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오에게

 

자오에게




조해진




1


자오를 만나기 전, 나는 2층 카페의 창가 바에 앉아 맞은편 주택가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저 나무의 다갈색 잎은 원래 무슨 색이었을까. 붉은 색 지붕은, 길모퉁이에 서 있는 젊은 여자의 핑크 스커트는 내가 바라보며 인지하고 있는 그 색깔이 맞는 것일까. 아주 오래 전부터, 나는 내가 보는 세상을 신뢰할 수 없었고 한 마디의 말로 단정 지을 수도 없었다. 자오를 만나기 전, 그러니까 나는 그런 류의 인간이었던 것이다.

 

 

2137입니까? 어느새 다가온 자오가 내게 물었다. 그건, 내가 사용하는 핸드폰의 뒷자리 숫자 4개였다. 나는 꽤나 이런 일에 능숙한 여자처럼 거만하게, 아무런 감정도 싣지 않은 듯한 무심한 시선으로 자오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단 한 번도 남의 눈치 따위는 본 적이 없으며 다만 시간을 소비하기 위해 마음의 사치만을 찾아다녔을 뿐인 조금은 한심한 아웃사이더처럼, 혹은 사회적 계급이나 현실적인 액수로 치환되는 노동의 질에 대해 순박하리만큼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 자족적인 자유주의자처럼. 몇 년 만에 신어 본 하이힐과 보통 때와 달리 짙게 한 눈화장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사실 나는 조금 우쭐해져 있기도 했다. 그리곤, 내가 스스로에게 부과한 그 역할에 맞는 액션을 취하듯, 은색의 담배 케이스에서 길쭉하게 생긴 담배 하나를 꺼내 입에 물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조금은 머쓱해하던 자오가 머리를 긁적이며 내 곁에 앉았다. 하지만 자오의 태도에서 경직된 긴장감은 없었기에 그 짧은 순간, 나는 갑자기 모든 것에 흥미를 잃어버리기도 했었다.

자오는 잔업이 있어 늦었다며 사과부터 했다. 나는 괜찮다고 말했다. 괜찮다는 말과 함께, 내가 내쉬는 담배연기가 자오에게로 흘러갔다. 그것은 마치 내 몸에서 빠져나가는, 목적지를 상실한 한 줌의 영혼 같았다. 자오는 그 무엇에도 크게 신경 쓰지 않으며 터무니없이 큰 가방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우리가 처음 만난 그날로부터 또 많은 시간이 지난 어느 날, 미친 듯이 내가 가구점 뒷문을 두드렸을 때 땀에 젖은 해쓱한 얼굴로 문을 열어 준 자오는 그 가방의 정체에 대해 말해 준 적이 있었다. 그 가방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오의 느리게 뛰는 빛바랜 푸른 심장을 진정한 푸른색으로 느낄 수 있게 되리라곤, 물론 그 카페의 2층 창가 바에서는 짐작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봉투를 내밀며, 세어 보시죠, 아직 앳된 소년 같은 조금은 고음의 목소리로 자오는 말했다. 됐어요. 여전히 비스듬히 비껴가는 음성으로 나는 대답했다. 어차피 말이죠. 그제야 자오가 빤히 나를 들여다봤다. 어차피 액수가 틀리면, 우린 당신을 신고할 거니까요. 순식간이었지만, 나는 자오가 아주 희미하게 웃다가 금세 단단하게 표정을 닫아 버리는 것을 놓치지 않고 보았다. 가장 감추고 싶었던 무언가가 들킨 기분이었다. 가령, 이런 일이 내게는 처음이고 나는 자오 같은 신분이 불확실한 사람을 만난 적도 없으며 내가 잘하는 것이라곤 그저 정해진 자리에 앉아 전화를 받거나 고객에게 커피를 날라다 주는 것뿐이라는 사실 같은 것. 자오는, 내가 신뢰하지 못하고 있던 세상의 어떤 비밀스런 문을 열고 나와 나에게만 들리는 작은 속삭임으로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속삭임을, 그때의 나는 듣고 싶지 않았다.

자오가 준 현금봉투를 챙긴 후, 여러 번 흰색의 종이로 싼 그것을 나는 바에 올려놓았다. F-4 비자가 부착된 중국 여권이었다. 자오가 그것을 얻기 위해 쓴 현금은 곧 자오의 인생이었다는 걸 우린 침묵으로 모른 척하고 있었다. 그때까지 자오는, 동대문 쇼핑센터 근처의 가방 공장에서 한 시간에 5,000원씩 받으며 하루 10시간에 이르는 강도 높은 노동을 감당하고 있었다. 자오가 나에게, 아니 나와 연결된 위조문서 제작자에게 준 현금은 그의 시간이었고 육체를 소모해 온 증거였을 것이다. 공중전화기 앞에서 열 번에 아홉 번은 필요 이상의 인내심으로 돌아서야 했던 작은 한숨과 공장과 고시원만을 오가며 스물여섯의 청년을 남김없이 헌납한 후에야 얻게 된 한 장의 위조된 여권을 자오는 손바닥에 올려놓고는 한참을 내려다봤다.

