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에 병든 자

 

   [연재 에세이]

 

 

아름다움에 병든 자

― 사막의 미학 4

 

글/사진_김태형

 

 

 

 

 

 

   투바인 여자들이 모여서 노래 부른다

 

   알타이 산맥의 안쪽으로 말을 타고 들어가면 온갖 야생화가 피어 있고, 구름이 지나가지 않아도 깊은 그늘이 서늘하게 맑은 빛으로 드리워진 아름다운 계곡이 있다고 했다. 한여름인데도 계곡에 아직 녹지 않은 빙하가 푸르게 빛나고 있다고. 이곳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대상을 소유할수록 나는 그것으로부터 더욱 멀어질 뿐이다. 소유한다는 것 자체마저 아름다움의 본질과 무관하다. 그러나 나는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그 아름다움을 갖고 싶었다.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을,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려고 했다. 설령 그것이 나를 파멸에 이르게 한다고 해도 나는 아름다움을 갖고 싶었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는지 모른다. 바위샘물로 두 눈을 씻고 사막의 황량한 아름다움을 볼 수 있으리라는 믿음은 어쩌면 나 자신을 영원으로 환원하고 싶은 열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름다움에 병든 자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는 이미 아름다움 그 자체로 자신을 환원해 버리려고 한다.

   그래서였을까. 오늘 하루는 혼자 남기로 했다. 다시 못 본다 한들 그 아름다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름으로만 남은 계곡을 계속 그 이름으로만 남도록 하고 싶었다. 아침 일찍 길을 떠나기 위해 서둘러 짐을 챙기고, 뭐 놓고 가지나 않을까 구석구석 둘러보는 눈길 대신 나는 그저 하루만이라도 혼자가 되기로 했다. 느지막이 침대에서 일어나 점심을 먹고 먼 잿빛 산맥이 바다처럼 펼쳐진 곳을 바라보며 언덕 위를 걷고 싶었다.

 

 

 

   어젯밤에 들려온 노래 소리 때문이었다. 작은 탁자에 둘러앉아서 게르의 문을 열어 놓고 투바인 여자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어린아이를 저마다 무릎 위에 안고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지만, 오히려 다른 이의 노래를 가만히 서로 듣고 있는 것 같이 그들은 귀가 맑은 고요 속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렇게 그이들은 저녁 노래를 불렀다. 석양은 언제나 느리게 저물고 별이 뜨기까지는 아직 이른 것이어서 서로 모여 앉아 부르는 그 노래는 저녁 내내 끊이지 않고 머뭇거리는 일몰과 늦은 어둠을 이어 주고 있었다.

   그 노래 소리가 혼자 남은 게르 안에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천창(天窓) 위를 스쳐가는 바람소리였다. 어젯밤 내가 뒤에 남겨 두고 온 폐허 때문이었는지 더욱 그 노래가 다시 듣고 싶었다. 그 적막한 시간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고대의 언어는 침묵으로부터 탄생했다. 막스 피카르트는 그것을 ‘사건’이라고 했다. “모든 말들은 그 가장자리가 침묵에 둘러싸여 있다. 그렇게 됨으로써 말은 맨 먼저 자기 자신이 되며 그 다음에 비로소 다음의 말 곁에 있게 된다. 말은 침묵이 자신에게 주는 한계에 의해서 형상화되고 그 형태를 얻는다.”(『침묵의 세계』) 침묵은 말을 끊는다. 아니, 말은 저 홀로 막다른 절벽을 마주하고야 만다. 그때 침묵은 더 이상 이어질 수 없는 말을 어둠 속으로 이끈다. 그 단절된 상태를 불쑥 드러내고야 만다. 급기야 침묵은 다른 말을 불러낸다. 침묵은 단절이다. 그러나 침묵은 다른 말에 가까스로 다가서려고 한다. 그렇게 해서 다른 말들이 탄생한다. 그 자리에 비로소 나와 당신이 있는 것이다.

