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다음 역

 

그 다음 역

 

김혜순

 

 

 

작의

 

하나의 질문에 서로 다른 답을 할 때 발생하는 갈등은 연극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다. 이 작품에는 갈등이 없다. 이는 연극의 관습에 위배된다. 연극의 관습은 삶의 관습이기도 하다. 연극의 관습을 거역하는 일은 곧 삶의 관습을 거역하는 일이다. 갈등 없는 삶, 단절된 관계가 연극이, 혹은 삶이 될 수 있을까?

사실, 현실에서 사람들은 항상, 서로를 죽이거나 사랑을 고백하거나 하지 않는다. 분명한 것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대부분 시간을 돈을 벌고 쓰는 일에 할애하고 습관처럼 반복되는 일상적 대화를 하다 보면 달력은 다 뜯어지고 만다. 싸움은 가끔 있을 뿐이다.

싸움에서 오는 분노, 절망감보다 관계의 단절로 인한 막막함은 현대 삶 속에 배제되어 있지 않다. 홀로 생을 살아가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소외된 현대인의 삶에서 ‘사랑하기’는 살고자 하는 욕망과 자신의 결핍을 채우는 부단한 몸짓이다. 살기 위해서는 사랑해야 하고 또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때로는 그 살풋한 기억도 잊어야 한다. 그 기억이 만든 감옥에 갇히지 않기 위해서.

 

 

줄거리

그녀는 잘살고 있을까? 이젠 잊었을까? 죽은 건 아닐까? 버려진 신문을 주워 파는 ‘기억’은 첫사랑과 비슷한 할머니를 보자 이런 것들이 궁금하다. 할머니는 저녁이면 기차역에 우산을 들고 나와 말없이 누군가를 기다린다. 사랑의 취향은 혈액형만큼 변할 수 없는 것일까? ‘기억’은 첫사랑과 닮은 그녀를 보면 볼수록 점점 가슴이 두근거려 온다. ‘기억’이 지하철에서 신문을 줍는 사이 그녀는 역에서 사라지고 ‘기억’은 그녀를 찾아 나선다.

 

등장인물

아득 ─ 80대 할머니

기억 ─ 80대 할아버지

노숙자

아득의 남편

아득의 아들

아득의 며느리

 

장소

무대 오른쪽은 대합실, 왼쪽은 기차 안

 

 

 

1. 아득한 기억

 

기차 안에는 군복을 입은 아득의 남편이 좌석에 앉아 있다.

무거운 스웨터를 입고 스카프로 얼굴을 가린 아득, 우산을 들고 대합실을 서성이다 비틀거리며 종이박스 위로 쓰러진다.

박스 안에 누워 있던 노숙자, 박스 뚜껑을 열고 나와 아득을 긴 의자에 눕힌다.

 

노숙자   에이, 이 할망구가 내 갈비뼈 순서를 바꾸려고 작정을 했나! 집구석 놔두 고 꼭 내 침대 위에 엎어져.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 할망구, 입 벌려! 어서! 당 떨어져 죽고 싶어? 오늘 송장 치를 기분 아니야. 자, 사탕 입에 넣고 있어.

 

아득, 입에 사탕을 물고 눈을 감는다.

기억, 자루에 버려진 신문을 주워 담으며 등장한다. 아득을 미끄럼이 바라보다 깨끗한 신문 한 장을 꺼내 아득을 덮어 준다.

 

기억_   또 쓰러졌군. 야, 숙자야.

노숙자_   숙자?

기억_   네 이름 까먹었다며. 성은 노, 이름은 숙자. 이제 숙자라고 하자.

노숙자_   아무렇게나 불러. 불러 주는 사람도 없는 이름 어디 쓸 데도 없는데.

기억_   (신문을 내밀며) 이것 좀 읽어 봐.

노숙자_   詩는 시시해서 시라고 하는 거야. 이딴 걸 뭐 하러 읽어. 밥이 나와 떡이 나와. (투덜거리며) 기억.

기억_   왜?

노숙자_   뭐가?

기억_   나 불렀잖아.

노숙자_   언제?

기억_   지금 ‘기억’이라고 했잖아. 내 이름이 기억이라는 걸 어떻게 알았냐?

