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질성, 안에 있는 바깥에 대하여

이질성, 안에 있는 바깥에 대하여

고봉준

1.

“네 마음을 내가 알아, 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네가 하는 말의 뜻도 나는 모른다, 라고 말해야만 한다.” 작가 김연수의 이 말은 ‘타자’에 대한 우리 시대의 윤리처럼 들린다. 이 경우 ‘타자’를 외국인, 난민, 이주민, 탈북자, 혼혈인 등으로 불러도 상관이 없을 것이다. 작가는 이해의 불가능성에 절망하기보다는 이해하려는 노력 그 자체에서 희망을 감지하려 한다. 그런데 불현듯 이런 궁금증이 떠오른다. ‘노력’이라는 윤리적 개념이 국경선 너머에서 찾아온 이방인들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될 수 있을까? 이 의문은 자본의 지구적 확장과 노동력의 국제적 이동이 일상적 풍경이 되어버린, 국민국가의 경계가 느슨해지고 초국가적인 상상력이 현실의 일부가 되어버린 지구화 시대의 문학이 감당해야 하는 핵심적인 질문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지구화 시대는 ‘이동’의 시대이다. 이주노동자 100만 시대의 한국문학은 지난 몇 년 간 ‘타자’와 ‘경계’라는 이름으로 이 질문에 대답해 왔다. 오늘날 ‘이동’은 전통적인 의미의 모험과 같은 예외적인 경험이 아니라 일상적인 활동의 일부분이다. 우리의 삶은 더 이상 국민국가의 경계선 안에서만 영위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국민국가의 권력이 줄어든 것은 아니다. 한편에서는 국민국가의 지배력이 약화되고,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국민국가의 지배력이 강고해지는 것, 이것은 자구화의 아이러니이다. 오늘날 ‘이동’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노동력의 이동이다. 노동력의 이동은 가난한 나라에서 부유한 나라로 향한다. 그렇지만 지구화 시대의 ‘이동’이 노동력의 이동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부유한 나라에서의 ‘이동’은 ‘여행’이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문화의 뒤섞임은 양면적일 수밖에 없다. 해외여행을 통해 경험된 이방의 문화가 이곳의 상상력에 개입하고, 노동력의 이동에 의해 유입된 이방의 문화가 이곳의 문화와 뒤섞인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문화의 양면성이라는 이 순진하면서도 맹목적인 이데올로기를 우리의 현실이라고 간주하는 것은 타당한 인식일까?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다문화’와 ‘관용’이라는 단어는 정확히 이런 이데올로기를 진실인 것처럼 위장하는 데 유용한 도구인지도 모른다. 
‘다문화’와 ‘관용’이라는 말은 이방인을 문화적으로 전유하려는 시선을 숨기고 있다. 이방인은 오직 ‘문화(!)’로만 표상된다. 아니, 문화로 표상되는 한에서 이방인은 다문화와 관용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닐까. 지금 이 순간에도 <미녀들의 수다>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서 각 가정마다 ‘다문화’의 현실이 배달되고, 국가적인 차원에서는 ‘다문화’ 교육이 장려되고 있다. 이제 기업은 ‘다문화’의 든든한 후원자임을 자처한다. 시민사회는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내세워 저임금 장시간이라는 열악한 노동환경에 처해 있는 노동자들을 차별하지 말 것을 요구하고 있다. ‘다문화’는 지구화 시대의 보편적 윤리가 되어 도처에 떠다닌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이방인들과 마주치면서 살아간다. 도시와 농촌, 노동현장과 일상적 세계, 이방인들은 어디에나 있고, 그들과의 만남은 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사건이 되었다. 그런데 추방의 공포 속에서 숨죽이며 살고 있는 대다수의 이방인들을 향해서 ‘문화’의 다양성과 공존을 말하는 것은 진심일까? 혹시 ‘다문화’가 이주노동자의 노동력을 싼값에 전유하려는 국가와 자본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왜 우리는 그들의 헐벗은 삶 대신 다양한 문화의 공존이라는 허상에 집중하려는 것일까? ‘관용’이라는 가치는 또 어떤가? 일반적으로 ‘관용’은 이방인의 정체성과 차이의 문제를 부각시키지 않고 그들을 통합과 동화의 대상으로 간주함에서 비롯되는 가치이다. 그것은 이방인과의 마주침을 정치적인 사건이 아니라 오직 문화적인 현상에 국한시켜 이해할 것을 강제하는 ‘다문화주의’와 마찬가지로 인종과 문화를 위계화하고 사회적 갈등을 상이한 정체성 간의 마찰이라는 논리로 확장시키며, 종교적?문화적 차이가 그 자체로 갈등을 내재하고 있다고 믿게 만든다. ‘관용’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오직 자신의 취향이나 관습과 어울리지 않는 것들을 견뎌야 한다는 시민성(civilite) 뿐이다. 타자와의 마주침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상상은 항상 그 이상인데도 말이다.
2000년대 한국문학의 형질변화가 이방인의 출현에 의해서만 주도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과장일지도 모르겠다. 이방인의 출현만큼이나 작가들의 해외여행이 잦아졌고, 작가들의 해외경험은 어김없이 문학적인 상상력의 변화로 이어졌다. 특히 국가 간의 심리적 거리가 좁혀짐에 따라 외국의 종교와 사상, 문화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는 작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세계문학의 번역물들이 쏟아지면서 문학의 영향관계 또한 이전과 달라졌다. 오늘날 한국문학은 이 모든 조건들의 교차점에서 조심스럽게 ‘이질적인 것’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2.

