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멘트 침대

 

   [민들레 문학특강 참가 후기]

 

시멘트 침대

 

김신용

 

 

 

 

지하도 구석에 구겨 박힌 몸뚱이 하나가 벌레처럼 꿈틀거린다.

오늘도 숲 속의 너와집을 꿈꾸고 있는 것일까?

뿌린 만큼 거두는 흙 속의 집을 짓고 있는 것일까?

그 꿈틀거림이, 낮게 자신을 성찰하는 자의 몸짓을 닮았다.

햇살에 반짝이는 나뭇잎에도 웃음을 보내 주고

공원에서 날고 있는 비둘기에게도 미소를 던져 주는, 그 바람의 얼굴을 닮았다.

자신이 흘린 땀방울이, 자신을 갉아먹는

손톱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저런 표정을 가지는 것일까?

 

〈졸시, 「시멘트 침대」 전반부〉

 

   암담하다. 벽을 맞댄 것 같다. 벽이 벽을 보고 마주선 것 같다. 대체 이 벽을 어이 허무나?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처럼 죄수들에게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주어 돌처럼 굳어버린 벽을 허물어야 하나? 새처럼 날아온 음악이, 그 돌의 벽을 쪼게 해야 하나? 그러면 시가, 혹은 내 시가, 그 아름다운 음악이 될 수 있을까? 돌의 벽을 쪼는 그 새가 될 수 있을까? 그러나 그것은 영화의 한 장면일 뿐, 시가, 음악이, 도무지 돌의 벽을 쪼는 새가 되지 못하는 암담한 벽 앞에서 벽이 되어 서 있으면, 그러나 벽이 무엇인가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돌처럼 굳어버린 입으로 무엇인가 말하려고 하는 것 같다. 벽 속에서 걸어 나가고 싶다고, 조그맣게 갈라진 틈새만 있어도 빠져나가고 싶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면 시가, 혹은 내 시가 그 갈라진 틈새가 될 수 있을까? 굳어버린 돌의 벽의 조그만 균열이 될 수 있을까? 그러면 이것 또한 변신의 한 얼굴이 아닐까? 살아 있기 위해 무수히 자신을 변화시켜야 하는 변신의 또 다른 얼굴은 아닐까? 대체 저들에게 시를 알게 해서 뭐 어쩌자는 것인가? 그러면 시가 ‘인간의 얼굴을 한 시장’의 하나의 물품이 될 수 있을까? 우리는 마치 구호품처럼 그 물품을 저들의 손에 쥐어주면 되는 것일까? 시는 본래 인간의 얼굴을 한 시장의 하나의 상품이라고 말해 주면 되는 것일까? 경쟁에 이기지 못하면 도태되는, 이 차가운 세계의 구조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말해 줄 수 있을까?

   다시 또 암담하고 착잡하다. 지금도 내 자신의 얼굴이 살아남기 위한 변신의, 그 무수한 얼굴들 중의 하나 같기 때문이다. 아니, 그 모든 변신의 합계 같기 때문이다. 이 얼굴을 들고 과연 저들에게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시는,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주는 물건이라고 말해야 하나? 아니면 카타르시스를 가져다주는 것이라고 말해 주어야 하나? 하나의 동화 같은 이야기를 가져다주면 저들의 마음이 밝게 가라앉을까? 이솝 우화나 재밌는 민담 같은 이야기를 해주면 저들을 웃게 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뾰족한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벽을 허물 질문이, 대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 노릇을 어이 하나, 그렇다고 두 손 놓고 있자니 또 너무나 암담해진다. 가슴이 답답해진다. 무엇인가를 해주어야 하는데, 해주고 싶은데 뾰족한 대책이 떠오르지 않는다. 지난날, 지하도 구석에 구겨 박혀 벌레처럼 꿈틀거리던 몸뚱이만 자꾸 떠오른다. 대낮부터 독한 술로 자신을 마비시키고, ‘시멘트 침대’에 누워 벌레처럼 꿈틀거리던 순간만 자꾸 떠오른다. 신문지 한 장으로 자신을 가리고 이 세상에 대해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는 얼굴로 지하도 바닥에 웅크리고 있던 순간만 자꾸 떠오른다. 내 자신이 이럴진대 과연 그런 내가 저들에게 무슨 말을 해줄 수 있다는 말인가? 누구는 분석심리학에 기초한 시 치료의 기능을 적용해 보라고 한다. 그러니까 포에트리 테라피(poetry therapy)의 기능을 되살려 보라고 말한다. 시 치료라니? 그러면 저들이 무슨 정신병동의 갇힌 죄수라도 된다는 말인가? 시가 가지고 있는 카타르시스 기능, 즉 정화 기능으로 치료를 해야 할 무슨 병자라도 된다는 말인가? 그러면 한 편의 시를 읽어주는 것만으로 저들의 돌처럼 굳어버린 마음속에 비를 내리게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아니, 그 비가 가슴속에서 돋아나게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암담하다, 아니 더욱 착잡해진다.

