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플레인

 

퍼플레인

                                                           



김규나



이번엔 보라색이다. 눈부신, 섹시하고 아찔한. 내 머리는 지금 붉은 보랏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 압구정동에 위치한 고급 뷰티 숍은 언제나처럼 인공 미인들로 가득하다. 잠깐 보면 입이 딱 벌어지게 완벽해 보이지만 5분도 못 되어 싫증나는 얼굴들이다. 똑같은 입술 두께와 비슷한 깊이의 쌍꺼풀, 자로 잰 듯 일치하는 턱 선의 각도. 명품을 입고 쇼윈도에 서 있는 마네킹과 다를 게 없다. 저런 인조인간들과 나를 비교하는 건 내 인격에 대한 모독이다. 귀족적으로 보이도록 코끝을 조금 올리긴 했다. 보다 완벽한 S라인을 위해 가슴에 생리식염수도 약간, 아주 약간 채워 넣었다. 요즘 세상에 그 정도야 기본이니까. 나머진 손대지 않았다.

 

 

아래턱은 짧고 갸름한 V라인으로 21세기가 선호하는 미인의 기본을 갖추고 있고 까만 눈동자는 크고 선명한 쌍꺼풀과 긴 속눈썹이 깊이를 더해 주어 내 얼굴을 이지적이고 분위기 있게 만든다. 그러나 성형외과에서 찍어낸 붕어빵 같은 저 여자들과 뚜렷이 차별화되는 나만의 개성은 따로 있다. 헤어스타일이다. 나는 헤어 정과 미용 스태프에 의해 붉은 보랏빛으로 서서히 물들어 가고 있는 머리를 거울 속에서 이리저리 훑어보며 마음이 들뜬다.

고등학교 때 ‘크레이지 보라’라는 별명을 가진 미술선생이 있었다. 그 여자의 코트와 티셔츠, 그리고 바지와 양말은 모두 보라색이었다. 손톱 위의 벗겨진 매니큐어도, 땀에 번져 번들거리는 눈두덩의 아이섀도 역시 보라색이었다. 팬티나 브래지어도 보라색일 게 틀림없었다. 그 노처녀는 보라만 보면 진짜 미쳤다. 수업시간에 아이들이 갖고 있는 보라색 볼펜이나 노트를 발견하면 살쾡이처럼 눈을 치뜨고 압수했다. 화폭에 보라색 계통의 물감이라도 칠해 놓으면 붓에 검은 물감을 흠뻑 적셔서 그림 위에 엑스 자를 북북 그었다. 그런 날 미술 준비물을 제대로 챙기지 못했거나 질문에 대답을 못하면 크레이지 보라는 길길이 뛰면서 회초리로 손등을 때렸다. 보라의 도발을 압도할 수 없는 비천한 영혼은 결국 보라의 주술에 함락당하고 만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물론 나는 보라의 발칙함을 누를 만큼 개성과 세련미를 가지고 있지만 그러한 보라색에 대한 추억 때문에―그것도 추억이랄 수 있는지 모르지만―나는 보라색으로 염색하는 것을 상상해 본 적이 없다. 그러던 내가 며칠 전부터 붉은 보라색으로 머리를 물들이고 싶어 거의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하필이면 헤어 정이 밀라노 헤어 쇼에 참석중이었기 때문에 일주일이나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의 불빛이 반사되어 더욱 번들거리는 민둥머리 헤어 정이 염색약을 칠한 내 머리에 캡을 씌우고 있다. 염색에 있어서는 달인의 경지에 이른 헤어 정에게 내 머리를 맡긴 게 고등학교 3학년부터니까 벌써 이 년째다. 나처럼 다양하고 과감한 염색을 하는 사람이 많지 않으므로 세계적 헤어 쇼에 나가 새로운 것을 발표해야 하는 유명 뷰티 숍 부원장인 그에게 나는 언제나 특별 손님이다. 어머머, 우리나라에 나만큼 머리 잘하는 애들이 있어야지. 헤어디자이너가 대머리인 게 우스워 이유를 물었을 때 헤어 정은 코에 힘을 주고 한껏 애교스런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운이 좋은 편이다. 헤어 정에게 내 머리를 맡긴 결과는 언제나 만족스러웠다. 그는 이번에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거울 앞 테이블 위에 놓인 휴대폰 벨이 울린다. 그 여자일 것이다. 늦지 말라거나 단정히 차려입고 와야 한다는 잔소리를 할 게 분명하다. 듣는 사람을 동요시키지 못하는 말은 언어적 소비다. 그 여자가 절실하게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 내가 호의적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내게 동의를 얻지 못하는 그 여자가 간혹 안쓰럽게 느껴질 때도 없진 않지만 내면의 불안을 외부로 폭발시키는 유아적 행태를 내가 책임질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한창 물들어 가고 있는 머리에 대한 기대를 그 여자의 곤두선 목소리로 망치고 싶은 생각이 없다. 보랏빛으로 물든 내 머리를 퍼플레인에게 빨리 보여 주고 싶을 뿐이다. 그의 황홀해하는 눈빛이 보고 싶어 마음이 급하다.

