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단속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문단속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윤영수




1월 22일 화요일


오늘도 별일 없이 집에 돌아가게 되어서 어머니 감사합니다. 나무가시가 손에 박히지도 않고 멍든 데도 없어서 어머니 감사합니다.

오전에는 강동의 아파트에 침대 한 개, 오후에는 우리 공장에서 가까운 하남의 한 단독주택에 경대를 날랐는데 김 과장에게 야단맞은 것은 오전에 침대를 나를 때뿐이었습니다. “유순봉! 정말 왜 이러는 거야. 내가 미치는 꼴 보고 싶어! 하여간 공장에 가서 보자고. 돌아서면 일이 터지니 사람이 살 수가 있어야지.” 하지만 걱정 마세요 어머니. 공장에 돌아가서는 김 과장이 야단치는 것을 잊어버렸답니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침대 배달을 떠날 때 김 과장은 내게 골조는 새것을, 매트는 창고 앞쪽에 따로 놓아 둔 반품된 것을 실으라고 했습니다. 골조는 박스로 포장되어 있었지만 매트의 비닐 포장은 당연히 벗겨져 있었습니다.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기 전에 김 과장이 갑자기 트럭을 세웠습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어땠을까요. 매트가 헌 것이라고 손님이 시비를 걸면 침대를 팔기는커녕 하마터면 난리를 치를 뻔했습니다. “매트 포장을 새로 해 와야지! 척 보면 똥인지 오줌인지 몰라?” 김 과장은 왠지 뒷골이 당겨서 물건을 확인하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김 과장의 뒷골을 당겨 주신 어머니 감사합니다.

다행히도 며칠 전에 배달한 매트의 비닐이 트럭 바닥에 남아 있었습니다. 이번 것과는 다른 제품이라 크기도 맞지 않고 가운데가 죽 찢겨 나간 것이었지만 김 과장은 그나마 살았다며 한숨을 돌렸습니다. 김 과장의 지시대로 나는 찢겨진 비닐을 적당히 매트에 둘렀습니다. 손님의 아파트에 닿아 초인종을 누른 김 과장은 주인이 문을 여는 순간에 매트의 비닐을 뜯는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집에 들여가면 먼지가 많이 나서요. 어차피 포장은 우리가 치워 드려야 하고요.”  트럭에 전번 비닐을 그대로 실어 놓으신 어머니 감사합니다.

공장사람들은 김 과장 성격이 더럽다고 흉을 보지만 내가 보기에 김 과장은 정말 똑똑합니다. 나이가 나보다 세 살이나 어린데도 일처리는 예순 넘은 공장장만큼 노숙합니다. 김 과장 덕분에 나는 다음 달도 공장에 무사히 다닐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부로 써 달라고 공장에 찾아와 기웃거리는 사람들도 꽤 있는데 여러 모로 부족한 내가 쫓겨나지 않고 다닐 수 있는 것은 김 과장이 나랑 짝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내 월급에서 김 과장에게 20만 원을 떼어 주는 것은 당연합니다. 박 과장과 짝인 최철기 씨는 운전도 잘하고 웬만한 배달은 혼자 할 만큼 눈치가 있는데 나는 운전도 못하고 눈치도 없고 말주변도 별로 없습니다. “유순봉 때문에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심장마비야. 이러다 죽으면 다들 제 성질 못 이겨 죽었다고 하겠지.” 김 과장이 투덜거리지만 그가 그렇게 쉽게 죽을 사람은 아닙니다. “죽겠다고 엄살떠는 사람치고 빨리 죽는 사람 못 봤어.” 이건 박 과장이 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죽겠다는 말은 농담으로도 하지 않던 어머니나 왕사장님이야말로 일찍 돌아가셨잖습니까. 어머니는 하늘에서 잘 지내시지요? 내 걱정은 마세요. 김 과장만 꼭 붙잡고 있으면 만사 오케이입니다. 공장에 김 과장을 보내 주신 어머니 감사합니다.

웬일로 방앗간을 하는 넷째동서가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오후에 경대 배달을 마치고 공장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별일 없남?” 근 일 년 만에 듣는 목소리였지만 나는 금방 넷째동서인 줄 알았습니다. “예. 저희는 별 일 없…….” “아직도 있남?” 나도 이제 조금씩 눈치가 생기나 봅니다. 동서가 앞뒤 자르고 다짜고짜 묻는데도 나는 단번에 알아들었습니다. “예. 아직…….” 넷째동서는 내 말을 끝까지 듣는 법이 없습니다. 물론 다른 동서들도 비슷하기는 하지만요. “그게 시방 뭔 말여. 아직꺼정 같이 살다니 말 되는 소릴 혀. 자네두 막내처제두 그 눔허고 똑 같어. 똑 같으니께 그 꼴루들 살지. 하여간 나는 몰러. 나헌티는 전혀 책임 없응게 알아서들 혀. 지 앞가림 지가 허지 누굴 탓혀 시방!” 충청도 사람이 느리다고 해도 넷째동서를 보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제 할 말만 두두두 쏟아 놓고는 어느새 전화를 끊어 버립니다. 오랜만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동기간이니까 안부 전화도 합니다. 동기간이……잖어. 남이……아니……잖어. 어머니가 풍을 맞아 입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면서 겨우 하신 말씀이 그것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순대가게를 방앗간으로 내준 것도 넷째동서와 가깝게 허물없이 지내야 우리 식구들이 편하다는 어머니의 배려였습니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집골목으로 들어서는데 웬 남자가 다가섰습니다. “유순봉 씨죠? 저는 가나티브이 피디입니다.” 그가 명함을 내밀었습니다. 가로등 빛이 있기는 해도 그림자에 가려 제대로 보지도 못했는데 그는 명함을 자기 지갑에 다시 넣어 버렸습니다. “유순봉 씨가 명함을 갖고 계시는 게 좋지 않을 것 같아서요. 근처 다방에라도 가실까요.” 그가 큰길 쪽을 가리켰지만 나는 그냥 서 있었습니다. 다방에 가자고 했으니 찻값이야 자기가 내겠지만 처음 보는 사람을 따라가기가 찜찜했습니다. 한참 머뭇거리던 그가 말을 이었습니다. “댁에 있는 남자 분…… 말입니다. 뭐하는 사람입니까.” 오늘따라 기천웅씨 얘기를 왜들 꺼내는지 모르겠습니다. “글쎄요, 모르겠는데요.” “이름은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 사람 이름은…… 기천웅입니다. 저희가 조사했습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의 반코트 단추를 바라보았습니다. 그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 사람하고 어떤 관계십니까?” 나는 또 단추만 바라보며 가만히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정말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머니, 기천웅 씨와 나는 어떤 관계일까요?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참,” 돌아서려던 그가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 “저 아래 시장에서 방앗간 하시는 분이 동서시라고요?” “예. 바로 윗동섭니다. 그 위의 동서들은 지방에서 살고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 분께 이번 취재에 대해 양해를 구했습니다. 아시겠지만, 기천웅이란 사람에게는 절대 저를 만났다는 얘기는 하시면 안 됩니다.” “알았습니다.” 그가 돌아서서 골목을 빠져나갔습니다. 기천웅 씨에게 무슨 일이 있기는 한 모양입니다. 다방에 가서 자세히 들어볼 걸 그랬나 싶었지만 이미 지난 일이었습니다. 다방에 가봤자 찻값만 축내지 별 것도 없습니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우리 집 문손잡이를 잡으려는데 주인아줌마가 내 잠바자락을 잡아채었습니다. “저기.” 자기 집 마당으로 나를 끌고 들어선 아줌마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말고 자기 입을 톡톡 쳤습니다. 내가 먼저 말을 꺼내었습니다. “이번 달 수도요금이랑 전기요금은…….” “그게 아니고 미림아빠, 오늘 누가 와서 미림이네……, 아냐, 관둬.” 주인아줌마가 도망치듯 자기 집 현관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드디어 집 미닫이문을 밀었습니다. 현관에는 기천웅 씨의 슬리퍼와 미림이의 운동화와 종훈이의 운동화가 있었습니다. 미림엄마 신발은 물론 없었습니다. 미림엄마는 파출부일이 끝난 후 해장국집 저녁 설거지를 더 하고 오기 때문에 나보다 늦습니다. 방안 풍경도 여느 때와 같았습니다. 기천웅 씨는 아랫목에 비스듬히 누워 티브이를 보고 있었고 미림이와 종훈이는 나를 보더니 배가 고프다고 징징거렸습니다. “일 끝나면 잽싸게 기어들어 올 일이지 어딜 쏘다녀! 새끼들 굶을 거 뻔히 알면서.” 기천웅 씨가 나를 노려보았지만 더 이상은 없었습니다. 저녁 설거지를 다 하고 방에 들어갔는데 기천웅 씨는 별 말 없이 티브이만 보았습니다. 새 사극 드라마가 재미있는 모양입니다. 재미있는 드라마를 시작해 주신 어머니 감사합니다.



1월 23일 수요일


아침에 집골목을 나서는데 누가 어깨를 쳤습니다. 어젯밤의 그 피디였습니다. 깜깜할 때는 잘 몰랐는데 환할 때 보니 생각보다 어려 보였습니다. 기껏해야 서른 중반, 내 나이 또래인 듯했습니다. “잠깐 같이 가시죠.” 그를 따라가 보니 아랫골목 공터에 웬 은색 차가 하나 서 있었습니다. 크기는 콤비버스만한데 창문은 운전석 쪽에만 나 있었습니다. 티브이 중계차라 했습니다. 차 앞에 서 있던 노랑머리의 남자가 잽싸게 차 문을 열었습니다. 차 안에는 우리 말고도 세 사람이나 더 있었습니다. 안녕하세요, 나를 보고 인사하면서도 한 사람은 기계의 스위치를 조절하느라 바빴고 또 한 사람은 천장에 매달린 전등들을 만지며 내 얼굴과 그림자를 살폈습니다. 버스 앞자리에 앉은 사람은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나를 찍어 대었습니다. 피디가 가리키는 화면에는 웬 후줄근한 사내가 쭈뼛대며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그 사내가 바로 나였습니다. 마이크를 든 피디가 말을 시작했습니다. “기천웅 씨에 대해 묻겠습니다.” 제가 얼른 말했습니다. “출근해야 되거든요.” 피디가 황급히 마이크를 끄더니 공장에 전화를 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고 했습니다. 사실 공장에는 열 시까지만 가면 됩니다. 매장 직원들이야 일찍 나가서 매장 청소도 하고 손님도 맞아야 하지만 창고의 인부들은 여유가 있습니다. 배달용 트럭으로 상계동부터 출퇴근하는 김 과장도 열 시 반은 되어야 나오니까요. 여덟 시도 채 되지 않아 내가 집에서 나오는 이유는 미림엄마도 파출부협회로 일찍 나가는데다 집에서 뭉그적거려 봤자 기천웅 씨에게 책이나 잡히기 때문입니다.

