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은 어떻게 드러나는가-한강 장편소설 『바람이 분다, 가라』(문학과지성사, 2010)

[기획/특집] 시와 소설로 보는 2010년 명장면들

진실은 어떻게 드러나는가

한강 장편소설 『바람이 분다, 가라』(문학과지성사, 2010)

 
이선우

한강의 자리는 독특한 데가 있다. 등단 17년, 어느덧 중견작가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한 시간이 흘렀고 작품이 쌓였다. 문학을 한다는 사람은 누구나 알 만한 이름이 되었고, 굵직한 문학상도 몇 차례 거머쥐었다. 최근에는 동리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녀는 한 번도 문단의 중심이었던 적이 없다. 그렇다고 주변부였다고 말하기도 곤란하다. 중심이 되기에는 시류를 너무 타지 않았고 주변부가 되기에는 소설을 너무 잘 썼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단순한가?
이 세계의 폭력을 온통 자신의 것으로 앓고 있는 한강의 저 진지하고 예민한 주인공들은 그럭저럭 한 세상 살아가고자 하는 우리들에게는 확실히 불편하고 비현실적이다. 세상을 바꾸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그녀의 소설이 너무 내성적이거나 심미적이고, 때로는 몰역사적으로 보일 것이다. 어쩌면 그녀는 너무 급진적이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 문명을 구축하고 있는 온갖 동물성을 거부하고 아예 식물이 되겠다는 발상은 과연 문학 안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이 세상의 관습이나 도덕 대신 자기 내부의 윤리만을 따라 살고자 하는 한강 소설의 ‘그녀들’에게 우리 사회가 배정하는 곳은 그러므로 정신병원 정도. 살아남는 것만이 미덕이 되어 버린 이 속물과 동물의 시대에 한강의 소설이 끈질기게 제기하는 저 진정성의 미학은 과연 얼마만큼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까.
그러나 최근작 『바람이 분다, 가라』(2010)는 그녀가 지금까지 추구해 온 진정성이라는 것이 결코 문학 안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저 오랜 싸움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준다. 범박하게 말해, 『바람이 분다, 가라』의 주요 골자는 화가 서인주의 죽음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진실 싸움이다. 이 싸움의 한편에는 서인주의 죽음을 자살로 확정지으며 그녀의 신화화 작업에 앞장서고 있는 권위 있는 미술평론가이자 교수인 강석원이 있고, 반대편에는 서인주의 오랜 친구인 이정희가 있다. 그녀는 인주 삼촌에게 한동안 그림을 배웠으나 화가가 되는 대신 희곡작가가 되었고, 오래전 그마저 그만두고 번역가가 되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번역 일도 접고 서인주의 평전에 매달리고 있는 중이다. 강석원이 쓴 평전을 반박하기 위해서다. 엄마가 자살했다는 거짓으로부터 인주의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다.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다.
그러나 고군분투하면서 이정희가 하나하나 알아 나가는 것은 그동안 자신이 알고 있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인주의 면모들이다. 모든 정황과 증언이 인주의 죽음을 자살로 몰아간다. 진실은 이정희 편이 아니라 오히려 강석원 편에 서 있는 것 같다. “나는 너를 몰랐다, 네가 나를 몰랐던 것보다 더.” 불안에 떨며 이정희는 고백한다. 너덜너덜한 치욕의 밑바닥을 들여다본다.
자, 그렇다면 이 소설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던 두 친구의 이야기인가. 각자의 고통에 빠져 서로의 고통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는, 살아남은 자의 자책 어린 후일담인가. 그 고통의 근원에 가족이, 가난이,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이, 대물림되는 운명이 있었다는 온갖 슬픈 이야기들의 집결체인가. 혹은, 서인주-이정희-이동주로 대변되는 모성의 세계 반대편에 강석원 그리고 인주와 정희의 전 남편 등으로 대변되는 폭력적인 남성의 세계를 배치함으로써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보다 감동적으로 그려내는 한편의 휴먼드라마인가. 또다시 반복되는 ‘상처와 치유의 서사’인가. 