난 남자를 바꿀 때마다 머리색을 바꾼다. 고3 여름방학에 가슴 수술을 해 준 성형외과 원장은 영계를 무척이나 밝히는 서른여덟 살짜리 노총각이었다. 그 아저씨를 만나는 동안 나는 백발마녀처럼 하얗게 염색을 했다. 그가 입는 흰 가운과 잘 어울릴 것 같아서였다. 그는 자신이 직접 식염수를 채워 준 내 가슴에 입을 맞출 때마다 피그말리온이 된 것처럼 감탄했다. 그는 여자들의 가슴을 부풀려 주고 번 돈이 너무 많아 주체를 못하는 남자였다. 어제 수술한 여자가 주고 간 거네. 카드를 쓰지 않는 그가 호텔 프론트에서 수표를 꺼내다 말고 뒤쪽에 적혀 있는 이서를 보며 키들키들 웃었다. 내가 그에게 지불한 수표도 다른 계집애하고 노는 데 썼겠구나 싶었다. 재수 없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구질구질한 모텔 대신 나오고 들어갈 때 폼 나는 호텔로 가는 것이나 노래방 대신 룸살롱에 가는 것은 좋았다. 그의 BMW를 타고 드라이브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맘에 들었던 건 백발이 내게 너무나 잘 어울렸다는 사실이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어디를 가나 내 머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놓아 주지 않았다. 나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면 어쩌나 하는 걱정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못하는 멍청이가 아니다. 오히려 흘끔거리는 시선을 즐긴다. 내가 그들과 다르다는 것이 증명되는 순간이니까. 백발은 탈색하기까지 겪어야 하는 힘든 과정을 충분히 보상해 주었다.

칼라염색은 머릿결을 망가뜨린다. 염색을 시작한 후부터 내 머리카락은 뻣뻣하고 부스스하다. 계란 흰자나 마요네즈로 마사지를 하고 아무리 비싼 트리트먼트로 관리를 해도 반지르르 윤이 나는 머릿결은 꿈꿀 수 없다. 보통사람들이 선호하는 브라운과 달리 탈색을 먼저 해야 하기 때문이다. 머리카락 속에 있는 멜라닌 색소를 모두 빼내고 난 뒤 색깔염색을 하는 것이다. 게다가 탈색과정에서 사용되는 독한 약물은 두피에 염증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렇지만 나는 결 좋고 단조로운 것보단 스타일이 살아 있는 색으로 나를 물들이는 게 즐겁다. 어쩜 색깔마다 이렇게 잘 어울리니? 정말 환상이야. 헤어 정조차 염색을 마친 내 모습에 감탄을 하곤 했다. 가끔은 음모에도 머리와 똑같은 색으로 염색을 하고 싶다는 충동이 일기도 한다. 헤어 정에게 그것도 해 달라고 말해 볼까 입이 근질거리지만 섹스하자는 의미로 받아들일까 봐 그만두기로 한다. 헤어 정은 내 타입이 아니다. 물론 헤어 정이 호모일 가능성도 높다. 섹스를 누구하고든 할 수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원할 때만 가능하다.

나는 흰 가운이 좀 재수 없긴 해도 한동안은 백발을 고수하고 싶었다. 하지만 한 달 만에 쫑내 버렸다. 젠장, 그 자식은 섹스를 할 때마다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네 친구 하나 데려와. 셋이 해 보자. 넷은 어떨까? 변태라고 판단해서는 아니었다. 나는 섹스에 변태가 있다고 생각할 만큼 고리타분하지 않다. 내 취향이 아니었을 뿐이다. 오르가슴에 올라가려는 순간 흰 가운이 그렇게 말을 하면 펑크 난 자동차 바퀴처럼 속도가 급감하고 엔진이 꺼져버렸다. 마지못해 다른 애들이랑 하는 거 옆에서 봐 주겠다고 했는데 남자를 데려 오겠다고 하는 바람에 나의 인내는 곤두박질쳤다.

그 다음엔 푸른빛이 세련된 다크블루였다. 그런대로 들어줄 만한 음색이라고 해서 2년제 실용음악과에 입학을 했지만 따분하고 새로울 것 없는 수업에 나는 별 흥미가 없었다. 화성이니 음계니 하는 것들은 머리만 아프게 할 뿐이었다. 노래방이면 충분했다. 다만 팝송을 잘 부르기 위해서는 본토발음이 필요했다. 나는 강사들 물이 끝내준다는 강남의 영어회화학원에 등록했다. 학교 강의는 대충 빼먹고 회화 강의를 여러 개 수강했다. 금발의 미국인 강사 조지가 제일 맘에 들었다. 나는 그의 수업에 열심히 출석했고 액티브한 실력 향상을 위해 데이트도 시작했다. 다크블루는 이방인에게 동양의 신비를 느끼게 해 주고 싶은 나의 애국적 서비스 정신 때문에 선택한 색이었다. 조지는 내 헤어스타일이 클레오파트라를 연상시킬 만큼 판타스틱하다고 말했다. 할리우드 영화배우처럼 잘생긴 외국인과 함께 다닐 때 야릇한 시선을 받는 것도 짜릿했다. 한 달쯤 지나자 의사소통의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이 문제였다. 어두운 머리색도 쉽게 싫증이 났다. 그래서 내가 먼저 바이바이했다.

같은 학교 무용과에 다니는 백댄서를 만났을 때는 그 녀석의 샛노란 머리와 앙상블을 이루기 위해 빨간색으로 염색을 했다. 사악한 처키 인형 같아 보여서 썩 맘에 든 건 아니었지만 같은 노랑머리 친구들이 엄청 부러워한다며 그 녀석이 아주 신이 났었다. 누나라고 부르며 내 모성애를 살짝 자극하던 한 살 연하는 발랄한 오렌지색, 결혼한 지 3년 만에 아내에게서 권태를 느낀다는 유부남을 위해서는 레드브라운으로 염색하고 레드 와인을 마시며 그를 위로했다.

내 머리를 초록으로 물들이게 했던 남자는 가장 긴 시간 동안 내 헤어 칼라를 지배했다. 대학교 산악 서클 회장인 그는 등반 일정이 없는 날엔 나를 데리고 산에 갔다. 그는 내게 천천히 숨 쉬는 법과 편하게 걷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함께 손을 잡고 정상에 올라가 세상을 내려다보는 기분도 괜찮았다. 평생 녹색머리만 달고 살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도 빠졌다. 하지만 산을 내려오면 땀이 밴 남의 운동화 속에 맨발을 구겨 넣고 있는 기분이 되었다. 결코 내 것이 될 수 없을 것 같은 평온, 그러한 불안감은 녹이 슬듯 내 자신을 천천히 부식시켜 가고 있었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이제 한 시간만 지나면 뷰티 숍에 들어올 때의 초록 머리는 감쪽같이 사라질 것이다. 이번에 공백은 없었다. 초록이 지쳐 갈 무렵 퍼플레인을 만난 것이다.