   말갛게 늦별마저 다 뜰 때까지 잠자리에 들어야 할 하루의 마지막까지 어젯밤 그이들은 노래를 이어 부르고 있었다. 아버지의 이름을 성(姓)으로 받은 아이들을 안고서 저녁 어둠에 하루가 툭 끊어져 버리지 않도록, 그 낮은 목소리로 이어온 삶을, 귀를 기울여 서로 노래 부르고 있었다. 별들이 밤하늘을 혼자서도 짊어지고 갈 수 있을 때까지는 그 오래된 노랫말은 그치지 않고 있었다. 그 성스러운 노래를 들었다.

 

 

   해발 1900m의 적막

 

   천창 아래 매단 유리병이 떨렸다. 푸른 하늘과 고요한 바람을 기원하는 의미로 달아 놓은 것 같았다. 그 속에 담긴 물이 점점 푸른빛으로 바뀌고 있었다. 바람이 제 눈물 속에 가라앉으면 무엇이든 제 무게만으로 고요해질 텐데, 내가 아는 별은 어젯밤에도 뜨지 않았다. 언덕에 앉아 어둔 밤하늘이 열리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적막했다. 침대에 팔베개를 하고 누워서 천창으로 구름이 흐르는 것을 한참 동안 올려다보았다. 알타이 산맥의 끝자락에 지은 게르에 누워서 바람이 높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해발고도 1900m의 산자락을 지나가는 바람은 제법 세찼다. 그래도 반쯤 열어 둔 문이 바람에 삐꺽거리는 소리가 마치 누군가 인기척을 내며 뭐하느냐고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혼자 있는 것 같지 않았다. 한 차례 세찬 바람에 끈이 풀린 문을 다시 반쯤 잡아매면서 잠시 햇빛 맑은 문 밖을 내다보다가 탁자에 돌아와 앉았다. 머리 위를 지나가는 바람 대신 문 밖의 햇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침에 받아 둔 보온병의 뜨거운 물로 커피 한 잔을 만들어 탁자에 올려놓고 있으니 어쩐지 좀 낯설었다. 핸드폰을 가져오기는 했지만 아예 로밍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어디서도 연락이 올 일은 없었다. 게다가 이곳은 아예 통신마저 안 되는 지역이니 나를 부르려면 내 게르의 문을 여는 수밖에 없다. 다급하게 일거리를 건네고 사라지는 목소리도 광고 문자도 나의 게르까지는 들어올 수가 없었다. 함부로 내 시간을 점령하던 그 전화벨이 더 이상 울리지 않았다. 아무 때나 불쑥 나를 불러내던 그 강제된 시간이 이곳에는 없었다. 그런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이곳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나를 낯설게 만들었다. 그동안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을 가져 보지 못했던 것이다.

 

 

   문명으로부터 멀리 외떨어진 낯선 오지를 가는 데도 여행 짐 하나 내 손으로 꾸리지 못했다. 단 며칠이나마 자리를 비우는 일이 여간해서 쉽지 않았다. 그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가까스로 일을 마무리하고 나자 내게 주어진 것은 이미 출발하기에 늦은 시간뿐이었다. 공항으로 가는 리무진을 기다리다가 비행기가 연착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 나는 겨우 마음을 놓을 수가 있었다.

   그 어떤 지시와 의무를 수행할 필요도 없는 상태에 놓여 있고 보니 가장 먼저 내 몸이 이 낯선 시간을 본능적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몸은 지극하게도 수동적이었다. 외부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서 우리의 몸은 맹목적이며, 게다가 무목적적이기까지 하다. 그저 우연에 내맡길 뿐이다. 이런 것들이 진화의 원리가 아니었던가. 살아남기 위한 저 생명의 원리들이 나는 어딘가 대단히 수동적으로만 느껴졌다. 어떤 일을 해야만 되는 그 일상의 질서가 위반된 순간을 내 몸은 낯설게 반응하고 있었다. 오로지 그 폭력에 길들여지려는 것만이 내 몸이 가진 유일한 주체성이라니!