그날, 우리의 만남은 십 분이 채 되지 않았을 것이다. 커피가 식어 가는 동안 우리는 더 이상의 말을 나누지 않은 채 그저 나란히 창밖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이 일은 벌이가 좋습니까? 자오가 물었을 때, 나는 벌써부터 의자에 걸쳐 놓았던 프렌치코트를 껴입고 있었다. 그 일의 벌이를, 나는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자오를 만나기 일 주일 전, 구인 구직 사이트에서 수상쩍은 게시물을 보고 영등포 뒷골목의 지저분한 인쇄소를 찾아가 받아낸 그 일은 일회성 아르바이트에 불과했다. 자오라는 조선족 중국인을 만나 가짜 비자가 포함된 위조 여권을 건네주고 현금을 챙겨 오는 대가로 내가 받게 될 일당은 10만 원이었고 그 돈은 오로지 위험수당에 해당된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만에 하나 일이 틀어졌을 때 곧바로 자오를 신고할 수도 있는 그 ‘우리’에 나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럭저럭요. 애매한 내 대답에 자오는 말없이 고개만 몇 번이나 끄덕였다. 안 가세요? 마지막으로 그렇게 묻자, 자오는 조금은 우울해 보이는 옆모습을 숨기지 못한 채 천천히 대답했다. 더 있다가 가겠습니다.

자오를 남겨두고 카페를 나오니 골목 끝에서부터 바람이 불어 왔다. 골목 모서리,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거인 한 명이 아랫배에 잔뜩 힘을 주고 있다가 내가 나타나자마자 힘껏 하아아, 입김을 불어대는 것 같았다. 가까운 지하철역으로 걸어가 여자화장실 마지막 칸에서 자오가 건넸던 봉투를 꺼냈다. 내 다섯 달 월급이 들어 있었다. 봉투를 다시 그 인쇄소에 갖다 주지 않는다면 어차피, 인쇄소의 누군가는 나와 부모님이 살고 있는 18평 아파트로 어깨들을 데리고 찾아올 터였다. 욕심내어서는 안 되는 현금봉투를 다시 얌전히 가방에 넣으며 나는 자오라고 불리는 스물여섯의 중국인이 또 무엇을 목표로 살아가게 될지, 다만 그것이 조금 궁금했을 뿐이다.



2


그 전화가 오기 전까지 나의 일상은 그 어떤 위험한 일 없이 안전하게, 안전하면서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무료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나사가 빠졌는지 사무용 의자는 내가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새된 비명을 지르며 작은 변화에도 민감하게 거부 반응을 보였고, 틈날 때마다 구인 구직 사이트에 들어가 보았지만 적당한 아르바이트는 찾을 수 없었다.

영등포 뒷골목의 인쇄소로부터 또 다른 일을 해 달라는 전화는 더 이상 오지 않았다.

근처에 있는 아파트가 재개발된다는 소문 때문에 한 달 사이, 내가 일하고 있는 중개소를 중심으로 세 군데의 중개소가 새로 개업했다. 고객의 발길은 자연스럽게 뜸해졌고 사장은 자주 초조하게 사무실을 오가며 줄담배를 피우곤 했다. 내가 그렇게 담배연기만 자욱한 네모난 사무실에 내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처박아 놓고는 가끔씩 며칠 전에 만난 중국인 남자를 떠올리고 있을 때, 자오는 다니던 공장에서 해고되어 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우리가 다시 만났을 때 흔한 일이죠, 라고 자오는 여전히 덤덤하게 말했다. 임금이 체불되어 자오를 비롯한 몇 명의 외국인들이 사장에게 항의를 하자 사장은 불법 체류자의 신분을 거론하며 또 한 번 단체행동을 했다가는 출입국사무소에 신고해 버리겠다고 오히려 화를 냈다. 자오는 며칠 전 나에게서 받은 위조된 비자와 여권을 내놓았지만 이미 자오가 불법 체류자임을 알고 있었던 사장은 그저 시시하다는 듯 비웃으며 먼저 회의실을 빠져나갔다고 했다. 그 모든 것이 너무도 흔한 일이라고, 자오는 이미 식은 커피를 조금씩 아껴 마시며 다시 한 번 강조해서 말했다.

-도와주시겠습니까?

여느 날과 같던 목요일 오후, 그렇게 자오에게서 전화가 왔을 때 나는 무턱대고 어디냐고 물었다. 2137 번호를 사용하는 내 핸드폰 너머로 사람들의 소란스런 속삭임과 불명확한 멜로디가 들려왔다. 내가 왜 당신을 도와줘야 하나요? 라고 되묻지 못한 내가 그곳에서도 거인들이 입김을 불어대나요? 같은 어수룩한 질문을 해대지 않은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퇴근 시간 즈음부터 나는 나사 빠진 의자와 함께 안절부절 못했다. 그날따라 6시 직전에 고객 한 명이 찾아와 근방에 전세로 나온 원룸을 문의해 왔다. 사장의 눈치도 보였지만 무엇보다 오랜만에 찾아온 고객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 고객을 사장 소유의 승용차에 태워 원룸을 보러 가야 했다.