휴대폰 벨이 다시 울린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본다. 오후 5시, 뷰티 숍 창밖에 어스름이 깔린다. 빌딩 내부의 불빛이 외부로 노출되는 시간이다. 11월은 햇빛에 관대하지 않다. 가능한 빨리 지면의 온기를 몰아낸다. 자신이 겨울의 길목이라는 것, 다시 말해 시리고 차가워야만 하는 계절의 본분을 잊지 않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인생을 위해서 그 여자도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나는 휴대폰을 노려본다. 집어 줄까? 휴대폰 벨소리에 다른 손님들이 신경 쓰이는지 헤어 정이 슬쩍 내게 묻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헤어 정이 눈짓을 하자 옆에 서 있던 스태프가 전화기를 건넨다. 나는 슬라이드를 밀어 올리는 대신 수신음 소리를 죽여 버린다. 

내가 염색을 하지 않고 남자를 만난 건 첫 경험 때뿐이었다. 그 자식은 내가 열다섯 살이었을 때 학교에서 짱을 먹던 녀석이었다. 그 녀석의 눈에 띄고 싶은 여자아이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서울로 전학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성적이 상위권이었던 내 눈에 그런 녀석은 쓰레기였다. 그런데 녀석이 내게 몇 번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자 나로서도 이해할 수 없는 오기가 발동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고 그 여자가 중늙은이와 세 번째 재혼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유부남과의 간통, 부인의 이혼 합의, 결혼 골인. 한때 몇 편의 영화로 이름을 날렸던 그 여자의 기사가 연일 싸구려 잡지에 오르내렸다. 여자는 내가 모르길 바랐거나 자신을 이해해 주길 바랐을지 모르지만 난 그 여자를 혐오하고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 여자가 나를 낳았다는 걸 무효화시키고 싶었다. 그럴 수 없다면 그 여자가 나를 혐오하게 만들고 싶었으므로 나에게는 내 자신을 던져 버릴 무언가가 필요했다. 하지만 어렴풋하게나마 내 자신이 누군가에게 위로 받을 수 있다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녀석이 음지에서 휘두르는 그깟 허세조차 내게는 세상을 조롱할 수 있는 권력으로 비쳤던 것도 같다. 그 녀석이 나를 예뻐한다면 세상에 버려진 것 같은 더러운 기분은 더 이상 없지 않을까 하는 어리석은 꿈도 꾸었을 것이다. 그럴 수만 있다면 그 여자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립 만세를 외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한창 호기심이 많을 때이긴 했다. 내가 알지 못할 세계에 발을 들여놓고 싶은 조바심과 나를 망가뜨리고 싶은 치기, 일상 파괴에 대한 욕망은 나날이 커졌다. 나는 하루라도 빨리 그 녀석이 나를 덮쳐 주길 바랐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내 치마를 걷어 올리려고는 하지 않았다. 주먹 센 놈이 여자 경험은 없는 모양이라고 생각되자 숙맥 같은 그 녀석이 귀엽기도 했다. 마침내 아지트로 쓰던 학교 근처 쾨쾨한 지하 노래방으로 그 녀석이 나를 데려갔다. 나는 노래를 부르며 한껏 섹시한 춤을 추었다. 녀석의 얼굴이 점점 긴장되어 가는 게 느껴졌다. 나도 떨리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더 기다리고 싶진 않았다. 나는 대담하게 그의 무릎 위에 올라앉았다. 그의 뜨거워진 양 볼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내 입술을 그의 바짝 마른 입술에 갖다 대었다. 영화에서 본 것처럼 내 혀를 녀석의 입술 사이로 밀어 넣었다. 녀석이 당황했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의 반응을 빤히 쳐다보고 있던 내 눈과 시선이 딱 마주친 그 녀석이 질끈 눈을 감았다. 나도 긴장하긴 마찬가지였다. 지금 아무리 머릿속을 헤집어 보아도 내 생애 첫 키스가 무슨 맛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남의 숟가락으로 밥을 먹으라고 하면 구역질이 날 것 같았는데 더럽진 않네, 신기했을 뿐이었다. 입술을 떼고 바라본 녀석의 얼굴은 처음 겪는 흥분과 호기심의 무게에 금방이라도 압사할 것 같아 보였다. 묘한 쾌감이었다. 나는 정복자처럼 그 다음 단계로 돌진하고 싶어졌다. 녀석의 아랫도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용기를 내어 말했다. 네 거 보여 줘. 그럼 내 것도 보여 줄게. 나의 당돌함과는 달리 심장은 갈비뼈를 뚫고 뛰쳐나올 것처럼 쿵쾅거리고 있었다. 

