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이 이어지는 서사의 괴물성, 최제훈 소설가 - 고봉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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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준의 젊은 작가 인터뷰_04]

 

 

끝없이 이어지는 서사의 괴물성

─ 최제훈 작가 인터뷰

 

고봉준

 

 

 

 

 

   을에서 겨울로 넘어오는 길목, 나는 많이 아팠다. 특히 목이. 언제부턴가 유행성 감기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게 월동준비가 되어버려 겨울이 깊어지기도 전에, 그러니까 남들이 감기 증세로 병원 문턱을 넘나들기도 전부터 일찌감치 한바탕 감기와의 일전을 치르는 것이 연례행사가 되어버렸다. 특히 10월 말부터 12월 초까지 6주간 이어지는 ‘소설 이론’에 관한 강의를 진행하고 있던 터라 인터뷰를 세심하게 준비할 시간도 턱없이 모자랐는데, 목과 코, 그리고 천식환자의 그것처럼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는 발작성 기침 때문에 여러모로 상태가 엉망이었다. 이런 어수선한 가운데 12월 8일 저녁 7시 홍대 앞 카페 〈토즈〉에서 2011년에 가장 주목받은 신예소설가 최제훈을 만났다. 감기 때문에 그의 책, 특히 『일곱 개의 고양이 눈』을 미처 다 읽지 못한 상태였던지라 예정시간보다 1시간 일찍 약속 장소에 도착해서 간이 휴게실에서 책을 읽고 있었는데, 불현듯 내 앞자리에 낯익은 얼굴이 나타났다. 어디서 봤더라. 상대방의 구체적인 신상에 대해 알지 못한 가운데 말을 붙이기는 어려운 일. 생각해 보니 지금 내 앞에 놓인 책의 날개에 인쇄된 프로필 사진의 주인공이었다. 이후, 그는 나의 질문에 시종일관 여유롭고 침착하게 답했던 같고, 나는 연신 터져 나오는 기침을 달래느라 정신이 없었던 듯하다.

 


  제훈은 2007년 소설 「퀴르발 남작의 성」으로 제7회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에 당선되어 등단한 소살가다. 1973년 서울에서 태어나 남들이 부러워할 연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했으나, 안정적인 중산층의 삶이 보장되는 취직의 길이 아니라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 다시 입학해서 문학을 공부했다. 2010년 9월 첫 소설집 『퀴르발 남작의 성』(문학과지성사)과 2011년 1월 첫 장편『일곱 개의 고양이 눈』(자음과모음)을 연이어 출간하면서 일약 문단의 새로운 상상력으로 주목받았다. 전작 『퀴르발 남작의 성』은 시간과 공간의 경계는 물론 현실과 환상, 사실과 허구를 아무런 제약 없이 넘나들면서 이야기의 진수를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았고, 첫 장편 『일곱 개의 고양이 눈』은 4편의 독립된 중편이 모자이크처럼 하나의 장편을 구성하는 무한반복의 형식과, 추리문학이라는 장르소설적 요소가 적절하게 평가를 받아 올 겨울 제44회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했다.

 