피디가 다시 마이크를 켰습니다. “기천웅 씨와 처음에 어떻게 만나셨습니까.” “처음에는 몰랐죠.” 내가 대답했습니다. “그 사람과 어떻게 같이 살게 되었나요.” “……문단속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요. 구멍가게를 했던 집이라 길 지나는 사람들이 종종 미닫이문을 밀거든요. 물론 살림집이란 걸 알고 얼른 닫기는 하지만요.” “그 사람과 같이 산 지 얼마나 되었나요.” “2, 3년쯤 되었죠. 그런데……” 갑자기 벼락 치는 소리가 났습니다. 사람들도 나도 깜짝 놀랐습니다. 피디가 나더러 마이크를 함부로 만지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습니다. 손바닥으로 잠깐 마이크를 가렸을 뿐인데 그렇게 큰 소리가 날 줄은 몰랐습니다. 내가 말소리를 죽여, 기천웅 씨가 우리 집에 있는 걸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었습니다. 피디는 자기가 〈사람 사는 이야기〉라는 티브이 프로를 맡고 있는데, 그 프로를 담당하는 작가 중 한 사람이 누군가로부터 우리 집 얘기를 들었고, 그 누군가는 우리 동네의 시장 누군가에게서 얘기를 들었다고 했습니다. 피디가 시계를 들여다보며, 죄송하지만 시간이 없으니 자기가 묻는 말에 먼저 대답해 달라고 했습니다. 나도 시계를 들여다보며, 죄송하지만 시간이 없어서 이만 가봐야겠다고 했습니다. 피디가 한숨을 쉬더니 그럼 종종 뵐 테니 오늘은 그냥 가시라고 했습니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생각해 보니 기천웅 씨와 같이 산 세월이 3년하고도 2개월입니다. 다음 달이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종훈이가 뺑소니 오토바이에 치어 다리를 다친 때가 네 살 여름이고, 그 병원비를 대느라 전셋집에서 지금의 사글세방으로 옮겨 앉은 때가 그 해 10월, 기천웅 씨가 우리 집에 들어온 것이 12월이었으니까요. 공장에서 돌아와 보니 미림엄마랑 아이들이랑 그 사람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가 미림엄마의 사촌이나 집안 형부쯤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반갑게 인사했습니다. 그런데 미림엄마는 나를 싱크대 쪽으로 부르더니 저 사람이 누구냐고 했습니다. 미림엄마는 그가 내 사촌이나 육촌인 줄 알았다고 했습니다. 결국 그 사람은 우리와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대놓고 말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몸집도 큰데다 찢겨 올라간 눈꼬리, 짧은 전중이 머리, 그가 한 번 성질을 부리면 감당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게다가 그는 이미 우리 아이들과 함께 두렛상에서 저녁밥을 먹는 중이었습니다. 나는 기다렸습니다. 저녁을 먹고 나면 나는 그가 미안하다며 일어날 줄 알았습니다. 집 주인인 내 얼굴도 확인했고 자기가 집을 잘못 찾아들었다는 걸 알았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밥을 먹은 그 자리에서 그는 꼼짝 않고 티브이를 보았습니다. 아니, 한 번 일어나기는 했습니다. 말도 한 마디 했습니다. ‘변소가 어디요?’

우리가 세 들기 전까지 구멍가게였던 집에 욕실이나 화장실이 따로 있을 리 없습니다. 길에서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서면 신발 너덧 켤레를 놓을 수 있는 현관, 현관 옆에 단칸방, 마주 보이는 허드레 공간에 싱크대가 한 조 놓인 것이 다입니다. 화장실은 주인집 마당에 있습니다. 화장실을 이용하자면 우리 집에서 나가 담을 따라 돌아 주인집 대문에 달린 작은 문을 열쇠로 따고 들어가야 합니다. 하는 수 없이 내가 앞장서서 그를 화장실에 데려다 주었습니다. 화장실 한 번 쓰겠다는데 야박하게 굴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아이들 요강을 내줄 수도 없는 일이고요. ‘얼른 문을 잠가요.’ 내가 집에 들어오자 미림엄마가 내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잠깐 망설였습니다. 그가 들고 온 큼직한 가방이 방바닥에 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방이야 바깥에 내놓으면 되지.’ 그의 가방에 손을 대는 순간 문이 열리고 그가 집안으로 들어섰습니다. 나는 깜짝 놀라 방 한쪽 구석으로 물러섰습니다. 그의 가방을 탐낸 것으로 오해하면 곤란하니까요. 가방을 챙겨든 그가 머무적거리는 듯싶더니 웬일로 방에 다시 주저앉았습니다. 그의 눈은 티브이에서 방영되는 주말드라마에 박혀 있었습니다.

드라마가 끝나면 나는 그가 갈 줄 알았습니다. 미림엄마는 설거지를 하고 나는 옷을 갈아입었습니다. 미림이와 종훈이는 방바닥을 뒹굴며 장난감 비행기를 가지고 놀았습니다. 드라마가 끝나고 뉴스, 뉴스가 끝나고 오락프로. 아이들이 잠에 곯아 떨어졌을 때 그가 다시 입을 떼었습니다. ‘내가 윗목에서 자지요.’ 미림엄마와 나는 또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밤 열한 시가 넘은 시각이었습니다. 날이나 밝으면 보내야지 추운 겨울밤에 어떻게 내쫓겠습니까. 갈 곳이 있으면 그렇게 우리 집에서 개기겠습니까.

길가 유리창 쪽으로 그 사람이 눕고 그 옆에 미림이와 종훈이, 나, 맨 안쪽으로 미림엄마가 누웠습니다. 그의 코 고는 소리가 너무 시끄러운 데다 종훈이 역시 좁아진 방이 답답한지 몸부림을 심하게 쳐서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아침이 되었습니다. 미림엄마가 아침밥을 차렸고 그 사람과 내가 밥을 먹었습니다. 미림엄마가 자꾸 눈짓을 했습니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나는 그 사람에게 짐짓 작별인사를 하고 바깥으로 나왔습니다. 일요일이라 공장에 출근할 것도 아니었습니다. 나는 주인집 대문 안쪽에 숨어 그가 나가는 것을 기다렸습니다. 한 시간, 두 시간…… 그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집에 다시 들어갔습니다. 그 사람은 방 아랫목에 꼼짝 않고 앉아 있었습니다. 아니, 미림이를 앉은뱅이책상에 앉혀 숙제를 시키는 중이었습니다. 그가 집에서 나간 것은 두 번, 열쇠를 가지고 변소에 갈 때뿐이었습니다. 어물어물하는 사이에 점심때가 되고 저녁때가 되고 밤이 되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나는 출근시간보다 한 시간은 빨리 집을 나서면서 큰 소리로 힘주어 말했습니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못 보더라도 건강하시고요.’ 아무 대답도 듣지 못했지만 나는 그가 그날만큼은 꼭 갈 줄 알았습니다. 아무리 갈 곳이 없어도 남의 집에 마냥 눌러앉을 수는 없을 테니까요. 주인집 대문 안에 서서 이제나저제나 동정을 살피고 있는데 누가 나오기는 했습니다. 미림엄마였습니다. ‘나가서 볼 일 보래. 자기가 아이들 돌봐 준다고.’

오늘 제일 기뻤던 일은 저녁으로 순대국을 먹은 일입니다. 오후에 식당 의자를 배달했는데 마침 그 식당에서 순대국을 팔고 있었습니다. 박 과장과 최철기 씨와 김 과장은 갈비탕을 먹었지만 나는 1000원 더 싼 순대국을 먹겠다고 했습니다. 어머니 생각에 눈물이 찔끔 났는데 김 과장이 나를 쳐다봐서, 정말 추운 날이라고, 그래서 눈물이 난다고 말했습니다.

돌이켜 보면 어머니가 순대국을 끓이고 내가 손님들에게 음식을 나르던 때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인 것 같습니다. 커다란 국솥 두 개가 절절 끓던 가게는 한겨울에도 봄날처럼 따뜻했지요. 두 번째로 행복했던 때는 우리 순대국집 단골이었던 종묘사 왕사장님의 주선으로 묘목장 일을 할 때였습니다. 밭이랑에 씨를 뿌리는 일이나 묘목 심기, 물주기, 비료 주기, 나는 어느 일이든 재미있었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커 가는 작물들을 보면 힘이 들기는커녕 부쩍부쩍 힘이 솟곤 했습니다. 빨강 파프리카뿐 아니라 주황색 노랑색 흰색 파프리카, 잎 모양이 공주 드레스 같은 상추 이야기를 하면 공장사람들은 내가 말을 지어낸다며 코웃음 칩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최 박사님이 떠오릅니다. “유순봉씨는 정말 사람이 좋아. 언제나 봐도 밝고, 진실하고.” 매일매일 노트를 들고 밭고랑을 체크하던 최 박사님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실까요. 왕사장님이 갑자기 돌아가시지만 않았어도, 왕사장님 아들이 그 묘목장 땅을 팔지만 않았어도 나는 거기서 평생 일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묘목장 안에 빈 농막도 있어서 우리 식구 정도는 거기서 살아도 아무 문제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나는 어쨌든 아이들과 잘 살고 있으니까요. 어머니 감사합니다.