노래방에서 그 일을 치룬 지 며칠 후 학급 주번이던 나는 쓰레기통을 비우려고 소각장에 갔다가 그 자식과 다른 학교 일진들이 어울려 담배 피우고 있는 걸 보았다. 내 말이 맞지? 계집애가 먼저 달려들 거라고 했잖아. 내가 누구냐? 도도한 척해도 계집애들 다 똑같다니깐. 침을 꿀꺽거리는 사내자식들 앞에서 녀석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얼굴에 벌긋벌긋 여드름이 한 멍석 깔린 녀석이 억울해 죽겠다는 듯 말했다. 씨발, 전교에서 제일 도도해 보이더니, 그렇게 쉬운 년인 줄 알았으면 내가 먹는 건데. 여드름은 마지못해 바지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만 원짜리 한 장을 펴서 그 자식에게 내밀었다. 이 형님이니깐 넘어온 거지, 새끼야. 녀석이 다시 으스댔다. 웃기고 있네. 짜샤, 너 처음이었지? 후장까지 해 봤다더니 벌벌 떠는 꼴이라곤. 나이키를 꺾어 신은 놈이 놀렸다. 죽을래? 그 녀석이 불쾌하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그렇게 자신 있음 니네 새엄마나 따먹든지. 꺾어 신은 나이키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 사이 녀석은 꺾어진 나이키의 손에서 만 원짜리를 낚아채 자신의 상의 윗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히죽 웃었다. 근데 그 계집애 후다 아냐? 교복 앞단추를 세 개나 풀어 헤친 놈이 돈을 내밀다 말고 그 녀석의 눈치를 살피며 빈정거렸다. 생아가 그렇게 달려드는 게 넌 이해가 가냐고? 풀린 단추를 못마땅하게 노려보던 그 자식이 피우던 담배꽁초를 흙바닥에 홱 내던지며 말했다. 걔네 엄마 베드신 못 봤냐? 그 엄마에 그 딸인 거지, 짜식. 꺼림칙하면 혼자 딸딸이나 치던지. 그제야 다른 놈들도 주춤주춤 주머니에서 천 원짜리와 만 원짜리를 꺼내 그 녀석에게 건넸다. 녀석은 돈을 받아 교복 윗주머니에 구겨 넣으며 말했다. 이 형님이 길 닦아 놨으니 다음엔 누가 탈래?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죽을 것처럼 아팠다. 피비린내가 싸아, 입안에 번졌다. 나는 힘주어 침을 칵, 하고 뱉었지만 입안의 비린내는 가시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내가 그토록 바라던 일이 마침내 나를 산산조각 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목표에 도달했다는 것에 조금도 기쁨을 느낄 수 없었다. 도저히 나를, 아니 그 녀석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날 밤, 아이들과 본드를 마시러 학교 뒷산으로 가던 그 자식의 뒤통수를, 나는 미리 준비해 간 야구방망이로 힘껏 내려쳤다. 내겐 좁쌀 알갱이만큼의 양심의 가책이나 두려움이나 망설임은 맹세코 없었다. 녀석이 내게 선물한 통증을 그 자식에게도 고스란히 되돌려 주는 것이 공평하다고 믿었다. 깨진 뒤통수를 감싸 쥔 채 땅바닥에 쓰러지며 나를 발견한 그 녀석의 눈빛은 귀신을 본 것처럼 두려움으로 가득했다. 녀석은 나를 고발하지 못했고 다른 녀석들도 겁을 집어먹었는지 나를 건들지 않았다. 그 후로 나는 그 자식을 보지 못했다. 1년 휴학했다는 말을 들었을 뿐.

모든 발단은 그 여자에게서 비롯되었다고 나는 확신했다. 그 여자와 닮은 것들을 내게서 모두 뜯어 버리고 싶었다. 가출은 이득 될 게 없는 무모하고 어리석은 짓이라고 판단했고 중학생이던 내게 성형은 너무 멀었다. 가장 빨리 털어 버릴 수 있는 것이 그 여자를 쏙 빼닮은 검은 머리였다. 그 여자는 염색이 아무리 유행을 해도 새까만 머리를 절대 바꾸려 하지 않았다. 하얀 얼굴과 긴 목, 검은 머리는 객관적으로 그 여자를 한층 아름답게 보이도록 했다. 그러한 아름다움이 부를 지닌 속물들과의 재혼을 가능하게 하는 데 기여했을 것이다. 나는 다음날 무단결석을 하고 미용실에 가서 가장 밝은 색으로 머리를 염색해 버렸다. 모범생이었던 나의 변화에 아이들은 환호했고 선생들은 어이없어했다. 정학 처분이 내려졌고 그 여자는 화가 아주 많이 났었다.

그 여자를 부정하기 위해 시작한 염색은 나를 또 다른 누군가에게 물들이고 싶은 욕망으로 진화했다. 하지만 3개월 이상 같은 남자를 만나다 보면 똑같은 색으로 염색을 반복해야 했는데 그건 정말 지루한 작업이었다. 뷰티 숍에서 등이 휘게 따분한 잡지나 뒤적이고 앉아 있어야 했던 결과가 몇 시간 전과 다름없는 머리색이라는 것을 확인할 땐 힘이 쏙 빠졌다. 나는 머리색을 바꾸기 위해서 사귀던 남자와 헤어졌고 새로운 칼라로 다가오는 사람을 만나 전혀 색다른 빛으로 머리를 염색했다. 이상한 건 이별 후 다른 남자를 만나기 전까진 머리색을 바꾸지 못했다는 것이다. 퇴색되어 버린 사랑의 빛깔을 머리 위에 얹고 살아야 하는 것은 우울한 일이었다. 남자와 헤어져서 속이 상한 게 아니라 머리색이 모호해져서 화가 났다. 모발의 멜라닌 색소가 쑥쑥, 두피를 뚫고 올라와서 정수리의 시커먼 범위가 날마다 넓어지는 건 돌아서는 남자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것보다 몇 배 더 불쾌한 일이었다.

