날 찾는가. 나는 회의가 끝날 즈음의 시간이면 좋겠다고 그때 전해달라고 했다.

그녀가 내게 전화한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그녀는 나를 저녁식사에 초대하고 싶다고 했다. 그런 이야기라면 재경을 통해서 해도 되는 거 아닌가. 혹시 그녀는 그 아름다운 저택의 주인이 자신이라는 걸 나에게 과시하고 싶은 것일까.


나는 아주 오래간만에 재경의 집을 방문했다.


재경은 아직 퇴근하지 않았다. 재경의 아내는 네일 숍에서 손질한 것이 분명한 모양 좋은 기다란 손톱에, 무슨 좋은 화장품을 바르는지 피부는 윤기나게 반짝반짝거렸고, 머리카락은 쓰다듬고 싶을 만큼 찰랑찰랑거렸다. 그리고 그녀는 몰라보게 건강해져 있었다. 지속적으로 관리를 받고 있다고 했고, 이번 달부터는 라틴댄스를 배우고 있다고 했다. 그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재경이 왔다.

오래간만에 만난 재경의 얼굴은 그녀의 빛나는 얼굴에 비해 왠지 상해보였다. 너, 어디 아프냐? 라고 물었더니 너무 오래간만에 열심히 일한 덕분이라고 재경은 뻔뻔스럽게 대답했다. 특유의 자유로움이 십퍼센트는 감소한 재경의 표정을 보면서 너무 오래간만에 열심히 일했다는 것이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재경은 일에 관해서는 제법 유능한 축에 속하지만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성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늘 노는 듯 일하는 재경은 그래서 사람들의 관심을 더 받았고, 그의 부모가 남긴 유산 덕분에 일에 목매달지 않고 태연자약하다는 오해를 받아서 가끔은 아주 심한 미움을 받는 때도 있었다. 재경이 믿는 구석이 있어서 열심히 일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사실 그건 재경이 가진 일종의 삶에 대한 태도였을 뿐이었다. 

결혼 후 재경은 설거지도 하고 세탁도 하고 청소도 한다고 했다. 일하는 아줌마가 집안일은 거의 다할 텐데도 재경은 그녀를 돕기 위해 안달이었다. 며칠 전에도 과일을 깎다가 손을 베었다 재경은 오늘도 그녀의 요리를 돕겠다고 칼을 들고 설치고 있었다. 서로 하겠다고 티격태격하면서 그들 부부는 저녁을 준비했다. 그녀가 감독하고 재경이 했다고 주장하는 요리는 다 맛있었지만, 재경의 운명 어쩌고 하는 주장에는 밥맛이 뚝 떨어질 정도였다.

“우린 하늘이 내린 한 쌍이야.”

“뭐?”

“운명이라구.” 

나는 갑자기 재경이 바보가 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재경이 그녀와 운명이라고 믿는 이유는 지극히 사소한 것들이었다. 이를테면 취향의 일치 혹은 식성의 동일함 같은 것. 재경은 거듭 운명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 사실에서 나는 재경이 이번에야말로 정말로 제대로 사랑이라는 것에 빠졌음을 확신했다.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지경을 스스로는 납득하게 되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그리고 무아지경의 사랑으로 인하여 재경의 저택은 그의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로 정말 집다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저녁식사를 하고 내 아파트까지 데려다주겠다는 재경의 호의를 거절했다. 거리로 나와 택시를 잡으려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선영이었다.

“어디야?”

“집에 가는 길.”

“지금까지 뭐했어?”

“재경이 집에 갔다 왔어.”

“그 집 어때?”

“……”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열한 살이었던 봄, 높은 담 너머의 저택을 처음 방문했던 날이 생각했다. 소문이나 상상과는 달리 저택의 소년은 비밀의 화원의 아픈 소년도 아니었고, 꿈속의 어린 왕자도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소년이었다. 여기서 평범이란 말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그도 가지고 있었고, 우리에게 없는 것은 그에게도 없었다는 뜻이다. 그 소년은 이 동네 아이들이 다니는 공립초등학교에 다니지 않았고, 얼마간 떨어져 있는 사립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아이들에게 굳이 그 소년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언젠가는 알게 될 비밀들이었고, 굳이 나서서 그들이 품고 있는 신비를 깨부수고 싶지는 않았다.


어둠이 내린 거리에 나는 홀로 서 있다.


내가 목숨보다 사랑한다고 믿었던 그 남자를, 그리고 내가 운명이라고 여겼던 사랑을 배신했을 때부터 나는 독신주의자였다. 넘어지지도 않고 휘어지지도 않고 부서지지도 않는, 보기만 해도 싸늘함이 온몸으로 느껴지는 완벽하고 완전한 독신이 내 삶의 이유와 방식이 되었다. 이제 누군가를 선택하면 전혀 다른 세상에 있을 것처럼 여겨졌던 단련되지 않은 젊은 날들은 거의 다 지났다. 원하는 걸 가지지 못한 적은 없었다. 가질 수 없었던 지난 것들은 내가 진정으로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의심하고 경멸하고 회피하고 거부하고 선언해야만 지킬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문장 웹진/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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