집 근처 버스정류장에 내렸는데 아침에 보았던 노랑머리남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티브이 사람들은 빈틈이 없습니다. 휴대폰으로 내게 전화를 걸면 간단할 텐데 기천웅 씨에게 들킬까봐 절대 걸지 않습니다. 중계차에 오르니 피디가 맞아 주었습니다. “기천웅이 슈퍼에 간 틈을 타서 집에 소형카메라를 설치했어요. 양해해 주십쇼. 유순봉씨 가족을 위한 거니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화면에 비친 우리 집은 정신이 없었습니다. 사방 벽에 걸린 옷들, 방바닥의 담요, 미림이 책상, 밥상, 티브이, 싱크대와 밥통, 신발장 쪽에 있는 우산……. 피디에게 집을 치우지 못해 미안하다고 하자 피디는 단칸방에서 어른 셋과 아이들 둘이 사는데 어떻게 깨끗할 수 있느냐며 창피할 것 없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중계차의 화면에는 무엇보다도 사람이 이상하게 나옵니다. 아랫목에 앉은 기천웅 씨만 해도 머리는 큰데 다리는 짧고 가늘게 나와서 표고버섯이나 꼴뚜기를 보는 기분이 듭니다. 기천웅 씨가 발로 종훈이를 찼습니다. 또 미림이가 쥐포와 땅콩을 사 와서 기천웅 씨에게 주었습니다. 아이들이 물끄러미 보고 있는데 기천웅 씨는 자기 혼자만 열심히 다 먹었습니다. “그동안 힘드셨죠?” 피디가 마이크를 대었습니다. 내가 아무 말하지 않자 그가 마이크를 껐습니다. “별로 힘들지 않으신가 봐요?” 그가 웃었습니다. “세상 사는 게 다 그렇죠.” 나도 웃어 주었습니다. 그리 특이한 대답도 아닌데 그는 나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혼자 머리를 내저었습니다. 기계를 만지는 사람과 무언가 속삭이더니 나더러 오늘은 그만 가시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어쨌든 자기들이 우리 집을 지켜보고 있으니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어머니, 나는 어머니가 우리 식구를 돌봐 주고 계시니 아무 걱정 안 합니다. 티브이카메라에 낱낱이 찍히는 것을 기천웅 씨가 나중에라도 알고 화를 낼까 봐 걱정이 되긴 하지만 내가 시킨 것은 아니니 많이 걱정하지는 않습니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집에 돌아오니 미림이랑 종훈이도 잘 지냈다고 하고 미림엄마도 별일 없었다고 했습니다. 기천웅 씨는 오늘도 드라마에 정신이 팔려 나한테 시비 걸지 않았습니다. 드라마가 매일매일 오래 계속되면 좋겠습니다. 재미있는 드라마를 보내 주셔서 어머니 감사합니다.



1월24일 목요일


아침에 일어나니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미림이와 종훈이는 역시 아이들입니다. 눈이 내리면 길도 미끄럽고 고생하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닌데 눈이 온다며 그저 좋아합니다. 하지만 금방 조용해졌습니다. 기천웅 씨가 시끄럽다고 화를 냈기 때문입니다.

집골목을 나서는데 또 노랑머리남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중계차에 오르니 피디는 누군가와 전화를 하는 중이었습니다. 화면에서는 기천웅 씨가 혼자 집안을 뒤지고 있었습니다. 싱크대의 양념통들을 들었다 놓더니 냄비와 그릇들을 들추고, 싱크대 서랍을 들어내고 그 속을 들여다보기도 했습니다. 미림엄마의 비상금을 찾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습니다. 피디가 마이크를 켜고 웃으며 말했습니다. “이제 마음이 놓이시나 봐요.” “그런 게 아니라…… 뒤져봤자 헛일이거든요. 미림엄마나 나나 비상금은 양말 속에 있거든요.” 나는 바지를 약간 올려 양말목을 보여 주었습니다.  “……아무렇지 않으세요?” “저 사람 원래 저래요.” 웃자고 한 얘기였는데 웬일인지 피디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습니다. 갑자기 화면이 바뀌었습니다. 미림이가 기천웅 씨의 눈치를 보며 학교가방을 챙기고 있고 종훈이는 기천웅 씨에게 쥐어 박혀 싱크대 앞에 쪼그리고 앉아 눈물을 짜고 있었습니다. “현재 상황입니다. 유순봉씨, 어떤 기분이 드십니까.” 대답하고 싶지 않았지만 피디가 계속 나를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기천웅 씨가 종훈이를 너무 심하게 때리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아이가 맞는 것이 안쓰럽기는 하지만 사실 사내자식은 맞을 필요가 있습니다. 학교나 군대에 가면 당연히 매를 맞으니까요. 참, 종훈이는 다리를 절기 때문에 군대에 가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 종훈이가 사고를 당한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닌 듯합니다. 비록 전세금은 병원비로 날렸지만요. 어머니 감사합니다. 피디가 다시 물었습니다. “저 사람에게 책잡힌 일이 있습니까?” “아뇨.” “그럼 왜 그렇게 꼼짝 못하십니까. 억울하지 않습니까?” 나는 가만히 있었습니다. 피디가 담배를 꺼내어 불을 붙였습니다. “유순봉씨가 원치 않으시면 우리도 손 뗍니다. 모르는 사람이 막무가내로 들어와 나가지 않는다는 게 아주 희귀한 경우라 우리 프로에서 다뤄 볼 생각이었지만, 순봉 씨 쪽에서 저 사람과 사는 게 아무렇지 않다면 제 삼자인 우리가 끼어들 성질은 아니죠. 티브이 방영도 곤란하고요. 어떻게, 저 사람과 계속 같이 사실 예정입니까?” “예정이랄 게 뭐 있나요.” “쫓아낼 힘이 없어서 같이 사는 거라면 우리가 이참에 확실하게 쫓아내 드릴 수 있단 말입니다. 감옥에 보낼 수도 있고요. 분명히 말씀하세요. 저 사람과 계속 같이 살 생각입니까?” 나는 가만히 있었습니다. 피디가 다 태우지도 않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습니다. 나는 출근해야 한다는 핑계로 차에서 내렸습니다. 피디도 더 이상 나를 잡지 않았습니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오늘은 원래 땡처리되는 미국 수입 가구를 창고에 쌓으려고 했는데 눈 때문에 내일로 연기되었습니다. 비나 눈을 맞으면 가구가 망가지니까요. 창고는 춥습니다. 모두들 난로 곁을 떠나지 못합니다. “팔리지도 않는 가구 쪼개어서 불이나 때면 좋겠구먼.” “좋지. 잘 타겠다.” 다들 한바탕 웃었습니다. “석유난로에 나무를 어떻게 넣어요.” 내가 한 마디 하자 사람들이 더 크게 웃어대었습니다. “부수기만 해. 어떻게든 땔 테니.” “모닥불이 훨씬 뜨뜻하고말고. 이까짓 석유난로에 비하겠어.” “그럼. 락카통 하나 비워서 불 때면 되지.” “순봉씨, 하나 부숴 봐.”사람들이 모두 나를 부추겼습니다. 나는 슬그머니 창고에서 나왔습니다. 유순봉 간다! 이왕이면 큰 걸로 때려잡아. 웃는 소리가 시끄러웠습니다. 공장 문밖에 서서 내리는 눈을 바라보았습니다. 수선부에 가면 허드레 나무토막이 뒹굴고 그런 것들만 주워 와도 하루 땔감이야 되겠지만 저 사람들 이야기를 그대로 들었다가는 큰일 납니다. 지난 가을 어느 비 오는 날, 사람들이 부추겨서 소주를 사 온 적이 있습니다. 공장장에게 들키자 사람들은 내가 권해서 할 수 없이 마셨다며 하나같이 발뺌을 했습니다. 별수 없었습니다. 사정이야 어떻든 내가 내 돈으로 소주를 사 온 것은 사실이었으니까요. 한바탕 나를 야단치고 난 후 공장장은 그들에게도 한 마디 했습니다. ‘유순봉이가 너희들 봉이냐? 툭하면 뒤집어씌우게.’ ‘봉이잖아요! 유순봉.’ 사람들과 같이 웃는 공장장이 나는 원망스러웠습니다. 내 이름에 봉자가 있기는 하지만 나는 그들의 지시대로 움직이는 봉은 아닙니다. 나는 내 이름을 좋아합니다. 어머니가 주신 이름이니까요. 어머니 감사합니다.

방앗간 동서가 또 전화를 했습니다. ‘피디 만났남?’ “예.” ‘이번 기회에 그 쥑일 눔을 워떻게든 끌어내어.’ “나가려고 하겠어요? 이 겨울에.” 별 말도 아니었는데 동서가 마구 화를 내었습니다. ‘자네가 그놈 추울 걱정을 왜 혀! 3년이나 그 꼴을 당하구두 혼이 덜 났남? 지발 똑바루 좀 굴어. 자네 땜에 내가 욕먹어. 내가 무슨 잘못여. 자네 동서 된 죄밖에 더 있남? 답답혀, 내 복장 터지는 걸 누가 알어. 끊어!’ 전화를 끊고 가만히 생각하니 기천웅 씨도 어쩌면 갈 데가 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젠가 자기도 처자식이 있다는 말을 했거든요. 그래도 처자식까지 데려오지는 않고 혼자 우리 집에 있는 것을 보면 기천웅 씨가 영 염치없는 사람은 아닙니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퇴근하여 집에 들어서는 나를 기천웅 씨가 노려보았습니다. “티브이에서 왔다는 것들, 만났냐?” 나는 얼른 고개를 내저었습니다. 속으로는 간이 뚝 떨어졌습니다. 기천웅 씨가 모든 걸 다 알았다면 어떻게 나올까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말해 봐. 이 집 주인이 누구야?” 기천웅 씨의 발이 내 옆구리를 질렀습니다. 너무 아파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두 손으로 겨우 기천웅 씨를 가리켰습니다. “알긴 아냐? 길바닥으로 쫓겨나 얼어 죽고 싶지 않으면 똑바로들 굴어!” 내가 얻어맞는 것을 티브이 쪽 사람들은 다 보고 있겠지요. ‘보고 있으니 걱정 말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맞아 죽게 내버려 두지는 않겠다는 보장일까요. 아니면 보는 사람들이 있으니 용감하게 맞으라는 뜻일까요. 내게 하던 발길질이 그치나 했더니 어느새 종훈이가 앞으로 고꾸라집니다. 종훈이는 울지도 않고 혼자 일어섭니다. 크게 다친 데는 없는 것 같습니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여느 때와 똑같이 기천웅 씨는 아랫목에서 따로, 우리 네 식구는 플라스틱 작은 상에 둘러앉아 저녁밥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방앗간 처형이었습니다. 집에 들어선 처형이 다짜고짜 소리를 질렀습니다. “왜 내 동생 집에서 이러는 거야! 대체 당신이 누구냐고!” 처형이 기천웅 씨에게 대놓고 화를 내는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내가 진정하라고 하니까 이번에는 나를 노려보며 소리쳤습니다. “제부는 가만히 있어요! 이런 사람 하나 내쫓지도 못하면서 무슨 말이 많아!” 그 소동 속에서도 기천웅 씨는 밥숟가락을 뜹니다. 티브이 연속극을 보면서 한가로이 한 마디 합니다. “밥 먹고 얘기해.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리는 법이야.” 나도 그냥 밥을 먹을까 싶어서 다시 숟가락을 잡았습니다. 처형에게 저녁 드셨냐고 하니까 지금 밥이 넘어가냐고 또 화를 내었습니다. 밥이 잘 넘어가지는 않지만, 어머니, 나는 어머니 말씀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밥은 꼭 찾아 먹어야 되어. 한 끼를 굶으면 죽을 때꺼정 그 끼니를 못 찾아 먹으니께.’ 그릇에 있던 밥을 억지로 입에 쑤셔 넣었습니다. 밥상을 싱크대 앞으로 옮기며 아이들에게 빨리 먹으라고 손짓했습니다. 처형은 기천웅 씨에게 계속 소리를 질러대었습니다. “당신이 사람이야? 내 동생이고 조카들이고 무슨 죄가 있다고 이렇게 괴롭히냐고!” 처형의 목소리에 울음이 섞이니까 나도 울고 싶었습니다. 

