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감각적이고 정치적인

[기획/특집] 시와 소설로 보는 2010년 명장면들

이토록 감각적이고 정치적인

황정은의 『백의 그림자』(민음사, 2010)

정영훈

첫 번째 소설집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문학동네, 2008)가 나온 이후의 황정은 소설 가운데 나에게 특히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목요일, 나비」(『현대문학』, 2009. 1)였다. 그것은 이 소설이 등단 초기에 보여주었던 어두운 세계를 이후에 마련된 그녀 특유의 스타일로 그려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정은식’ 스타일이 초기 소설의 어두운 세계와 결별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라면, 이 둘을 미학적으로 결합함으로써 새로운 경지에 이른 것이 이 소설이라 여겨졌던 것이다. 여기에다, 무심하게 이어진 짧은 문장들과 ‘시계수리공’(주인공의 아버지)이라는 말이 환기시키는 어떤 느낌이 더해져 나는 자연스레 저 유명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연작을 떠올리게 했다. 1970년대에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그랬던 것처럼 이 시대에도 우리가 겪고 있는 빈곤의 문제를 미학적으로 새롭고 윤리적으로 올바른 방식으로 그린 소설이 나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요청과 맞물려 황정은이 그에 대한 대답을 들려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져 보았던 것이다. 이제 『백의 그림자』를 읽으면서 이 기대가 헛되지 않았음을 확인하게 된다.

은교와 무재의 대화를 듣고 있으면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날 때가 있다’고 했던 정현종의 시구가 떠오른다. 목소리가 작고, 건네는 말들이 뚝뚝 끊어져 주의해서 듣지 않으면 둘이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고 묵묵히 앉아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다. 주위에 있는 누구도 방해하거나 성가시게 하지 않고 어떤 작용도 하지 않으면서, 거기서 둘을 빼내어도 아무도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같이 있는 듯 만 듯 그저 그렇게 있다는 느낌. “얼핏 지나가면서 우연히 볼 수 있는 곳이 아니고 그런 가게가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갈 수 있는” 오무사처럼. 『백의 그림자』는 존재감이 희박한 이 두 사람을 주인공으로 한 일종의 연애소설이다. 두 사람의 성격에 어울리게 둘은 밀고 당기는 일 없이, 서로를 다른 누구와 견주지 않은 채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게 사랑에 진입해 있다. 두 사람의 사랑은 은교의 쇄골이 반듯하지 않다는 사실이 증거가 되는, 이를테면 물신화된 대상에서 사랑의 이유를 발견하는 대신 대상의 부재를 통해 사랑을 증명하는 그런 역설적인 형태의 사랑이다. 쇄골이 반듯한 사람을 좋아하는데 쇄골이 하나도 반듯하지 않은 사람이 좋아졌다면 이것이야말로 사랑이 아닐 것인가.

둘은 세계도 이런 식으로 본다. 존재감이 희박하여 여느 사람들의 눈에는 띄지도 않을 것들이 이들에게는 크게 보인다. 몇 개의 장면을 두서없이 늘어놓아 본다. “개구리의 발가락은 섬세하게 갈라져서 작고 가늘고 투명했다. 밟았으면 어쩔 뻔했냐고 새삼 놀랐다. 출근하는 길에 화단에서 자라고 있는 강아지풀에 붙여 주었다. 개구리의 무게 덕분에 풀잎이 약간 휘어졌다. 개구리는 잠자코 엎드려 있다가 문득 뛰어서 덤불 속으로 사라졌다.” “섬세하게” 갈라진 개구리의 발가락과 이 작은 개구리를 지지해 주느라 “약간” 휘어진 풀잎에 시선을 주는 은교의 세심하면서도 여린 감성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녀 자신이 작고 약하여 누군가의 부주의한 발놀림에도 쉽게 다칠 수 있는 처지여서 개구리 한 마리가 허투루 보이지 않았던 것일까. 동급생들의 따돌림과 괴롭힘 때문에 학교를 그만둔 그녀였으니 그럴 만도 하지 싶다. 그러나 「마더」나 「The Wall」(이 소설은 무슨 이유에선지 작품집에서 제외되었다. 과도한 폭력성이 이유일까) 같은 황정은의 초기 소설에서, 과도한 폭력에 노출된 아이들이 같은 크기의 폭력으로 세계와 맞서거나 자기보다 힘이 약한 대상을 골라 분풀이를 하거나 했던 것을 보면 이게 늘 자연스러운 일은 아님이 분명하다. 은교는 어떻게 폭력을 되갚지 않고 이 놀랍도록 섬세하고 ‘윤리적인’ 삶의 자세를 견지할 수 있었을까. 은교를 이 폭력의 세계에서 구원해 준 것은 무엇일까.

