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비(楊貴妃), 배꽃에 지다

귀비(楊貴妃), 배꽃에 지다



이병천 




서기 756년, 당(唐) 현종의 치세로 천보(天寶) 15년에 들어선 초여름, 섬서성 마외파(馬嵬坡) 지역에는 새벽부터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무릎 관절의 통증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난 황제는 등을 돌린 채 잠을 자고 있던 양귀비의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밀어넣었다. 그러자 잘 익은 배의 향기가 황제의 후각까지 일깨웠다. 하루가 시작되면서 처음 맡는 냄새라서 황제는 그 달콤한 향을 기억해두기로 했다. 하지만 그 냄새는 어쩌면 귀비가 즐겨먹는 남방 과일 여지(?枝)의 향인지도 몰랐다. 아무리 황가의 피난길이라고는 하더라도 실제 만 리가 넘는 머나먼 곳의 여지까지 궁성 나인들이 다 챙겨왔을 리 만무하겠지만.

 

 

“쯔읍!”

피난길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황제는 입맛을 다셨다. 말이 좋아 몽진(蒙塵)이라, 지엄한 성상께서 세상의 하찮은 티끌을 뒤집어쓴 채 잠시 피한다는 뜻이지만 비루하고 역한 냄새 풍기는 말발굽의 먼지, 그 소도둑놈 같은 뚱보 안록산(安祿山)의 모반은 참으로 죽을 맛이었다. 장안성을 버리고 이미 백 리를 쫓겨 오지 않았던가? 비록 궁궐 안팎의 침상 보료가 서로 다르지 않은 항주의 비단이라고는 하더라도 그 감촉이 결코 같을 수는 없었다. 늙어서 삭신이 온전치 못한 황제에게 어찌 궁성의 비단 보료가 사무치지 않으랴. 곁에 누운 귀비의 살결이 변함없는 게 그나마 위안이었다. 서른여덟, 그녀의 몸은 아직도 불씨를 뒤집기만 해도 활활 불이 일곤 하는 숯불이었다. 

“마마, 호위대장이 알현을 청하나이다.”

밖에서 환관 고력사(高力士)가 아뢰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귀비는 그때서야 수달 같은 검은 눈을 떴다.

“듣지 마소서.”

자기 생애의 마지막 새벽을 예감한 것이었을까? 귀비가 돌아누우며 침을 삼키더니 꽈리 같은 붉은 제 젖꼭지를 황제의 입에 물려주었다. 황제가 그걸 받아 문 채 늙은 입을 오물거렸다.

“화급을 다투는 일이라고 하옵나이다. 마마!”

고력사의 전갈에 이어 마룻장을 내리찧는 듯한 두 번의 둔탁한 소리가 뒤를 이었다. 호위대장이 칼집 끝으로 바닥을 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버릇없고 고얀 일이었지만 그걸 탓할 힘이 황제에게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귀비가 모로 누운 채 자기 가슴 부위를 한껏 구부려 젖무덤을 더욱 부드럽고 동그랗게 몰아주었지만 황제는 거기서 입을 빼내고 문밖으로 몸소 걸어나왔다.

“무슨 일인가?”

간밤의 과도한 방사 탓인지 황제의 목소리는 비에 젖는 나뭇잎처럼 짜그락거렸다. 그렇지 않았더라도 그는 칠십 노인이었고, 궁궐 침상에 비하면 풍찬노숙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감기 기운이 몸에 이미 침입했을 수도 있었다. 저렇듯 흔들리는 음성에 기대어 나는 앞으로 얼마나 더 의지하고 매달려 살 수 있을까? 귀비는 문득 그런 생각에 몸서리치며 이불깃을 끌어당겼다. 황제의 위엄은 항상 목소리에 실리는 법이었다.

“병사들이 더 이상 어가를 끌지 않겠다고 버티고 있사옵니다.”

“뭐라고? 무엇이라고 했느냐?”

황제가 호위대장의 탱자가시 같은 거친 턱수염을 내려다보며 하문했다. 그 뒤로는 창검을 아무 방향으로나 버릇없이 꼬나 쥐고 있는 군사 놈들이 울타리를 치고 있었다. 황망하고 당황하여 마구 채찍질을 해온 터라 하나같이 피로에 찌들어 있었고 배고픔에 절어 있는 놈들이었다.

“안사(安史)의 난이 외척(外戚)인 양씨(楊氏) 일문의 전횡으로 말미암았으니, 여기서 그들을 모두 도륙하지 않으면 단 한발짝도 움직이지 않겠다고 하옵나이다.”

“저, 저런 능지할 놈들!”

“저들을 능지하고 어가는 누구에게 맡기시겠나이까?”

“……”

안록산과 사사명(史思明)의 얼굴이 다시 황제의 머리를 스쳤다. 올챙이 같은 안록산의 불룩한 배를 두고 황제 자신이 물었던 적이 있었다. 그대의 뱃속에는 도대체 무엇이 그토록 가득 채워져 있는 것인가? 그때 놈은 말했었다. 폐하에 대한 충성심이옵나이다. 그렇게 호언하던 놈이었다. 허나 놈의 감언이 그뿐만은 아니었다. 나이로는 부녀지간이 명백하건만 자기보다 스무 살 가까이 어린 양귀비를 어머니라고 불러오지 않았던가? 사사명만 해도 그랬다. 매사에 생각을 바르게 한다는 뜻으로 사사명이라는 분에 넘치는 이름을 하사한 것도 황제 자신이었다. 솔간(?干)이 본래 그 천한 놈의 이름이었다. 그런데 놈들이 서로 모의하고 반란을 일으켜 돼먹지 않게도 대연(大燕)이라는 국호를 내건 것이다.

“너희는 이미 누군가를 참수하지 않았느냐?”

“양국충(楊國忠)의 집사 하나를 베어 폐하의 충성스런 칼날에 피를 먹였나이다.”

안사, 그 두 놈이 역모의 핑계로 삼은 것도 사실은 양국충이었다. 국충은 귀비의 6촌 오빠로 상국을 역임하였는데 권세만큼은 아직도 상국 이상이라는 사실을 황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병사들의 칼끝이 국충의 목울대 가까이를 지나 벌써 귀비의 턱밑까지도 이르러 있는 셈이었다. 황제는 까마득한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는 아찔한 심정으로 등 뒤쪽의 침상을 돌아보았다. 귀비는 자리에서 일어나 미동조차 없이 멍하니 앉아 있었다.

“굳이 베어야…… 하느냐?”

황제는 고력사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라면 이 배배 꼬인 난관의 매듭을 풀어낼 비책을 찾아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젊고 명민하던 고력사도 이제 나이가 들 대로 들었지만 아직도 꾀 많고 노회한 너구리였다.

“마마!……. 굶주린 창검의 날이 미친 소처럼 분별없이 날뛰기 전에…….”