노숙자_   영감이 기억이면 난 니은이다. 시 제목이 기억이라고. 듣기나 해. 나 바쁜 사람이야. (빨리 대충 읽으며)

“기억. 한 사람이 떠났는데 서울이 텅 비었다. 일시에 세상이 흐린 화면으 로 바뀌었다.”1)문정희 詩, 「기억」 

 

노숙자, 신문을 읽다 말고 접는다.

 

기억_   (가방에서 두루마리 휴지를 꺼내 아득 머리 밑에 넣어 주며) 마저 읽어라.

노숙자_   (시치미)오늘 시는 짧네. 통 무슨 소린지. 시를 왜 읽어?

기억_   병원에 갈 돈도 없는데 부동산, 주식, 펀드 그런 기사 봐서 뭐 하겠어. 시를 읽으면 그래도 여기에 연고를 살짝 바른 것처럼 덜 아프고 덜 허전 해. (사이) 이 할망구 벌써 며칠째냐?

노숙자_   몰라. 저녁마다 나와서 누굴 기다리는지.

기억_   어제도 아들이 왔냐?

노숙자_   아들이 일 끝나면 열두 신가 봐. 찾으러 오는데 나한테 사탕을 주면서 신신당부하고 가는 거야. 쓰러지면 사탕 먹이라고. 이렇게 반송장처럼 있 다가 아들 오면 깨어나서 집에 가.

기억_   아직 말 안 해?

노숙자_   벙어린가?

 

노숙자, 아득이 귀에 대고 소리 지른다.

 

노숙자_   불이야! 불! 전쟁 났어! (아득 반응 없다) 귀가 먹었나?

기억_   아득이도 말 못했는데. 이 할망구 아득이랑 많이 닮았어.

노숙자_   아득이가 누군데?

기억_   내 색시…… 아니 색시가 될 뻔했는데…… 헤어졌어.

노숙자_   왜? 말 못해서?

기억_   말은 못해도 기분이 나면 새처럼 노래를 하고 슬프면 소처럼 울었어. 아직 도 꿈에서 아득이를 만나면 꿈에서도 ‘이게 생시야 꿈이야’ 이렇게 묻곤 해.

노숙자_   그런데 왜 헤어졌어? 기억 만날 땐 우연히 이유 없이 만나지만 헤어질 땐 필연처럼 다 이유가 있어.

 

아득, 몸을 뒤척인다.

기억, 아득이가 눈을 뜨자 가방에서 도시락을 꺼내 아득에게 권한다.

 

기억_   찬이 김밖에 없지만 한술 떠요. 사람은 밥알이 위에서 굴러다녀야 산다 우. 어서 같이 들어요. 물도 마시고.

 

아득, 물을 마시다가 손바닥에 뿌린다. 멍하니 바라보다가 도시락을 뺏듯이 들고 뒤돌아 앉는다. 밥을 손으로 주무른다.

 

기억_   손으로 밥 뭉개지 말고 숟가락으로 먹어요. 에이 (포기한 듯) 맘대로 하슈. 밥 한 숟가락만 남겨 주구려.

노숙자_   알도 없는 안경은 왜 쓰고 다녀, 모양내는 거야?

기억_   알이 깨졌어. 이번에 신문지 팔면 알 해서 넣어야지. 통 가까이 있는 건 보이질 않으니. 가까이 있는 것도 이렇게 멀리해야 보인단 말이야. 갓 태 어난 아기들 보면 천장에 매달아 놓은 거 있잖아. 애들은 그렇게 코앞에 갖다 놓고 보잖아. 젊을 때는 가까이 있는 게 보이지만 나이 들면 먼 것 이 더 잘 보여. 요즘은 이 할망구 보니까 멀리멀리 아주 멀리 두고 온 아 득이가 자꾸 꿈에 보여.

노숙자_   사궈, 사궈 봐.

기억_   사귈까? (미소) 이 나이에 사귀긴. 아득이 손은 통통한 별마냥 생겼었어. 손톱엔 항상 하얀 초승달이 떠 있었지. (아득의 손을 보며) 손톱이 반달 은커녕 돌멩이 다섯 개 박아 놓았네. 아이고, 손톱 봐. 손톱이 왜 이리 길 어. 집에 가서 손톱깎이 가져와야겠네. (손을 내려놓으며) 이제 사랑도 먼 사랑이 잘 보여.

