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회] ‘조반니 아리기’를 발견하기 위한 책 구입 여정

 

[철학, 삶을 탐하다_제5회]

 

 

‘조반니 아리기’를 발견하기 위한 책 구입 여정

 

조광제(철학자)

 

 

 

 

 

   가라타니 고진은 자신이 쓴 논문들을 모아 2004년 『역사와 반복』(2004)을 출판한다. 이 책이 2008년 한국어판으로 번역 출간되는 것을 기화로 2007년 3월에 쓴 ‘한국어판 서문’이라는 글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1)『역사와 반복』, 조영일 옮김, 도서출판 b, 2008, 11쪽.

 

   나는 ‘자유주의’나 ‘제국주의’를 역사적인 단계보다 순환적 프로세스로 보는 사고를 월러스틴으로부터 배웠다(『근대세계시스템: 1600?1750』). 그가 생각하기에 ‘자유주의’란 압도적인 헤게모니를 잡은 국가가 존재하는 세계경제 시스템의 존재형태다. 그에 반해 ‘제국주의’는 헤게모니 국가가 몰락하고 있지만, 신흥국가가 그것을 대체할 정도로 확립되어 있지 않아 항쟁이 계속되고 있는 상태다.

 

   이 글을 읽으면서 나는 ‘아, 고진의 『역사와 반복』을 제대로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월러스틴의 『근대세계체계: 1600?1750』을 읽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데 월러스틴의 이 책을 읽지 못하고서 그냥 일단 『역사와 반복』을 읽는다. 이 책에서 가라타니 고진은 마르크스가 쓴 『루이 보나파르트 브뤼메르 18일』을 역사의 반복을 파악한 하나의 전형으로 보면서, 이를 실마리로 삼아 자기 나름으로 특히 1930년대 일본 파시즘이 어떻게 과거 일본의 역사를 반복하고 있는가를 일본의 실제 정치 과정뿐만 아니라 당시 발간된 일본의 여러 소설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이에 나는 ‘음, 마르크스가 쓴 『루이 보나파르트 브뤼메르 18일』도 세심하게 읽어보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인터넷을 뒤진다. 찾기가 쉽지 않다. 결국 그냥 『역사와 반복』만 읽고 만다.

   그러던 중, 친우들과 모여 매월 정기적으로 여는 지난 2월의 세미나에서 일본 사상에 정통한 김동기 선생이 「애덤 스미스의 도덕철학사상」이라는 제목의 발제를 했다. 그때 함께 참여한 중국 사상에 정통한 황희경 선생이, “조반니 아리기라는 이탈리아 학자가 『베이징의 애덤 스미스』를 쓴 게 있는데, 제대로 한번 읽어봐야 할 것 같습디다.”라고 했다. 나는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 인물인데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집에 와서 확인해 보니, 일전에 읽었던 『뉴레프트리뷰』(김철효 외 옮김, 도서출판 길, 2009)의 맨 마지막에 실려 있는 글, 「곡절이 가득한 자본의 여정 — 데이비드 하비와의 인터뷰」의 주인공이 바로 조반니 아리기다. ‘이런! 멍청한 기억력 하고는.’ 다시 한 번 읽어 본다. 데이비드 하비는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구동회/박영민 옮김, 한울, 1995)의 저자로 국내에 널리 알려져 있는 마르크스주의적인 대가가 아닌가. 그런데 이 대담에서 하비가 질문자로 나서서 조반니 아리기라는 인물의 사상을 거의 따라가듯 하면서 점검?소개하고 있다. 나는 속으로 ‘아, 조반니 아리기가 데이비드 하비보다 한 수 위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대담 내용을 보니, 조반니 아리기는 오늘날 대대적으로 펼쳐지고 있는 세계자본주의의 위기적인 흐름을 경제사적 원리와 실제를 바탕으로 대단히 논리적으로 분석 비판해 내고 있다. 내 나름으로 크게 고무되었다.

   조반니 아리기라는 인물과 그의 저서들을 본격적으로 점검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이력에 관해서는 방금 말한 데이비드 하비와의 대담에 간략하면서도 적절하게 잘 나타나 있다. 그는 1937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태어나 아프리카의 짐바브웨 대학과 탄자니아의 다르에스살람 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하면서 노동 문제를 중심으로 식민화와 민족해방운동 전개에 관한 현장 중심의 연구를 했다. 1969년 이탈리아로 돌아와 1971년 ‘그람시 그룹’을 결성하기도 했다. 1979년 페르낭 브로델 센터의 사회학 교수로 일하던 중 세계 체계론으로 유명한 월러스틴과 함께 뉴욕의 빙험턴 대학에서 경제학, 역사 체계 및 문명 연구를 하게 된다.

