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언제나 외로운 파수꾼

 

[최창근의 쉽고 재밌는 희곡 이야기_다섯 번째]

 

 

마음은 언제나 외로운 파수꾼

─ 연극관람 일기 : 영국과 미국의 현대 희곡 작가를 중심으로

 

최창근

 

 

 

 

 

  2011년 6월 12일 일요일

 

  동예술극장에서 아놀드 웨스커의 〈키친 The Kitchen〉(이태주 옮김, 범우사)을 보았다. 연극 〈키친〉은 ‘티볼리’라는 영국의 큰 레스토랑의 주방이 배경이다. 티볼리는 요리사, 웨이트리스, 운반 포터까지 합치면 서른 명이 넘는 인원이 일하는 큰 곳이다. 또한 이곳은 영국인 외에 독일, 아일랜드, 키프로스, 이탈리아 등 다양한 국적 출신의 요리사들이 동고동락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요리사들은 자신의 조리대에서 생선을 튀기고 야채를 다듬고 스테이크를 굽고 빵과 디저트를 만들고 각자 맡은 일을 하며 바쁜 일상을 보낸다. 그곳에서 펼쳐지는 요리사들의 꿈과 사랑, 그러니까 〈키친〉은 꿈과 사랑에 관한 연극이다.

  후 영국 사회극의 가장 강력한 대변자였던 아놀드 웨스커는 극장은 사회적인 활동을 펼치는 곳이며 극작가는 마땅히 대중의 생활을 풍요롭게 해줘야 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한 작가였다. 자신의 사상을 작품에 반영하는 것으로 유명했던 그는 한때 청년공산연맹 회원이었고 시오니즘 운동에도 가담했으며 그 자신이 직접 호텔과 레스토랑 주방에서 요리사로 일한 경험도 지니고 있다.

  1957년 초연 이후 세계 각국에서 공연되면서 그 작품성을 인정받은 이 연극은 마치 한 편의 교향악을 감상하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든다. 첫 시작을 알리는 활기차고 조용한 아침은 디미누엔도, 손님이 가장 많이 몰리는 점심시간은 크레센도 그리고 점심과 저녁 사이의 휴식시간은 칸타빌레, 저녁은 다시 크레센도에서 클라이맥스로 다다르는 흐름을 보여주는 것. “셰익스피어에게 세계는 무대였다. 그러나 나에게는 주방이 세계다.” 원작자인 아놀드 웨스커의 말이 실감난다.

  러나 2011년 국립극단이 올린 〈키친〉 무대에서 살아 있는 주방을 보기는 힘들었 다. 생생한 묘사와 리드미컬한 전개를 보여줘야 할 배우들의 움직임은 철저하게 기계적이었고 그로부터 희곡에서 전해 받은 감동을 맛보기는 어려웠다. 무엇의 문제일까? 제작의 문제일까, 아니면 연출의 문제일까? 최근의 국립극단이 내딛는 위태로운 행보를 보면 실은 그것이 극단 내부의 총체적인 문제임을 미루어 짐작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극을 보고 나서 예전에 나온 희곡을 다시 한 번 읽었다. 우리는 왜 음식을 먹는가? 왜 돈을 버는가? 왜 사랑을 하는가? 왜 꿈을 꾸는가? 희곡은 삶의 본질적이고 기본적인 질문을 위트를 섞어 진실하게 독자들에게 던지고 있다. 주방에서 음식을 준비하고 주문받고 요리하고 서비스하는 행위 속에서 피어나는 사랑과 우정, 오해, 갈등, 화해라는 삶의 다채로운 빛깔을 절묘하게 그려내고 있으며 주방에 모인 사람들의 각기 다른 국가, 나이, 환경, 성별을 통해 담담하고 자연스럽게 사회와 인간을 이야기하고 있다.