  가 처음 접한 최제훈의 소설은 『2010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소설』이라는 엔솔로지에 실려 있는 「괴물을 위한 변명」이었다. 계몽주의의 음화(陰畵)라고 평가되는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소재로 한 일종의 메타소설인 이 작품은 한편으로는 괴물의 정체성이라는 묵직한 철학적 물음과, 또 한편으로는 이야기의 새로운 구성법이라는 문학적 가능성을 동시에 보여준다는 점에서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지금, 내 앞에 그 ‘괴물’의 작가가 마주보고 앉아 있다. 나는 그에게 문학수업 과정과 등단할 때까지의 삶에 대해 물었다. 특히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늦은 나이에 서울예대 문예창작과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소설을 공부했다는, 한때는 직장생활과 습작을 병행하다 소설에 전념하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었다는 이력은 무척 이채롭게 느껴졌다. 나의 궁금증에 대한 그의 대답을 요약하면 이렇다. 학교를 다니면서도 소설을 써보고 싶었고, 복학 후 국문학과와 심리학과 등을 기웃거리면서 혼자 문학공부를 했으며, 2년 정도만 공부를 해보고 싶어 서울예대에 입학했다. 졸업 후에는 시간적인 여유가 있는 직장을 알아보다가 서울예대 교직원으로 4년간 근무했으나, 직장과 창작을 병행하는 게 어려워 직장을 그만두고 소설 창작에 매진했고, 2006년부터 쓰기 시작해서 2007년부터 투고를 시작, 등단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와 소설의 첫 만남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특별한 계기는 없다고 했다. “제대 후에 졸업을 앞두고 현실적으로 하고 싶은 일이 뭘까 싶었어요. 경영학과를 나와서 직장 다니는 건 (내게) 맞지 않는 것 같았어요.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게 되면서 심리적으로 공허한 상태가 채워지는 느낌을 받았구요. 교내 학보에 소설 공모전이 있었는데, 나도 한번 써볼까 해서 투고를 했어요. 그때 굉장히 기분이 좋았어요. 수용과 독자의 입장에 있다가 써보니, 내용은 소설이라 부를 수도 없지만 이전까진 알 수 없던 기분이 좋은 느낌이 들었어요. 그때부터 조금씩 써보다가 결국 소설을 쓰게 됐죠.” 작가에 관한 일반적 신화 가운데 하나는 작가들이 다른 작가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성장한다는 것이다. 흔히 문학수업이라고 불리는 이 과정은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읽고, 그 작품들의 경향이나 스타일 같은 것으로부터 영향을 받게 된다는 이야기로 압축된다. 그래서 이 ‘괴물’의 작가는 과연 어떤 작가들의 영향을 받았을까가 궁금했다. “애당초 글을 쓰고 싶었던 사람이면 그런 식으로 자신의 롤 모델을 정해서 썼을 텐데, 그런 사람이 아니라서 책을 다양하게 읽었어요. 철학 동아리였는데 읽고 세미나 했던 동아리라서 다양한 분야를 읽고 재미를 느꼈죠. 때문에 특별하게 정한 롤 모델은 없었어요. 그보다는 자유롭게 써보고 싶은 마음이 컸죠. 오히려 다른 책들을 읽으면서 이거 좀 다르게, 더 재밌게도 쓸 수 있을 텐데 같은 생각을 하곤 했어요.”


  몇 개의 질문을 주고받으면서 내가 느낀 것은 ‘작가’라는 존재에 관한 교과서적인 이해로부터 자유로울 필요가 있다는 것, 특히 최근의 젊은 작가들에게 ‘작가’라는 존재론적 영역으로의 진입은 우연적인 요소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었다. 몇몇 작가들을 만났으나 그들 가운데 자신이 오래전부터 소설가가 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사람은 없었다. 본격적인 인터뷰로 들어가면서 내가 첫 번째로 던진 질문은 「괴물을 위한 변명」의 창작 계기였다. 인문학 전반에 관한 독서량이 조금 있는 독자라면 쉽게 알 테지만, 괴물이라는 존재의 상징인 프랑켄슈타인은 현대철학에서도 꽤 빈번하게 등장하는 캐릭터의 하나다.

 

  프랑켄슈타인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어요. 학문적이라기보다는, 죽은 시체 조각을 꿰매서 하나의 생명체로 만들고 그 생명체의 삶을 그린다는 것이 정서적으로 매력적이었어요. 그래서 프랑켄슈타인에 대한 소설을 써보자 하고 결심을 하면서 원작 번역본과 관련 논문들을 읽기 시작했죠. 어떤 식으로 쓸 지는 정하지 않은 상태였구요. 처음에는 프랑켄슈타인의 후일담처럼 썼었는데 다 쓰고 보니 영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썼어요. 그런데 또 마음에 들지 않아 두어 번 다시 썼구요. 마지막에 쓴 게 이것이죠. 그리고 내가 이렇게 쓰는 과정 자체를 소설로 써보자고 생각했죠. 이질적인 것들을 꿰매서 하나의 소설로, 그래서 소설 자체가 프랑켄슈타인처럼 보이도록. 그런 관심에서 시작된 소설이에요.