고력사가 그렇게 진언했다. 그는 이미 끝났다고 말하는 듯했다. 아니, 이쯤에서 끝내야 하며 그 일을 끝내야 할 사람이 다름 아닌 황제 자신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가 그렇다면 분명 그럴 것이다. 황제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고력사를 다시 쳐다보았다. 거울을 통해 자기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처럼.

“뜻대로…… 하라.”

황제의 목소리가 다시금 빗줄기에 몸을 맡긴 댓잎처럼 심히 흔들렸다. 가랑비는 마외파 일대의 누런 흙을 다 적시고 있었다. 이런 비가 순식간에 황하를 벌겋게 뒤엎곤 했다. 병사들의 요구가, 더는 황하의 강둑에 이르지 못하는 하찮고 시름없는 빗줄기마냥, 거기서 그치기를 황제는 간절히 염원했다. 양국충에서 그치기를…….

호위대 군사들은 변방의 같잖은 초적 떼거지같이 깜냥에 함성까지 내지르며 우르르 몰려나갔다. 갑작스런 소나기에도 화들짝 놀라 뛰어오르는 메뚜기처럼 그 대오가 정연하지도 않을 뿐더러 그들 입성이며 꼬락서니가 영락없는 오합지졸이어서 황제는 속이 더욱 미식거리는 것을 느꼈다. 어쩌다가 저런 무리들로부터 협박을 받아야 하는 신세로 전락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마마!”

비척거리며 다가오는 황제를 귀비가 꿇어 엎드린 채로 맞이했다.

“귀비를 볼 낯이 내게 없도다.”

“아니옵니다. 신첩이 비록 풍진 자욱한 곳일망정 마마 슬하에 있음이 오늘처럼 자랑스러운 적이 없나이다. 또한 신첩이 천하가 일컫는 대로 그나마 이 미모를 지녔음이 오늘처럼 다행스러운 적이 없나이다.”

“……?”

“그 두 가지로 마마의 옥체를 지켜드릴 수 있겠기 때문이옵나이다. 그 두 가지가 비로소 저들 살기등등한 군사들의 분노를 잠재울 수 있겠기 때문이옵나이다.”

“그게 무슨 말인가?”

밭고랑을 타고 흘러가는 물줄기처럼 깊게 패인 황제의 주름살을 따라 한순간에 눈물이 주르륵 쏟아졌다. 늙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그렇게 눈물샘이 마르는 법이 없었다.

“저들의 칼날은, 틀림없이, 신첩의 피로 포만할 것이옵니다.”

귀비가 희미하게 웃었다. 늙은이의 눈에 그 미소는 초여름 달밤에 막 피어오르는 박꽃 따위가 범접할 수 없을 만큼 더 어여뻤다. 그러면서도 더 차고 시렸다. 황제는 온몸에 소름이 돋아나는 걸 느끼며 귀비를 덥석 안았다. 총명하기 이를 데 없는 여성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총명이 무서울 지경이었다.

“우리 지금처럼 연리지(連理枝)로 살자. 우리가 살아서 연리지 되자. 훗날에 비익조(比翼鳥) 따위가 되는 건 나는 싫다.”

살고 죽는 일이 오로지 귀비의 뜻에 달려 있기라도 한 것처럼 황제가 간청했다. 연리지와 비익조 전설은 언젠가 칠월 칠석에 황제가 속삭인 얘기였다. 남남이던 두 개의 서로 다른 줄기가 얽혀 하나로 사는 나무가 연리지였고 암수 각각의 두 눈과 날개가 모여 짝을 이루어야만 비로소 날 수 있다는 새가 비익조였다. 그런데 살아서는 연리지였고 죽어서 비익조 된다고 했다.

‘올 때처럼, 이렇게 돌아가야 하는가?’

귀비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궁궐에서만 지내온 22년의 세월이 머리를 스쳤다. 옥환(玉環)이라는 이름으로 살던 어린 시절의 일이 문득 저 세상의 일처럼 까마득하게 여겨졌다. 열일곱 살, 그 나이가 그 경계에 가로놓여 있었다.

첫 인연은 황제가 아니었다. 몇 번째인지도 세어보기 어려운 그의 왕자 가운데 한 사람인 수왕(壽王)의 비로 본래 입궁했으니까 말이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숙부에게 의탁해 지내던 날들, 그의 아들 양소(楊銷)와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건 그냥 한때의 철없는 불장난에 지나지 않았었다. 젊어서 술과 도박만을 일삼던 육촌 오빠 그 무뢰배도 훗날 자신 때문에 국충(國忠)이란 이름을 하사받고 승상의 지위까지 올랐으니 지금 저 호위 병사들의 손에 죽어도 여한은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주변에서 귀비 자신을 깨끗하게 단념하고 떠나간 사람은 오직 수왕뿐이었다. 비록 황제의 요구를 거역하지 못한 것뿐일지라도……. 귀비는 그 가엾은 남자를 기억했다.

그때, 자신이 왜 그랬을까? 황제가 시를 쓰고 곡을 붙였던 ‘예상우의곡(霓裳羽衣曲)’을 궁중 연회에서 부르게 하고 스스로 앞에 나가 춤을 춘 건 순전히 자신의 의지로 했던 일이었다. 곡은 쉬웠다. 무지개 치마에 날개옷을 입은 선녀를 노래한 것이었으니, 미모뿐만 아니라 음률 가무에 관한 한 남부끄러울 일이 없다고 자부해 왔던 자신을 위한 노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만, 황제가 보는 앞에서, 그것도 며느리로서 춤을 춘다는 게 조금 껄끄럽지 않을 수야 없었다. 그러나 이미 내친걸음이었고 스스로 결정한 일이었다. 춤을 추다 문득 돌아보니 남편의 얼굴은 이미 사색이 되어 있었다. 황제의 곡에 맞춰 며느리가 난데없이 일어나 춤을 추고 있으니 크나큰 무례라고 여기고 있음이 분명했다. 뜻하지 않은 불똥이 떨어질지 모른다고 걱정할 수도 있었다. 총애하던 무혜비(武惠妃)가 요절한 뒤로 황제는 상심해서 지낸 지 오래였다. 예상우의곡도 사실은 죽은 그녀를 위해 시를 짓고 작곡을 한 것이었다. 이제 그 노래가 자신을 위한 노래가 되어야 했다. 남편이야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소심한 사람 같으니!…… 그녀는 물이 오른 버드나무 가지처럼 더 요염하게 황제 앞에서 몸을 흔들었다.

예상대로 그 얼마 뒤에 황제의 심부름꾼은 왔다. 그때도 환관 고력사였다. 몸종 두 년이 다가와서 그날 이후 벌이던 수작으로 봐서는 환관에게 매수된 게 분명했지만 사실은 그러고 자시고 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먼저 유혹을 했고 황제가 받아들이지 않았던가!…… 절차가 문제일 뿐이었다.

“마마, 양국충의 일문이 이제 막 참수되어 역관에 효수되었나이다.”

