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와 적포도주가 있는 테이블

 

김서령



스위스 로젠 호텔 727호


그가 오는 날이다.

그는 매월 둘째 주 화요일에 나에게 왔다. 정확히 말한다면, 그는 매월 둘째 주 화요일에 스위스 로젠 호텔 7층 맨 오른쪽 방 727호에 왔다.

727호는 트리플 룸이다. 폭이 좁은 싱글 침대 세 개가 놓인 방. 그는 혼자 오지만 트리플 룸에서 묵곤 했다. 별다른 이유는 없다. 그는 예약을 하지 않은 채 처음 이 스위스 로젠 호텔에 왔다. 비어있는 룸은 8인용 온돌 가족실과 트리플 룸 727호뿐이었다. 잠시 황망해 하던 그는 트리플 룸을 달라고 했다.

“침대가 좁으시면 두 개를 붙이세요.”

내가 말했다.


오늘은 유월의 둘째 주 화요일이다. 그가 오는 날이다. 아니, 그가 오기로 한 날이다.

유월의 스위스 로젠 호텔은 한산하다. 예약 따위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전망 좋고 아늑한 더블 룸을 구할 수 있다. 그래도 그는 트리플 룸 727호에 묵을 것이다. 온다면 말이다.

골프 가방을 든 남자 두 명이 로비를 가로질러 걸어갔고 깍짓동같이 허리가 부푼 중년의 여자가 의자에 앉아 휴대전화를 받고 있다. 지루한 풍경일 만도 했지만 나는 괜찮다. 짬짬이 손거울을 꺼내 화장이 들뜨지는 않았는지 립스틱이 지워지지는 않았는지 확인을 했다.

커피숍에 근무하는 K가 가장자리부터 굳어가기 시작하는 치즈케이크를 쟁반에 담아 들고 왔다. 나는 손을 내저었다. 팔리지 않는 치즈케이크는 이미 너무 많이 먹었다. K는 하품을 하며 서쪽 로비를 향해 걸었다. 케이크는 한식당이나 연회장의 직원들에게 나누어질 것이다. 손님도 없는데 제과부에서는 자꾸만 케이크를 구웠다. 조금만 더 버텨 달라고, 방부제를 더 많이 뿌려가면서.

프런트에는 나뿐이다. 비수기의 호텔 프런트에 여럿의 직원이 필요할 리 없다. 가방을 뒤적여 피임약을 꺼냈다. 나의 생리주기는 일정치 않다. 짧게는 27일, 길게는 33일도 갔기 때문에 예정일을 짐작하기 어렵다. 그래서 나는 매월 둘째 주 화요일이 오기 사나흘 전부터 피임약을 먹었다. 불필요한 혈흔을 침대 시트에 묻히기 싫었으므로, 나는 날짜를 늦추려고 식은 커피와 함께 조그마한 알약을 삼켰다. 그 때문에 더더욱 생리주기는 계산하기 어려웠고 내 몸의 리듬은 알약을 따라갔다.

K가 빈 쟁반을 흔들며 걸어가기에 잠시 프런트를 보아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녀는 흔쾌히 내 자리에 앉았다. 나는 727호의 열쇠를 빼들고 프런트를 빠져나왔다. 쑥빛의 카펫이 깔린 7층 복도는 어둡고 칙칙하다. 엘리베이터 앞에는 오래 전부터 사용이 금지된 대형 재떨이가 놓여 있다. 또 재떨이의 존재를 부정하는 금연 표지판. 그 아래, 재떨이의 존재를 다시 상기시키는 카펫의 담배 구멍들. 그저 재떨이를 떼어내 버리면 될 것을, 미련 많은 사람들은 모든 것을 그 자리에 가두어 놓았다.


나는 727호의 문을 열었다. 침대 세 개가 나란히 한 방향으로 누워 있다. 너무 많이 세탁해서 흰 시트의 가장자리는 닳아 있다. 파란 모포는 가슬가슬하다.

나는 가장 왼쪽의 침대를 벽으로 밀었다. 바퀴가 달려 있는 침대는 쉽게 굴러갔다. 나머지 두 침대는 빈틈없이 꼭 붙였다. 제법 널찍한 더블 침대로 보인다. 모포를 정리하고 베개도 다시 한 번 털어두었다. 주머니에서 마분지 조각을 꺼내어 몇 번 접은 후 침대의 바퀴 아래에 끼워 넣었다. 그래야 침대의 바퀴가 밀리지 않는다.

실제로 나는 침대 사이로 몇 번 발이 빠진 적이 있었다. 그 광경에 킥킥거리던 그의 얼굴이 떠올라 웃음이 났다.

묵직한 커튼을 젖히자 거짓말 같은 햇살이 묽은 먹물처럼 번져 들어왔다. 727호의 전망은 좋지 않다. 반대편의 룸에서는 호수가 보였고, 호수를 둘러싼 낮은 산들이 스위스 로젠 호텔을 다정하게 안고 있는 듯 보였다. 하지만 727호의 창밖으로는 물을 빼버린 지 오래인 수영장의 흉물스러운 파란 바닥이 그대로 드러나 보였고, 바짝 다가선 산등성이로는 철망이 삐죽삐죽했다.

