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과 사색

 

[작가가 읽은 책]

 

감옥과 사색

─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고

 

유종인(시인)

 

  


 

  영복 선생은 감옥에서 글을 썼다. 그것은 편지글, 그러니까 가장 실용적인 배후를 가진 문장이지만, 거기엔 짙은 인문학적 사유와 실존의 부대낌이 배어 있다. 어찌 아니 그러할 수 있을까만, 거기엔 영어(囹圄)의 몸이 정신과 영혼에 가하는 고통의 현실을 넘어서는 사유의 길 찾기가 한 겹 더 드리워져 있다.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갇히게 된 잡범(雜犯)들 속에서 혹은 비전향장기수 같은 시국사범이나 사형수(死刑囚) 같은 중범죄인들 속에서 그는 극명한 여러 삶의 도처(到處)들이 한데 모인 곳이 감옥임을 새삼 깨달았을 터이다. 장장 20년 20일의 복역은 저 ‘사회’로 나아갈 수 없는 실존적 자아를 함양하고 오히려 키워내는 방편의 글쓰기를 얼러내기도 했다. 그것은 이곳보다 더 극한의 시공간이 없으며, 여기보다 더 궁벽한 변방이 없다는 사실의 끝에서 그는 사람을 보았을 것이다. 비록 몸은 갇혔지만, 사람이 자신 밖의 사람과 자신 안의 사람을 알아 가는 것, 이것이 바로 사침(思沈)의 위안과 정신의 자유가 아닐까.

  그는, 귀와 눈이 밝은 사람이다. 〈구 교도소와 신 교도소〉라는 내용에서 이렇게 옛 교도소의 풍경을 새뜻하게 그려냈다. “……밤이면 도깨비 외발 춤추게 된 구석구석에 바람 먹은 비닐자락들이 땅바닥을 긁어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는데, 아! 굶주리다 못한 쥐들이 이 사람을 향해서 달려온다고 합니다. 취사장에 불 꺼진 지 이미 십 수 일, 식량창고에 흘린 낱알이 여태 남았을 리 없고 보면 사람이 없는 곳에 쥐들의 입에 들어갈 것 또한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죄수들이 떠난 구(舊) 교도소가 지닌 생명의 불모(不毛)를 아이러니로 그려낸 뒤, 종국에는, “15척 옥담은 이제 사람 대신 뼈만 앙상하게 남은 쥐들을 가두고 있는 셈입니다.”라고 갇힘의 뉘앙스를 새뜻하게 주워섬겨 본다. 인간세상의 사회적 제도와 구속의 요건 너머에 있는 생명 고유의 자연(自然)을 보아낸 것이다. 어디에나 이런 이중성, 홑겹이 아닌 관계의 여러 양상이 자리하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그런데 그곳이 다름 아닌 감옥이라는 것이다. 갇힌 자의 생각이라는 것은 이렇듯 갇히지 않은 사람은 미처 그려 볼 수도 없는 사방 도처로 열린 것이라는 역설을 부르기도 한다. 그럼에도 갇힌 것은 여전히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다 열어 줄 수 없나 보다. 생각이, 정신과 영혼이 아무리 깊고 그윽한 자유로움의 반열에 올라 있다 하더라도, 묶이고 매인 몸이 가지는 한계는 늘 한 개인이 가진 자아를 인간이라는 관계 속에서 생각하고 느껴 견딜 수밖에 없게 하는 바가 크다.

