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은 아무것도 아니다

 

[2012년 미리 보는 올해의 시집]

 

 

한 번은 아무것도 아니다

 

김이강

 

 

 

 

 

어떤 노동

 

  누군가 자신의 아버지가 들판에서 일하는 모습을 보고 이렇게 쓴다.

 

  나는 뭔가에 홀린 듯 그를 바라본다. 아버지는 단순하면서 아주 습관적으로 움직이신다. 사람들은 그가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지 않을 정도다. 그의 걸음걸이는 일정한데, 마치 제대로 착지할 자리를 찾고 있는 듯이 시험적으로 발을 디뎌 보는 것 같다. 그가 들고 있는 낫은 아무런 인위적 강제성 없이 소박하게 제 갈 길을 가고 있다.

 

  아버지의 낫과 움직임을 바라보며 이런 글을 쓴 사람은 트로츠키다. 벤야민은 트로츠키가 자서전에 적어 놓은 이 구절로부터 노동이 입증하는 정직함과 같은 것을 본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성공을 마주하는 정직한 태도다. 낫이 ‘성공적으로’ 한 번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같으면서도 새로운 움직임이 채워진다. 그것이 매번 새롭게 반복된다. 땅에 발을 딛는 순간들이 아마도 그 리듬을 셈하고 있었을 것이다. 벤야민은 이를 두고 ‘낫을 휘두를 때마다 새로 시작하는 법을 배운 노련한 자의 방식’이라 표현했다. 좋은 글을 쓴다는 것은 그와 같다는 것이다. 한 번 이룬 것에 멈추지 않고 한 리듬에서 벗어나 다음 리듬으로 넘어가기. 그리하여 ‘멋진 구절’을 쓰는 것은 좋은 글을 쓰는 것과 대비된다. 어떤 멋진 구절을 쓴 후 멈칫할 때, 그리하여 더 이상 그 뒤를 이어갈 수 없을 때, 무언가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나쁜 성공’의 사례가 된다. 벤야민식 구분법이란 이런 것이다. “이번 한 번만으로”와 “한 번은 아무것도 아니다”.

 

 

과거로 보낸 편지

 

  꿈에 나는 친구들과 홍대의 어느 골목을 걷고 있었다. 그곳은 정확히 십 년 전의 홍대 거리였다. 쌀쌀하고 어두운 거리들, 여기저기 공사 중인 건물들의 가림용 천막, 아무도 쓸어내지 않아 발자국을 맞고 단단해진 눈무덤들, 어둡고 더럽고 시끄럽고 충만한 공연장, 지하의 맥줏집 스미스, 팝콘. 모든 것이 그대로였기 때문에 우리는 십 년 전에 관해 아무런 기억도 갖고 있지 못했다. 우울하고 긴 침묵이 지속되었다. 걷다 지쳐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방 안에는 전등이 너무 밝게 켜져 있었다.

  ‘우리는 빛이 희미한 망각 속으로 빠져들었다(we slid into oblivion where the light is weak)’고 스웨덴의 어느 음악가가 적는다. 그는 밤을 회복하고 싶었으며, 아주 천천히 망각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나는 마치 그 가사처럼, 망각했던 어떤 영역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가 돌아왔음을 느꼈다. 그러나 어떤 것을 회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 회복할 것이란 있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단지 남아 있는 것은 길고 긴 걷기와 침묵임을 깨달았다.

 

 

서울, 폭설

 

  소파에 앉아 책을 읽는데 눈이 내린다. 내가 읽던 것은 빔 벤더스의 사진과 산문이 실린 책이었다. 그는 걷고 또 걸었다. 잘츠부르크에서 베니스까지, 그리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 그리하여 걷는 일이 마치 물고기가 헤엄을 치는 일처럼 익숙해져 버렸는지 모른다. 그는 적었다. ‘일정한 속도로 걷다 보면 멈춰 서는 것마저 부담스러워진다’고. 그도 어쩌면 걷기 분야에서 매우 능숙한 사람이 된 것임에 틀림없다.