자오는, 우리가 정한 약속 시간으로부터 2시간이 지난 밤 9시까지, 그 2층의 카페 창가 바에 앉아 나를 기다렸다. 아주 긴 세월을 그 자세로만 앉아 있었던 것처럼 카페의 움직이는 소음 속에서도 자오의 실루엣은 견고했고 그를 닮아 과묵할 듯한 그림자는 그의 등 뒤 사선에서 묵묵히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눈화장도 하지 않았고 하이힐도 신지 못한 내가 다가가 곁에 앉자 자오는 다소 놀란 얼굴로, 하지만 여전히 긴장감을 찾을 수 없는 자연스런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는 나에게 담배를 권했지만 나는 사양했다. 그리고 자오는, 불법 체류자여서 해고된 것과 거금을 들여 나와 연결된 브로커에게서 산 위조 비자와 여권이 무용지물이 되었다는 그 얘기를 천천히 시작했다.

-갈 곳이 없습니다. 고시원엔 세 달째 방세를 못 내서 더 이상 있을 수도 없고요.

그러니까 그는, 내가 그를 도와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거였다. 그가 마시던 식은 커피도 바닥을 보일 즈음, 나는 자오보다 대여섯 발자국 앞서 걸으며 카페를 나와 내가 일하는 중개소 사무소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중개소에서 세 정거장 더 가면 그곳이 나왔다.

그곳은, 붉은 매직으로 ‘폭탄세일’과 ‘폐업처분’을 갈겨쓴 종이가 닫힌 셔터에 무질서하게 붙어 있는 빈 가구점이었다. 이 년 전부터 문을 연 고가의 수입 가구점은 처음부터 손님이 들지 않았다. 재개발을 목 타게 기다리고 있는 강북의 작은 동네에서 독특한 무늬의 질 좋은 활엽수로 짠 킹사이즈 침대나 물소가죽으로 커버링을 한 고급스런 소파를 자기 집에 들여놓고 싶어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을 테니까. 계속되는 적자에 허덕이던 가구점 주인은 가구마저 챙기지 못한 채 도망가 버렸고 건물주는 권리금을 무리하게 내리면서까지 가게를 내놓았으나 넉 달째 급매물로 나온 이 가게를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팔리지도, 처리되지도 못한 고가의 원목 가구들이 무방비로 버려진 가구점은 황폐한 숲처럼 춥고 스산했다.

-10월까지는 괜찮을 거예요. 하지만 그 이상은 안 돼요.

내가 말했을 때, 자오는 그 커다란 가방을 섬세한 조각이 돋보이는 체리나무 콘솔 옆에 내려놓고는 침대에 주저앉은 채 깊이 숨을 들이켰다. 나무 냄새, 그가 말했을 때 나는 화장대 앞 의자에 앉으며 거울에 비치는 자오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나무 냄새가 나는군요. 익숙합니다.

-나무 공장에서도 일했나요?

-제 고향은 단동(丹東)입니다. 압록강 근처죠. 부모님은 그곳에서 한국인 관광객을 위한 여관을 하셨습니다. 자작나무 숲 가운데 있는 여관이었단 말입니다. 실향민들이 많이 왔었죠. 끊어진 압록강 철교를 보면서도, 강 너머의 가난한 신의주 땅을 보면서도 그들은 말없이 울기만 하더군요.

-빚은 없나요? 쫓기는 신세라면, 곤란해요.

-받을 것도, 줄 것도 없습니다.

더 이상 화장대 거울 앞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이미 밤 11시였고 무엇보다 거울 속에 비치는 자오의 옆모습이, 언뜻 보면 가깝지만 절대로 내 손에는 잡힐 리 없는 그 모습이 이유 없이 내 마음을 불편하게 했던 탓이다. 화장대 위에 내려놓았던 숄더백을 챙겨 일어나자 자오는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나를 올려다봤다. 식사는 밖에서 할 것과 담배를 피우지 말 것, 혼자 있을 때도 조명을 켜지 말 것과 셔터를 올리지 말 것 등에 대해 두서없이 늘어놓은 후 나는 뒷문 열쇠와 현금 5만 원을 졸참나무 식탁 위에 올려놓고는 허둥지둥 그곳을 빠져나왔다. 



3


그날 이후, 나는 아침마다 두통을 느끼며 잠에서 깬다. 두통은 쉽게 내 머리를 떠나려 하지 않았으므로 하루 종일 나는 멍한 상태로 전화를 받고 고객을 접대하고 사장의 잔심부름을 한다. 매물로 나온 아파트나 상점을 둘러보고 싶다는 고객이 오면 사장의 승용차에 태워 운전을 했다. 그럴 땐, 차에 오르기 이전부터 나는 고객이 곧 방문하게 될 아파트나 상점의 탁월한 입지 조건과 매력적인 가격대에 대해 쉴 새 없이 떠들어대야 했다. 한참을 떠들다가 문득 고개를 돌리면, 예외 없이 가구점 앞 횡단보도였다. 안에서 조절할 수 있도록 설계된 자동셔터는 늘 내려져 있었다. 신호가 바뀌는 것도, 고객의 의아한 시선도 의식하지 못한 채 뚫어지게 가구점을 쳐다봤지만 셔터는 너무도 단단했으므로 자오의 모습도, 헝클어져 있던 어수선한 가구들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내가 가구점을 그렇게 모른 척 지나치고만 있을 때 자오가 그 안에서 어떻게 자신 앞에 주워진 시간과 싸우고 있었는지, 나는 결국 단 한 번도 묻지는 못했다.

