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과거와 첨단의 시간

 

〈작가와 도시〉

 

 

서울, 과거와 첨단의 시간

 

고은

 

 

 


 

  압축이나 요약은 간단명료한 쾌감 말고는 수상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엇인가를 자주 왜소하게 만들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이해(理解)의 시간이 들어 있지 않다.

  서울은 서울의 시간을 배제하고는 서울이 아니다. 아무리 서울이 자신의 얼굴을 노련한 성형수술로 뜯어고친다 한들 서울이 살아온 시간을 거역할 수 없다. 그래서 서울은 잎이 아니라 뿌리다.

  현재의 서울이 아무리 멈출 줄 모르는 도시의 욕망에 갇혀 있다 하더라도 현재 이전의 긴 시간의 지층에 잠겨 있는 고뇌의 자취 없이는 서울이라는 보통명사로 만들어진 고유명사는 불가능하다.

  서울은 6백 년 내내 열 번 이상 주인이 바뀌면서 자신에게 부여된 수도(首都)의 운명을 놓쳐 본 적이 없다.

  아니다. 서울은 고대 백제 초기 그 수도의 유적지이기도 하다. 중세 고려의 부수도(副首都)로서 이궁(離宮)과 단기간의 본궁(本宮) 노릇도 곧잘 해왔다. 그러고도 모자라 조선 500년의 왕도(王都) 노릇을 해낸 것이다. 그리고 현대 한국의 수도 1백년이 되어 간다.

  그만큼 서울은 한국사 전신(全身)의 단전(丹田)으로 그 운명의 끈질긴 율동을 모아들였다.

  서울의 궁궐은 결코 중국 베이징의 비인간적인 극대(極大)와는 달리 아주 인간적이다. 류큐(琉球―오키나와)의 수리성(首里城)보다는 크다. 그래서 크지도 작지도 않다.

  이를테면 누구나 모스크바에 가면 그 이국적인 크레믈린보다 오히려 모스크바대학의 스탈린 시대 건축의 무모한 권위주의에 역겨워할 것이다. 누구나 서울에 오면 서울의 경복궁의 편안함이 여수(旅愁)를 달래 줄 것이다. 자유란 허황하거나 아주 밀폐되거나 하면 거기에 있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서울에는 광장이 없다. 녹색과 공원의 한가(閑暇)가 턱없이 모자란다. 1968년인가 한다. 일본 요미우리신문이 ‘세계의 광장’을 연속특집할 때 한국 차례가 되자 서울의 광장에 대한 에세이를 나에게 청탁했다. 나는 교통량이 집중되는 식민지 시기 총독부 청사이던 중앙청 앞에 외롭게 서 있는 광화문 앞거리를 내 마음대로 광장을 삼아 ‘광장 광화문’을 썼다.

  오늘날의 그 세종로에는 전(前) 시장이 시민복지를 내세워 세종대왕 동상을 안치하고 산책 공간을 만들어 놓았다. 전전(前前) 시장은 시청 앞의 번잡한 교통망을 뚫어내어 이른바 서울광장을 만들었다.

  사실 1960년대의 서울은 저 19세기말 이래 이렇다 할 변동 없이 자신의 소박한 도시 형태로 살아왔다. 도시 구성의 제1요건인 인구 역시 조선 태조의 천도(遷都) 당시에는 기껏 2, 3만 명을 고려의 수도 개경에서 데려왔다. 그 뒤 제4대 세종 초기 10만 명으로 늘었다. 16세기 후반 임진왜란의 참극 이후에는 10만 미만으로 줄었다가 다시 늘어났다.

  이런 인구 정체(停滯)는 그 수도 인구를 먹여 살리는 한반도 농업의 한계를 반영한다. 논농사의 경우 18세기 무렵에야 고대의 직파(直播) 농법에서 이앙(移秧) 농법으로 개량되었으니 그 수확인들 얼마나 애처로울 것인가.

