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넘기

 

줄넘기




김종은




꽤 오랫동안 아버지를 동상이라 여겼다. 거대하고 딱딱하고 무엇보다 조용한 까닭에서였다. 어쩌면 아무것도 입지 않은 아버지의 모습을 너무 자주 봤기 때문인지 몰랐다.

아버지와 단둘이 지낼 수 있는 시간은 일주일에 한 번이었다. 동네 진성탕에서 매주 일요일 오전 한 시간 반을 거르지 않고 아버지와 함께했다. 아버지는 수건을 바닥에 곱게 펼쳐 놓고 비눗갑을 올려놓은 다음 그것을 능숙하게 말았다. 수건 뭉치는 거짓말처럼 아버지의 손에 딱 들어맞게 변했다.

 

 

“때 밀자.”

아버지는 수건 뭉치를 단단히 움켜쥐고 말했다. 아버지는 그것이 사랑하는 아들을 향한 애정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부자간의 오붓한 시간쯤으로 여기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로선 차마 싫다는 말을 하지 못해 견디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아버지도 나도 늘 말이 없었다. 아버지 앞에 서면 늘 그렇게 됐다. 우리는 왜 일 주일에 한 번밖에 못 보죠? 묻고 싶었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다. 동상 앞에 선 것처럼 묵묵히 바라보다 고개를 숙이고는, 가끔은 그 앞에 서서 맹한 표정으로 사진을 찍는 것이 내가 아버지와 함께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던 시절이었다. 그랬던 마당이라 서로 알몸이 된다 한들 달라질 것이 없었다.

그랬다. 나는 아버지가 무서웠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함부로 대했고 내게 손찌검을 했으며 교양 없는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 5분도 채우지 않고 게걸스레 음식을 먹었고 불필요한 제사에 목을 매면서도 집안일이라고는 손도 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가 싫었다.


아버지는 무엇이든 잘 견뎌냈다.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사우나실로 들어가면 이 십여 분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견디고 있을 때 나는 자유로웠다. 파란 플라스틱 바구니 두 개를 겹쳐 공처럼 품에 안고서는 냉탕에 들어가 혼자 발을 통통 구르며 신나 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행여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지 싶은 불안함에 이내 스르르 물속에 잠길 때가 많았다. 아버지가 벌겋게 달아 오른 몸으로 다시금 내 앞에 동상처럼 우뚝 섰을 때 비로소 기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때 불리자.”


아이의 질문이 늘었다. 아이는 뭐든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대부분 나도 모르는 내용이었다. 묻는 타이밍도 좋지 않았다. 보통 내가 곁에 없다는 투로 신경조차 쓰지 않고 저 혼자 무언가 하다 불쑥 입을 여는 식이었다. 나로서는 생각해볼 시간조차 없었다. 그래서 매번 당황하게 됐다.

돌이켜보면 나도 아버지에게 아버지조차 모를 만한 내용들에 대해 많이 물었던 것 같다. 왜 투표를 지들끼리만 해요? 랄지 저 형들이 진짜 다 빨갱이인가요? 따위. 아버지는 당황하는 법이 없었다.

“몰라도 된다.”

아버지는 매번 그렇게 말했다.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거나 숙제는 했냐? 고 되물었다. 그게 어찌나 싫었는지 몰랐다. 무언가 숨기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여겼다. 하루도 빼지 않고 신문을 읽는 아버지가 아무것도 모를 리 없었다. 행간의 한자(漢字)를 이해하지 못해 그것이 무슨 암호인 줄 알았던 나는 그것을 일러주지 않는 아버지가 야속하기만 했었다.


행간의 한자를 이해하게 됐을 즈음 아버지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모른다는 말을 하지 않은 것뿐이었다. 그렇다고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아버지가 나도 모르겠다, 랄지 실은 나도 알고 싶으니 네가 한 번 알아봐 주렴, 이라 대답해 주길 원하고 있었다. 그도 아니면 같이 한 번 생각해 볼까? 도 좋았을 터였다.

“몰라도 된다니까.”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늘 같았다.

제멋대로에다가 무식하며 스스로를 인정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 그것이 아버지의 실체인 줄 알았다. 훗날 아들이 생긴다면 모르는 것은 모른다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겠노라 마음먹었다. 그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닐 것이라 믿었다. 아버지에게는 용기가 없다 단정 지은 것이었다. 감추는 일이라면 겁쟁이들이나 하는 짓이라 알고 있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아버지야말로 멋진 아버지일 것이라고, 기필코 그런 아버지가 되겠노라 다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오기였을지 몰랐다.

그나저나, 아버지는 그때 부끄러웠을까?


궁금해 하던 사이 지들끼리만 투표하던 방식은 없어졌다. 빨갱이 형들은 넥타이를 둘렀고 도시의 신문에는 한자가 사라졌다. 좋아지고 있는 것이라 했다. 그것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라 했다. 안정되고 있다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입 모아 말했다. 하지만 나로서는 어쩐지 순서를 맞춰 정돈되어 있던 것들이 흐트러진 느낌에 지나지 않았다. 과연 나아지고 있는 것일까? 변한 것은 없는 것 같았다. 그저 누군가가 사라지고 있을 뿐이었다. 커다란 벽처럼 여겨졌던 아버지도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묵묵히 병원 침대에 가냘픈 몸을 뉘었다. 역시 당황하는 법이 없었다. 차례를 기다렸다 순서에 맞춰 예정된 곳으로 입장하는 느낌이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손을 잡고 괜찮으세요? 라고 물었을 때 아버지는 비로소 내게 대꾸했다.

“모르겠다.”

붉은 버튼을 누르자 의사가 달려왔고 그는 내게 죄송하다 말했다. 더없이 부끄러웠다. 사과라면 내 몫인 까닭에서였다. 담담할 수 있을 줄 알았지만 나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주저앉고 말았다. 대체 무엇이 나아졌을까? 생각해 보니 눈물이 났다.