너 퍼플레인 본 적 없지? 스테인버그 기타를 끌어안고 길고 곧은 손가락으로 코드를 잡으며 그가 물었다. 속삭이듯 프린스의 퍼플레인을 뜯을 때였다. 고등학교 때부터 음악에 빠졌던 그는 대학에 실패한 후 아버지한테 떠밀려 뉴욕으로 유학을 갔다고 했다. 뉴욕은 음악을 배우고 공연하기에 좋은 바와 무대가 많은 곳이었다. 그는 집에서 보내준 돈으로 대학에 다니는 대신 뮤직스쿨에 등록하고 그룹을 시작했다. 매일 저녁 록 바에서 기타를 연주하고 주말엔 공연을 보러 다녔다. 예술의 승화를 위해 친구들과 어울려 드럭도 했다. 한 번은 일곱 가지 색의 드럭을 친구가 가져왔다. 선택하는 색깔대로 세상이 온통 그 빛으로 바뀌어 보이는 약이라고 했다. 그가 손에 잡은 것이 퍼플이었다. 드럭을 한다고 해서 다 좋은 건 아냐. 처음에는 머리가 깨질 것 같고 속도 메슥거려. 토하는 애도 있거든. 그 고비를 넘겨야 환상의 세계가 오지. 그가 잠시 말을 멈추고 버드와이저 한 모금을 마셨다. 그날은 비가 내렸어. 한참 몽롱해져서 정신을 놓고 앉아 있는데 창밖에 퍼플레인이 내리는 거야. 상상을 해 봐. 밤하늘도 먹구름도 나무도 풀도 모두가 퍼플이었어. 눈앞이 온통 보라색인 거야.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어. 세상이 그렇게 아름답게 보였던 건. 섹스를 끝내고 나서 침대에 엎드려 턱을 괴고 있던 나는 거품이 모두 빠져버린 맥주를 홀짝거리고 있었다. 세상이 아름다울 때도 있을까. 나는 그가 보았다는 퍼플레인이 보고 싶어 후, 하고 한숨이 나왔다. 그거 구할 수 없어? 내가 물었다. 그가 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I never meant to cause you any sorrow, I only wanted to see you laughing in the purple rain. 너에게 슬픔을 주려던 건 아니었어. 퍼플레인 속에서 웃는 너를 보고 싶었을 뿐이야. 그가 기타를 튕기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퍼플은 자주색이라기보다 자주와 보라 중간쯤 되는 색을 말한다. 영어권에서는 보라색을 말할 때 흔히 퍼플이라고 한다고 그가 알려주었다. 그러고 보니 한자로도 보라는 자색(紫色)이라고 쓴다. 빨강과 파랑을 1대 1로 섞으면 푸른빛에 가까운 바이올렛이 되고 붉은 것을 약간 더 섞으면 퍼플이 되는데 신비함을 강조할 땐 보라, 좀 더 우아한 멋을 상징할 때는 자주색이 되는 거라고 나는 이해했다. 로마 왕족들을 퍼플의 자손이라고 했을 만큼 퍼플이 귀한 염료였던 시대엔 보라색을 몸에 걸쳤다는 이유로 사형당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야말로 미친 보라의 전설이었다. 

퍼플레인을 말할 때 그의 두 눈은 꿈을 꾸는 것도 같았고 다시 볼 수 없는 세상에 대한 동경과 절망으로 눈물이 가득 차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그의 젖은 눈빛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 순간 나는 내 머리를 붉은 보라색으로 염색하기로 결심했다. 그가 퍼플로 염색한 나를 볼 때마다 꿈꾸는 눈빛이 된다면 그런 그를 바라보는 나는 행복해질 것만 같았다. 그런 그를 매일 볼 수 있다면 세상은 퍼플레인보다 아름다울 것이다. 보랏빛은 내게 꿈이 되어 날아왔다. 보라는 더 이상 크레이지한 색이 아니었다.

퍼플레인을 처음 만난 건 그가 리더로 있는 홍대 앞 록 카페에서였다. 한 달에 한 번 페스티발이 열리는 날이었다. 손님 중에서 그달의 보컬을 뽑는 이벤트였다. 지금 잘나가는 아이돌 스타 몇몇이 그곳에서 스카우트 되었다는 소문 때문에 노래 꽤나 한다는 아이들이 줄을 섰다. 나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초록머리, 너 튈 줄 알았어. 보컬로 내가 뽑히고 나서 그룹 멤버들과 뒤풀이 할 때 그가 말했다. 그가 눈여겨봐 주었다는 말에 나는 하늘을 날 것 같았다. 그는 언제 어디서든 근사하게 튄다. 작고 깨끗한 얼굴선, 날렵한 콧날과 섬세한 눈매, 잘 다져진 몸과 훨씬 어린 남자애들을 능가하는 패션 감각. 그 중 가장 멋진 건 역시 헤어스타일이다. 뽀글뽀글 볶아 여러 갈래로 총총 땋아 늘어뜨린 까만 레게머리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그의 감각을 세련되게 표현한다. 그에게 썩 잘 어울리는 검은 색의 머리만큼은 나도 결코 싫지 않다. 그는 내 우상이 되었다. 나보다 열두 살이나 많지만 한 번도 아저씨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자신감, 그들의 세대와 위치에서 갇히기 쉬운 틀에 꿰이지 않은 자유로움, 그것이 내가 그에게 열광하는 진짜 이유다. 그날 이후 나는 자주 카페에 나갔고 그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정규 연주를 마친 그는 테이블에 앉아 있던 나를 종종 무대 위로 불러 노래를 시켰다. 언더 쪽에서 알아주는 그와 같은 무대에서 노래를 부른다는 것, 정식 무대는 아니었지만 나는 좋아 죽을 것 같았다. 퍼플은 행운의 색이다. 퍼플레인과 함께 있으면 난 이제 혼자가 아니어도 된다는 안도감에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뭐 하는데 전화도 안 받는 거야?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의 슬라이드를 밀어 올리고 귀에 대자마자 그 여자의 히스테릭한, 그러나 한껏 교양을 가장한 목소리가 귓바퀴를 찌른다. 몰라서 물어? 나는 느긋하고 여유 있게 한마디 톡 쏜다. 너 정말 머리 하고 있는 거 맞아? 그 여자의 목소리에 약간의 안도감이 비친다. 나중에 보면 알 거 아냐? 나는 쿡쿡 웃음이 나려는 걸 겨우 참는다.