드디어 기천웅 씨의 밥그릇이 비었습니다. 물을 따라 마신 그는 예상대로 자기 밥상을 걷어찼습니다. 상이 널브러지고 반찬이 쏟아지고 김치그릇이 박살났습니다. “여보, 밥통!” 미림엄마가 내게 밥통을 치우라고 소리쳤지만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밥통이 방밖으로 날아가고 미림이의 책가방이, 옷이, 물주전자가 차례대로 날아갔습니다. 나는 얼른 싱크대 앞으로 가서 미림이와 종훈이를 감쌌습니다. 그가 심하게 화나면 물건뿐 아니라 아이들도 던지기 때문입니다. 종훈이를 패대기쳐서 머리가 깨진 적도 있습니다. 처형에게 제발 진정하시라고 소리쳤지만 처형은 참지 않았습니다. “제부가 이 모양이니 식구들이 고생하잖아! 사내가 싸울 때는 싸워야지, 왜 피하기만 해!” 기천웅 씨가 널브러진 두레상을 머리 위까지 쳐들었습니다. 아찔했습니다. 누군가가 다쳐도 크게 다칠 상황이었습니다. “잠깐만요!” 나는 벌떡 일어나 처형의 등을 힘껏 밀쳤습니다. 처형을 집 밖으로 몰아내고 문을 닫아 버렸습니다. 경찰에 신고할 거야! 당장 집에서 나가! 처형의 목소리가 골목에 울려 퍼졌지만, 처형도 겁이 나는 모양입니다. 다시 집에 들어서지는 못했습니다. “빨리 치우지 않고 뭐해!” 기천웅 씨의 호통에 우리는 얼른 방을 치우기 시작했습니다. 미림이의 책들이 물에 젖기는 했지만 그래도 찢어지지는 않았습니다. 현관까지 굴러간 밥통도 찌그러지기는 했지만 그런대로 뚜껑이 닫혔습니다. 무엇보다도 아이들과 미림엄마가 무사했습니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더 이상 별일 없이 잠을 잘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방안을 서성이던 기천웅 씨는 아무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 모양이었습니다. “애들 내보내.” 결국 아이들은 겉옷도 입지 못하고 밖으로 내쫓겼습니다. 엄마, 아빠, 추워! 잘못했어요! 우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애처로웠습니다. “이참에 느이 연놈도 같이 나가라. 더 이상은 못 봐주겠다.” 나는 얼른 무릎을 꿇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럽니다.” “뭘 안 그러는데? 말해 봐. 네가 잘못한 게 뭔데?” “다 잘못했습니다. 진정하십쇼.”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아 영 불안했습니다. 잠시 후 작은 소리지만 다시 울음소리가 나서 그나마 마음이 놓였습니다. 기천웅 씨가 내 휴대폰을 집어던졌습니다. 아이고, 요행히 잡았습니다. 휴대폰이 또 황천으로 갈 뻔했습니다. “방앗간에 전화해. 또 한 번 조잘거리면 아가리를 찢어 놓겠다고 해. 집이고 방앗간이고 확 싸질러 버린다고.” 방앗간 처형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실은요, 기천웅 씨한테 돈을 꾸었거든요. 그래서 이 집이 기천웅 씨 집이거든요.” 내가 말했습니다. ‘제부 정말 왜 이래! 그 놈한테 또 맞은 거야? 애들도? 속상해 죽어, 내가!’ 처형이 전화통에 대고 다시 울부짖기 시작했습니다. 처형의 말소리를 기천웅 씨가 들은 모양이었습니다. “죽어! 죽으면 될 거 아냐? 언제 그렇게 동생이고 조카들이고 챙겼다고! 이 집 알토란 같은 재산은 즈이덜이 다 채 간 주제에. 너희 방앗간, 그거 유순봉 거잖아! 진짜 도둑이 누군데?” 어느새 전화 목소리가 넷째동서로 바뀌었습니다. ‘너 이게 무슨 소리야! 엇다 대고 없는 소릴 만들어? 너 정말 내 손에 죽어 볼래?’ “지랄하고 자빠졌네.” 기천웅 씨가 코웃음을 쳤습니다. 기천웅 씨와 넷째동서가 시비를 붙는 동안 나는, 에라 모르겠다, 바깥에 있는 아이들을 들여 놓았습니다. 미림이와 종훈이는 마른 장작처럼 얼어붙어 있었습니다. 미림엄마가 손발을 주물러 주고 뜨거운 물을 먹였습니다. 기천웅씨는 전화를 끊고도 한동안 씩씩대었습니다. 허락도 받지 않고 아이들을 들여 놓았다며 또 나를 발로 찼지만, 그래도 아이들을 다시 내쫓지는 않았습니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기천웅 씨가 오줌 누러간 새에 천장 구석에 설치된 카메라를 올려다보았습니다. 피디와 그 일행들은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그들을 믿은 것은 아닙니다. 처음부터 기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 나는 하늘에 계신 어머니만 믿습니다.

기천웅 씨의 코고는 소리가 들리니 오늘도 이럭저럭 끝이 난 듯합니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1월 25일 금요일


출근하는 길에 중계차에 들렀습니다. 어젯밤에 처형이 왔었다는 이야기를 꺼내는데 피디가 말을 막았습니다. “알고 있어요. 우리가 보낸 건데요. 그 사람을 자극하면 어떻게 나오나 보려고요.” 피디가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마이크를 켰습니다. 나는 갑자기 얼떨떨했습니다. “지금 월세로 사시는 집의 명의가 누구 이름으로 되어 있습니까.” 얼떨떨한 채로 기천웅 씨라고 대답했습니다. “기천웅 씨한테서 목돈을 꾼 적이 있습니까?” “예.” “사실대로 말씀하세요. 목돈을 뺏기셨죠?” “그야…… 사람이 살다 보면 목돈이 필요할 때가.” “월급도 뺏습니까?” “뺏는 건 아니고요, 기천웅 씨 통장에 일단 넣었다가…….” “넣었다가 어떻게 하는데요?” “그건 아직까지……” 그때 기계를 만지는 사람이 손을 들었습니다. “왜 끊고 그래?” 피디가 짜증을 내었습니다. 방송국에서 전화가 왔다고 했습니다. 피디가 전화를 받았습니다. “이번 기획 그대로 진행합니다.” 피디가 갑자기 얼굴을 구겼습니다. “……그럼 이대로 포기해요? 애들 장난도 아니고. 방앗간 얘기는 잘라내면 되죠. 식구들 간의 재산문제는 건드리지 않는다니까요.…… 본인이 원하고말고요. 확실하다니까요!” 전화를 끊은 피디는 테이블에 전화기를 내동댕이쳤습니다. 화면 속의 기천웅 씨는 아랫목에 비스듬히 누워 맨 배를 득득 긁어대었습니다. 피디가 선 채로 담배를 뻑뻑 피워대었습니다. 기천웅 씨는 누운 채로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며 트림을 했습니다. “유순봉 씨, 잘 들으십쇼. 마지막 기횝니다.” 피디가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습니다. “기천웅이 집에서 나가 주면 좋겠죠?” “그건 그렇죠, 그런데…….” “됐어요, 거기까지!” 피디가 손을 올렸습니다. 꼼짝하지 않던 차 안의 사람들이 조심조심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멈춰 섰던 카메라가 다시 피디와 나를 향했습니다. “우리가 알아본 바로는 기천웅 씨는 전과잡니다. 조폭 출신이고 술집 살인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15년에 처해졌습니다. 감형되어 8년 복역한 후 3년 전 가을에…….” 내가 얼른 거들었습니다. “전과자라고 다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 “지금 뭐 하자는 거예요!” 피디가 벌떡 일어서며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습니다. 나는 깜짝 놀라 가만히 있었습니다. 어머니도 아시다시피 묘목장에서 같이 일하던 임씨 말입니다. 임씨는 정말 착했습니다. 누구의 심부름을 무심코 해 주었는데 그 사람이 마약과 관계되는 사람이라 감방에 들어갔었습니다. 의자에 앉은 피디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팔짱을 낀 채로 눈을 감아 버렸습니다. “지금 출근해야 되거든요.” 조심스레 말을 했는데도 그는 꼼짝하지 않았습니다. 차에서 내려서니 그래도 노랑머리남자가 안녕히 가시라고 인사해 주었습니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놀라지 마세요, 어머니. 아침에 차에서 만났던 피디 일행이 공장에 나타났습니다. 피디, 조명기사, 카메라맨 둘, 노랑머리 남자까지 총 다섯 명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다른 인부들과 함께 대형 소파들을 창고 안쪽에 쟁이는 중이었습니다. 카메라맨들이 공장 이곳저곳을 찍어대자 공장장이 기겁했습니다. “너희들 뭐야! 누구 허락 받고 사진 찍어!” 중국에서 들여 온 골조에 천을 씌워 미국 가구회사의 상표를 붙인 소파들에 대해서는 엄밀히 따지자면 우리 공장은 책임이 없습니다. 우리가 만들지도 않은 데다 벌써 몇 년 동안 전국 점포에 깔렸던 것을 공짜나 다름없이 넘겨받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피디가 공장장에게 명함을 내밀었습니다. “사장님께 협조를 구했습니다.” 마침 그때 사장이 왔습니다. 사장과 공장장과 피디가 얘기를 나누는 동안 카메라맨들은 계속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은 줄곧 나만 따라다녔습니다. 나는 열심히 일했습니다. 이인용 소파를 혼자 지는 것이 꽤 무거웠지만 내색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이 보더라도 아빠가 씩씩하게 일하는 모습이 보기 좋을 테니까요. 사장은 이내 돌아가고, 공장장이 내게 오더니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습니다. 피디가 공장장에게 마이크를 대었습니다. “유순봉씨 성격이 어떻습니까.” “성실하죠. 말수도 없고 아침에도 제일 먼저 출근하고요.” 김 과장도 한 마디 거들었습니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이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으면 입었지 절대 해를 끼칠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왜 나랑 일하면 심장마비 걸린다고 합니까.” 내가 웃으며 한 마디 했습니다. 순간 김 과장의 얼굴이 벌개졌습니다. 그렇게 심한 농담도 아닌 것 같은데 또 내가 잘못한 것일까요.

