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어 없는 정글에서 살아남기, 안보윤 소설가

 

[고봉준의 젊은작가 인터뷰_05]

 

 

악어 없는 정글에서 살아남기, 안보윤 소설가

 

고봉준

 

 

 

 

 

  지독하게 추웠던 겨울도 막바지다. 곧 경칩과 춘분이 지나고, 한두 차례 꽃샘추위가 왔다 가면 완연한 봄이 시작될 것이다. 주말 아침 늦은 아침을 먹고 겨우내 쌓였던 먼지를 털었다. 지난겨울 신체의 일부가 되어 삭풍을 막아 주었던 두터운 옷들을 차곡차곡 쌓아서 세탁소에 맡기기로 한다. 일은 일을 부르는 법. 옷장을 정리하고 나니 무질서하게 쌓아 둔 책들과, 먼지와 커피 얼룩이 잔뜩 들러붙어 있는 책상에 눈이 간다. 방청소를 끝내고 옷을 맡기러 세탁소 가는 길, ‘봄’이 제일 먼저 찾아오는 곳은 주말의 근린공원이다. 지난 주말만 해도 제법 음산한 기운이 감돌던 아파트 군락 사이의 공원에 가족 단위로 산책을 나온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다. 생각해 보니 이 인터뷰를 진행한 것도 벌써 두 달 전, 그러니까 겨울에 맺은 ‘인연’이 봄에 정리되는 셈이다.


  안보윤은 1981년 인천에서 태어나 명지대 사학과와 동 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으며, 제10회 문학동네작가상에 『악어떼가 나왔다』라는 수상한(?) 제목의 소설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물론, 내가 처음 읽은 안보윤의 소설 역시 『악어떼가 나왔다』였다. 당시 안보윤의 이 소설은 꽤 주목을 받았다. 사회의 병리적 현상을 집약한 캐릭터들을 등장시켜 병적 상태에 빠져 있는 우리 사회의 폐부를 압축적으로 드러냈고, 특히 ‘잔혹’과 ‘코믹’이라는, 결코 융합될 수 없는 두 세계를 오가며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문체와 구성의 힘은 우리 시대의 젊은 소설가들이 갖춰야 할 중요한 덕목으로 회자되기도 했다. 안보윤의 등단작 『악어떼가 나왔다』에는, 만년의 작가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사상의 깊이는 없지만, 2000년대의 문학이 독자와 호흡하기 위해 갖춰야 할 필수요소들은 빠짐없이 들어 있었던 셈이다. 등단 이후, 그녀는 소설집을 출간하리라는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계속해서 장편소설을 출간했다. 2009년에는 장편소설 『오즈의 닥터』로 제1회 자음과모음문학상을 수상했고, 2011년에는 장편소설 『사소한 문제들』을 출간했다. 이 장편들을 쓰고 책을 만드는 동안에도 그녀의 창작은 멈추지 않았다. 틈틈이 단편들을 발표했고, 인터파크 웹진에도 연재를 했으며, 2010년에는 한 문예지에 경장편(「우선 멈춤-잠시 검문이 있겠습니다」)을 전재했다. 그녀의 일상을 모두 알 수는 없으나 등단 8년차 작가로서는 꽤 많은 작품, 특히 장편을 쏟아내었고, 그것은 곧 그녀가 소설쓰기에 있어서만큼은 누구보다 성실했다는 증거다.

 

