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세라 (ah! sherah)

 

아! 세라 (ah! sherah)




허혜란




1

                                        

이 집에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산다. 그러나, 아무도 살지 않는 빈집처럼 고요하다. 창밖에서부터 흘러드는 달빛이 서늘하게 비쳐드는 거실, 크고 넓은 빈 벽들만이 서로를 비춰 주고 있다. 어슴푸레하게 드러나는 바닥이 어둠속에서도 반들반들하다. 한 발을 내디디면 스윽, 미끄러질 것만 같다. 한밤의 폐쇄된 수영장 같다. 어딘가 음험한 분위기다. 살아 있는 자의 숨소리라고는 한 번도 품어 본 적 없는 것 같은 고요함 속에 다만 간간히 ‘지이잉’ 소리만 흐른다. 광야를 휘도는 바람소리 같고 덩치 큰 짐승이 내뱉는 ‘숨’ 소리 같다.

 

 

그 소리는 벽에 착 붙은 견고한 직사각형 모양의 상자에서 흘러나온다. 달빛을 받아 홀로 빛나고 있는 그 물체, 은색의 위풍당당한 냉장고. 그것만이 고요한 거실에서 유일하게 숨 쉬고 있다. 냉장고의 상단 오른쪽에 황금색 영문 알파벳이 날카롭게 빛나고 있다. 정교하고 단아한 흘림체로 새겨진 그 이름, sherah. 곧 나의 이름이다.     

                                


2


물소리와 새소리가 뒤섞인 벨소리가 들린다. 왼쪽의 닫힌 문 저편에서부터 나온다. 이 집에서 울리는 첫 번째 알람이다.

AM 5:30

이 고요한 집에도 바야흐로, 어김없이 아침이 찾아온 것이다. 이제 정확하고도 치열한 ‘그들의 스케줄’ 이 시작된다.



3

                                

문 하나가 열린다. 여자가 나온다. 발목에 녹슨 쇳덩어리라도 매달아 놓은 듯 비척거리는 걸음이다. 여자는 욕실로 들어간다. 이따금씩 끊어지고 이어지는 얕은 물소리가, 칫솔질에 이어 양치물 내뱉는 소리가, 얼굴을 씻는 소리가 그 안에서 들려온다. 부엌에 들어선 여자가 빠르게 걸어온다. 내게 다가온다. 견고한 내 몸을 열기 위해 여자는 가느다란 팔을 뻗는다. 두 개의 손잡이를 잡아당긴다. 내 몸의 중앙을 가르고 있는 양 문이 부드럽게 열린다. 여자가 고개를 살짝 젖히며 움찔, 뒤로 물러선다. 내 안의 서늘한 냉기와, 그리고 눈부시게 푸르스름한 실내등이 여자를 주춤거리게 한다. 몇 초가 지나고 적응이 된 여자는 푸석한 지푸라기처럼 짧고 뻣뻣한 머리카락에 둘러싸인 얼굴을 내 안에 들이민다. 파란빛을 받으며 이런저런 먹을거리들을 훑어본다. 김치가 들어 있는 반찬통과 샐러드 통을 꺼낸다. 냉동실에서 누룽지 한 봉지도 꺼낸다. 여자는 묵묵히 간단한 아침식사를 준비한다. 냄비에 물을 붓고 누룽지를 넣어 끓인다. 정갈한 접시에 김치와 샐러드를 적당히 담아 식탁에 올려 두고 깨끗한 식탁보로 덮어 둔다. 분주하게 움직이지만 일하는 손길이 조용하다. 

한 사람분의 식사 준비를 마친 여자는 내 안의 빈 공간을 점검하기 시작한다. 한 개 남은 계란과 얼마 남았는지 모를 종이팩 우유를 들어 본다. 바닥이 드러난 채 일그러진 마요네즈 통을 꺼내고 반찬 칸을 열어 김치와 스테이크용 소고기가 들어 있는 통도 열어 본다. 버릴 것은 버리고 씻어야 할 것은 싱크대 안에 담아 둔다. 슬라이드식 냉동실 바스켓을 열어 냉동 반찬이 어느 정도 들어 있는지 살펴본다. 내 몸의 두 날개를 접고 일어선 여자는 시간을 확인한다. 나가야 할 때를 넘기면 안 된다. 여자는 물병에 물을 담아 들고서 등을 돌린다.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여자는 신발장에서 운동화를 꺼내 신는다. 고개를 들어 식탁 위와, 나와, 그리고 닫혀 있는 또 다른 방에 시선을 준다. 가뭄 끝에 간신히 서 있는 메마른 나무처럼 우두커니 서서 물끄러미 바라본다. 현관문의 잠금 장치를 푼 다음 밖으로 나간다. 철컥, 여자를 내보내고 조용히 닫히는 문소리가 유난히 크다. 고요한 거실은 그래서 더욱 고요해진다. 조용하기 때문에 고요한 것이 아니고 또한 고요해서 평온한 것도 아닌, 그런 종류와는 거리가 먼 고요함이다. 무언가 은폐된 ‘숨’이 깃든 것처럼. 마치 거실 한 모퉁이 어디쯤에 복면을 한 강도가 숨죽이고 서 있기라도 하듯이. 여자가 첫 번째로 집을 비우는 이 시간, 거실의 시계는 정확하다. 아침 여섯 시 삼십분.