   탁자에 앉아서 노트북을 열고 빈 페이지를 불러내는 것은 이 낯선 시간에 적응하려는 자기 보호 본능처럼 느껴졌다. 8.9인치 모니터에 천창을 지나가는 구름과 바람과 문 밖의 햇빛을 옮겨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사막의 길을 다시 떠올리기 시작했다. 몇 개의 문장들이 이 낯선 적막에 적응하느라 단어와 단어 사이의 고리를 채 연결하지도 않고서 바람처럼 지나가고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미하일에게 보낸 편지에서 5년 동안 간수의 지배를 받으며 단 한순간도 혼자 있은 적이 없었다고 했다.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과 새파란 폭력보다도 더 견디기 힘든 것은 혼자가 될 수 없는 것이었다. “혼자 있다는 것은 마시고 먹는 것처럼 정상적인 생존의 필수 조건”(E. H. 카, 『도스또예프스끼 평전』)이다. 혼자가 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어떤 꿈을 꾸게 된다.

   문명은 과학기술 등에 의존해 외로움이라는 고통을 벗어나려고 했다. 혼자가 된다는 것은 소외라는 사회적 죽음과 동일한 것으로 인식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끊임없이 누군가와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고 다양한 소통을 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소통은 오로지 자기만의 고통을 잊으려는 것이지 세계와 마주한 행위는 아니다. 혼자가 되었을 때 우리는 어떤 간절함과 마주한다.

   혼자가 되었을 때, 내가 마주한 것은 낯선 적막이었다. 그 적막이 나에게 시를 쓰게 하고 있었다. 시는 거의 반사적으로 내 몸이 반응하는 현상이었다. 환각지! 그렇다. 내가 잃어버린 그 무엇을 대체하는 이 놀라운 대체물! 어떤 동물이나 곤충에게 신체의 일부를 스스로 절단하는 것이 자기 구원이듯이 내가 혼자가 되려는 것 또한 동일한 것이었다. 채 마치지 못하고 남은 문장들은 생리적이었다. 나는 현실을 잃어버렸다. 그 절단된 부분을 내 문장들은 여전히 심리적으로 계속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언덕 위의 빈 들판

 


   구름과 바람과 햇빛과 내 눈으로 더 이상 건너다볼 수 없는 침묵의 긴 지평선 하나가 남았다. 나를 에워싼 풍광을 이름 부르려 할수록 '나'는 공허한 이미지가 되어 가고 있었다. 바람소리만 들려왔다. 언덕을 느짓이 걸으며 햇빛과 구름마저도 모두 바람소리가 되어 다가왔다. 양떼가 언덕을 넘어가는 소리도, 덩치 큰 몽골개가 멀찍이 떨어져 따라가는 소리도 모두 그 바람 속에 묻어 있었다. 침묵은 이곳에서 온갖 소리가 되어 있었다.

   산자락 아래 너른 언덕을 조금 걷다가 맨바닥 아무데나 앉았다. 아무리 걸어도 별반 달라질 게 없이 언덕은 광활했다. 눈에 보이는 저 끝까지 가보겠다는 목적은 허망할 뿐이다. 그렇게 지평선 하나를 건너간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건너고 건너서 지평선마저 벗어난 후에 나는 대체 무엇을 볼 수 있을 것인가. 그 누구도 가보지 못한 지나온 거리의 수치로 나를 증명하려는 것은 어리석다. 이곳은 이미 내가 건널 수 없는 지평선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곳은 침묵의 공간이다. 끝끝내 끝을 보면서 넘어서고 이내 잊히게 되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 나는 “무한을 소진할 수밖에 없는 것”(모리스 블랑쇼, 『도래할 책』)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것이 비로소 이곳에 존재하는 나였다.

   걸어서는 결코 지평선을 건널 수가 없다. 늘 그곳은 나에게서 가장 먼 곳이다. 편서풍을 거슬러 구름을 따라왔어도 기다려 왔던 것들은 익숙해질 무렵 사라져 버릴 뿐이다. 오래오래 저무는 먼 데 붉은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는 자는 나 혼자만은 아니었으나 같은 지평선을 바라본다는 것은 힘겨운 일이었다.

   나는 지평선에 갇혀 있지 않다. 내가 볼 수 있는 이 지상의 가장 먼 곳에 둥근 선이 이어져 있다. 그 어디로든 소실점이겠지만, 그러나 아무것도 없는 저 먼 곳은 영원이다. ‘나’라는 공허는 이렇게 가까스로 ‘영원’에 스며들고 있었다.