  “여름 징역의 열 가지 스무 가지 장점을 일시에 무색케 해버리는 결정적인 사실-여름 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 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 사람을 단지 37도의 열 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이것은 옆 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 나가는 겨울철의 원시적 우정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형벌 중의 형벌입니다.”라고 생각함으로써 그는 갇힌 자들이 가진 분명한 구속의 의미를 폐쇄된 공간이 아닌, 인간 속에서 찾는 감각적 사유의 깊이와 전환을 보여준다. 구체화되지 않은 형벌, 이 〈여름 징역살이〉는 오히려 깨닫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실존적 형벌일 수도 있고, 단순한 육체적 관계의 부대낌에서 오는 짜증과 불편일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우리가 여기서 또 한 번 괄목하게 되는 것은 감옥이라는 공간은 의당히 형옥(刑獄)이기도 하지만 생각하기에 따라서 쪽빛이 들 듯 가만한 생각의 수행처일 수도 있다는 여지가 아닐 수 없다. 이 여지를 가만 둘 수가 없다는 게 어쩌면 필자의 기본적인 마음바탕이 아닌가 싶다. 다양한 서체서첩(書體書帖)들과 옛 책들을 들여 읽고 생각의 고인 물이 썩지 않게 휘돌리는 것이야말로 갇힌 자가 가진 가장 궁극적인 정신의 활보(闊步)가 아닌가 싶다. 거기에 더하여 이 옥중서간집이 가진 또 하나의 큰 미덕은 무엇보다 자연(自然)의 편재(遍在)를 보여주는 숨탄것들과 계절의 기미를 잘 갈마들어 보여준다는 것이다.

  작업장 창문턱에 앉은 화분 속 ‘메리 골드’에게서 어쩔 수 없이 지심(地心)을 타지 못한 연약한 식물의 한계를 자신의 옥중생활에 은연중에 견주기도 한다. 또한 “패연(沛然)히 쏟아지는 빗소리를 듣다가 문득 창문 가득히 물씬 풍기는 흙내”에 놀라기도 한다. 서늘한 새벽녘의 한기(寒氣)와 쓸쓸하고 선득한 가을날의 고적과 “나한테 묻는다면 겨울의 가장 아름다운 색깔은 불빛”이라고 자처하는, 갇힌 자의 어쩔 수 없는 궁벽한 심사가 오히려 새뜻하게 다가온다. 계절이 온몸에 끼쳐 오는 느낌과 사소한 미적이인 생명의 기척도 정신의 활성(活性)으로 연결시켜 감시와 감독의 매인 몸에서 피워내는 정신의 여줄가리는 오히려 늡늡하고 웅숭깊은 인문학적 사유의 편편(片片)들로 늠연히 무애(無碍)의 지경으로 열려 있지 않은가. 15척 옥담이 두른 자신과 수형자 동료들의 옥사(獄舍), 즉 교도소에서의 그의 담담한 견딤은 어디서 발원하는가. 아마도 그 자신이 자신의 교도소에 얽힌 옛 이야기를 전하는 대목에서 찾아지지 않을까 싶다. 즉, “옛날에 수염이 길고 지혜 또한 깊은 노승이” 있어 “짙게 서린 무기(霧氣)를 보고 이곳에는 훗날 큰 절이 서리라는 예언을 남겼”다한다. 그렇듯 이 예언은 “엇비슷이 적중하는 데에 묘(妙)가 있는가” 신용복이 보기에 “수천의 청의삭발승(靑衣削髮僧)들이 고행 수도하는 교도소는 가히 큰 절이라 하겠”다고 자신의 무고하고 지난한 갇힘의 시절을 달리 보아내고 있다. 이는 단순히 자신의 불우와 불행한 옥고(獄苦)를 변호하는 바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폭압 앞에 결국 한 인문주의자가 어떻게 자신을 견디고 이뤄내야 하는가에 대한 마음의 모색으로 읽힌다. 그것은 처음의 제목처럼, 감옥과 살면서 감옥을 넘어 살아가는 정신의 자세- 즉 감옥 속의 몸과 마음이 아닌 사유의 도저함과 생명의 감각으로 시대의 감옥을 파옥(破獄)하고 마음의 절[寺]로 순치(馴致)시켜 나가는 도저한 자기갱신의 기록이 아닐 수 없다.

 

《문장웹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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