4


여자가 나간 지 얼마 후 짧은 음악 소리가 반복적으로 들려온다. 그 소리는 또 다른 문 저편에서 흘러나온다. 이 집에서 울리는 두 번째의 알람이다. 그 방 안에서 이런저런 소리가 들려온다. 연달아 터지는 재채기 소리, 굵은 대포알 구르는 것 같은 오줌 누는 소리, 여러 개의 물줄기가 한꺼번에 쏟아지는 샤워기 소리, 옷장 문 여닫는 소리, 성큼성큼 걸어 다니는 발자국 소리……. 그 모든 아침의 소리들이다.

문이 열리고 남자가 나온다. 넥타이를 엉성하게 목에 늘어뜨린 채, 와이셔츠에 팔을 꾀고, 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양복 상의를 손에 든 채. 한꺼번에 여러 가지를 하느라 남자는 혼자서 바쁘다. 대충 옷을 걸쳐 입자 훈련된 손놀림으로 빠르게 넥타이를 목에 맨다. 남자는 부엌으로 온다. 아니, 내게로 온다. 내게 닿기 위하여. 내 몸을 열고 싶어서. 남자의 크고 단단한 손가락이 나를 열어젖혔다. 내 몸이 열리자 서늘하고도 푸르스름한 내 안의 숨결이 훅, 남자에게 끼쳐 든다. 남자는 푸르러진 얼굴로 내 안을 들여다본다. 푸르스름한 조명 안으로 푸르스름해진 가늘고 긴 손을 뻗어 푸르스름한 물병을 집어 든다. 푸르스름한 생수를 마시는 남자의 얼굴도 푸르스름하다. 팽팽한 볼 살이 푸르스름하고, 물을 삼키느라 오르내리는 목울대도 푸르스름하고, 두 눈동자도 푸르스름하다. 푸르스름한 남자는 물을 마시며 나의 이름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물을 마시느라 적당히 고개를 젖힌 그 눈높이에 황금빛 글자가 걸려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는 물론 안다. 물을 다 마신 남자는 고개를 돌려 여자의 방문을 쳐다본다. 표정을 짐작할 수 없는 그 눈빛도, 푸르스름하다.

유기농 밀폐 야채실에서 포도 한 송이를 꺼낸다. 빠른 속도로 포도 한 송이를 다 먹는다. 내 안에는 달콤한 포도가 많다. 여자는 포도가 끊이지 않게 내 속에 채워 둔다. 남자가 포도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포도 껍질만 남은 접시를 치우며 남자는 식탁 위에 올려 있는 누룽지탕을 본다. 냄비를 만져 본다. 따끈따끈하다. 남자는 식탁 앞에 앉아 숟가락을 든다. 후륵후륵 누룽지를 넘기고 빈 그릇을 싱크대 안으로 밀어 넣는다. 남자는 다시 내게로 다가온다. 내 속을 들여다보는 남자의 눈이 탐지기처럼 생기 있게 반짝인다. 어젯밤에 먹던 족발을 발견한 눈에 생기가 차오른다. 새우젓을 꺼내 선 채로 족발을 찍어 먹는다. 순식간에 뼈다귀만 남은 족발이 날렵한 농구공처럼 싱크대 안으로 휙, 들어간다. 저온 숙성된 모닝 빵을 꺼내 짜 먹는 치즈를 잔뜩 발라 한 입에 다 삼켜 버린다. 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퀴베 동 폐리뇽을 꺼낸다. 전쟁에 이겼을 때도 샴페인이 필요하고 패배했을 때도 샴페인이 필요하다는 나폴레옹처럼 남자에게도 샴페인은 잠에서 깨고 나서도 필요하고 잠이 들기 전에도 필요하다. 불룩해진 배를 쓰다듬으며 샴페인을 따르는 그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떠오른다. 남자는 빈 그릇들을 차곡차곡 넣으며 시계를 확인한다. 그녀의 방을 지나 현관으로 간다. 그의 출근 시간은 아침마다 동일하다. 오전 일곱 시 반.