꿈결인 듯, 막사 밖에서 고력사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생애의 영화는 길었지만 죽음은 짧고 순식간이었다. 목이 잘리던 당사자들에게도 그 영화는 길게 느껴졌을까? 귀비는 그 생각에 몸서리쳤다.

밖에서는 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무엇인가 거대하고도 두꺼운 가죽 천막이 잠시 천지사방을 뒤덮어버린 듯했다. 하지만 이내 가죽을 찢어내는 날카로운 굉음이 옆구리 어딘가에서 터지고 말 것이라는 두려움으로 황제는 흐느끼는 귀비의 어깨를 더듬더듬 매만졌다. 양국충과 그의 처, 그리고 피난길을 함께 해 온 귀비의

 

일지농염노응향(一枝濃艶露凝香) 운우무산왕단장(雲雨巫山枉斷腸)

차문한궁수득사(借問漢宮誰得似) 가련비연의신장(可憐飛燕倚新粧)


이슬 머금은 저 농염한 한 떨기 모란꽃이여. 비구름 속 무산녀(巫山女)조차 창자가 끊기겠네.

미인 많다던 한나라 누구와 견줄 수 있을까? 새로 단장한 조비연(趙飛燕)이라면 혹시 모르지. 


이백(李白)이 궁중에 초대되어 처음 귀비를 보고 대취한 채 즉흥으로 썼던 노랫말 ‘청평조사(淸平調詞)’ 3장 중에 두 번째 장이 떠올랐다. 황제는 그때 자신이 쓰던 벼루와 붓, 그리고 잘 익은 여아홍주(女兒紅酒) 한 동이를 특별히 하사했었다. 자신이 맨 처음 귀비를 보았던 첫인상도 화중지왕(花中之王), 바로 그 모란이었으며 도대체 귀비가 모란인지 아니면 모란이 귀비인지 분간할 수 없었던 기억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때 귀비는 이백을 무단히 트집 잡아 기어코 장안성 밖으로 추방해버렸었다. 자신을 하필 비연에 비유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한나라 성제(成帝)의 총애를 받다가 나중에는 길거리에서 굶주려 죽었다는…….

시를 쓰던 이가 모란에 비유했지만 어떤 꽃들은 귀비와 견주어지기는커녕 그녀 앞에 서는 것조차 수줍어한다고 했다. 수화(羞花)라는, 전에 없던 고사가 그래서 새로 생겨났다. 귀비가 어떤 꽃인가에 손을 대자 그만 부끄러워져서 한순간 꽃잎을 말아올리고 말더라는 궁녀들의 수군거림은 궁궐 전체에 늘 바람처럼 불었다. 황제도, 그리고 귀비 자신도 그 얘기가 반복될 때면 귀를 돌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즐기곤 했다.

아들과 며느리가 이미 몇 년을 살았든 그건 상관이 없었다. 왕자의 침실에 놓인 모란 화분은 얼마든지 황제의 처소로 옮겨올 수가 있는 것이다. 치국의 구실은 천명이었으니 인륜 따위를 앞서야 했다. 그런 데다가 마음으로 한 점 거리낄 것도 없는 게 어쩐 일인지 아들 내외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그건 경우에 따라 역모일 수도 있었다. 황제의 기름진 땅을 경작하지 않는 게 역모가 아니고 무엇이랴? 다만 개구리 떼처럼 왈가왈부 떠들어대는 중신들의 반대가 더러 낯 뜨겁고 귀찮을 뿐이었다.

허나 아무리 자신이 황제라고 한들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쓸 수는 없었고, 아무리 급하다고 한들 콩마당에서 간수 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그 성가신 문제는 환관 고력사가 또 꾀를 내어 풀어주었다. 부친의 후궁 가운데 하나였던 측천무후를 자신의 비로 취한 당 태종의 고사에서 방법을 찾았는데, 우선 귀비가 화산(華山)으로 가서 도사(道士)의 길을 걷도록 조치했던 것이다. 도사는 세상의 명리와 관계에서 초월해야만 했다. 그게 출가였다. 그렇게만 된다면 귀비는 다시 환생하여 전생의 인연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몸도 물론 새 몸이 될 터였다. 고력사는 한 술 더 떠서 귀비에게 도호 하나를 내리도록 자신에게 진언했었다. 태진(太眞)이라는 이름은 그때 주어졌다. 귀비를 위해 자신이 새로 지어주었던 궁궐 태진궁도 그 이름에서 유래했다.

“태진아, 태진아!”

황제가 귀비의 귓불에 입을 대고 옛 도호를 불렀다. 그녀가 허울뿐인 도사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황제의 품에 처음 안길 무렵, 황제가 늘 즐겨 부르던 이름이었다. 그 음성에서는 손으로 헛되이 바람이라도 움켜잡으려는 사람의 그것처럼 절절하고 안타까운 애원이 묻어나곤 했던가? 확실히 황제는 그 무렵에 그랬다. 아들 수왕, 한때 그녀의 지아비였던 왕자에게 고심하며 쓴 편지만 해도 그랬다. 가로되, 효라 하는 것은 부모의 뜻에 따르는 것, 부모가 하자는 대로 하는 게 효의 시작이니라. 황제는 그렇게 써 보냈었다. 그리고는 서둘러 위씨(韋氏) 성을 가진 여인과 수왕이 혼사를 치르도록 주선하기도 했다.

귀비는 그때의 일들을 떠올리며 가만히 숨을 죽였다. 막사 밖은 여전히 고요했다. 그 적막은 턱 밑에 겨누어진 수천수만의 기치창검보다 더 날카로웠다. 이 뜻하지 않았던 돌풍이 그대로 사라졌기를, 궁중의 일들이라면 잘리거나 부러지거나 베어지거나 끊어지거나 쫓겨나거나 가라앉거나 없어지거나 상관할 것도 없이 순식간에 매듭이 지어지곤 하는 것처럼 이번 사태도 그대로 끝났기를, 귀비는 잠시 염원했다. 황제의 일이 왜 이리도 더딘가!

궁궐의 높은 처마 끝에서 낙숫물이 떨어지듯, 황제가 불쑥 떨어뜨린 눈물 한 방울이 귀비의 목덜미에 아프게 닿았다. 황제의 눈물은 뜨겁지도 그렇다고 차지도 않았다. 문득 장안성 밖 여산 남쪽 자락에 위치한 화청궁의 뜨거운 온천물이 떠올랐다. 이제 누가 그곳 여산이 뜨겁게 뿜어내는 젖줄기에 온몸을 담그게 될까? 귀비가 황제의 품에서 슬그머니 빠져나와 침상 주위를 하릴없이 서성거렸다. 막사 한쪽 탁자에 놓여진 그녀 자신의 화장품들이 눈에 띄었다. 귀비는 그쪽으로 다가가 옥홍고(玉紅膏) 합의 뚜껑을 열어 냄새를 맡아보았다. 사향과 용뇌(龍腦), 그리고 살구향이 간밤의 꿈길처럼 멀고 아득했다. 그걸 바를 마음은 처음부터 없었다. 화청궁으로 갈 수 있다면……

희구나. 비의 살결은 참으로 희구나!