노숙자_   잘 보이는 게 아니라 궁금한 거 아니야. 사랑도 빵처럼 갓 구운 바삭바삭 따끈한 사랑이 제일 맛있다구. 방금 만들어서 내 손 안에 있다 입안에 들 어간 빵이 제일 맛있는 거야. (입맛을 다시며) 갑자기 빵 먹고 싶네.

기억_   무명치마는 빛이 바랠수록 눈부신 법이다.

노숙자_   둘둘 말아 놓고 입지도 않은 무명치마를 펼치면 사랑이 나와?

털털 털면 먼지랑 그리움만 한 바가지 쏟아지지.

기억_   그럼 사랑이 먹고 싸면 없어지는 빵부스러기냐?

아득이랑 헤어지고 다른 여자들을 만나도 그 첫 느낌은 한 번뿐이야.

처음으로 손을 잡고, 처음으로 아득이 가슴이 내 가슴 위로…….

노숙자_   살도 섞었는데 왜 장가 안 갔어?

기억_   하얀 박꽃이 필 무렵이면 아낙들은 저녁밥을 지으러, 아이들과 남정네들은 저녁밥을 먹으러 집으로 가지. 모두가 집으로 돌아갈 때 우린 집에서 나와 복숭아밭에서 만났어. 그날은 아득이를 품에 안지 않으면 숨을 못 쉴 것 만 같았어. 아득이도 그랬나 봐. 해 그림자가 없어지기가 무섭게 우린 옷 고름을 풀고 저고리를 벗었어. 속치마가 흘러내리는데…….

노숙자_   내리는데…… 둘이 포갰어?

기억_   하얀 속치마를 벗은 흰 몸은 허물을 갓 벗은 흰 뱀보다 더 매끄러웠어. 흰 뱀 가슴에는 8월의 복숭아가 두 개 달려 있었지. 씻은 듯, 깎은 듯, 접 어 만든 꽃이 따로 없었어. 정신이 아찔해지는 거야.

노숙자_   히히, 허연 몸뚱이에 탱탱하면서 살짝 말랑말랑한 황도 같은 젖가슴…… 흐흐. 맛있겠다. 그 맛을 못 잊겠다 이거군. 벙어리를 안은 건지 흰 뱀한테 둘둘 감긴 건지 아찔했다 이 말씀?

기억_   거품을 품고 말았어. 하필 그때.

노숙자_   흰 뱀을 품에 안았는데 거품을? 누가? 그 흰 뱀이?

기억_   아니, 내가. 발작이 그때부터 생겼어. 벌거숭이가 된 나는 전신을 뒤틀고 짐승같이 신음을 하고. 아득이는 놀란 사슴마냥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두 짐승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노숙자_   에이, 맛 뚝 떨어지네. 하다 말았단 말이야?

기억_   하려고만 하면 거품을 품었어.

노숙자_   무슨 팔자가 그래. 개 거품 같은 팔자 다 보겠네.

기억_   병을 고치려고 무진 애를 썼는데 고치질 못했어. 무당이 병을 끌어안고 살 다 보면 괜찮다고 했는데 병을 고친다고 조선 팔도 다 돌아다니다가 집안 이 거덜이 났어. 어느 점쟁이는 아득이랑은 이번 생에서는 인연이 아니라는 거야. 두근거리고 거품을 품는 것도 아 득이 때문이래. 부모님 성화에 못 이겨 헤어지고 말았어. 그때 병 을 안고 살았으면 고칠 수 있었는데. 요즘은 병원에서 못 고치는 병이 없 잖아. 내 병도 돈만 있으면 고치는데. 이제 그 놈의 돈이 없어서 고치질 못하니. 지금은 돈이 만병통치약이야.

 

〈사랑이 지나가면〉2) 정훈희 데뷔 40주년 수록된 곡 참고 노래 흐른다.

아득, 밥을 주물럭거리다 주먹밥을 만들어 도시락에 담아 무표정하게 놓는다.

 

기억_   난 안 먹어도 되는데. 들어요. 숙자야, 먹자.

 

기억과 노숙자 주먹밥을 하나씩 들고 먹는다.