지구적 ‘이동’이 노동의 보편적 감각이 되고, 여행의 공간적 거리가 비약적으로 확장됨에 따라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 초국가적 상상력을 드러내는 시(집)들이 하나 둘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초국가적 경향은 이동순의 『미스사이공』이나 김정환의 『‘하노이 서울 시편』처럼 ‘역사적 현실’에 의해 매개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노동’과 ‘여행’의 영역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 “언제부터일까/이방인들 틈에 내가 이방인같이 보이는 이곳/어느 사이에/국적도 피부색도 방해가 되지 않는/낯선 것을 느끼는 동시에 낯익어 있는/정체 모를 이 끈적함”(김사이, 「이방인의 도시」)이라는 한 시인의 진술처럼 ‘공단’이라는 노동 공간에서 이주노동자들의 숫자는 한국인 노동자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노동’은 힘든 일상이지만, 이주노동자들에게 한국에서의 노동은 특별히 더 힘들고 가혹한 것으로 경험된다. 이방인에 대한 편견과 폭력이 그들을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사실 이주노동자가 등장하는 작품은 특정한 시인, 시집을 언급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많다. 그렇지만 하종오의 시적 성과가 단연 돋보이는 까닭은 그의 시에서 타자가 소재나 풍경 이상의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코시안들의 불행한 삶을 그린 『아시아계 한국인들』(2007), 이주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현실을 담은 『국경 없는 공장』(2007), 그리고 탈북자들의 곤핍한 삶을 형상화한 최근의 『입국자들』(2009)까지 최근 몇 년간 하종오가 보여주는 시적 세계는 지구화라는 노동력의 초국적 이동, 민족(혈통)과 국가라는 ‘경계’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정주민과 이주민의 갈등을 일상적인 차원에서 그려내고 있다. 하종오의 시편들은 이방인에 대한 편견의 시선의 그들의 감당해야 하는 불행한 삶의 현실을 형상화하는 데 집중하고 있지만, 문제의식이 표현을 압도함으로써, 이방인을 ‘사건’으로 사유하고 시적 울림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데에는 한계를 보인다. 이방인들의 불행한 삶을 증언하는 것이 그가 응시하고 있는 시인의 소명일지는 모르지만, 문제는 불행 자체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불법화하는 메커니즘에 있다.

이 선원의 선승들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오직 혼자이지요
홀로 존귀한 최고의 선승들입니다
108개의 선방에는 선승이 꼭 한명씩만 들어갈 수 있어요
여느 선방과 달리 방 안에서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습니다
잠을 자든 공부를 하든 밥을 먹든 자위행위를 하든
혼자서 하는 일은 무엇이든 괜찮습니다
가끔 심한 소음이 있어도 자기 일이 아니면 가급적
상관하지 않습니다 정 참지 못하면
총무스님에게 호소하면 됩니다
중국 일본 필리핀 말레이시아 방글라데시 그리고 한국
식탁에는 온통 외국인뿐입니다
이곳은 외국인을 위한 선원인 것이지요
금지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공양간에 함께 모인 선승들은 말이 없습니다
말은커녕 입도 벌리지 않고
그들은 밥을 몸속으로 밀어넣습니다