황제는 목욕을 하다 말고 감탄하곤 했었다. 그런 다음에는 꼭 어린애처럼 업어달라고 졸랐었다. 물속에서 황제를 업으면 허깨비처럼 가벼웠다. 그 가벼움이, 영화의 허망임을 진즉에 깨우치지 못했을 뿐이었다.

짐이 일찍부터 시를 쓰고 문장을 지어 왔으되, 비의 고움을 하나로 드러낼 수 있는 말은 아예 처음부터 없었구나. 초사흘에 돋는 초승달이라고 한다면 비의 눈썹에 이미 두 개나 떠 있고, 세상에 둘뿐이라는 벽옥에 견주려고 들면 비의 두 눈이 이미 다 품었도다. 더러 시인묵객이라는 자들이 5월 아침 풀잎에 맺힌 녹로(綠露)의 덧없음으로 세상의 미를 찬탄하고자 덤볐으되, 비가 입을 열어 말을 하면 그게 바로 찰나의 이슬이요 목소리가 어언 사라지면 그게 또한 이슬의 소멸이거니……. 하여, 오로지 절세(絶世)로다!……

황제의 언어는 늘 화청의 물보다 부드러웠고 그런가 하면 무사의 칼끝보다 언제나 지엄했다. 그 언어가 지금은 흔들리고 있었다. 흔들려서 강유(剛柔)가 따로 없었다. 있다면, 강함은 호위 병사들에게 나누어져 있고 유함은 황제의 늙은 몸에 다 스며버린 터였다. 분첩을 바른 연후에 호위대장을 만나보거나 병사들 앞에 직접 서보면 어떨까? 절세라면, 절세라는 말이 분명 옳다면 황제는 물론이거니와 자신의 목숨까지 그걸로 구할 수 있어야 한다. 귀비는 문득 서러워지는 심사로 그런 생각을 했다. 옛 남편 수왕은?……. 그가 혹시 병사들을 대동하고 와주지는 않을까?

“마마!”

잠잠하던 회오리바람이 다시 일어나듯, 막사 밖에서 또 한번 다급한 외침소리가 들렸다. 황제가 느릿느릿 그쪽으로 다가갔다. 귀비는 말없이 황제의 뒤를 따랐다.

“귀비는 자리를 지키고 있구려.”

황제가 짐짓 태연한 척했다. 귀비는 잠시 주춤했으나 발길을 멈추지는 않았다. 비는 이미 그쳐 있었다. 누렇게 들떠 있던 역관 마당의 흙은 잘 다져져 있었으며 주변에 서 있는 나무 이파리들은 푸르게 반짝였다. 여느 아침이나 다를 게 없었다. 황제는 그 사실에 안도했다. 호위대장은 황제를 대하고도 허리를 숙이는 둥 마는 둥 했다.

“마마, 이제는…….”

“역적 안사의 무리는 어떠하더냐?”

용상에 앉은 채로 시종들로부터 시름 걱정 없이 장계를 받는 여느 날처럼, 황제가 무질러 입을 열었다. 평상시라면 아무리 화급을 다투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황제가 능히 화제를 바꿀 수 있으리라.

“이제 귀비를 내어주소서.”

“안록산은 어찌 되었느냐고 묻지 않았더냐?”

호위대장의 말을 전혀 듣지 못한 것처럼 황제는 재차 물었다. 어쩌면 자기 생애 최초로 온몸의 기를 다 쓸어모아 발설하는 게 분명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렇게 하는 바람에 그의 목소리는 더욱 떨려서 새나왔다. 황제가 궁금해하는 안록산의 성쇠 여부야말로 지금 당장 그 자신과 귀비의 안위가 결정되는 눈금저울이랄 수 있었다. 하지만 안록산의 진영에서는 지금쯤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귀비는 안록산의 얼굴을 떠올렸다. 명색이 그는 자신의 수양아들이기도 했다. 그러니 그의 진영에서라면 자신이 이렇듯 수모를 당할 리 없었을 텐데…….

안록산!……. 그를 맨 처음 만난 건 천보 6년인 747년이었으니 그게 꼭 십년 전이었다. 그가 하동(河東)과 범양(范陽) 일대 세 곳의 절도사를 겸임하던 시절이었고, 황제가 변방의 절도사들을 위로하는 연회를 베풀던 자리에서였다. 그는 호인(胡人) 출신이라고 했다. 부모가 이란 계통이니 터키족 돌궐계니 하는 말들이 떠돌았지만 정확한 건 알 수 없었다. 그들 무리를 일러 잡호(雜胡)라고 했으니 근본을 더 이상 따지려고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는 흰 코끼리만큼 체구가 큰 데다가 장안성 남문의 큰 북만큼이나 배가 튀어나온 사내라서 누구에게나 금방 눈에 띄곤 했다. 그리고 실제 이방인처럼 피부가 백상(白象)처럼 희었다. 하지만 귀비 자신이 그를 쉽게 기억할 수 있었던 건 그 때문이 아니었다.

좌중에 한창 취흥이 돋아오를 무렵, 안록산은 느닷없이 귀비를 향해 오체투지 큰절을 올렸다. 이, 이게 무슨 일이에요? 그녀가 놀라 벌떡 일어서자 그는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차제에 소장이 온 정성을 다해 귀비마마를 어머니로 모실까 하나이다. 황제가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경의 나이가 이미 오십을 앞둔 반면 귀비는 이제 갓 스물을 넘겼을 뿐인데 어찌 모자지간이 될 수 있단 말이오? 그러자 안록산은 엎드린 자세 그대로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아뢰었다. 폐하께서는 억조창생의 아버지가 되시나이다. 하오니 귀비마마가 소장의 어머니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겠나이까?

그 말의 감동은 분명 황제와 귀비 자신의 마음을 모두 흡족하게 채우고도 남았다. 황제 쪽에서 본다면 그것은 시키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당나라 전체 국경 방위군의 3할을 장악하고 있는 대장군이 스스로 충성을 다짐한 셈이었다. 그것도 문무백관과 휘하 장졸들이 모두 지켜보는 자리여서 그 파급효과는 클 수밖에 없었다. 황제는 그 때문에 모칭(母稱)을 흔쾌히 윤허하였다. 귀비 자신도 물론 만족했다. 비록 이름뿐일지라도 그를 양자로 둘 수 있다면 자신과 자신의 일족에 두꺼운 갑옷을 두르는 일이었다. 그 뿐만은 아니었다. 아직 거기까지는 지위가 오르지 못했는데 그 홀로 그녀를 황후로 예우한 것이다. 그러니 한때 떠돌던 소문대로 오히려 그에게 선수를 빼앗긴 다른 이들이 심히 질투할 만도 했다.

“안사의 일은 모르오이다. 벽지에 갇히고 진창에 빠져 고립무원이온데 하물며 안사 따위가 귀에 들어오겠나이까? 어서 바삐 수레의 짐이나 덜게 하소서.”