   조반니 아리기는 1994년에 『장기 20세기 — 화폐, 권력 그리고 우리 시대의 기원』(백승욱 옮김, 그린비, 2008)을, 1999년에 비벌리 실버와 함께 『근대 세계 체계에서의 카오스와 거버넌스』(국역본. 『체계론으로 본 세계사』, 최흥주 옮김, 모티브북, 2008)를, 그리고 2007년에 『베이징의 애덤 스미스. 21세기의 계보』(강진아 옮김, 도서출판 길, 2009)를 출간했다. 이 세 권의 책은 근대의 자본주의 경제가 그 체계에 있어서 어떻게 변환 이동해 왔는가를 밝히는, 말하자면 그의 삼부작이다. 이 세 권의 책과 그의 글이 들어 있는 공저 『제국이라는 유령』(김정한/안중철 옮김, 이매진, 2008)을 인터넷을 통해 급하게 주문했다. 책들이 하루도 못 되어 배달된다.

   우선 『장기 20세기 — 화폐, 권력 그리고 우리 시대의 기원』을 펼쳐 읽어 본다. ‘금융팽창’과 ‘실물 팽창’, 그리고 ‘패권’(헤게모니) 혹은 ‘패권국가’라는 개념이 나온다. 실물팽창 과정이 끝나면 금융팽창의 시기가 시작되고 급기야 금융팽창이 노골화된다면, 그것은 그때까지 현행 자본주의 체계에서 패권을 주도적으로 행사해 온 기존의 패권국가가 쇠퇴하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는 것을 알리는 징후라는 것이다. 16세기 말 17세기 초에 이탈리아의 제노바의 패권이 금융팽창으로 네덜란드라는 신흥패권으로 넘어가고, 18세기 말, 네덜란드의 패권이 금융팽창을 통해 영국으로 넘어가고,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영국의 패권이 금융팽창으로 미국으로 넘어가 지금까지 미국의 세계체계의 패권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 세계자본주의는 급속한 금융팽창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세계자본주의의 발전 과정에서 ‘체계적 축적 순환’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세세한 역사적인 자료들을 제시함으로써 입증해 보이고자 하는 것이 『장기 20세기 — 화폐, 권력 그리고 우리 시대의 기원』이다. 가라타니 고진이 제시한 ‘역사의 반복’에 관한 기본 아이디어는 자본주의 발전의 이 같은 ‘체계적 축적 순환’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나에게 가장 실감나게 다가오는 ‘금융팽창’이라는 용어가 페르낭 브로델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조반니 아리기가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브로델이, 시장 위에 위치하면서 반(反)시장적 성격을 띠고 시장에 압박을 가하는 것이 자본주의라고 말하고, 또 시장 아래에서 시장에 편입되지 않으면서도 경제생활의 바탕을 이루는 이른바 ‘물질생활’의 영역이라 일컫는 근본 영역이 있다고 주장한다고 말한다. ‘아니, 이러한 브로델의 구분법은 칼 폴라니가 자기 조정 시장에 입각한 것이 자본주의 경제체계의 기본이라고 한 것과 크게 대립되는 것 아닌가. 그뿐만 아니라 흔히 상식적으로 자본주의 경제를 시장경제라고 말하는 것과 크게 대립되는 것 아닌가. 브로델이 말하는 반(反)시장의 성격을 띤 자본주의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한단 말인가?’ 나는 조반니 아리기가 소개하는 브로델의 경제사상이 궁금할 수밖에 없다. 나는 급하게 인터넷을 통해 페르낭 브로델의 주저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주경철 옮김, 까치, 1996-2001) 1-1에서 3-2에 이르는 전체 6권을 주문한다. ‘아이쿠, 이거 언제 다 보나.’ 하는 한숨이 나오지만, 최근 집중하고 있는 경제사에 대한 나의 관심을 저버릴 수가 없다.

   사실 나는 경제사에 거의 문외한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치경제학에 대한 관심은 계속 유지해 오고 있었지만, 칼 마르크스의 『자본』은 물론이고,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도 제대로 읽어 보지 못했다. 지속적으로 미친 듯이 파고들어야 하는데, 그럴 여건을 확보하지 못했다. 그런 내가 갑자기 ‘조반니 아리기’에 빠져들고 있다. 예컨대, 『장기 20세기 — 화폐, 권력 그리고 우리 시대의 기원』을 제대로 다 읽기도 전에, 급한 마음으로『근대 세계 체계에서의 카오스와 거버넌스』의 앞부분을 읽고, 또 이 책을 다 읽기도 전에 『베이징의 애덤 스미스. 21세기의 계보』를 읽고 있다. 현재 이 글을 쓰는 동안 내 책상 위에는 이 책이 펼쳐져 있다.