– 차창룡, 「고시원은 괜찮아요」부분

차창룡의 시세계에서 느슨해지는 것은 비단 국민국가의 경계만이 아니다. 그의 시는 한국적인 현실에 집착하기보다는 인간의 존재론적 본질과, 그것의 후광이 되고 있는 종교적, 문화적 시공성에 집중하고 있으며, 때문에 현재와 과거, 이곳과 이곳 아닌 곳을 끊임없이 넘나드는 월경(越境)의 과정을 보여준다. 차창룡의 시세계는 이 넘나듦을 통해서 세계와 존재의 본질에 한 발짝 다가서려는 고투의 기록처럼 읽힌다. 이 시에서 ‘고시원’은 공부하는 곳이 아니다. ‘고시원’은 빈자의 공간이고, 빈곤의 현대적 아이콘이다. 시인은 이 가난한 삶의 공간을 ‘선원’, ‘선방’, ‘선승’ 같은 종교적 세계에 비유함으로써 삶의 한계지점으로 내몰리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을 풍자하고 있다. 가장 고귀한 세계와 가장 비참한 세계가 겹쳐질 때, 현실에 대한 풍자의 힘은 배가된다. 방과 방 사이가 철저하게 단절된, 그리하여 “혼자서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허락되는 이 공간을 시인은 “외국인을 위한 선원”이라고 부른다. 물론 시인의 말처럼 이들 가운데 한국인이 섞여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한국인은 분명 자신의 땅에서 유배당한 유령적 존재일 것이며, 이러한 논리는 소통하지 않으면 누구든 이방인이 된다는 현실법칙의 비정함을 일깨워준다. 그러므로 ‘고시원’이 “외국인을 위한 선원”이라고 말하는 것과 ‘고시원’에서 생활하는 모든 사람들은 ‘외국인으로 간주된다’는 논리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어쩌면 ‘고시원’은 모든 인간을 외국인으로 만드는 거대한 기계일지도 모른다. 이주노동자는 우리 시대의 ‘호모 사케르(Homo Sacer)’이다. 그들을 가리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라고, 노동자라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주노동자의 대부분이 불법체류자인 현실에서, 이주노동자를 고용하는 공장이 거대한 치외법권지가 되어버린 현실에서, 그들을 향해 보편적 가치와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어떤 해결책을 가져올 수 있을까. 시인은 이 암담한 현실을 “금지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공양간에 함께 모인 선승들은 말이 없습니다”라는 내면화된 침묵의 풍경으로 그려내고 있다. 

1

레바논 국경 시모나의 이스라엘군 포진지를 찾은 이스라엘 소녀들, 제 키만한 포탄에 글씨를 쓴다. 사랑을 담아 보내노라고, 탄두에 제 이름과 함께 쓴다. 한여름 한낮에 사랑이 담긴 포탄이 베이루트 주택가를 향해 날아간다. 사랑의 이름으로, 또 다른 소녀들이 건물 잔해에 깔리거나 불에 타 죽어간다.

    

2

팔레스타인에서는 죽은 자도 검문소를 통과해야 비로소 죽음에 닿을 수 있다. 포탄에 맞아 이마가 함몰된 도로를 우회하는 것은 산 자나 죽은 자 모두에게 익숙한 일이다. 앰뷸런스는 죽음보다 늦게 도착하고, 소녀는 무너진 발전소를 지나 집으로 간다. 살랑거리는 촛불을 사이에 두고 동생과 숙제를 하는 밤은 행복하다.