 

  제훈의 소설을 접한 사람들은 쉽게 이야기의 매력에 빠져든다. 그런데 내게 더 매력적이었던 것은 이야기의 구성방식, 즉 형식적인 틀이었다. 그래서 그의 소설들에 관한 평가에는 흔히 ‘메타소설’, ‘브리콜라주 소설’, ‘난장의 글쓰기’ 같은 비평적 언사들이 따라다닌다. 특히 그의 첫 장편은 4편의 독립적인 중편을 모자이크처럼 합성해서 만들어졌는데, 나는 이런 형식적인 틀의 기원에 대해서 무척 궁금했다. 「괴물을 위한 변명」, 「퀴르발 남작의 성」, 「셜록 홈즈의 숨겨진 사건」 같은 작품들은 대개 메타 텍스트의 느낌이 강하다. 그 작품들은 원작 내지 다른 버전들이 이미 존재하는 것들을 소재로 삼고 있다. 얼핏 보면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새로운 서사의 가능성을 이야기할 때 제시했던 패러디라고 볼 수도 있는데, 특히 소설 쓰기 자체를 소설화하는 데서는 그런 특징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이런 ‘취미’가 어디에서 왔을까라는 질문을 던져보았다.

 

  글쎄, 애당초 체계적으로 이런 작업을 하겠다고 한 건 아니었어요. 그때그때 하고 싶은 작업을 했어요. 모으면서 보니까 이런 게 있구나 싶었던 거지 포스트 모던한, 패러디. 페스티쉬 같은 걸 이용하겠다는 건 아니었어요. 「퀴르발 남작의 성」 같은 경우는 『옛 이야기의 매력』(* 이 책은 브루노 베텔하임이라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심리학자가 지난 수백 년 동안 전 세계 어린이들의 사랑을 받아 온 옛이야기들을 통해 어린이의 심리를 심층적으로 분석한 책으로 1998년 시공주니어에서 번역?출간되었다)이란 책을 읽으면서 구상을 처음 했어요. 정신분석학적인 이야기도 나오고 변형 이야기도 나오고. 그런데 「괴물을 위한 변명」과는 다른 게, 「괴물을 위한 변명」은 원전이 있는 거고, 「퀴르발 남작의 성」은 원전 자체를 내가 거짓말로 만들었어요. 원전에 대한 패러디 같지만 사실 원전 자체가 비어 있는 작업을, 해석이 변주되는 과정 자체를 해보고 싶었어요. 그러면서 기법적인 아이디어도 동시에 떠올랐기 때문에 섞었죠.

 