  대개의 첫 만남이 그러하듯이, 우리의 인터뷰 역시 간단한 프로필과 일상을 묻는 과정으로 시작되었다. 역사학과를 졸업하고 문예창작학과 대학원에 진학한 이력에 대해서 묻자 그녀는 역사학과를 다니면서 대학 3학년 때부터 문예창작을 복수전공 했고, 졸업 후 1년을 재충전하며 쉬었다가 대학원에 진학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열에 아홉은 공감할 수 있듯이, 그녀 역시 역사학을 공부하기 위해 역사학과에 진학한 것은 아니었다. 국사 선생님이라는 다소 무난한(?) 길을 선택하여 역사학과에 진학했으나, 입학 후 역사학이 자신의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학교생활이 무료해서 자신에게 뭔가를 선물하는 기분으로 ‘소설’이라는 것을 다시 끄집어내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소설과의 첫 만남을 “그냥 나를 위로해 주려고?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나쯤 하게 풀어 주려고?” 시작했노라고 말했다. 그녀에게 ‘소설’은 전망을 잃어버린 채 방황하던 20대의 자신에게 준 선물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다시’라니. 그랬다. 그녀는 아주 어렸을 적에 작가를 꿈꾼 적이 있었으나, 무기력한 우리 시대의 청소년들이 응당 그렇듯이 작가의 꿈을 잊고 오직 대학 진학에만 관심을 두었다. 그러나 억압된 것은 반드시 귀환한다고 했던가? 대학입학 원서를 쓸 무렵 그녀는 부모님께 문학에 대한 자신의 관심을 표현했으나 – 그녀는 고등학교 때 문예부 활동도 했다 – ‘작가=가난한 삶’이라는 편견을 넘지 못하고 꿈을 접었었다.


  인터뷰는 자연스럽게 등단에 관한 이야기로 흘렀다. 그녀는 스물셋에 소설을 쓰기 시작해서 스물다섯에 등단했다. 그것도 남부럽지 않은 문예지에서 신인상을 받으면서. 이 시대의 기준으로 보자면 나름 성공한 인생에 속한다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 과정이 궁금했다. 그녀의 문창과 생활이 쉽지만은 않았던 듯하다. 문예창작을 복수전공 하기 위해서는 3, 4학년 때 문예창작학과의 전공수업을 집중적으로 들었어야 했는데, “나름대로 방학이니 수업 때니 진짜 도서관에서 살았다”고 자부한 그녀도 문예창작학과 수업시간에 고담준론처럼 주고받는 이야기와 작가, 작품에 대해서 적응하기는 어려웠다고 한다. 더구나 타 학과에서 수업을 들으러 온 처지였으니 누구한테 어떤 작품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물을 수도 없었다. 그런 그녀가 대학원 진학을 앞두고 선택한 것은 1년간 책 읽고 글 쓰는, 소위 기초체력을 기르는 것이었다.

 

  대학원을 갈까 말까 고민하고 있다가 어차피 대학원에 갈 거면 공부를 좀 하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1년 동안 책 읽고 글 쓰고, 책 읽고 글 쓰고, 그렇게 하겠다고 집에다 말씀을 드렸어요. 그때는 집에서는 거의 포기상태였었으니까 ‘니 멋대로 하라’고 그러셔서. (웃음) 그때는 딱 하루에 책을 세 권쯤 읽고, 소설 쓰고, 그걸 도서관에 가서 계속했어요. 그때 썼던 게 이거(『악어떼가 나왔다』)예요. (등단을 위해서는) 원래는 단편을 써야 됐겠지만 읽다 보니 장편을 많이 읽게 되었고, 또 그때 마침 쓰고 싶다고 생각났던 게 이렇게 연작성이어서. ‘습작인데 어때’ 하고 썼다가, 대학원 입학원서를 낼 즈음이 〈문학동네신인상〉을 낼 무렵인 거예요. 그래서 응모하고 대학원 들어갔는데, 당선됐죠.

 