그렇게 아버지를 잃고 아버지가 됐다. 내게도 아들이 생겼다.

“아빠는 신문을 왜 안 봐?”

“순 거짓말이야.”


당당하게 모른다고 말하기. 쉽지만은 않았다. 아이의 질문을 접하고 나면 뜻대로 잘 되지 않았다. 바지를 내리는 순간 누군가 탈의실 문을 벌컥 연 느낌이어서 용기고 뭐고 생각할 짬부터 없었다. 깜짝 놀라는 것 말고는 대체 뭘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어 매번 당황하기만 했다. 하루 이틀 다짐한 일이 아니었는데도 그랬다. 몰라! 라고 당당하게 말을 해야 하는데 어쩐지 그게 말이야, 하면서 머뭇거리게 될 뿐이었다.

“워비곤 호수 효과가 뭐야?”

워비곤 호수가 어디 붙어 있는지 몰랐고 게다가 그 효과라니 더더욱 모를 일이었다.

“붉은 양귀비, 그 발레 어떻게 끝나?”

붉은 양귀비라면 꽃일 것이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나라꼴이 왜 이 모양이야?”

글쎄, 나도 궁금했다.

초등학생이 물을 만한 내용은 아니었다. 게다가 꼴, 이라니 더욱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몰라도 된다, 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마음을 가다듬고 예전의 다짐을 떠올리며 용기를 내 잘 모르겠다 대답했다. 역시 쉽지만은 않았다. 아이는 더없이 실망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몰라?”

“응.”

그러자 부끄러웠다.


“진영아, 오랜만에 집에 가니까 좋다. 그렇지?”

“응.”

당당해야 했지만 잘 되지 않아 머쓱했다. 늘 다짐했던 일을 한 것임에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아이가 내게 뭐든 묻는 것이 아직 나를 믿고 있다는 뜻일 것이라 생각하고 보니 미안하기까지 했다. 나도 아버지를 믿었던 것일까?

그래서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이의 작은 손이 안기듯 손바닥 안으로 쏙 들어왔다. 문득 아이가 너무 많은 것을 배우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무언가 더 배워야 되겠다는 마음이 앞섰다. 대체 워비곤 호수 효과는 뭘까?

“그걸 어디서 봤어?”

“신문에 나와.”


꼭 한 달 만이었다. 마치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기분이었다. 집에 돌아와 발을 쭉 뻗으면 피로가 사라질 줄 알았다.

하지만 집은 어쩐지 낯설기만 했다. 이곳이 우리가 10년 간 웃고 울고 때로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깔깔대며 뛰어다녔던 그 공간이 맞나 싶었다. 소파와 텔레비전, 시계, 스탠드 따위를 차례차례 확인해 봤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꼼꼼히 비교하며 하나하나 직접 골랐던 혼수품들이었다. 그리 대단한 물건들이 아닌 탓에 그녀와 연애, 나아가 우리 사랑의 일부처럼 여겨졌던 것들이었다. 요컨대 평범해 예쁘고 평범해 더없이 소중했었다. 한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 모두가 남의 물건 같았다.

“엄마!”

아이는 쪼르르 달려 제 엄마에게 안겼다. 그제야 내 집이 맞구나 싶었지만 어리둥절한 기분은 여전했다.


아내가 무엇보다 만족해했던 것은 냉장고였다. 냉장고 벽면에 사진을 붙여 놓고서 아내는 더없이 흐뭇해했었다.

“이런 거 꼭 해보고 싶었어.”

음식을 많이 담기보다는 사진을 많이 붙여 놓고픈 욕심에 가장 큰 것으로 구입한 녀석이었다. 차례차례 순서를 맞춰 붙여 놓은 사진만으로도 지난 세월이 고스란히 손에 잡히곤 했다. 그래서 나도 그것이 나쁘지 않았다. 결혼, 혼인신고서, 새 주민등록등본, 생일, 입맞춤, 여행, 작은 2인용 식탁에 차려진 저녁 찬들 그리고 아이의 첫 초음파 사진. 휘이 둘러보면 박물관 복도를 걷는 듯 기분이 좋아져 그것이 냉장고라는 사실을 깜빡 잊을 때도 있었다. 뭐랄까, 뭔가 잘 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사진을 보면 나아질까 싶어 바라본 냉장고 벽면 역시 낯설기는 마찬가지였다. 지난 10년의 기록은 찾아볼 수 없었다. 수식과 그래프, 아내가 힘주어 직접 적어 놓은 듯한 메모들이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그래 놓으니 그건 그냥 냉장고였다.

“사진 치웠어?”

“번잡스럽잖아.”


숲을 보고 나무를 보자! 대중이 가는 뒤안길이 꽃길! 때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사람만이 성공! 1년 이상 기다리면 손해 보지 않는다! 교만하지 말자. 보름달은 하루뿐! 승리에 도취하지 말자! 과신이 생명을 앗아가는 법! 생선 꼬리와 머리는 고양이에게나 줘 버려! 10% 등락은 대세의 전환! 달걀은 한 바구니에 담지 말자! 밀짚모자는 겨울에 사야지! 오르는 힘이 다하면 저절로 떨어진다! 바닥은 깊고 천장은 짧다! 인기는 순환한다! 기회는 소녀처럼 왔다가 토끼처럼 달아나! 그대 아는가, 촛불은 꺼지기 직전 가장 밝다는 것을!

빤하고 익숙한 문장들은 침입자처럼 다가오고 있었다. 까까머리 시절에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를 읽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대충 읽은 것인데도 전력으로 달린 듯 숨이 차 지쳐 버렸다. 그래서 물을 꺼내 마셨다. 격언이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기묘한 구호들이 어떻게 지난 10년의 기록을 대신하고 있는 것일까? 두 명이 쓰기에는 제법 컸다 생각했던 냉장고가 처음으로 비좁게 느껴졌다. 뭐랄까, 뭔가 더 번잡스러워진 것 같았다. 10년을 한순간에 잃어버린 느낌이었다. 물맛은 심심하기 이를 데 없었다.