– 박후기, 「소녀들」 전문

이주노동자의 궁핍한 삶과 그들에 대한 차별의 시선을 고발하는 시들은 드물지 않다. 그러나 그런 시들의 대부분은 이주노동자가 겪고 있는 불행한 삶을 연민이라는 온정주의적 시각에서만 바라본다는 점에서 일정한 한계를 지닌다. 그들을 우리 사회의 새로운 빈곤층이자 약소자로 그리는 문학이 무의미하다는 말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런 시들의 본질적인 문제점은 이주노동자를 무력하고 불행한 인간으로 그림으로써 그들을 연민의 대상으로 표상한다는 데 있다. 이 온정주의적 시각은 내국인과 외국인이라는 관습적 경계를 의문시하지 않음으로써, 재현을 통한 무의식적 ‘타자 만들기’에 공모한다. 여기에는 이주노동자의 존재 조건과 사건성에 대한 사유가 삭제되어 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을 동정하려는 태도가 아니라 ‘우리’의 ‘정상성’이 ‘그들’에 대한 폭력에 의해 유지되고 있고, 행위가 아니라 ‘존재’ 자체가 불법으로 간주된다는 것의 의미를 올바로 사유하는 일이다. 박후기의 「불법체류자들」은 이주노동자를 불쌍한 인간이라는 통상적 방식이 아니라 ‘불법체류’라는 존재의 조건에서 사유한다. 시인은 밤늦도록 공중전화 부스에서 전화기를 붙들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의 모습에서 가지에서 떨어져나온 나뭇잎들의 ‘사각거림’ 같은 것을 듣는다. 여기에서 시적 유사성은 “떨켜를 놓는 순간/나뭇잎도 지상의 불법체류자가 되나니”처럼 ‘분리’라는 사건에서 비롯된다. 시인은 이주노동자가 현대의 호모 사케르가 되는 이유가 그들이 법적 주체가 아니며 ‘권리’의 주체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인식에 도달하고 있다. 우리가 박후기의 「불법체류자들」을 읽으면서 되묻게 되는 것은 그들의 불행한 삶이 아니라 ‘불법’이라는 존재의 조건이다.
「소녀들」에서 초국가적 상상력은 현재성의 새로운 구성을 통해서 드러난다. 표면적으로 이 시는 ‘지금-이곳’을 배경으로 설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주노동자가 등장하는 대부분의 시들과 구분된다. 전통적인 경계에 의지한다면 그것은 국제적인 현실이거나 지금-이곳과 무관한 ‘저곳’의 현실에 불과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지구 전체에서 발생하는 사건, 사고를 인터넷을 통해 실시간으로 접하는 네트워크 사회에서 살고 있다. 네트워크 사회의 도래는 ‘지금-이곳’에 대한 우리의 실감을 무한히 확장시키며, 현실의 시?공간성 역시 비약적으로 증폭시킨다. 네트워크 사회는 ‘국제’라는 말보다 ‘지구’라는 단어가 한층 친숙하게 느껴지는 사회이다. 이런 까닭에 인용시에 나오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분쟁이 ‘지금-이곳’의 사건이 아니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스라엘군의 포진지를 찾은 소녀들이 포탄에 ‘사랑’의 글씨를 새긴다. 그런데 ‘사랑’을 새긴 포탄들은 곧이어 “사랑의 이름”으로 국경 저편의 베이루트 주택가로 날아가 “또 다른 소녀들”을 죽음으로 내몬다. 이것은 마치 ‘인권’이라는 보편적 개념이 적대적인 국가에 ‘인권 폭탄’으로 수출되는 지구적 현실과 유사하다. 그리하여 팔레스타인에서는 사자(死者)도 검문소를 통과해야 ‘죽음’에 도달할 수 있다. 죽음은 항상 두 번의 과정을 거쳐서 완성된다. 주검마저 검문의 예외가 될 수 없는 이 척박한 현실에서 ‘죽음’은 모두에게 익숙한 일상이 된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은 곳에서, 앰뷸런스는 항상 죽음보다 늦게 도착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실을 죽음의 세계라고 불러야 할까? 그런데 시인은 그 비참한 현실 속에서 삶이 영위되는 장면을 포착한다. “살랑거리는 촛불을 사이에 두고 동생과 숙제를 하는 밤은 행복하다.” 이러한 시각은 팔레스타인을 저주받은 나라로, 혹은 그들은 비참한 존재로 그려내는 연민의 정서와는 다르다. 박후기의 「소녀들」은 비록 전쟁과 일상의 명확한 구분은 존재하지 않지만, 참혹한 전쟁만이 그들의 삶을 지배한다는 휴머니즘의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롭다. 

3.