  방에서 만난 요리사와 웨이트리스들은 늘 그렇듯 새롭게 들어오고 어느새 레스토랑을 떠나간다. 그만큼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더더욱 진정한 관계 맺기를 간절하게 원한다. “아름다운 것을 찾아 우리는 전 세계를 여행하지만 우리 자신 안에 반드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그것을 찾지 못할 것이다.” 소박한 자연주의자 랄프 왈도 에머슨의 말이 두고두고 생각나는 밤이다.

 

 

  2010년 2월 19일 금요일

 

  이비드 해어의 〈에이미 Amy〉를 보았다. 해어는 1960년대 이후 알렌 베넷, 톰 스토파드와 함께 영국 연극을 이끄는 주요 작가다. 그는 세계대전 이후의 영국 사회를 가장 능수능란하게 풍자할 줄 아는 작가들 중의 한 사람으로도 정평이 나 있다. 영국 사회의 전통적 관행이나 도덕관 및 정치 체제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하면서 동시에 연극적인 예술성을 집요하게 추구하고 있는 해어는 극작가이자 영화제작자이며 감독이기도 하다.

  으로 출판되지는 않았지만 그가 쓴 희곡 〈철로〉와 〈유다의 키스〉를 구해 읽어 보았다. 놀라운 작품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공연된 동명의 연극들은 별 재미가 없었다. 연출가가 제대로 희곡에 접근해 들어가지 못한 느낌이었다. 연극배우와 그녀의 가족에 관한 이야기인 〈에이미〉도 마찬가지. 배우들의 연기만 돋보일 뿐 거기서 연출의 세계관은 읽어내기가 힘들었다. 그저 많은 제작비를 들여 잘 만든 웰─메이드 연극 같은 인상을 풍긴다고나 할까. 작가가 희곡 속에 녹여낸 첨예한 문제의식을 한국의 연출가들에게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는 점도 아쉬웠다.

  생 동안 [천국의 나날들], [씬 레드 라인], [트리 오브 라이프] 같은 몇 편의 위대한 작품만을 만든 과작의 은둔하는 영화감독 테렌스 맬릭의 프로덕션 디자이너인 잭 피스크는 훌륭한 세트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처럼 최소한의 정보만으로도 이야기와 정서를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거기서 나는 ‘세트’란 말을 ‘연극’이라는 말로 바꾸고 싶은 충동을 받는다. 물리적인 키뿐만 아니라 마음의 크기마저 한없이 작은 난쟁이 같은 한국 연극 현장의 왜소함을 재확인하는 외롭고 쓸쓸한 밤이다.

 

 

  2008년 5월 1일 목요일

 

  돌극장. 젊은 연극인들의 산실. 게릴라극장이 극단 연희단거리패의 독채에 가깝고 연우소극장이 극단 연우무대 중심으로 편재돼 있으며 연극실험실 혜화동일번지가 많이 노쇠해졌다는 점을 감안하면 선돌극장의 선전은 한국 연극계에 신선한 활력을 불어넣어 주고 있다. 이름도 좋지 않은가, 선돌이라니. 젊은 연출가 손기호가 의욕적으로 이끌어가고 있는 이 극장에서 극단 골목길의 〈포트 Port〉를 관람했다.

  로 말하자면, 생명력이 넘치는 고향 같은 연극을 표방했던 극단 골목길의 정체성을 좋아했었다. 열악한 여건 속에서도 실험정신과 오기로 극단의 진로를 새롭게 개척해 가는 대표 박근형의 의지를 좋아했었고 그 인간성을 사랑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지금은 아니다. 지금도 여전히 연출가 박근형을 좋아하지만 예전만큼은 아니다. 그에 대한 믿음과 신뢰도. 그의 모습에서 이전의 당당하고 자신만만하던 패기를 발견하기 힘든 까닭은 무엇일까. 한국 연극의 지형이 정치적으로 변해서? 아니면 이제는 교수가 된 그가 변해서?