  안보윤의 첫 소설 『악어떼가 나왔다』에는 정작 ‘악어’가 등장하지 않는다. 붕어빵에 붕어가 없고, 곰탕에 곰이 들어 있지 않은 것과 같은 이치일까? 오래 전에 이 책을 읽을 때도 내심 ‘악어는 언제 나온대?’라고 물으면서 읽었던 기억이 났다. 그래서 혹시 소설을 탈고하고 난 뒤에 제목을 정한 거냐고 물었더니 구성을 할 때 이미 제목을 썼고, 심지어 소제목까지 다 정해 놓고 썼단다. 그렇다면 왜 ‘악어’가 나오지도 않는 소설의 제목이 ‘악어떼가 나왔다’였을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아마 제가 구성을 처음에 짰던 게요, 점 있는 아이가 사라지는 부분하고, 한강에서 시체가 막 떠오르는 부분을 포인트로 놓고, 그 다음에 얼개를 쭉 짜나갔던 걸로 기억을 하는데…… 그러면서 저는 이 제목과 딱 맞지 않을까, 제가 막연하게 떠올리는 악어떼가 맞지 않을까 했는데, 굉장히 그것에 대해서 많이 지적하더라구요. 근데 정말 악어가 나왔어야 했을까, 싶어요.” 그렇다면 ‘악어’는 일종의 알레고리였을까? 물론, 그녀의 이 소설에 ‘악어’와 비슷한 이미지들은 다수 등장한다. 가령 악어백, 악어 문신 등이 그것들이다. 실체가 아닌 이미지가 지배하는 세상을 알레고리로 표현하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히치콕이 영화에서 자주 썼던 맥거핀(Macguffins. 그 자체로는 별 의미가 없지만 관객이 영화에 집중하고 긴장하도록 만드는 역할을 하는 플롯의 한 장치)처럼 사람들의 시선을 거기 붙잡아 둠으로써 집중력을 높이려는 플롯의 일종이었을까? 어쨌거나 이 소설에서 돋보이는 것은 잔혹하고 끔찍한 사건들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하고, 더 나아가서 세상을 냉정하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처리함으로써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비극적 단면을 그렸다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목에 대한 궁금증은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이 소설이 왜 아이의 실종 사건으로 시작되었어야 했는지, 혹시 신문이나 텔레비전에서 소재를 가져온 것은 아닌지에 대해서 물었다.

 

  그게, 제 불안증 같은 거였을 수도 있을 거 같아요. 제가 막내여서 계속 어른들끼리만 살다가 그즈음에 조카가 네댓 살이 되었어요. 제가 좀 불안이 많은 성격인데, 그때 아기 엄마가 아기를 우리 집에 놓고 직장을 다녔거든요. 그런데 저는 그 애가 너무 불안했어요. 볼 때마다. 유치원 간다고 나갔다가 없어질 것 같고, 뉴스에서 아이가 실종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오면 그게 너무 무섭고, 신문에서 아이가 어떻게 되었다더라 그러면 하루 종일 그 아이한테서 시선을 못 떼는, 그러니까 아이를 잃은 게 세상의 전부를 잃은 것일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사소한 것에서 시작했던 것 같아요.

 


  소설이 보여주는 사소한 일들은 실제로는 결코 사소하지 않은 일들이다. 그런 점에서 소설에서의 소소함이란 실상 패러독스일 수밖에 없다. 사소한 일들의 특징은 그 사건의 당사자들에게는 결코 사소하지 않지만, 세상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사소하고, 또 너무 자주 발생한다는 데 있다. 『악어떼가 나왔다』에도 ‘아이가 사라지는 것은 흔한 일이다’는 표현이 나온다. 그러나 아이를 잃어버린 경찰청장과 그 부인은 굉장한 슬픔에 휩싸인다. 물론, 우리들 대부분은 ‘사라지는 아이가 한두 명이야?’ 정도로 반응하겠지만. 안보윤의 소설에서 끔찍함이나 잔혹함은 이처럼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대수롭지 않은 일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태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런데 바로 그런 화자의 태도, 그러니까 어떤 사람들에게는 끔찍하거나 비극적일 수 있는 사건을 오직 관찰자의 객관적 시선으로만 묘사하려는 태도에 대해 불편함을 토로하는 독자들도 있다. 그녀의 화자들은 왜 이러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일까.

 

  물론 그런 것도 감동적이라거나 사람의 마음을 흔들 수 있겠죠. 내가 그 화자가 돼서 진지하게 내 입장을 설명하고, 내 감정에 대해서 서술하는 것 말이에요. 그런데 제 개인적인 취향부터가 감동을 주려고 하는 영화나 책을 안 좋아해요. 제가 잘 이해를 못하기도 하고. 그래서 말로 “내가 너무 슬퍼”, “내가 지금 너무 괴로워, 고통스러워”라고 고스란히 표현하는 게 사람의 감정을 건드릴 수 있을까라고 반대로 생각했고, 말로 표현해 줄 수 있는 게 한계가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 여자가 아이를 찾고 울부짖고 신세한탄을 하지 않는 것도 그렇게 이야기함으로써 오히려 더 거리감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오히려 아이가 없는 사람이라면 이 여자가 이랬을 때 더 모를 것 같고, 남자라면 또 다른 느낌일 것 같고, 그래서 저는 상황만 딱딱 잘라서 보여주되 그 면을 조금씩, 쇠고기를 이렇게 놓고 절단면을 조금씩만 들춰 주는 게 더 상상력을 자극하지 않을까, 그게 더 감정을 극대로 끌어올릴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을 했어요.

