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상상력에 대하여

 

   사유의 드로잉_제1회

 

 

사랑의 상상력에 대하여

 

강수미(미학,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술연구교수)

 

 

 

 

 

   황금빛 공작무늬가 돋을새김 된 노란색 바탕의 작은 상자 하나가 눈앞에 고요히 놓여 있다. 공작 주위로는 짙은 노랑, 보라, 분홍색 꽃들과 푸른빛 잎사귀가 서로 연결돼 풍요로운 패턴을 이루고 있는데, 그것이 다시 상자의 직사각형 온 둘레를 감싸고 돈다. 지그시 들여다보고 있자니 그 자그마한 사물은 내게 잇따라 사랑의 형상들을 물어다 준다. 예컨대 『아라비안나이트』에서 후궁들이 놀았을 비밀의 정원, 『순수의 시대』에서 엘렌이 입었을 파리 사교계풍 드레스, 『삼국지』에서 양귀비의 미소를 보기 위해 당 현종이 찢었을 하늘하늘한 비단 천이 연상되는 것이다. 혹은 더 선명하게는 앵그르(Jean Auguste Dominique Ingres)가 그린 〈마담 무아테시에(Madame Moitessier, 1856)〉의 치마폭 무늬, 모네(Claude Monet)의 〈기모노를 입은 마담 모네(Madame Monet in Japanese Costume, 1876)〉에서 그 붉은색 옷의 화려한 무늬가 노란색 공작무늬 위에 겹쳐 떠오른다. 이 일련의 것들은 전면적으로 드러나 있으면서도 어딘가 은밀함이 배어 있는 이미지, 매우 장식적이면서도 조화롭게 구성돼 미와 정서의 독특한 역동성이 느껴지는 이미지로 다가온다. 이를테면 통상 우리가 아름답다고, 특히 소박하고 담백한 내향성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화려하고 풍부한 표현으로 외향성이 넘쳐나는 아름다움을 말할 때 그 사랑하는 대상의 성향으로 지목했던 바와 같은 것이다.

   여기까지 읽은 독자들 중에는 위의 노란색 상자를 그에 뒤따라 유비된 여러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예술품, 예컨대 18세기 로코코 시대 귀금속 장인이 만든 보석상자 같은 것으로 상상했을지 모른다. 또는 시대나 만든 이, 명칭이나 용도는 전혀 떠올리지 않았지만 어쨌든 귀하고 고급스러운 어떤 사물과 이미지를 쭉 연상해 가며 글을 읽어 나갔을 수 있다. 하지만 저 노란 상자의 실체는 상품 포장지다. 구체적으로 말해, 중국계 미국인 디자이너의 글로벌 브랜드가 내놓은 “상상의 비행(Flight of Fancy)”이라는 제법 멋스러운 이름의 향수 포장지. 심지어 내가 보고 있는 것은 본 상품을 사라고 소비자를 부추기는 샘플용 패키지에 불과하다. 안에 얇은 유리 향수병이 꽂힌 가로 5cm, 세로 8cm, 두께 1cm의 그것.

   그럴듯한 수사(修辭)를 동원하고, 사람들이 알고 있을 법한 예술작품들을 언급하며 장황하게 그 아름다움을 상찬한 대상이 정작 성냥갑보다 조금 크게 만든 상품선전용 종이곽이라니! 이런 내 행태를 두고 혹자는 조소를 보낼 것도 같다. 허장성세하다든가, 괜한 말로 현혹하는 글쓰기를 한다고 말이다. 그렇더라도 부당한 비난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우리의 상상력이란 것이 어린아이의 단순하고 순진무구한 의식은 아니라는 것, 경험 이전의 때 묻지 않은 원초적 마음 같은 것은 더욱 아니라는 것, 나아가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주어진 어떤 이성적 에너지 같은 것 또한 아닐 것이라는 점을 말하고 싶어 위와 같이 썼다.

   상상력이란, 그와는 달리, 아주 작은 것에다가도 아주 많고 다양한 다른 것과 관계를 접목할 수 있는 애정 어린 사고력이다. 동시에 어떤 존재들 간의 외관상의 유사성과 더불어 뉘앙스, 톤, 분위기처럼 파악하기에 까다로운 감각 질까지 지각해 낼 수 있는 감수성이다. 그런 사고력과 감수성은 무색무취의 어떤 재능으로 단번에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복잡다단한 삶을 살면서 우리가 몸과 마음으로 겪는 지적, 정서적, 감각적 경험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와 내용으로 형성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를테면 상상력은 세속의 한가운데, 일상의 한복판에서 자기 자신 전체로 해나가는 경험에 근거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언젠가 미국의 여류 소설가 워튼(Edith Wharton)이 쓴 『순수의 시대』를 읽었고, 스콜세지(Martin Scorsese)가 영화화한 동명의 작품을 본 경험 덕분에 샘플용 향수 곽 디자인에서 은밀한 아름다움을 지각할 수 있었다. 또 나는 여태까지 살면서 이곳저곳에서 아라비안나이트나 삼국지의 이야기를 인용하고 변주한 서사 혹은 이미지들을 마주쳤고, 그때마다 내 나름대로 어떤 모습들을 재형상화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경험이 부지불식간에 공작과 꽃들이 그려진 노란 상자를 볼 때, 또한 이 글을 쓸 때 환기되어 시시한 물건과 이야기계의 고전을 ‘아름다움’ 아래 연결시키는 상상력의 비약을 감행케 했을 것이다. 물론 앵그르의 그림, 모네의 회화작품도 아마 그런 상상력의 경로로 샘플 포장지의 전면과 어느 순간 내 안에서 조우했으리라. 만약 내가 그 같은 문화 생산물, 지적 산출물, 공동체의 문화에 노출된 적이 없다면 내 상상과 글쓰기는 이 사물에서 저 사물로, 이 이미지에서 저 의미로, 이 가시성에서 저 비가시성으로 엮여 나갈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의 끝에서 내가 정의하는 상상력은 삶의 온갖 경험을 양분으로 삼아 커나가는 능력, 나이가 들어도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한 곳에 고정시키지만 않는다면 점점 더 화려하고 유연하며 깊게 꽃필 수 있는 능력이다.