“보리차 안 끓여?”

“시간 없어. 요새 누가 보리차 먹니?”


한 달 만에 만난 아내의 얼굴은 안쓰러울 만큼 초췌해져 있었다. 국제 원자재 가격은 계속해서 올랐고 항생과 코스피 지수는 꾸준히 떨어졌으며 신도시의 부동산 시장마저 지지부진 활력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 이유라 했다. 국제 유가와 금값마저 불안정해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 왔다며 아내는 아랫입술부터 내밀었다. 이래가지고 어떻게 살아. 한숨을 몰아쉬더니 기어코 손톱마저 물어뜯었다.

“전반적으로 미친 환율이야.”

아내는 초조해하고 있었다. 항생, 코스피 지수, 국제 유가. 그것들이 우리와 무슨 관계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되물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것 참, 이라 대답하고는 입을 닫았다.

많이 보고 싶었어, 는 아니더라도 그간 잘 지냈어? 정도는 내심 기대하고 있던 터였다. 한데 그야말로 우리가 간 날은 장날이었다. 걱정 마 잘 될 거야, 랄지 내가 좀 더 열심히 할게, 라는 말을 먼저 꺼낼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그건 또 얼마나 우스운 일일까 싶어 그만뒀다. 내가 열심히 한다 해서 국제 원자재 가격이거나 유가가 달라질 리 없는 까닭에서였다.

“그것 참.”


아내의 갈색 눈동자가 각종 경제 지표들만 좇기 시작하면서 주머니거나 지갑에 든 돈을 셈하는 것이 세상의 모든 경제인 줄 알았던 나까지도 오르락내리락하는 각종 화살표들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내와는 다른 관심으로 변한 지 오래였다. 살아 있는 듯 꿈틀거리며 좀처럼 가만히 있을 줄 모르는 화살표들이 징그러워졌다. 제발 팔딱팔딱 뛰지 좀 말고 가만있으렴. 나로서는 그렇게 평행선을 바라는 마음이었다. 내리는 것은 좋지 않았지만 오른다 해서 딱히 좋을 것도 없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있는 것이었다. 분명 후회였다. 어째서 실수는 반복되는 것일까?

몸을 던져도 좋겠다 싶을 만큼 깊고 예뻤던 아내의 눈동자가 다시 보고 싶었다. 다시 찾아 주고 싶었다. 하지만 아내가 내게 바라는 것은 달랐다. 아내는 내가 ‘주당순이익’이거나 ‘주가순자산배율’ 같은 용어를 암기하고 이해해 주기를 바랐다. 낯선 것만큼 위험한 것은 없지 않을까? 분명 함께하자고 손을 내미는 것이었는데 그래서 선뜻 따르기가 어려웠다. 그것은 초대처럼 보였지만 명령 같았고 그래서 괜히 주눅만 들뿐이었다. 그때마다 번번이 그것 참, 만 반복한 것이었다.

“이런 게 고통을 분담하는 차원인데…….”

“나 예체능이잖아.”

“난 뭐 경제학과 나왔니?”

“…….”

아내는 날카로워지고 있었고 그에 맞춰 증시의 호황과 불황이 고스란히 집안 분위기가 되어 가고 있었다.


연애할 때는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4월이면 스트레이트 펌을 하고 벚꽃나무 아래서 뱅글뱅글 돌며 ‘코모도스’의 ‘쓰리 타임 어 레이디’를 흥얼거리던 아내였다. 취미는 요리, 특기가 십자수였다.

아이를 대신해 워비곤 호수 효과를 검색해 주려다 컴퓨터 책상 앞에 놓인 의자 방석을 보고는 걸음을 멈췄다. 그곳에 남겨진 아내의 엉덩이 자국과 눈이 맞았다. 그래서 벚꽃이며 ‘코모도스’가 더없이 옛일처럼 여겨졌다. 언제부터인가 아내는 그곳에 앉은 채 2개의 모니터만 번갈아 바라보며 좀처럼 움직일 줄 몰랐다. 아내의 엉덩이 자국은 멸종된 생물의 화석처럼 애처로운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애초에는 1번 모니터가 놓인 곳이 내 자리였다. 결혼식 날 서약도 그렇게 했다. 평생 서로만 바라보겠다 했다.

물론 자리에서 일어나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콧노래를 부르며 요리나 해볼까? 한 적도 있었다. 지난 2월 나스닥 지수가 320포인트 올랐던 날이었다.

과연 그런 날이 또 올까? 아마도 와야겠지.


어찌됐든 니케이 지수가 480포인트쯤 내려간 관계로 내가 직접 라면을 끓여야 했다.

“엄마가 해 준 밥 먹으러 왔잖아.”

“엄마 기분 별로인 것 같으니까 우리끼리 대충 먹어.”

니케이 지수가 480포인트 하락했거든. 차마 그렇게 말할 자신은 없었다. 먼저 낙담하는 아이를 달래야 했지만 서운하기로 치면 내가 더한 참이라 내키지가 않았다. 아내에게 잡채밥을 해 달라 부탁할 요량으로 점심도 애써 거른 채였다.

