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러운 사랑’, 저 운명애의 내력들

 

[기획특집]

시와 소설로 보는 2011년 명장면

 

 

‘더러운 사랑’, 저 운명애의 내력들

─ 정한아의 시집 『어른스런 입맞춤

 

이찬

 

 

 

 

  한아의 시집 『어른스런 입맞춤』은 “제발제발제발나를낳아주세요, 라고/우리는 빌지 않았지만/빌어먹을 삶”(「쪽팔리는 일」)이라는 구절로 표상될 수 있는 어떤 운명에 대한 저항감이 제 거죽을 찢고 나올 수밖에 없는 절실함의 무게로 꽉 채워져 있다. 저 저항감은 이 시집의 거의 모든 매듭과 마디들을 가로지르는 근원적인 벡터인 동시에 제 무늬들을 아로새기는 조각술의 중핵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 “내 속에서 나를 조롱하는 것들 눌러 죽이면 히드라처럼 새 머리가 나는 것들 히히 우는 것들 엉엉 웃는 것들 한숨 쉬는 것들 빌어먹을 것들 한없이 요설을 뱉어내는 것들”(「어떤 기도」)이라는 문양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시인의 실존의 내력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을 어떤 원초적인 사건과 그 부조리한 생의 얼룩들로부터 빚어졌을 경악과 분노의 감정들은 쉽사리 사그라질 수 없는 흔적들을 남기고 있다. 이 흔적들이 품고 있는 가공할 만한 감각의 현재성을 시인은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문양들로 기록한다.

 

“한밤을 펜과 씨름하다/세상에 엎어졌습니다/거기에는 책상의 이데아도 질료도/아무것도 없었습니다./하지만 거기서/나,/책상의 나직한 고동 소리를 들었습니다/책 속에 세월을 묻고 가슴에 열쇠를 꽂은/숨소리가 나직한 늙은 책상은/내가 사춘기에 칼로 그은 상처도/간직하고 있습니다/나를 구원해 준 책상/나를 잠재워 준 책상/내가 후려갈기고 긋고 할퀴고 물어뜯고 종국에/머리를 박아대던 책상,/책상은 나를/제 다리 밑에 숨겨 줍니다/거기서 손가락 빨며 눈 빨개지도록 웁니다” 

─  「愛人」 전문.

 

  인 정한아에게 “책상”은 이미 오랜 시간의 풍화를 겪어내면서 “숨소리가 나직한 늙은” 것이지만, “내가 사춘기에 칼로 그은 상처”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자 “나를 구원해 준”, “나를 잠재워 준” 바로 그것이기에,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나를 제 다리 밑에 숨겨 주”는 살아 있는 “愛人”이다. 따라서 그것은 저 아련한 ‘회감Erinnerung’의 뒷면에서 처연하게 펼쳐지는 과거의 유물일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거기서 손가락 빨며 눈 빨개지도록 웁니다”라고 여전히 말할 수밖에 없는 팽팽한 현재의 살갗을 가진 “愛人”의 몸이다. 시인의 상상력이 이렇듯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사건들을 지금 이곳에서 생생하게 살아 있는 몸으로 뒤바꾸려 하는 것은, 그의 실존에 새겨진 지독한 운명의 싸움으로부터 기원하는 것이 틀림없다. 그것은 정한아를 시인으로 다시 태어나게 했던 원초적인 바탕 세계이자, 그의 시편들의 속살을 짜고 닦고 어루만지는 방법론의 중핵이기 때문이다.

  인의 제 운명에 대한 싸움은, 예컨대 “보라, 어둠이다/공평무사하신 무정한 어둠의 신/눈도 코도 입도 없는 그분이/시간의 옷자락을 끌고 걸어오신다”(「무정한 신」), “내 등딱지엔 ‘고(孤)’ 자가 새겨져 있다고//말해 봐/나의 전면(前面)보다는 너의 배후(背後)랄까/네 날개는 무슨 글자로 봉인됐는지/네 탈바꿈은 순조로웠는지”(「무당벌레」), “제 얼굴에서 점을 뺀 사람들이/하나같이 점을 빼라고 종용하는 세밑//점을 뺀다고 태생이 환해지지는 않는다/물론, 당신은/어제와는 다소 다른 사람이 되었지”(「어제의 겨울과 오늘의 쇼윈도 사이」), “주여, 우리의 위락이 우리의 고통을 상쇄하지 않고/우리의 명랑이 우리의 우주적인 비극을 거스르지 못하나이다/(다 함께) 당신의 죄를 자백하소서”(「Sagittarius Riging」), “우리를/아무 신이라도, 다시/진흙에서 빚어내소서”(「다른 못, 가시연」) 등과 같은 문양들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지만, 이 시집의 대부분의 시편들은 ‘운명’의 궤적이나 그 조건들에 대한 저항감으로 빼곡하게 둘러싸여 있다. 이러한 시인의 근본 기분은, 세 가지 매듭의 시편들로 흩뿌려지지만, 그것들은 서로 마주보고 함께 울려나면서 제 몸의 힘겨운 숨결들을 우리 앞으로 데려온다.