“저, 저런!”

황제가 발을 굴렀다. 놈들은 무례하게도 수레의 짐이라고 했다.

“난이 평정된 연후면 너희가 목숨인들 제대로 보존할 수 있을 성싶으냐? 허나, 가엾은 너희 처지를 살펴 지금까지는 짐이 너그러이 용납하고 차후에 큰 상을 내릴까 하노라. 이쯤, 돌아가라.”

“폐하의 ‘개원지치(開元之治)’ 성세에는 상이 없었어도 마음으로 풍족하였으나 양씨 일문이 득세한 이후로는 비록 상이 주어진다 한들 유복이라 할 수 있겠소이까? 귀비를 마저 베도록 하는 일이 차라리 상일까 하오이다. 난이 평정되거든 그때는 소장 무리의 목을 베소서.”

“…….”

귀비가 황제 앞으로 나섰다. 황제는 그때 귀비의 몸에서 농익은 배 향기를 다시 맡았다. 여전히 알 수 없는 일이었으나 향기 따위에 사로잡혀 있을 계제는 아니었다. 귀비가 입을 열었다.

“나, 여기 있어요. 비록 난에 의해 벽지며 진창까지 쫓겨왔을망정, 여전히 황제 폐하의 땅인 이곳에 나는 있어요. 여기도 엄연히 폐하의 영토란 말이에요. 그러니 제군도 폐하께 충성을 다하고 예의를 잃지 마세요. 혹시 폐하의 팔과 다리를 차례로 요구한 뒤에 나중에는 목까지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을 건가요? 그리고 대역죄인의 군대에 가담할 속셈인가요?”

“귀비는 오해하지 마시오. 대역죄인의 군대를 만든 일등 난적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귀비로소이다. 소장 무리는 폐하께 한번 바친 충성심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외다. 지금도 충성으로 귀비의 목을 요구하는 것뿐이로소이다. 그러니 폐하를 위해 목숨을 아까워하지 마시오.”

“그래요.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어서 내 목을 치세요. 떨어지는 내 목도 폐하께 충성하는 것이니까요.”

귀비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온화하게 웃었다. 그녀는 애써 몸을 숨기는 대신 스스로 백척간두에 올라 홀가분하게 마지막 협상을 벌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게 어쩌면 유일한 살 길일 수도 있었다. 병사들은 비로소 제대로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궁궐에서 어쩌다 한번씩 마주칠 때만 하더라도, 아니 생사가 가로놓인 지금 이 은밀한 피난길에서조차 감히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던 존재였다. 그건 단순하게 황제의 비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어느 누구든 스스로 눈이 시려서 오래 마주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병사들 가운데서 낮게 탄성이 흘러나왔다. 귀비의 미색 때문만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양측은 서로 상반된 충성의 길에 대하여 자신들의 하나뿐인 목을 걸고 이제 막 거래를 다 끝낸 참이었다. 아마도 그 공감이 더욱 컸을는지도 모른다.

“안 된다. 너희가 충성을 운위하고 있으나 이야말로 불충임을 모르느냐? 짐의 눈썹 하나, 짐의 신발 한 짝 부단히 훔치는 일조차 불충임을 너희는 정녕코 모른단 말이더냐?”

황제가 두 손을 뻗어 귀비를 가렸다. 그의 말은 억지에다 발악에 지나지 않았다. 귀비는 그렇게 믿었다. 황제의 말이란 총검이 보좌하지 않을 때면 하찮은 백성들의 그것보다도 더없이 공허한 것임을 그녀는 실감했다. 이를테면 자신의 남편이었던 수왕에게 새삼스럽게 효도에 대해 가르치는 편지를 보낼 때만 하더라도 그건 아니었다. 하지만 효를 앞서는, 황제 자신에게만큼은, 충을 언급하는데도 불구하고 너무 억지스런 것이다. 그가, 현명한 학자이면서 빼어난 악사이자 황제이기도 한 그가 그녀의 마지막 돌파구를 가로막고 있었다.

“폐하, 소첩의 하나 남은 행운을 빼앗지 마소서.”

이번에는 벽옥이 담겨 있다던 귀비의 눈에서 왈칵 눈물이 쏟아져 두 볼을 적시고 말았다. 희디 흰 백모란 꽃잎 위로 내려앉은 이슬이었다. 황제는 그 아슬아슬한 아름다움에 서러웠고 또 오해를 했다.

“귀비는 나서지 말라. 이건 짐이 풀어야만 하는 매듭이니라.”

“마마!”

고력사가 황제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귀비는 반사적으로 자기 허리끈의 매듭을 바라보았다. 황제가 한손으로 잡아당기면 그냥 시름없이 풀어지도록 묶어놓은 비단 끈이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황제가 풀어야 할 매듭은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었다. 어디서부터 배배 꼬였으며 또 얽히고설키게 됐는지 종잡을 수가 없는 매듭이었다.

궁궐에 입궁할 때면 안록산은 항상 귀비의 처소에 먼저 들르곤 했다. 그게 말이 나자 황제가 연유를 물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자 그가 대답했다. 저희 호인(胡人)들은 어머니를 앞세우는 게 전통이나이다. 그 말을 듣고 난 황제는 웃으며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었다. 하지만 그가 귀비를 배알하는 절차 같은 것에 대해서는 황제가 자세히 알지 못하였다.

그는 처소 문밖에서부터 연신 어머니를 외쳐 부르다가 귀비를 만나면 두 팔로 덥석 껴안아 들어올리곤 했다. 그리고는 한동안 내려놓는 일이 없이 춤을 추듯 방안을 빙빙 돌아다녔다. 처음에는 귀비도 그걸 말렸다. 하지만 안록산은 그때마다 자신이 아들이며 귀비가 어머니라는 사실을 강조하곤 했다. 귀비도 점차 그걸 마다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를 기다리는 날이 많았다. 그의 두터운 허리춤에 두 허벅지를 착 감고 높이 안긴 채 드넓은 처소 이곳저곳을 오락가락하는 놀이는 사내들의 말 타는 재미 따위가 흉내낼 게 못 되었다. 게다가 그는 그 정도 놀이로는 그치려고 하지 않았다. 어머니, 어머니를 이제야 만났으니 지금이라도 젖을 좀 주셔야지요. 그가 발걸음을 덩실덩실 옮길 때마다 그가 눈을 뜨고 있는 바로 그 맞은편에서는 그녀의 풍만한 가슴이 언제나 출렁거리고 있었다. 그가 이윽고 그녀 가슴의 비단 옷섶 속으로 자기 이마며 코며 입술을 어렵사리 자꾸 들이밀라치면 그녀는 못 이기는 체하며 가슴을 열어주곤 했었다. 그러다가 한번은 그가 우악스런 아구지의 힘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하여 젖꼭지를 깨뜨려놓고 만 적도 있었다. 그런 몸으로 황제를 맞이할 수 없었던 귀비는 할 수 없이 네모난 붉은 천 홑겹 조각에 어깨 끈을 이어 붙여 그걸로 오랫동안 상처를 가리고 다녔다. 세상 모든 여자들이 가슴만을 따로 감추기 시작한 새 천 조각의 시발이 그것이지만……. 말할 나위도 없이, 그가 벌이던 놀이의 그 끝은 항상 귀비의 침상이었다. 