 


  소설은 작가가 세계를 바라보는 스크린의 일종이다. 그래서 어떤 작가들은 그 스크린의 조금의 여백을 만들어 놓음으로써 불행한 삶이 치유될 수 있는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타진하는가 하면, 또 어떤 작가들은 소설 속의 인물들이 처한 나쁜 상황에서 빠져나갈 수 있거나 그 상황이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진행될 출구의 여지를 아예 없애버린다. 단적으로 안보윤이 출간한 세 권의 소설에는 삶의 비상구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때문에 그녀의 스크린이 너무 비관적이거나 냉정하다는 평가도 없지 않다. 이렇게 물었더니 그녀는 자신의 소설이 그렇게 읽힐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이 착안해 온 소설들이 현실에 관계되어 있으며, “현실에서 따뜻하고 행복한 결말이 나지 않는 것을 뻔히 알고 있는데도, 다만 독자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기 위해서 행복한 결말을 도입하는 것”은 작가로서 무책임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 그 무책임을 온전히 껴안은 채로 글을 쓰는 것이 작가이며, 출구 없음을 인정한 상태에서도 쓰기를 멈추지 않는 것이 작가의 윤리일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소설’은 독자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우회적인 질문이었지만 이것은 ‘소설’에 관한 그녀의 가치관에 대한 질문이기도 했다. 현실의 비정함? 그것은 이미 우리들 일상의 일부가 되어버린 뉴스들과, 주말 저녁의 텔레비전을 장악하고 있는 시사 다큐멘터리들이 고스란히 전해 주지 않는가?

 

  제가 충분히 준비된 상태에서 소설가가 된 게 아니었기 때문에 입장이 계속 바뀌어 왔던 것 같아요. 처음에 사실 데뷔작을 썼을 때는 나를 위로하는, 나를 위해 주는 느낌으로 썼고, 그랬기 때문에 방황기가 굉장히 길었어요. 사실 독자를 생각하지 않은 상태에서 쓴 게 『악어떼가 나왔다』였고, 독자라든지, 나와 같이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라든지, 그 사람들을 의식했던 것은 다음부터였어요. 이전의 저라면 다른 생각을 했겠지만, 지금의 저는 정말 소소하게, 사실 소설가나 작가가 대단하게 많이 알고 앞서가고, 미래를 여는 사람들은 아니잖아요. 그냥 일반인의 입장에서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들, 아니면 내가 당신을 이만큼, 이런 사건을 이렇게 기억하고 혹은 내가 더 많이 기억하고 있는 부분들을 일깨워 줄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사소한 목적이었거든요. 잃어버린 아이들이 많다는 걸 잊었다면 내가 그걸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만들어 주고 싶고,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 입히고 폭력적이었거나 혹은 그것에 대해 방관자였다면, 이건 잘못되지 않았을까라고 어느 정도의 화두를 던져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고 싶었던 거거든요. 그랬기 때문에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 지금 자꾸 터지고 있는 사건들에 관한 이야기, 그것에 대해 썼었고, 욕심으로는 자꾸 뭔가 화두를 던져 주고 싶었어요. 제가 그분들에게, 독자들에게, 좋은 것, 이미 결정되어서 다 빚어지고 만들어진 완성체를 주는, 혹은 그런 위로나 감동이라든지 이런 감정을 드리는 게 아니라 무한히 커질 수 있는 생각의 아주 사소한 화두 하나쯤, 이 책 다 읽고 나면 되게 불편하게 한 가지 생각이 들고, 그 생각에 대해서 자꾸자꾸 생각이 번지고, 그렇게 해서 뭔가를 실행한다거나 변화한다거나, 그랬으면 진짜 좋겠다라는…….

