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인칭 주어의 겨울 한 컷

 

비인칭 주어의 겨울 한 컷




     이신조




‘얼다’와 ‘녹다’라는 동사를 물이나 얼음뿐만 아니라, 마음이나 감정을 주어로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흥미롭다. 따뜻하다, 시원하다, 눅눅하다, 건조하다, 뜨겁다, 시리다 등도 마찬가지. 마음에 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고 구름이 흘러가고 햇살이 내리쬔다. 기상현상은 언제나 친근하고 매력적인 메타포다.

‘비인칭 주어’를 처음으로 배웠던 중학교 영어시간을 기억한다. It is raining. – ‘It’은 누구인가, 무엇인가, 과연 비인칭. It은 딱히 규정하기 어렵고 모호한 ‘그것’. 비가 온다. – 누가 비를 내리게 하나, 무엇으로 말미암아 비가 내리나. 감히 비인칭이 아니고서야. 안개가 걷힌다, 파도가 출렁인다, 천둥이 친다, 하늘이 맑다, 이슬이 맺힌다······ 이 문장들의 진짜 주어는 각각 안개가, 파도가, 천둥이, 하늘이, 이슬이 아니다. 나는 오래도록 비인칭주어를 생각했다. 그러나 집요하거나 치열하지는 않게, 말하자면 비인칭스럽게. 

 

 

이과(理科)적 사고체계를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갖추지 못한 처지지만, 중고교 시절 ‘지구과학’ 시간을 제법 좋아했던 것 같다. 예의 비인칭 주어의 정체에 접근할 수 있었기에. 그렇다고 지구과학 시험점수가 월등히 높았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친근하고 매력적인 메타포의 몽상에 잠겨 지구‘과학’ 시간을 누구보다 ‘문학’적으로 보냈기에.

지구과학 시험점수에 상관없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듯, 둥근 지구는 적도 지방이 가장 많은 태양 에너지를 받는다. 당연히 적도 지방은 지구에서 가장 덥고 습하다. 일 년 내내 여름이다. 하여 적도 지방의 과도한 열에너지는 열에너지가 부족한 극지방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여기에 다양한 요인들이 결합되어 특정한 방식으로 바람이 불고 구름이 만들어지고 눈비가 내리거나 가물어진다. ‘대류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요는 균형을 잡고자 하는 에너지의 속성이다. 지구는 에너지의 균형을 원한다. 가로수를 뿌리째 뽑는 태풍도, 아프리카 난민들을 괴롭히는 가뭄도, 해안 휴양지를 집어삼키는 해일도, 산간 마을을 고립시키는 폭설도, 그 모든 과잉과 결핍이 지구의 입장에서 보자면 결국 에너지의 균형을 잡고자 하는 무엇이란 얘기다. 그렇다면 비인칭주어 It의 정체는 지구일까, 에너지일까, 균형일까.

지난해, 1년 넘게 냉장고 구석에 필름 한 통이 들어 있었다. 지지난 해 겨울, 강원도 어딘가에서 니콘FM2로 촬영한 흑백필름이었다. 필름은 작고 둥근 검정 플라스틱 통에 담겨 장기 냉장보관 중이었다. 아니 보관 중이었다기보다는 방치 중이었다. 나는 1년이 넘도록 그 필름을 현상하지 않았다. 인화하지 않았다. 종종 새벽에 물병을 꺼내다 혹은 누렇게 곪은 사과를 집어 들다 필름과 눈이 마주쳤다. 필름은 달걀 옆에 혹은 치즈 뒤에 숨어, 실은 여기 좀 봐주십사 자신을 드러냈다. 나는 짐짓 시선을 돌리거나 부러 노려보았다. 슬며시 혹은 힘주어 예의 서늘한 감옥 문을 닫아 버렸다. 현상해서 뭘 어쩔 건데. 인화하지 않아도 필름 안에는 눈 덮인 벤치와 정원, 눈보라치는 산등성, 겨울 개울가의 마른 풀들, 나란한 돌다리 따위가 찍혀 있음을, 그 누구의 얼굴도 찍혀 있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그해 겨울이 가고, 봄이 가고, 나는 불행해졌다. 1년이 넘도록 필름은 냉장고 안에 있었다. 굳이 버리진 않았지만 애써 찾지도 않았다. 

이사를 가며 냉장고를 바꾸게 되었다. 나는 오랜만에 충무로 현상소 골목으로 갔다. 한때 단골이던 곳에 필름을 맡겼다. 행복해졌기 때문은 아니었다.

흑백사진들 속엔 과연 눈 덮인 벤치와 정원, 눈보라치는 산등성, 겨울 개울가의 마른 풀들, 나란한 돌다리 따위가 찍혀 있었다. 그러나 사진 속 인화된 시간과 공간과 풍경은 전생처럼 낯설었다. 냉장고에서의 1년 몇 개월, 탁하고 뿌옇게 바랜 듯 거칠어진 입자 때문일 수만은 없었다. 벤치와 정원과 산과 풀과 돌다리가 주어일 수 없는 사진이었다. 내가 주어일 수 없는 사진이었다.

<우리말갈래사전>에서 ‘감은바닥’이란 낱말을 발견했다. ‘땅에 덮인 눈이 녹아서 땅바닥이 드러나 보이는 곳’이라 풀이되어 있다. 과잉과 결핍뿐 아니라, 모처럼의 무지개도, 강변도로에서 맞는 저녁놀도, 숲 속 상쾌한 바람도, 제각기 아름다운 눈의 결정들도 결국 균형을 이루고자 하는 무엇인 것이다. 비인칭 주어가 필요한. 지금 열대야를 잠재우려 장마의 폭우가 쏟아지는 여름밤, 그해 겨울의 감은바닥이 찍힌 사진을 바라보며 나와, 나의 에너지와, 나의 에너지의 균형을 생각해 본다. 짐짓 비인칭스럽게.《문장 웹진/2008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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