그렇다면, 6촌 오빠 양국충의 그 일탈은 질투였을까? 한때 연인이던 어린 시절, 양국충은 천하를 갖기보다는 그녀 하나를 선택하겠노라고 누가 묻지도 않는 약속을 하곤 했었다. 하지만 본시 그에게 깃들여진 망나니 기질이 그걸 방해하는 모양이었다. 그는 천하를 욕심내지는 않았으나 황제에게 기꺼이 그녀를 바치고 대신 그에 상응하는 권세를 얻고자 했다. 환관 고력사의 뒤에는 그래서 늘 그가 있었다.

매듭이라고 했지만, 그 매듭은 양국충과 안록산의 알력으로 처음 꼬여진 것이다. 그들은 같은 부류이면서도 서로 확연히 달랐다. 재상 이림보(李林甫) 역시 간신의 하나였지만 그가 살아 있을 때만 해도 두 사람은 서로 가깝게 지내고 있었다. 서로에게 눈엣가시 같은 이림보를 제거하기 위한 연합이었다. 그렇지만 그가 죽고 양국충이 재상에 오르면서부터는 사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오월동주(吳越同舟)의 그 배는 유리보다 더 깨지기 쉬운 배였던 것이다. 양국충은 황제 앞에 나아가 걸핏하면 안록산을 비방하곤 했다. 그에게서 역모의 싹이 보인다고 했다. 황제는 믿지 않았다. 그가 귀비와 너무 사사로이 지낸다고도 했다. 황제는 그가 친자식과 다를 바 없으니 그럴 만도 하다고 문제 삼지 않았다. 물론 그때마다 귀비는 안록산을 따로 변호해주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이림보가 살아생전에 돌궐과 내통했다고 모함하여 양국충이 그의 일족을 주살해버렸다. 돌궐이라면 안록산과 관계가 있는 종족이었으니 그가 가만히 앉아서 당할 리 없었다. 결국 그는 황제 옆의 간신을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거병을 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에 대한 응징으로 양국충은 장안에 있던 안록산의 아들을 죽인 것이다. 그게 바로 이제 와서는 돌이킬 수 없게 된 매듭이었다. 바야흐로 황제께서 몸소 풀어내어 바로잡겠다는. 

“마마, 안사 무리가 군사를 일으킨 연유가…….”

고력사는 여전히 머리를 조아리며 황제에게 아뢰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이 복잡하기 짝이 없는 매듭의 단초는 고력사 그가 제공했다고도 할 수 있으리라. 매듭의 재료랄 수 있는 실이나 노끈이 귀비,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한다면……. 결자해지라고, 그래서 이제 그가 노끈이고 매듭이고 간에 도로 되돌려놓을 수 있는 것인가? 귀비는 꿇어 엎드린 환관의 흰 머리칼과 구부러진 등을 내려다보았다.

“그 연유가 바로 양씨 일문의 척결이었사옵니다. 하오니 저 병사들의 충성심을 가납하여주시옵소서. 그래야만 출병의 명분을 잃은 안사 무리가 갈팡질팡할 것이오며 그 소굴의 죄 없는 군사들 또한 역적 무리에 호응하는 바가 내심 줄어들 것이옵나이다.”

“들어라! 저들 명분이란 건 오로지 역모만을 위한 간사한 거짓이 아니었더냐? 그게 거짓인 마당에 이따위 일로 어찌 저들의 전열이 한순간이라도 흐트러질 수 있기를 바라겠느냐? 그 명분이 참이라고 할지언정 그렇도다. 저들 명분에 부합하는 짓이야말로 도리어 저들 사기를 북돋워주는 일임은 왜 헤아리지 못하느냐?”

황제는 턱수염이 떨리도록 부르짖었다. 그만큼 자기 확신에 차 있다는 반증일 것이었다. 고력사는 아까 호위대장이 말한 대로 ‘개원지치’라 불리던 태평성대의 황제를 잠시 보는 듯했다. 요숭(姚崇)과 송폭(宋爆), 두 명재상이 보좌하던 시대가 바로 개원의 치세였다. 그리고 이림보와 양국충이 재상으로 군림하던 무렵부터가 이른바 ‘천보(天寶)’의 치세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안록산의 난을 천보의 난이라고도 불렀다. 어쨌거나 묘하게도, 그 뭍과 하천의 경계가 되는 제방에 귀비가 있었다. 고력사는 그 제방 풍경을 눈앞에 바로 대하는 듯했다. 그가 입을 열었다.

“마마, 백성이란 늘 멈추어 고요하고자 하는 초목(草木)임을 폐하께서 이미 오래 전에 갈파하지 않으셨나이까? 그리하여 백성들은 항상 고요할 수 있는 구실을 찾게 된다고 하셨나이다. 부지불식간에 역적 무리를 따라나선 군사들 또한 모두 하나같이 폐하의 백성임을 유념하여주시옵소서.”

“이놈, 고력사야. 네가 시방 내 말의 꼬리를 붙들고 새 작란(作亂)을 하려는 것이더냐?”

“황공하나이다. 마마. 지금 이 순간에도 역적 안사 무리와 대치하고 있는 조정 군사들을 헤아리사이다. 폐하의 결단이 우리 아군에게 백만 원군을 지원하는 일보다 결코 적지 않음을….”

고력사는 충언을 멈추지 않고 계속 간하려고 들었다. 황제가 몸을 돌려 막사 기둥에 손을 얹는 바람에 말이 끊긴 것뿐이었다. 철이 들기 시작한 어린 날로부터 궁중에서 잔뼈가 굵은 한 생애를 통틀어 황제의 의중에 맞서는 것도 처음이었다. 황제는 그런 그를 이해할 수 없어서 뒤돌아섰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귀비에게 그것은 모든 희망이 사라졌음을 알리는 신호처럼 여겨졌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귀비는 그 자리에 자신이 신고 있던 비단 가죽신을 벗어 가지런히 놓았다. 화청궁의 온천에 발을 담그기라도 하려는 듯했다.

“가세요. 어디로든 가세요.”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였다. 고력사는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땅이 너무 질척거리지만 않았으면 좋겠어요.”

“안 된다. 이놈들아, 안 돼!”

귀비가 이윽고 발을 내딛었다. 그녀는 맨발이었다. 치렁거리는 비단 치맛자락 아래로 드러난 흰 발등이 이제 막 제 굴집을 빠져나오는 어미 생쥐 같았다. 황제가 울음을 터뜨렸다. 궁녀 서넛이 황급히 다가가 늙은 그를 부축해 일으켰다. 그가 허공을 향해 바싹 마른 손을 뻗어가며 빈 갈퀴질을 해댔다.