아득, 먹지 않고 긴 의자에 다시 눕는다.

 

기억_   밥이 너무 차갑소?

 

기억, 아득이 목에 걸린 이름표를 실눈으로 보다가 밥풀로 신문지 두 장을 이어 붙인다.

 

기억_   보여야 말이지. 밥이 차서 안 먹나.

노숙자_   계속해 봐. 그러니까 포개려고 하면 거품을 품는단 말이지? 그럼 아직 딱 지도 못 뗐어?

기억_   뗐어.

노숙자_   개 거품 문다며?

기억_   몸 파는 여자한테 가봤지. 괜찮은 거야. 그러다 병에 걸리고 말았지만.

노숙자_   에이, 팔자 한번 지랄 같네.

기억_   아득이는 군인한테 시집갔는데 죽었는지 살았는지…… 아득이가 간 후로는 이 가슴도 세상도 텅 비었어.

노숙자_   금세 아까 읽은 시 따라하네. 히히.

기억_   두근거리질 않아. 여기 심장에 있던 작은 북이 콩당콩당 울렸었는데. 가슴 에 자국이 질기게도 떠나지 않고 남아 있었어. 그것도 이젠 세월 앞에선 연해져. (사이) 숙자야, 이 할망구 말이다. 이상하게 볼수록 예쁘다. 그렇지 않냐?

노숙자_   눈깔에 거품 꼈어? 이 쭈그렁바가지가 어디가 예뻐? 뱀 허물 뒤집어쓴 몸에 터진 복숭아나 달려 있을까. 따먹어 봐.

이 할망구, 그나저나 이렇게 자빠져 있다 눈깔 빼가도 모르는데. 얼마 전 에는 노망든 할망구가 여기서 알짱거리다 세 놈한테 당했다고. 그 할망구 당하고도 당했는지도 모르고 히히덕거리고 갔어. (사이) 그런데 영감은 첫 사랑 보면 알아볼 수 있겠어?

기억_   글쎄…… 알아볼 것 같은데.

노숙자_   50년 넘게 지나면 아주 딴판으로 변하는 사람 많잖아.

기억_   오래 전에 헤어져도 아프게 하고 두근거리게 했던 사람은 척 보면 알지.

 

밥풀로 길게 붙인 신문을 아득에게 이불처럼 덮어 준다.

 

노숙자_   그 흰 뱀이 여기 지나가면 알아보겠어?

기억_   지금은 이 할망구처럼 늙었겠지. 아니면 땅 속에 누워 있던가.

노숙자_   못 알아볼걸. 영감 젊을 때 사진 가져와 봐.

기억_   사진은 뭐 하게?

노숙자_   그때랑 지금 얼굴이랑 비교해 보게.

기억_   (TV를 보며) 노래나 듣자. 뭐, 벌써 데뷔한 지 40년 됐어. 그럼 몇 살이 야? 환갑은 훌렁 줄넘기 넘었네. 목소리는 여전해. 얼굴은 짜글짜글해도 목소리엔 주름이 안 갔어.

노숙자_   세월 참 빨라. 저 여자가 저렇게 늙다니. 나 어렸을 때도 나왔는데. 세월 고장도 안 나. 고장 안 나는 시계나 사람 봤어? 세월은 고장도 안 나고 정 확히 잘도 흐른다.

기억_   흐르는 건 세월이 아니야. 가는 것도 오는 것도 아닌 세월. 세월은 기차역 처럼 바위처럼 서 있어. 세월은 물 흐르듯 그런 것이 아니야.

노숙자_   어이 야매 시인 양반. 세월이 뭐 기차역? 바위?

기억_   그냥 있는 것인데. 달라지는 것은 그 지나가는 것들이지.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고기떼처럼, 달리는 기차처럼. 고속열차처럼 휙 눈 깜짝할 사이에 기억도 못할 만큼 한 움큼 시간만 안고 지나가고.

노숙자_   나처럼 여기 바위처럼 누워 있는 건 뭐야?

기억_   바위처럼 박혀 있다 밥때 되면 배급받으러 가는 놈이 있어야 밥 퍼주고 뿌듯해하는 사람이 생기지 (일어나며) 가자.

노숙자_   어디 가?