다시 말하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가 727호를 택하는 것은 그가 묵은 곳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룸에서 그와 살을 섞었고, 참치 캔을 열어두고 함께 소주를 마셨다. 그리고 사랑에 빠졌다. 재떨이 주변의 담배 구멍처럼 727호에는 우리의 가쁜 숨이 증거처럼 남았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혹여 그가 바빠서 한 달쯤은 거를 수도 있다. 나는 그 정도를 충분히 이해할 만큼의 참을성은 가지고 있다. 그는 지난 두 달간 스위스 로젠 호텔 727호에 오지 못했다. 그 전에도 가끔 그런 일이 있었으므로 나는 그의 입장을 이해하려 애를 썼다. 아주 오지 않을 사람이 아니므로. 행여 유월의 둘째 주 화요일에 오지 못한다 해도, 다음 달에는 반드시 올 것이므로.

나는 티슈를 두 장 뽑아서 창틀의 묵은 먼지를 닦았다. 그는 내가 창틀에 올라앉는 것을 좋아했다. 나는 오늘 이 창틀에 어여쁘게 앉아 있을 거다. 그러면 그가 두 팔을 벌리고 나를 안아 내릴 것이다. 나는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아야지. 벗은 등에 차가운 시트가 벌써 닿는 것 같아 나는 오소소 몸을 떨었다.

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나는 화장대 위에 올려두었던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푸른 사과 한 자루


출처를 알 수 없는 경련이 몸을 흔들었다. 눈을 떴다.

어두웠지만, 불을 켜려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방바닥에서부터 올라온 냉기가 손가락처럼 집요하게 내 머리카락을 붙잡고 있었다. 머리를 방바닥에서 떼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나를 좀 놓아줘. 어지러웠고 몽롱했다. 나는 끝을 알 수 없는 잠에 빠져들었다, 깨어났다, 를 반복하고 있었다.

아무도 일으켜주지 않는 밤, 나는 열한 살이었다.

 

종종 있는 일이었다. 그들은 일 년에 한 번씩 행사를 치르듯 엄마와 내가 사는 집을 공격했다. 그들의 등장은 시작부터가 요란해서, 철대문을 우지끈 부수기라도 할 듯 발로 차고 들어왔다. 얌전히 자기들끼리 살다가 문득 생각난 사람들처럼 쳐들어와서는 엄마의 머리채를 흔들고, 텔레비전을 내동댕이치고, 장롱 문을 열어 이불을 끌어내리고서 발로 자근자근 밟았다. 그래서 엄마와 나는 깨지기 쉬운 물건은 아예 사지 않았다.

나는 그들을 도통 이해할 수 없었는데, 그런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애초부터 없었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몇 대 맞았다고 해서 눈물을 보인다거나 하지도 않았고, 자신의 머리통을 후려치는 본처의 뺨을 도리어 두 대 내려칠 만큼 당찼다.

“썩을 년. 딴살림 낸 것도 모자라서 이젠 돈까지 뜯어내? 내놔! 네년이 뜯어간 돈 다 내놔!”

엄마는 코웃음을 쳤다. 그도 그럴 것이, 엄마가 아빠로부터 돈을 뜯어내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열한 살 먹은 나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엄마는 돈을 잘 벌었다. 시내에 자리한 엄마의 ‘태백다방’은 늘 손님들로 가득했다. 엄마는 변두리 다방의 초라한 마담들과는 달랐다. 늘 발목까지 내려오는 폭 좁은 스커트를 입고 한 올 흐트러지지 않은 단발머리를 고수했다. 화장기도 없고 액세서리도 하지 않은 엄마의 얼굴은 도도했다. 다방은 지방 소도시의 꽤 점잖은 유지들로 왁시글했다.

돈 문제가 불거지는 것을 보니, 보나마나 아빠가 또 무슨 일인가 저지른 모양이었다. 엄마는 그런 일로 머리 아파지는 것이 싫어서 그들 앞에 돈 뭉치를 던져주곤 했다. 그러면 그들은 씩씩대면서 돈뭉치를 주워들고 빠져나갔다. 일종의 습관 같은 일이었다.

이번의 난장판이 평소와 달랐던 점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엉망이 된 집을 정리해 줄 외할머니가 두 달 전 돌아가셨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뒤늦게 아빠가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엄마는 곧 돈을 던져줄 참이었고 그 낌새를 알아챈 그들이 잠시 숨을 가다듬고 있을 때였다. 어이없게도 아빠는 사과 자루를 들고 있었다. 얼굴을 잊을 정도로 오랜만에 보는 아빠였다.

“사과가 얼마나 싼지 말이야……”

아빠는 그 다음 말을 하지 못했다.

방 안에 있던 모두가 넋 나간 얼굴을 하고 아빠를 바라보았다.