식탁 위에 가방이며 옷가지들이 널려 있어 냄비를 어디다 내려놓아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 틈에 아내가 숙제처럼 권해 줬었던 『부자 아빠의 생활 수칙』이 눈에 띄었다. 그걸 냄비 아래 깔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30페이지도 채 읽지 못한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아내의 날카로워진 신경을 더 거슬리게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라면 가닥을 젓가락에 말면서 생각했다. 교회 때문일까? 아내가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 탓일까? ‘집사’라는 명칭(아내는 그것을 ‘직분’이라 했다.) 때문일까? 교회라기보다는 교회에서 만난 사람들 때문 아닐까?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타인에게 화살표를 돌릴 수는 없었다. 누가 뭐래도 내 탓이었다. 아내가 벌어들인 돈에 나 역시 한참을 달콤해 했었다. 애초에는 그것이 덫이 아닐까 의심했었다. 하지만 아내의 말은 옳았다. 뭐랄까, 정말 호흡은 여유로워졌고 어깨는 당당해졌다. 그것이 교회에 다니게 된 후로 우리가 우리의 처지를 깨닫게 될 수 있었던 ‘기적’이라고 아내는 말했었다.

“뭔가 소망이 생긴다는 거, 그런 게 기적이야.”

과연 그럴까? 기적은 달콤한 것일까?

막 끓인 라면 면발은 야속할 만큼 뜨거웠다.

“아빠 울어?”

“혀 씹었어.”

 

“이 달엔 이걸로 좀 버텨 봐. 전반적으로 힘든 시기니까.”

“충분해. 걱정하지 말고. 몸 생각하면서…….”

삶이란 버티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렇게 버티면서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청소 좀 해, 집안 꼴이 이게 뭐야! 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냥 그렇게 대꾸했다. 떠오른 질문의 대답을 찾을 수 없어 그랬다. 그렇게 잘 모르겠다 생각하니 또 부끄러웠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서로 말수가 적어졌다. 이를테면, 소통이 잘 되지 않는 것이었다. 가끔 오래 마주 앉아 이야기 하는 내용의 대부분은 셈과 관련된 것들뿐이었다. 돈이 남았느냐, 돈이 모자라느냐. 남은 돈을 써야 하느냐, 아니면 투자해야 하느냐. 그런 말들이 지루할 만큼 반복되고 있었다.

니케이 지수가 지나치게 하락한 날, 볶은 간장 향이 솔솔 피어오르는 윤기 나는 잡채덮밥을 기대했던 나는 돈 봉투만 받아들고는 아이의 손을 잡고 서둘러 현관을 나서야 했다.

“미안해, 학원비가 올랐으니까.”

“내 말이. 수익 빼곤 다 올라. 서브 프라임 론인지 미국 애들은 왜 쥐뿔도 없으면서 집 잡혀 돈을 꾸고 지랄이냐고. 못 갚겠으면 빌리질 말았어야지.”

“애 있는데 그만해.”

“오죽 답답하면!”

집을 담보로 빌린 돈이라면 우리도 제법 많은 터였다. 아내는 누구에게 불평을 하고 있는 것일까?

아이의 몸값을 받고 돌아서는 유괴범이 된 기분이었다. 봉투를 쥐고도 전혀 즐겁지가 않았다. 전처럼 달콤하지 않았다. 아니 나는 되레 미안해하고 있었다. 아이의 학원비가 올랐으니까.

하필 가정의 달, 5월이었다.

“줄넘기 선생은 구했어? 내신 정말 신경 써야 해.”

“줄넘기 학원도 만만치 않더라고.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그것이 아내와의 작별 인사였다. 심드렁하게 손을 흔드는 아내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아빠는 꿈이 뭐였어?”

“화가.”

역시나 부적절한 타이밍의 질문이었다. 그래서 대답하면서 또 부끄러웠다. 아이마저 분명 ‘뭐였냐’ 묻고 있었다. 아이의 눈에도 내 꿈은 과거형으로 변해 버린 지 오래인 모양이었다. 제법 서글플 줄 알았는데 의외로 담담했다. 그저 부디 왜 꿈을 접었는지 묻기 않기만을 바랐다. 어쩌면 그것은 꿈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최근 꽤 많이 했었다.

미대를 졸업하고 계속 그림을 그려야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던 차에 아내가 먼저 꺼낸 ‘결혼’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단어가 ‘결혼’인 줄 알던 시절이었다. 그 단어를 어찌 들어야 좋을지 몰라 바벨을 처음 들게 된 역도 선수처럼 이유 없이 손바닥만 털어대며 이리저리 용쓰던 그런 20대였다. 그러니 그것이 짐처럼 여겨졌어야 옳았다. 한데, 웬걸 무겁지가 않았다. 어쩐지 짊어져도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피하지 않기로 한 것이었다. 모처럼 용기가 생겼다 믿었다. 그것이 사랑의 기적인 줄 알았다.

죽는 날까지 날 기다리며 요리를 하고 날 생각하며 십자수를 하고 싶다는데 그게 뭐라고 못해 주겠나 싶었다. 실은, 아내를 콱 깨물어 주고 싶었다. 바보처럼 실실 웃고 있던 차에 아내가 말했다.

“임신이래.”


“넌 뭐가 되고 싶은데?”

“나도 화가.”

“엄마한텐 그 말 하지 말자.”

“응.”

“대치동이 좋아 집이 좋아?”

“집이 좋아.”

아이와 나는 그렇게 다시 강을 넘고 있었다. 한 달을 주기로 강을 넘는 철새라도 된 듯 몇 년째 반복되고 있는 일이었다. 내 날개는 지쳐 버린 지 오래였지만 아이는 한사코 놓치지 않고 내 뒤만 쫓았다. 불평도 짜증도 낼 줄 몰랐다. 그것이 나로선 무엇보다 불안했다.

