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눈사람 – 자끄 혹은 잔느에게

[기획/특집]

겨울에 쓰는 여름 이야기

여름 눈사람

– 자끄 혹은 잔느에게

김태용

죽음

 

– 자끄 드뉘망(?~2010)

 

 

어려운 말은 하지 않겠다
다리 아래를 쳐다보지 않겠다
목의 치수를 재지 않겠다
혀를 굴리지 않겠다
너는 떠났고
너 때문이 아니라
j로 시작하는 모든 단어가 사라졌다

겨울 식탁 아래 겨울 식탁보가 깔려 있다. 플라스틱 눈사람이 문 앞에 떨어져 있다. 자끄는 문을 걸어 잠그고 쥘 르나르의 일기(journal)를 노트에 베껴 쓰고 있다. 4월 8일 그 다음엔 11월 1일 그리고 다시 4월 8일. 그러니까 날짜만 쓰고 있는 것이다. 간혹 벼락 맞은 오리나무, 또는 벼락 맞은 오리와 나무, 라고 썼다가 지운다. 쥘 르나르. 발음해 본다. 쥘 쉬페르비엘. 이것 또 발음해 본다. 13월 64일. 자끄는 소학교 시절 자신의 일기를 떠올려 본다. 13월 64일. 날씨 없음. 나는 죽어 가는 나를 보고 있었다. 다음 날 선생님의 매질. 아이들의 웃음. 종소리. 누군가 가방 단추를 빼버렸고 구두 한 짝을 변기통에 던져 버렸다. 13월 65일. 거울이 깨졌고 나는 여전히 살아 있는 나를 보고 있었다. 왜 모든 일기는 과거형이어야 할까. 자끄는 더 이상 일기를 쓰지 않는다. 모두 과거의 일일 뿐이다.
잔느는 창문을 열어 놓고 눈을 기다리고 있다. 작년엔 눈이 많이 왔지. 기억 속에서 눈사람이 녹아내리고 있어. 나의 얼어붙은 눈사람. 눈사람이 기다리는 것은 빛(jour)일지도 몰라. 잔느는 중얼거린다. 겨울 식탁 위에 놓인 겨울 냄비 안에서 겨울 치즈가 녹아내리고 있다. 얼어붙는 것과 녹아내리는 것. 한 번 더 말해도 좋은 문장이다. 얼어붙는 것과 녹아내리는 것. 어떤 시간은 얼어붙고 어떤 시간은 녹아내린다. 잔느는 생각한다. 아니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야. 얼어붙는 동시에 녹아내리는 시간만 가능할 뿐이야. 이 문장의 비등점을 확인할 수만 있다면. 왜 모든 독백은 가정법이어야 할까.
언제 우리 다시 한 번 왜가리 해변에 가자. 그런 마음으로 문에 노크를 한다. 한 번 두 번 세 번. 다시 한 번. 문 저편에서 무언가 딱딱한 것을 집어던지는 소리가 들린다. 플라스틱 눈사람일 것이다. 눈사람의 목이 부러졌을 것이다. 눈사람의 목이 있단 말인가. 눈사람의 목은 이미 녹아내렸다. 물러선다. 이쯤에서 물러서야 한다. 나의 불법체류기한은 이미 초과되었다.
자끄와 잔느를 만나 것은 여름이었다. 왜가리 호수로 가는 기차에서 빠롱을 마셨다. 빠롱 받침으로 보토 슈트라우스의 『커플들, 행인들』을 사용했다. 멀미와 구토가 일었다. 창밖의 왜가리를 보았다. 왜가리 호수가 멀지 않았다. 왜가리 호수에는 왜가리가 없었다. 대신 자끄와 잔느가 있었다. 호수 옆 쓰레기통에 얼굴을 박고 구토를 하고 있을 때였다. 괜찮아 동양인, 하고 자끄 혹은 잔느가 물었다. 둘은 커다란 배낭을 메고 있었다. 여름이었지만 때에 전 점퍼를 걸치고 신발은 진흙으로 범벅이었다. 피로와 몽롱함이 표정에 달라붙어 있었다. 자끄는 노란 턱수염을 기르고 있었고 잔느의 입술은 보라색이었다. 