내가 학교에 가고 없는 틈을 타 엄마와 아빠는 가끔 만나는 모양이었다. 집에 돌아와 보면 내 몫의 손목시계나 인형 따위들이 책상 위에 올려져 있었다. 엄마를 구슬려 다만 얼마라도 받아가기 위해 나를 구실 삼았을 것이다. 나도 이제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아주 간혹 마주칠 때도 있었다. 그러면 아빠는 안주머니를 뒤적여 흰 봉투를 연 다음 만 원짜리 한 장을 내게 건넸다. 필시 엄마에게 받은 봉투였을 것이다.


아빠의 등장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저 돈이나 몇 푼 받아내려고 왔던 그들은 다시 우우, 고함을 치며 아빠와 엄마에게 동시에 달려들었다. 어디선가 축낸 돈을 어찌어찌 엄마를 통해 메꾸어 보고자 사과 자루까지 떠메고 왔을 아빠 역시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을 테다. 총각인 줄 알고 덜컥 아이를 가지고 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본처와 그의 가족들에게 시달려 온 엄마였다. 인이 박힐 만큼 박혔을 엄마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나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팽개쳐진 베개 하나를 집어 들고 구석에 가서 쪼그려 앉았다. 나를 좀 내버려 두라고, 나도 내가 원하는 사람과 한 번만 살아보자고 얼토당토 않는 떼를 쓰는 철없는 아빠를 바라보며. 달려드는 그들보다도 그런 말을 하는 아빠를 더 한심한 눈으로 쏘아보는 엄마를 바라보며.

자루에서 푸른 색 사과들이 굴러 나왔다. 몇 개는 그들의 발에 밟히고 몇 개는 이불 속에서 뭉개졌다. 몇 개는 나에게로 굴러왔다. 나는 푸른 색 사과를 만지작거렸다. 알이 작은 사과는 매끄러웠다. 한 입 베물면 새큼한 물이 입 안 가득 고일 것 같았다. 나는 목이 말랐다.

그들은 엄마와 아빠를 둘 다 끌고 나갔다. 어디로 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이불을 아무렇게나 당겨 덮고 잠이 들었다. 해거름에 눈을 떠 부엌을 뒤졌지만 마땅히 먹을 것이 없었다. 나는 사과를 베어 먹었다. 텔레비전은 망가져 있었다. 불을 켜지 않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엄마가 돌아와서 나를 깨울 것이었다.

엄마가 오기 전에 집안을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혼자 하기에는 벅찬 일이었다. 고리가 망가진 커튼을 제자리에 다시 걸기에 내 키가 너무 작았고, 겨울 이불은 무거워서 나 혼자 장롱 안에 다시 개켜 넣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상할 만큼 몸이 나른했다. 나는 계속 잠을 잤다. 그러다가 배가 고프면 사과를 깨물었다. 목에서 신물이 넘어올 것 같았다. 잠결에 전화벨 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했지만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무거운 몸으로 겨우 돌아누우면 얼굴에 젖은 사과 씨가 닿았다. 축축한 그것을 치우지 못한 채 나는 자꾸만 자꾸만 잠을 잤다. 며칠이 지난 것 같기도 했고 몇 시간 지나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사과만 먹으면서 몇 번이나 해가 지고 해가 떴다. 뱃속에서 사과가 뭉글뭉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내 안에서 누군가 긴 시간 동안 사과잼을 졸이고 있는 것일까.

나는 누운 채로 사과를 토해냈다. 베개가 젖었고 머리카락이 젖었다.

“나처럼 살게 하느니 너를 죽여버릴 거야.”

어두운 방 안에서 엄마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엄마는 울고 있었다.



열아홉 살, 적포도주


나는 엄마처럼 키가 크지 않았다. 열너댓 살을 지나면서부터 살이 오르고 내리고, 를 반복했을 뿐 나는 키 작은 여자애가 되었다.

수학 과외를 삼 년 연이어 받았지만 성적은 오르지 않았다. 나를 가르쳤던 대학생 오빠는 오렌지 주스를 마시며 내 옆으로 슬그머니 옮겨 앉았고 가끔 내 납작한 가슴에 손을 대려 했다. 오빠는 지갑 속에 여자 친구의 사진을 넣고 다녔다. 나에게 달리 마음을 먹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굳이 그 손을 밀어내지 않은 적이 몇 번 있었다. 한 달에 한 번씩 오빠는 엄마에게 꼬박꼬박 이십만 원을 받았고 나는 그저 그런 지방대학에 원서를 내서 합격을 했다.

도시의 몸피가 불어나면서 규모가 큰 레스토랑과 커피숍들도 많이 생겨났다. 엄마의 다방은 예전 같지는 않아도 여전히 잘 되는 편이었고, 나는 여고 졸업식이 다가올 무렵까지 태백다방 딸이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다. 친구들에게도 담임에게도, 새로 이사를 한 아파트 옆집 가족들에게도 엄마는 수입 상품점을 운영하는 여자였다.