  설에 대한 작가들의

 
이해나 독자들의 기대는 한 마디로 압축되지 않는다. 그것은 소설의 역사가 지니고 있는 풍요로운 사례들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작가와 독자들이 ‘소설’이라는 장르/형식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와도 직결되어 있다. 그래서 이렇게 물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소설에 대해 가지고 있는 관념이란 일어날 법한 이야기나 주변에서 흔히 경험했거나, 들었거나, 알고 있는 현실적인 이야기들에 픽션을 가미해서 이야기로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독자들이 이런 것은 일어날 법한 이야기구나, 라는 느낌을 주는 게 소설에 관한 오래된 생각의 하나죠. 그러나 선생님의 소설을 읽으면 처음부터 아예 그런 게 없는 것 같아요. 이 상황을 독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이렇게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말씀하신 대로 그런 게 없는 거 같아요. 그리고 오히려 그런 게 없으려고 노력을 해요. 소설이란 이런 것이다, 이런 역할을 해야 한다, 이런 걸 배제를 하고 정의 자체도 내리지 않으려고 해요. 한참 몇 년 전에 근대 문학 얘기 나왔는데, 근대 문학 이것도 결국 사회적 역할에 대한 이야기더군요. 그런데 내가 소설을 쓰고 싶다고 한 건 소설이 과거에 어떤 역할을 했다거나, 미래에 무언가 될 수 있다는 것 때문인 것 같지는 않아요. 다만 현재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작업에 충실할 뿐이죠. 나 역시도 독자로 있을 때 그런 식의 소설을 좋아했어요. 많지는 않았지만.” 그는 그 많지 않은 소설들 가운데 하나로 보르헤스를 꼽았다. 나는 즉흥적으로 하나의 가상적 상황을 설정해 보았다. 그 설정이란 이런 것이다. 한 사람의 작가로서 독자들에게 대중 강연을 한다고 생각을 하면 ‘소설이란 무엇이다’, 또는 ‘내가 생각하는 소설이란 무엇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냐고, 그런 것이 있으면 들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런 게 없다니까요. (웃음) 그런 것을 없애려고 하는데, 어떻게 보면 이게 나에게는 현실이었어요. 현실이라고 이야기할 때, 우리는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이 현실이라고 해요. 그러나 내가 살아가면서 어떤 선택을 하고, 그 결과에 따라 어떤 일들이 있을 때, 그런 선택을 지배하는 것이 그 사람 안에 있는 현실 이외의 관념이나 추상일 수도 있다고 보고, 그런 부분이 크다고 봐요. 굳이 꼭 눈에 보이는 것만을 쓰는 게 현실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특히나 요즘은 점점 더 기술이 발전하면서 그런 것 자체가 좀 무화(無化)되는 거 같아요. 나는 지금 나온 두 책의 작업이 내가 나갈 방향이다, 이렇게 말하고 싶진 않아요. 초반에는 뒤늦게 소설을 쓰다 보니까 나도 모르게 내가 소설 쓰는 과정 자체에 관심을 가져서 이렇게 나온 거 같아요. 앞으로도 다양하게 쓰고 싶어요. 나는 뭘 그려야 된다, 현실에 있을 법한 이야기로 뭘 줘야 된다는 그런 강박관념은 가지고 있지 않아요. 어떤 분이 쓰신 건지는 잊었는데 평론에서 읽었어요. 공감을 주는 문학과 영감을 주는 문학이 있다고. 어, 선생님이 쓰신 건가? 아, 이런 우연이. 그거 재밌게 읽었어요. 나는 정리된 말로 못하니까 이거 읽으면서 굉장히 공감을 했어요. (웃음) 딱 나누기는 힘들지만 굳이 나누자면 공감을 주는 문학이 어떤 현실에 있을 법한 보편적인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걸로 위로나 감동을 주는 거라고 봐요. 그런 걸 벗어나서 한 방향을 지시하진 않더라도 충격 같은, 새로운 것을 보고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그런 (영감을 주는) 문학을 받아들일 때 나도 관심이 있고 그런 걸 쓰고 싶어요.

 