 


  안보윤의 두 번째 장편소설은 『오즈의 닥터』다. 그녀는 이 작품으로 제1회 자음과모음문학상을 받았다. 그런데 이미 문학동네신인상으로 등단한 그녀가 출판사에서 선정해서 수여하는 문학상이 아니라 장편 공모에 응모해서 상을 받았다는 것이 쉽게 납득되지 않았다. 작가의 설명을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첫 책을 출간한 이후에 발표지면도 별로 없었고, 발표를 해도 반응이 없거나 나쁘다는 평가가 많았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자신감도 떨어지고 창작의욕이 위축된 상태에서 쓴 소설이 『오즈의 닥터』였다. 장편을 썼으나 막상 출판사를 찾아가 곧장 책을 내달라고 말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고, 그런 와중에 도서출판 자음과모음에서 장편을 공모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응모했다는 것이다. 힘든 부침의 시간을 이 소설과 함께 보내서 그랬는지 그녀의 두 번째 장편소설 『오즈의 닥터』는 첫 번째 책과는 느낌부터가 많이 다르다. 가령 이 소설에는 두세 차례 반복해서 등장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것은 대략 ‘진실이 뭐냐,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망상이냐?’는 물음과, ‘믿고 싶어 하는 데까지가 망상이고 나머지가 현실이다’는 대답을 통해서 현실과 현실 아닌 것의 경계, 현실과 망상의 경계에 대해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는 장면이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다 보면 우리들 역시 소설의 인물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가 진짜인지 아닌지 쉽게 판단할 수 없는 상태에 직면하게 된다. 작가가 의도한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녀는 첫 장편을 출간한 이후 ‘현실적이지 않다’라는 이야기를 좋은 의미와 나쁜 의미 모두에서 들었다고 토로했고, 그때 자신의 소설적 설정이 ‘문학의 허구’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에 낙심한 상태에서 ‘닥터팽’이라는 인물을 만들었다고 한다. 참고로 닥터팽이라는 인물은 이 소설의 주인공인 김종수가 망상을 통해서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이다. “닥터팽이라는 환상 속의 인물을 만들어 놓고 이 사람이 주체가 생각하는 것에 따라서 변화하는 모습을 그려야겠다고 생각하다 보니까 구성상으로 반전이 필요하게 되더라구요. 닥터팽을 등장시키면서, ‘아, 이 사람은 가짜였어!’라고 하는 부분이 필요한데, 그 부분이 너무 식상한 거예요. 너무 지리멸렬하고. 그렇게 해서 아 없는 사람이었네, 이 사람은 정신병자야라고 하는 게 너무 뻔한 결말처럼 느껴져 구성을 비틀기 시작하다가, 그러다가 ‘현실과 망상의 경계를 나누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라는 결론에 이른 것 같아요.”

