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의 큐레이터 외 1편

 

 《문장웹진》이 주목한 2012년 젊은 시인들

 

 

  강윤미

 

 너와 나의 큐레이터

 

 

 

 

  사람과 사람 사이 그림 하나 걸려 있다

 

  물감을 짜놓은 듯 어둠이 질퍽하다

  다시 물감이 마르듯 달빛이 딱딱해진다

 

  너는 사과와 접시와 유리병으로 이루어진 정물화

  나는 꽃과 연못과 구름으로 이루어진 풍경화

 

  너는 맘에 든 탁자 위에 하얀 식탁보를 깔고

  사과와 접시와 유리병의 위치를 정한다

  꽃과 연못과 구름이 있는 공원으로 간 나는

  액자와 어울리는 오전 11시의 풍경을 고른다

 

  너에게는 사물의 각도에 따른

  그림자와 어둠의 밀도가 필요하다

  나에게는 햇빛이 비치는 각도와

  풍경의 감정을 눈여겨볼 줄 아는 마음이 필요하다

 

  네가 남겨놓은 고요를 배우며

  사물은 사물로 완성되어간다

  시간의 원근법, 내 붓은

  풍경으로부터 벗어난 풍경이 된다

 

  사람들은 네가 선택한 사물이 상징하는 의미를 찾으려

  눈을 붉힌다 내가 선택한 풍경 속에서

  피로한 눈빛을 쉬게 한다

 

  너를 이해하는데 나의 언어가 필요하고

  나를 이해하는데 너의 언어가 필요하다

  우리는 서로에게서 빗나간

  액자 밖의 시간이 절실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 언어로 그리다 만

  벽 하나 걸려 있다

 

 

 

 

 시간

 

 

 

  한쪽 귀퉁이가 썩은 딸기 속에는

  썩지 않은 시간이 있다

  부패의 장소를 향해 떠나는, 썩지 않은

  딸기의 시간

 

  말려도 소용없다

  모든 것은 일그러지고

  냄새를 풍기고

  형체를 알아볼 수 없도록 얼굴을 바꾸고

  늙고

  비어간다

 

  지구의 어느 쪽에선가

  얼음이 녹고

  햇볕은 살을 뚫을 듯 쏟아진다

  추워서 죽고

  목이 말라 쓰러진다

 

  모든 것은 시간의 음모

  미워할 수 없다

  미워할 수 없는 것들이

  시간이 된다

 

  시작 노트

 

  나는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 둘을 알고 있다.

  열일곱의 그녀는 랭보를 모르던 내게 랭보를 이야기했고, 세잔의 그림을 그린 유화를 내게 선물했다. 스물둘의 그녀는 수업 때마다 매번 늦었고, 나는 출석체크 때마다 그녀 대신 대답하곤 했다. 그 순간엔 내가 꼭 그녀가 된 것 같았다.

  내게 그녀는 열일곱의 모습에서 정지해 있고, 또 다른 그녀는 스물둘에 생을 마쳤다. 시를 쓰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시인이 되어야 할 사람이 내가 아닌 그녀는 아니었을까, 생각한 적이 있다. 또, 어디선가 내 이름이 들리면 나는 그녀를 찾곤 했다.

  난 여기 있어. 넌 어디에 있니?

 

《문장웹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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