“그녀의 거주지를 지나서 왼쪽으로는 주차장을, 오른쪽으로는 조명 가게나 공구 상점들을 두고 걷다가 오른쪽으로 첫 번째 골목이 나타날 때 발길을 틀어서 그 길로 접어들면, 이십 년째 그 자리에서 별다른 도구도 없이 드럼통 하나를 세워 두고 무표정한 얼굴로 순대를 찌고 있는 아주머니를 만날 수 있었고, 회중시계, 구리 자명종, 낡은 손목시계, 빛바랜 은수저를 유리장 안에 진열해 두고 졸고 있는 남자들 앞을 지나 담배와 음료와 삶은 계란을 파는 구멍가게를 지나서 부품 상점이나 구식 라디오를 손보는 수리실 등을 지나가게 되어 있었는데, 어느 곳이든 책상 하나 더는 들어갈 여지가 없을 만큼 비좁았다.” 오무사로 가는 길에 만나는 가게들이다. 중간에 마주치는 어떤 가게들도, 거기 놓인 어떤 물건들도 허투루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은교는 거기에 하나하나 이름을 붙여 가며 존재를 부여해 준다. “따끈하고 맑고 개운한 국물을 먹으러” 가자며 차를 몰고 온 무재도 같은 방식으로 조개의 이름을 죽 늘어놓는다. “가리비, 대합, 명주조개, 민들조개, 칼조개, 개조개, 돌조개, 참조개, 동죽, 모시조개, 하고.”

“그런 것[빚: 인용자] 없이 사는 사람이라고 자칭하고 다니는 사람을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조금 난폭하게 말하자면, 누구의 배[腹]도 빌리지 않고 어느 날 숲에서 솟아나 공산품이라고는 일절 사용하지 않고 알몸으로 사는 경우가 아니고서야, 자신은 아무래도 빚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뻔뻔한 거라고 나는 생각해요.” 무재는 7남매를 둔 아버지가 “개연적으로, 빚을” 지게 되었다는 이야기에 뒤이어 이런 이야기를 한다. 처음 무재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은교는 이게 당연히 돈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식구가 많으면 으레 사는 게 힘들기 마련이니까. 부식비며 교육비며 자식들을 키우는 데 드는 비용이 좀 많겠는가. 무재가 의미하는 게 이게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무재는 이 말을 일반화해서 이해하고 싶어 한다. 우리는 누구나 살아가면서 빚을 진다. 태어나고 자라고 무엇인가를 사고 쓰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되지 않는다는 뜻에서. “하다못해 양말 한 켤레를 싸게 사도, 그 값싼 물건에 대한 빚이 어딘가에서 발생한다는 이야기예요.” 그러니 제아무리 돈이 많은 사람도 빚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빚이 없다고 떠벌리며 다니는 사람만큼 뻔뻔한 사람도 없다. 같은 맥락에서 “아버지는 죽어서 빚을 남기고 소년은 빚을 갚으며 어른이 되어 간다.”는 무재의 말도 다르게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 삶이 누군가에게 빚을 짐으로써만 살아지는 것이라면, 우리는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있는 것일까. 아버지가 남긴 빚을 대신 갚으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숙명 같은 것이라면, 우리 자신이 살아가는 동안 지고 갚아야 할 빚만도 산더미 같을 텐데, 도대체 우리는 얼마나 우리 몸을 혹사해야 이 빚을 다 갚을 수 있을까. 무재는, 그리고 이 말에 공감하는 은교는 자기가 진 빚을, 윤리적으로 살아야 하는 요청을 위한 단초로 삼고 있는지도 모른다. 은교와 무재가 악해질 수 없는 이유는 이들이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빚지고 있다고 느끼는 것, 이것은 윤리적인 삶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다.

