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롯의 해독제, 한유주 소설가 - 고봉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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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준의 젊은작가 인터뷰_06]

 

 

플롯의 해독제, 한유주 소설가

 

고봉준

 

 

 

 

 

  3월 어느 날, 아주 잠깐 봄볕이 비치던 주말 오후에 홍대 부근의 〈창비 카페〉에서 소설가 한유주를 만났다. 한유주의 소설에 대한 일반적 평가는 극명하게 호오(好惡)로 나뉜다. 최근 한국 문학에서 이렇게 상반되는 평가를 받고 있는 작가가 또 있을까. 그것은 아마도 그녀의 소설이 ‘중간’이라는 습관적 미덕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인터뷰 전날, 나는 프리모 레비의 『주기율표』를 읽다가 ‘파시즘의 해독제’라는 표현을 발견했다. ‘철(Fe)’이라는 작은 제목을 달고 있는 부분은 주인공 ‘나’와 친구인 산드로의 우정에 관한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파시즘의 광풍이 유럽을 서서히 잠식하고 있던 때, 유대인인 ‘나’와 산드로는 우정을 쌓아 나가면서도 파시즘의 해독제를 발견하기를 열망하면서 청춘의 한 때를 보냈다는 것이 이야기의 대략적인 요지다. ‘해독제’, 그렇다면 작가는 파시즘을 일종의 ‘독’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불현듯 한유주의 소설 또한 일종의 해독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 문학(작가, 독자, 평론가를 모두 포함)을 중독시키고 있는 ‘독’의 정체는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소설을 플롯과 동일시하는 관습, 나아가 소설이 소설 바깥의 현실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재현에 대한 강박과, 문학을 감정적인 동일시의 장르라고 규정하는 일체의 근대적 태도 모두라고 생각했다. 지나친 생각일까?  

  한유주는 긴 손가락이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그녀는 피아니스트나 기타리스트의 날렵하면서도 깡마른 손가락을 연상시키는 손가락의 소유자였다. 저 손가락 사이 어딘가에서 단단한 문장들이 스멀거리면서 기어나오는 상상을 잠시 했다. 인터뷰는 의외로 ‘출판사’ 이야기로 시작되었다. 인터뷰 며칠 전 우연히 한유주 작가가 출판사를 등록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녀에게 출판사에 대해서 물었더니, 한국의 출판사들이 손을 대지 않는 짧은 외국단편들을 번역해서 소책자로 만드는 것, 문학전문 출판사들에서 출판하기에는 조금 애매한 성격의 글들을 300부 남짓의 한정판으로 만들어 인터넷을 통해 판매하는 것이 출판사를 등록한 목적이란다. 조금 있으면 첫 책이 출간된다고 하니 은근 기대도 되고, 대량생산 대량소비가 기본원칙인 시대에 한정판으로 발매된다고 하니 수집가들에게는 꽤 흥미로운 ‘물건’이 될 듯하다.

 

  이야기가 근황에 관한 것으로 넘어갔다. 특정한 직장에 묶여 있지는 않지만 꽤 분주하게 지낸다는 것이 답변의 대략적인 내용이었다. 강의-번역-창작이 그녀의 일상을 구성하고 있는 세목이다. 작가들이 대학이나 예고에서 ‘강의’를 하는 것은 낯선 일은 아니지만, ‘번역’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번역’과 ‘창작’을 겸하고 있는 작가는 매우 드물고, 특히 ‘번역’이 단순히 밥벌이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작가의 문학세계와 연결되는 경우는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대학에서 독문학을 전공했고, 대학원에서는 미학을 전공했다. 그렇다고 그녀가 독일권 저작들을 번역하는 것도 아니다. 한유주는 2011년 두 권의 번역서를 출간했다. 제임스 스콧 벨이라는 작가가 글쓰기 비법을 정리한 『작가가 작가에게』(정은문고, 2011)와 찰리 잉글리시의 눈 여행기인 『눈 여행자』(텍스트, 2011)가 그것들이다. 그리고 인터뷰 당일 최근에 출간된 세 번째 번역서 『교도소 도서관』(이음, 2012)을 내게 선물했다. 이 정도 속도라면 ‘번역’이 단순한 흥미만은 아닌 셈이다. 이 번역에 대한 관심이 결국 출판사를 등록하도록 만든 계기가 아니었을까.  

 

  고봉준 : 소설을 쓰게 된 계기는 어떤 것인가요?