   나에게서 가장 먼 곳을 본다는 것은 그 끝에서 내가 무엇과 맞닿아 있는지를 새삼 확인하는 일에 지나지 않았으나, 아득하다는 말은 이미 그곳에 내가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감추고 있었다. 어느 곳으로든 나는 지극히 멀다. 지평선이 석양을 놓친 내 발밑으로 건너왔는지 마른 바람이 스며들어 내려앉은 이 언덕 위의 들판에 멀고 먼 하룻밤이 시작되고 있었다.

 

 

   격자무늬 구름의 집, 게르

 

   집은 성스러운 곳이다. 집은 그렇게 지어졌기 때문이다. 버드나무 격자로 벽을 두룬 게르에는 북극성의 빛이 머물고 있다. 그래서 별빛이 들어오도록 천창을 뚫어 놓았다. 둥근 천창을 떠받치고 있는 바가나(bagana)라는 기둥을 통해 우주의 중심 별 북극성이 내려온다.

   양털로 펠트를 두른 게르의 구조는 유목제국 흉노에서 시작되었지만 그 기원이 기원전 3천년 무렵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사방으로 광활한 지평선에 둘러싸인 곳에서 바라본 하늘은 그지없이 둥글다. 게르는 이러한 하늘을 상징하는 둥근 원형으로 만들어졌다. 바이칼 호 유역에 살던 돌궐계 부족의 후예인 고차(高車) 부족의 옛 노래 중 “게르와 같은 둥근 하늘이 온 들판을 감쌌네”라는 부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게르는 ‘멍흐-텡그리(영원한 하늘)’ 사상이 반영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버드나무로 만든 삼각형과 격자의 연속무늬, 그리고 게르의 둥근 토대는 영원과 하늘을 상징한다.

   게르는 구름으로 만든 집이다. 하늘이 이 지상에 구현된 살아 있는 자의 집이다. 이동하는 가옥이며, 그 무엇으로든 환원될 수 있는 영적인 공간이다. “하낭 게레스 하단 게르트(벽이 있는 집에서 바위의 집으로)”는 이곳의 장례 풍습에 사용되는 말이다. 죽음의 세계인 북두칠성으로 가기 전까지 밝은 북극성이 천창을 통해 들어오는 곳에 삶이 있다. 그 삶이 머무는 집은 죽음 이후의 영원한 하늘을 지상에 구현한 것이다. 신성한 버드나무로 삼각형과 격자무늬를 만들어 무한을 이루는 벽을 세우고 북극성의 빛이 들어오도록 천창을 뚫은 게르에서는 죽음처럼 삶이 신성해진다. 게르가 있는 이곳은 삶과 죽음이 만나는 곳이다.

 

 

 

   세계수(世界樹)인 바가나 기둥 사이로는 그 무엇도 주고받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말하자면 그것은 인간의 욕망을 드러내서는 안 되는 것과 같다. 인간의 욕망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며 따라서 모방적이라고 르네 지라르가 말했던가. 그 모방적 경쟁 관계가 필연적으로 불러오는 폭력은 모두가 동일한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주고받는 행위는 궁극적으로 폭력을 완화시키지만, 주고받는 행위의 이면에는 이미 폭력이 전제되어 있다. 이마저도 끊임없이 지연시키거나 감춤으로써 욕망이 드러나지 않게 해야 된다. 게르의 중심을 이루는 기둥 사이로 그 무엇도 주고받아서는 안 되는 오랜 풍습은 이런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다.

   누군가 방랑자에게 죄를 묻는다면 그가 다른 것을 꿈꾸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방랑자의 죄마저도 게르 안에서는 아름다움이 된다. 이곳에서 꿈꿀 수 있기를 그는 간절하게 바라고 있다. 그렇게 한 사내가 구름에 커다란 돌을 하나 매달아 놓았다. 오늘밤 그가 잠들 곳이다. 들나귀처럼 아무데나 뛰쳐나가서 발길질이나 해대다가 마른 구덩이에 발이 빠진 지친 바람도 먼저 들어와 있다. 늙은 양이 하루 종일 뜯어먹은 마른 풀과 먼지와 돌조각에 찢긴 석양과 한순간 침묵이 되어버린 눈빛으로 구름의 집은 적막했다. 다시 사납게 늑대바람이 몰아치고 죽은 짐승들이 울더라도 부디 그대로 잠들게 해다오. 아예 어둠 속을 삼켜버린 것처럼 그렇게 무덤이 되어버린 것처럼 다른 것을 꿈꾸는 것은 외로운 일이다. 아름다운 일이다.

