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피고 지고 외 1편

 

  《문장웹진》이 주목한 2012년 젊은 시인들

 

 

  성은주

 

 아버지, 피고 지고

 

 

 

 

 개나리를 소주병에 꽂아 놓던 날

 

  아버지는 연애를 시작했다

 

  사방이 황금빛 소문으로

 

  몸이 몸에게 건네는 말

 

  흑발은 아버지의 근황을 알리는 가느다란 숨

 

  계절은 피고 지고

 

  오래된 잡지에 밑줄이 생긴다

 

  나무가 옷을 입고 벗는 동안

 

  그림자 안으로 부푼 늙은 애인

 

  다시 돌아오지 않고

 

  위치를 지운 표정은

 

  조용히 무너지는 동굴을 닮았다

 

  종종 라디오 옆에서 아버지는 잠이 들곤 했는데

 

  후두둑 떨어지는 저녁 공기들

 

 

 

 

 데린쿠유*

 

 

 

  물고기의 붉은 배가 바닥에 닿으면 지문地文을 따라 우물이 차오르지. 좁고 각진 눈을 뜨면서 수영을 배웠어. 그 눈으로 널 대신해 울어 줄 수 있으니까 눈동자를 켜둘게. 다시 환기구에서 만나자.

  도망치는 꿈을 꾸다가 밑바탕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지. 난 여전히 파랗고 쉼표의 노출이 싫어. 군데군데 지워진 이정표의 잔망殘亡. 머리가 흰 거대한 고래는 항상 같은 소원을 빌었지. 땅속 메아리 때문에 가끔 착란을, 서쪽을 향해 기도할 때마다 허리 구부려 신을 만나러 가. 좁고 긴 통로에서 순차적으로 바람이 불어 주었으면,

 

 

 * Derinkuyu: 깊은 우물이라는 뜻을 가진 터키의 지하도시.

 

 

 

 

  시작 노트

 

  가까워지거나 멀어지는 것이 두려웠다. 꽃이 피고 지듯 계절이 끝날 때마다 사라지는 흔적들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를 이해하고, 누군가를 포용하다가 떠나보내는 이별과 흡사하다. 루이스 푸엔조 감독은 <고래와 창녀>에서 사랑은 깊은 바다 밑을 떠도는 고래가 건네는 허무의 몸짓이라고 했다.

  봄날이었다. 오래된 잡지에 밑줄을 긋고, 유행가 가사를 적어 놓던 아버지. 꽃을 가까이하지 않던 아버지가 개나리를 소주병에 꽂아 놓고 노란 웃음을 보였다. 아름답지만 시든 애인을 닮아서일까. 누군가를 잊는 건 동굴처럼 서늘하고 습한 어둠을 향해 걷는 기분일 것이다. 쉽게 헤어 나오지 못할 만큼 터키 지하도시의 통로는 구불구불하다. 마치 테세우스가 미노타우로스의 미로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사용했던 끈이 필요할 것 같다. 길을 몰라 정지화면처럼 서 있을 때 누군가의 손짓이 간절하듯, 깊은 우물에서 꺼내 줄 괜찮은 바람이 불어 주기를 호흡해 본다.

  그러나 우린 길을 잃었으니까 긴 골목을 오래오래 쓰다듬어 보면서 걸음을 한다. 지금은 온전히 나의 것, 여행이 시작됐다. 숨찬 발걸음으로 낯선 경험이 채워진다. 어쩌면 여행이 끝나는 순간에도 길을 찾지 못할지 모른다. 영원히.

 《문장웹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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