5


그들의 스케줄은, 그렇다. 정확하게 어긋난다. 남자가 아직 잠들어 있을 때 여자가 일어나고 여자가 집을 비우면 남자가 일어난다. 남자가 출근하고 나면 여자가 집에 돌아온다. 여자는 남자가 없는 집 안에서  머물다가 남자가 퇴근할 무렵이 되면 집을 나간다. 집에 돌아온 남자는 저녁 시간을 혼자 보내다 밤이 되면 잠이 든다. 남자의 방에 불이 꺼지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드디어 그때, 여자는 집에 들어온다. 서로가 머리를 맞대고 시간표를 짜지도 않았는데 말없이 척척 맞는다. 물론 둘 다 머무를 때도 있다. 서로가 잠자는 새벽 시간이 그렇고 가끔 찾아드는 휴일에도 종종 그렇다. 하지만 불편할 것은 없다. 남자의 방 안에는 화장실이 있고 드레스 룸이 있으며 앞뒤로 베란다가 있다. 후면으로 크게 드러나는 전망 좋은 산을 보며 바람을 쐴 수 있고 담배도 필 수 있다. 앞 베란다에는 넝쿨 식물이 뻗어 가는 작은 화단이 있다. 방에는 텔레비전과 노트북, 오디오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굳이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올 필요가 없다. 그가 나올 때는 오로지 단 하나의 이유, 나를 만나기 위해서이다. 부드럽고 서늘하고 풍요로운 나, sherah에게 닿기 위해서이다. 손을 뻗어 내 몸을 열기 위해서이다. 그를 만족시킬 위대한 것들이 내 안에 있으므로. 그러니 그들은 그리 불편하지 않다. 여자가 내 속에 먹을 것을 채워 넣으면 그가 취하면 된다. 이 집에 사는 남자와 여자는 그렇게 완벽하게 어긋나도 그런대로 평안하다. 그들을 소통시켜 주는 sherah, 곧 내가 있음으로 하여.       



6


틱, 틱, 틱, 틱. 현관문 저편에서 비밀번호 버튼을 누르는 소리가 난다. 여자가 돌아온 것이다. 뒷산을 다녀왔을 것이다. 산을 깎아 만든 새 아파트에 살아서 가장 좋은 점은 그것이라고, 이 집에 입주한 오 년 전 남자와 여자는 입을 모아 그렇게 말했다. 뒤에는 커다란 산이 뻗어 있고 옆에는 카페와 식당과 갤러리를 갖춘 대형 교회가 있다. 여자는 하루에도 몇 번씩 산에 가거나 교회에 간다. 집이 아니라도 여자가 시간을 보낼 곳은 손쉽게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 예배당에 가서 여자는 무슨 기도를 할까. 나는 갑자기 그것이 궁금하다. 여자는 CD 한 장을 골라 오디오에 집어넣는다. ‘쓸쓸한 달빛 아래’로 시작되는 고음의 소프라노가 청결하고 고요한 거실에 흐르기 시작한다. 이제 여자의 시간이 시작된 것이다.

여자는 설거지통에 쌓여 있는 빈 그릇들을 지나쳐 내 두 문을 활짝 연다. 여자의 아침식사가 준비될 차례다. 오른쪽 문 안쪽 서랍에서 커피를, 조미료 홀더에서 소금 통을 꺼낸다. 달걀도 하나 집어 든다. 커피와 함께 삶은 달걀을 소금 찍어 먹는 게 첫 순서다. 여자는 주전자에 물을 채워 가스레인지에 올린다. 휘리릭. 주전자가 휘파람 소리를 내며 자글거린다. 잘록한 주둥이에서 더운 김이 솟아오른다. 후텁지근한 열기가 퍼져 나간다. 여자는 가스 밸브를 잠그고 투명한 유리잔과 커피세트를 꺼낸다. 적당량의 소금을 붓고 다시 냉장고 문을 연다. 여자는 허리를 굽히고 냉장고 안을 헤맨다. 소금 통이 있던 자리가 어디더라. 여자는 그 빈자리를 쉽게 찾아내지 못한다. 길을 잃은 사람처럼, 막다른 벽 앞에 부딪힌 사람처럼. 막막하고 어두운 눈빛이다. 어디더라, 어디더라, 쉽사리 그 빈자리를 찾지 못하는 여자는 급기야 내 이름을 부른다. 어디지, 세라! 세라, 세라, 음…… 아! 세라. 나를 부르는 여자의 소리가 엄마를 찾는 어린 계집아이 같기도 하고, 간병인을 찾는 환자의 신음 같기도 하다. 그 이름을 부르는 순간 거짓말처럼 찾아야 할 그 지점이, 소금 통이 있던 자리가 여자의 눈에 들어온다. 여자는 소금을 내 속에 안전하게 넣는다. 새벽부터 남자의 식사를 준비하고 산책까지 다녀온 여자는 그것으로 부족하다. 야채 통에서 상추를 꺼내고 쌈장을 꺼내고 어제 먹다 남은 불고기를 꺼낸다. 커다란 식탁이 크고 작은 그릇과 온 우주를 기반으로 한 울긋불긋한 재료로 화려해진다. 거한 아침식사가 끝나자 여자는 이제 집 청소를 시작한다. 혼자서 이 크고 넓은 집을 청소하자면 시간이 꽤 걸린다. 하지만 여자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는다. 이때만큼은 남자의 방을 서슴지 않고 들어간다. 남자가 자고 일어난 침대를 정돈하고 시트를 탈탈 턴다. 텔레비전 위의 먼지도 닦고 책상 위도 정리한다. 앞 베란다에 있는 작은 화단에 물도 준다. 뒤 베란다 테이블에 있는 재떨이도 비운다. 옷장을 열어 와이셔츠를 점검하고 더러워진 것은 세탁소에 맡기기 위해 가려낸다. 아무렇게나 바닥에 떨어져 있는 속옷이나 평상복들을 들고 다용도실로 가져간다. 여자는 빨아야 할 그들의 옷을 세탁기 안에 집어넣는다. 전면으로 나 있는 투명한 뚜껑을 통해 빨래가 돌아가는 것을 지켜본다. 남자의 초록색 긴팔 티셔츠가 여자의 하얀색 티를 휘감는다. 남자의 검정 양말이 여자의 청바지에 닿았다가 멀어지길 반복한다. 여자의 브래지어가 남자의 러닝셔츠와 뒤엉킨다. 남자의 파자마 바지가 여자의 보라색 팬티를 삼킨다. 남자의 옷과 여자의 옷이 한데 뒤섞인 채 돌고 도는 것을 여자는 물끄러미 바라본다. 여자의 얼굴은 무표정한가 하면 권태로운 듯하고 원망스러운가 싶으면 체념이 들어 있다. 거실의 오디오에서는 때마침 ‘그저 한숨 쉬며 물어볼까요. 나는 왜 살고 있는지……’ 어쩌고 하는 노랫말이 들려온다. 여자는 픽, 웃었다. 단순하고 지극히 감상적인 노랫말은 내가 들어도 퍽 시시하다. 반복 설정된 오디오에서는 그 하나의 노래만을 쉬지 않고 내보내고 있다. 오디오에서는 음악이, 텔레비전에서는 나지막한 방송 소리가 조용한 거실에 소음을 채운다.

