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셔 고양이의 미소와 예술의 사라짐

 

   사유의 드로잉_제4회

 

 

체셔 고양이의 미소와 예술의 사라짐

 

강수미

(미학,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술연구교수)

 

 

 

 

 

   1. 위장이 내는 소리

 

   그녀는 지금 늦은 저녁 운동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다. 운동이라고 해봐야 1시간 정도 음악이든 뉴스든 휴대폰을 통해 뭔가 들으며 아파트 뒤편 산책길을 걷다 오는 정도다. 하지만 막상 걷기를 끝내고 집에 올 때쯤에는 배가 고파지기도 한다. 9층 자신의 집에 가기 위해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지금도 그녀는 살짝 시장기를 느끼며 이어폰을 타고 들리는 영어 문장에 귀 기울이고 있다. 물론 자기 뒤에 서 있는 낯선 남자와 엘리베이터에 단둘뿐이라는 사실이 신경 쓰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딱히 경계할 분위기도 아니어서 그냥 멍하게 귓속으로 스며듣는 그 기계적 재생 음을 듣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17층 단추에 불이 들어와 있는 것을 보니 이 남자는 거기 사나 보다’ 뭐 이런 뻔한 생각을 하면서.

   귀에는 여전히 미국 클린턴 정부 시절 부통령을 지낸 앨 고어가 CNN의 ‘래리 킹 라이브’에 출현해 무게감 있는 목소리로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그가 환경운동의 다급함을 강조하면서도 부정적인 전망을 피하기 위해 “위험과 기회라는 두 가지 의미가 등을 맞대고 있는 중국의 한자 위기(危機)”를 예로 들고 있는 순간 어디선가 커다랗게 “꾸르르꺼러러럭”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아니 정확히는 고어의 “데이 해브 투 심볼스 백 투 백 퍼스트 민스 댄저 앤 더 세컨 민스 아퍼튜니티”와 겹쳐 이중의 불협화음이, 그러나 한쪽 소리는 매우 정확하고 가깝게, 다른 쪽 소리는 알 수 없이 두렵고 낯설며 기이하게 들려온다. 찰나의 순간 그 소리는 사라지고, 마침 9층에서 열린 엘리베이터 문을 통과해 그녀는 내린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생경하고 이질적으로 느껴진 그 소음이 자신의 뱃속에서 밖으로 울려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것, 그러니까 자신의 몸속 깊은 곳에서 내장이 어떤 다급한 신호처럼 울린 그 배고픔의 소리가 그렇게나 멀고 생경하고 이질적인 무엇처럼 느껴지다니. 뒤에 얼굴도 모르는 그 낯선 남자의 존재보다 더 무섭고 거칠게 느껴진 그 소리가 자기 뱃속의 무엇이 내는 소리라니. 그녀는 이 사실에 너무나 놀란다. 그리고 좀 전에 마치 이방인의 침입처럼 불쑥 그녀의 귓속으로 날아들었던 그 기이한 “꾸르르꺼러러럭” 소리가 사라져 버렸지만, 계속해서 자신의 몸과 마음에 떠돌고 있다는 사실에 더욱 놀란다. 유령 같고 허깨비 같은 그 소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몸의 확실성만큼이나 뚜렷하게 존재하는 저 깊은 몸속의 어떤 장기(臟器)가, 어떤 물리적 메커니즘이 내게 보내는 그 소리.

   문득 그녀는 며칠 전에 읽었던 보드리야르의 책 구절을 떠올린다. 프랑스의 사회학자이자 평론가인 그가 과학과 분석적 지식과 기술이 세계를 재구조화한 근대 이후 세상은 사라짐의 세계가 되었다고 단언하며 쓴 다음과 같은 말이다.

 

   “사라져 버렸지만, 그럼에도 사라지기를 멈추지 않는 무언가를 이렇게 항구적으로 연장하고 있다. 따라서 전체 예술은 죽기 전에, 그리고 죽는 대신에 사라질 줄 아는 것이다. (…) 이건 마치 루이스 캐럴(Lewis Carroll)의 체셔(Cheshire) 고양이와 같은데, 그놈의 미소는 고양이 형상이 사라지고 난 후에도 여전히 공중에 떠다닌다. (…) 그러므로 고양이의 미소는 그 자체로 무시무시하지만, 그 고양이 없는 미소는 훨씬 더 무시무시하다.”(Jean Baudrillard, 하태완 역, 『사라짐의 예술』, 민음사, p. 31)

 

   며칠 전 새벽녘 책상에 앉아 위에 인용한 보드리야르의 문장을 읽을 때 그녀는 머리가 좀 아파 왔다. 짜증도 슬슬 났다.

 

   ‘그러니까 근대 이후로 우리 문명이 점차 자연의 물질적인 상태에 근거를 두던 데서 벗어나 고도로 관념화되었다고, 그 와중에 테크놀로지가 우리 문화와 예술을 더욱더 비물질적인 것으로 만들었다고, 이제는 시간과 공간의 물리적인 제약을 벗어난 완전히 비물질적인 상태의 문명에 이르렀다고 말하는 것 아냐. 그걸 당신은 “사라짐의 예술”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 아냐. 근데 뭐 이렇게 어렵고 모호하게 말해. 당신은?’