기억_   퇴근시간이야. 지하철 한 바퀴 휙 돌아야지. 집에도 잠깐 갔다 와야지. 흘러흘러 또 가보자. 남이 버리면 줍고, 주워서 팔면 돈이 되고. 돈이 있어 야 밥통에 밥알이 흐른다.

노숙자_   밥 배급 시간 됐네.

 

기억과 노숙자 퇴장한다.

조명 어두워진다.

 

 

2. 꿈의 대화

 

새소리와 함께 조명 들어온다.

군복에 얼굴 전체를 붕대로 감은 아득의 남편이 기차 좌석에서 일어나 대합실로 나온다.

의자에 누워 있는 아득을 흔들어 깨운다.

 

군인_   나 왔어.

아득_   …….

군인_   집에 가서 자.

아득_   배고프죠?

군인_   …….

아득_   얼굴이 많이 상했어요. 월남에서 보내 준 돈은 잘 모아 뒀어요. 엊그제도 9만 원 왔어요.

군인_   …….

아득_   거기가 그렇게 덥다면서요. 그냥 불볕이 얼굴에 와 떨어지는 것 같다고 하 던데. 얼굴이 불볕에 데었어요? 왜 그래요?

군인_   비행기가 지나가면서 약을 뿌렸어. 얼굴이 자꾸 녹아내려. 이제 나오지 마.

아득_   이번이 마지막인지도 몰라요.

군인_   당신 옆에 저승사자가 서 있군.

아득_   눈을 감으면 저승이고 눈을 뜨면 이승이에요. 이 세상 것이 잘 안 보여요. 눈을 떠도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아요.

군인_   당신 머리칼도 다 떨어졌군.

아득_   하나는 이승으로 하나는 당신 곁에 떨어져요. 산 것 같지도 않은데 벌써 다 살았나 봐요.

군인_   아픈데 왜 나와서 기다려.

아득_   기다리다 보면 오겠지 했어요. 그러다 이렇게 늙어버렸네요. 자, 우산 받 아요.

군인_   나오지 마.

아득_   큰 애가 이사했어요. 집 모르잖아요.

군인_   귀신이 번지 들고 제삿밥 먹으러 다녀?

아득_   그래도……. 모두 싹 바뀌었어요. 골목길도 없어지고 전봇대도 다 없어졌 어요. 대문에 붙어 있던 문패도 없다구요. 큰 애 낳고 마당에 심었던 감나 무도 베어버렸어요. 다 부수고 쓸어내고 버리고 날마다 아파트 짓는다고 난리에요. 개들은 짖지도 않아요. 비 많이 와요. 아랫목에 따뜻한 밥 묻어 놨어요. 밥 식어요. 어서 가요.

 

군인, 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 머리에 댄다.

 

아득_   아, 안 돼요! 여보! 우리 애들은 어떡해요! 쏘면 안 돼! 죽으면 안 돼! 이렇 게 기다렸는데 이렇게!

 

군인, 자신을 쏜 후 아득을 겨냥한다.

아득, 총부리에 가까이 다가간다. 군인, 총을 쏜다.

 

아득_   …….

 

아득, 비명도 없이 누웠던 의자에 쓰러진다.

남편, 기차 안으로 걸어가 앉는다.

조명 어두워진다.

 

 

3. 그 다음 역

 

기차소리와 함께 조명 서서히 들어온다.

아득의 아들과 며느리, 매표소에서 기차표를 사서 아득에게 다가온다.

 

며느리_   오늘은 꼭 약속 지켜.

아들_   …….

며느리_   매일 이렇게 살 수 없잖아. 어머니 때문에 싸우는 것도 지쳤어. 어서 깨워.

아들_   어머니를 보면 뭐가 제일 마음 아픈지 알아?

며느리_   아픈 거투성이야. 우리를 항상 죄인으로 만들잖아.

아들_   어머니는 혼자 거리에서 붕어빵 장사를 하면서도 그 흔한 말싸움 한 번 할 수 없었어. 단속반들이 니어커를 부술 때도 붕어빵 먹고 돈 안 내고 튀는 놈들한테도 욕 한 번 하지 못했어. 내 소원이 뭔지 알아? 엄마가 세상에 대고 욕 한 번 하는 거야.