점심시간 후에도 피디 일행은 떠나지 않았습니다. 괜찮은 장면을 골라야 하기 때문에 골고루 넉넉히 찍는다고 했습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피디 일행이 공장 한 쪽에 모여 얘기들을 나누는데, 김 과장이 내 귀에 대고 작은 소리로 물었습니다. “피디에게 월급 얼마 받는다고 했어요?” 웬일로 존댓말이었습니다. “안 물어보던데요.” “혹시 물으면 100만 원이라고 해요. 내 얘기는 절대 하지 말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때마침 공장장이 오더니 잠깐 공장장실로 가자고 했습니다. “피디한테 월급이 얼마라고 했어?” “안 물어보던데요.” “순봉씨 월급은 130만 원이야. 지금 사장님이 전화했어. 퇴직할 때 주려고 매달 저축하는 것이 있어서 조금 덜 주는 거지. 알았지? 130만 원.” 나는 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희한하지요. 사람들은 어떻게 피디가 물을 말을 먼저 알고 있을까요. 공장장실에서 나오자마자 피디가 마이크를 들이대었습니다. “한 달 봉급이 얼마쯤 되십니까.” “130만 원요.” 나는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130만원. 어머니, 제 가슴이 울렁거립니다. 어머니도 기쁘시지요?

퇴근길에 나는 또 중계차에 갔습니다. 피디가 ‘별다른 지시가 없는 한 무조건 아침저녁으로 차에 들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이 있는 듯했습니다. 양복을 차려 입은 점잖은 신사가 테이블 앞에 앉아 있고 피디가 그 앞에 서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습니다. 신사가 내게 자리를 권했습니다. 화면에는 수돗가에 쪼그린 미림엄마가 보였습니다. 피디 일행이 미림엄마에게도 갔던 모양입니다. 미림엄마는 찬물로 야채를 씻느라 손이 곱아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뜨거운 물을 설거지통에 부어 주었습니다. 화장을 진하게 하고 옷도 그럴듯하게 입은 식당 주인아줌마였습니다. 뜨거운 물을 부어 주다니, 미림엄마에게 들은 바로는 그 아줌마는 요새 증권에 빠져 가게에 나타나지도 않는다고 했습니다. 신사와 피디가 계속 얘기를 나누었기 때문에 나는 쉬고 있는 카메라맨에게 작은 소리로 말했습니다. “주인아줌마가 잘 보이고 싶은가 봐요. 저렇게 물도 떠다 주고.” 카메라맨 역시 작은 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애기엄마는 파출부 일은 안 하고 식당일만 하는 걸로 했어요. 파출부를 부르는 여자들이 집을 공개하지 않아서요.” 나는 조금 놀랐습니다. 드라마나 오락프로야 꾸민 이야기지만, 시장이나 농촌 등지의 사람 사는 모습을 찍은 것들은 사실 그대로인 줄 알았거든요. 피디와 얘기를 끝낸 신사가 내게 악수를 청했습니다. “말씀 들었습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집에 들어와서 식구들 모두 고생하시네요.” “고생 안 하는 사람이 세상에 있겠습니까.” 나는 여유롭게 웃었습니다. 신사가 말을 이었습니다. “월세 명의를 되찾는 일이나 그 사람을 감옥에 보내는 일들은 우리 마음대로 하는 게 아닙니다. 유순봉 씨가 원하신다는 전제하에 우리가 도와드리는 거죠. 티브이 방영도 마찬가집니다. 유순봉 씨가 원치 않으시면 안 하셔도 됩니다.” “사실 티브이에 나가는 것은 좀…… 남에게 자랑할 만한 일도 아니고 기천웅 씨도,” 내가 말하는 도중에 피디가 내 팔을 쳤습니다. 신사가 피디를 노려보았습니다. 피디가 하는 수 없이 뒤쪽으로 물러났습니다. 잠깐만요, 내가 피디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피디가 반색하며 나를 쳐다보았습니다. “내 월급이요, 그거 진짜 우리 사장이 줄까요?” 피디가 눈을 껌벅거렸습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는 눈치였습니다. 신사가 말했습니다. “그럼요. 월급이야 당연히 사장이 주죠. 그럼 누가 주겠습니까.”130만 원. 그 돈만 꼬박꼬박 받는다면 미림엄마가 식당 설거지까지는 안 해도 됩니다. 티브이에 나가는 것이 잘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장이 두 말은 안할 테니까요. 어머니 감사합니다.



1월 26일 토요일


출근길에 아랫골목에 갔는데 웬일로 중계차가 없었습니다. 그 아랫골목, 또 그 아랫골목까지 뒤져 보아도 차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놀랍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했습니다. 차가 있던 골목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차바퀴 때문에 으깨진 공터의 잡초를 한참 동안 들여다보다가, 마치 내가 중계차라도 되는 양 한참 동안 그것들을 밟고 서 있었습니다. 나를 도와주고 싶어 하는 피디 일행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들 일이 끝나면 떠날 사람들 아닙니까. 기천웅 씨를 감옥에 보낸들 그는 얼마 되지 않아 다시 나오지 않겠습니까. 나오면 그는 또 어떻게든 우리를 찾아내지 않겠습니까. 어머니, 어머니가 보고 싶습니다. 저 혼자 가족을 지키는 일이 너무나 힘듭니다.

공장사람들은 무언가를 수군거리다가도 내가 다가서면 뿔뿔이 흩어지곤 합니다. 티브이에서 나를 찍은 이유를 알고 저희들끼리 나눌 말들이 많은가 봅니다. 혹시라도 내 얘기가 티브이에 나오지 않게 되면 이들은 또 얼마나 많은 말들을 할까요. 김 과장은 단단히 틀어졌습니다. 커다란 안락의자를 낑낑대며 혼자 차에 싣고는 혼자 배달을 떠나 버렸습니다. 빗자루로 창고바닥을 쓸었습니다. 공장장실도 치우고 공장마당의 눈까지 치웠는데도 내게 일을 시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창고 문 앞에 혼자 서 있는데 웬일로 노랑머리남자가 나타났습니다. 반가웠습니다.

은색의 티브이 중계차가 공장 앞 벌판에 서 있었습니다. 차 앞에 섰던 피디가 나를 보더니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피디가 반가워하는 모습을 보니 갑자기 눈물이 날 듯했습니다. 피디가 아침저녁으로 나를 괴롭힌다고 생각했는데 한편으로는 정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유순봉 씨가 꼭 봐야 할 장면이 있어서요.” 차에 오르자 피디가 화면을 가리켰습니다. 어제 오후의 일이라고 했습니다. 미림이와 종훈이가 방에 있는데 기천웅 씨가 종훈이에게 소주를 사 오라고 했습니다. 종훈이가 가기 싫다며 누나더러 가라고 하니까 기천웅 씨가 종훈이의 머리를 쥐어박았습니다. 종훈이가 찔끔거리다가 돈을 받아 밖으로 나갔습니다. 미림이가 앉은뱅이책상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기천웅 씨가 미림이의 등 뒤에 붙어 앉아 아이를 껴안았습니다. ‘공부 잘 하나 봐야지.’ 말은 그러면서 기천웅 씨는 미림이의 가슴과 배를 주물렀습니다. ‘저리 가요.’ 미림이가 싫다고 몸을 비틀며 책상에 바짝 붙었습니다. 기천웅 씨가 가만있으라며 호통을 쳤습니다. 미림이의 얼굴이 일그러졌습니다. ‘아저씨 저리 가요, 왜 그래요.’ 미림이가 자꾸 몸을 피하며 울먹였지만 기천웅 씨는 가만히 있지 않으면 매 맞는다고 겁을 주었습니다. 기천웅 씨가 미림이의 쉐타 속으로 손을 넣었습니다. 그리고 미림이더러 바지를 벗으라고 했습니다. 미림이가 벌떡 일어나 바깥으로 나가 버렸습니다. ‘너 이 년, 집에 못 들어와!’ 기천웅 씨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내가 저놈 나쁜 놈이라고 했죠? 이래도 가만있을 거예요? 딸이 저렇게 당하는데도 같이 살 거냐고요!” 손가락으로 화면을 가리키며 나를 다그치는 피디가 왜 내 눈에는 덩실덩실 춤이라도 출 듯 뵈는 걸까요. 피디의 말로는 기천웅 씨가 밤에도 미림이에게 손을 대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기천웅 씨 옆에 미림이가 자는 것은 사실입니다. 종훈이가 잠을 잘 때 몸부림을 심하게 쳐서 기천웅 씨가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담배 태우시겠어요?” 피디가 담배를 내밀었습니다. 담배를 끊은 지 5년이 넘었지만 오늘은 피우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담배에 불을 붙이는데 손이 덜덜 떨렸습니다. “확실히 얘기하세요. 이 일을 덮을 것인지 아니면 저놈을 경찰에 넘길 건지.” 나는 온몸에서 힘을 짜내어 겨우 말했습니다. “잡아가세요. 잡아가는데…… 나나 우리 식구들이 없을 때 잡아가세요.” 피디가 어딘가로 즉각 전화를 걸었습니다. 차 안에서 일하던 사람들도 한 마디씩 거들었습니다. 저런 놈은 사형을 시켜야 해, 개만도 못한 놈. 저게 인간이야? 일어나 집으로 오려는데 그 때까지도 이리저리 전화를 계속하던 피디가 소리쳤습니다. “그놈한테 절대 말하면 안돼요. 유순봉 씨 행동, 우리가 다 보고 있어요. 알죠?”