  한유주 : 참 별거 아닌 계기였어요.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하긴 했는데, 내가 글을 쓰게 될 거라고 상상을 못 했죠. 감히. 초등학교 때부터 작문을 시키잖아요? 항상 그게 너무 어려웠고 힘들었는데, 물론 상을 받기도 하긴 했지만, 이게 내가 쓴 글이라는 생각을 못해 봤던 거 같아요. 고등학교 때는 노느라고, 책은 많이 봤는데, 글을 쓰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힘들다는 생각을 좀 했던 거 같고. 그러다가 대학을 왔는데, 대학을 지원할 때는 러시아문학과 이런 데 원서를 냈어요. 서너 군데 썼는데, ‘들어가서 뭘 하겠나 그냥 책이나 읽어야지’ 하는 생각으로 책을 많이 읽을 수 있는 학과에 원서를 넣었고, 그러다가 독문과에 입학을 했는데 들어가니까 예상대로 책은 되게 많이 읽더라고요. 그냥저냥 대학생활 보내다가 그때 국문과 수업 중에 ‘문예창작론’이라는 게 있었어요. 그걸 들었는데요. 그전까지는 소설의 기본적인 매수나 단편이 요구하는 분량 같은 것도 모르고, ‘문단’이란 얘기도 단어는 알고 있었지만 뭔지 모르고, 문예지도 그냥 본 적은 있지만 ‘이런 게 있구나’ 하는 정도만 알았던 거 같고요. 문창과 학생들에 비해서 소설가가 되어야겠다는 목표나 자의식이 뚜렷하진 않았어요. ‘내가 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강했고, 그러다가 그 수업의 기말 과제가 소설 한 편 쓰는 거였는데, 그래서 부랴부랴 써서 낸 게 「달로」라는 작품이었어요. 그걸 문학에 관심이 많은 친구에게 보여주니까 문예지에 응모를 해 보라고 해서 《문학과사회》에 보냈어요. 그 전에 대산대학문학상에 보냈는데 바로 떨어졌었죠, 김애란 씨가 됐고요.

 

  고봉준 : 대산대학문학상에 응모한 작품도 「달로」였나요?

  한유주 : 네, 같은 작품이었어요. 그런데 친구가 그 얘길 듣더니 ‘생각해 봤더니 너는 그쪽은 아닌 거 같다, 문지에 보내 봐라’라고 이야기를 해서 《문학과사회》에 응모를 했고, 거기서 데뷔를 하게 됐어요. 이런 이야기를 하면, 특히 등단을 위해서 치열하게 준비하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합평도 하고, 문예지도 나오는 거 다 읽고, 정보도 서로 교류하고…… 그런 친구들에 비하면 ‘그런 과정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소설가의 자의식이 없는 게 아니냐?’, ‘치열하지 않았던 게 아니냐?’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근데, 제가 이것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에도 좀 느려요. 뭘 잘 모르고 시작하고 덤비는 게 있거든요. 근데 모르겠어요. 어려서부터 책을 꾸준히 읽으면서 뭔가 알게 모르게 독자 이상의, 그걸 넘어서는 마음의 상태가 있었던 거 같아요.  

  고봉준 : 어쩌면 문창과 수업이나 국문과 수업, 또는 합평 같은 정해진 과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한유주 작가의 소설(사람들이 흔히 스타일이라고 부르는 것)에 매료되는 것일 수도 있어요. 선생님의 작품은 한국 문학에 익숙한, 전통적인 스타일은 아니잖아요? 일종의 ‘변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았으니까 변종이 가능했을 거예요. 변종으로서의 원본성(originality)을 인정받았으니까 독자들이 좋아하고, 비평가들도 높게 평가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선생님이 쓴 세 권의 책을 읽으면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방식이 기존의 문학적 관습과는 많이 다르다고 느꼈어요. 우리는 누군가의 삶을 이야기로 만들고, 현실의 장면들을 담고, 그걸 인과성으로 연결하는 식의 소설에 익숙하잖아요? 그런 것들이 없으면 소설이 아니라고 생각하죠. 그런데 이 책들에서는 글쓰기, 소설,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일까? 언어란 무엇일까? 같은 근본적인 질문들의 주위를 맴돌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그래서 이 작가는, 앞으로는 모르겠지만, 이런 질문을 던지고 그것에 대답하는 방식으로 문학적 모험을 감행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점에서 ‘소설’이라는 장르에 대한 이해가 남다른 것 같고요. 선생님이 생각하는 ‘소설’이란 어떤 건가요?