 

   이런 생각이 들어 머리도 아파 오고 짜증도 났던 것이다. 다만 그녀는 보드리야르가 체셔 고양이를 예로 든 것은 마음에 들었다. 사실 앞선 문장들이 이해가 안 가고 뚜렷하게 의미를 파악하기도 힘들었지만, 루이스 캐럴의 체셔 고양이를 언급한 대목을 읽는 순간 그녀는 그 프랑스 지식인 특유의 난해한 주장들이 금세 손에 잡히는 듯했다. 언젠가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 없는 고양이의 미소를 그린 그림, 이빨만 동동 지면에 뜬 채 입이 찢어지도록 웃고 있는 그 고양이 형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으며, 그 기이한 형상에서 느꼈던 독특한 감각이 섬광처럼 되살아났던 것이다. 말하자면 존재와 부재 사이에 어떤 미세한 베일처럼 드리워진 것, 이를테면 전체를 압도하는 부분의 미약하지만 끈질긴 힘 같은 것, 요컨대 잡을 수 없지만 안 느껴지는 것도 아니고 무시하자니 커다랗게 울리는 어떤 것이 체셔 고양이 형상을 언급한 대목에서 감각을 넘어 의미로 전달됐다. 그래서 다행히도 그녀는 보드리야르의 그 복잡한 현대 문명론 내지는 현대 예술론을 이해하며 넘어갔다. 혹은 이해한 것으로 치고 책을 덮었다.

   그런데 자신의 내장이 체셔 고양이와 그 미소처럼 실체가 없이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순간을 경험한 지금, 그녀는 새삼 보드리야르의 문장에 헛웃음을 치고 있다. 그의 말처럼 “아무튼 아무것도 간단하게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말에 승복하기 전에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아무튼 어떤 것도 사라지기에 앞서 존재한다.’고 읊조리면서. 그 읊조림에 장단을 맞추듯 자기 몸 저 안쪽에서 울리는 낯선 친밀함(uncanny)의 소리를 들으면서.

 

 

   2. 현대미술의 미소

 

   ‘체셔 고양이의 미소’라는 모티브가 매력적인 이유는 아마도 그것이 구체적으로 우리 머릿속에 형상을 그려 주기 때문일 것이다. 자세히 따지고 보면 그만큼 모호한 형상도 별로 없지만, 우리는 고양이도 익히 봐왔고 미소도 금방 떠올릴 수 있으니까. 그렇게 자주 봐왔고 익숙하게 연상해 낼 수 있는 고양이와 미소의 결합, 그리고 고양이는 사라지고 미소만 공기 중에 일종의 기분 좋은 향기처럼 감촉 좋은 실크처럼 흩날리는 상황이 멋지지 않을 리 없다. ‘어쩌면 오늘의 현대미술 또한 그런 것이 아닐까?’ 이쯤에서 그녀는 보드리야르가 말한 사라짐의 예술이 정말로 어떤 것인지, 혹은 어떤 상태의 예술인지 온전히 알 것만 같다.

   현대미술은 1980년대 본격화된 포스트모더니즘을 통과한 이후로 고정된 미학의 범주나 영역에 귀속되지 않으며, 미술사의 선형적이거나 인과적인 발전과정을 따라 전개되지 않는다. ‘미의 절대적 기준’이라는 관념론 미학의 신념이 별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지금 여기서, 미술가들은 일상의 아주 작은 것으로부터도 무제한의 예술(art unlimited)을 시도한다. 그렇게 해서 예컨대 데미언 허스트(Damien Hirst)의 2005년 개인전 《새로운 종교 New Religion》는 약국에서 파는 알약이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형상을 대신하는 경지까지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이다. 또 “오래된 것을 사랑스럽게 훼손함으로써 새로운 것을 만들기를 즐기는” 작가 크리스티안 마클레이(Christian Marclay)는 자기가 찍지도 않은 수많은 옛날 할리우드 영화에서 오로지 시계가 나오는 장면만을 편집해 24시간 분량의 비디오 작품 《시계 The Clock》를 만들 수 있었다. 디지털 모자이크 방식을 써서 실제 시간과 24시간 일치하며 하루 종일 상영되는 기이한 구조의 그 비디오아트 작품 말이다. 전시 개막식 날 미술관에서 직접 태국 카레를 요리해 관객들이 나눠 먹도록 한 리크리트 티라바니자(Rirkrit Tiravanija)의 미술은 어떤가? 일순간 백색의 네모난 미의 공간을 주방 겸 식당으로 만드는 그의 미술을 감상자가 가장 멋지고 훌륭하게 감상하는 방식은 작가가 대접하는 그 음식들을 맛있게 깨끗이 먹어치우는 일이다.

   이와 같은 몇몇 현대미술 사례를 기억해 내며 현대미술의 독특한 존재 방식, 그러니까 일상의 대수롭지 않은 물건으로 성스러움을 대신하고, 과거의 필름을 요리조리 재접합시켜 극히 현실적이면서도 무한히 반복될 수 있는 24시간을 창조하고, 음식을 만들고 나눠먹는 와중에 정작 미술의 창조와 향유과정을 모두 수행하는 작품의 기묘한 방식들을 생각하면서 아파트 9층에 사는 그녀는 불현듯 아까보다 더 강렬한 배고픔의 소리를 듣는다. 그 소리는 현대미술이 삶의 영역으로, 작가 없는 미술계로, 사라짐의 차원으로 스며들면서 그 존재감을 드높이는 미소만큼이나 멀지만 강렬하게 그녀 귓속으로 파고든다.

 

 

   《문장웹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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