  사실 이 대목에서 조금 더 작품 내적인 문제에 관해 묻고 싶었으나 정해진 인터뷰 시간과 지면이 빠듯해서 묻지 못했다. 다만 두 번째 책과 관련해서 소설의 제목이 왜 ‘오즈의 닥터’인가에 대해서만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과 망상의 경계에 대한 물음으로 일관하는 이 소설의 제목은 왜 ‘오즈의 닥터’가 되었어야 했을까? 작가는 이 물음에 대해서 『오즈의 마법사』의 일절을 끌어와 이렇게 설명했다. “오즈의 마법사에서 마법사가 결국 사기꾼이었던 걸로 밝혀지게 되잖아요. 도로시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한 유일한 희망으로 오즈의 마법사를 만나는 걸로 모든 모험과 험난한 길을 헤쳐 나갔는데, 너무나 볼품없는 마법사가 사실은 거짓말쟁이 사기꾼이었을 뿐인 게 나타나거든요. 닥터팽도 김종수라는 인물이 의지하고 나를 치료해 주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어떤 꼴도 다 참아내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환상이었고 일종의 사기였고 내가 만들어낸 허상이었다는 식으로 생각해서 오즈의 닥터라는 제목을 붙였어요.” 그렇다면 김종수와 닥터팽은 대체 어떤 관계일까, 닥터팽이라는 가상의 인물은 김종수가 위로받거나 치료받고 싶어서, 또는 자신의 결핍을 채우기 위한 보충적 인물로서 만들어낸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생각을 깨뜨리기 위해 등장한 인물인지, 이 질문이 이들의 관계를 이해하는 핵심인 듯했다. 작가는 이 질문에 대해서도 ‘후자’에 무게를 두고 있었다. “왜냐하면 닥터팽은 김종수에게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고 계속 이죽거리거나, 이게 진짜야? 라는 식의 도발적 질문을 해대는데, 사실 김종수 자신이 만들어낸 모든 게 자기에게 호의적일 수는 없는 거잖아요? 막연한 도덕이나 윤리 같은 것들, 너 정말 수연이 안 만났어? 라는 식의, 정말 쉽게 말하면 간간이 제정신으로 돌아올 때 잡음 같은 거죠.” 이 소설이 망상에 관해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흥미로웠던 것은 그 망상, 즉 판타지가 그것을 만들어낸 주체에게 일방적으로 종속되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런 점에서 김종수의 망상은 일반적인 의미의 자아도취 같은 판타지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안보윤의 세 번째 장편은 『사소한 문제들』이다. 작가에 따르면 이 소설은 『오즈의 닥터』와 비슷한 시기인 2009~2010년 무렵에 쓴 작품이다. 그렇지만 ‘왕따’ 문제와 청소년의 폭력을 다룬 이 작품은 요즘의 세태와 더 잘 어울리는 듯하다. 이 소설의 특징은 폭력에 대응하는 인물들의 태도가 순응적이고, 극도의 무기력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이다. 물론, 실제의 ‘왕따’ 현상 역시 마찬가지로 인간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세상에는 초식동물처럼 무기력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타인을 짓밟으면서 만족감을 느끼는 맹수와 같은 인간들도 많지 않은가. 소설은 왕따의 피해자인 아영과 또 다른 초식인간인 헌책방 주인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래서 헌책방 주인 남자와 아영이라는 비슷한 처지에 놓인 두 인물이 만나는 중간 부분에서 은근히 이들의 만남이 서로에게 행복한 만남으로 끝맺기를 기대하게 된다. 그럼에도 이 소설에서 이들의 만남은 결코 행복한 결말로 이어지지 않는다.

 

  제가 생각했던 건요, 외부로 인해서 당하는 폭력의 인물이 아영이라는 존재였다면, 두식 같은 경우에는 내부에서 번져 나오는 폭력이잖아요. 사실 저 사람이 진짜 게이인지 아닌지도 명확하지 않고, 내가 그냥 막연히 좋아했던 게 이성이 아니라 동성이었을 수도 있는 건데 자기 내부에서 너무 많이 스스로를 몰아붙이고 이렇게 저렇게 되고, 물론 외부적인 요인은 있지만, 그래서 제가 처음에 생각했던 건 처음에는 헌책방이라는 곳이 약간 골방이잖아요? 밀폐된 방 안에 외부의 폭력에 의해서 찌그러진 사람과 내부의 폭력으로 인해서 찌그러진 사람이 만나서 거의 무(無)가 되는, 영화였다면 이들이 폭력에 대항해서 누군가를 한 방에 날려버리겠지만, 그것과는 정반대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폭력과 왕따의 문제를 다루면서도 이 소설에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는 명확하지 않다. 가령 소설에서 아영을 괴롭히는 순구라는 인물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인데, 이것은 약육강식의 사회법칙을 가장 정확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준 사람의 약점을 잡아서 그 사람에게서 무엇인가를 뜯어내는, 그래서 마지막에 상대방에게서 더 이상 뜯어낼 게 없다고 판단되면 쉽사리 돌아서는 성현이라는 인물 역시 표면적으로는 비정하게 그려지지만 실상 현대인의 초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계, 첫 번째 책의 제목을 빌려서 표현하자면 악어가 없는 정글 같은 세상이 바로 작가 안보윤의 구체적인 관심사다. 그래서 우리는 그녀의 소설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나는 순구일까 아영이일까, 혹시 나는 헌책방 주인일까 성현일까 계속 되묻게 된다. 과연 나는 어떤 종류의 인간일까? 이 질문은 이 책을 다 읽을 무렵이면 어느새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실존적인 질문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같은 질문을 작가에게도 물어보았다. 질문의 핵심은 “본인이 이 소설에 등장한다면 어떤 캐릭터일까요?”라고 물었다.