어느 날, 자오가 그곳을 차지하기 이전부터 나의 습관이었던 방식으로 내가 그 가구점의 뒷문을 열었을 때 자오는 없었다. 그가 벗어 놓은 허물 같은 가방만이 콘솔 옆에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었다. 처음 내려놓았던 그 모습을 잃지 않고 잔뜩 웅크린 채 나를 감시하는 가방이 웃음이 날 정도로 귀여워서 나는 발로 가방의 앞부분을 툭, 차 주었다. 상처 입은 가방은 토라진 모습으로 변하여 나에게서 돌아서 앉았다. 나는 그런 가방을 잠시 비웃어 준 후 화장대 앞으로 걸어가 의자에 앉았다.

화장대 위에 올려져 있는 작은 스탠드를 켜고 숄더백에서 파우치 가방을 꺼내 꼼꼼하게 화장을 했다. 그것 역시 나의 오래된 습관이었다. 화장을 하고 가구점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다가 조금씩 격해지는 무언가를 참지 못하면 침대 앞에 주저앉아 좀약 냄새 나는 시트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울다 떠나곤 했다. 자오가 잠시 외출한 사이, 나는 되도록 빨리 나의 습관을 모두 충실하게 이행한 후 아무런 흔적도 없이 가구점을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그날따라, 메마른 심장은 젖지 않았고 차갑게 식은 눈동자는 침착하기만 했다. 한때는 거의 맹목적으로 나에게 통증을 주었던 몇 개의 기억들조차 무력했다. 조급해진 마음에 빠른 걸음으로 가구점 여기저기를 걷고 있을 때, 자오가 큐 사인을 받은 배우처럼 내가 있는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공사장 같은 곳에서 일일 인부로 일하고 오는 길인 듯했다. 오랫동안 세탁하지 못한 듯한 다크브라운의 가을 점퍼에 녹때가 묻어 있었다.

자오는 그저 사심 없는 눈빛으로 나를 한 번 쳐다본 후 침대 쪽으로 걸어가 조심스럽게 점퍼를 벗었다. 내가 잠시 허둥지둥 하다가 다시 화장대 쪽으로 걸어가 비스듬히 기대 서 있는 동안 자오는 점퍼를 반듯하게 개킨 후 침대 시트 위에 얌전히 올려놓았다. 나는 괜히 내 뒷목을 매만지며 화장대 의자에 앉았고 침대에 걸터앉은 자오는 처음 봤을 때처럼 긴장감 없는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건너다봤다.

-왜 울었습니까?

자오의, 첫마디였다. 반사적으로 손바닥으로 얼굴을 쓰다듬어 보았다. 젖지 않았다. 얼굴도, 손바닥도 물기 없이 그저 메마르게 바삭거렸다. 나는 화장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저벅저벅 자오에게로 걸어갔다. 자오의 얼굴은 점점 더 가까워지고는 있었지만 우리 사이를 기웃거리며 발화될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던 언어들은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왜 그런 거짓말을 하죠? 처음부터 눈물 냄새가 났다 이겁니다, 식의 언어들은 죽은 나무들이 완성해 놓은 폐허의 가구점 구석구석에까지 숨어 들어가 우리의 어색한 대면을 숨죽이며 구경하고 있을 뿐이었다.  

-여긴 당신 집이 아니에요. 벌써 10월 중순이잖아요.

오랜 시간을 들여 그에게로 다가갔을 때 막상 내가 한 말은 그게 다였다. 자오는 팔짱을 낀 채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아직 끄지 못한 화장대 위의 작은 스탠드가 자오의 얼굴에 섬세한 그늘을 만들었다가 이내 한 발 비켜서며 자오와 나의 힘없이 늘어진 그림자 위로 겹쳐졌다. 우리들의 심장은, 그 불빛과 함께 바닥에 버려진 것 같았다.

-돈을 좀 벌었습니다. 게다가 여기는 난방도 안 되지 않습니까.

귀찮다는 듯이 그렇게 대답하며 자오는 그대로 천천히 침대에 누웠다. 피곤합니다, 라고 말한 것도 같았고 외롭습니다, 라고 속삭인 것도 같았지만 확인할 수는 없었다. 자오는 금세 잠이 든 것 같았다. 그의 낮은 숨소리가 오래 전에 죽은 나무들을 다시 깨어나게 하는 듯, 가구점은 이내 수많은 나무들의 맥박소리로 가득해졌다. 나는 다시 돌아서서 화장대 위의 스탠드를 껐다. 깜깜했다. 가구점 안의 모든 실루엣을 덥석 집어삼킨 새까만 어둠 속으로 잠든 줄 알았던 자오의 낮은 목소리가 느슨하게 스며들었다.

-뭡니까? 브로커 녀석들과 한 패도 아니면서 뭘 그리 잔뜩 겁을 주었느냐 이겁니다.

-…….

-지독하게 안 어울립니다, 화장 같은 거 말입니다.

-……. 