버스 좌석 난간을 붙잡은 채로 창밖을 바라보면서도 계속해서 아이는 내게 무언가를 물었다. 바퀴 위 좌석에 앉은 터라 몸을 벌벌벌 떨면서 늘 그래왔듯 나는 어눌한 대답만을 반복했다. 힘을 낼 필요가 있었다. 아이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사랑의 기적을 믿었던 그때처럼 알 수 없는 용기가 생기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사실은 말이야 아빠는 한강을 건널 때마다 손발이 오그라든단다. 아빠도 여기가 싫어. 집이 더 좋아. 그렇게 말해 보는 것은 어떨까 생각하고 있던 참에 아이가 껌을 씹고 싶다 했다. 주머니를 뒤적여 포장을 벗겨 주고는 묵묵히 흐르는 강줄기를 봤다. 사실은 말이야……, 그런 말이라면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아이가 짝짝 할 때마다 박하향이 조그맣게 퐁퐁 피어올랐다.

“참을 만해. 걱정하지 마.”

“그래.”

그랬다. 아이도 견디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냥 다 할 줄 안다 하고, 다 할 수 있을 거라 하고, 다 하겠다고 해. 일단 그렇게 해.”

“…….”

참 부끄러웠다.

선배의 조언대로 전공을 살려 광고 회사를 선택하기로 했다. ‘서울종합기획’은 광고 회사라기보다는 인쇄소라 불러야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도대체 어디쯤에서 어떻게 전공을 제대로 살려야 하는 것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선배는 연신 전공자를 구했으니 사장님도 잘 된 거죠, 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이 친구 미적 감각 엄청나요.”

“뭐 자네 후배만 그래? 이 바닥 사람들 다 센서티브하지.”

최소한의 노력(대충)으로 그린 그림을 갖고 최대한 페이지를 채워(장 수를 늘려) 끊임없이 찍어 내는(복사) 일이라면 학부 4년 동안 배워 본 적도 해본 적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고개만 숙인 채 테이블 유리 아래 끼워져 있는 중국집 전단지만 반복해서 읽었다. 실속 짜장 세트 1만원, 쟁반 짜장 2인분 8천원, 요리 주문 시 구폰 5장 더 드림. 물론 초라한 곳은 아니었다. 선배가 이미 연봉은 나쁘지 않다 귀띔해 준 터였고 전국으로 발송되는 카드며 핸드폰, 인터넷 요금 고지서에 동봉되는 광고의 14%를 담당하고 있다니 나쁜 실적이라 할 수 없었다. 좀처럼 어깨에 힘을 빼지 않는 사장을 보니 꼴불견이라기보다는 기묘한 믿음마저 생기는 참이었다.

“뭐 자랑 같지만 차근차근 해서 브로슈어, 리플릿 늘리고, 씨에프 만들고 그럼 코스닥 등록은 일도 아냐. 이 바닥에서 이렇게 하기가 쉽지 않잖아.”

거짓말! 그런데 어째서 터무니없는 거짓말에 믿음이 생겼던 것일까?

비로소 내 차례가 돌아온 것 같아 전단지 읽는 것을 그만두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크게 외쳤다.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거짓말이면 어떠냐. 그것이 더없이 믿음직하다 생각하면 되지 않겠느냐. 그래서 또 그렇게 된다면 좋은 것 아니겠느냐. 최선을 다해 보겠다 다짐하면서 어쩐지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실은, 내 스스로를 초라하게 만들고 싶지 않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사상 최악의 취업 난국에 대다수 동기들이 무리한 대출금을 등에 업고서 너도 나도 미술학원만 차리던 시절이었다. 바이어스 앞치마를 두르고 또다시 아그리빠를 그리는 일이라면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학원은 뭐 잘 되는 줄 알아? 꾹 참고 버텨 봐.”

선배는 그렇게 말했다. 그때도 꼭 같은 생각을 했었다. 삶이란 버티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렇게 버티면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문득 10여 년 전의 나처럼 교복을 입고 책상에 앉아 전공을 어찌 살려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을 학생들이 떠올라 입이 썼다. 전공을 살린다는 것, 그것을 살려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교묘한 거짓말인지 미리 가르쳐 준다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내가 뭐라고.

“유치원 왜 다녔어? 괜찮은 초등학교 가야지. 중학교 왜 다녔어? 괜찮은 고등학교 가야지. 그래서 괜찮은 대학 가야지. 대학은 왜 다녔어? 괜찮은 직장 가져야지. 왜? 돈 벌어야지. 돈을 왜 벌어? 결혼해야지. 결혼해서 애 낳아야지. 그래서 또 유치원 보내야지. 괜찮은 초등학교 보내야지. 이게 말이 안 되지만……, 여기 사람들, 다 그렇게 살아.”

그렇게 꾹 참으라고만 했다.

“내가 너한테……, 참 쪽팔리다.”

선배도 역시 모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선배는 직장을 일러 줘 미안하다 했고 나는 선배에게 일자리를 줘 고맙다 했다. 소주 4병을 비우는 내내 나도 선배도 많이 우울했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잘 되겠지 뭐.

“네 그림 좋았는데.”

“뭘요, 형 그림이 더 좋았지.”

“사람이 얼마나 미련한지 알지? 평생을 그렇게 속고 사는 거야.”

“그런 다음 속이겠죠.”


아내와 함께 산부인과에 들렀던 날 나는 복도 구석 벤치에 앉아 선배와 주고받은 말들을 곱씹고 있었다. 괜히 초조했다. 적절한 연봉의 괜찮은 직장을 얻었다고, 이제 걱정 없다고, 앞으로는 잘 될 것이라고 말해 줄 요량이었다. 선배의 말대로 아내를 속이려 들고 있는 것이었다. 분명 아내도 잘 됐다고, 당신만 믿겠다고 대꾸할 터였다. 다들 그렇게 산다는데 뭐 어떨까 싶었지만 초조함은 사라질 줄 몰랐다.

한참 만에 검진실 문을 열고 나온 아내는 운동화 바닥을 끌면서 지친 표정으로 다가와 내게 4개월이래, 라고 말했다.

“나 취업했어.”

“고마워.”

그리고 아내는 울었다.

정말 앞으로 우리에게 남은 것이 속고 속이는 시간들뿐일까? 나는 어째서 아내가 우는지 알지 못했지만 아내는 내 아버지 이야기를 꺼내며 되레 나를 달래기 시작했다.