  가와 연출가가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그는 예술가로서 사망선고를 받는 게 아닐까. 이 무시무시한 경고는 내게도 해당되는 것일 테지. 한 가지 의문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가가 예술가로 존재하지 않는 순간에도 그 예술가의 존재를 의식하고 지지하고 있는 허깨비 같은 비평들의 정체가 참으로 궁금하다. 어쨌든 〈포트〉는 재미있었다. 사이먼 스티븐스는 인간의 약점을 정확하게 꿰뚫어볼 줄 아는 관찰력을 지닌 뛰어난 상상력의 소유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영국의 젊은 극작가이다. 이 희곡은 작가의 유년 시절과 청년기에서 많은 부분을 따온 자전적인 성격이 강한 작품이다. 역경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11살 꼬마 여자아이 레이첼의 성장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위안을 던져줄 것만 같다. “태어나면서 운명이 정해져버리는 그런 곳. 나는 그리고 당신은 그곳으로부터 끝내 자유로울 수 있을까.” 작품 제목이기도 한 ‘포트(PORT)’를 표현한 연극 속 대사가 가슴 속으로 스윽 스며든다.

  작품을 소개한 성수정은 요즘 대학로에서 자주 만날 수 있는 능력 있는 번역가다. 그녀에 의해 연출가의 손을 거쳐 좋은 작품이 여러 편 무대 위에 올라가고 있어 반갑지만 한편으로는 변변한 드라마터그조차 제대로 붙지 않는 한국 희곡의 기막힌 현실을 생각하면 갑갑한 생각도 든다. 단순히 훌륭한 외국 희곡을 국내에 소개하는 것만으로 자생력이 없는 한국 희곡이 스스로 서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을까?

 

 

  2007년 4월 7일 토요일

 

  너 맥퍼슨, 붉은 머리의 이야기꾼. 이 선한 인상의 아일랜드 극작가의 희곡 〈더블린 캐럴 Dublin Carol〉이 산울림소극장에서 공연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괜히 마음이 설렜다. 몇 년 전 〈거기〉라는 그의 또 다른 희곡이 강원도 사투리로 각색되어 연극무대에 올라간 적이 있었다. 그 생각을 하니 설레던 마음은 유쾌하게 바뀌어 갔다.

  20여 년 만에 재회하는 부녀상봉이라는 극적인 이야기를 맥퍼슨 특유의 모놀로그를 강조하는 대사와 일상적인 인물들의 대화로 잔잔하게 풀어 나간 이 작품은 그러나 공연으로만 보면 실패였다. 졸음이 밀려올 만큼 느슨한 전개에 아름다운 구원의 여정을 떠올리게 하는 따뜻한 봄날의 캐럴은 파묻히고 말았다. 결국 봄날의 크리스마스는 오지 않았다. 하지만 같이 갔던 전직 뮤지션 목수 부부는 이 연극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훗날 고백했다.

  작 공연 자체보다 내게는 다음과 같은 의문이 머리를 스쳤다. 왜 한국 연극의 중심에서 활동하고 있는 젊은 연출가들은 정해진 필수코스처럼 소극장 산울림을 꼭 한 번씩은 거쳐 가야 되는 것일까? 그곳에 한국 연극의 앞날에 대한 청사진이라도 있는가? 알 수 없는 일이다. 아니면 연출가들에게도 계보가 있는 것일까? 당연한 말. 왜 계보가 없겠는가? 한국 연극판도 한국 사회의 축소판에 다름 아니니까.

  일랜드 출신의 시인 셰이머스 히니를 연상케 하는 아일랜드의 또 다른 극작가 브라이언 프리엘. 사실 나는 맥퍼슨보다 프리엘을 더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아일랜드 사회에 대한 저항과 혁명의 감각을 감지할 수 있는 그의 희곡들. 하지만 그 작품들은 거칠지 않고 아름답다. 또한 이상과 현실, 비극과 희극, 신성과 세속, 정신과 육체 사이의 길항을 통해 종합적인 비전을 추구하려는 작가의 의지가 도드라지게 나타난다. 게다가 그의 언어에는 음악이 흐른다. 그러니까 프리엘의 예술에 대한 다음과 같은 말은 되새겨서 음미해 볼 만하다. “움직이는 것은 지속적인 것이다.”