아무 말도 못한 채 어둠 속에서 나는 그저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하지만 자오는 그런 나를 보지 못했다. 대학 졸업 후 3년 동안 공무원 시험에 계속 떨어지다가 친척의 친척이 운영하는 중개소 사무실에서 자격증도 없이 잔심부름이나 하는 나의 인생에 대해서라면 해줄 수 있는 이야기가 많았지만 깜깜한 곳에서는 침묵이 더 편하다는 걸 나도 자오만큼은 알고 있었다. 이유도 없이 왼쪽 눈가 끝이 조금 뜨거워졌다. 갑자기 자오가 벌떡 일어나 왜 울었습니까? 또 다시 물어올 것 같아 나는 서둘러 가구점을 나왔다. 가구점의 닫힌 셔터 앞에서, 그리고 나는 재킷 주머니에 두 손을 질러 넣은 채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었다.



4


이튿날 아침, 나는 출근길에 평면 열판이 내장된 전기 주전자를 들고 가구점에 가서 콘솔 위에 올려놓았다. 그날은 점심을 먹기도 전에 사장 몰래 사무실을 빠져 나와 마트에 들러 100개들이 커피믹스와 머그잔 하나, 그리고 생수 한 박스를 사서 전기 주전자 옆에 놓아두기도 했다. 사흘도 되지 않아 고급 실사가 들어갔다는 스트라이프 무늬의 담요와 순면 쿠션을 사서 킹사이즈 침대에 올려놓았고, 2년 전부터 붙박이장에 처박아 놓았던 전기담요를 수리해서 침대 시트 아래 깔기도 했다. 알람이 울릴 때마다 야광 빛이 난다는 자명종 시계와 받침 거울, 수건과 빗, 달력과 간단한 필기도구까지 갖다 놓았지만 내 머릿속은 가구점을 채워 갈 만한 목록들을 찾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자오에게서 다시 전화가 온 날은 황토색 사기화분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테이블야자와 이름을 알 수 없는 둥근 모양의 선인장을 화장대 위에 올려놓고 온 날이었다. 잠들기 직전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를 받으면서 나는 내 몸에서 잠시 이탈하려는 내 영혼을 가까스로 붙잡아야 했다.  

-먹다 남은 약이 좀 있습니까?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들려오는 사운드답게 자오의 목소리는 희미하게 떨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나 시계를 보았다. 새벽 2시였다.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머리핀 하나가 발바닥에 박히면서 날카로운 통증이 나를 일깨우는데도 나는 정신없이 거실로 걸어가 약품 상자를 열었다. 아스피린과 유통기간이 지난 감기약, 색이 바랜 붕대가 전부였다. 새벽 2시, 약을 구할 곳은 없었다.

전화를 끊고 아스피린을 챙긴 후 어머니가 고향에서 사다 놓은 생강차를 가슴에 품은 채 아파트를 나왔다. 택시는 보이지 않았다. 빈 택시가 지나가는지 도로를 살피면서 걷다 뛰다를 반복했다. 가구점에 도착하고 나서야 여벌의 열쇠도, 핸드폰도 가져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강차 유리병을 바닥에 내려놓고 뒷문을 두드렸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열어, 제발 열어 줘! 속으로만 외치며 사정없이 뒷문을 몇 번이나 내리치고 나서야 딸깍, 문이 열리면서 내가 사다 놓은 담요를 뒤집어 쓴 자오가 거대한 그림자를 힘겹게 이끌며 나타났다. 해쓱함에도 땀에 흠뻑 젖어 있던 자오의 얼굴을 눈에 핏발이 서도록 한 번 노려본 후 나는 바닥에 내려놓았던 생강차 유리병을 다시 품에 안고는 가구점 안으로 들어갔다. 내 뒤에 서 있던 자오는 이내 문을 걸어 닫고 느리게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자오가 침대에 누워 있는 동안, 나는 전기 주전자에 생수를 붓고 스위치를 꽂았다. 잠시 후, 머그잔에 생강을 듬뿍 넣은 차를 만들어 그에게로 다가갔다. 자오는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키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라도 되는 듯 고통스런 얼굴로 내 손을 무르며 혼자 힘으로 일어나 앉았다. 한 손으론 뜨거운 차가 담긴 머그잔을 잡고, 다른 한 손엔 내가 방금 쥐어 준 아스피린을 올려놓은 채 자오는 몇 분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왜 울어요?, 나는 묻지 못했고 울지 않았습니다, 자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우리 사이의 언어는 이번에도 길을 잃고 어딘가를 바쁘게 헤매고만 있었다.

자오가 다시 잠들었을 때 나는 빈 머그잔을 생수로 헹군 후 화장대 의자에 무릎을 모으고 앉아 있었다. 악몽을 꾸는지, 아니면 그저 그의 아픈 몸이 나에게 해 주고 싶은 이야기에 불과한 건지 그는 가끔씩 아아, 신음소리를 냈다. 그 와중에도 자오가 없을 때만 몰래몰래 갖다 놓았던 시계와 거울, 수건과 빗, 그리고 테이블야자와 선인장이 자꾸만 내게 자장가를 불러 주었다. 눈이 감겨 왔다. 설핏 눈을 떴을 때, 자오는 바로 내 곁에 누워 내 귓가에 아아, 같은 성량으로 신음했다. 잠결에 나는 그에 관한 많은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누군가 그를 이용했다는 것도 그때 들었던 걸까. 그래서, 아무도 믿지 않으며 그 무엇도 꿈꾸지 않는다는 그의 이야기를 지금의 나는 이렇게 확신하지 못한 채 그저 현실을 각색한 꿈속의 한 장면처럼 희미하게만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니, 다시는 물건들을 사다 나르지 마십시오. 나에겐 저기 있는 가방만 있으면 됩니다. 저게, 내 집이고 내 고향입니다. 

