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승비속(非僧非俗)의 언어

 

[기획특집]

시와 소설로 보는 2011년 명장면

 

 

비승비속(非僧非俗)의 언어

─ 이홍섭 『터미널』(문학동네)

 

김문주

 

 

 

 

  『미널』은 문학의 가장 유서 깊은 주제인 시간에 관한 시집이다. 정주의 공간이 아니라 어딘가로 떠나는 경유지로서 터미널(terminal)은 그것의 어원이 내포하고 있는바, 이미 너무 오래 전부터 생(生)에 관한 비유의 공간이었다. 이 지극한 상투를 넘어서는 견결한 말의 힘을 이 시집은 웅숭 깊은 풍경으로 보여준다. 특정한 시적 주체를 중심으로 하는 시선에 의해서가 아니라 서로의 삶에 관여하는 관계들을 시차(時差) 속에 마주 세우는 방식으로 구성되는 풍경을 통해, 시는 생에 기숙한 본연의 슬픔을 읽는 이의 마음에 부려 놓는다. 이를테면 수십 년의 시차가 있는 두 풍경을 그린 시편에서 시인은 상이한 입장에 놓인 모자(母子)를 함께 배치하는데, “휘청거리는 버스 안에서/젊은 어머니는/어린 아들에게 자꾸 말을 시키셨다//말 좀 해볼래/말 좀 해볼래//그러다 보면/어느덧 버스는 대관령을 넘고/어머니는/내 손을 꼭 잡고 잠이 드시곤 했다…말 좀 해볼래/말 좀 해볼래/조르던 어머니께서는/이제 말이 없으시다”(「멀미」), 젊은 어머니와 어린 아들, 장년의 아들과 늙은 어머니가 나란히 놓인 시는 시간에 기숙한 생의 애틋함과 고단함을, 소 같은 묵묵한 언어로 그려낸다. 시차와 역전된 관계는 생에 관한 시인의 관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시적 구도(構圖)다. 오고 가고 보내고 떠나는 그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생은, 굽이굽이 흐르는 강물처럼 면면(綿綿)할 것이다.

  린 아들은 무심하고 늙은 어머니는 너무 노쇠하여, 그래서 한없이 처연한 생, 시집 『터미널』이 경계와 어긋남에 대해, 그리고 기억과 쓸쓸함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앞을 지나가지만/나를 알아보지 못하”(「청단풍 아래」)고, “한 여인을 끝끝내 사랑하지 못한 일”과 더불어 “한 여인을 끝끝내 떠나보내지 못한 일”도 “그러지 말았어야 했”(「터미널5」)던 일이 되는 것은, 맺어지거나 그렇지 않거나 관계들은 모두 매한가지로 안타깝기 때문이다. 시집 『터미널』에 저녁처럼 번져 있는 촉기는 오고 가는 존재들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이 시차(時差/視差)에서 연유한 것이며, 서로 다른 시차 속에 마주한 겹쳐진 장면들이 데자뷔의 환영으로 감수되지 않는 것은 애틋함이 시간의 간극을 연결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시는 “자기 상처가 둥지인”(「안목 하구」) 이 존재들 사이를 연통(聯通)하는 언어, 어찌 보면 어린 아들의 ‘멀미’를 돌려세우기 위해 젊은 어머니가 건넸던 말들-“말 좀 해볼래/말 좀 해볼래”를 닮은 언어일 것이다. 멀미를 잠재우는 말을 청하는 저 언어들 밑에 깃든 상대에 대한 깊은 연민과 헤아림이야말로 시집 『터미널』을 간결하면서도 오래도록 뜻이 남는 세계로 만든 것이리라.

  양한 시적 언어들로 인해 새로운 시적 카니발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오늘의 우리 시단은 표면적인 풍요로움에도 불구하고 불운한 전망과 무력한 미학적 갈등의 터미널을 지나고 있다. 종전의 시학적 관성과 분명하게 갈리는 젊은 시들의 등장은 그 바깥의 시인들에게도 중대한 영향을 끼치면서 우리 시단의 영토를 이동?확장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삶에 대한 감각의 변화는 새로운 심미적 언어를 요청하고, 그러한 점에서 오늘의 한국 시단은 삶에 관한 우리 시대 감각의 한 반영이겠지만, 한편으로는 그 시적 반영들이 진정한 자기─미학의 산물인가를 살피는 작업이 동반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새로운 언어에 대한 강박이 우리 시단을 추동하는 어떤 힘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창작환경의 안팎에서 두루 살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승(僧)의 언어로써 속(俗)의 처연(凄然)과 애틋함을 투명하게 마주하게 하는 이홍섭의 시편들은 맨─말의 수월한 능력을 여전히, 그리고 먹먹하게 실현해 준다는 점에서 경이롭다. 그것은 이홍섭의 시학이 시사적 젖줄을 대고 있는 백석 시의 생명력과도 관련되어 있다. 새로운 언어에 대한 동경과 미적 대응들이 시의 영토를 확장하는 것은 분명하겠지만, 이와 더불어 미적 영토를 넓히는 작업에 대한 성찰도 함께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홍섭의 견결한 시들이 보여주는 시적 능력은 미학적 개성에 대한 우리 시대의 강박증이 꼭 참고해야 할 의미심장한 세계로 생각된다.

 

《문장웹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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