여자는 로봇처럼 생긴 미국제 투박한 청소기를 민다. 카펫과 소파와 커튼, 침대의 미세 먼지와 진드기를 제거하느라 여자의 몸은 습해진다. 남자의 방과 여자의 방과 아무도 쓰지 않는 빈 방을 싹싹 밀고, 남자의 욕실과 여자의 화장실과 베란다에 물청소를 한다. 화분에 있는 여러 종류의 식물에게 관대하게 고루고루 물을 준다. 세탁이 완성되었음을 알리는 벨소리가 들린다. 여자는 세탁기에서 한 뭉텅이로 똘똘 뭉쳐 있는 그들의 옷가지를 꺼낸다. 스테인리스 건조대를 베란다에 펴고 빨래들을 가지런히 널기 시작한다. 남자의 옷과 여자의 옷을 따로 분리하지 않고, 짧은 것은 짧은 것대로 긴 것은 긴 것대로 그 길이에 따라 순차적으로 넌다. 빨래를 다 널고 나서도 여자는 건조대 옆에 서 있다. 빨래들과 나란히 서서 햇빛을 받고 있다.

창밖에서 달달거리는 엔진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여자는 창밖을 내려다본다. 노란색 셔틀버스가 아파트 현관 앞에 시동을 건 채 서 있다.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뛰어온다. 얼마나 힘껏 달리는지 분홍색 원피스가 맹렬하게 펄럭인다. 아이는 간신히 버스 앞에 도착해서도 곧장 차에 오르지 못하고 무릎을 구부리며 숨을 몰아쉰다. 오로지 숨 쉬는 것만이 최고로 소중하다는 듯 눈을 꼭 감은 채 입을 벌려 숨을 들이마시고 내뿜는다. 가슴에 손을 올려놓고 숨 가쁘게 헐떡이던 아이는 무엇이 즐거운지 환하게 웃고 있다. 붉게 상기된 볼, 웃음을 피워 올리는 입술. 소리 없는 함박웃음이 13층에서도 선명하게 보인다. 아이의 눈과 코와 입과 팔다리, 몸 전체가 한꺼번에 웃고 있다. 저 웃음을 단단히 붙잡고 쥐어짜면 ‘까르르’ 소리가 손금에 박힐 것만 같다. 빛나는 얼굴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는 아이에게서 여자는 시선을 떼지 못한다. 여자는 문득 한 가지를 깨닫는다. 그리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소녀였을 때의 그녀가 꿈꾸던 미래와는 사뭇 다른, ‘오늘’을 살고 있다는 것. 하지만 산다는 것이 어디 쉽사리 마음대로 되는가. 여자는 그 또한 순순히 수긍한다. 