  한유주 : 저는 소설은, 그냥 단순하게 말해, 형식인 거 같아요. 뭐 시나 희곡이나 다른 여타의 문학 장르와는 다른 변별력을 갖는 무언가가 있는 그런 형식이란 생각은 들어요. 그리고 모르겠어요. 제가 보기에는 세 권의 책을 관통하는 게 있거든요? 꾸준한 관심사가 있었던 거 같아요. 처음 등단했을 때는 나이가 되게 어렸어요. 뭐 알면 얼마나 알았겠어요? 지금도 그런데. 어쨌거나 어떻게 소설가가 됐는데, 내 상태가 너무 이상한 거예요. 다들 나한테, 이름이 많이 알려진 건 아니지만, 소설가라고 이야기해 주고, 작품을 쓰라고 이야기해 주는데, 나는 갑자기 독자에서 작가로 약간 입장이 바뀌게 된 거거든요. 그 상태를 제가 되게 힘들어했던 거 같아요. 뭔가를 계속 평생 써나가야 하는 일이 된 건데, 나한테는 그래서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나 스스로 정당성을 찾으려고 하다 보니까 그게 자연스럽게 그 전에 생각했던 관심사들과 맞물리면서, 이를테면 언어의 문제, 표현의 문제, 내가 소설가가 됐는데 과연 소설은 뭐 길래 내가 이렇게 쓰게 됐나, 이런 식의 질문들을 꾸준히 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모르겠어요. 제 소설에는 뭔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구체적인 현실 같은 게 결여되어 있거나 구체적인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지금까지는 적어도 제가 다른 것들에 대해 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 그걸 제 걸로 쓰는 것을 어려워했던 거 같아요. 되게 미안했던 거 같아요. 제가 모르는 다른 삶에 대해서 제가 함부로 들어가서 그걸 쓴다는 거 자체가 약간 저한테는 아직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앞으로 계속 뭘 쓸 수 있다면, 바뀌기는 하겠지만, 지금까지는 그렇게 썼던 것 같아요.  


 
고봉준 : 소설 쓰기를 바느질에 비유하기도 해요. 소설을 쓴다는 건 여러 이야기와 장치들을 짜깁기하는 과정이지만, 결국엔 짜깁기의 흔적을 없앰으로써 자연스럽게 읽히는 것이 소설이라는 이야기겠죠. 그래서 소설을 하나의 총체성 같은 이미지로 설명하기도 하구요. 그렇지만 선생님의 소설은 읽으면 읽을수록 자꾸 그런 흔적을 노출시키려는 듯해요. 소설의 ‘낯설게 하기’라고 할까? 혹시 의도적으로 그런 흔적을 드러내는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그런 의도와 관계없는 자유로운 실험의 결과인지, 그게 궁금해요.

  한유주 : 저는 사실 이게 감정적인 게 많이 들어가 있다고 많이 생각을 해요. 주변의 친구들이나 저를 잘 아는 사람들이 제 책들을 읽으면 계속 왜 이렇게 숨기려고 하느냐고 이야기를 해요. 보통 글을 쓸 때 글하고 자기 자신을 분리하는 게 힘들잖아요? 근데 이건 내용적인 측면과 좀 다르겠지만, 문장 하나하나가, 내가 뭔가를 정말, 내가 생각하는 것이나 감정이나 이런 물질이 아닌 덩어리 같은 것을 숨기면서 드러내고 싶은, 그런 생각을 했던 거 같아요.

 

  고봉준 : 사람들은 흔히 소설가나, 소설의 화자나, 주인공이 말을 많이 하는 달변가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여러 사람이 지적했듯이, 선생님의 소설은, 오히려 그런 ‘오염’되고 ‘타락’한 언어보다는 ‘침묵’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고, 심지어 ‘언어’보다는 ‘음악’에 접근하려고 하는 것 같아요. 그때의 ‘음악’을 정서나 느낌이라고 이해하면 될까요?