내가 태어난 것은 그 여자가 열일곱 살 때였다. 그 여자와 나를 함께 만들었을 남자는 임신 사실을 알고 줄행랑을 쳤다고 할머니가 말했다. 그 당시 여자는 단역으로 몇 번 영화에 출연한 신인배우였고 내 존재가 세상에 알려질까 봐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통영에서 할머니가 나를 키웠다. 여자는 얼마간의 돈을 보내는 것으로 할 일을 다 했다고 믿었다. 그건 모성이나 양심 때문이 아니었다. 나를 자신의 세계에 얼씬거리지 못하게 하고 싶어서였다. 그 후 스턴트맨과 결혼을 했지만 1년 만에 미망인이 되었고 조금 더 이름이 알려진 후 재혼한 감독과는 3년쯤 살았다. 그 사이 나는 일 년에 한 번쯤 그 여자를 봤다. 여자는 나를 안아 준 적 없었고 살가운 눈길을 건네지도 않았다. 자신을 엄마라고 내게 소개하지 않았으므로 나 또한 엄마, 라는 이름으로 그 여자를 부르지 않았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모성에 외면 당하는 존재라는 걸 나는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간혹 할머니는 그 여자를 향해 모진 년, 이라며 혀를 끌끌 차곤 했다. 명성을 조금 더 얻은 여자가 나이 서른을 넘어 세 번째 재혼을 할 무렵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여자는 장례식장에서 한동안 나를 빤히 쳐다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여자는 하는 수 없다는 듯 서울로 나를 데리고 갔다. 한국의 리즈테일러, 세 번째 결혼, 그녀의 숨겨 놓은 딸 등등의 머리기사가 한동안 여성지를 장식했다. 나는 머리를 염색하던 그날부터 여자와 본격적인 전쟁을 시작했다. 결국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여자는 백기를 들고 나를 독립시켰다. 작은 오피스텔을 얻어 주었고 적지 않은 돈도 통장에 입금시켜 주었다. 나는 매일매일 그 여자를 보지 않게 된 것이 좋았다. 혼자 먹고 혼자 자고 가끔 학교에 다녔다. 참을 수 없이 따분해지면 진한 화장을 하고 휘황한 밤거리를 쏘다녔다.

그 여자는 작년에 또 다시 재혼을 했다. 여자의 네 번째 남편은 주가가 한창인 신도시에 최고급 호텔을 오픈했다. 오늘 호텔 개관을 축하하는 파티가 열린다. 무식하긴 해도 무시할 수 없는 재력은 그 영감탱이의 파티에 정관계와 언론계의 주요 인물들을 불러 모았다. 얌전하게 하고 와. 그 사람들한테 잘 보여서 너한테 나쁠 게 없으니까. 여자가 내게 말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럴 땐 여자가 정말 나를 낳긴 한 걸까 의심스럽다. 미치지 않고서야 하룻저녁 파티 때문에 헤어스타일을 바꿀 내가 아니라는 걸 모르다니 말이다. 파티에서 퍼플헤어의 나를 발견했을 때 그 여자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흥분된다. 코트를 벗으면 롱부츠에 아찔한 미니스커트, 그리고 배꼽과 가슴을 한껏 드러낸 탑도 그 여자를 기함하게 만드는 데 한 몫 해 줄 것이다. 오늘은 내 생애 최고로 익사이팅한 날이 될 것 같다.

더운 열기로 드라이 되고 있는 내 머리는 붉은 보라색이다. 물기가 마르면서 거울에 비친 퍼플은 눈이 부시다. 그가 보았다는 퍼플레인과 같은 색인지 빨리 묻고 싶다. 나는 그의 번호가 저장된 단축키를 꾹 누른다. 그가 세션으로 참여했던 컬러링이 오래도록 들려올 뿐, 그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다시 통화버튼을 누른다. 역시 그의 목소리는 대답하지 않는다. 오늘 만나기로 한 것은 아니지만 연주 시간이 아닌데도 가끔 연락이 끊기는 그가 날 불안하게 만든다. 섹스를 한다고 해서 사랑하는 사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이 원하지 않을 땐 몇 시간이건 며칠이건 연락두절이다. 그 자식 변했어. 지난주부터는 멤버들 간에도 연락이 잘 안 된다며 키보드 치는 오빠가 툴툴거렸다. 이럴 땐 꼭 세상에 없는 사람 같다. 바빠? 문자를 보내고 손톱을 자근자근 깨문다.

내일까지 머리 감으면 안 되는 거 알지? 헤어 정이 디자인을 마무리하며 말한다. 염색을 하고 처음 머리를 감는 날엔 염색물이 샤워실 바닥에 수채화물감처럼 번졌다. 몹시 아깝지만 약간의 물이 빠지고 나면 칼라는 나와 좀 더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보라색물이 빠지면 어떤 기분일까. 거울 속 나를 들여다본다. 바람머리처럼 부풀려진 커트 웨이브에 보랏빛 염색이 세련미와 신비함을 동시에 주고 있다. 봄의 푸른빛보다 화사하다.

호텔을 향해 달리는 택시 안에서 운전기사가 흘낏흘낏, 백미러로 나를 훔쳐본다. 촌스럽긴. 나는 슬쩍 비웃어 준다. 나를 괴물처럼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을 조롱하는 것, 염색이 내게 주는 또 하나의 재미다. 차 안에 틀어 놓은 히터의 더운 공기가 답답해 창문을 내린다. 11월의 냉랭한 바람이 내 머리를 흩어 놓는다. 구름이 많고 공기가 축축한 걸 보니 어쩌면 눈이라도 내려줄지 모르겠다. 하얀 첫눈이 퍼플헤어 위로 사뿐 내려앉으면 진짜 죽여 줄 텐데. 나는 싱긋 웃는다.