거실의 텔레비전 화면에는 CF가 한창이다. 하루에도 몇 십 번씩 되풀이되는, 그러나 너무 짧아서 질릴 틈이 없는 수많은 광고 중에서 가장 나를 매혹시키는 하나의 광고가 흐른다. 발랄한 여성의 모습이 화면에 클로즈업된다. 발목까지 올라오는 연두색 장화를 신은 두 발, 손에는 꽃무늬 장갑을 끼고, 머리에는 리본이 달린 밀짚모자를 쓰고, 허리 뒤로 초록색 앞치마의 끈을 살짝 동여맨, 바구니를 든 금발의 곱슬머리 아가씨. 금방이라도 밭으로 달려갈 듯한 차림새로 집어 드는 싱그러운 과일과 야채들. 멜론, 파프리카, 오이, 당근 등등. 그러나 그 싱싱한 것들을 품고 있는 곳은 밭이 아닌 견고한 나의 내부. 메탈 느낌이 나는 스테인리스 스틸 색상의 내 모습이 전면으로 부각된다. 여자는 베란다에 서서 햇볕을 쐬던 그대로 화면 속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아무 생각 없는 무심한 얼굴로 여자는 거실을 가로질러 내게 다가온다. 목이 마르지 않고 배가 고프지 않아도 내 속을 열고 또 연다. 내가 이끄는 대로.

날파리 몇 마리가 날아다닐 뿐 오후의 거실은 청결하고 한가롭다. 엄마야! 하는 날카로운 비명이 들리기 전까지는. 점심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를 마치고 음식물 찌꺼기를 처리하던 여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외침이다. 다용도실의 검정 비닐봉지 속 수북이 쌓인 포도 껍질들 위에 버글거리는 것들이 있는 것이다. 작고 누렇고 꾸물대는 것. 그 이름도 형체도 떠올려 본 적 없는 생소하고 혐오스러운 것, 구더기. 그것이 여자를 충격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여자는 두 주먹을 움켜쥔 채 성큼 물러선다. 당혹스럽고 어이없는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본다. 이 고요하고 깔끔한 집에 그런 생명체가 있다니!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 때는 여름이고 밀폐된 쓰레기봉지에는 단내 나는 포도 껍질이 한가득 있다. 하지만 구더기라니. 버려지는 음식물들이 날마다 넘쳐나지만 구더기라니. 여자의 시선이 주방과, 그리고 주방 한가운데에 우뚝 선 나를 바라본다. 눈앞의 것들이 문득 낯설다는 표정이다. 여자는 다시 비닐봉지를 들여다보고, 물러서고, 손을 내밀었다가, 다시 물러서기를 반복한다. 치워야 하는데 차마 손을 대고 싶지 않은 것이다. 

여자는 후유, 숨을 한 번 크게 고른다. 여자는 생각한다. 이럴 수도 있지. 산다는 것이 늘 산뜻할 수만은 없으니까. 여자는 이번 일 또한 쉽사리 수긍한다. 광고 속의 백인 여성이 낀 꽃무늬 장갑이 아닌 노란색 방수용 설거지 장갑을 끼고 과일 바구니 대신 커다란 비닐 포대를 손에 든다. 광고 속의 싱싱한 과일 대신 가느다란 젓가락으로 야멸치게 몸통을 꿈틀거리는 구더기들을 집어 올린다. 검정 쓰레기봉지를 그 속에 푹 집어넣고 매듭을 동여맨다. 현관 밖에 가져다 놓는다. 쓰레기봉지가 있던 근처에 살충제를 흥건히 뿌리고 휴지로 싹싹 닦는다. 최고급 스페인산 양변기 뚜껑을 열고 변기 속으로 구더기의 흔적이 묻은 휴지를 버린다. 여자는 물을 내려 휴지 뭉텅이가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을 들여다본다. 살아 있는 몇 마리가 변기 안에서 둥둥 떠 있다.

여자는 두 손을 들어 온몸을 긁기 시작한다. 머리를 푹푹 긁고 팔뚝을 긁고, 등판을 긁는다. 허벅지를 긁고 발등을 긁고 얼굴도 북북 긁는다. 사정없이 긁는다. 입고 있던 옷들을 훌렁훌렁 벗고 샤워기 앞에 선다. 선머슴처럼 짧은 머리카락, 거무튀튀한 등, 굴곡 없는 몸, 허리, 엉덩이, 허벅지, 다리가 거울 안에 있다. 여자는 거울을 등지고 선다. 거울 속에 드러난 뒷모습이 샤워하는 여자를 ‘다른 여자’ 보듯 한다. 긁어서 벌게진 살은 뜨거운 물로 더 벌겋게 달아오른다. 여자는 샤워하는 동안 쉬지 않고 입을 벌려 중얼거린다. 구구단을 외우듯 뜻 없는 말들을 물처럼 쏟아낸다. 마치 샤워기의 구멍들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물이 아니라 ‘말’ 이라도 되어서 그 말들의 세례를 받아 내는 것처럼. 아닌 게 아니라 간혹 “어, 왜 물이 안 나오지. 이상하네” 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분명히 샤워기의 구멍들에서는 물줄기가 쏟아지는데 여자는 이상하다는 듯 손바닥을 펴고 샤워기를 골똘히 들여다보는 것이다. 물 아닌 다른 것들이 새어 나와서 참 곤란하고 이상하다는 듯. 그러니 어쩌면 지금도 뒤엉킨 말들이 샤워기의 구멍 속에서 와글와글 새어 나와 여자를 젖게 하는지도 모른다. 가끔은 걱정스러운 여자의 정신세계 안에서 말이다. 여자의 손등에 물방울이 툭 떨어지면 “상관없다니까” 하고 여자가 툭 내뱉는다. 여자는 수건으로 몸을 닦지도 않고 욕실을 나온다. 지치지 않고 반복되는 처연한 노랫소리가 여자의 젖은 몸에 달라붙는다. 여자의 취미는 그렇다. 흐르는 물처럼 끊임없이 중얼거리며 샤워하기. 하나의 음악을 골라 하루 종일 그 노래만 듣기. 베란다의 건조대에 널어 둔 빨래는 이제 제법 말라 있다. 고루고루 햇빛을 받으며 바짝 말라 가는 그 모습이 참 태평스럽다고 여자는 생각한다. 마치 ‘이 집은 그런 대로 평안하답니다’라고 말하는 듯. 점점 비스듬해지고 작아지는 오후의 볕드는 거실 끄트머리에 그렇게 여자는 우두커니 서 있다. 흠뻑 젖어 무거워진 빨래처럼.