   나는 왜 이렇게 급하게 정신없는 방식의 글 읽기를 하고 있는가, 이러한 나의 글 읽기의 처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지금 한창 읽고 있는 『베이징의 애덤 스미스. 21세기의 계보』에 이런 구절이 있다. 2) 국역본. 74쪽.

 

   애덤 스미스는 1980년대와 1990년대의 충격요법과 비슷한 어떤 것에도 강하게 반대했다. (…) “다수의 인력”을 고용하는 무역이나 강한 대중적 반발을 불러일으키는 생필품 무역에서는 보호 조치를 철회하는 데 특별히 신중해야 한다. 그뿐 아니라 생필품 무역에서는, “정부는 민심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서 [대중의-인용자] 편견에 양보해야 하며 대중이 동의하는 제도를 수립해야 한다.”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단박에 그저께 발효된 ‘한미 FTA’를 떠올린다. 애덤 스미스가 현 한국 정부의 경제 관료였다면, ‘한미 FTA’는 결코 안출되지도, 성사되지도 않았을 것임에 틀림없다. 1980년대부터 대대적으로 불어 닥친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에 의거한 세계자유무역의 대대적인 확산, 그리고 2001년 9 ? 11 사태를 기화로 부시 행정부가 채택한 ‘새로운 미국의 세기 프로젝트’는 ‘그들’이 예사로 사상적인 원조로 동원하는 애덤 스미스가 크게 반대하는 내용인 것이다. 이는 세미나에서 김동기 선생이 발제한 내용의 주제가 아니었던가. 바야흐로 애덤 스미스에 관한 그동안의 편견을 씻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기운이 일고 있다. 그것은 결국 세계화를 내세워 세계경제를 위기로 몰아넣어 실제에 있어서 파탄이 난 신자유주의에 대해 그 이론적인 바탕마저 철저히 허구였음을 밝혀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조반니 아리기는, 애덤 스미스가 서구가 아메리카 대륙과 희망봉을 거쳐 동인도로 가는 경로를 발견한 것을 세계사의 중대한 전환점으로 삼으면서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는 것을 특별히 강조한다. 3) 같은 책. 15쪽.

 

   이러한 발견의 영향은 이미 지대하다. (…) 어느 정도는, 세계의 가장 먼 곳까지 통합하여, 서로 부족함을 덜 수 있고, 서로 즐거움을 증진하고, 서로의 산업을 장려함으로써, 전체적인 경향은 혜택을 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동인도와 서인도의 원주민들에게 이러한 사건들이 줄 상업적 혜택은 이 사건들로 야기된 끔찍한 불행들 속으로 모두 가라앉아서 사라졌다. (…) 이들 발견이 이루어진 특정한 시기에는, 힘(force)의 우위가 유럽인 쪽에 너무 치우쳐 있었으므로, 이들은 이 먼 나라에서 온갖 종류의 불의를 처벌받지도 않고 저지를 수 있었다.

 

   애덤 스미스의 이 말은 오늘날 한국의 뉴라이트를 비롯한 우파들이 내세우는 이른바 ‘식민지 개발론’이 얼마나 몰역사적인 ‘파렴치한’ 주장인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내가 조반니 아리기가 제시하는 세계자본주의 체계의 주기적이고 반복적인 거대 변환에 특별히 관심을 갖는 것은 다음과 같은 어려운 생각들을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의 민족공동체가 저물어 가는 세계자본주의의 패권국가인 미국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반(反)시대적 방향의 경제 정책으로 크게 위기를 자초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닌가? 그럼으로써, 미국에 이어 새로운 패권의 후보지로 꼽히는 동아시아에서 세계자본주의의 원동력 역할을 할 정도로 크게 부상하고 있는 중국과 여전히 세계자본주의의 중요한 축을 형성하고 있는 일본의 틈바구니에서 오히려 상승의 기회를 크게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무엇보다 그 과정에서 결국에는 대다수의 국민이 경제적 어려움으로 불행한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는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지 않겠는가? 게다가 남북 분단 체제를 전혀 일소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욱더 강화되고 있는 일련의 상황이 이러한 난국을 근본적으로 더욱 강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등, 쉽게 해결하기 어려운 생각들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조반니 아리기의 경제사회학적 통찰을 빌려 이러한 생각을 해결할 일련의 실마리를 찾고자 한 것이리라. 내 책상에 조반니 아리기의 삼부작이 나의 독서의 시선을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 여러 모로 마음이 심란하다.

 

《문장웹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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