며느리_   대신 당신이 욕 많이 하잖아. 기차 시간 됐어.

 

아들, 아득을 흔들어 깨운다.

아득, 멍하게 바라본다.

아들, 수화로 아득에게 말한다.

 

아들_   엄마, 오늘은 집에 안 가요. 기차 타고 멀리 가요.

며느리_   수화도 잊었어.

아들_   가끔은 알아들으셔. 엄마, 막내 녀석이 취직이 됐어요. 대학 졸업하고 삼 년 동안 놀다가 오늘에서야 취직됐어요. 아들놈이 취직됐는데 이렇게 마음 이…….

 

아들, 말을 잇지 못하고 아득의 이름표를 떼어버린다.

아득, 아들 내외를 따라 기차에 오른다.

노숙자, 등장한다. 노숙자, 떨어져 있는 이름표를 줍는다.

 

노숙자_   (이름표를 보며) 할망구 이걸 놓고 어디 갔어. 이름이 (사이) 뭐라고 쓴 거 야. 이아…… 득! 흰 뱀! 히히 뭐, 먼 사랑만 보여. 가까이 있어도 정말 못 보는구나. 안경알 맞추면 제일 먼저 이거 보라고 해야지. 눈알을 새로 껴놓은 것같이 세상이 확 달라 보일 거야. 히히.

 

비에 젖은 기억, 신문 자루를 들고 피곤한 얼굴로 등장한다.

 

기억_   할망구 어디 갔냐?

노숙자_   글쎄, 복숭아밭에 갔나?

기억_   헛소리 말고. 못 봤어?

노숙자_   늦었어. 야매 시인이 한 발 늦었어. 좀 일찍 오지.

기억_   퇴근시간에 지하철에 사람이 터지게 많았어. 집에 가서 손톱깎이랑 사진 갖고 오다가 내리지 못하고 지나쳤어.

노숙자_   할망구 당했어. 끌려갔어.

기억_   (손에 든 자루를 떨어뜨리며) 뭐! 너 가만 보고만 있었어. 어떤 놈들이?

노숙자_   히히 좋아하네, 확실히 좋아해. 거짓말인데.

기억_   빌어먹을 자식!

노숙자_    빌어먹은 지 이미 수십 년 됐슈다. (냄새를 맡으며) 이거 무슨 냄새지…… 붕어빵 냄새 같은데.

 

노숙자, 코를 기억의 가방에 댄다. 기억, 옆으로 슬그머니 피한다.

 

노숙자_   가방 안에 있는 빵이 갑갑하다고 하네. 우리 빵 세상구경 시켜 줍시다.

기억_   안 돼.

노숙자_   밤새 할망구 지키기도 귀찮고. (이름표에 붙은 쪽지를 읽으며) ‘이 노인은 당뇨가 있는 치매 환자입니다. 쓰러지면 사탕을 먹여 주세요.’ 할망구는 내 가 사탕 주면 먹지 다른 사람이 주면 절대 안 먹어. 영감이 줘도 안 먹 잖아.

기억_   에이, 요즘 물가가 산꼭대기에 올라가 있어. 붕어빵 천 원에 몇 개 안 줘.

노숙자_   신문지 팔잖아. 하나만 내놔. 싫으면 말구.

 

기억, 봉투에서 붕어빵을 꺼내 크기를 비교하며 작은 것을 노숙자에게 준다.

 

기억_   지금 막 나온 거야.

노숙자_   (먹으며) 따끈따끈 바삭바삭. 영감도 맛있을 때 먹어.

기억_   됐어. 할망구가 지금 먹으면 좋겠는데. 아까 밥이 차가워서 안 먹었나?

노숙자_   그거 할망구 주게 나한테 맡겨.

기억_   다람쥐한테 도토리를 맡기지. 식기 전에 찾아봐야겠다.

 

기억, 일어나 아득을 찾는다. 기억, 걷다가 식은땀을 흘리며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

 

노숙자_   어이, 야매 시인, 정신 차려. 눈 떠 봐!

기억_   (힘없이) 가방에 사탕.

 

노숙자, 가방에서 지팡이 모양의 사탕을 꺼낸다.

 

노숙자_   이거밖에 없는데.