  내가 태어나서 가장 많이 걸었던 길은 ‘윗길’이라 불리는 고향의 어느 구간이다. 버스로 세 정거장 거리인 그 길을 어릴 적엔 오빠, 언니와 함께 걸었다. 집에서 학교로,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길이었던 것이다. 그곳엔 정말이지 눈이 오지 않는다. 정말로 오지 않는다. 아마도 그때의 그 고장은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에 눈이 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눈으로 뒤덮이기엔 모든 것이 너무도 아름다웠다. 전혀 ‘멋’스럽지 않게, 소박한 방식으로.

  폭설이 계속해서 내리고 있다. 이 눈이 서울을 아름답게 뒤덮어 가고 있다. 전혀 폭력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덮을 수 없는 것들이 있다면, 웃음, 침울, 그리고 게으름. 마지막으로 발자국.

 

 

가득 찬 종이

 

  대학 동기들 가운데 멍멍이라는 별명과 똘똘이라는 별명을 가진 친구들이 있었다. 이 별명을 가진 친구들은 내가 좋아하고 신뢰하는 몇 안 되는 인물들이었는데, 흥미롭게도 나는 ‘똘똘이’라는 이름을 가진 ‘멍멍이’와 함께 살았던 적이 있다.

  처음 나에게 도착했을 때 그는 하얀 털을 가진 4개월 된 꼬맹이였다. 그는 겁에 질려 있었고 온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아무리 따뜻하게 보살펴 주어도 쉽게 놀라고 자주 떨었다. 외로움을 견디지 못했다. 홀로 남겨진 어느 날 공포와 외로움에 질렸던 그는 현관문을 온종일 긁어대다가 피투성이가 된 앞발로 빨간 발자국을 이곳저곳에 찍어 놓았다. 알고 보니 그 꼬마는 이전의 4개월 동안 대가족 틈에서 살았었다. 자신을 낳아 준 엄마와 함께.

  그 일이 있은 후로 그는 낮 동안 주인집에서 운영하는 아래층 안경점에서 사람들 틈을 뛰어다닐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에는 마지못해 떠안았던 주인아저씨와 안경사들의 마음을, 그는 단번에 사로잡았다. 추운 겨울 동안 그는 조명의 온기가 뿜어져 나오는 진열장 위에서 잠을 자거나, 주인아저씨가 까주는 귤을 먹곤 했다. 그리고 따뜻한 봄이 되자 모두의 곁에서 사라졌다. 안경사와 봄날의 산책을 하던 중이었다.

  우리는 벽보를 만들었다. ‘강아지를 찾습니다’. 나중에 보니 우리는 절대로 그를 찾을 수 없는 종류의 벽보를 여기저기에 매달았던 것 같다. 강아지의 종류와 몸집, 사진, 특성 따위를 하나도 적지 않은 것이다. 그 커다란 종이에 ‘강아지를 찾습니다’라는 글자 외에 우리가 써놓은 것은, 주인의 연락처와 ‘사례하겠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름 : 똘똘이’.

 

 

코너만 돌면

 

  어떤 리듬이 반복되고 있다. 그리고 어떤 반복은 리듬이 된다. 두 경우 모두 예술에 가깝다. 그리고 두 경우 모두 노동에 가까운 건 아닐까?

  언제인가 나는 게으르고 무지한 관람객으로서 로댕의 작품전에 입장한 적이 있다. 그가 얼마나 고독한 영혼이었는가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그의 작품에서 들려오는 표면의 중얼거림을 들으면 된다. 모든 근육들이 살아 꿈틀거리는 표면의 윤곽, 리듬과 질량, 그리고 표정. 그 지고지순한 물리적 노동의 흔적으로 남은 물질성은 고독하다. 아마도 ‘좋은 성공’의 사례에 해당할 것이다.

  시에 물질성이 있다면 아마도 리듬이 아닐까? 시의 표면이자, 내적으로 반복되는 노동. 내가 즐겨 읽는 어떤 시들은 아이들이 읽기에 좋은 동시처럼 순수한 리듬에 가까워지곤 한다. 그러나 코너만 돌면, 곧바로 황량해지고 만다. 그 순수한 리듬의 길 끝에서 외롭고 고독한 노래가 들려온다. 그 모퉁이에서 마주치는 고독은 자기가 고독한 줄 모르고 있을 것만 같다.

 

《문장웹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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