 

  초등학교 즈음에. 저희 때는 왕따라고 해도 그렇게 심하지 않았어요. 왕따라는 용어 자체도 없었구요. 고등학교 때 ‘은따’라는 용어가 막 생겨서 사람들이 많이 썼지, 초등학교 때는 그게 전혀 없었죠. 그런데 사실 온갖 아이들을 다 모아 놓는 곳이 학교니까 은연중에 따돌림이 없을 수가 없잖아요? 제가 초등학교 3~4학년 때는 약간 따돌리는 쪽이었는데, 5~6학년 때는 그걸 고스란히 받은 쪽이었어요. 특히 6학년 때는 선생님과 아이들이 합심해서 저를 따돌렸어요. 선생님이 절 너무 싫어했고, 그리고 제가 임원이었는데, 선생님이 부모님이 학교에 안 오시는 걸 되게 싫어하는 선생님이라, 임원이 모범을 안 보인다고……. 그때 제가 제일 친했던, 5학년 때 같이 다른 아이를 은근히 따돌렸던 아이가 앞장서서 저를 따돌리는 거예요. 자기는 절대로 전면에 나서지 않으면서 제 약점을 다 이야기하구요. 아마 그때 받았던 상처가 아직까지 남아 있는 거 같아요. 그래서 ‘왕따’ 이야기가 나오면 더 예민하게 반응하고, 나는 그때 그것만으로도 너무 힘들었는데, 이 아이들은 정말 살 수가 없겠구나라는 생각을 해요. 편안하게 살아오신 분들은 그런 이야기들을 많이 해요. ‘저 녀석은 그냥 학교에 안 나가면 되지 왜 죽고 그래?’ 저는 그게 정말 말도 안 되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오죽하면 그랬을까요. 여태까지 ‘의지가 약하면 저놈은 언제 죽어도 죽을 거야’라고 생각하던 일부 사람들이 동영상을 통해서 그 아이들의 모습이 보여지니까 그때서야 ‘아휴, 저 아이가 괴로웠구나’라고 생각을 하죠.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과 14층을 왔다 갔다 하는 걸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알잖아요. 어쨌든 아영이를 쓸 때 그 기억이 많았어요. 따돌림을 당한 사람은 내부가 변하는 것 같아요. 자신을 미워하게 되고, 증오하게 되고, ‘내가 이런 취급을 당하거나 미움을 받는 게 당연할지도 몰라, 난 정말 더러울지도 몰라’, 이런 식의 생각이 어쩔 수 없이 생겨나게 돼요.

 


  안보윤의 소설은 읽은 사람들을 매우 불편하게 만든다. 이 불편함의 정체는 ‘이런 게 우리의 현실이야’라는 식의 고발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이 비상식적인 현실 앞에서 책을 읽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만들기 때문에 불편하다. 그래서 그녀의 소설에는 ‘현실’에 맞서려는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그 현실에서 상처를 받겠지만, 그 사람 곁에 선 또 다른 누군가는, 우리는, 그 상처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 그것이 세상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처세의 전부다. 오직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누군가를 이용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그런 것을 ‘능력’이나 ‘인맥’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것. 저녁 퇴근길 지하철에서 누군가가 심각한 위험에 처해 있음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행동할까? 여전히 우리는 이어폰을 끼고, 시선을 휴대폰에 고정시킨 채, 타인의 삶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처럼,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행동하지 않을까? 아니라고 대답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나 자신의 일이 되었을 때, 우리는 타인의 무관심을 쉽사리 비난할 것이다. 이 무관심의 장벽이 무너지지 않는 한 안보윤의 소설이 묘사하는 현실은 영영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우리 또한 그 거대한 악어 없는 정글의 세계에서 쓸쓸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문장웹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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