  컨대 소설에 관한 고정된 관념을 갖고 있지도 않고, 어떤 작품을 쓸 때도 처음부터 의도해서 그 방향으로 쓰는 것도 아니라는 게 작가의 말이었다. 그렇지만 그 말을 들으면서도 내심, 필연적인 맥락이나 정해진 의도가 없다고 하더라도, 무의도의 결과라고만 말할 수는 없는 작품들도 있음을 떠올렸다. 예를 들면 그의 작품집 마지막에 실려 있는 「쉿! 당신이 책장을 덮은 후……」에는 이 소설집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총출동을 한다. 그래서 이 소설은 딱히 정해진 방향을 향해 달려가는, 즉 결론을 향해 나아가는 소설의 일반적 원칙과 달리 다양한 목소리들이 웅성거리고 있는 것처럼 다가온다. 만일 내가 이 책의 해설자였다면 나는 프랑켄슈타인이 그랬던 것처럼, 이 작품 또한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다 짜깁기를 해서 만든 또 하나의 메타 이야기라고 썼을 것 같다. 그래서 이 책이 프랑켄슈타인과 동일한 방식으로 만들어진 생산품이라고 주장했을 것 같다. 이런 맥락에서 첫 작품집의 마지막 작품을 구상하게 된 계기에 대해 물었다. “어떤 의도를 가지고 한 건 아니에요. 쓰다 보면 내가 쓰고 있는 인물들이 다른 세계에서, 완전한 공상과 현실의 중간계쯤에 다 모여서 쑥덕거리고 있는 거 같은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그런 이미지를 형상화했어요. 또, 사실 소설집이라고 하면 다 개별 소설인데 한 군데 모여서 뒤풀이하는 거 같은 자리를 한번 그려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썼죠.”

 


  야기가 자연스럽게 두 번째 책이자 첫 장편으로 흘렀다. 그의 첫 장편 『일곱 개의 고양이 눈』은 네 편의 중편소설이 하나의 장편을 구성하고 있는 독특한 형식의 작품이다. 또한 소설은 끝을 향해 나아가기를 거부하면서 뫼비우스의 띠처럼 꼬여 있다. 어떤 이유로 이런 형식을 구상하게 되었는가가 궁금했다.

 

  처음 연재를 의뢰받을 때 장편연재가 아니었어요. 자모(* ‘자음과모음’ 출판사 )에서 새롭게 기획을 하는데 ‘픽섭 연재’라는 걸 한다고 했어요. 난 ‘픽섭’이 뭔지도 몰랐어요. 그게 뭐냐고 했더니 연작이나 옴니버스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고 하더라구요. 마침 연작소설을 생각해 놓은 게 있었어요. 나중에 쓸 생각이었는데 그렇게 기회가 돼서 그걸 써보자 했죠. 보통의 연작소설이라고 하면 똑같은 인물이 다음 이야기에 나오거나 하는 건데 그런 게 아니었어요. 변주되는 인물들을 통해서 이야기가 영원히 뻗어 나가는, 그러면서도 계속 겹쳐지는 이미지 같은 걸 기반으로 해서 써보고 싶었어요.

 

  종의 기하학적인 구성을 만들고 싶었던 것일까? 어쨌거나 이 대목에서 나는 인터뷰를 이어가기 위해 ‘독자’라는 예민한 문제를 꺼내들었다. 참고로 말하자면 이 질문 이전에 나는 작가에게 “당신의 독자들이 당신의 작품을 읽고 무엇을 얻었으면 좋을까요?”라고 물었는데, 그는 “전혀 없다”는 짧은 대답만 했다. 그래서 재차 나는 “그렇다면 그 말은 소설을 쓸 때 독자, 즉 읽힌다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는 건가?”라고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습니다. 오히려 가능한 독자를 배제하고 쓰려고 노력을 해요. 그게 쓰는 사람의 의무라고 생각을 합니다. 제일 많이 하는 얘기가 ‘소통’인데, 소통을 염두에 둔다는 것은 독자, 대중을 말하는 것이죠. 그런데 그 자체가 어떤 균일한 집단이 아니므로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어요. 그러므로 글 쓰는 사람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을 하고, 그럼으로써 결과물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나오도록 한 뒤에 독자가 선택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글 쓰는 사람의 의무가 아닌가 하고 생각을 해요. 이걸 어떻게 읽혔으면 좋겠다, 더 잘 읽히기 위해 어떻게 써야겠다는 것은 가능한 배제를 해요. 쓰고 싶은 게 있을 때 그 안에서 최대한 좀 파고들려고 노력을 하죠.