그 마지막 말을 할 때, 자오의 숨소리는 아주 작아졌다. 나는 그가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다시 한 번 가늘게 눈을 뜨고 그의 가슴을 천천히 들여다봤다. 푸른빛이었다.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내쉬는 그의 심장이 너무도 선명한 푸른색이어서 나는 감히 손도 댈 수 없었다. 눈을 돌리는 곳마다 원래의 컬러를 찾아낸 제각각의 물건들이 자오의 심장과 같은 박자로 숨을 쉬고 있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자오는 나에게서 등을 돌린 채 침대 밑에 앉아 있었다. 시트가 조금 젖혀져서 먼지 묻은 내 맨발이 그대로 보였다. 시트로 맨발을 가리기 위해 몸을 뒤척이자 자오가 뒤를 돌아봤다.

 -상처가 있습니다.

 -늘 그렇죠.

 -이제 곧 11월인데 무슨 생각으로 맨발에 슬리퍼만 신고 뛰어왔습니까?

 -무슨 말을 듣고 싶은데요?

 -생강차가 달아서 좋았습니다.

 -감기는요?

 -집에 돌아갈 차비나 하십시오.

그리고 자오는, 따뜻한 물로 적신 수건을 내게 건네주었다. 수건으로 먼저 얼굴을 닦고 다시 상처 입은 발바닥을 닦았다. 자오가 빌려준 운동화를 신은 채 가구점을 나왔을 땐 이미 거리의 많은 상점들이 하루를 열고 있을 무렵이었다. 집까지 걸어가는 동안 내 몸은 내 사이즈보다 20밀리미터 정도 큰 운동화 속에 들어가 포근하게 쉴 수 있었다. 그날의 그 느낌을, 나는 지금도 잃어버리지 못한 채 이토록 무력하게 기억하고 있다.



5


퇴근 후, 나는 날마다 가구점으로 갔다. 되도록 약속을 잡지 않았고 가구점에 도착하면 핸드폰의 전원을 껐다. 자오는 일주일에 서너 번 공사장으로 갔고 일이 없을 때에는 내가 갖다 놓은 라디오를 틀어 놓고는 무언가를 쓰거나 읽곤 했다. 우리는 아주 오랜 세월 동안 같은 공간과 같은 가구를 공유해 온 사람들처럼 행동한다. 그가 침대에 누워 책을 읽고 있으면 나는 화장대 앞에 앉아 다이어리를 썼고, 그가 침대에서 일어나 물소가죽 소파 근처에서 가방을 정리하기 시작하면 나는 은근슬쩍 식탁으로 걸어가 커피를 끓이거나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우리는 커피를 마시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었고 출출하면 컵라면을 먹었으며 그것마저 끝나고 나버리면 식탁에 마주 앉아 단동의 이름이 왜 단동인지, 서울과 북경의 차이는 무엇인지 혹은 한국의 드라마는 왜 그토록 똑같은 내용뿐인지에 대해 건조한 대화를 이어 갔다. 그럴 땐 자오의 담뱃갑엔 늘 한 개의 담배만 남아 있었으므로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앉아 마치 지하 벙커의 군인들처럼 조심스럽게 라이터를 켜고는 불이 붙은 담배를 한 모금씩 사이좋게 나눠 피웠다. 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생존자가 되어 버린 듯한 기분이 엄습하곤 했다. 가구점 셔터 밖의 시간을 다시는 영원히 따라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자주 나를 우울하게 했다. 어느 날은, 셔터를 끝까지 올린 채 자오와 킹사이즈 침대에 누워 격렬하게 서로를 탐하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눈을 의심하며 유리문 주위로 몰려들 것이고 거리의 차들은 우리의 허약한 공간을 구경하기 위해 경적을 울리며 급정거를 해댈 것이다. 우리는 유리문 밖의 의심과 노여움에 찬 시선을 마음껏 향유하며 천천히 늙어 가면 그만일 터이다. 하지만 스스로를 절제해야 한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의무감이 우리의 시간을 빈틈없이 채우고 있었으므로 나는 자오에게 단 한 번도 자고 가겠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자오 역시, 사랑을 구걸하는 눈빛을 내 손에 쥐어 준 적이 없었다. 

밤 11시가 넘으면 나는 벗어 놓은 외투를 찾아 입었고 자오는 화장실에 갈 시간이라며 나를 따라 나섰다. 그가 건물의 열어 놓은 화장실에서 물을 틀어 놓은 채 세수를 하고 이를 닦는 동안 나는 망을 본다는 명목으로 화장실 외벽에 등을 기대고는 핸드폰으로 단순한 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무엇이든지 하지 않으면 화장실 하나도 마음대로 소유할 수 없는 그의 삶에 너무도 많은 생각을 할 것 같아서였다. 자오가 화장실에서 나오면 우리는 되도록 불빛이 없는 좁은 골목만을 찾아 내가 사는 아파트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막 세수를 한 자오에게선 언제나 기분을 좋게 하는 비누 냄새가 나곤 했다. 아파트 입구 앞에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등을 돌리는 순간, 또 다시 두통은 시작됐다. 자오와 함께 있을 때나 그와 떨어져 있을 때, 나의 불안과 우울엔 똑같이 실체가 없었다.