  것들 가운데 하나는 “이마에 작은 총알구멍을 달고/날아간 뒤통수를 긁으며/우리는 예의 바른 어른이 되었나/유행하는 모양으로 찢고 씹고 깨무는/어여쁜 입술을 가졌나”(「어른스런 입맞춤」)이라는 구절로 표상될 수 있을 ‘反성장’의 모티프들로 이루어진 시편들이며, 다른 하나는 “그럼 지금 당신을 먹어치우고 이 ID를 분실해도 상황은 똑같겠군/한 번도 자기에게 자기를 증명하려 시도하지 않은 자/나는 당신을 재발급하기로 결정했습니다”(「당신은 누구시길래」)라는 문양에 드러나 있는 것처럼 ‘현존재Dasein’의 자기정체성에 이미 깃들어 있는 덧없음을 현시하려는 시편들이다. 마지막 하나는 “죽은 시간들이 부족한 애도를 모아/뭉게뭉게 우울을 짓더니/한 모금씩 투명해지는 너를 두고/하늘의 모든 물들이 내려왔다”(「장마」), “취하고, 또 취했건만/만나면 그곳에 없는/어둔 욕망의 화려한 위장술/달려 달려가며 사방에 어둠을 뿌리며/(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울먹울먹 발자국에 고이는 새벽/잠든 네 얼굴에 내리는 빛 부스러기”(「사물, 그 쓸쓸한 이름을 위하여」) 등과 같은 이미지들로 표상될 수 있는 집요한 관찰과 청신한 감각과 섬세한 묘사를 통해 이루어진 세계의 외부 풍경들 곁에다 불길한 운명선과 혼란스런 마음결들을 덧씌운 시편들이다.

  세 가지 계열의 시편들은 시인 정한아가 보고 듣고 만지고 끝끝내 이루어내려는 예술 세계가 매끈하게 마름질된 고전주의 미학, 곧 ‘형식적 균제미’를 깨뜨리고 넘어서려는 자리에서 태어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것들은 모두 우리들 생활세계를 둘러싸고 있는 숱한 규범들과 제도들과 관행들의 무의식적인 배치, 곧 ‘상징계의 질서’를 벗어나려는 충동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일 뿐만 아니라 시적 전통의 여러 성좌들이 이루어내는 ‘이상적 질서’마저도 넘어서려는 미학적 기획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벤야민(W. Benjamin)이 말했던 ‘알레고리allegory’의 풍모를 따르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비단 그것이 시인의 지적인 태도와 방법론에서 나온 것이라 보기 어렵다. 오히려 그것은 그의 가족사의 숱한 얼룩들로부터 비롯된 ‘온몸’의 절규에 가깝다. 특히 ‘이미지즘’의 섬세한 외부 정경 묘사를 충실하게 구현하면서도, 그 곁에다 불길한 느낌들이 새어나오는 문양들을 맞세우고 있는 시편들은, 시인의 실존의 얼룩과 정념의 벡터가 ‘한정된 사물의 관조’, 또는 ‘잘 빚어진 항아리’라는 미학적 덕목이 넘쳐날 수밖에 없다는 시실을 반증한다.

  시집의 한복판을 차지하고 있는 「크루소 씨」 연작들이나, 「눈을 가리운 노래 ─ 주신제(酒神際) 1999」, 「백설공주」, 「그리스도의 순환」, 「론 울프 씨의 혹한」 등의 시편들은, 니체(F. Nietzsche)를 비롯한 여러 철학자들에게서 나온 사유의 모티프들을 ‘알레고리’의 문양으로 되새기고 있지만, 우리가 지금까지 말해 온 시편들만큼 매력적이지는 않은 것 같다. 그것은 어쩌면 시인 제 자신의 타고난 기질이나 체험이 아니라, 그가 읽고 탐구하고 편애했던 어떤 지식의 체계가 시가 씌어졌던 바로 그 순간에 훨씬 더 강력하게 펼쳐졌던 데서 기원하는지도 모르겠다. 더 나아가, 비평가인 나로서는 도저히 벼려낼 수 없는, 제 실존의 알몸뚱이를 처절한 아름다움으로 빚어내는 그 용기와 솜씨가 훨씬 더 매력적이라는 그 어려운 말을 해야만 하겠다. 그리하여, 시인 정한아의 저토록 순정한 영혼과 기백이 우리들 모두의 몸에서 다시 울려나는 그 감염의 현장들을 목도하고 싶을 뿐이다. “오늘은 언제나 마지막 오늘”이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지만, 저 “더러운 사랑”을 “멀리 돌아와 다오”(?떠도는 별?)라고 한사코 말할 수밖에 없는 ‘운명애amor fati’의 외침처럼.

 

 

몸이 가벼워 용감한 별들은

언제고

정들어 더러운 집을 떠난다

 

마을이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창백한 철쭉꽃 무리, 어스름 속에서

짐승 이빨처럼 사납게 빛나는

간악한 봄밤

 

단 한 번 부드러운 입맞춤도

맞잡은 두 손의 가느란 떨림도

오랜 세월 단 하나 사랑한 이름이 (맙소사)

아주 벌써 바스라진 작년의 나뭇잎

 

피뢰침에 초승달을 뾰족하게 꽂아 두고

옥상에서 마지막 담배를 나누어 태우며

별들은 백만 광년 먼 웃음을 깔깔거린다;

 

오늘은 언제나 마지막 오늘,

갈 데까지 가다오 정든 형제여

멀리 돌아와 다오 더러운 사랑

 

─ 「떠도는 별」 전문.

 

《문장웹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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