 

  떤 사람들은 이런 태도, 그러니까 ‘독자’의 존재를 괄호 속에 넣어버리는 태도가 소설 장르의 탄생이나 본질을 벗어난 것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독자’의 존재를 둘러싸고 발생하는 이러한 입장 차이는 실제로 소설가들 사이에도 꽤 넓게 퍼져 있다. 쓰는 것에 강조점을 두는 작가와 읽히는 것에도 강조점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작가들. 분명한 것은 한국문학의 젊은 흐름이 후자보다는 전자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 하나의 질문을 건넸다. “두 권의 책에서 보여주셨던 이야기가 작가로서 본인이 궁극적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은 아니었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러면 소설가로서 어떤 것을 해보고 싶으신 건가요?”라고 물었더니 또다시 “특별히 그런 것은 없어요.”라고 짧게 대답한다. 말인즉슨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계속 매진한다기보다는…… 내 안에 있는 것들을 가능한 잘 풀어낼 수 있는 걸 해보고 싶고, 결과물로 어떤 축적이 되는 것을 따라가 보고 싶은 마음”이라는 뜻이다. 작가는 그것을 인생에 비유해서 이렇게 설명했다. “쉽게 비유하면 사는 게 인생은 무엇이다 정의를 내리고, 인생이란 어때야 한다 생각하고 사는 게 아니지 않잖아요. 계속 상호작용을 통해서 자기가 나아간 길을 뒤돌아보면 인생이 되는 거지. 아멜리 노통이 그런 말을 했었죠. 소설 쓴다는 것을 출산에 많이 비유하는데, 안에 무엇인가 생겼을 때 이 아이가 커서 무엇이 되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온전하고 건강하게 꺼내 놓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느냐고. 그런 생각이 마음에 들었어요.”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런 것 같았다. 글을 쓰는 것을 출산에 비유할 수 있다면, 그때 중요한 것은 뱃속의 아이가 커서 어떤 아이가 되면 좋을까라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어떻게 이 아이를 건강하게 낳을 수 있을까를 걱정하는 게 당연한 듯했다. 멋진, 작가다운 비유라는 생각이 들었다.

 


  터뷰는 ‘이야기꾼’에 관한 이야기로 마무리되었다. 인터뷰가 ‘이야기꾼’ 얘기로 흘러간 이유는 그가 출판된 자신의 책들을 펼쳐 보지 않았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1~2년의 시차를 두고 읽고 싶다고 말했지만, 자신의 소설(책)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은 그가 소설 쓰기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는다는 것을 뜻한다. 액티브한 것으로서의 이야기 혹은 글쓰기 자체를 ‘책’이라는 물질적 생산물보다 더 중시하는 것, 나는 그에게 그것이 이야기꾼의 태도라고 말했던 듯하다. 그는 ‘이야기꾼’이라는 말이 왠지 “쭉 이어지는 서사”를 떠올리게 만들어 약간의 이질감이 느껴지기도 한다고 말했으나, 내가 말한 ‘이야기꾼’이 자신의 머릿속에 모든 걸 정리해 놓고 그것대로 이야기를 정리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생각나는 게 있으면 그것도 집어넣고, 사람들의 반응도 살피고, 끊임없이 변주하는 브리콜라주라를 뜻하는 것이라는 걸 이해하곤 쉽게 동의했다. 이 경우 ‘동의’란 이야기꾼에 관한 나의 ‘해석’에 대한 긍정이다. 어쨌거나 나는 그의 이야기꾼 기질이 미리 정해진 결론을 향해 직핍하는 스타일이 아니라 우연성을 긍정하면서 독자에게 자극을 주는, 동시에 쓰는 존재로서의 자기 실험이 어떤 상태에 도달하는 것에서 만족감을 얻는 작가적 윤리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문장웹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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