  한유주 : 아니요. 사실은 그렇게 이야기하는 게 첫 번째 책(『달로』)을 두고 그렇게 말씀들을 많이 하세요. 그런데 사실 이게 저한테는 되게 오래된 책이라서 그렇게만 이야기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러니까 침묵이라는 것은 너무 거창한 단어이기도 하고, 뭘 잘 몰라서 그렇게 쓴 것도 있어요. 사실은 말로 표현되지 않고 남는 어떤 소회들이 있잖아요. 그런 걸 어떻게 하면 표현할 수 있을지, 그건 사실 모든 작가들의 공통된 관심사일 수 있을 텐데, 그렇다고 내가 침묵할 수는 없잖아요. 작가로서도 침묵할 수는 없고, 뭔가 일상생활에서도 침묵할 수는 없을 거고, 타인과 관계 맺으면서 살아가려면요. 그런 상황을 썼던 게 이 책(『달로』)이었어요. 침묵할 수는 없지만 침묵에 가까운 뭔가를 통해서 그걸 보여 줘야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던 거죠. 그 다음에는 음악이……. 음악이라는 건 일단 언어가 없잖아요. 음악 안에는 문자언어가 없잖아요. 그런데 뭔가를 또 표현한단 말이에요, 그게? 표현방식의 매체가 다른 건데. 글로서는 음악을 할 수가 없어요. 제 생각에는. 음악적일 수는 있어요. 리듬 같은 것을 통해서. 그런데 음악이 될 수는 없고. 하지만 뭔가 음악적인 어떤 느낌을 통해서, 그러니까 이 안에서 직접적으로 음악이 등장한다기보다는, 그런 경우도 있지만, 라인을 맞춘다거나 이런 식으로 뭔가 문장의 리듬을 만들려고 했던 게 이 책(『얼음의 책』)이기도 하거든요. 뭔가 말로는 할 수 없는, 문장으로는 할 수 없는 것? 그게 정서라면 정서고, 감정이라면 감정인데, 그냥 의미를 딱 짚어내는 것 말고 읽으면서 생긴 리듬을 느끼게 하고 싶은 것도 있었어요.

 

  고봉준 : 세 권의 책을 읽으면서 떠올랐던 순수한 제 느낌만을 이야기하자면, 강조점이 찍힌 작품들이 각 책의 맨 앞에 배치되어 있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여쭤 보는 것이지만, 세 번째 책(『나의 왼손은 왕, 오른손은 왕의 필경사』)의 처음에 등장하는 이야기(「나는 필경……」)는 사실 모 잡지에 발표되었던 산문이잖아요? 그런데 산문이 소설집에 들어가면서 ‘소설’이 됐어요. 그래서 전 아, 뭔가 좀 바꿨겠다, 기대했는데, 똑같아요.(이 대목에서 두 사람 모두 웃었다) 그러니까 이런 질문이 생각나더라구요. 한유주라는 소설가에서 ‘산문’과 ‘소설’의 차이점은 도대체 뭘까? 어떻게 이해하면 될까요?

  한유주 : 그 글은 잡지 특집을 준비하면서 에세이를 쓴 거였어요. 사실 저 자신에 대해서 할 말이 별로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걸 쓸 때는 오히려 산문으로 쓴다는 생각은 안 했던 거 같아요. 그냥 짧은 소설? 이런 식의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산문하고 소설은 저한텐 확실히 달라요. 저한텐 확실히 다른 것이고, 이걸 쓸 때는 적어도 소설을 쓴다고 생각을 하고 쓴 거고, 그 다음에 제 소설이 에세이 같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데, 가장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이것은 소설이다’라고 이야기를 하면 그냥 소설이 된다고 생각은 해요, 일단은. 소설은, 제가 생각하기에, 한 인물이 어떤 사건을 계속 맞닥뜨리면서 시간을 감내하면서 가는 거거든요? 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 고군분투하면서. 그런데 저는 인물의 차원이 아니라 문장의 차원 같은 것을 생각을 하고 있어요. 어쨌든 산문하고 소설이 다른 것은 산문은 사실 현실의 시간을 그대로 따오는 건데, 제 생각에는, 소설에서는 소설의 시간이 있어요. 그게 따로 작동을 하는 거 같아요. 그게 제일 큰 거 같아요.

 

  고봉준 「허구 0」은 한편으로는 ‘동시성’ 같은 것을 실험해 보려고 하는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고, 또 한편으로는 “시간을 따라가지 않겠다”, “시간의 유속과 싸우지 않겠다”처럼 시간의 흐름에 대해 거부하려는 이야기도 나왔던 거 같은데요. 소설은 대개 ‘시간의 장르’라고 이야기하잖아요. 그런데 선생님의 소설은 여러 편을 읽어도 그런 시간의 느낌보다는 오래된 것에 대한 것, 잘 안 바뀌는 것, 버린 것에 강조점을 두고 있어요. 소설을 쓰실 때 그런 시간을 염두에 두면서 쓰시는 거죠?