‘이동’하는 것은 ‘노동(력)’만이 아니다. 세계여행이 더 이상 예외적인 경험이 아니고, 삶의 시공성이 확장됨에 따라 문학의 상상력 또한 국민국가의 경계라는 재래의 중력장에서 급속하게 이탈하고 있다. 해외체류나 여행을 통한 문학적 상상력의 확장이 문학의 보편적 현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 타자의 삶을 풍경의 일부로 재구성하는 여행자의 시선이 지닌 폭력성의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며, 이질적인 문화와의 접촉을 통해서 국민국가적 정체성이 재생산된다는 한계도 없지는 않지만, ‘여행’은 오늘의 문학적 현실이 한국이라는 경계선 내부로 한정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이다. 베트남, 인도 등에 대해 관심을 갖는 작가들의 모임이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작가들의 해외체류 프로그램이 상설화되고 있으며, 이방인의 땅을 여행하면서 경험한 내용들이 시적으로 형상화되고 있다. 가령 신대철의 『바이칼 키스』(2007)는 몽고, 알래스카, 바이칼 호를 오가면서 경험한 만남에 관한 이야기들이고, 차창룡의 『나무 물고기』(2002)에 실려 있는 다수의 시편들은 인도를 상상력의 모태로 삼고 있으며, 최승호의 『고비』(2007)는 몽골의 고비 사막을 여행하면서 쓴 시편들이다. 물론, 여행자의 시선은 다양하기 마련이다. 여행을 통해 인간 존재의 보편적 조건을 사유하는 시인들이 있는가 하면, 이국적인 풍경에 시선을 빼앗김으로써 타자의 문화를 ‘풍경’으로 만들어버리는 시인들도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격언을 실증하는 시인들이 있는가 하면, ‘아는 만큼 보지 못한다’는 맹목의 딜레마를 보여주는 시인들도 있다. 소설의 경우 이러한 시선의 차이는 다소 명확하나, 시에서 이러한 시선을 구분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의 ‘시선’이 한 편의 시에서 뚜렷하게 확인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 쓸모가 없어 말의 기능을 잃은 말.
성대의 울림과 혀의 발음으로 겨우 버티는 말.
지나가는 이들을 건드려보지만
걷는 속도에 부딪쳐도 힘없이 나동그라지는 말.
듣는 이 없어 모든 허공이 귀가 되는 말.
고막들이 자물쇠처럼 굳게 채워져 있는 수많은 귓속에서
몇가닥 발음으로 겨우 말이 되려는 말.
무시하고 바삐 걸어가는 행인들처럼
무심한 표정으로 가볍게 튕겨냈어야 할 그 말을
나는 그만 듣고야 말았다.
그 말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야 말았다.
그 말을 발음한 얼굴의 눈을 쳐다보고야 말았다.
그 순간 아무런 힘도 의미도 없던 말은
그 눈빛의 의미를 받아 갑자기 생기가 나기 시작했다.
허공에서 떠돌던 모든 귀들이
재빨리 그의 눈과 내 눈 사이로 모여들었다.

– 김기택, 「버클리에서」 부분

‘여행’이 중요한 문학적 동기가 되는 이유는 낯선 존재와의 마주침이 감각의 개방을 촉발하기 때문이다. 모든 여행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타자의 공간을 경험하는 여행은 세계에 대한 ‘나’의 통상적 이해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러나 김기택의 「버클리에서」는 문화적 차이에서 발생하는 이해불가능성이 아니라 호명에 대한 응답이 한 인간을 주체로 바꿔놓는 순간의 보편성에 주목하고 있다. 홈리스가 버클리의 낯선 거리를 걷고 있는 화자를 부른다. 지나가는 불특정 대중을 향한 홈리스의 언어는 사실 ‘언어’가 아니다. 누구도 그의 말을 듣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말은 “성대의 울림과 혀의 발음으로 겨우 버티는” 소리-음향일 뿐이다. 홈리스의 ‘언어’에 반응하지 않는 것이 버클리의 불문율일 터. 그러나 시인은 무심코 “무심한 표정으로 가볍게 튕겨냈어야 할 그 말”을 듣고 만다. 그 소리의 발원지를 향해 고개를 돌렸기 때문이다. 바로 그 순간, “아무런 힘도 의미도 없던 말”이 생기를 갖기 시작한다. 타인의 호명에 응답함으로써 언어의 수신자가 되는 이러한 상황이 ‘여행’ 때문에 생긴 것은 아닐 것이다. 시인이 이러한 장면을 통해서 말하려는 것은 언어가 소리가 되고, 소리가 언어가 되는 배치이다.

인도 서벵골 주 다르질링의 티베트 난민촌
구부러진 길모퉁이 집 담벼락에서 꾸벅 졸고 있는 의자

(중략)

난민촌을 한 바퀴 둘러보고 와 보니
담쟁이를 어루만졌던 예수의 손길이 있다
의자는 잠결에 관절에 박힌
녹슨 못을 보풀처럼 빼내더니
뜨개질을 하는 담쟁이를 삼킬 듯 긴 하품을 한다
나는 의자 입속에 고인 말줄임표들을 본다
의자는 담벼락에 기댄 채 눈 감고 말 줄이고
국적 불명인 헐거운 옷을 입는다