   문득 브레히트의 시집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 실려 있는 「임시 야간 숙소」라는 시가 떠오른다. 듣건대 뉴욕/ 26번가와 브로드웨이의 교차로 한 귀퉁이에/ 겨울철이면 저녁마다 한 남자가 서서/ 모여드는 무숙자들을 위하여/ 행인들로부터 동냥을 받아 임시 야간 숙소를 마련해 준다고 한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이 세계가 달라지지 않는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나아지지 않는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착취의 시대가 짧아지지 않는다//라고 끝을 맺는, 시가 자꾸 떠오른다.

   그래, 그러한 방법으로는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이 없다. 마치 환상방황(環狀彷徨)처럼 언제나 제자리에서 맴돈다. 그래도 무엇인가를 해주어야 한다. 빈곤과 절망의 악순환이 저들의 심장을 돌로 만들어버리기 전에 무엇인가를 해줄 수 있다면 해주어야 한다.

   그저께, 중산층에서 하층민으로 몰락해 가는 미국의 하우스푸어, 또는 워킹푸어들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조그만 경제불황의 충격에도 속절없이 무너져 가는, 그 인간낙엽들을 보았다. 그렇다, 세계의 경제는 그러한 구조로 만들어져 있다. 나비 효과는 국경이 없다. 글로벌 세계경제는 그렇게 국경선도 없이 해일처럼 태풍처럼 몰려온다. 그리고 그 인간낙엽들은 속절없이 집을 잃고 직장을 잃고 거리의 노숙자 신세로 내몰린다. 그리고 자신들의 심장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가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그 돌이 된 심장으로 세계를 쳐다보게 한다. 그런 부랑의 삶은 마침내 자기 방기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대가로 절망이라는 보수를 얻는다. 그 보수는 너무도 매혹적이다. 이 세계에 대해 어떤 기대도 갖지 않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가는 얼굴로, 벽이 벽을 쳐다보는 느낌은 어떨까? 과연 벽을 벽이라고 느낄 수는 있는 것일까?

   그런 의문으로, 그러나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저들에게 무슨 말인가를 해주어야 한다.

   그래도 시는 천연적으로 치유(healing) 기능을 갖추고 있으므로. 세계를 보는 자신만의 시선을 갖게 해주므로. 보이지 않는 인간의 이면을 보는 눈 또한 갖게 해주므로. 그 기능을 살려 저들에게 무엇인가를 말해 주어야 한다.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저들의 가슴속에서 비가 돋아나게 해주어야 한다.

   그러한 느낌으로 저들 앞에 선다.

   그리고 ‘집’이라는 주제로, 변주되는 시의 언어와 메시지를 떠올리고 분석할 수 있도록 설명을 해준다.

   ‘집’이란, 무엇인가?

   노숙자로 전락할 때 가장 먼저 잃는 것, 그것이 집이 아닌가?

   당신이 하우스푸어가 될 때, 또는 워킹푸어가 되었다가 노숙자로 전락할 때, 가장 먼저 손으로 붙잡고 싶은 것은 ‘집’에 대한 열망이 아닌가?

   그리고 그것은 원초적인 마음의 고향이며 어머니의 품속 같은 곳이 아닌가? 라고 말해 준다.

   부끄럽다. 대체 이 설명이, 이 관념적인 용어가 저들에게 무엇이 될 수 있을까? 희망이 될 수 있을까? 하는 그 의문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관념밖에 손에 쥐고 있지 않으므로 그것을 저들의 손에 쥐어주고 뒤돌아설 때마다 다시 벽이 된 느낌이지만, 지금 시인이라는 이름으로 저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이것밖에 없으므로, 참담하지만, 그것을 손에 쥐어주고 뒤돌아선다.

   그리고 벽 한 귀퉁이라도 허물어졌기를.

   돌처럼 굳어 가는 심장에 실핏줄이라도 젖어들기를, 빌어 본다.

   그래, 그들은 끊임없이 새를 날려 보내는 존재들이므로.

   지하도에 쭈그려 앉아, 무엇인가를 향해 손을 내밀 때마다

   새를 날려 보내는 존재들이므로.

   물론 한 마리의 새도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그러나 한 마리의 새도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욱 끊임없이 새를 날려 보내야 하는 존재들이므로.

 

   《문장웹진 11월호》

 

 

 

 

   * 민들레 문학특강은 서울시가 운영하는 노숙인 시설의 노숙인을 대상으로 9월 15일부터 약 한 달 간 ‘제1회 민들레 예술문학상’의 부대행사로 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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