  한유주 : 네. 그게 사실은…… 제가 뭔가 계속 그냥…… 이 세계가 너무 빠르게 바뀌니까, 태어나면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거 같으니깐. 그것에 대한 생각이 저도 있었겠죠.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허구 0」 같은 것은 재밌게 썼던 거 같아요. 뉴욕에 있을 때, 번역원에서 지원하는 레지던스 프로그램으로 갔는데, 정말 할 일이 없는 거예요, 아무도 아는 사람도 없고, 두 달 동안 있어야 하는데, 그래서 이왕 온 거 일기를 쓰자, 그래서 일기를 쓰다 보니까 제가 ‘일기’를 쓰는 게 아니고 ‘시간’을 쓰고 있는 거예요. 일기는 보통 저녁에 그날 하루에 있었던 일을 쓰잖아요. 저는 그것에는 관심이 없고 계속 지금 동시다발적으로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쓰고, 집 안에만 있으면 거의 사건이나 사물들이 변하지 않으니깐 밖에 나가서 지하철에서도 쓰고 그랬던 거 같아요. 그래서 쓰다 보니까 뭔가 재밌는 하나가 될 수 있겠다 싶어서 앞뒤를 자르고 거의 손 댄 거 없이 그것을 150매로 만들었던 거 같은데, 그게 그렇게 쓰다 보니까 뭐…… 계속 여러 가지 차이들이 있잖아요. 내가 글을 쓰는 동안에도 시간은 고정되지 않고 흘러가기 때문에 진짜 이 시간에 대해서 기록할 수 없고. 여기 나온 일들은 100% 사실일 거예요. 있었던 일들. 그런데 그게 내가 생각하기엔 사실이지만 이미 지나간 것이고, 내가 이걸 소설로 쓰고 있기 때문에 허구화가 일어난 거고, 그러면 진짜 있었던 일은 어떻게 판가름할 것인가, 이건 심지어 내가 읽어도 뭐가 어떻게 일어난 건지 잘 모르겠고, 또 되게 사소한 거잖아요. 소설적인 사건이 없거든요? 그러니까 이렇게 사소한 것을 쓰는 게 의미가 있을까? 이런 생각도 했던 거 같고, 재밌었어요. 이걸 긴 장편으로 써보고 싶었는데, 아무도 안 찾을 거 같고……. (웃음)  


 
고봉준
거기에 “사람들은 이것을 허구로 읽을 것이다”라는 얘기가 등장하잖아요. 그랬을 때, 제가 앞에서도 「나는 필경……」을 이야기했지만, 소설은 보통 ‘허구’라고 이야기하는데, 이렇게 되면 ‘픽션’과 ‘픽션 아닌 것’의 경계가 모호해지잖아요? 그런데 그 ‘애매모호성’이라고 하는 게 결점은 아닐 테지만, 사람들은 소설을 읽으면서 ‘아, 이건 픽션이겠구나’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는데, 이건 일종의 관습이죠. 그런데 계속 그걸 왔다 갔다 하면서 허물고 있어요?

  한유주 : 저는 사실, 남들 이야기를 잘 안 믿어요. (웃음) 그러니까 ‘이것은 이것이다’라고 이야기하면 정말 그런가, 하고 생각하는 버릇이 있는 것 같아요. ‘회의주의적 입장’이라고 그러는 거 있잖아요? 그걸 어디에서 주워듣고 되게 좋아하는데. 항상 보면 ‘이것은 이것이다’라고 이야기할 때 그 이면에는 이것과 이것의 등가가 성립되지 않을 수밖에 없는 뭔가가 더 있는 거 같아요. 다를 수밖에 없는 게. 소설도 남들이 소설이라 부르는 것이 있죠. 학생들하고 세계문학 강독이란 수업을 하면서 느끼는 건데, 학생들은 베케트도 힘들어해요. 본인들이 원하는 어떤 소설의 형식을 조금만 넘어가면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죠. 그때마다 왜 이렇게 강할까, 이야기를 원하는 이런 것이. 왜 이렇게 강할까 이런 생각이 들어요. 저는 이야기를 읽는 걸 되게 좋아하거든요? 남들이 쓴 좋은 이야기를 읽는 걸 굉장히 좋아하는데, 일단은 나는 그런 이야기를 매끈하게 쓰는 재능이 전혀 없는 것 같고, 나의 관심사는, 뭔가 이야기가 이야기로 받아들여지는 과정이고, 그런 이야기의 틀 혹은 소설을 결정하는 요소들(서사구조라든가) 그런 걸 내가 흔들 수 있으면, 내가 할 수 있는 한에서 그런 걸 조금 변경할 수 있으면 해보자, 그런 생각이 컸던 거 같아요. 소설이 많이 넓어진 거죠. 그런 식으로 ‘소설’이라는 형식을 흔드는 과정 자체가 소설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고…….