 

 

   별은 왜 뜨는가

 

   나는 석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쪽으로든 귓등에 먼저 건너온 바람조차 피할 수 없지만, 등지고 서 있다가는 두 뺨에 석양이 다 몰려들 것이지만, 그래도 어둠으로 남으려고 뒤돌아보지 않으려 했지만, 흠칫 무엇인가 한 발짝 물러서는 그 어둠이 두려웠지만, 정작 밀쳐내지 않는 그 야윈 뺨이 더 두려웠지만.

   석양이 지자 밤하늘에 드문드문 별이 떠올랐다. 이윽고 밤이 깊어지자 천창 위로 별들이 흐르기 시작했다. 캄캄한 목구멍 밖으로 큰 날개를 펼친 흰 새 한 마리가 귀먹은 울음소리를 물고 가파른 밤하늘을 날아가고 있었다. 어느새 모래바람이 밤하늘 높이 얼어붙어 있다가 대신 떨어져 내리기도 했다.

 

 

 

   두 뺨으로 별을 보고 있었는데, 아무것도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먼 곳에서 서로 바라만 보고 있었는데, 랜턴 하나만 켜들고 어둠 속으로 걸어가서 그저 어둠으로만 돌아갈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밤하늘의 구멍 난 가죽 덮개를 하나 걷어내고는 또 한 눈빛만을 불러내고 있었다.

   녹물 흘리던 온 밤하늘의 별을 다 뽑아내어도 가슴 엔 듯 다시 못을 쳐서 떠오르는 게 있었다. 사라져 버리지 않는 게 있었다. 문득문득 사무치는 게 있었다. 별은 그래서 너무나 익숙한 두려움처럼 떨고 있었던가. 그래서 등 돌려 앉은 언덕처럼 지평선의 어깨가 기울어만 있었던가. 그러나 내 사악한 영혼이 마른 비 한 방울 품지 않은 먹장구름을 불렀더라도 늦별은 아닌 듯 아닌 듯이 떠오르고만 있었다.

   어젯밤 누군가 내게 별이 왜 뜨느냐고 물었다. 왜 별이 뜨는지 나는 말하고 싶었지만 나는 어떤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게르에 모인 사람들이 별을 보러 자리를 비우고 하나둘씩 남은 이들은 빈 술잔만 바라보다 흩어졌다. 오늘은 별이 뜨리라 기대도 못 했는데, 은하수가 나를 건너가고 있었다. 이 가득한 별들을 보여주려고 초저녁부터 세차게 바람이 분 것은 아니지만, 다 썩은 목제 가구에 박힌 쇠못에서 아직도 녹물이 흐르듯 나는 바람이 불었던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든 것을 잃고 흘러만 가는 별은 어디에 있을까. 옆에 서 있던 누군가가 대답했다. 그 별을 찾는 사람에게는 결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그때 나는 저 멀리 떠 있는 희미한 별빛이 아니라 한 사내를 보고 있었다.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떠올리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 별자리에도 없는 별이 뜨고 있었다.

   다시 이곳에 돌아오게 된다면 이 별을 기억하기 때문일까. 멀리 있어 아름다웠지만 멀리 있어 모든 것을 잃고야 만다. 그러니 이 별 아래를 다시는 지나가지 못할 것이다. 먼지구름이 흘러간 언덕 위에서 함께 사라졌던 짐승이 푸른 발바닥을 감추고 밤하늘에 웅크려 있었다. 그러나 십만 배로 쪼그라든 초신성처럼 영혼을 잃은 한 사내가 낮은 언덕에 홀로 앉아 있을 뿐이더라도, 어쩌면 나는 다시 이 자리에 끝끝내 다시 돌아오게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문장웹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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