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건봉사

 

겨울 건봉사




  손홍규




지난겨울 어느 날 아침, 얼굴에 표정이 생겼습니다. 입을 움직이는 근육이 귀 쪽으로 당겨진 채 멈췄고 눈꺼풀을 여닫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얼굴 반쪽을 누군가에게 내주고 난 뒤에야 알았습니다. 불구는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잠복해 있다가 드러날 뿐이라는 사실을. 시린 겨울, 태백산맥 왼편은 고요했습니다만 바다를 끼고 있는 바람벽 아래에선 폭설이 내렸습니다. 서울에서 시작해 오십만 미터를 걸어 일주문 아래 섰습니다.

전쟁 때 유일하게 화재를 피했다는, 혹은 다른 전각들의 멸망에 동참하지 못했다는, 건봉사 일주문은 신들의 밥상처럼 네 다리로 우뚝 선 채 눈 덮인 산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당신을 닮은 사람을 보았습니다. 전술도로에서 절마당까지 길을 내고 있는 군인들 사이로 체인을 감아 캐터필러처럼 진한 자국을 만들며 달려온 눈빛 차 한 대. 허리까지 쌓인 눈 사이로 난 길을 걸어와 일주문을 올려다보던 당신은 이곳과는 평행하게 존재하는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 같았습니다.

 

 

그 사람을 호수에서 보았다는 기억이 났습니다. 얼어붙은 호수에 눈이 쌓여 있었고 호숫가에서 호수와 하늘이 닿는 희미한 경계를 바라보던 그이였습니다. 우뚝 서 있는 당신은 내리는 눈과 평행을 이루고 곧장 뻗어나간 당신의 시선은 지상과 평행을 이루었습니다. 첫 자위를 했던 열네 살 이후 세계는 시시했습니다만, 제가 지나온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가 존재할 수도 있음을 그이의 뒷모습에서 문득 알았습니다. 평행선 사이에서 영혼은 자유로웠고 이따금 그 영혼은 제가 속한 세계에 출몰하기도 합니다. 눈을 감지 못하게 된 뒤에야, 억지로 개안(開眼)한 뒤에야, 제 눈은 비로소 유령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호수에서 저는 유령과 더불어 지상의 모든 경계가 지워지는 순간을 목격했던 것입니다. 당신은 호랑이라는 기표에서 용맹함이라는 기의만을 취하는 잔인한 자들을 경멸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음과 모음처럼 흩날리다 지상에 내려와 그 누구보다 매끄러운 단어와 문장을 만들어 내는 눈송이, 그것들이 만들어 낸 평면의 언어를 읽을 줄 아는 사람과 똑같다고 해도 무방하겠지요. 그런 곳에서는 울어도 괜찮습니다만, 당신을 지켜보는 시선 때문인지 어깨를 들썩이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보는 이 없어도 숨고 싶다던 당신이기에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허허벌판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할 만큼 절망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라진 건 전각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서른한 명의 열반승 역시 아무런 자취가 없었습니다. 능파교를 건너 십바라밀 사이를 지나 대웅전으로 향하던 당신을 닮은 사람은 열반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했습니다.

드넓은 절터만이 과거의 영화를 증명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눈 덮인 벌판이었습니다. 금강저라 해도 좋을 커다란 고드름이 지상을 혹은 그 아래 심연을 겨누었고 두툼한 털모자를 쓴 수행자가 싸리비를 쥐었습니다. 당신은 투시라도 하듯 눈 덮인 안내문 앞에 오래도록 서 있었습니다. 눈을 쓸어버리자 건봉사의 이력이 드러났습니다. 몰라도 좋을 것들을 너무 많이 알면서 살아가는 게 고달프다고 말하는 듯한 눈빛이었습니다. 사전 속에 처박아 두고 싶은 단어들이 눈으로 내리던 날이었습니다.

당신을 닮은 사람은 눈으로 빚은 사람인 것만 같았습니다. 부도와 대웅전을 힐끔거렸고 산신각을 올려다본 뒤 명부전을 노려보며 적멸보궁을 거닐던 당신은 조금씩 희미해지고 있었습니다. 어느 곳에나 있다는 부처를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그걸 딱히 아쉬워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당신이었다면 어느 곳에나 있다는 건 그 어느 곳에도 없다는 말이나 다름없다고 중얼거렸겠지요. 과거의 절터에서 새로 지었다는 절을 바라보는 일만큼 쓸쓸한 의무도 없습니다. 바람이 불고 눈보라가 날렸습니다. 멀리 가지는 않을 겁니다. 어딘가에 한 꺼풀로 내려앉아, 지상의 기억 위에 내려앉아 진심은 함부로 보여 주지 않는 법이라고 속삭이는 일을 그치지 않을 겁니다. 눈은 구덩이를 채우지 않고 지상의 결을 따라 쌓입니다. 솟으면 솟은 대로 꺼지면 꺼진 대로 더러운 곳이나 정갈한 곳이나 구분하지 않고 쌓입니다. 흐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번 내리면 그곳이 수행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눈은 늘 용맹정진을 합니다. 공양간에 내린 눈이 부러웠습니다. 아궁이와 솥에서 풀려 나온 열기가 천장에 닿으면 지붕 위 눈은 이 세상을 오래도록 견딜 필요가 없으니까요. 제 몸을 온기가 통과하지 못하도록 혼신의 힘을 다한 뒤 스러지면 그만이니까요. 눈을 뭉치면 주먹밥을 떠올리고야 마는 가난한 저로서는 공양간과 한 걸음이라도 가깝다는 사실조차 위로가 됩니다. 당신이 멀리 있어도 위로가 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아득해도 좋습니다. 당신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오래도록 벌판에 서 있을 수 있으니까요.

그러다 보면 이렇게 우담바라를 만나기도 합니다. 많은 걸 욕망하며 살았지만 뜻대로 이루지 못한 이유는 대부분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일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담바라가 아닌 걸 알고 있었지만, 제게 상상과 현실은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조금 뒤 엔진 소리가 들렸습니다. 필시 보리라는 이름을 지녔을 누런 개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들었습니다. 운전석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차는 움직였습니다. 공허를 실은 차가 몸을 돌려 절마당을 빠져나갔습니다. 해탈이란 이렇게 사소한 일이라고 말하듯 눈길을 꾹꾹 눌러 가며 사라졌습니다. 그때 금강저 하나 처마에서 툭 떨어졌고 누구의 가슴에도 상처를 주지 않은 채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일주문 아래를 다시 지나 당신을 닮은 사람의 발자국을 따라 적멸보궁을 거닐어 보았습니다. 그 동선이 만다라를 닮았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그것만으로도 당신이 무엇을 느끼는지 알 수 있을 듯했습니다. 다음에는 유령이 되어서라도 당신과 함께 건봉사에 가렵니다. 평면의 언어를 읽어 내고야 말 것입니다. 오십만 미터를 되돌아가야 합니다. 감을 수 없는 제 눈에서 눈물 한 방울 떨어졌습니다.《문장 웹진/2008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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