공장 창고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창고는 춥고 난롯가는 비어 있었지만 나는 난로 곁에 가지 않았습니다. 나 같은 놈은 불을 쬘 자격이 없으니까요. 아무도 몰래 창고 구석, 높이 쌓아 올린 소파와 소파의 작은 틈서리를 비집고 들어갔습니다. 나는 소리 죽여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미림이에게 너무 미안했습니다. 한참 동안 울다 보니 어쨌거나 미림이가 더 이상 피해를 입지 않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티브이 사람들을 보내 주신 어머니 감사합니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울게 해 주셔서 어머니 감사합니다.



1월 27일 일요일


일요일에 가끔 나는 이삿짐을 나릅니다. 하루 품이 보통 4, 5만 원인데 기껏해야 한 달에 한두

번 있는 일이라 그 돈까지는 기천웅 씨가 채뜨리지 않습니다. 오늘은 일도 없는데 이삿짐을 나르러 간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중계차에 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잠든 미림이를 내 자리에 뉘고 기천웅 씨 옆에 내가 누웠습니다. 기천웅 씨가 나를 발로 걷어차며 왜 옆에 눕느냐고 화를 내었습니다. 나는 그냥 죄송하다고만 했습니다. 기천웅 씨도 찔리는 게 있던지 더 이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밤새 그는 팔다리를 내게 얹으며 불편하게 굴었습니다. 하지만 내가 잠을 이루지 못한 것은 몸보다도 마음이 아팠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되지만 기천웅 씨의 상대가 미림엄마였다면 차라리 나을 수도 있었겠습니다. 어떻게 만 열 살도 되지 않은 미림이를 괴롭힌단 말입니까. 기천웅 씨의 코고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그의 가슴에 식칼을 푹 꽂는 상상을 했습니다. 가슴에서 붉은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고 그가 눈을 떠서 칼을 빼 보려 하지만 이미 그의 상태는……. 어머니, 나쁜 상상을 해서 죄송합니다. 물론 나는 그런 일을 하지 못합니다. 상상을 이어 나가는 것만으로도 겁이 나는, 그래서 딸아이도 지키지 못한 못난 아빠인 것입니다.

중계차의 화면에는 현재의 우리 집이 보였습니다. 미림이는 미림엄마 곁에 딱 붙어 다닙니다. 답답하니까 떨어지라고 해도 미림이는 떨어지지 않습니다. 종훈이도 마찬가집니다. 싱크대 밑에 드러누워 징징대니 미림엄마는 설거지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기천웅 씨가 소리를 지릅니다. 아이들의 징징대는 소리가 뚝 그칩니다. 피디가 스위치를 만지니, 세상에, 기천웅씨 가 미림이를 만지는 화면이 또다시 나왔습니다. “왜 자꾸 이래요!”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외면해 버렸습니다. “어제 본 것과 달라요. 어제 우리가 중계차에서 얘기를 나눌 때 찍힌 새 필름이에요.” 다른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어제 본 필름에서는 미림이가 기천웅 씨를 피해 바깥으로 도망쳤는데 이번 것은 미림이가 하는 수 없이 아랫도리를 벗고 있었습니다. “순봉 씨, 어제 처음 봤을 때의 표정을 지어 주세요. 어제는 내가 그만 흥분해서 순봉 씨 필름 찍는 것을 잊어 버렸거든요.” 피디가 다른 사람들에게 무언가 지시했습니다. “자, 찍습니다. 담배 피우시고요, 손도 좀 떨고요…….” 피디가 담배를 건넸지만 나는 받지 않았습니다. 피디에게 말했습니다. “미림이가 시달리는 장면은 텔레비전에 내보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미림이 친구들이 보면 곤란하니까요.” 그렇습니다. 내가 티브이에 나가고 싶지 않으면 안 나가는 것입니다. 피디보다 더 높은 신사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해 주시지 않으면 우리 집 일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으로…….” 피디가 벌컥 화를 내었습니다. “뭐야, 저런 인간하고 그냥 살겠다고요? 딸이 저런 꼴을 당하는 걸 보고도 그대로 넘어가겠다는 겁니까? 당신이 그러고도 아빠 맞아요? 지금 이 얘기를 빼면 뭐가 됩니까. 딸 이야기가 낱낱이 밝혀져야 저 짐승만도 못한 놈이 확실히 벌을 받을 것 아녜요! 담배 잡지 않고 뭐해 지금!” 나는 그만 고개를 숙였습니다. 피디도…… 기천웅 씨와 똑같았습니다. 얼굴이나 하는 일은 다르지만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손에 쥐고 마는, 강한 인간 말입니다. 나는 담배를 피우고 또 피웠습니다. 미림이는 아랫도리를 벗고 또 벗었습니다. 미림이의 울음 섞인 목소리와 기천웅씨의 강압적인 목소리가 내 귀에 쌓이고 또 쌓였습니다. 모든 것은 흘러가게 마련이라지만 어머니, 어떤 순간은 흘러가지 않습니다. 1분이 1년처럼, 1시간이 백 년처럼 길 때가 있습니다. 

오케이 사인이 나왔을 때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하지만 피디가 다시 나를 잡아 앉혔습니다. “내일 저녁에 예고편이 나가야 되거든요.” 피디는 다른 필름을 또 틀었습니다. ‘전과자가 다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라고 말하던 내 모습, ‘저 사람 원래 저래요.’ 하며 웃던 내 모습들을 틀며 그는 다시, 또다시 해 보라고 명령했습니다.

화면이 겨우 현재 상태로 돌아왔습니다. 미림엄마가 기천웅씨에게 커피를 타다 주는 모습, 기천웅 씨가 방에 누운 종훈이를 발로 차서 종훈이가 새우처럼 오그리는 모습들이 이어졌습니다. 피디가 수고했다며 선심 쓰듯 말했습니다. “미림이를 위해서, 성희롱은 딱 한 번뿐이었던 걸로 하겠습니다. 사실 우리도 곤란합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동안 촬영팀은 뭐했느냐고 항의가 들어올 수도 있고요.” 차에서 나오기 전에 나는 남은 힘을 다 짜내어 말했습니다. “저 사람, 지금 잡아가 주세요. 되도록 빨리 데려가세요.” 어머니, 어머니께 항상 감사드려야 하는데 오늘은 그러기가 정말 힘드네요. 중계차에서 우리 집까지 오는 동안 나는 앞뒤 생각하지 않고 칵 죽어 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습니다. 어머니, 어머니 곁에 가면 안 될까요? 미림엄마와 아이들 모두 데리고 한꺼번에 그리로 건너가면 안 될까요?

“왜 벌써 와?” 집에 들어가자 기천웅 씨가 나를 노려보았습니다. “가보니, 이사가 벌써 끝났더라고요.” 내가 둘러대었습니다. “병신, 그렇게 행동이 굼뜨니 평생 요 꼴이지.” 기천웅 씨가 양은재떨이를 날렸습니다. 담배꽁초와 재들이 이불과 방바닥에 부슬부슬 내려앉았습니다. 미림엄마가 점심을 먹겠느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점심을 먹고 왔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어머니, 한 끼는 굶더라도 눈감아 주세요. 숟가락을 들 힘이 없습니다.

잠바를 벗기도 전에 미닫이문 열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경찰이 온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나는 얼른 아이들을 일으켜 싱크대 구석으로 몰았습니다. 집에 들어선 사람들은 경찰이 아니라…… 피디 일행이었습니다. 앞서 들어온 조명기사가 커다란 반사판을 들고 방 안 구석을 비추어대었고 곧바로 따라 들어온 카메라맨은 기천웅 씨와 우리 식구들을 찍어대었습니다. 기천웅 씨는 아랫목에 앉은 채 꼼짝하지 않았습니다. 피디가 기천웅 씨에게 마이크를 대었습니다. “말씀 좀…….” 기천웅씨가 마이크를 뿌리쳤습니다. 벼락 치는 소리가 났지만 피디는 다시 마이크를 들이대었습니다. “이 집 주인이십니까?” “당신들 누구야?” “이 집 주인은 저기 계신 유순봉 씨 아닙니까? 월세계약서 명의를 기천웅 씨 이름으로 바꾸셨더군요. 말씀하십쇼. 왜 그랬습니까.” “나가. 남의 집에 들어와서 지금 뭐 하는 거야?” “그러게 말입니다. 남의 집에 들어와서 대체 뭐 하시는 겁니까?” 기천웅 씨의 옆모습 뒷모습을 한참 찍어대던 카메라맨이 오케이, 됐어요, 말했습니다. 그들이 썰물처럼 집을 빠져나갔습니다. 나도 얼른 그들을 따라 골목으로 나갔습니다. 경찰이…… 경찰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골목에는 은색의 중계차만 덩그러니 서 있었습니다. “잠깐만요!” 차에 올라타는 피디 일행을 잡는 순간 기천웅 씨의 고함이 들렸습니다. “유순봉, 당장 이리 못 와?” “왜, 왜 이래요! 종훈아!” 미림엄마의 놀란 목소리가 이어졌습니다. 돌아보니 기천웅씨가 종훈이를 가슴에 붙안고 문간에 서있었습니다. 피디가 쫓아가 다시 마이크를 들이대었습니다. “뭐하는 겁니까. 아이를 잡아 협박하는 겁니까?” 카메라맨이 연이어 기천웅 씨를 찍어대었습니다. 기천웅씨가 엉겁결에 종훈이를 내려놓았습니다. 종훈이가 절룩거리면서 엄마에게 달려가 안겼습니다. “이 집 식구들에게 함부로 손대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집 안팎 곳곳에 소형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거든요.” 피디의 말에 기천웅 씨의 얼굴이 굳었습니다.

피디가 다시 중계차에 올랐습니다. 나는 작은 소리로 경찰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참! 말씀드린다는 게.” 피디가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습니다. “일요일이라 영장이 안 나온다네요. 내일 오후나 되어야죠. 저 인간, 도망이야 가겠어요? 월세 보증금까지 제 것으로 해 놓았는데 그게 아까워서라도.” 기가 막혔습니다. “그런 문제가 아니고요, 기천웅 씨가 다 알았으니 우리는 오늘 밤에…….” 피디가 내게 한 마디 쏘았습니다. “3년도 참아내셨잖아요. 어차피 하룬 걸요. 김군, 가자!”