희박한 존재들이 살아가기에 이 세계는 “시끄럽고 분주하고 의미도 없이 빠른 데다 여러모로 사납”다. 평균적인 사람들의 눈에는 이들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인상적인 장면 하나. 전자상가를 이루는 다섯 개 동 가운데 가동이 철거되고 그 자리에 공원이 들어섰다. 네 사람이 앉을 만한 길이의 의자가 있는데 중간쯤 가로 막대가 붙어 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나눠 놓았을까요, 라고 묻자 눕지 말라는 의미죠, 라면서 무재 씨는 의미 모르게 웃었다.” 이게 우리가 사는 세계의 한 단면이다. 구약성서의 신은 그의 백성들에게 떨어진 이삭을 애써 줍지 말라고 명령한다. 이 하지 말라는 명령은 소극적이기보다는 적극적이다.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하라는 것이다. 무엇을?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자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은 늘 우리 곁에 있을 수밖에 없는 그들을 배려하라는 것이다. 부작위(不作爲)는 때로 강한 의미의 작위(作爲)가 된다. 그런데 여기 우리 세계는 하지 않음으로써 의도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는 누군가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이 될 수도 있을 어떤 행위들을 끝끝내 허락하지 않는다. 조금 게으르고 놓아 두고, 약간만 무관심하고, 그저 방치해 둘 수도 있었을 그것을 굳이 하게 만들어 예기치 않게 누군가에게 선을 행할 수도 있었을 기회를 쉽게 포기한다. 예쁘게 꾸며 놓은 공원에 들어와, ‘시민’들이 즐겁게 놀다 갈 수 있는 그 곳을 부랑자들이 찾아와 더럽힐 수도 있다는 이유로, 아니, 감히 무엄하게도 거기 머리를 눕히고 두 다리 쭉 뻗고 누워 잘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서, 굳이 가운데다 “딱딱한 가로 막대”를 박아 넣는 이 과도한 ‘행위’란…….
이 세계의 생리로는 전자상가를 둘러싼 지역을 “슬럼, 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하고 밀어 버리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몇 십 년 동안의 역사와 그 속에 깃들어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과 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 온 수많은 일터를 간직하고 있는 이 곳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은교가 여 씨 아저씨의 서랍을 정리해서 얻은 동전은 모두 “백삼십오만 칠천육백사십 원”이었고, “너무 무거워서 앰프를 운반하는 데 사용하는 수레에 실어서” 가져가야 할 정도로 무거웠다. “백삼십오만 칠천육백사십 원”이라는 액수는 충분히 상징적이다. 낡고 해지고 볼품없어지고 추레해졌지만 우리의 기억이 켜켜이 쌓여 정리하는 데만도 하루가 족히 걸릴 “오래되어서 귀한” 그것들을 모으면 아마도 무거워서 그냥은 들고 갈 수 없을 만큼의 무게를 지닌 이 상징적인 금액을 얻게 될 것이다. 은교와 무재는 이 세계가 잊어 주기를 바라고서 슬그머니 감추어 둔 것을 조심스레 매만지고 어루만진 다음 우리 앞에 펼쳐 보인다. 작아서 오히려 귀한 이 세계를 누구든 외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동안 우리 문단은 문학의 정치성 논의로 뜨거웠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이 논쟁에서 소설은 소외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문학은 문학 일반이거나 시였을 뿐 소설은 아니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건 소설이 현실을 다루는 방식이 낡았거나 현실을 정치적으로 재구성하는 상상력을 잃었거나 최근 맥락에서 의미하는 정치성을 지니지 못하거나 하는 이유들 때문이 아니었을까. 『백의 그림자』는 우리의 감각을 갱신하여 존재감이 희박한 자들이 살아가는 세계에 주목하게 한다. 이 작고 여린 세계와 대조적으로 우리 세계가 얼마나 폭력적이고 정치적으로 그른지 돌아보게 만든다. 이런 의미에서 『백의 그림자』는 다른 어떤 소설들보다 감각적이고 정치적이다. 이제 누구든 문학의 정치성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백의 그림자』를 참조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문학의 정치성 논의는 한 단계 성숙해지게 될 것이다. 

《문장웹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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