  20세기 벽두에도 서울 인구 겨우 20만이었다. 그 당시 한반도 전체 인구의 3%에 해당한다. 지금의 인구 1천만 단위의 대도시 규모는 상하이, 런던, 뉴욕, 베이징, 도쿄 등지의 뒤를 쫓아간다. 그렇다 해서 인구 2만 시대의 인간보다 오늘날 서울 인구 1천만 시대 및 한반도 인구 7천만 이상인 시대의 인간이 더 나은 인간의 품성을 가진 것 같지는 않다.

  서울은 고대의 자연관을 자신의 환경에 불러들였다. 근대도시의 시장성(市場性)만으로 된 도시가 아니다. 그러므로 세계 어느 도시와도 바꿀 수 없는 북한산과 한강을 가지고 있다. 그것으로도 심심했던지 도심 한복판에 남산을 놓아두었다. 어떤 도시 건축가와 최근의 한 시장은 남산을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해서 평면화하자고 제안한 적이 있다. 천민개발주의의 수작이었다.

  근세조선 왕조 5백 년이 마감될 무렵 한반도는 타자의 침략에 속수무책이었다. 뜻있는 지사(志士)들이 망명의 길을 떠나야 했다. 그때의 이별가가 있다. ‘가노라 삼각산(북한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이렇듯이 조국의 수도로서 끝내는 망국의 수도가 되고 말 때도 서울은 북한산의 기상과 한강의 유구한 흐름으로 한국인의 역사와 꿈을 지켜냈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북한산 정상에 쇠말뚝을 박아 한국의 기운을 죽였다.

  20세기 한국 현대사의 서울은 수많은 선언이 발표되는 뜨거운 공공장소였다. 저 1919년 3월 1일 ‘눈앞에 새 세상이 열렸도다’라는 독립선언 이래 온갖 이념과 의지가 폭발하고 온갖 정신의 꽃들이 피어나는 언동(言動)들이 서울을 결코 일상적이거나 사적(私的)인 삶의 가가호호로만 채워 두지 않았다. 4월 혁명과 그 뒤의 군사 쿠데타도 있었다.

  낯선 사조가 들어오고 해묵은 가치들이 그것들과 상충되거나 변질되었다. 서울은 사방풍(四方風)이 불어오는 곳이고 누군가가 떠나고 누군가가 돌아오고 실시간으로 쌓이는 문물(文物)의 항구였다.

  서울의 근대는 세계의 어느 근대보다 단계론을 내던진 비약론의 사례였다. 몇 백 년의 숙성기간을 사절하고 숨찬 열차가 급경사의 철로를 기어오르듯이 근대 가속(加速)의 서울을 낳은 것이다.

  그동안 한국전쟁의 폐허 서울은 바라크시대와 옛날 기와집이나 초가가 아닌 국민주택의 시대 그리고 너도나도 2층 3층의 건달 같은 집장사 집의 시대와 함께 고층건물의 도시로 나아갔다.

  서울의 시계(市界)는 옛날의 4대문 안이라는 전설을 지나서 전방위(全方位)의 팽창으로 ‘서울의 바다’가 되고 말았다. 여기에 한반도 휴전선 이남의 전국 방방곡곡에서 살 길을 찾아 모여드는 ‘무작정 상경’의 인구들은 변두리 산자락에 상하수도가 없는 ‘달동네’를 덮었다.

  그런가 하면 한강 이남의 신도시는 부와 향락 그리고 소비의 특수지대로 번영을 누린다. 세계의 사치 비율에서 둘째 셋째라면 서러울 그런 초호화판의 낮과 밤이 이어지고 있다. 이것이 1%와 99%의 심각한 계급 상충을 만들었다. 세계경제 10위권을 관장하는 서울. 정보문명과 연예의 전위인 서울. 그러나 자기 자신의 시(詩)를 잃어버린 서울. 여기에서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내가 아니다.

 

  《문장웹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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