어쩌면 내가 들키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사실 우리 엄마는 시내에서 다방을 해, 라고 시시콜콜 이야기를 할 만큼 가까이 지낸 이가 없었던 까닭일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이 나에게 지대한 관심을 표현할 만큼 나는 요란스러운 여자애가 아니었다. 있는 듯 없는 듯, 사람들은 내가 말을 꺼내면 아, 너 거기 있었구나, 하는 정도였던 것이다.

내가 목이 드러나도록 머리를 짧게 커트하거나 양 갈래로 핀을 꽂고 다니거나 어깨까지 머리를 늘어뜨리는 동안에도 엄마는 여전히 단발머리였고 화장을 하지 않았다. 때로 샤넬 라인의 흰 투피스를 입은 엄마는 고고해 보일 때도 있었다.

엄마는 한동안 자동차 카탈로그를 들여다보았다.

“이 소도시에서 자동차를 살 필요가 어디 있어? 주차비랑 기름값 생각하면 택시가 훨씬 나아. 사람들은 다 헛똑똑이라니까.”

늘 그렇게 말했던 엄마였다. 엄마는 자동차 회사의 영업사원과 몇 번 만났고 이천오백 씨씨 금모래색 자동차에 분명 마음을 빼앗긴 것 같았다.

얼마 후 이천오백 씨씨 금모래색 자동차를 타고 나온 사람은 삼일건설의 강 이사 아저씨였다. 엄마의 가게에서 몇 번 본 적이 있었고 그때마다 나는 공손히 인사를 하곤 했다. 아저씨는 종종 길에서 마주치면 호탕하게 웃어젖히며 만 원짜리 몇 장을 쥐여 주기도 했다. 내가 곧 입학할 대학이 있는 이웃도시의 백화점 앞에서 강 이사 아저씨는 환한 얼굴로 금모래색 자동차의 문을 열고 나왔다. 나와 엄마는 양손에 쇼핑백을 잔뜩 들고 있었다.

“다 컸어. 우리 희정이가 대학생이 된다 그거지? 오늘 내가 근사하게 한 턱 쏴야 하는데 무얼 먹을까?”

나는 뒷좌석에 앉아 아직 비닐도 뜯어내지 않은 반들반들한 가죽 시트에 눈을 박았다.

“희정이는 아무 거나 잘 먹어요.”

엄마가 대신 대답했다.

“네. 아무 거나.”

나도 덧붙였다. 쇼핑백 안에는 입학식 때 입을 짙은 핑크색 정장 한 벌과 검정색 핸드백이 들어있었다. 핑크색 정장 스커트는 조금 짧았다. 입학식 날까지 다리 살을 빼지 못하면 부츠를 신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호텔의 한식당에서 버섯전골을 먹었다. 꽉 끼는 유니폼을 입은 여직원이 국자를 들고 전골 냄비 안을 휘휘 저었다.

“조금만 일찍 오셨으면 부채춤 공연을 보실 수 있었을 텐데요.”

여직원이 말했다.

한식당 안에는 우리뿐이었다. 조금 전에 끝났다는 부채춤 공연을 본 손님들이 있기나 한 것일까. 기껏해야 한두 테이블 정도 앉은 손님들을 두고 하르르 하르르 부채를 휘날렸을 무용수들이 떠올라 나는 인상을 썼다. 부쳐놓은 지 오래된 것이 틀림없는 호박전, 굴전 따위들이 테이블 위에서 식어갔다. 강 이사 아저씨는 소주를 마셨고 엄마는 인삼주 한 잔을 들이키고는 인상을 썼다. 나는 지나치게 매콤한 해파리 냉채만 날름날름 집어먹었다. 입 안이 아려왔다.


강 이사 아저씨가 엄마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트윈 룸이었다.

창가에 놓인 테이블에 적포도주와 과일 바구니가 놓여졌다. 룸서비스 직원이 허리를 굽혀 인사한 후 방을 나갔고, 나는 강 이사 아저씨가 다른 방을 따로 예약을 했는지 아니면 집이 있는 도시로 돌아갈 것인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엄마는 긴 다리를 포개고 앉아 과일을 깎았다. 붉은 사과 한 알과 오렌지, 포도 등이 정갈하게 접시 위에 늘어졌다. 엄마는 과일을 예쁘게 깎을 줄 알았다. 하기는, 요구르트 한 병도 접시에 받쳐서 내미는 사람이었으니까. 노란 사과 속살을 보자 구역질이 치밀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엄마는 포크로 사과를 찍어 강 이사 아저씨와 내게 건넸다. 고개를 저었지만 엄마는 계속 사과를 코앞에 내밀었다.

“달아. 먹어봐.”

“나는 사과 싫어해. 안 먹어.”

엄마는 뜬금없다는 표정이다.

“너 사과 예전엔 좋아했잖아.”

나야말로 뜬금없다. 열한 살 이후로 내가 사과를 먹지 않았다는 것조차 엄마는 모르고 있었다. 나는 반으로 가른 아보카도를 스푼으로 떠먹었다. 오래되어 물러진 아보카도는 맛이 없었다.