기억_   아니, 그건 할망구 꺼야. 사탕이 없으면…….

노숙자_   영감도 당뇨야?

기억_   (끄덕)…….

 

노숙자, 지팡이 모양의 사탕을 조금 잘라서 기억의 입에 넣어 준다.

 

기억_   (미소, 끄덕)……빵은?

노숙자_   안 먹었어. 먹을래.

기억_   아니, 아득이가 빵을 좋아했어.

노숙자_   아득이? 많이 듣던 이름인데. 할망구가 이름표를 놓고 갔어. 영감이 갖고 있다 줘.

기억_   (이름표를 받아 가까이 보다 멀리 보다 하며) 안경알을 맞춰야지. 내 가방 에 넣어 둬. 가방에 있는 지팡이 같은 사탕 꺼내 봐.

노숙자_   (가방을 뒤지며) 이건 손톱깎이…….

 

노숙자, 가방에서 기억의 사진과 사탕을 꺼내 사탕을 위아래로 돌리며 사진을 본다.

 

노숙자_   이거 누구 사진이야

기억_   왜? 나 안 닮았냐?

노숙자_   이게 영감이야! 지금하곤 영 딴판인데.

기억_   사탕 부러지면 안 돼. 할망구 오면 그거 두 개 꼭 줘. 이렇게 해서 (지팡이 모양 사탕을 서로 마주보게 한다. 사탕 모양이 하트가 된다) 이거 여기가 좀 짧다.

노숙자_   한 조각은 영감 입 속에 있잖아.

기억_   에이, 빌어먹고 있는 놈 같으니! 자르지 말라고 했잖아!

노숙자_   그럼, 이 뭐시냐 사랑 때문에 죽으려고? 사랑도 목숨이 붙어 있어야 할 수 있는 거야. 붕어빵 먹어. 빨리 정신줄이나 잡어.

 

기억, 입안에 있던 사탕 조각을 꺼냈다가 다시 입에 넣는다. 붕어빵을 먹는다.

 

기억_   가방에 천 원 있어. 그걸로 따뜻한 호빵 하나 사와. 팥 들어간 걸로. 따끈 한 걸로.

노숙자_   지금 사다 줄까?

기억_   아니, 지금 말고 이따, 할망구 오면 사와.

노숙자_   가슴팍에 개 거품이 생겼군.

기억_   그래, 심장에 콩당콩당 작은 북이 들어가 있는 것 같아. 박꽃 필 때 아득 이를 만나러 갈 때처럼. 두근두근. 심장이 따끈하게 데워져.

노숙자_   따끈한 빵으로 하나 사오라 이거지.

기억_   그래, 따끈한 빵이 찌그러져도 맛은 있잖아.

 

노숙자, 가방에서 천 원과 손톱깎이를 꺼낸다. 신문을 펴고 손톱을 깎는다.

기차 안 좌석에 앉은 아들, 아득의 손톱을 본다.

 

아들_   (아내에게) 당신 손톱깎이 있어?

며느리_   왜?

아들_   어머니 손톱이 길어서. 바빠서 깎아 드리지 못했네.

며느리_   (손톱깎이를 찾으며) 이런 데서 손톱 깎으면 사람들 싫어하는데……. 어딨 지? 여깄네. 요양원에서 안 해줄까 봐. 돈 주면 뭐든지 다 해줘.

아들_   마지막으로 깎아 드리고 싶어.

 

아들, 아득의 손톱을 깎아 준다. 아들의 어깨가 들썩인다.

 

노숙자_   야매 시인, 아플 때 시 들으면 덜 아프다고 했지. 오늘은 내가 싸비스로 읽어 준다. 잘 들어.

 

노숙자, 신문에 실린 시를 읽는다.

〈꽃밭에서〉3) 안형수 기타 연주곡, 〈꽃밭에서〉  연주곡 흐른다.

시를 읽는 동안 아득의 남편은 얼굴의 붕대를 서서히 풀고 아득은 무거운 스웨터를 허물 벗듯 벗는다. 얼굴을 덮었던 스카프로 머리를 단아하게 묶은 아득의 모습과 상처 없는 남편의 얼굴은 박꽃이 필 무렵으로 돌아간 듯 꽃답다.