“아버님이 좋아하셨을 텐데.”

“그러게.”

대걸레를 꽂은 파란 플라스틱 바구니를 든 아주머니가 다가와 껴안고 있는 우리 뒤에 대고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발 좀 들어요.”


소개해 준 선배 덕에 수습 기간 없이 바로 정직원이 됐다. 그렇게 5년 간 나는 ‘회원님들만을 위한 초특가’거나 ‘회원님들만을 위한 특별 우대’라는 제목의 일러스트를 얼추 3만 장쯤 그렸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리플릿이었다. 나 역시도 고지서만 확인하고 찢어 버리는 과다한 양의 종이쪽지들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걸 그만 만들고 차라리 회원들 카드 값을 깎아 주는 게 훨씬 낫지 않을까요? 광고주를 만날 때마다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열리지 않았다.

“아니 뭘 이런 데다 예술을 하려고 해요. 그냥 큼지막하게 눈에 확 띄게만 합시다. 광고라는 게 기본적으로 뻥이지 뭐.”

“아무래도 그게 좋겠죠?”

늘 그런 말들만 주고받았다.

내 그림이라면 그렇게 그릴 짬이 없었지만 대신 통장의 잔고가 늘고 있었다. 이 도시의 대부분 사람들이 그렇듯 3년이 지나 대리가 됐고 5년이 지나 과장이 됐다. 팀장을 맡게 된 후 아버지가 됐고 새 양복을 구입해 아들 녀석 돌잔치를 치르며 적금 통장을 두 개 더 늘렸다. 펀드의 시대가 왔다기에 적립식으로 하나 넣고 미래를 위해서는 변액 연금 보험이 최고라기에 그것도 하나 장만했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나도 그런 말들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최 대리, 뭐 이런 데다 예술 하려고? 대충해. 광고주들은 그런 거 보지도 않아.”

뭐랄까, 딱딱한 동상이 되어 버린 기분이었다.


그래도 든든했다. 넉넉한 잔고가 우리를 지켜 주리라 여겼다. 그렇게 모든 것을 상쇄하고도 남을 통장의 잔고가 처음으로 부족하다 여겨진 것은 아내가 교회에 다녀온 다음날이었다. 아내는 울고 있었다. 선교 활동 겸 관광이라고 중국에 가벼운 마음으로 다녀온 줄 알고 있던 터였다. 그래서 그래도 외국 갔다 왔는데 내 선물은 없냐고 농담 삼아 물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호랑이 연고라도 사오지. 목 언저리가 뻐근뻐근한데.”

“뭐?”

한데 아내는 갑작스레 울음을 터뜨렸다. 산부인과 병원 복도에서 이후로 처음 보는 아내의 눈물이었다.

2일간 원서 접수를 하려고 줄을 서고 왔다 했다. 아무나 입학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 아닌데 주님의 도움으로 모든 게 잘 됐다고 했다. 한 학기 등록금만 일시불로 내면 바로 입학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는데 통장에 돈이 부족했다고 했다. 까짓 빌리면 되는 일인데 그쪽에서 시간을 주지 않았다고 했다. 당장 없으면 곤란하다고, 들어오고 싶은 사람은 넘쳐나니 마음대로 하라는 투였다 했다. 박 집사 아들도, 김 집사 아들도, 조 권사 손녀딸도 화교 유치원에 입학하기로 됐는데 살다 살다 이렇게 창피한 꼴은 처음 당해 봤다며 아내는 콧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우리 진영이만 못 가게 됐단 말이야.”

아내를 달래야 했다. 결혼식 날 장인의 팔을 둘렀을 때에도 그렇게 서글피 울지는 않았다. 아직까지는 우리나라가 낫다고, 들인 돈에 비해 효과가 적을 수 있다고, 아이가 좋아할지 묻지도 않고 이렇게 하는 건 아니라고, 무엇보다 네 살배기 아이를 중화(中華)에 물들이고 싶지 않다고. 아내가 이해할 수 있도록 나름 경제 용어 비슷한 것을 섞어 본 것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말들이었지만 도리가 없었다.


창피해서 어떻게 다시 교회를 나가냐 했던 아내는 꽤 큰 액수의 헌금을 내는 것으로 마음을 달랬다.

“믿음도 정성도 부족했던 거야.”

그렇게 말했지만 실은, 아내는 그저 속아 주고 있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부러워하고 서로 가늠하고 서로 경쟁하는 그 커뮤니티를 잘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아내는 속속들이 알고 있는 눈치였다. 종교는 믿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해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아내는 뿌린 만큼 거둔다는 말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더니 정말로 얼마 지나지 않아 집사가 됐다. 게다가 뜨거운 박수와 함께 ‘복음전파1080’의 총무까지 맡았다. 10대부터 80대까지를 대상으로 전도 활동을 강화해 축복된 나라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뛰기로 되어 있었지만 아내와 박 집사와 김 집사와 조 권사가 한 것은 ‘나이스 경매 아카데미’의 등록과 ‘브라보 주식 투자 연구소’의 특강 청취였다. 아내는 그 커뮤니티에서 도태되지 않으려 발버둥치고 있었다.

아내는 그야말로 최선을 다하기 시작했다. 컴퓨터 모니터를 추가로 구입한 후에는 수험생이라도 된 듯 툭하면 끼니마저 걸렀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누군가에게 복수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라 여겨질 정도였다. 생각해 보면 그것은 정말 복수였는지 몰랐다. 어찌됐든 아내는 보기 좋게 그것을 두 손에 쥐었다. 매주 수요일 교인들을 만나 상위 200개 기업들의 주가를 분석했고 주일이면 교회에 모여 부동산 정보를 나눴다. 아이가 영어 유치원 졸업반이 된 해 나는 직장을 그만둬야 했다. 아내가 반 년 새 버는 돈이 내 연봉의 두 배를 훌쩍 넘고 만 것이었다.

