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어 낱말

 

외국어 낱말




편혜영




그는 계절이 두 개뿐인 나라에서 왔다. 더운 여름과 아주 더운 여름. 어떤 사람들은, 그는 덧붙였다. 계절을 셋으로 나누기도 해. 여름과 더운 여름과 아주 더운 여름. 내가 웃자 그도 슬며시 따라 웃었다. 웃음 끝에 그가 물었다. 너는 겨울을 좋아하니? 이제껏 계절에 대해 받아 온 질문들이 떠올랐다. 계절에 관해 받아 온 질문들은 대개 무슨 계절을 좋아하느냐는 것이었다. 도대체 왜 그런 게 궁금하지, 라는 생각이 드는 질문이었다. 말하자면 나는 계절에 대한 선호가 전혀 없다고 할 수 있었다. 조금 생각하다가 대답했을 것이다. 휴가가 있는 여름이라고 근로에 지친 사무원처럼. 벚꽃 피는 봄이라고 여성스럽게. 혹은 생각하는 말투로 가을이라고 대답했을 수도 있다.

 

 

그러니 겨울이라고 대답하지 않았을 이유도 없다. 겨울, 이라고 말할 때는 어떤 어투였을까. 점점 무거워지는 나이가 떠올라 한 해를 보내는 서운함이 묻어 있었을지, 날 벼린 스케이트 날처럼, 불어오는 칼바람처럼 차가운 말투였을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그때그때 달랐을 것이다. 어떤 대답이든 누군가 그 질문을 물었던 계절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쩌면 다음 계절, 혹은 지나가 버린 계절을 답했을지도.

나는 그의 나라 말을 몰랐다. 그도 내 모국어를 몰랐다. 우리는 각자 조금씩 아는 외국어 낱말을 이어 붙여 짧게 얘기했다. 그 말은 서로의 말을 완벽하게 이해하거나 이해시키기에 적당한 낱말의 뉘앙스를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는 말이다. 나는 겨울은 추워서, 라고만 대답하고 말을 흐렸다. 춥다는 감각을 그가 알까. 그것은 너의 나라에서 바깥의 덥고 습한 기운을 없애기 위해 실내에 틀어 놓은 에어컨 때문에 느껴지는 서늘함의 백배쯤 되는 감각이라고 설명했다. 나는 그의 나라에 가서 설비가 잘된 건물에 들어가면 이 나라가, 더운 여름과 아주 더운 여름 두 계절뿐인 나라라는 것을 자주 잊는다. 내가 생각하는 그 나라의 계절은 덥고 습한 우기의 실외와 춥고 한랭한 실내뿐이다. 그는 그 감각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걱정 마, 내가 말했다. 비행기는 곧 인천공항에 도착할 것이고, 그는 머지않아 추위를 물리적으로 이해하게 될 거였다.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기가 태어난 나라를 떠나 일곱 시간 비행기를 타고 도착해야 하는, 어느새 겨울을 맞은 나라로 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겨울에 주로 뭘 하니? 그가 물었다. 겨울에만 할 수 있는 게 있어. 스키를 타거나 스케이트를 타거나 입김을 내뿜는 일. 스키나 스케이트에 관해서는 그도 알고 있었다. 다만 해보지 않았을 뿐. 나 역시 알고 있지만 해보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너와 같아. 내가 말했다. 그럼, 너도 겨울을 잘 모르는 셈이군. 그가 억지를 썼다. 나는 점점 말하기가 귀찮아졌다. 아니야, 나는 추위를 잘 알아. 삼십 년 넘게 추위를 경험해 봤어. 게다가 아주 추위를 잘 타는 체질이라고. 너희 나라에서 건물에만 들어가면 추워서 벌벌 떠는 걸 봤잖아. 그럼 너는 겨울에 뭘 하는데? 겨울에 나는, 뭘 했더라. 추워서 몸을 작게 했다. 웅크리다, 라는 외국어가 떠오르지 않아 둘러댔다. 왜 몸을 작게 해? 그가 물었다. 너도 한번 추워 봐라. 추운 데 걸어 다니면 내 몸이 칼처럼 깨질 것 같다. 네가 가져온 옷으로는 어림도 없다. 나는 그가 트렁크에 넣어 온 옷을 트집 잡았다. 그리고 또 뭘 하니? 그가 지치지도 않고 물었다. 겨울에 나는 졸려서 많이 자고, 자고 일어나면 허기가 져서 많이 먹어. 그가 네가 먹어 봤자지, 하는 얼굴로 쳐다봤다. 그런데, 몸이 칼처럼 깨질 것 같다는 계절이라니, 맘에 든다. 그건 실은 마음이 ‘깨어지는’ 느낌이지? 나는 방금 네가 외국어로 한 말이 ‘겨울은 마음이 깨지는 계절이다’라는 게 맞는지 확인했다. 그는 조금 다르긴 하지만 다른 표현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어쩌면 그가 살아 보지도 않은 계절, 겨울을 이해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했다.

공항에 내렸을 때는 뜻밖에 따뜻한 겨울이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의 옷차림을 보자 그는 조금 질린 것 같았다. 저렇게 두꺼운 옷으로 지내는 계절이구나. 그가 자신의 트렁크를 후회하듯 말했다. 아니야, 사람에 따라 달라. 넌 더위를 잘 버티니까 추위도 괜찮을 거야. 정말이야? 그가 물었다. 농담이라고 말하려다가 그의 얼굴을 봤다. 그는 유리창 너머의 겨울을 두려운 듯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겨울은 누구에게나 추운 계절이라고 말했다. 너만 추운 게 아니라 나도 추워. 거리의 사람들도 춥고 가게의 사람들도 춥고, 집에 있는 사람들도 추워. 그러니 혼자만 춥다고 외로워할 필요 없다, 는 말은 속으로 삼켰다. 위로란 별 게 아니다. 혼자가 아니라는 것, 실은 우리 모두가 그렇다는 걸 알려 주는 것. 겨울은 내게 위로의 감각을 몸으로 이해시켜 주었다. 추위에 떠는 그에게 추위 잘 타는 나는 목도리를 끌러주었다. 그 목도리는 계절이 두 개 혹은 세 개인 그의 나라 어딘가에 아직도 있을 것이다.《문장 웹진/2008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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