옷을 갖춰 입고 온 여자는 빵에 아이스크림을 발라서 우적우적 먹는다. 삼키기도 전에 그 입에 마시멜로를 넣고 초콜릿도 집어넣는다. 그것들을 한꺼번에 씹고 삼키려니 목이 막힌다. 커억, 여자의 목에서 이상한 소리가 새 나온다. 뭉개진 음식물이 공중으로 튀어 나온다. 눈동자가 벌게져서 가슴을 탕탕 친다. 입안에 든 음식물을 어쩌지 못해 보대끼는 품이 우스꽝스럽다. 마치 억누를 수 없는 울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처럼. 저러다 숨넘어가는 게 아닐까. 청아한 여성의 고음 목소리가 고요한 거실을 울린다. 노래는 금방 끝나지 않는다. 길기도 길다. ‘나 슬퍼도 살아야 하네. 나 슬퍼서 살아야 하네’ 이 대목에 이르자 여자의 가슴은 더 심하게 오르내린다. 여자는 터질 것 같은 볼과 입을 손으로 막고 욕실로 들어간다. 입 안에 있는 것을 모조리 뱉어 내고 게워 내기 시작한다. 인터폰이 울릴 때까지 여자는 욕실 바닥에 주저앉아 있다. 여자는 비척비척 걸어가 모니터를 확인한다. 생협입니다, 소리치는 낯익은 남자 얼굴. 삼일 전에 주문한 식료품들이 배달되어 온 것이다. 여자는 문을 열어 준다. 남자는 하얀 냉동 박스에 담긴 먹을거리를 한가득 내려놓고 간다. 여자는 그것들을 내 안에 차곡차곡 집어넣기 시작한다. 여백 없이 가득 채워진 내 안을 들여다보는 여자는 안심한다. 여자는 거실 벽에 붙은 시간을 확인한다. PM 6:00 슬슬 저녁식사를 준비해 두고 나갈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여자는 또 다시 숲을 산책하거나 갤러리에서 차 한 잔을 마시거나 영화 한 편을 보거나 서점에 가거나 PC방에 가거나 거리를 걸어 다닐 것이다. 퇴근해서 들어온 남자의 방에 불이 꺼질 때까지.



7


네 번의 ‘띠리릭’ 소리가 나면서 비밀번호가 풀리고 현관문이 열린다. 초인종을 눌러 본 지 오래된 남자는 그렇게 혼자서 들어선다. 남자는 가방을 식탁 의자에 내려놓고 내게로 먼저 다가선다. 여자가 저장해둔 꽉 찬 음식들을 본다. 남자는 우선 톡 쏘는 스파클링 와인을 잔에 가득 채워 천천히 목으로 넘긴다.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샤워를 하고 나온다. 리모컨을 들어 오디오 버튼을 누르자 여자가 줄기차게 듣던 음악, 슬퍼서 살아야 한다던 처연한 목소리가 낮게 깔린다. 미간을 좁히는 남자의 표정, 오래전에 그들이 함께 보았던 이 음악의 뮤지컬을 어쩔 수 없이 기억하는 거다. 남자는 평상시와 다름없는 저녁 시간을 보낸다. 여자가 차려 놓은 저녁식사를 하고, 자신이 선택한 풍부한 디저트로 거하게 마무리를 한다. 텔레비전 뉴스를 보고, 책을 읽고, 노트북으로 확인해야 할 나머지 일들을 처리한다. 그동안 쉬지 않고 내게로 온다. 남자의 손과 입은 내내 분주하다. 밤이 깊어지면 남자는 침대에 눕는다. 기포가 뽀글거리는 커다란 와인잔을 침대 옆 테이블에 올려 둔 채. 뱃속은 좀 거북하지만 마음은 지극히 포만한 상황을 즐기며 몽롱한 속에서 잠을 기다린다. 한없이 무료하고 한없이 익숙하고 한없이 평온한, 황폐한 고요의 시간이 엄격하게 계산된 ‘그들의 스케줄’ 을 따라 흐르고 있다.