룸에 들어서고 난 후부터 강 이사 아저씨는 말수가 줄어들었다. 엄마는 남강초밥 사장님이 내놓은 변두리의 건물이 시세보다 싸다느니, 개업한 지 이십 년이 넘은 런던제과가 드디어 폐업을 할 예정이라느니 종알종알 떠들었다. 강 이사 아저씨는 엄마의 말에 응응, 무심한 대꾸를 하고 있었다.

나는 처음 마셔보는 적포도주를 홀짝홀짝 들이켰다. 목울대를 따끈하게 적시는 야릇한 느낌이, 상한 포도주스 맛 같기도 했다.

강 이사 아저씨가 넥타이를 풀고 셔츠 단추를 두 개 열었다. 붉게 달아오른 목이 드러났다. 이제 그만 아저씨가 가주었으면. 엄마가 샤워를 하고 나온 후에도 아저씨는 도통 일어날 낌새를 보이지 않았다. 나는 달리 할 일이 없어서 텔레비전을 보며 적포도주를 마셨다. 붉은 포도주가 방울방울 혈관을 따라 마냥 흘러갔다.

엄마와 나는 한 침대에 누웠다. 옆 침대에 누운 강 이사 아저씨의 코 고는 소리가 낮게 들려왔다. 속이 좋지 않았다. 미처 다 삼키지 못한 포도주가 목 근처에서 찰랑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몸을 뒤척일 때마다 시큼한 포도주가 혀 밑을 적셨다. 화장실에 다녀오고 싶었지만 어두운 방을 헤집고 걷다가는 두 사람의 잠을 보나마나 깨울 것 같아서 꾹 눌러 참았다.

빨리 아침이 되었으면. 내 방에 돌아가서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양치질을 하고, 차가운 물을 두 컵 쯤 마시면 출렁거리는 뱃속이 진정이 될 텐데. 그런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들었나 보았다.


엄마가 포스스 일어나고 있었다. 엄마는 슬립 차림이었다. 매끄럽게 엄마는 이불을 빠져나갔다. 강 이사 아저씨가 이불을 들추고 기다리고 있었다.

잊고 있던 속이 보깨어 왔다. 바삭거리며 시트가 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낯선 풍경. 어이없게도 눈은 빠르게 어둠에 익숙해져서 나는 이불을 코끝까지 덮어쓰고도 두 사람을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엄마의 슬립은 침대 밑으로 떨어져 내렸고, 강 이사 아저씨가 브래지어를 제대로 풀지 못했는지 엄마는 일어나 앉아 손수 브래지어를 떨쳐냈다.

나는 엄마와 목욕탕에 가본 적이 없었다. 다 큰 계집애가 사람들 앞에서 옷을 벗다니. 그래서 엄마는 집 욕조에 물을 받아 내 등을 밀어주었다. 엄마가 누군가의 앞에서 옷을 벗는 것을 본 건 처음이었다. 엄마의 신음인지 강 이사 아저씨의 신음인지 구별할 수 없는 약한 소리들이 들렸다가 곧 사라졌다.

강 이사 아저씨가 엄마의 몸 위에서 버둥거리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고 싶었지만 입 안까지 포도주가 올라왔다.

“돌아누워 봐.”

강 이사 아저씨의 잠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머리를 털었다. 끝내 입술 밖으로 포도주가 흘러나왔다. 울컥울컥. 내 위가 걸레처럼 비틀어지고 있었다. 시큼한 냄새가 베게에 묻어났다. 손에 맥이 풀리면서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포도주가 핏물처럼 흘러 내 귀를 막아주었으면. 흐르고 흘러 내 귀를 출렁출렁 채워주었으면. 귀 대신 출렁거리는 것은 두 사람의 실루엣이었다. 신기하게도 눈을 감은 나에게 두 사람은 계속 보였다. 강 이사 아저씨의 살진 허벅지가 엄마의 가는 다리를 짓누르는 것도 보였고, 강 이사 아저씨의 검은 등판을 쥐어짜는 엄마의 손가락도 보였다. 강 이사 아저씨의 무거운 뱃살에 짓눌려 엄마의 허리가 꺼지지나 않을는지 걱정이 되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아침은 오지 않았다. 겨울 해는 더디었다.



알레르기


내가 처음 그에게 사과 알레르기가 있다고 말했을 때, 그는 푸시시, 바람 새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나는 좀 난감했다.

“그런 게 어딨어? 그냥 사과를 좋아하지 않는 거겠지.”

“어쨌거나, 나는 사과를 먹지 않아요.”

“언제부터 사과를 먹지 않은 거야? 오래 됐어?”

나는 끄덕였다.

“사과도 먹지 않지만 적포도주도 마시지 않아요. 똑같은 알레르기가 있거든요.”

“둘 다 내가 좋아하는 건데, 아쉽군.”

그가 나를 쳐다보았다.