“마마, 만수무강하옵소서. 날지 못하는 비익조의 한 축으로 신첩은 언제까지나 마마를 기다리겠나이다.”

귀비는 그 말을 남기고 더 이상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고력사가 그녀를 앞질러 걸었다. 담장을 두르고 섰던 병사들이 저절로 무너지듯 길을 열어주었다.

“귀비께서는 폐하께 충성할 수 있는 길을 스스로 찾지 않으셨는가? 그러니 저승길을 가실 때에도 부디 그 옥체만큼은 상처가 나지 않도록 했으면 싶네. 비록 터럭 하나까지도……”

고력사가 호위대장 쪽을 돌아보며 그렇게 부탁했다.

“……”

“칼이 아니라, 귀비께서는, 비단 허리끈을 쓰실 것이라네.”

“…… 잘 알았소이다.”

호위대장의 두터운 갑옷 사이로 오래 묵은 땀냄새가 새나왔다. 귀비는 그 냄새를 깊이 들이마셨다. 살아 있는 몸에서만, 살아서 펄펄 뛰는 몸에서만 맡을 수 있는 냄새였다. 맨발을 옮길 때마다 발바닥에 미끈거리는 젖은 흙의 감촉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앞으로 또 다른 삶이 주어진다면 평생을 그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저승길도, 맨발이어서 괜찮을 것 같았다.

“고마워요. 고력사 어르신.”

귀비는 전에 단 한번도 쓰지 않았던 호칭을 써서 그에게 감사했다. 그리고 머리채를 고정시켰던 비녀 하나를 빼들었다. 그 순간 귀비의 긴 머리칼이 출렁거리며 그녀의 어깨와 등 위로 툭 떨어져내렸다. 귀비는 고력사에게 그 비녀를 선물로 주었다. 호박과 청옥으로 장식된 봉황 형상의 금비녀였다. 그렇지만 환관인 고력사는 자신에게 소용이 되지 않는 물건이라고 여겼는지 대수롭지 않게 힐끗 한번 쳐다보았을 뿐 호위대장에게 넘겼다.

귀비의 긴 치맛자락이 역관 문턱을 넘어서자마자 황제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자신이 한때나마 사랑했던 여인들이 그가 지켜보는 바로 그 코앞에서 사라져갔다. 황후였던 무혜비(武惠妃)가 젊어서 죽은 뒤로 지극히 아끼던 매비(梅妃)가 떠나가고, 심지어 이 아침에는 괵국부인까지 갔다. 그리고 이제 귀비였다. 장안성의 삼천 궁녀를 모두 주고도 바꾸지 않겠다고 했던……. 그렁그렁한 눈물이 시야를 온통 희뿌옇게 가린 가운데 황제는 귀비가 꿈처럼 벗어놓고 간 비단 가죽신을 보았다. 그가 다가가서 그걸 주워들고 품에 안았다. 그녀가 가진 대부분의 금은보화와 패옥들이 그러하듯, 가죽신 역시 황제 자신이 직접 하사한 것임이 분명했다. 황제는 그 기억 때문에 가슴이 더욱 미어지는 걸 느꼈다. 그게 언제였던가?

귀비의 셋째 언니 괵국부인 옥쟁, 바로 그녀 때문이었다. 귀비를 만나러 입궐하는 그녀를 황제는 처음 보았었다. 귀비에게는 미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미색이 아주 돋보이는 여성이었다. 특히 동그랗고 도톰한 위아래 입술이 한눈에 들어왔다. 끝 가는 데 없을 정도로 풍부한 황제의 상상력은 곧 발휘되어 그녀의 몸 곳곳을 샅샅이 훑게 되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서로 닮은 친자매의 알몸 속을 비교해보고 싶은 호기심을 억지할 수 없었다. 똑같으면 똑같은 대로, 그리고 서로 다르다면 그냥 다를망정 상상만으로도 군침이 돌기 시작했다. 그래서 고력사를 시켜 그녀를 따로 궁에 불렀던 것이다.

귀비는 그 일로 크게 화를 냈다. 질투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자기가 쓰던 물건들을 밖으로 집어던지거나 부수고 신발이며 옷가지를 마구 찢고 불태웠다. 자고로 황제의 총애를 받기 시작한 여인들은 주군이 아예 다른 여자들을 넘보지 않도록 이따금 눈치를 살펴가면서 자기 자매를 황제의 침상에 일부러 밀어넣는 게 예사였다.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귀비는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혼자서도 얼마든지 자신이 있었기 때문일까?…… 어쨌거나 그 일로 황제와 귀비는 적지 않게 다투고, 황제는 그런 귀비를 양국충의 사가로 쫓아보내고 말았었다. 그리고 달이 흘렀을 무렵, 황제는 귀비에게 서신을 썼다. 아주 가지는 않은 줄 알고 있으되 떠난 자리에 자취가 묘연하도다. 그대 몸 가까운 장신구라도 하나 얻을 수 있다면, 희미해진 향기라도 잠시 그대려니 여기고 맡아볼 수 있을 것을……. 귀비와 그 언니는 같아도 같은 게 아니었고 다르다고 같은 것도 아니었다. 황제는 귀비만의 독특한 값어치를 새삼 실감했다. 하지만 귀비는 이제 그쯤 해두고 입궐하라는 황제의 뜻을 따르지 않고 그때부터 버티기 시작했다. 소첩이 지닌 노리개 하나 신발 한 짝, 황제께서 내리지 않은 게 어디 있겠어요? 하여 오로지 제 것이라면 머리칼뿐이니 여기 한 움큼 잘라 보내나이다. 황제는 홀로 애가 타서 고력사에게 심술을 부리곤 했다. 고력사는 두 사람을 각각 화청궁 온천으로 보내어 우연히 만나는 것처럼 꾸몄다. 황제는 귀비가 부수고 없애버린 물건들을 새로 만들어 싸들고 갔다. 귀비의 화는 그때 풀렸다.

“고력사 어르신은 의중에 두고 있는 일들을 어찌 그렇게 다 뜻대로 이루곤 하나요?”

일부러 맨발의 감촉만을 염두에 두고 걸어가던 귀비가 역관 광장을 가로지르며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한껏 푸르러진 나뭇잎 사이로 비쳐드는 햇빛이 화살처럼 보였다.

“황공하옵니다. 귀비마마.”

“고력사 어르신도 뜻대로 되지 않은 일들이 있으신지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사오나, 오로지, 부원수(副元帥) 고선지(高仙之) 대장군의 참수를 막지 못한 일이 천추의 한으로 남을 듯하옵니다. 그리고 또 한 분, 그게 마마이옵고…….”

“저는 그렇다 치고, 그 고선지는 어르신과 일가붙이라도 되는 건가요?”