   ‘부채의 상상력’이라는 것도 있다. 20세기 초중반 당대 최고의 문예평론가를 자처했으며, 서구 모더니티에 대한 연구를 ‘아케이드’라는 극히 세속적인 모티브를 중심으로 시도한 독창적인 철학자이자 미학자 벤야민(Walter Benjamin). 그는 흥미롭게도 상상력을 부채에 비유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부채는 일정한 넓이를 가진 단면들이 가지런하고 순차적으로 붙어 있어 그것을 접었다 폈다 할 수 있으며, 그 경우 전체 면적이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하고, 내부의 면들이 드러났다 감춰졌다 하는 구조의 사물이다. 분명 벤야민은 이 같은 부채의 구조로부터 인간 상상력의 핵심을 추론해 낸 것으로 보인다. 그가 정의하기를 상상력이란 “무한히 작은 것 속으로 파고들어갈 줄 아는 능력이고, 모든 집약된 것 속으로도 새로운, 압축된 내용을 풍부하게 부여할 줄 아는 능력”이라 했기 때문이다. 또한 “상상력은 어떤 이미지든 접어놓은 부채로 여길 줄 아는 능력, 그 부채가 펼쳐져야 비로소 숨을 쉬게 되고 또 새로이 펼쳐진 그 폭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특성들을 내부에서 연출해 보이는 능력”이라 해서다. 부채가 접힐 때 각각의 면면이 일사불란하게 주름져 내부로 숨어들듯이, 우리의 상상력은 그 범위를 축소시켜 밀도를 높일 수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부채의 주름이 펼쳐지며 그 안의 면면을 과시하듯이, 우리의 상상력은 평소에는 그 존재도 몰랐던 기억들, 경험들, 심상들을 우연한 순간에 외부로 드러내고 경계 너머로 확대시킬 수 있다. 아마도 벤야민은 부채를 통해서 상상력의 특성을 이와 같이 설명하려 했을 것이다.

   그런데 문득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위 대목에서 또 어떤 새로운 상상의 나래를 폈는지 궁금해진다. 상상력에 관한 벤야민의 아포리즘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부채와 주름진 우리의 뇌가 닮았다고 생각했다. 평소에는 전혀 그렇게 둘을 연관 짓지 않았다. 하지만 그 글을 읽으며 불현듯 그의 문장 속 “부채” 위에 “뇌”가 겹쳐지고, 그 양자의 유사성이 알 듯 모를 듯 감지됐다. 여러분도 상상해 보라. 쭈글쭈글 주름진 뇌의 형상은 벤야민이 말한 무한히 작은 것과 예측할 수 없이 넓은 것이 공존하는 곳, 무한히 작은 데로 침투하고 예측할 수 없이 너른 곳으로 나아갈 수 있는 역동성의 원천지로 충분히 가능한 모델이 아닌가? 그 주름의 접힌 면과 골의 깊이, 그것이 펼쳐졌을 때 차지할 폭과 각 부위의 다양성이 부채의 구조와 유사한 동시에 그것을 능가한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뜬금없다고 독자인 당신이 책망해도 할 수 없지만, 이렇게 또 하나의 예를 듦으로써 나는 앞서 상상력의 특성이라고 주장한 바를 좀 더 설득하고 싶다. 그러니까 상상력이란 아주 많고 다양한 것들 간에 관계를 접목시킬 수 있는 능력이라고 했던 말을 벤야민에서 이 글로, 부채에서 뇌로 전이시켜 가며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철학자 푸코(Michel Foucault)는 서구 각 시대의 지식이 어떤 인식론에 기초해 형성됐는지를 연구했고, 16세기까지 지식의 무대는 ‘유사성’의 질서를 따라 구축됐음을 해명했다. 예컨대 당시 사람들은 주정(酒精)과 호두가루를 섞어 먹으면 두통이 낫는다고 생각했는데, “호두 알맹이는 외견상 뇌수의 모습과 거의 유사”하다는 데 그 근거를 뒀다. 사물들끼리의 관계, 말과 사물의 관계, 그리고 인간과 말과 사물의 관계가 16세기에는 그렇듯 가시적 닮음, 상응, 공감을 통해서 명명되고 배치됐다. 냉혹하리만치 분석적이고 객관적인 과학과 인간 상상을 초월한 지 오래된 첨단 테크놀로지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눈에 보이는 대로 믿고, 감각에 의존해 판단하고, 마음을 나누는 16세기의 지식세계는 순진해 보인다. 하지만 푸코가 말했던 것처럼 “숨겨진 유사성들은 사물들의 표면에 은밀히 나타난다”. 그러니 점점 더 인간의 상상력이 사물과 세계의 존재 상태로부터 멀어져 온갖 추상적 기호와 관념에 고정돼 가는 우리 시대의 지식이야말로 실체 없는 것이라 볼 수도 있다. 사람들이 어느 때부턴가 사물들의 표면을 주시하기보다는 그것을 화폐의 이름으로만 부르기 시작하면서 지식의 무대 밑이 소리 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것 같다. 또한 사랑의 온기가 우리 자신, 그리고 사물들에서 빠져나가면서 우리가 상상력의 부채를 펼칠 기회 또한 점점 희박해져 가는 것 같다.

 

   《문장웹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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