“다시 한 번 먹어봐. 처음엔 좀 힘겨울지 몰라도 금방 괜찮아질 걸. 사과라는 거, 별 거 아니거든. 적포도주도 마찬가지고. 사람들이 누구나 아무렇지도 않게 먹는 거야. 원래 시간은 사람 몸을 충분히 변하게 하는 거니까, 너도 모르는 사이에 네 몸은 이미 변해 있을는지도 모르잖아.”

나는 그의 충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과를 먹지 않는다고 해서 내 삶이 잘못된다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고, 또 적포도주를 다시 먹게 된다 할지라도 그것이 내 삶의 전환점이 될 리는 없으므로. 나는 그의 말을 흘렸다.


엄마의 가게는, 예상치 않은 시점에서부터 부서지고 있었다.

내가 대학 졸업반이 되자 엄마는 태백다방을 팔고 새로운 가게를 내겠다고 했다. 아무래도 하나뿐인 딸을 시집보낼 때가 되었는데, 다방을 한다는 것은 보기 좋은 일이 아니라는 거였다.

“그래서? 어떤 가게를 할 건데?”

“커피숍. 젊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커피숍 말야. 인테리어도 좀 고급스럽게 하고.”

나는 발끈했지만 토를 달지는 않았다. 엄마가 말을 꺼냈다는 건 이미 진행될 만큼 진행이 되었다는 것을 뜻했으니까. 나로서는 엄마가 그저 엄마 인생이나 잘 살아 주었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분위기 고상한 커피숍을 한다 해서 내가 멀쩡하고 화목한 집안의 고명딸이 될 리는 없었다.

엄마는 권리금을 제법 챙겨 받고서 태백다방을 넘겼다. 그리고는 미용실과 주점들이 가득한 거리에 오십 평짜리 커피숍 ‘꿈의 궁전’을 열었다. 인테리어 업자는 엄마의 다방을 드나들던 손님이기도 했는데, 그것부터가 문제였다. 그는 이미 유행이 지나가기 시작한 체크무늬 소파를 들여놓고 테이블마다 불투명한 유리로 칸을 질렀다. 그건 명백한 다방 스타일이었다.

엄마는 여전히 진한 커피를 끓여냈다. 태백다방의 손님들은 엄마를 잊지 못해 꿈의 궁전을 들락거렸고 메뉴판에도 없는 생강차와 쌍화차를 주문했다. 젊은 손님들은, 머리가 벗겨진 중년의 남자들이 떡하니 가운뎃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꿈의 궁전을 다시는 찾지 않았다. 게다가 오지랖 넓은 중년의 남자들은 젊은 여자 손님들이 담배라도 한 대 물라치면 대놓고 혀를 끌끌 찼다.

엄마는 뒤늦게야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루에 몇 안 되는 젊은 손님들을 잡으려고, 그나마 잊지 않고 찾아오는 옛 손님들을 몰아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태백다방을 통째로 갖다 부은 엄마의 꿈의 궁전은 이도저도 아닌 퇴락한 커피숍으로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누구도 찾아오지 않는 빈 궁전.

통장의 잔고가 비어가고 있다고는 해도 엄마는 여전히 오만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엄마는 언제나 조강지처처럼 굴었다. 강 이사 아저씨의 삼일건설이 잠시 휘청일 때에 엄마는 이리저리 인맥을 대어 대출을 도와주고 아저씨의 건강을 챙긴답시고 자라를 고아왔으며, 용하다는 점쟁이를 찾아가 부적을 받아오기도 했다. 그 와중에 엄마는 강 이사 아저씨의 부인에 의해 간통죄로 입건이 되었다.

부랴부랴 경찰서로 달려가 보니 가관이었다. 엄마는 아저씨의 부인을 앞에 놓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그래, 내가 미친년이지. 다 자빠져가는 강 이사 회사 한 번 살려보겠다고 아등바등한 내가 미친년이야. 그런다고 그 돈이 나한테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정아 엄마가 이젠 직접 뛰어댕겨 봐. 나는 손 뗄래. 거기 형사 아저씨. 전화 한 통 쓸게요. 은행 지점장한테 전화해서 삼일건설 대출건 다 없었던 걸로 해달라고 할래. 나도 이러고는 너무 억울해. 안 그래, 강 이사?”

이미 한 바탕 몸싸움이 벌어지고 난 다음인가 보았다. 엄마의 블라우스 단추들은 모조리 뜯겨나갔고 새치가 돋기 시작한 엄마의 머리칼은 엉망으로 엉켜 있었다. 그런 꼴로 떠들고 있다니. 나는 엄마를 말리고 싶었다. 이제 그만 가요. 집에 가서 좀 쉬란 말이야. 나는 아무 말 못하고 서 있기만 했다. 강 이사 아저씨는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두 사람이 이혼을 하든 말든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야. 이봐요, 정아 엄마. 참 답답한 사람이네. 나를 간통으로 처넣는 건 그래, 좋다 그래. 그래도 인생을 다 바친 삼일건설인데 일단 살려는 놔야 안 돼? 그래야 위자료라도 받을 거 아니야? 정아 엄마도 참 딱한 사람이다.”