“당신 그림 그려. 돈은 내가 벌 테니까.”

낯설지 않은 일이 반복되고 있었다. 어째서 실수는 반복되는 것일까?


아버지가 목수 일을 그만두게 된 것도 어머니의 한마디 탓이었다. 취미 삼아 놓은 계가 커졌고, 이어 개수가 늘었다. 아버지가 물! 하면 쪼르르 컵을 들고 달리고 재떨이! 하면 역시나 쪼르르 재떨이를 가져다 줬던 어머니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어머니의 집을 비우는 횟수가 잦아지자 아버지는 물! 했다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는 끙, 하고 일어나 직접 물을 따라 마셨다.

그러는 사이 어머니는 사채를 굴리기 시작했고 그 돈은 너무도 쉽게 부풀어 올라 아버지가 나무를 깎아 번 돈의 10배가 됐다. 아버지는 재떨이! 라고 외치는 대신 어머니에게 담배 값을 받기 시작했다.

나는 사립학교에 진학했고 어머니는 계원과 채무자를 늘리기 위해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집 안 곳곳에 십자가가 걸렸고 어머니의 목소리는 커졌다. 아버지는 말수가 준 대신 주량이 늘었다. 바보 같이 나는 그것이 무언가 시대의 흐름에 맞게 잘 변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아버지가 초라해졌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간 아버지가 너무 많은 힘을 쥐고 있었다는 생각뿐이었다.

“개 같은 년아! 돈을 빌렸으면 갚아야 할 거 아냐!”

어머니의 목소리가 커질 때마다 살림살이가 나아졌다. 손가락질을 하는 동네 사람들이 늘었지만 상관없었다. 수준 떨어지는 지긋지긋한 동네를 우리 가족은 해마다 떠나고 있었다. 오른 집값은 고스란히 내 몫이었다. 과외 선생을 10명 넘게 갖다 붙여 줘도 내 성적이 크게 오를 줄 모르자 다급해진 어머니는 나를 미술 학원에 데려갔다. 제법 고가의 화구들을 손에 쥐어 주며 어머니는 내게 치과의사만큼 훌륭한 미술 학도가 되라 말했다.

아버지가 크게 웃었지만 어느새 나는 그런 아버지가 무섭지 않게 됐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벌어다 주는 돈으로 화투를 치고 소주를 사 마시고 산에 올랐다. 아버지의 톱과 대패에는 가을 낙엽처럼 녹이 슬었다. 부푼 근육이 줄어드는 만큼 아버지의 몸에도 녹이 슬고 있었다. 피가 터지도록 나를 때리는 일도 없었고 근엄한 목소리로 이것저것 시키는 일도 잦아들었다. 나 역시 아버지에게 그닥 묻고 싶은 것이 없어졌다. 제법  큰 평수의 아파트로 옮긴 터라 아버지와 함께 대중목욕탕을 갈 필요도 없었다. 사람 많은 곳에서 비위생적으로 때를 미는 것보다 보디 샴푸로 매일 샤워하는 쪽이 보다 좋을 것이라 여긴 것이었다. 아버지는 여전히 순서를 따르고 있었다. 아버지는 수건을 바닥에 곱게 펼쳐 놓고 비눗갑을 올려놓은 다음 그것을 능숙하게 말았다. 수건 뭉치는 거짓말처럼 아버지의 손에 딱 들어맞게 변했다. 나무를 깎는 것처럼 혼자 묵묵히 그 일을 반복했다. 아버지의 뒷모습이 굽어지고 있었다.

나는 나이가 든 아버지가 그렇게 고개 숙여 지난 일을 후회하고 있는 줄 알았다. 부쩍 자라 버린 내가 여러모로 현명해지고 성숙해진 줄 알았다. 화실에 앉아 밤늦도록 아그리빠를 그리면서 나는 그렇게 아버지를 떠올렸다. 결코 아버지처럼 되지 않겠다고 이를 악물었다. 멋진 미대생이 되면 아버지와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무엇보다 아들에게 자상한 아버지가 되고 싶었다.

미처 아버지가 견디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국제 중학교를 보내려면 강남으로 가는 방법뿐이라 했다. 박 집사 아들도, 김 집사 아들도 국제중을 준비 중이라 했다. 아내는 다시는 그들과 간격을 벌려 놓지 않겠다 다짐한 지 오래였고 나 역시 아내가 우는 모습을 다시 보고 싶지 않은 터였다. 사돈의 팔촌을 따져 봐도 강남에 지인이 없었던 우리가 택할 수 있는 것은 이사뿐이었다. 하지만 신도시에 벌여 놓은 부동산이 지나치게 많아 여의치가 않았다. 무엇보다 강남의 아파트를 덜컥 구입할 만한 금액이 잔고에 없었다. 그것이 아내가 가장 분통해하는 부분이었다. 아내는 그곳의 집값이 지나치게 비싼 것인지 아니면 그간 우리가 지나치게 적은 수입을 올린 것인지 비교조차 하지 않은 채 말했다.

“정부 정책이 잘못되고 있는 거야. 양극화가 너무 심해. 우리 같은 사람들이 살 수가 없잖아. 그러니까 경제 대통령이 필요한 거야. 아무튼 방 하나 얻어 줄 테니까, 진영이랑 좀 지내. 학원 픽업도 해야 하고, 어리니까 혼자 놔둘 수 없잖아.”

“같이 사는 게 낫지 않겠어?”

“가서 그림 그리라니까. 교회도 그렇고, 여기 일들도 많고, 아직은 힘들어. 장기적으로 봐야지. 눈앞만 보려고 하니까 자긴 발전이 안 되는 거야. 그냥 그림이나 그려. 진영이가 자기처럼 살았으면 싶어?”

