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피의 보편성-편혜영, 『재와 빨강』(창비, 2010)

[기획/특집] 시와 소설로 보는 2010년 명장면들

죄와 피의 보편성

– 편혜영의 『재와 빨강』(창비, 2010)

조형래

『재와 빨강』의 주인공은 불운했다. 그는 본래 전염병과 지진이 내습한 C국에 있지 않아도 될 인간이었다. 그가 C국에서의 재앙과 직면하게 된 데는 그 어떤 합리적인 이유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파견은 남들보다 쥐를 잘 잡는다는, 말도 안 되는 근거에서 결정된 것이었으며 후에 밝혀지듯이 그의 파견 자체 역시 전적으로 본사 담당자의 실수에 의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C국에서 그가 막다른 처지에 내몰리게 되는 것 또한 예기치 않은 불운의 연속 탓이다. 이를테면 그는 감염 여부가 불분명한데도 억류되어 본사에 정상적으로 출근하지 못할뿐더러 또 잠깐의 실수로 트렁크를 잃어버려 물품 상당수를 분실하게 된다. 또한 그의 파견 자체가 착오에서 비롯된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예정에 없던 휴가로 무위의 나날을 보내게 되며, 무엇보다도 방문을 두드리는 자들이 그를 체포하러 온 형사라는 그 어떠한 확증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그의 이름을 정확히 발음했다는 데서 연유한 불안에 찬 심증만으로 쓰레기 더미에 투신한다.
알다시피 그것은 이후 그의 운명을 가름하는 결정적인 분기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바처럼 그러한 연이은 불운이 꼭 그 자신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진정한 아이러니가 있다. 쓰레기 그리고 그 쓰레기와 같은 삶은 도처에 널려 있으며 공원 내에 거주하는 다른 사람들을 좀처럼 구별할 수 없었던 것처럼 그 자신 또한 그들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존재가 되고 있다. 이와 같은 쓰레기적 삶의 익명성이란 비단 그 자신만의 전유물 내지는 운명적인 것이 아닌 것이다. 쓰레기로 전락한다는 사실에는 그 어떤 필연성도 작용하지 않으며 대상을 특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것은 불편부당하고 무차별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쓰레기의 식별 불가능성으로부터 근본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 이는 그 어디에도 없다고 해도 좋다. 마치 제아무리 방역복을 착용하고 위생에 신경을 쓴다고 해도 전염병에 감염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쓰레기의 존재를 간과하거나 신경 쓰고 있지 않다고 해도 사람들이 여전히 쓰레기를 배출하고 있는 이상 그 누군가가 쓰레기로 전락할 잠재적인 가능성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다. 바꾸어 말하면 이러한 불운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도래할 수 있는 불특정 다수의 것이다. 누구나 이러한 불운의 대상으로 간택될 수 있다는 것만이 유일무이한 필연성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가 희생자가 된 것이 도리어 우연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태를 절박하게 실감하고 있는 이는 오직 그 자신뿐, 이외의 모든 이들은 그러한 궁지에 처한 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완전히 무심하거나 무감각하다. 쓰레기로 전락하기 이전의 그처럼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그러한 불운이 자신을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공평무사한 가능성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삶을 영위하고 있다. 그리고 소독약과 방역복, 아파트나 회사 등의 건물 그리고 쓰레기를 태운 재 등은 그것을 (마치 효율적으로 관리되고 있는 것처럼) 불투명한 것으로 은폐한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위안에 지나지 않는다. 불운이 나를 포함한 누군가를 급습할 가능성은 어디에나 있다. 마치 자신이 배출한 쓰레기 및 그것을 태운 재처럼, 도처에 퍼져 있으나 아직은 자신의 문제가 아닌 한에서 항상 잠재적인 위험인 채로 남아 있는 전염병의 존재처럼.
그렇다면 그는 잘못해서 쓰레기가 된 것이 아니다. 도리어 쓰레기가 되었다는 것이 잘못된 것으로 오직 그 자신에게만 실감된다는 사태가 문제적인 것은 아닐까. 이러한 질문과 대면한 우리는 이 모든 파국의 원인이 그가 다름 아닌 살인자로 판명된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 주목하게 되겠지만, 그것보다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다름 아닌 그와 같은 우연적 계기란 자신의 내부에도 잠복하고 있었다는 진실 말이다. 말하자면 그 자신의 예측 불가능한 리비도 역시도 그러한 불운의 엄연한 일부를 이룬다. 이를테면 그는 C국에서의 새로운 생활에 대해 (그것이 순탄할 리 만무함에도 불구하고) 근거 없는 기대를 품었던 적이 있었다. 트렁크에 들었던 물건들은 분실 후 돌이켜 보니 그리 요긴한 것들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굳이 그것들을 챙겨왔으며 또 트렁크를 필사적으로 끌고 다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감기약을 구하러 약국을 찾았다가 정작 충동적으로 살충제와 쥐약을 손에 넣게 되며 그 결과 강도를 만나게 된다. 