어이없게도 엄마가 이겼다. 정아 엄마라는 여자는 고소를 취하했고 엄마도 강 이사 아저씨도 경찰서를 나올 수 있었다. 강 이사 아저씨는 택시를 불러 엄마와 나를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집 앞에서 엄마에게 몇 번이나 머리를 조아렸다. 누가 본처인지 첩실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노릇이었다.

“그만 가 봐요. 지금은 내 마음이 너무 안 좋아서 아무 소리도 하고 싶지 않아. 나중에 가게로 한 번 나오던가.”

엄마는 남편의 바람기에 이골이 난 본처처럼 너그럽고 오만하게 아저씨를 대하고 있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엄마는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린 뒤 마사지를 꼼꼼하게 했다. 엄마의 오기가 문득 안쓰러웠다. 나는 엄마의 저 독기가 어느 날 갑자기 통장의 잔고처럼 바스락 부서질까봐 겁을 내고 있었다.

엄마가 방으로 들어간 후 나는 거실에 앉아 규칙을 제대로 알 수 없는 배구 경기를 지켜보았다. 선수들이 손바닥으로 공을 바닥에 세차게 내리꽂을 때마다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도무지 받아칠 수 없는 속도, 나는 그것에 적응할 수가 없었다. 텔레비전을 끄려고 할 때쯤 끄어억, 엄마의 울음소리가 방에서 새어나왔다.

나는 볼륨을 높였다. 또 속이 뒤틀려왔다.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보아야 하는 것일까. 시도 때도 없이 이어지는 알레르기 때문에 머리까지 쪼개질 것 같았다. 이건 틀림없는 알레르기다. 나는 몸을 벅벅 긁었다.



유월의 둘째 주 수요일


그는 아직 체크인을 하지 않았다. 교대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엄마는 낮부터 계속 전화를 걸어왔다. 당장 호텔을 그만두지 않으면 윗사람에게 손을 대어 해고를 시켜버리겠다고 협박까지 했다. 헛웃음이 풀풀 날 지경이었다. 아직도 엄마에게 손닿을 수 있는 선이 있기나 한 것일까.

꿈의 궁전은 지난 십여 년간 엄마의 모든 잔고를 바닥냈다. 이제 그만둘 때도 되었다 싶을 때쯤 엄마는 다시 한 번 모든 것을 걸고 대대적인 수리를 했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소도시에 불어  닥친 불황은 비단 꿈의 궁전 뿐 아니라 그 동네 전체를 박살내고 있었다.

이제는 나갈래야 나갈 수 없었다. 들어올 때 치렀던 권리금과 시설비가 아까워 전전긍긍하던 엄마는, 이제 다른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자리에 죽치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젊은 년이 하면 달라질 수 있어. 나는 이렇게는 못 끝내.”

나더러 호텔을 그만두고 소도시로 내려와 꿈의 궁전을 맡아 해보라는 거였다. 벌써 두 달째 엄마는 끈질기게 나를 조르고 있었다.

나는 알레르기를 일으킬 만한 상황과 맞닥뜨리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되도록 사과는 바라보지 않았고 적포도주를 마실 만한 자리에는 가지 않았다. 그래서 과일가게를 무심히 지나쳤고 친구들과의 모임에도 잘 참석하지 않았다. 나는 사랑을 지키려고 큰 소리로 싸우지 않았고, 부도덕한 연애에 빠질세라 몸을 사렸다.

한 번만 더 말을 아끼면 내가 이기는 것이라고, 나는 나를 위로했다. 헤픈 말은 미련을 만들고, 미련은 슬픔을 만들기 마련이고, 그렇게 슬퍼지는 사람이 지는 거니까. 나는 엄마처럼 혼자 슬퍼지는 사람이 되기 싫었다.

그런데 나더러 그곳으로 돌아오라니. 알레르기는 짐작치 못한 곳에서 시작되는 법이다. 병원균은 도처에 숨어 있었다.

“이젠 좀 쉬어. 피곤하지도 않아?”

나는 진심으로 엄마가 이제 그만 쉴 수 있기를 바랐다. 부닥쳐오는 것들에 끊임없이 대꾸하고 반응하고 끼어들고. 그러면서 엄마는 늙어갔다. 그래서 나는 늘 뒤편에 섰다. 대꾸하지 않았고 반응하지 않았으며 끼어들지 않았다. 보여주는 것만 보고, 들려주는 것만 들었다.

시간은 조용히 흘러갔으며 나는 서른두 살이 되었다. 고요하고 메마른 청춘이었지만 평화로웠다. 사람들은 나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는 아직 오지 않았다. 어쩌면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지난달처럼. 또 그 전달처럼. 하지만 그에게 묻지 않는다. 왜 나에게 오지 않나요. 기다렸다는 것을 들키는 순간 내 몸에는 지독한 알레르기가 시작될 것이다. 왜 대답을 하지 않는 거지. 왜 나를 기다리게 하는 거지. 왜 내 말을 듣지 않는 거지. 나는 입가로 흘러내리는 구토물로 더럽혀질 것이고, 온몸 구석구석 푸른 멍이 들 것이다.