이 소설을 구성하는 전혀 다른 기억들, 욕망들, 언어들에 집중한다면, 어쩌면 여기서 우리는 고정된 하나의 진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익숙한 전언을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뿐이라면, 이 소설의 감동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문제는 너무 빤한 우리 삶의 세부가 아니라 그 삶의 요목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다. 상투성을 만드는 것은 내용이 아니라 그 내용의 배치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심연을 파고드는 한강 소설의 문체는, 문체의 힘만으로도 웬만한 상투성들은 극복할 수 있는 저력을 분명 가지고 있다. 그러나 문체의 힘만으로 장편소설이 될 수는 없다. 거기에는 어떤 싸움이 필요하다. 익숙한 장르론의 문법으로 말하자면 그 싸움을 일컬어 ‘자아와 세계의 대립’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자아와 세계는 정확하게 양분되어 있지 않다. 싸움은 전면전이 될 수밖에 없으며 동시에 자신의 내부까지 겨냥해야 한다. 진실을 밝히려는 이정희의 작업은 그러므로 강석원이라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힘과의 싸움일 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익숙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사유의 어떤 전개 방식 ― 이를테면 수많은 죽음으로 점철되어 있는 불행한 가족사나 이혼의 전력 등이 자살의 증거라고 제시되고 의심의 여지없이 받아들여지는 방식, 곧 상투화(이것이 신화화의 또 다른 얼굴이다)와의 싸움이기도 하며, 그 속으로 안주하고 싶은 내밀한 자기 욕망과의 싸움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싸움은 고스란히 글쓰기로 이어진다. 치고받듯이 새로운 증거들이 제출되고 다시 반박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끊임없이 자살의 증거를 들이미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은 전혀 몰랐던 인주의 다른 얼굴들 앞에서, 그것들이 불러일으키는 어떤 기억들과 여전히 아물지 않은 환부 사이에서, 흔들리는 내면을, 그러나 흔들리지 않으려는 다짐을, 머뭇거리는 불안을, 박차고 전개되는 싸움을, 의심을, 충동을, 분노를, 절망을, 그리고 마침내 그 절망을 뚫고 일어서는 생의 의지를 이 소설은 놀라울 만큼 생생하게 기록한다. 다성적인 목소리만큼이나 다성적인 문체들이 서사의 완급을 조절하며 소설의 색채를 바꾸어 나간다. 익숙한 이야기를 다루되 그것들과 부단히 싸우며 전혀 다른 배치를 만들어 낸다. 진실을 의심하되 진실을 포기하지 않는다. 온통 싸움의 기록이자, 싸움 그 자체인 소설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상투적인 것은 정희의 죽음이 아니라 강석원의 사랑이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러나 이 소설의 감동은, 마침내 밝혀진 진실이 아니라 그 진실을 드러내는 방식에서 온다. 아니, 둘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진실이 드러나는 방식이 바로 진실의 내용을 구축한다. 우선, 강석원의 ‘논리’에 맞서 이정희가 내세우는 ‘감각’. 그것은 한편으로 이 소설의 딜레마다. 이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을 이성의 언어로 납득시켜야 한다는 딜레마, 증거에 기대지 않고 진실을 드러내야 한다는 곤혹. 그러므로 “모른다고밖에는. 모든 것이 덩어리로 다가왔다고밖에는. 스며들고 번져 갔다고밖에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한 사람의 진실이란 바로 그렇게 드러나는 것이다. 그것은 조각조각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그러므로 퍼즐을 맞추듯이 이어 붙여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덩어리로, 육체와 분리된 사유가 아니라 그것들의 총합인 몸으로 현현한다. 논리와 이성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선(배제한다는 뜻은 아니다) 어떤 감각으로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성으로 증명할 수 없으므로 우리는 이 믿음을 신뢰해서는 안 되는가. 그러나 강석원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증거란 언제든 조작 가능하다. 오히려 진실은 그 너머에 있다. 문학이 추구하는 세계가 바로 그 곳이다. 이성의 언어를 질료로 삼되 이성의 화법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그 너머를 드러내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소설이 놓여 있는 문학의 세계다.