 

  고봉준소설이 넓어지는 것, 예를 들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유럽 문학계, 특히 독일권이나 오스트리아 쪽의 문학들을 살펴보면, 실제로 ‘소설’이라는 장르의 전통적 형식과 관념을 폭파시켜 버리는 작품들이 꽤 있죠? 로베르트 무질이나 헤르만 블로흐 같은 사람들의 작품은 아무리 읽어도 ‘소설’이 아닌 거 같은 생각이 드니까요. 그럴 때 소설의 경계가 넓어진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소설’이라는 규정 자체가 무의미해지거나 불가능해지는, 그냥 ‘소설집’에 포함되면 소설이 되는 그런 상황이 생기는 거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한유주 : 사실은 그게 나쁘지 않다고 봐요. 왜냐하면 사실, 예술도 마찬가지잖아요? 마르셀 뒤샹 나오고 앤디 워홀이 나온 다음에는 무엇이 정말 예술품과 사물을, 그냥 일반 사물을 구분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게 문제가 되었는데, 근데 어떤 사람들은 예술계 안에서, 예술계 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걸 예술이라고 인정하면, 적어도 한 명이라도 인정을 하면 예술이다, 이런 식의 논의가 많이 있잖아요. 소설도 크게 보면 그런 거 같아요.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소설’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어떤 한 가지만 요구하는 경우가 많아요. 소설에 대해서, 예를 들면 탁월한 이야기꾼의 소설, 이런 것들이요. 마담 보바리 같은 것만이 소설이라고 이야기하는 그런 게 있기 때문에. 그것보다는 오히려 소설의 경계가 넓어져서 많은 것을 하는 게 낮지 않나요? 이런 것도 있고, 저런 것도 있는 게 좀 괜찮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좀 개인적으로는 하고 있어요. 근데 뭔가 지금 말씀하신 대로 걱정이 되는 부분이 없는 건 아니죠. 예를 들면, (아무것이나 가리켜서) 이것도 소설일 수 있잖아요. 뭐 이런 식의 주장이 나올 수도 있을 테니까요.

 

  고봉준 : 그래서 예를 들면, 그런 문제에 대한 안전장치나 경계 같은 게 전혀 없었던 것 같지는 않은데, 좀 다른 이야기지만, 뒤샹에게는 결정적으로 사인이 있었잖아요? 그냥 변기가 아니라 뒤샹이라는 작가의 서명이 기입되어 있는 변기가 진짜인 거잖아요? 또 다른 이야기지만, 아서 단토 같은 사람은 그것이 왜 예술인가를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 있을 때 모든 것은 예술이 된다고 주장하기도 하지요. 이런 경우들은 경계가 전혀 없다고 말하기는 어렵겠죠. 그래서 만일 경계가 없다고 말해버리면 그걸 ‘소설’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문제가 생길 것 같네요. 프로필을 보고 독문학을 전공하셨다는 걸 알았는데, 그래서인지 독일권의 영향력이 꽤 느껴졌어요. 미디어에 대한 관심도 그렇고. 문학 자체에 대한, 소설 자체에 대한 고민의 방식들도 한국적이거나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잘 짜여진 플롯을 중시하는 전통과는 달라요. 실제로 소설을 쓰실 때 독문학의 영향을 받으셨나요?

  한유주 : 그렇겠죠? (웃음) 어렸을 때부터 읽은 게 한국 소설보다는 외국 소설을 많이 봤어요. 독문학을 전공했지만 사실 독일어는 불어를 배우면서 다 까먹었어요. (웃음) 옛날에는 책도 읽고 했는데, 요즘은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고요. 그러니까 뭔가 답답했어요. 한국 문학이 요구하는 게. 이게 사대주의는 아닐 텐데, 프랑스나 독일 문학에서 좀 더 예외를 인정하는 게 많이 있었잖아요? 거기다 이론도 만들어주고. (웃음) 그래서 영향을 안 받지는 않았을 테고. 뭔가 내가 안 읽어 본 책을, 내가 쓴 다음에 읽게 됐을 때 비슷한 유사성을 발견했을 때, 후에 발견하게 됐을 때 안도감이 들었던 적도 있었어요.