 

 

「손톱」

 

문정희

 

 

 

지는 저녁 해를 마주하고 앉아

팔순 어머니의 손톱을 자른다.

벌써 하얀 반달이 떠오르는 어머니의 손톱을 자르면

세상의 바람소리도 모두 잘리어 나간다

어쩌면 이쯤에서 한쪽 반달은 이승으로 떨어지고

또 한쪽은 어머니 따라 하늘로 가리

시시각각으로 강물은 깊어 가는데

이제 작은 짐승처럼

외로운 어머니의 등

은비늘처럼 부드러운 어머니의 손톱이 피울

저 먼 나라의 꽃은 무슨 색일까?

무슨 꽃이 어머니의 꽃밭에 피어나

날마다 그녀가 주는 물에 나처럼 가슴이 젖을까

흔들리며 흔들리며

팔순 어머니의 손톱을 자른다.

 

아득, 자리에서 일어나 남편 옆자리로 가서 앉는다.

노부부의 대화는 아들 내외에게 들리지 않는다.

 

아득_   애들이 사는 데 바빠서 오늘 당신 오는지도 모르네요.

아들_   오늘이 며칠이지?

며느리_   참! 아버님 제삿날!

아들_   (어깨에 있던 공기가 다 빠져나갈 만큼의 한숨)…….

아득_   손자가 취직됐어요.

남편_   잘 됐군. 어디 가는 게야?

아득_   취직이 되면 날 요양원에 보내기로 했대요. 우리 아들도 불쌍해요. 새끼들 학비 대느라 고생했는데. 학비 끝나기 바쁘게 어미 요양비 대랴…… 안됐 어요.

남편_   요양원보다 내 품이 낫지 않아.

 

아득, 곁에 있어도 그리운 남편의 어깨에 기댄다.

기억, 사탕을 꺼내 하트 모양을 만들어 보인다.

 

기억_   할망구 오면 내 사진 보여줘야지. (설레며) 오늘은 농 좀 걸어 보고 고 향하고 이름도 물어 봐야지.

노숙자_   그럼 흰 뱀은?

기억_   다음 역에서나 아님 그 다음 역에서나 만날까.

노숙자_   할망구랑 유치하게 잘 해봐.

기억_   유치? 그래, 사랑이 유치하지. 유치해야 유지도 되는 거야.

 

긴 사탕을 조금 잘라 짧은 사탕의 길이와 맞춰 본다. 자른 사탕 조각을 입에 넣는다. 사탕은 완전한 하트 모양이 된다.

 

기억_   줍자. 주워야 돈을 벌고, 벌어야 사랑도 하고 (사이) 사랑을 해야 살맛도 나지.

 

아득과 남편, 기차에서 내려 꽃무늬 양산을 펴고 꽃밭으로 떠난다.

기억, 〈꽃밭에서〉를 흥얼거리며 다음 역으로 향한다.

 

 

《문장웹진 10월호》

 

 

 

창작 노트
  
 
 
하나의 질문에 서로 다른 답을 할 때 발생하는 갈등은 연극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다. 이 작품에는 갈등이 없다. 이는 연극의 관습에 위배된다. 연극의 관습은 삶의 관습이기도 하다. 연극의 관습을 거역하는 일은 곧 삶의 관습을 거역하는 일이다. 갈등 없는 삶, 단절된 관계가 연극이, 혹은 삶이 될 수 있을까?
 
사실, 현실에서 사람들은 항상, 서로를 죽이거나 사랑을 고백하거나 하지 않는다. 분명한 것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대부분 시간을 돈을 벌고 쓰는 일에 할애하고 습관처럼 반복되는 일상적 대화를 하다 보면 달력은 다 뜯어지고 만다. 싸움은 가끔 있을 뿐이다.
 
싸움에서 오는 분노, 절망감보다 관계의 단절로 인한 막막함은 현대 삶 속에 배제되어 있지 않다. 홀로 생을 살아가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소외된 현대인의 삶에서 ‘사랑하기’는 살고자 하는 욕망과 자신의 결핍을 채우는 부단한 몸짓이다. 살기 위해서는 사랑해야 하고 또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때로는 그 살풋한 기억도 잊어야 한다. 그 기억이 만든 감옥에 갇히지 않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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