둘은 여행을 떠나 이제 막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나는 서툰 언어로, 아니 거의 말더듬이의 손동작으로 불법체류를 도와줄 친구를 찾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왜가리 호수 옆 상점에서 팔고 있는 왜가리 사진을 보고 있을 때 자끄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왜가리 해변으로 가자. 왜가리 호수 뒤 언덕을 넘으면 왜가리 해변이라고 했다. 구두가 발목을 조여 왔다. 나의 걸음이 뒤처지자 자끄가 자신의 운동화를 벗겨 바꿔 신자고 했다. 거절할 수 없어 운동화에 발을 집어넣었다. 모래가 잔느뜩 들어 있었다. 다시 벗으려 하자 그러지 말라고 했다. 잔느 역시 그러지 말라고 했다. 처음에는 불편했지만 걸을수록 편했다. 모래 속에 발이 빠지고 있었다. 자끄는 나의 구두를 구겨 신고 걸었다. 간혹 춤을 추듯 이상한 걸음걸이를 했는데 어떤 배우의 흉내를 내는 것 같았다. 잔느가 웃으며 말했다. 자끄 타티의 영화를 말하는 것 같았다. 우체국 유리창에 커다랗게 파업이라고 쓰여 있었다. 잔느는 자끄가 시를 쓴다고 말했다. 난 더 이상 시를 쓰지 않아. 자끄가 미간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에게 고함을 치는 것 같았다. 나도 고국에 시인 친구들이 있다고 말했다. 나는 사우쓰코리아 대신 노오쓰코리아라고 말했다. 왜가리 해변에 도착하자 자끄와 잔느는 옷을 벗었다. 자끄의 음경은 두 시 방향으로 휘어져 있었고, 잔느의 음모는 노란색이었다. 벌거벗은 채로 바다로 뛰어 들었다. 누군가의 맨엉덩이를 보는 것이 정말 오랜만이었다. 둘의 옷을 가지런히 개서 모래 위에 얹어 놓았다. 자끄와 잔느가 물장난을 쳤다. 운동화를 벗어 털고 새 모래를 넣었다. 자끄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티에요온. 잔느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요온티에. 운동화만 벗고 옷을 입은 채 바다로 들어갔다. 자끄와 잔느가 나의 옷을 벗기려 했다. 이미 젖었다고 말했다. 둘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누가 더 잠수를 오래 하나 시합을 했다. 물 밖으로 머리를 내밀자 자끄와 잔느가 잇몸이 보이도록 웃었다. 웃음 소리가 왜가리, 왜가리, 하고 들렸다. 자끄가 나의 이마에 잔느가 나의 볼에 입을 맞췄다. 자끄와 잔느가 양쪽에서 나의 팔짱을 끼며 사우쓰노오쓰, 라고 말했다. 파도 위를 날아다니는 왜가리의 비행곡선을 떠올렸다. 해변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았다. 코냑 위의 크림. 너는 크림을 핥고 나는 코냑을 마시지. 그 반대라도 상관없지. 노래를 하듯 자끄가 말했다. 몸의 물이 마르자 일어났다. 잔느가 이번에는 자신의 신발과 바꿔 신자고 해서 그렇게 했다. 발에 꼭 맞았다. 올 겨울에는 눈이 많이 온대. 자끄 혹은 잔느가 말했다. 우체국 유리창에 쓰여 있는 파업이라는 글자에 X 표시가 되어 있었다. 걸을 때마다 젖은 옷에서 한두 방울 물이 떨어졌다. 감기가 오려는지 몸이 떨려 왔다. 손톱에 모래가 껴 있었다. 이제 모든 게 새롭게 시작될 거라는 불확실한 믿음이 자라났다. 자끄를 믿고 잔느를 믿었다. 그해 여름 나는 자끄와 잔느의 눈사람이 되었다.

 

《문장웹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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