 

  고봉준 : 만일 누군가가 제게 한유주 소설의 미덕이 뭐냐고 물으면 저는 잘 안 읽히는 게 최고의 미덕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쉽게 소비되지 않는다는 의미죠. 저는 밀란 쿤데라를 좋아해요. 쿤데라의 산문, 쿤테라가 소설을 설명하는 방식을 좋아하고, 그래서 헤르만 블로흐나 곰브로비치 같은 사람의 책도 다 읽었죠. 그러면서 소설이 시간 때우는 용도로 소비되고 있는 현실이 처참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람들이 이야기(소설)를 좋아하는 것은 흥밋거리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고, 그러다 보니 소설을 사유가 아니라 소비의 대상으로, 한 번 읽고 버리는 것으로 치부하는 태도가 익숙해진 것 같아요. 그런데 선생님의 소설은 그게 불가능하단 말이에요. 그래서 가끔은 선생님의 소설이 일종의 플롯에 대한 해독제 같다는 생각도 해요. 다시 돌아가서 질문을 드리자면, 초기작들에는 ‘야만’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또 ‘미디어’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와요. 첫 책(『달로』)의 〈작가의 말〉에는 카메라 이야기도 나오더군요. 지금도 여전히 미디어가 불편한가요?

  한유주 : 제가 이걸 썼을 때는 뭘 몰라서 그렇게 썼던 것도 있어요. (웃음) 지금은 저렇게 함부로 못 쓸 거 같아요. 그렇지만 그때는 어쨌거나, 제가 함부로 말을 할 수 없는 이유가 뭐냐면, 제가 태어났을 때부터 컬러 TV가 있었고, 초등학교 때 처음 PC 통신을 접했고, 고등학교 때 인터넷에 처음 들어갔던 거 같은데, 되게 빨랐거든요. 그러니깐 그냥 처음부터 있었고 지금도 있는 상태 안에 있는 거니깐 제가 떨어져서 볼 수 없는 면이 좀 있어요. 지금은 그게 불편하다기보다는, 미디어 자체가 불편하다기보다는, 그게 사람들을 호도하거나 소진시키거나 이게 좀 불편하죠.

 

  고봉준 : 등단작인 「달로」도 이 이야기는 전해 들은 이야기라는 식으로 시작되는데, 「나는 필경……」에서도 필경사는 뭔가를 베껴 쓰는 존재잖아요? 계속해서 자신을, 소설가를 창조자가 아니라 수동적으로 전해 듣고, 베껴 쓰는 존재로 설정하고 있어요. 왜 그런 건가요?

  한유주 : 제가 생각하기에는, 뭘 진짜로 문학에서 창조하는 것은 불가능한 거 같은데요? (웃음) 그러니까 우리가 말을 배울 때도 엄마 말 따라하면서 배우고, 아빠 말 따라하고, 그 다음에 유치원에라도 가면 풀이 넓어져서 또래 애들 말을 배우고…… 내가 언어를 개발하는 게 아니잖아요? 특히 말은. 수학 같은 것은 천재가 있을 수 있잖아요? 그냥 수식 몇 개만 던져 주면 모든 걸 다 풀어버리는 애들이 세 살 때 네 살 때도 있잖아요? 문학은 그게 불가능하죠. 세 살이나 네 살짜리가 플라톤을 읽을 수는 없거든요? 그러니깐 내가 이만큼 읽고 이만큼 듣지 않으면 할 수가 없는 게 문학이란 생각이 들었는데, 그러다 보니깐 내가 진짜로 모든 걸 쓰는 게 아니라, 내가 지금까지 겪어 왔거나 들어 왔던 이야기나 경험들의 총체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진짜로 창조하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했던 것 같아요. 상당히 넓은 얘기예요. 진짜로 표절한다거나 그대로 남의 이야기를 전달한다거나 그런 뜻이 아니라요.  


 
고봉준 :
선생님의 소설 중에 굉장히 많은 평론가들이 인용한 구절이 하나 있어요. “우리의 세대는 수사학이 선인 세대다.” 경험은 초라했고 가진 게 없다는 식의 이야기인데요. 이 구절이 2000년대 문학의 특징을 설명하면서 세대론과 겹쳐져서 인용되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한국 소설의 지형이 바뀌고 있는데, 새롭게 등장한 여러 작가들의 공통적인 특징을 규정하려고 할 때 쓰기 좋은 구절이었죠. 그런데 이 이야기가 인용되고 난 뒤에 꽤 구설수에 올랐을 것 같은데요?