무언가 오기 같았지만 아내는 그것을 끝내 모성(母性)이라 말했다. 나는 애써 아내가 날 배려하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어쩐지 가슴이 아팠다. 물론 쉬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내 시간을 가늠하면서 아이를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다면 그것도 좋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꽤 했었다. ‘회원님들만을 위한 초특가’거나 ‘회원님들만을 위한 특별 우대’라는 일러스트를 너무 많이 그린 까닭에서였다.

요컨대 부끄러웠지만 참기로 한 것이었다. 아이에게 좋은 아빠가 되어야 했다.


아이의 줄넘기 수행 평가가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국제 중학교에 진학하려면 탄탄한 내신 성적은 기본이었다.

1분간 150회 이상, 2단 뛰기 10회 이상, 기본 스텝 5개 항목 연결 동작, 엇걸어 풀어 뛰기 및 옆 떨쳐 뛰기를 포함한 음악 줄넘기. 엇걸어 풀어 뛰기는 고사하고 2단 뛰기조차 되지 않아 마음이 조급했다. 밤마다 홀로 줄넘기를 할 때마다 쫓기는 기분이었다. 줄은 야속하게도 자꾸만 발에 걸렸다.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데 좀처럼 되지 않는 것이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학원은 필요 없다며 아내에게 큰소리까지 친 터였다. 게다가 줄넘기 학원을 보내는 것도 여의치 않은 상황이었다. 학원비는 둘째치더라도 아이에게 시간이 없었다. 아이는 토플, 토익, 토셀을 배우고 심층 면접을 준비하고 고등 수학을 배우고 봉사 활동을 하고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배우고 각종 경시 대회의 문제집을 풀면서 한 주를 보내고 있었다. 밤 11시가 넘어야 돌아오는 아이에게 학원 한 군데를 더 가야 되겠다는 말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것은 좋은 아빠가 할 말이 아니었다. 대체 어쩌면 좋을까?

결국 신경질적으로 줄넘기를 바닥에 던져 버리고 말았다. 나도 울고 싶었다.

“괜찮아. 내가 할게.”

등 뒤에서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등 뒤에서 아이가 모든 것을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어째서 몰랐던 것일까? 더없이 부끄러웠다.

“이런 거 말고 하고 싶은 거 없어?”

“청계천 갈래요.”


아버지의 몸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거대하고 딱딱하고 조용하며 무엇보다 무엇이든 잘 견뎌내는 아버지가 나는 세상 그 무엇보다 강한 줄 알았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다시 뜨거운 물로 들어가는 아버지를 볼 때마다 아버지가 되고 싶었다. 아버지와 같은 근육을 갖고 아버지처럼 포경 수술을 하고 아버지처럼 뭐든 잘 견디는 남자가 되고 싶었다. 달아 오른 얼굴만 물 위로 내어 놓고 잔뜩 인상을 쓰고 있노라면 아버지는 꼭 이렇게 말했다.

“오백까지만 세자.”

아버지의 한마디에는 거스르기 어려운 무언가가 있었다. 나는 늘 꼬박 빼지 않고 오백을 셌고 그러고 나면 머리가 핑 돌았다. 그것이 아버지가 갖고 있던 역시나 거대하고 딱딱하고 조용한 규칙이었다. 준비물은 수건과 비누가 전부. 비누칠을 하고, 온탕에서 몸을 불린 후, 때를 밀고, 샤워를 한 후, 밖으로 나와, 선풍기로 머리를 말린 다음, 수건을 허리에 두르고, 나무 의자에 앉아, 손발톱을 깎고, 비로소 우유 한 잔. 대체 그 순서를 아버지는 누구한테 배운 것일까?

세상에서 가장 지겨운 일이 거스르지 않고 오백까지 세는 일이라고만 여겼던 그날 나는 입가에 묻은 초코 우유를 핥으며 알게 됐다. 견딘다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지 않다고.


이튿날 몇몇 신문에 아이와 내 사진이 실렸다. 바보 같은 표정으로 의무 경찰의 곤봉에 두들겨 맞고 있는 사진을 모르는 네티즌이 없었다. 그들은 나를 ‘줄넘기 아저씨’라 칭했다. 나는 줄넘기를 허리에 감고 있었고 아이는 촛불을 들고 있었다. 사진 속의 나는 아이의 손을 잡으려 가까스로 손을 내밀고 있었지만 아이는 야속하게도 달아나고 있는 중이었다. 생쥐처럼 흠뻑 젖었으면서도 뭐가 그리 좋은지 아이는 밝게 웃고 있었다. 그렇게 아이는 줄을 넘어서고 있었다.

한 달 만에 다시 돌아온 집 냉장고 메모에는 ‘그대 아는가, 촛불은 꺼지기 직전 가장 밝다는 것을!’이라는 문장이 지워져 있었다.

“가지가지 한다.”

“…….”

“애 데리고 거기서 뭐했니?”

“오백까지 셌어.”

“니가 애니? 그런다고 뭐가 달라져? 참 철없다. 한 번이면 됐다, 그만 하자.”

“…….”

주가가 떨어진 모양이다. 아내는 여전히 날카로워져 있었다. 아내의 말은 옳았다. 물론 달라진 것은 없었다.

아내는 여전히 화살표를 들여다보고 아이는 일주일에 스무 곳이 넘는 학원을 전전한다. 나 역시 아직도 모르는 것이 너무도 많다. 그렇지만 내게도 순서라는 것이 생겼다. 견디는 일은 여전히 힘들었지만 그래서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인 것 아닐까? 지나치는 차가 없는 광화문 대로를 달리면서 나는 아버지를 찾고 있었다. 그것이 순서였다.

줄넘기? 근 두 달째, 꾸준히 하다 보니 옆 떨쳐 뛰기는 일도 아니다.《문장 웹진/2008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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