– 윤석정, 「국적 불명인 의자」 부분

시인은 인도에 위치한 티베트 난민촌의 담벼락 아래에서 한가롭게 졸고 있는 의자를 본다. 무성한 담쟁이가 그 의자를 뒤덮고 있다. 이것은 윤석정의 시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가난한 풍경의 일부이다. 그런데 이 “국적 불명인 의자”에 ‘시바’와 ‘붓다’와 ‘예수’가 앉는다. 시인은 의자를 뒤덮고 있는 ‘담쟁이’의 형상에서 “의자에 앉아 뜨개질”에 열중하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연상한다. “시바가 하나의 손을 넌지시 붓다의 어깨에 얹고”, 담쟁이가 “붓다 소맷자락의 부피를 짐작”하고, “예수의 손길”이 담쟁이를 어루만진다. 시인은 종교와 문화의 정체가 모호한 티베트 난민촌의 풍경 속에 놓인 ‘의자’가 “국적 불명인 헐거운 옷”을 입고 있다고 포현한다. 우리의 통념 안에서 ‘시바’와 ‘붓다’와 ‘예수’는 각각의 종교와 문화를 상징하는 존재들이지만, 시인이 바라본 티베트 난민촌의 풍경 안에서 그것들은 근본주의적 갈등이 아니라 모호한 상태로 공존하고 있다. 지구화 시대에 ‘종교’라는 단어에는 피 냄새가 배어 있다. 이념의 갈등이 사라진 시대에 지구 전체에서 발생하고 있는 대다수의 갈등은 민족과 종교 분쟁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이념으로서의 종교에서는 공존이 불가능하다. 이러한 인식이 문명의 충돌과 종교적 관용이라는 허상을 낳는다. 그러나 종교는 예외적으로만 갈등관계에 돌입한다. 문명의 충돌이라는 서구 담론은 이 갈등을 극단적으로 부풀린 결과이다.

4.

텔레비전에서 국내의 한 기업이 다문화 가정을 후원한다는 광고가 흘러나오고 있다. 유독 민족적 정체성을 강조해온 한국의 현실이 급속하게 바뀌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한때 ‘다문화’는 지구적 시민권과 인권의 보편성을 강조하는 시민운동가들의 전유물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그것은 국가와 기업이 자신들의 관용을 과시하기 위해 사용하는 통치성의 일부가 되었다. 모든 ‘차이’가 남김없이 다문화와 관용, 문화의 공존이라는 허상 속으로 흡수되고 있다. 다문화주의는, 그 명칭이 보여주듯이, 타자를 하나의 완결된 문화적 공동체로 간주한다. 다문화주의는 ‘차이’를 통해서 확인되는 타자의 정체성을 존중하지만, 그것은 특수를 바라보는 보편의 시선을 내장함으로써 자신의 우월성을 역설한다. 대부분의 다문화주의는 타자의 문화를 특수한 것으로 이해하는 동시에 자신의 문화를 보편적인 것으로 위치시킨다. 이것이 “네 마음을 내가 알아”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이유, “네가 하는 말의 뜻도 나는 모른다”라고 말해야 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그 자체로 완결된 문화적 공동체가 존재하지 않듯이 다문화라는 현실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문화들 사이의 영향관계가 있을 뿐이며, 대개 이 영향은 노동과 일상보다는 문학과 사상의 차원에서 훨씬 두드러진다. 서로 다른 국적의 소유자들이 함께 지낸다고 해서 그것이 다문화적 현실이라고 말하는 것은 모든 것을 ‘문화’로 환원하려는 불순한 태도와, 마치 복수의 문화가 수평적으로 공존하고 있는 듯한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이 환상이 타자에 대한 우리의 폭력성을 은폐하기 위한 수단임을 알고 있다. 
이주노동자가 등장하는 대다수의 시에서 그들은 특정한 방식으로 재현된다. 그들은 전지구적 ‘이동’을 선택해서 한국에 왔지만, 그 선택으로 인해서 존재 자체가 불법으로 간주되는 유령적 존재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들은 한국사회에서 삶의 주체는 물론 노동자로서의 신분도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이주노동자를 대상으로 삼는 많은 시편들은 그들을 우리와 함께 노동하고 살아가는 인간 주체가 아니라 동정과 연민을 받아야할 불쌍한 존재로 그려내는 데 익숙한 것처럼 보인다. 문제는 이렇게 선한 시선이 궁극적으로 ‘타자 만들기’라는 권력의 메커니즘과 무의식적인 차원에서 공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타자를 불쌍한 존재로만 그려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문화도 그 자체로 완결되지 않으며, 공동체의 내부에 존재하는 ‘이질성’을 사유하지 못하는 문화는 타자에 대한 집단적인 폭력에 통해서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일이다. 그 순간 비로소 우리는 눈 뜬 맹목에서 벗어날 수 있다. 《문장웹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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