  한유주 : 네. (웃음) 세대론적으로 묻는 질문들이 많았죠. 요즘 세대는 어떻게 생각하시냐고……. 근데 지금 세대가 더 어렵다거나 이런 건 아닐 텐데, 그냥 넓게 보면 매달릴 만한 큰 이데올로기가 없잖아요? 이데올로기가 우리를 설명해 주지 않잖아요? 〈싱글맨〉이라는 영화가 있어요. 영화 자체는 되게 별론데, 주인공이 70년대 영국의 문학교수로 나와요. 그런데 영화에서 뉴스만 틀면 계속 소련이 무슨 핵실험한다, 우주선 발사한다 같은 소식들이 등장해요. 그런데 그런 게 이 사람들의 근본적인 불안을 오히려 해소해주는 거예요. 계속 그런 불안을 조장해서 이것만 견디면 다른 건 괜찮다는 식으로 만들어주는 거죠. 근데 그냥 넓게 보면 우리 세대는 그런 게 없는 거 같아요. 그런데 다른 종류의 불안이 있고, 그 불안을 만들어 주는 요소들이 큰데, 아예 너무나 파편화되고 작은 것들로 계속, 이 불안, 저 불안 해가면서 수십만 개의 무슨 불안들을 던져 주는 거 같거든요. 그런데 그걸 설명할 수 없어요, 아무도. 그런 생각을 이때도 하고 있었던 거 같아요, 어느 정도 뭔가 큰일을 겪어 본 게 없어요. 크게 나누면 전쟁 세대랑, 박정희 세대랑…… 이런 식으로 나눌 수 있을 텐데, 지금은 너무나 먹고살기 좋고, 5000년 한국 역사상 지금이 제일 잘살잖아요?

  고봉준 : 그게 한국 작가들의 딜레마 아닌가요? (웃음)

  한유주 : 그렇죠.

 

  고봉준 : 두 번째 소설집(『얼음의 책』)은 세 개의 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나’, ‘너’, ‘당신’ 이렇게 되어 있어요. 원래 쓸 때는 그렇지 않았을 텐데, 뭔가 강조하고 싶었던 게 있었나요?

  한유주 : 그냥 그 책 쓰기 전에, 여기 안에 있던 단편들 중 뭐 하나 쓰던 시점에 모르는 분한테서 편지를 받았는데 책을 잘 읽었다는 내용의. 평론하는 분도 아니었고, 글 쓰는 분도 아니고, 미술 하는 분이었던 것 같은데, 되게 잘 읽었다고 쓰셨더라구요. 근데 그게 저는 너무 고마운 거예요. 왜냐하면 제 주변에 친한 지인들한테 책을 줘도 ‘야, 못 읽겠더라!’ 이런 얘기를 듣는데……. (웃음) 글 쓰는 사람도 그냥 못 읽겠다고 얘기를 많이 하는데, 오히려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을 하시는 분들이 쉽게 읽으시더라고요. 특히 미술 하시는 분들이 되게 쉽게 읽어요. 그런 편지를 받으니까 아, 나한테는 독자가 한 명 있는데, 그 한 명이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있구나, 내가 알 수 없는 복수로 있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그 다음에 첫 책을 내고 난 후에는 제가 아는 것만 해도 굉장한 공격을 받았거든요? (웃음) 모르는 건 더 많을 테고. 이게 대체 뭔지 모르겠다, 이런 식의 반응들이 많았던 것 같은데, 그래서 뭔가 그렇게 묶은 것이, ‘나’는 나를 설명하는 거고, ‘너’는 내가 생각하는 아주 추상적인 독자를 생각했던 거 같아요. 그게 그렇게 뭔가 명확히 구분되는 건 아니지만.

  고봉준 : 그러면 세 번째는 당연히 ‘우리’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당신’이란 말이에요.

  한유주 : 높여 준 거예요.(웃음)

  고봉준 : 아, 그러니까 이 ‘당신’이 ‘우리’의 높임이라는 거죠?

  한유주 : 네.

 


  한유주 작가가 키우고 있는 다람쥐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근황에 대해 물었는데, “다람쥐가 제 인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져서요”라고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리고 사진에 관한 책 한 권을 번역 중에 있다고 한다. 번역은 밥벌이의 일종이지만 번역을 하면서 자신이 우리말을 못 한다는 걸 깨닫는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번역이 남의 글을 옮기는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창조라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그랬더니 “둘 다 있는 거 같아요.”라는 간명한 대답이 돌아왔다. 거의 실시간으로. 조만간 그녀가 또 한 권의 번역서를 출간할 듯하다. 자연스럽게 준비한 인터뷰가 모두 끝났다. 문학성을 판매량으로 평가하는 태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잘 읽히는 게 문학의 미덕인 시대, 결코 쉬운 소비를 용납하지 않는 문장의 소유자와 인터뷰를 끝내면서 역시 문학의 가치는 ‘판매’로 정당화될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문장웹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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