 그렇다면 정희는 어떻게 그 너머를 드러내는가. 강석원이 구축한 논리의 틈새를 드러내며 상반된 논리를 내세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증거는 조작될 수도 불에 타 사라질 수도 있다. 남는 것은 진실을 알고(어쩌면 ‘믿고’가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있는 이정희, 그녀 자신뿐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녀만이 진실을 알고 있고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를 손에 쥐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바로 증거이기 때문에. 인주와 인주 어머니, 그 고통의 서사를 공유했고, 하여 죽고 싶었던 것이 나약함의 증거라면 분명 그들만큼 나약했던, 정희가 죽지 않고 살아남는다는 것 자체가, 인주의 자살을 반박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음은 삶으로 반박되고 삶은 삶으로만 증명된다. 소설의 결말은 그것을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무릎이 짓이겨진 채 뜨거운 배로 바닥을 밀고” 기어이 불구덩이 밖으로 나가는 그녀, 인공호흡기를 쓰고도 스스로 “쒜엑쒜엑” 숨을 토해내는 그녀, 죽음이 자신을 덮치는 바로 그 순간, “살고 싶다”는 생생한 욕망을 실천하는 그녀. 인주의 마지막과 정확히 겹쳐지는 이 장면이야말로 인주의 죽음이 자살이 아님을 가장 강력하게 시사한다.
그러므로 나약함도 인주가 자살을 시도했다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 소설은 이미, 누구보다 나약했던, 그러나 누구보다 생의 감각으로 충만했던 이동주라는 인물을 소설의 배후에 배치해 놓았다. 인주가 강인하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면 정희도 나약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며, 나약함이 강인함과 공존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이동선이 있었다면 이동주가 있었고, 태어나지 못한 아이들이 있었다면 매 순간 생의 약동을 보여주는 민서가 있었다. 자살을 증명하는 논리는 그대로 그것을 반박하는 논리가 된다. 그러나 여기에는 논리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또 다른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바로 삶에 대한 사랑이다. 절망을 뚫고 솟아나는 생에 대한 의지다. 자살에 실패한 정희가 밖으로 나와 처음으로 다시 본 세상이 온통 생명력으로 들끓던 봄이었다는 것, 그 생명의 약동에 자기도 모르게 감탄을 자아냈다는 것은 정희의 부도덕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생에 대한 그녀의 경외심을 드러내는 것이다. 어둠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이 우리한테 있었던 게 예외적인 일, 드문 기적”이므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의 책임을, 아니 삶 그 자체의 윤리를 우리는 이제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때 삶이라는 것은, ‘벌거벗은 생명’만 뜻하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생명은 곧 생명활동이며, 그러므로 그것은 결코 우리가 추구하는 삶의 의미와 분리되지 않는다. 정희가 진실을 밝히기 위해 삶을 향해 투쟁하며 나아가듯이, 그리고 바로 그 투쟁이 그 자체로 진실의 구현이듯이. 우리의 삶도, 한강의 소설도, 그러므로 아무것도 완결된 것은 없다. 모든 것은 길 위에 있고, 진실은 길 위에서만 드러난다. 그러나 『바람이 분다, 가라』는 한강이 그 길을 얼마나 열심히, 그리고 꾸준히 걸어왔는가를 증명한다. 더딘 걸음이어서 그녀가 얼마나 걸어갔는지 미처 모르고 있었다면, 이 소설을 읽을 것을 권한다. 2010년에도, 한강의 바람이 분다.

 《문장웹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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