우리의 10월은 그렇게 지나갔다.

11월 첫째 주 화요일, 신혼부부를 데리고 근처 매물로 나온 아파트를 보고 온 날, 그리고 사장은 느긋하게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말한다. 마치 재미없는 연극에서 비중 없는 배우가 결정적인 대사를 전할 때처럼 그의 첫마디는 앞뒤 맥락 없이 불친절했다.

-넉 달 전에 나온 그 가구점 말이야, 난리가 났었어.

나는 들고 있던 다이어리를 떨어뜨렸다. 앞뒤 맥락 없는 불친절한 그 한 마디의 말을 한 번에 이해하지 못한 채 텅 빈 눈으로 사장을 쳐다보자 사장은 예정된 극의 내용이 그렇다면 자신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방금 전 가구점에서 일어난 일들을 순순히 이야기했다.

-미스 김 나간 사이에 그 가구점 좀 보겠다는 고객이 찾아와서 가 봤더니 아주 가관이더라고. 웬 이상한 녀석이 아주 거기에 살림을 차려 놓고 자고 있더라니까. 건물 주인이 펄쩍펄쩍 뛰며 경찰 부르는 것까지 보다가 나도 방금 왔어. 하여튼 그딴 녀석들 땜에 이 동네가 발전이 안 되는 거야.          

더 이상 들을 것은 없었다. 어디 가? 등 뒤에 꽂히는 사장의 목소리를 모른 척하며 중개소 사무실 문을 박차고 나와 승용차에 올라탔다. 시동을 거는데 자꾸만 손이 떨려 와서 나는 몇 번이나 허리를 굽혀 바닥에 떨어진 열쇠를 찾아야 했다. 시동이 걸리자마자 액셀을 밟았다. 두 개의 신호를 무시하고 정신없이 액셀만 밟았는데도 버스로 불과 세 정거장뿐인 가구점까지 가는 데 너무도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가구점 앞 횡단보도에서 나는 속도를 줄였다. 벌써 도착한 세 대의 경찰차가 가구점 앞에 포진하고 있었다. 내 시선은 여느 때와 달리 활짝 열린 가구점의 유리문에 고정됐다. 이제야 셔터가 벗겨진 가구점은 낯설고 초라해 보였다. 넉 달 가까이 화장을 하거나 쓰러져 울곤 했으며, 또 한 달 정도는 푸른 심장을 갖고 있는 스물여섯의 미등록 중국인과 내일의 시간을 오늘로 끌어와 미련 없이 소모했던 그곳은 이미 이사를 가 버린 건 아닐까,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세 명의 경찰들에게 포위된 채 셔터가 젖혀진 가구점 유리문을 열고 나오는 자오를 본 순간, 나는 다시 액셀을 밟았다. 계속 직진을 했다. 쉬지 않고 직진했지만 가도 가도 서울이었다. 유턴이 가능한 곳에서 차를 돌려 다시 중개소로 돌아올 때까지 내 핸드폰은 울리지 않았다. 가끔씩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전혀 새로운 영혼이 내 속에 들어오는 듯 소스라치게 놀라며 핸드폰 액정을 들여다봤지만 막상 통화버튼을 누르면 거기엔, 자오의 세계가 없었다. 그 가구점은 제가 열어 줬어요, 혹은 저는 그런 사람을 모릅니다, 식의 말들을 할 수 있는 기회는 그날 이후 며칠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사실은, 영원히 오지 않았다.



6


그 중국인은 체포되었다. 그에겐 많은 이름의 위법이 적용됐다. 그는 합법적인 비자가 없는 불법 체류자였으며 타인 소유의 부동산을 무단으로 침범한 가택 침입자였다. 기물 파손죄와 공문서 위조죄도 그를 정의하는 새로운 이름이 된다. 그는 이미 소재 불명으로 사실상 수배령이 떨어진 상태이기도 했다. 유학생 신분으로 한국에 온 단동 출신의 조선족 중국인은 불법 대포통장을 만들어 범죄에 사용했다. 아니, 누군가 그의 신분과 이름을 이용하여 계좌를 열 수 있도록 그는 자신의 개인정보를 팔았다. 그의 개인정보를 산 사람은 같은 학교에 다니던 고향 선배였으나 그 개인정보가 최종적으로 간 곳은 두 명의 한국인이 설립한 유령회사였다. 유령회사는 여러 상황을 연출하여 순진한 사람들에게 거액의 돈을 입금하도록 유도한 후 대포통장을 해지하는 수법으로 수억 원대의 돈을 착복했다.

어쨌든 그 대가로 그 중국인은 1년 전 퇴학 처분과 강제추방령을 받은 바 있었다. 그가 다니던 대학은 비자 연장을 불허한다는 통보를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서울의 모대학교 대학원에서 무역학을 전공하고 있던 그는 비자 말기 이틀 전에 행방을 감췄다. 한때는 중국 출신의 유학생이었으나 지금은 한국에서 추방해야 하는 범죄자가 된 그 중국인의 성은 자오(趙)가 아니었다. 그는 이십육 년 동안 피아오(朴)의 성만을 써왔던 사람이었다. 배신감을 느끼진 않았다. 배신감을 느끼며 그것을 고통으로 미화하는 스스로를 용서할 자신도 없었다. 자오 혹은 피아오는 1년의 실형을 채운 후 강제 추방될 터였다. 추방 후엔, 다시는 한국으로 올 수 없다.