8


여자가 돌아온다. 방에 들어간다. 짙푸른 밤의 정적이 거실에 내려앉는다. 고요하고 고요하다. 콘크리트 덩어리로 이루어진 건축물이 아니라 덩치 큰 벙어리, 병든 짐승의 내장 속처럼. 말할 수 없는 침묵으로 가득한 공간을 오늘의 보름달만이 지켜보고 있다. 이따금씩 나의 숨소리만 ‘지이잉’ 새 나온다. Quiet Package가 적용되어 최저 소음을 자랑하지만 고요한 이 집에서는 그마저도 큰 소리다.

문이 열리고 여자가 나온다. 아직 첫 번째 알람이 울리려면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 잠이 안 오는지 말짱한 얼굴이다. 여자는 식탁과 거실과 베란다를 걸어 다닌다. 내 몸을 열어 식료품을 꺼낸다. 이것저것 맛보기 시작한다. 육포를 뜯고, 아몬드를 씹는다. 마시멜로를 입에 넣고, 치즈를 우물우물 삼킨다. 남자가 마신 흔적이 있는 에스 드 살롱 빈티지를 꺼낸다. 연인의 속삭임 같은 소리가 난다는데 그러지도 않군, 혼잣말을 하면서 마개를 연다. 꿀꺽, 목 안으로 흘려 넘긴다. 여자는 샴페인을 마시며 밥을 만들고 반찬을 만들고 국을 만들기 시작한다. 이것저것을 씻고 넣고 썰면서 내 몸을 열었다가 닫기를 반복한다. 쌀을 씻어 밥솥에 넣고, 야채를 썰고, 냄비에 물을 끓인다. 문제가 될 일은 아무것도 없어 보인다. 고요하고 질서 있게 움직이던 여자가 우뚝 멈춘 그때까지는. “소금이 어디 있지.” 그 단순한 말이 여자의 입에서 흘러나오기 전까지는. 문제는 늘 그렇지만 항상 사소한 것에서 출발한다. 그들의 고요한 스케줄처럼.

여자는 내 안에 머리를 쑥 디밀었다. 설탕이며 소금, 향신료 등의 상하지 않을 조미료들을 보관하는 홀더를 살펴본다. 가스레인지의 국은 끓고, 간을 맞추던 여자의 한 손에는 숟가락이 들려 있다. 여자는 무릎을 꿇고 내 안의 이것저것을 헤집어 보기 시작한다. “어제도 썼는데. 분명 여기에 넣어 둔 것 같은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찾고 있는 것이 좀처럼 발견되지 않으니 여자는 조바심이 난다. “발이 달렸어, 눈이 달렸어, 날개가 달렸어.” 중얼거리며 여자는 내 속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차근차근 꺼내기 시작한다. 웰빙 잡곡실에 있는 콩과 현미와 녹두를 꺼내고, 유기농 밀폐 야채실에서 토마토와 사과 봉지와 수북한 포도송이들을 빼내고, 차곡차곡 쌓여 있던 반찬통들을 꺼내고, 우유와 요구르트와 주스 병들과 케첩 통 마요네즈 통을 꺼내고, 매실 원액과 꿀, 고추장을 꺼내고……. 꺼내고 꺼내도 끝이 없다. 내 속은 무한히 넓고 거대해서 여자가 집어넣고도 잊어버린 것들이 저 안쪽 구석구석에 들어 있는 것이다. 이러다 말겠지, 싶던 여자는 좀처럼 멈추지 않는다. “이게 다 뭔 필요야. 소금이 없는데.” 여자는 집요하다. 소금만을 요구한다. 여자의 눈빛에 견딜 수 없는 짜증이, 억눌러 왔던 분노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카레 봉지가 튀어 나오고 돼지고기와 닭다리도 바닥에 널브러진다. 한 무더기의 계란이 바닥에서 깨지고 아이스크림이 떨어진다. 얼음이 우박처럼 투둑, 쏟아진다. 마치 자기의 소중한 것을 빼앗겼다는 듯이 내 안을 헤집는 손길이 거칠다. 냉동실, 냉장실 가릴 것 없이 보이는 대로 있는 족족 집어던진다. 뭐야, 이 여자가 왜 이러는 거야. 찾던 것이 없으니 바짝 독이 오르는 건가. 잠이 안 오니 음식을 만들고, 소금을 찾다 없으니 이왕 뒤지는 마당에 냉장고 청소라도 할 요량인가.