나는 집안에 다시 들어서야 했습니다. 미림엄마와 아이들은 싱크대 앞에 한 덩어리로 얼크러져 있었고 기천웅씨가 선 채로 나를 향해 손을 뻗었습니다. “너, 이리 와.” “자, 잠깐만요.” 나는 얼른 집밖으로 뛰쳐나왔습니다. 어떻게든 오늘 밤 안으로 기천웅 씨를 데려가라고 피디에게 매달릴 참이었습니다. 중계차는 이미 보이지 않았습니다. 전속력으로 뛰어 버스를 탔습니다. 피디의 휴대폰 번호는 모르지만 그가 어디 사는지는 대충 알고 있었습니다. 무슨 말끝에 그가 사는 아파트 이야기를 했거든요. 가구 배달을 한 적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맞아요. 입구에서 첫 번째 동이에요.’ 피디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습니다.

아파트 단지에 들어섰습니다. 오른쪽과 왼쪽에 1동과 2동이 있는데 피디가 어느 동에서 사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경비원에게 물을 수도 없었습니다. 피디의 이름도 모를 뿐 아니라 무슨 용건으로 왔는지 설명하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나는 단지 정문에 섰습니다. 단지로 걸어 들어오는 사람들 하나하나, 주차장에 들고나는 승용차 하나하나를 확인했습니다. 겨울이라 날이 금방 저물었습니다. 손과 발, 귀가 추위에 떨어져 나가는 듯했습니다. 기다린 지 세 시간, 저녁 여덟 시가 넘어도 피디는 오지 않았습니다. 불안했습니다. 이 시간에도 기천웅 씨에게 곤욕을 당할 미림엄마와 아이들을 생각하면 초조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시계를 다시 들여다보는데 승용차 하나가 옆을 스쳤습니다. 아! 차의 조수석에 앉은 사람이 피디가 틀림없었습니다. “잠깐만 기다려요! 나 좀 보세요!” 나는 큰 소리로 외치며 차를 따라 뛰었습니다. 차가 설 듯 하더니 그대로 부르릉 떠났습니다. 나는 고작 차의 꽁무니를 손으로 한 번 내리쳤을 뿐입니다. 단지 안 깊숙이 들어가는 차를 한참 따라가다가 그만두었습니다. 피디가 아닌 모양이었습니다. 피디라면 자기 집이 있는 1동이나 2동에서 내리지 않겠습니까. 피디라면 나를 보고 왜 피했겠습니까.

결국 집에 돌아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데 휴대폰이 울렸습니다. 세상에! 피디였습니다. 너무나 반가웠습니다. “저기 저, 제가…….” 입이 얼어붙어 숨을 고르는 사이 피디가 내 말을 끊어버렸습니다. ‘듣기만 해요. 그놈 지금 옆에 있어요?’ 날씨보다도 더 냉랭한 목소리였습니다. “아, 아뇨.” ‘집에 없죠?’ “그건 잘…….” ‘왜 시치미를 떼요! 그놈이 우리 집까지 찾아와 나를 덮쳤잖아. 우리 집 가르쳐 준 게 당신이지?’ “아, 아뇨, 그런 적 없…….” ‘대체 나한테 왜 이래? 어째 아군적군을 몰라봐요! 집주소를 가르쳐 주다니, 우리 집식구들 해코지 당하면 당신 책임질 거야? 당신도 그놈하고 같이 콩밥 좀 먹어 볼 거야?’ 전화가 끊겨 버렸습니다. 나는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기천웅 씨가 피디의 집을 찾아가 덮치다니, 내가 피디의 말을 잘못 알아들은 걸까요?

집안은 의외로 말짱했습니다. 미림이는 윗목 앉은뱅이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고 있었고 종훈이는 윗목에서 바느질을 하는 엄마의 무릎을 베고 있었습니다. 돌부처처럼 앉아 꼼짝하지 않는 기천웅 씨는 피디를 덮치기는커녕 30년은 그 자세로 도를 닦은 스님 같았습니다. 주위를 돌아보니 방안이 깨끗했습니다. 이리저리 널렸던 물건들도 정돈되어 있고, 방바닥에 깔렸던 이불도 얌전히 개켜져 있었습니다. 숨 막힐 듯 조용한 이유는…… 텔레비전 때문이었습니다. 잠을 자지도 않는데 텔레비전이 꺼져 있었습니다. 미림엄마가 살그머니 일어서며 내게 손짓했습니다. 우리는 싱크대 구석으로 가서 귀엣말을 나누었습니다. “어떻게 된 거야?” “몰라. 당신 나가자마자 다 죽인다고 난리를 피우더니, 혼자 집안을 뺑뺑 돌더니, 갑자기 해해 웃으며 방을 치우고, 애들 머리를 쓰다듬고, 저녁 먹을 때는 애들한테 반찬까지 집어 주었어.”

자정이 지나고 새벽 한 시, 두 시가 지났습니다. 기천웅 씨가 눕지 않으니 미림엄마도 나도 누울 수가 없었습니다. 미림엄마는 윗목에서 아이들을 그러안은 채 졸고 있었고 나도 앉은 채로 졸기 시작했습니다. 헛기침 소리가 났습니다. 나는 얼른 눈을 떴습니다. “유순봉, 이리 아랫목으로 내려 와.” “아, 아닙니다. 춥지 않습니다.” 나는 얼른 무릎을 꿇었습니다. “왜 않던 짓을 하고 그래. 이리 오라니까. 누가 보면 오해하겠네.” 기천웅 씨를 쳐다보다가 그제야 나는 깨달았습니다. 그는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티브이카메라가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습니다. 나는 얼른 아랫목에 내려가 기천웅 씨와 똑같이 책상다리를 했습니다. “얘기를 해 보자고. 당신이 내 돈을 꿔 갔잖아. 5천만 원. 안 그래? 당신 입으로 확실히 말해 봐. 얼마야?” 기천웅씨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습니다. “5천만 원요.” “그래. 당신이 꿔간 5천만 원을 지금 갚는 중이잖아. 그래서 이 사글세 명의도 나한테 넘겨 주었고. 안 그래?” “맞습니다.” “딴 사람들은 오해할 수밖에 없지. 속사정을 모르니까. 말해 봐, 내가 당신식구들 피 빨아먹는 거야? 아니잖아. 거꾸로 내가 당신식구들을 봐주고 있는 거잖아. 내 말 틀려?” “맞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또 끄덕였습니다.

쾅쾅쾅, 누군가가 미닫이문을 부서져라 두드려대었습니다. “경찰입니다. 문 열어요!” 벽시계를 올려다보았습니다. 두 시 사십오 분. 이 시간에 경찰이 웬일일까요. 기천웅 씨가 나를 노려보았습니다. 나는 순간적으로 체머리를 흔들었습니다. 몰라요, 나는 몰라요. 미림엄마가 문을 열었습니다. 기천웅 씨가 또 종훈이를 끌어안았습니다. 집에 들어선 경찰이 말했습니다. “기천웅 씨, 우리랑 같이 가 주셔야겠습니다. 아이는 내려놓으십쇼. 놓지 않으면 현행범, 인질범으로 간주하겠습니다.” 뒤에 선 경찰이 기천웅 씨를 향해 권총을 겨누었습니다. 기천웅 씨가 즉각 종훈이를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는 얼른 인사를 차렸습니다. “바쁘신데 어떻게 여기까지……. 별일도 아닌데, 아니 물론 수고가 많으신데, 워낙 아무 일도 아니니까…….” 벽에 걸렸던 잠바를 입으며 그가 나를 쳐다보았습니다. 간절한 표정이었습니다. “잘 말씀드려. 괜히 오해 없으시게. 이건 정말 아무 것도 아니고, 완전히 오해로 벌어진 일이니까. 안그래?” 그는 신발을 신으면서도 내내 되뇌었습니다. “바쁘신 분들이 이렇게 오해로, 이건 알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닌 일인데…….” 나도 모르게 기천웅 씨를 따라 골목으로 나섰습니다. 그가 경찰차에 오르고 차가 삐용삐용 소리를 내며 골목을 빠져나간 후에도 나는 한참동안 골목에 서 있었습니다. 어머니, 이게 꿈일까요? 경찰차에 얌전히 올라탄 사람이 기천웅 씨 맞을까요? 온갖 악다구니와 공갈과 협박을 일삼던, 물건을 던지고 돈을 빼앗고 부엌칼을 휘두르고 아이들을 거꾸로 들어 패대기를 치던 바로 그 사람일까요? 그동안 나는 대체 누구를 두려워했던 것일까요. “골목에서 뭐하고 섰어? 추운데 안 들어오고!” 미림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1월 28일 월요일


어떻게 새벽을 맞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이들은 세상모르고 잠들었지만 미림엄마와 나는 누운 채로 누가 들을세라 소리죽여 이야기를 계속했습니다. 기천웅 씨가 없는 방은 너무나 넓었습니다. 뜨뜻한 아랫목에서 자는 아이들이 물레방아처럼 맴을 돌았습니다.

네 식구가 아침밥을 먹고 있는데 누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미림엄마와 나는 깜짝 놀라 서로 쳐다보았습니다. 기천웅 씨가 조사를 받고 벌써? 착잡했습니다. 문을 두드린 사람은…… 기천웅 씨가 아니라 피디 일행이었습니다. 작별 인사도 할 겸 카메라를 철거하러 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끝으로 인터뷰를 할 테니 고맙다는 인사를 차리라고 했습니다.

피디가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집 명의도, 기천웅 씨의 통장에 있던 돈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법적인 절차는 밟아야 하지만 순봉 씨 월급이 들어간 게 확인되고, 또 티브이화면을 보아도 앞뒤 정황을 알 수 있으니까요.” “고맙습니다. 정말 여러분 덕분입니다.” “얼른 돈 버셔서 집도 사시고 식구들과 편안히 사셔야죠.” “감사합니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저희도 보람 있습니다.” 컷. 카메라맨의 사인이 내리자 피디의 웃던 얼굴이 금방 사늘해졌습니다. 나는 언뜻 피디의 돌변한 표정이 기천웅 씨와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기천웅 씨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추위를 많이 타서 집에서도 이불을 둘둘 말고 있었는데 감옥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마침 기천웅 씨가 들던 아령이 피디의 발에 걸렸습니다. “이렇게 큰 아령이…… 그놈이 쓰던 겁니까?”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지겹지도 않아요? 얼른 갖다 버리지.” “버릴 수는 없죠. 나중에 다시 사려면 다 돈인 걸요.” 카메라맨이 아령을 찍자 피디가 화를 내며 카메라맨의 등짝을 쳤습니다. “가자고!” 감사 인사를 하려고 골목까지 따라 나갔지만 피디는 끝내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두 번 다시 나를 보고 싶지 않다는 피디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실은 나도 그러했습니다. 그들을 다시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머니, 미림이가 더 이상 괴로움을 당하지 않게 된 것은 그들 덕입니다. 그들을 원망할 수는 없습니다. 티브이 사람들을 보내 주시고 데려가 주신 어머니 감사합니다.