그는 유월의 둘째 주 화요일에 오지 않았다. 대신 수요일, 그가 프런트에 다가섰다. 나는 그가 늦게 오리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기에 어젯밤 피임약을 먹지 않았다. 생리가 시작될 지도 모르는데.

그의 옆에는 여자가 서 있었다. 키가 내 허리까지도 오지 않을 것 같은 여자아이도 있었다. 나는 727호의 열쇠를 조용히 내밀었다.

“트윈 룸으로 줘요.”

트윈 룸이라니. 그를 위한 727호는 아직 비어 있다. 내가 마분지 조각을 받쳐 넣어서 침대가 밀리지 않도록 해둔 727호는 그대로다.

“727호는 트윈 룸이 아닌데요.”

그의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이마가 붉어지는 것도 같았다.

“트윈 룸으로 달라구요, 아가씨. 우리는 아이가 있다구.”

내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트윈 룸의 침대는 너무 좁아요. 제가 727호의 침대 두 개를 이미 붙여놨으니까……”

“이봐요, 아가씨.”

그의 목소리가 차다. 그렇듯 서늘한 그의 목소리는 처음이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다른 층의 다른 방 열쇠를 내밀었다. 꾹 다문 입술을 한 그가 열쇠를 나꿔채고는 사라졌다. 정수리에 차가운 얼음물이라도 부은 양 얼얼했다.

나는 늘 얌전한 애인이 아니었던가. 따지지 않고 큰 소리 내지 않고 귀찮게 하지 않는 귀여운 애인. 그런데 왜 그가 저렇게 차가워졌을까. 그를 붙잡아 세운 다음 말을 하고 싶었다. 당신을 화나게 하려던 것이 아니었어요.

나는 그의 기분을 풀어주고 싶었다. 오직, 여전히 착하고 다소곳한 애인임을 상기시켜 주고 싶어서 쟁반에 적포도주 한 병과 사과 바구니를 담았다. 그는 분명 예전에, 사과와 적포도주를 좋아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테이블에 정갈하게 깔아줄 흰 식탁보 한 장도 챙겼다. 나는 그의 오해를 풀어주고 싶었다.

801호. 그가 머물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방이다. 벨을 누르자 여자가 문을 열었다.

“시킨 적 없는데요.”

의아해 하는 여자에게 공손히 인사를 한 후 나는 룸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이와 함께 침대를 구르던 그의 눈빛이 일순 사나워졌다. 나는 테이블 위에 식탁보를 탁탁 털어 깐 다음, 적포도주와 사과 바구니를 올렸다.

“서비스예요. 맛있게 드세요. 그리고 룸이 불편하시다면 언제건 727호로 바꾸어 드릴게요.”

조용히 방을 나왔다. 후련했다. 그들은 가족끼리의 오붓한 만찬을 즐길 것이다. 나는 끼어들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오래오래 그의 곁에 머물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마음을 다칠 일이 없을 것이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순진한 년이라고 이뻐해 줬더니 이런 식으로 골탕을 먹여? 집요한 것 같으니라고.”

그는 내가 변명도 하기 전에 전화를 끊었다. 잠시 후 가방을 챙긴 그의 가족들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는 프런트로 다가와 801호의 열쇠를 소리나게 탕 내려놓았다.

“좋은 말로 할 때 카드 환불조치 해놔.”

그는 사라졌다.



사과와 적포도주가 있는 테이블


그의 가족이 떠난 룸에는 적포도주 병과 사과 바구니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나는 가만히 의자를 당겨 앉았다. 푸른 알과 붉은 알의 사과들이 수북이 눈앞에 놓였다. 잘 갈아놓은 은색의 과도가 가지런하게 반짝였다.

나는 적포도주 병을 들었다. 코르크 마개가 뻥 하고 열리면서 긴 세월이 묻은 포도주 방울이 흰 식탁보에 점점이 튀었다. 얼핏 아빠와 강 이사 아저씨의 얼굴이 스쳤고 엄마의 새치머리가 떠올랐다. 여전히 적포도주에서는 상한 포도주스 향기가 나는 듯도 했다.

나는 은색 과도를 들어 사과를 깎았다. 푸른 사과 한 알. 붉은 사과도 한 알. 접시 위에 노란 과육이 달처럼 놓였다. 포도주도 한 잔 따랐다. 포도주 흐르는 소리는 긴 밤, 엄마의 울음소리 같기도 했다.

그의 말처럼 알레르기 따위는 애초부터 없었는지도 몰랐다. 성장통처럼 시간이 흐르면 사라져 버릴, 증거 없는 통증. 그런 통과의례. 바구니의 사과를 다 삼키고 적포도주를 한 병 모두 마시고 나면 나는 어른이 될 지도 모른다. 나는 사과를 베어 먹었다. 노란 물이 입가로 흘렀다. 그리고 적포도주 한 잔. 나를 위해 그가 준비한 만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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