얼핏 돌아보니 귀비는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고력사는 잠시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안록산의 반군에 맞서 방어선을 지휘했던 명장 고선지의 죽음은 두고두고 억울한 일이었다. 황태자가 친히 원수가 되어 이끄는 주력부대가 전투에 패했다는 보고를 받고 그는 군사를 움직여 구원하러 나섰다가 오히려 부대를 이탈했다는 모함을 받아 황제에게 참수됐었다. 성미 급한 황제의 분노를 잠시나마 가라앉힐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안록산의 기세가 오늘처럼 커져버린 건 순전히 그의 부재로 비롯된 일이었다.

“혹, 그럴지도 모르겠사옵니다. 고선지 대장군도, 소신 고력사의 한아비도, 멸망한 고구려에서 건너왔으니…….”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출생에 대해서 실토했다. 아무도 듣지 못했던 얘기였다. 귀비는 거기 동쪽의 고구려며 신라 땅을 머릿속에 그려보려고 애를 써봤지만 허사였다. 한번도 가보지 못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가볼 수 있다면, 거기 가서 여생을 보낼 수 있다면…….

“전 어쩌다가, 이렇게 됐을까요?”

“……”

“전 황제의 비로서 죽는 건가요, 아니면 역적의 수양어머니인가요?”

“……” 

띄엄띄엄 걸음을 옮기던 귀비가 남의 일이나 되는 것처럼 또 다시 물었고, 고력사도 순간 말을 잊었다. 무얼 알고 싶은 건지, 어떻게 대답을 해야 마땅한지 혼란스러웠다. 어쩌면 처음부터 대답 따위가 필요 없는 혼잣말인지도 몰랐다. 그들이 지나쳐온 어떤 나뭇가지 끝에서 작은 새 두 마리가 우짖는 소리가 아득히 들려왔다. 봄날이 다 갔으니 이제야 만나 사랑을 나누고 있다면 너무 늦었다. 언제 보금자리를 꾸미고, 알을 낳아 품어 새끼를 깨고, 또 언제 키워 겨울을 나게 할 것인가?……. 그 작은 새들의 사랑은, 그리하여 허망할 것이다.

“소신이 한 말씀 아뢰자면……. 천하의 땅은 나눌 수 있는 반면, 여인의 몸은 나눌 수 없음이옵니다.”

“……?”

“사내들이란, 천하를 두고 늘 다투는 무리들이고, 또한 적당히 나눈 채 타협도 하는 법이오나……”

“그런데요?”

귀비가 채근했다.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고력사는 목덜미에서 땀이 돋는 걸 느꼈다.

“마마 또한, 분명히, 천하의 땅에 견줄 수 있을 것이옵나이다. 그뿐입지요. 나눌 수 없을 뿐…….”

고력사의 말을 새겨보기라도 하듯 귀비는 고개를 들어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사내들이라고 했지만 영웅호걸을 자칭하는 자들이, 황제까지 포함해서, 자신을 두고 다툰 끝에 오늘에 이르렀다는 얘기였다. 여인 된 몸으로 죽음에 이르러, 그 죽음을 더없이 칭송하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조금 어이가 없긴 했지만 귀비는 덤덤히 그 말을 받아들였다.

“고마워요……. 고마워요.”

고력사가 역관 마당 한편에 서 있는 나무 아래서 걸음을 멈추었다. 귀비는 그 나무를 우러러보았다. 한 아름은 되는 배나무였다. 꽃이 떨어진 자리마다 손톱만한 배들이 뾰족뾰족 매달려 있는 게 눈에 띄었다. 고력사가 발을 멈춘 이유를 귀비는 헤아리고도 남았다. 자신의 삶과 그 어떤 관계도 없이 자라온 나무였으나 죽음과는 인연을 맺어야 할 나무였다. 아주 짧은 순간, 배나무가 진저리를 치는 것처럼 여겨졌다. 어쩌면 그것은 귀비 자신도 모르는 경련이었을 수도 있었다. 살고 싶다는……. 서둘러 두려움을 지우듯 귀비는 자신의 옷자락을 묶고 있던 비단 허리띠를 풀어 순순히 호위대장에게 내밀었다.

병사 하나가 나무 위에 올라가 말고삐라도 묶는 듯한 솜씨로 능숙하게 매듭을 지었다. 나뭇잎들이 일제히 우는 것처럼 후드득후드득 빗방울을 털어냈다. 매듭 아래로는 탁자 하나가 옮겨졌다. 조금은 높고도 좁은 탁자라서 귀비 혼자 올라설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귀비는 둘러선 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둘러보았다. 고력사는 애써 외면하고 있었고, 병사들은 눈을 동그랗게 치켜뜬 채 자신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회한과 자신들도 믿기 어려워하는 불신감, 그리고 일말의 공포심 같은 것들이 서로 복잡하게 얽혀든 듯한 눈빛이었다. 귀비는 그게 바로 죽음이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자신의 죽음이 그들 눈빛에 나타났던 것이다.

“올려주셔야죠.”

고력사는 못 들은 척하려고 했지만 이내 뿌리칠 수 없는 일임을 알았다. 그가 천천히 다가가 귀비를 부축했다. 귀비가 처음 궁중에 들어온 날로부터 무려 이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인연의 깊이도 그만큼 속 깊을 터였다. 그 인연이 이렇게 뒤틀리고 있었다. 그러니 비록 고력사 스스로 황제에게 주청했다고는 하더라도 포한이 지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돌아서서 눈을 감은 고력사의 귓가에 두세 차례 거친 단말마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무가 그때마다 안에 품고 있던 빗방울을 조금씩 털어냈다. 그런데 이상했다. 나무가 흔들릴 때마다 빗방울과 함께 농익은 배 향기가 흩뿌려지고 있었다. 손톱만한 배들은 아직 그럴 때가 아니었으니 귀비가 뿜어대는 향기가 분명했다. 배나무가 있는 쪽으로는 끝내 돌아보지도 않은 채 고력사는 자신도 모르게 코를 벌름거렸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한 향기였다. 썩기 직전의 과실이 농익어 생애 가장 독한 향기를 토하듯, 귀비의 향기야말로 그 새벽에 가장 멀리 퍼져나갔다.문장 웹진/ 2007년 8월》



주(註): 훗날에 이르러 난이 진압된 뒤, 황제가 한 술인(術人)의 힘으로 귀비를 환생시켜 백년해로했다는 얘기도 전해지거니와 이는 망령든 노인의 풋잠 속에 깃든 일장춘몽에 지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일본에는 현재 양귀비의 유물과 사당, 무덤이라고 하는 것들이 전해지고 있어서 그녀가 한 일본 상인에게 팔려가 그 뒤로 삼십여 년을 더 살았다는 얘기가 있으나 이 역시 그녀의 미색을 아까워하고 탐한 일본인들의 안타까운 소망에 불과하다. 미인박명(美人薄命)의 진리를 인정하려고 들지 않거나, 불만스럽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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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 Cash

벗어날 수 없는 악연,도망갈 수 없는 현실…글을 읽는 동안 자연스럽게 드라마처럼 머릿 속에 그려지는 문체..오랜만에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