  가 〈필라델피아, 내가 왔노라!〉, 〈번역〉, 〈루나자에서 춤을〉 같은 눈부신 작품을 거쳐 〈몰리스위니 Molly Sweeny〉(김수기 옮김, 월인)에 이르는 길은 한마디로 경이롭다. 프리엘을 믿음의 치유자로 격상시킨 이 작품엔 미국의 여성 시인 에밀리 디킨슨의 잠언이 머리말처럼 달려 있다. “모든 진실을 말하라 그러나 우회적으로 말하라.” 독일의 철학자 겸 신학자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의 말을 그대로 빌리자면 경건의 본질은 우리가 신에게 의존하고 있음을 느끼는 것으로부터 비롯되는 게 아닐는지.

 

 

  2004년 11월 25일 화요일

 

  샤 노먼. 페미니스트 연극. 미국의 대표적인 여성 극작가 노먼의 첫 희곡 〈출옥 Getting Out〉(정문영 옮김, 도서출판 동인)을 보러 갔다. 딸을 강간하는 아버지와 애증의 골이 깊게 팬 어머니 밑에서 성장한 알리의 파란만장한 인생행로를 다룬 작품. 공연은 쉽게 들어오지 않았다. 굉장히 쉽게 풀 수 있는 작품을 너무나 어렵게 푼 듯한 느낌. 그러나 그것은 나만의 편견일 수도 있겠다. 아, 그렇지. 삶이 어려운데 어떻게 연극을 쉽게 풀 수 있겠는가. 배우들의 열연 때문에라도 공연은 지속되기 마련이다.

  샤 노먼은 〈잘 자요, 엄마〉라는 희곡으로 퓰리처상을 받기도 한 재능 있는 작가이다. 여성이 바라보는 여성의 삶을 진지하게 표현할 줄 아는 작가. 여성의 삶을 글감으로 한다고 해서 다 여성주의 희곡은 아닐 것이다. 문제는 누가 밑바닥까지 내려가느냐, 지옥의 끝까지 가서라도 외면하고 싶은 실체와 정면으로 맞부딪치느냐가 아닐까. 그런 차원에서 본다면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짝퉁 여성 연극이 범람했었다고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은 아니리라.

  〈이들의 놀이시간〉과 〈가을정원〉을 쓴 릴리안 헬만, 〈마음의 범죄〉와 〈불꽃아가씨 선발대회〉의 작가 베쓰 헨리, 마리아 아이린 포네스의 〈진흙〉, 앨리스 차일드레스의 〈결혼반지〉, 수잔 글라스펠의 〈사소한 것들〉을 거쳐 카릴 처칠의 〈최상의 직업여성들〉과 사라 케인의 <정화된 자들〉에 이르면 여성의 문제는 다시 잔인할 만큼 적나라한 삶의 문제로 되돌아온다. 무섭고도 낯선, 그리하여 알고 싶지 않은 생의 이면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더 정직하게 맨몸으로 응시해야 할 우리 자신의 문제들.

  타고라스가 남긴 다음과 같은 말을 명심할 것. “우리 각자의 안에는 서로 연관된 네 개의 삶이 있다. 인간은 뼈가 소금으로 만들어졌기에 ‘광물’이며 피가 액즙처럼 흐르기에 '식물'이고 활동성을 가지고 외부세계의 지식을 소유하기에 ‘동물’이며 의지와 이성의 재능을 가지고 있기에 ‘인간’이다.” 그래서인가, 추함 속에서 인생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사라 케인을 읽는 밤은 외롭고도 슬프다. 자신이 지독하게 아파 보지 않고서는 타인의 아픔을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법, 그 뼈아픈 진실 앞에서 오늘 나는 또 가슴을 칠 뿐이다. 부끄러움만이 인생을 구원해 주는 이 추운 가을밤, 나는 진정 어디로 가는가.

 

《문장웹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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