노랑머리남자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우리는 종합병원으로 갔습니다. 병원에서 피도 뽑고 소변도 받아내고 초음파에 엑스레이도 찍었습니다. 그 와중에도 카메라는 우리 뒤를 따라다녔습니다. 맨 마지막에 정신과 상담이 있었습니다. 아이들 둘은 소아정신과 상담을, 미림엄마와 나는 정신과 상담을 받았습니다. 예쁘장하게 생긴 사십 대의 여자의사가 기천웅 씨 때문에 힘들었던 점을 말해 보라고 했습니다. “작은 문제지만, 어느 사이에 아랫목을 기천웅 씨가 차지했고 그 옆에 미림이, 종훈이, 나, 미림엄마 순으로 누워 자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아이들도 몸피가 불어서 내가 방문 앞에 가로 누워 잘 때도 많았는데, 기천웅 씨가 밤에 일어나 소변을 보러 갈 때면 나를 밟았습니다. 그 정돕니다.” 나는 간단히 잘랐습니다. 미림엄마는 좀 달랐습니다. “힘들었죠. 그 사람 밥 차려 주기도 힘들었고요. 돈 뺏고, 물건 던지고, 툭하면 아이들 때리고, 얼마나 힘들었게요.” 내가 미림엄마의 팔을 툭 치자 의사가 그러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습니다. 미림엄마의 말을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미림엄마가 계속 말했습니다. “미림이가 ‘아저씨가 자꾸 만져서 싫다’고 말한 지도 꽤 되었어요.” 나는 미림엄마의 팔을 꽉 붙잡았습니다. 의사가 또 괜찮다고, 이미 알고 있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이가 너무 물러요. 누구한테나 너무 잘해 줘서 손해를 봐요. 독한 구석이 있어야 되는데.” 미림엄마는 신이 났습니다. 나는 그냥 가만히 있었습니다.

“기천웅 씨가 없어져서 불안하십니까?” 의사가 책상 모서리를 문질러대는 내게 다시 물었습니다. 뜬금없이 집주인아줌마가 떠올랐습니다. 화장실을 같이 쓴다는 이유로 화장실 청소는 물론이고 툭하면 머슴 부리듯 크고 작은 집안일을 다 시키곤 했는데, 기천웅 씨가 온 다음부터 주인아줌마는 화장실 청소는커녕 거꾸로 우리 식구 눈치를 봅니다. 또 종훈이가 네 살 위의 동네 형에게 매를 맞고 온 적이 있었습니다. 기천웅 씨가 종훈이를 데리고 어디론가 가더니 이후로 동네 아이들은 종훈이를 괴롭히지 않습니다. 종훈이가 다리를 저는 것도 아무도 놀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사실을 의사에게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건 기천웅 씨의 편을 드는 셈이 되니까요. “편안하게 말씀해 보세요. 기천웅 씨가 없어서 불안하십니까?” 나는 묘목장에서 일하던 때의 얘기를 했습니다. “고추나 시금치 같은 야채들 말고 조금 큰 것들, 말하자면 포도 같은 덩굴나무들은 지지대가 필요합니다.” “기천웅 씨가 지지대 같은 역할을 해주었군요?” “아뇨. 그냥 포도나무 얘깁니다. 포도 같은 작물은 지지대를 세워 주어야 키가 높아져서 열매를 제대로 맺는다는 얘깁니다.” “그럼요, 밤나무, 느티나무, 벚나무처럼 제 뿌리를 내리고 당당히 크는 나무들도 있지만 지지대가 필요한 덩굴나무도 있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의사가 말을 이었습니다. “갖가지 나무들이 있습니다. 어떤 나무들은 모양은 볼품없지만 좋은 열매를 맺기도 하고 또 어떤 것들은 쭉쭉 하늘로 뻗어 올라 가구를 만드는 데 쓰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도 저도 아닌 나무도 많지요. 하지만 그들이 다 같이 모여 숲을 이룹니다.” 내가 말을 덧붙였습니다. “나무들끼리 서로 화내거나 싸우지 말고 잘 어울려 살면 좋겠습니다. 웬만큼은 양보해 가면서요.” “그럼요. 유순봉 씨 말이 맞습니다.” 의사의 칭찬에 나는 고개를 숙였습니다. 의사는 이제 나무 얘기는 그만 하고 사람 얘기를 하자고 했습니다. “기천웅과 같이 사실 예정이었나요?” “그 사람이 갈 곳이 없으니 평생 같이 살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돈을 뺏지 않았습니까.” “돈이야 뭐, 있다가도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식구들을 때리기도 하고요. 안 아프셨습니까?” “성질을 건드리지 않으면 그냥 넘어갈 때도 많았습니다.” 의사가 나를 한동안 쳐다보았습니다. “따님을 건드린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바로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목이 메어 왔습니다. “다 내 탓입니다. 문단속만 제대로 했더라면…….” 쓸데없이 눈물이 비치는 것은 어떻게 고칠 수 있을까요. 나는 말을 끝낼 수 없었습니다. 의사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노랑머리남자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우리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미림엄마와 아이들은 피곤한지 잠이 들어 버렸습니다. 거리에는 어둠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눈발도 어느새 굵어졌습니다. 어둠 속에서 눈을 맞고 선 나무들을 보았습니다. 어머니, 나는 어떤 나무일까요. 자기 열매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자기 발로 설 수도 없는 쓸모없는 덩굴나무, 그래도 계속 살아야겠지요? 어머니, 이왕이면 보기 좋은 밤나무나 느티나무로 낳아 주시지 그러셨어요. 그러면 하늘에서 내려다보시기도 훨씬 마음 편하셨을 텐데요.

집에 들어서자 아이들이 깡충대며 좋아했습니다. 미림이는 아저씨가 다시는 안 왔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종훈이도 아저씨가 세상에서 완전히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 또 아이들에게 미안했습니다. 오랜만에 티브이 채널도 마음대로 돌려보았습니다. 아이들이 먹고 싶어하는 과자에 떡볶이, 순대, 땅콩을 잔뜩 사와 배가 터지도록 먹었습니다. 어머니, 어머니가 모든 일을 보살펴 주셨음을 잘 압니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2월 20일 수요일


티브이에 우리 집 얘기가 방영되어 우리는 꽤 유명해졌습니다. 방영된 지 보름이 넘었는데도 동네사람들이 아는 척 하고 웃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악수를 청하기도 합니다. 여든은 되어 보이는 할머니는 내 등짝을 치며 말했습니다. “사내가 너무 순하면 못 써. 싫은 건 싫다고 딱 부러지게 말혀야지.” 나는 그 할머니에게 ‘더 이상 우리 집 얘기를 하지 마시라’고 딱 부러지게 말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습니다. 할머니가 기분 나빠할 것 같아서요.

종훈이는 아침 일찍 아동보호소에서 보내 주는 버스를 탑니다. 미림이는 학교 수업을 마친 후 아동보호소에 갔다가 종훈이와 함께 저녁까지 먹고 옵니다. 덕분에 이 달 말까지는 미림엄마도 나도 아이들 걱정 없이 일을 다닐 수 있습니다. 그리고 3월이 되면 종훈이도 초등학교에 입학합니다. 미림이와 종훈이가 나란히 학교에 가면 문단속도 제대로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오늘은 월급날이었습니다. 월급봉투에서 20만 원을 꺼내어 김 과장에게 건네는데 마침 공장장이 옆을 스쳤습니다. 공장장이 김 과장더러 따라오라고 했습니다. 공장장실의 열린 문으로 말소리가 새어 나왔습니다. “뭐야, 김 과장이 유순봉 월급에서 돈을 뗐던 거야? 어쩐지 그 티브이피디가 이상한 소리를 하더라. 유순봉 월급이 80만 원뿐이라고, 유순봉이가 혹시 뒤로 돈 빼돌리는 거냐고 묻더라고. 김 과장 정신 차려. 나중에 무슨 꼴을 당하려고 이래? 어리숙한 사람들 상대했다가 더 크게 망신 당하는 거 몰라?” 공장장실에서 나온 김 과장이 나에게 따라오라고 했습니다. 김 과장을 따라 트럭에 올랐습니다. 그가 20만 원을 내밀었습니다. “유순봉 씨 대단하네. 겉으로는 순진한 척하면서 피디한테 내 얘길 했던 거야? 그래 잘 했어. 나도 유순봉 씨한테 돈 받으면서 맘이 불편했어. 앞으로는 딴 사람하고 일해. 나도 숨 좀 쉬게.” 나는 김 과장의 손을 덥석 잡았습니다. 피디에게 안 일렀다고, 제발 화를 풀라고 말했습니다. “이거 왜 이래? 누가 보면 내가 순봉씨 괴롭히는 줄 알겠네. 내리지 않고 뭐 해!” 김 과장이 소리를 질러도 나는 내리지 않았습니다. 김 과장이 그대로 트럭을 몰았습니다. 차는 우리 집 동네도 훨씬 지나고 천호대교를 건너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집이 있는 상계동으로 가는 모양이었습니다. 나는 월급봉투에서 5만 원을 더 꺼내어 20만 원에 보태었습니다. “김 과장님만 믿습니다. 계속 일하게만 해 주세요. 김 과장이 봐주지 않으면 우리 식구 다 굶어 죽습니다.” 나는 부탁하고 또 부탁했습니다. 결국 그는 내가 내민 돈 중 20만 원만 받고 5만 원을 돌려주었습니다. 나는 나머지 5만 원을 그의 호주머니에 마저 쑤셔 넣었습니다. 그가 한숨을 쉬며 혼잣말처럼 뇌까렸습니다. “참, 사는 게 뭔지.”

고맙다고, 안녕히 가시라고 말하고 트럭에서 내렸습니다. 천호대교 중간부터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습니다. 강바람이 매섭기는 했지만 다리만 내려서면 집에 가는 버스를 탈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공장에서 김 과장과 같이 일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어머니 덕분입니다. 더디기는 하지만 어딘가에 봄도 오고 있을 테니 추운 겨울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어머니 감사합니다.《문장 웹진/2008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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