결정적으로 그는 자신의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채 유진에게 전화하고 쓰레기 더미에 투신하거나 병에 걸린 동료 부랑자를 보디백에 담아 소각로에 던져 버리거나 하는 것이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쥐를 잡고 있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 그는 자기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또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면서도 언제나 돌발적인 계기에 의해 앞서 열거한 뭔가를 하고 있으며 그것은 대개 예측하지 못했던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그가 애초 의식했던 목표들은 대개 그 표적을 잃어버리고 도중에 지리멸렬해지기 일쑤다. 도리어 파국의 잠재적인 가능성은 그 자신의 불가해한 행위에 의해 구체적으로 현행화되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그는 매 순간 자발적으로 (외부적 계기인 동시에 자기의 일부이기도 한) 그러한 우연적 계기들에 스스로를 의탁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셈이다. 요컨대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하는" 자다.
다만 예기치 않은 파국에 직면할 때마다 그는 자신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어떤 목적이나 이유가 있어서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 그 사실 하나로 인해 한사코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것이다. 요컨대 생존 그 자체만이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될 유일한 이유가 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그로 하여금 이미 결정되어 버린 모든 사태를 사후적으로 정당화하도록 하며 그것에 장애가 되는 모든 것을 망각하게끔 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그 어떤 극한 상황에도 적응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부랑자, 지하생활자, 방역원 등으로서의 모든 삶을 기꺼이 수긍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리비도 역시 어디를 향할지 전혀 예측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다분히 돌발적인 계기로서 작용한다. 이 살아남고자 하는 순수한 충동 앞에서 일체는 무효다. 이 점에서 그는 어떤 극한 상황에서도 살아남는 쥐와 같은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그 '살고자 하는 바'가 쥐를 잡아 죽이고자 하는 부단한 살의로 전도된다는 것은 지극히 역설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존이 유일하게 지향하는 바는 바로 이것이며 쥐에 대한 살의 및 그 능력으로 말미암아 그는 C국의 폐허 이후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야말로 그를 다른 이들과 구별하는 결정적인 지표다. 부랑자로 그리고 방역원으로 살아가면서 그는 쥐를 잡고 있다. 알다시피 그것은 쓰레기로 전락한 그에게 살아 있다는 사실에 관한 원초적인 실감을 선사하는 유일무이한 행위였을 뿐 아니라 방역원으로서의 삶을 가능하게 했던 그 자신만의 온전한 재능이었다. 그러나 그가 쥐를 잡지 않을 수 없었던 일차적인 원인은 어디까지나 자신을 그와 같은 궁지로 내몬 세계의 모든 불가사의한 적의(敵意)에 대한 분노와 원한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것은 마치 정글 속에서 원숭이들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있던 바로 그 순간 한 원숭이의 꼬리를 잡아 물어뜯지 않을 수 없었던 충동적인 행위처럼 외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바로 이 쥐를 잡는 행위로부터 이 모든 것은 근본적인 차원에서 전도된다. 예를 들어 불시에 자신을 급습하는 원숭이와도 같은 세계의 적의란 (앞서 언급한 바처럼, 그리고 그 자신도 명확히 시인하고 있다시피) 실상 그 자신의 방향을 상실한 리비도에 의해 초래된 것이라는 사실은 무엇보다도 그의 신체에 증상으로 깊이 아로새겨져 있다. 그러므로 그가 모든 사태의 원인을 연이은 불운으로 돌리고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뭔가를 결행하지 않았다면, 또한 막연히 자신의 죄를 의식하면서도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계속해서 쥐를 잡지 않았다면, 그는 칼자루의 익숙한 감촉, 즉 그 자신이 전처의 부정을 알고 격분한 나머지 그녀를 살해했다는 진실과 필연적으로 대면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자기기만은 알다시피 정작 그가 본국에서의 삶 전반에서 일상적으로 반복해 왔던 것이었으며, 그 결과 그는 동료들과 불화해 왔고 원숭이에게 모든 것을 빼앗겼으며 결정적으로 아내와 이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C국에서 경험하는 파국이란 사실상 본국에서의 삶 그것 자체의 연장(延長)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도리어 보편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진실과 마주하여 더 이상 회피하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바로 그 순간 그는 (자신이 느끼기에는 엉겁결에 우발적으로 그리고 마지못해) 살인을 저지르는 것이다. 