검은 색 대형세단들이 호텔 입구에 즐비하다. 택시에서 내린 나는 호텔을 올려다본다. 황금빛 조명을 받고 서 있는 40층 건물은 그 여자만큼이나 화려하다. 어쩌면 여자는 이제야말로 자신의 목표를 이루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더 이상은 나를 간섭할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로비로 들어가서 엘리베이터를 찾는데 한 남자가 방금 열린 엘리베이터 안으로 몸을 감춘다.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다. 혹시 퍼플레인? 나는 급한 마음에 로비를 뛰어가지만 엘리베이터 문은 코앞에서 닫히고 만다. 그 순간 내가 방금 본 남자의 머리와 의상이 퍼플레인의 것은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세상엔 닮은 사람이 많으니까. 나는 어깨를 한 번 으쓱 올렸다 내린다.

스카이라운지 연회장 입구의 직원이 나를 제지한다. 내 차림새가 그의 맘에 들지 않는 것이다. 초대장을 내밀자 못마땅한 얼굴을 겨우 감추며 직원이 내가 벗어 건넨 코트를 받아든다. 홀 안은 이미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다. 무대 위에서 실내악이 연주되고 있고 홀 한가운데 오늘 파티의 호스티스인 그 여자가 하늘색 실크 드레스를 입고 손님들을 맞이하는 게 보인다. 우아하게 틀어 올린 머리카락 사이에서 빛나는 보석장식들이 그 여자의 검은 머리 색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최고가의 피부 관리를 받아 윤기 나는 얼굴과 명품이 주는 고상함이 아니더라도 채 마흔도 되지 않은 그녀는 젊고 아름답다. 하지만 나를 찾느라 잠깐씩 흔들리는 여자의 시선은 불안하다.

해린이 너 이리 좀 와. 마침내 나를 발견한 그 여자가 다짜고짜 내 손목을 낚아챈다. 누가 볼세라 사람들이 안 보는 곳 어딘가에 나를 꼭꼭 숨겨 놓기라도 할 것처럼 서둘러 나를 끌고 나가려 한다. 왜 이래. 이거 놔. 여자의 손을 뿌리치며 내가 소리친다. 앙칼진 내 목소리에 놀란 여자가 주위를 살핀다. 순간 마주오던 노인네를 발견한 여자의 얼굴이 파랗게 굳어 버린다. 그 꼴이 뭐냐? 잠시 눈을 껌뻑거리던 노인네가 싸늘한 시선으로 나를 노려본다. 깐깐하고 고집스러워 보이는 늙은이의 전형이다. 나는 고개를 돌려 코웃음을 친다. 나를 흘겨보던 노인네가 여자를 매섭게 쏘아본다. 아이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요? 여자는 세상이 끝나기라도 한 것처럼 노인네 앞에서 기가 질린다. 화려하고 당당한 여자는 내가 등장하기만 하면 세상 앞에서 작게 움츠러든다. 그럴 때마다 나는 숨길 수 없는 쾌감을 느낀다. 차라리 지워 버리지 왜 나를 낳은 것일까 가끔은 궁금해지기도 한다. 머리카락에 새기고 잘라 내고 물을 빼면서 나를 스쳐간 남자의 기억을 삭제해 버리는 나와 달리 아마도 여자는 블랙홀처럼 검은 머리카락 속으로 모두 빨아들이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여자의 검은 머리색은 나날이 진해지는지도 모른다. 한 번쯤 묻고 싶다. 나를 세상에 있게 한 남자는 어떤 인간이냐고. 그 남자에 대한 기억만큼은 나에게 묻어 둔 것이냐고. 하지만 여자는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박 회장님. 축하드립니다. 여자의 남편과 같은 족속인 게 분명한 땅딸한 늙은이가 다가와 아첨을 한다. 그 여자도 나를 뒤로 숨기고 웃음을 지어 인사한다. 그네들이 과장되게 웃으며 인사를 나누는 동안 단정한 젊은 남자가 그들 옆에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다. 아, 아까 엘리베이터를 탔던 남자다. 나는 숨이 멎는다. 퍼플레인이다. 하지만 아닐 수도 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 검은 정장과 세련된 넥타이와 손목에 반짝이는 커프스가 돋보이는 하얀 드레스셔츠, 그리고 짧고 단정한 검은 머리. 오빠? 나는 등 뒤로 가서 그를 부른다. 그가 나를 돌아본다. 분명 퍼플레인이다. 반가움에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다. 고리타분한 자리에서 그를 만난 것만으로도 나는 신이 난다. 속물들의 파티에 그가 속물의 차림을 하고 왔지만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가 설명해 줄 것이다. 지금은 내 머리가 퍼플레인으로 바뀐 걸 그가 한 눈에 알아봐 주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하지만, 그는 웃지 않는다. 나를 보는 순간 당혹해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그의 난감해하는 눈빛이 나를 움츠러들게 한다. 땅딸보와 노인네와 그 여자가 퍼플레인과 나를 바라본다. 금방이라도 폭탄이 펑, 하고 터질 것 같은 순간이다. 퍼플레인은 분명 분위기를 감지하고 있다. 그가 나를 향해 깍듯하고 단호하게 말한다. 미안합니다. 사람을 잘못 본 것 같군요. 퍼플레인이 내게서 등을 돌린다. 머릿속이 텅 빈다. 어떤 말도 생각나지 않는다. 나는 지금껏 겪어 보지 못한 공황을 경험한다.