거실은 난장판을 이룬다. 내 몸은 어느새 텅 비어 버린다. 회전 바퀴가 달린 나는 가벼워진다. 여자가 미는 대로 밀린다. 여자의 가슴은 가쁜 숨을 몰아쉬느라 빠르게 오르내린다. 나는 여자를 집요하게 바라본다. 혹시 여자는 나를 눈치 채었는가. ‘sherah’라는 인간들이 지어놓은 이 이름 안에 숨어 있는 ‘나’를 여자가 감지한 것인가. 그러나 다음 순간 그렇지 않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어디로 간 거야, 도대체!” 절망적으로 내뱉는 여자, 왜 없냐고 그녀가 탄식하는 대상은 ‘소금’이다. 다만 소금! 하지만 그렇다고 저토록 이성을 잃어버릴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한 가지 음악만 되풀이 듣고 샤워할 때는 실성한 여자처럼 중얼거리는 집요한 취향을 가진 여자라지만. 여자의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을 보니 정말 겨우 ‘소금’이 문제인지 잠시 헛갈린다. 가벼워진 내 몸을 이리 밀고 저리 밀던 여자. 제대로 안지도 못할 거면서 두 팔로 나를 부둥켜안는다. 나의 육체가 한없이 커서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여자여, 그대가 나를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도대체가 나 없이 배를 채울 수 있다고, 만족이라는 것이 얻어진다고 생각하는가. 나를 통하지 않고는 제대로 요리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 건가. 나를 통하지 않고는 너의 남자에게 닿을 수 없음을 모르는 건가. “이건 아니야, 아니라고!” 여자가 말한다. 손으로 내 등을 친다. 발길질을 한다. 심히 불쾌하다. 여자는 나를 거실 끝으로 밀었다. 베란다로 나를 끌고 가려는 것인가. 화단과 창문뿐인 저곳으로? 설마. 나는 움직이지 않는다. 여자는 갑자기 밀리지 않는 나를 다시 손으로 치고 발로 차기 시작한다. 보이는 것, 손에 닿는 것들을 내던지기 시작한다. 그것들이 내 몸에 닿는다. 더러는 양 날개가 열린 내 몸 안으로 들어오기도 한다. 여자는 골프채를 휘두른다. 밥통을 집어던진다. 꽃병을 던진다. 이 소란이 아래위층에 전해졌는지 누군가 현관 인터폰을 누른다. 경비실에서 호출 신호가 온다. 그만두지 못해! 나는 여자에게 명령한다. 여자는 멈칫하며 나를 바라본다. 나는 날뛰는 여자를 냉정하게 바라보았다. 네가 나를 이길 수 있어? 나 없이 살림을 할 수 있어? 이 도심지 한복판에서? 좋아, 마음대로 해! 그만두지 않는다면 너는 모든 사람에게 미친 여자가 되는 거니까. 그것도 나쁘지 않군. 넌, 어찌하여도 나를 이기는 방법을 몰라. 네가 이 순간 나를 어떻게 하더라도 네 삶에서 나를 영원히 밀어낼 수는 없으니까.



9


문이 화들짝 열리고 남자가 잠이 덜 깬 얼굴로 나온다. 나는 남자를 반겼다. 어서 오라고. 아! 세라, 하고 내게 달려오라고. 나를 지키라고. 그러나 남자는 바닥에 어질러진 온갖 식료품들과 흐트러진 물건들, 그리고 짧은 머리카락이 사정없이 헝클어진 채 씩씩대고 있는 여자와 텅 비어 버린 속을 열어 보인 채 서 있는 나를 보며 멍한 표정을 지을 뿐이다. 여자와 남자는 갑자기 맞닥뜨린 이 상황이 당황스러운 듯 황망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본다. 그들은 너무나 오랜만에 마주 본다. 남자가 천천히 입을 연다. 여자도 나도 남자가 무슨 말을 할지 기다린다. 남자는 몇 차례 헛기침을 한다. 

“지금…….”

여자도 나도 남자의 입에서 나올 다음 말을 기다린다. 그러나 남자의 입에서는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는다. 뭐라고 말해야 될지 스스로도 알 수 없다는 표정이다. 왜 아무 말도 안 하는 거야. ‘미쳤어!’라고 하거나 ‘도대체 뭐 하는 거야!’라고 하거나 ‘이 새벽에 웬 난리야!’쯤은 나와야 하는 것 아닌가. 이봐, 당신의 여자가 한 짓을 보라고. 내게 어떻게 했는지를. 나는 남자의 마음을 파고든다. 남자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그래, 나야, 나! 나라고, sherah! 당신이 원할 때마다 당신으로 하여금 만족을 취하게 하던 나. 하지만 남자는 말이 없다. 나는 집요하게 남자를 사로잡는다. 그때였다. 여자의 부르짖음과 함께 여자의 손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나를 밀어뜨렸다.

“무슨 말이라도 좋으니 아무 말이라도 해보라고!”

그 말과 동시에 여자는 이해할 수 없는 힘으로 나를 거실 한가운데에 쓰러뜨린 것이다. 두 개의 문짝이 열린 채 바닥에 엎어져 버린 나를, 나는 믿을 수 없다. 남자는 망연한 표정으로 여자를 바라본다. 여자는 일그러진 얼굴로 숨을 몰아쉬며 남자를 바라본다. 나는 그들과 그리고, 나를 바라본다. sherah, 어이없이 무너져 버린 이 거대한 냉장고를.《문장 웹진/2008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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