실제로 전처가 과거 유진과 부정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또는 우연히 만나게 된 여성이 그가 잡은 쥐의 숫자를 속여 돈을 벌고 있다는 사실을 그에게 확인시킬 때 그는 마치 쥐를 잡거나 원숭이의 꼬리를 물어뜯을 때처럼 그 누군가를 죽이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C국에 오게 된 것은 본국에서 자신의 실책으로 말미암아 이미 수습하기 어렵게 된 삶 그리고 무엇보다도 살인이라는 죄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그 스스로 원했던 결과일 터이다. 바꾸어 말해서 이미 C국으로 출국하는 것을 기꺼워하기 시작했던 그 어떤 순간부터 사실 그는 이미 이 모든 사태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초래되었다는 사실을 절실히 체감하고 오히려 그 파국적 현실로부터 애써 눈을 돌리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잘못된 삶을 수습하기 위한 이 모든 알리바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시금 살인이라는 자신의 본성적 측면으로부터 결코 도망치지 못한다. 오히려 전처를 죽였다는 사실은 한사코 쥐를 잡고자 했던 살의로 잔존하며 끝내 여자를 살해하는 결과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 회피할 수 없는 사실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을 뿐이었던 그 자신의 애초의 소망을 결코 이루지 못할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오직 그 자신만의 불운이며 고독일까. 실상 자기 것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원숭이의 꼬리를 물어뜯는 그와 같은 존재란 도처에 상존하고 있지 않은가. 이를테면 그의 파견을 질시하는 동료들, 아내를 빼앗아갔던 유진, 그의 호소를 외면하는 경비원이라는 이름의 존재들, 그를 습격하여 살충제와 쥐약을 약탈했던 그 누군가, 감염된 부랑자를 보디백에 넣어 불태우고자 했던 다수의 부랑자들, 몇 푼의 돈을 탐해 그를 밀고했던 노인, 그 누구보다도 그의 이름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몰과 관련되어 있는 존재임을 부인했던 사내, 그리고 이러한 파국이 자기와는 전적으로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그 모두들. 이들 모두가 그와 구별될 수 있는 것은 예컨대 소독약 또는 방역복이라든가 보디백, 아파트나 건물의 벽 같은 차단막을 사이에 두고 그의 처지나 상황이 자신과는 다를 뿐 아니라 완전히 무관함을 주장하면서 스스로를 위안하고 있다는 데서 비롯된다. 그러나 전염병, 그리고 쓰레기를 태운 재는 알다시피 공기 속에 섞여 어디에나 침투할 수 있다. 또한 모든 생필품은 쓰레기로 전락하지 않을 수 없을뿐더러 그것을 태운 연기와 재는 흩어질 뿐 (그리고 태울 수 없는 것은 어딘가에 매립되어) 결코 사라지지 않은 채로 어딘가에 잔존한다. 따라서 그 속에 거주하는 쥐와 바이러스, 그리고 전염병이 불시에 그들을 덮칠 수 있는 것처럼 그들의 죄 역시 언제든 피로서 현행화될 수 있는 것이다. 즉 피(빨강)라는 기회원인에 의해 죄(재)의 예정조화가 발동할 가능성은 언제 어디서든 상존한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그들 모두 역시 그러한 가능성을 한사코 회피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그와 다르지 않은 존재가 아닐까. 또한 이러한 파국을 전적으로 타자의 것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 역시 이와 같은 위안의 카타르시스에 한없이 자족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은 이를테면 인도네시아를 덮친 쓰나미, 플로리다의 카트리나, 쓰촨이나 칠레, 아이티의 대지진 등의 자연재해로 인한 죽음, 그리고 9·11 테러,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벌어진 전쟁이라든가 용산 참사 등의 비극적인 사건의 희생자들, 삼성전자와 한국타이어 노동자들의 돌연사 등등, 죽음이 창궐하고 있는 이 참혹한 시대에 그와 같은 사태가 여기가 아니라 저기를 습격했던 것, 또한 우리가 그 때 거기에 있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단지 운이 좋았던 것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사태를 한사코 타자의 것으로만 여기며 오로지 살아남았다는 사실로서 우리의 삶을 필연적인 것으로 정당화하기에 급급한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주검 위에 살아 있다는 사실만큼은 엄연하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죄다. 이러한 섬뜩한 죄와 피의 보편성을 이처럼 도저하게 구현하고 있는 한국소설을 나는 아직까지 본 적이 없다.

 

《문장웹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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