속물들은 안도하는 낯빛이 된다. 내 존재를 무시하고 자신들의 이야기를 계속한다. 제 아들입니다. 땅딸보가 퍼플레인을 노인네에게 소개한다. 제 속을 한참 썩이더니 이제야 철이 들었는지 회사 경영을 맡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부족한 아이지만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퍼플레인이 반듯한 태도로 노인네에게 인사를 한다. 회장님하고 사모님. 저희들 결혼식 때 꼭 와 주셔야 해요. 내가 의식하지 못했지만 퍼플레인 옆에 얌전히 서 있던 여자가, 하얀 원피스에 검은 생머리를 한 여자가 애교스럽게 말한다. 정 회장님 따님이시죠? 그 여자가 하얀 원피스에게 아는 체를 한다. 땅딸보가 더욱 자신감에 차서 두꺼비 같은 웃음소리를 내며 말한다. 지난주에 집안끼리 모여 조촐하게 두 아이 약혼식을 했습니다. 하얀 원피스가 퍼플레인의 팔짱을 끼며 화사하게 웃는다. 노인네와 그 여자가 축하의 말을 전한다. 의례적인 시간이 지나자 퍼플레인과 하얀 원피스가 인사를 하고 홀을 빠져나간다. 퍼플레인의 손이 하얀 원피스의 어깨를 다정히 두른다. 내 주위의 시간이 멈춘다. 나를 두고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눈으로만 쫓는다. 퍼플레인이 아주 잠깐 나를 돌아본 것도 같다. 그러나 아닐지도 모른다.  

보랏빛으로 혼자 빛나고 있을 나는 검은 정장, 까만 머리들 사이에서 이방인처럼 서 있다. 흘끗거리는 시선들, 내가 그들과 다르다는 것을 증명해 보라고 독촉한다. 입증해 보이지 못한다면 그들은 나를 실컷 비웃을 것이다. 나는 무대 위로 올라선다. 실내악 단원들이 영문을 몰라 주춤거린다. 연주가 멎자 사람들도 무슨 일인가 하며 무대를 향해 서서 술렁인다. 나는 마이크를 찾아 스위치를 켠다. 오늘은 저를 낳아 준 여자 분의 세 번째 남편, 하고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엄지만 접고 네 손가락을 쫙 편 채 무대 아래에서 잔뜩 긴장하며 나를 바라보는 그 여자에게 묻는다. 아. 맞다. 네 번째죠? 다섯 손가락을 넘지는 말아야 할 텐데요. 남의 사생활과 가십거리에 눈을 반짝이는 사람들의 호기심어린 얼굴을 보며 나는 통쾌하게 웃는다. 암튼 죽여 주는 파티네요. 감사하는 의미에서 저도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나는 마이크를 바닥에 내려놓는다. 그리고 웨이브 댄스를 시작한다. 음악이 없어 아쉽지만 원, 투, 쓰리, 나는 입으로 소리 내어 비트를 만들고 두 팔과 다리를 한껏 돌리고 뻗으며 춤을 춘다. 머리, 어깨, 가슴. 배, 파이브,식스, 세븐, 에잇. 나는 가슴과 허리와 엉덩이를 한껏 부풀려 파워풀한 섹시웨이브에 몰입한다. 마지막으로 그들을 향해 엉덩이를 돌리고 미니스커트를 한껏 들어 올려 준다. 탄식인지 탄성인지 우, 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조심스럽게 터져 나온다. 언제부턴가 기자들이 눌러대는 카메라 플래시도 나이트 조명처럼 이어진다. 춤을 멈춘다. 두 손을 가슴 앞으로 모아 우아하게 인사를 하고 무대를 내려온다. 몹시 숨이 차지만 미소도 잊지 않는다. 모세를 맞이하는 바다처럼 사람들이 양쪽으로 물러서 내게 길을 내어 준다. 등줄기에 차가운 땀이 흘러내린다.

연회장을 빠져 나오려다가 흠칫 뒤를 돌아본다. 많은 사람들 속에서 그 여자와 시선이 마주친다. 원망일까, 슬픔일까, 뭐지 저 눈빛은. 그 여자의 몸이 휘청거린다. 중심을 잃으면서 옆에 있는 늙은이를 붙잡으려고 두 팔을 휘졌지만 노인네는 송충이 털어내듯 그 여자를 밀쳐낸다. 여자의 두 팔은 공중에서 허둥거린다. 여자의 얼굴이 파랗게 질리다가 하얗게 바랜다. 마치 야구방망이로 뒤통수를 맞고 쓰러지던 그 자식의 표정 같다. 나는 고개를 돌려 여자를 외면한다. 나를 바라보던 그 여자의 힘없는 시선이 내 뒤통수에 끈적이며 들러붙는다.

11월의 바람을 타고 차가운 빗줄기가 휘몰아친다. 나는 빗속을 빠른 속도로 걷는다. 하지만 두 발이 자꾸만 엇갈려서 몸이 비틀거린다. 얼음송곳 같은 빗물 때문에 눈을 뜰 수도 없다. 머리를 적시고 이마 위로 흘러내리는 차가운 빗물을 두 손으로 훔쳐낸다. 싸늘한 가로등 불빛이 손바닥에 반사된다. 내 손엔 자줏빛 빗물이 흥건하다. 퍼플레인이다. 내 얼굴 위로 그치지 않을 것 같은 퍼플레인이 쏟아져 내리고 있다. 그가 말했었다. 퍼플레인이 내리는 세상은 너무나 아름답다고. 그런데 이건 뭐지? 세상은 변한 게 없다. 오히려 나는 두렵기만 하다. 퍼플레인이 내 머리색을 모두 빼앗아 갈까 봐. 내 머리색이 다시 까매질까 봐. 그 여자처럼 까매질까 봐.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퍼플레인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또다시 어떤 색으로 나를 물들일 수 있을까. 하나하나 지나간 색들을 떠올린다. 파랑. 빨강, 초록……. 갑자기 눈앞이 환해진다. 왜 진작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내일 당장 헤어 정에게 가야겠다. 빨주노초파남보. 가닥가닥 서로 다른 빛깔로 염색을 해 달래야지. 내 머리를 레인보우로 만들어야지. 나는 빗속에 우뚝 서서 두 팔을 넓게 벌려 날개를 만든다. I only wanted to see you laughing in the purple rain.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퍼플레인은 밤을 새워 내리겠지만 이젠 상관없다. 레인보우가 될 머리를 상상하며 내 가슴은 벌써부터 뜨겁게 뛰고 있을 뿐이다.《문장 웹진/2008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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