나사가 빠진 의자에 앉아 서류를 작성하고 있다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면 어느 조선족 중국인이 잃어버려야 했던 미래의 어떤 삶이 보이는 것 같았다. 멋진 슈트를 입고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유창한 언어로 바이어를 상대하고 있을 젊은 남자의 미래는 수많은 사람들의 발에 밟혔다. 해질 무렵 차를 몰고 고객과 매물로 나온 건물을 돌아보고 올 땐, 동쪽에서 해가 뜰 때마다 천지가 붉은 색으로 변한다 하여 단동으로 이름 붙여진 그 중국인의 고향을 상상해 보기도 했다. 겨울이 길고 추위가 깊은 허름한 북쪽 도시에서 사람들은 또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건지 진심으로 궁금했지만 그곳은 내가 갈 수도 없고, 가서도 안 되는 곳이었다. 석양에 젖은 도시는 매번 그렇게 메마른 슬픔을 남겨 놓고 퇴장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적은 없었다. 집으로 돌아와 내 방 창문을 열면 본격적인 겨울을 앞두고 일제히 가난해져 버린 앙상한 나무들이 압록강 근처의 자작나무들처럼 연약한 목소리로 추위를 호소해 왔다. 이십칠 년 동안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겨울나무들의 목소리는 섬뜩할 정도로 측은했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런데 외지 사람이 어떻게 거기가 비어 있는 걸 알고 들어갔을까? 문은 뭘로 열었대요? 자오가 사라진 후 한동안은 중개소를 찾아온 주변 상가 사람들이 사장에게 그렇게 물은 적도 몇 번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그들을 위한 커피를 탔다. 짝퉁 나라에서 온 놈이 복사 열쇠 하나 못 만들겠어! 사장은 평소 때와 달리 호탕하게 웃으며 명쾌한 대답 아니냐는 듯 자신에 차서 말하기도 했다. 시간은 지나치게 더디게 갔다. 절대로 간격을 좁히지 않는 시계의 초침을 눈이 아프도록 노려보며 새벽을 맞는 날이 많아졌다. 나는 남들이 눈치 채지 못할 만큼만 아주 조금씩 지쳐 갔고, 여전히 가구점 밖이 시간을 따라가지 못하여 조명 없는 무대 뒤편에 자주 혼자 남겨지곤 했다.


7

가구점은 나가지 않았다. 몇 번인가 찾아가는 고객이 있긴 했지만 그 근방은 상권이 미약했으므로 그 누구도 섣불리 모험을 하려 하지 않았다. 나는 다시 가구점을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어느 날은 진공청소기를 가져가 한바탕 청소를 했고 어떤 날엔 들꽃을 꽂은 꽃병을 비어진 콘솔 위에 올려놓기도 했다. 화장대 앞에 앉아 화장을 하거나 침대 시트에 얼굴을 묻고 우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면 누군가 뒤에서 내 등을 잡으며 왜 울었습니까? 물어올 것만 같았다. 나는 아직, 그런 질문에 내놓을 수 있는 적당한 대답을 찾아내지 못했다.

아주 곤하게 잠을 잔 적도 있었다. 그날은 출근도 하지 않고 곧바로 가구점으로 들어가 외투와 구두, 양말을 훌훌 벗고 침대에 누웠다. 꿈을 꾸었다. 나는 키 큰 나무들이 빼곡한 숲 한가운데 서 있었다. 나무들은 더 이상 죽은 척하지 않았고 그저 청량한 바람소리를 내며 건강하게 서 있었다. 물소가죽 소파 근처에선 물소 떼가 요라한 발소리를 내며 달려가기도 했고, 낙타 깃털로 멋을 부린 장식장에선 게으른 낙타 한 마리가 걸어 나와 타박타박 내 곁을 지나가기도 했다. 악어가죽을 덧댄 콘솔과 의자들에선 악어들이 물살을 가르면서 수풀들이 조심스럽게 일렁였다. 나는 웃으며 꿈에서 깼다. 웃으면서 침대에서 일어나긴 했는데 화장대 앞으로 걸어가 거울을 들여다보니, 거울 속엔 잔뜩 인상을 쓴 흑백의 여자만이 무료하게 갇혀 있을 뿐이었다. 숄더백에서 준비해온 검은 색 매직을 꺼냈다. 나는 의자를 바짝 끌어와 다시 고쳐 앉으며 매직으로 거울에 한 글자씩 한 글자씩 신중하게 쓴다. 자, 오, 에, 게. 해야 할 말들이 많이 있을 줄 알았는데, 미치도록 너무도 많은 말들이 쏟아질까 봐 오히려 내내 걱정하고 있었는데, 더 이상 아무 것도 쓸 수 없었다. 매직을 내려놓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물컹한 것이 밟혀 내려다보니 푸른 심장이었다. 느리게 숨을 쉬던 그 푸른 심장을 주워와 온힘을 다해 꽉 쥐었다. 아아. 내가 갖다 놓았던, 뿌리가 뽑힌 선인장이 오랜만에 내게 진짜 고통을 알려주었다.《문장 웹진/2008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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