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고네』: 불가능한 사랑

 

[사랑의 윤리학_제5회]

 

 

『안티고네』 : 불가능한 사랑

 

민승기(철학자)

 

 

 

 

1. 사랑의 불가능성

 

“정신분석이 오이디푸스가 아닌 안티고네를 출발점으로 삼았다면 어떤 일이 발생했을까?” 버틀러(Judith Butler)는 묻는다. “공동체의 지속적인 아이러니”, 더욱이 부인도 어머니도 아닌 “영원한 여자 형제”로 남아 있는 안티고네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그녀는 정치의 영역으로 완전히 지양될 수 없는 가족을 지시하는 동시에 가족 속으로 편입될 수 없는 잉여물이다. 안티고네가 자신의 집 없음을 한탄하고 “누구에게 나는 도움을 청해야 하죠?”라고 울부짖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낱 인간에 불과한 크레온의 포고령이 아닌 신들의 변함없는 불문율”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다고 이야기하면서도 정작 신들에게도 의지할 수 없는 안티고네는 “살아 있는 이들 곁에서나 죽은 이들 곁에서 함께 살지 못하고” 인간이나 신들에게서도 완전히 배제되어 있는 빈 공간이다. 그러나 설명할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지배 질서에 'No!'를 행하는 안티고네가 “견딜 수 없는 광채”(라캉)를 통해 우리를 “매혹”시키는 이유는 무엇인가? ‘매혹적인 광채’는 어느 곳에도 속할 수 없는 ‘순수함’에서 나오는 것인가? 아니면 모든 경계를 오염시키는 ‘대리보충’(supplement)에서 생겨나는 것인가? 라캉과 데리다의 경계에서 우리는 이스메네의 외침을 듣는다. “안티고네 언니는 불가능한 것과 사랑에 빠졌어요.”

“미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항거할 때 안티고네는 필리아(philia)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은 본성 또는 자연(nature)과 관련된 것이고 혈연관계인 가족들에 대한 상호의무를 포함한다. 그리스 사회에서 필리아는 죽음, 애도, 매장과 관련된 여성의 의무를 뜻한다. 안티고네는 여자 형제로서 오빠인 폴뤼네이케스를 매장해 줄 의무를 갖고 있다. “남편이 죽으면 다른 남편을 구할 수 있고 아이가 죽으면 다른 남자에게서 다른 아이를 가질 수 있지만 아버지, 어머니가 모두 하데스에 계시니 오라버니는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안티고네가 스스로 오빠를 매장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폴뤼네이케스는 가족 관계 속에서 안티고네에게 여자 형제라는 장소를 부여해 주는 대체 불가능한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오빠를 매장함으로써 비로소 ‘여자 형제’라는 가족의 일원이 된다. 로버트(William Robert)의 말대로 안티고네가 크레온의 명령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는 단순히 정치적 법질서를 강요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그녀의 본성, 또는 가족과 그녀를 연결시키는 유일한 사랑인 필리아 즉 그녀를 그녀로 만들어 주는 사랑을 버리라는 명령이기 때문이다. “나를 내 가족에게서 떼어 놓을 권리가 크레온에게는 없어.” 안티고네는 매장을 통해 폴뤼네이케스를 자연의 영역에서 문화의 영역으로 이동시켜 주는 동시에 자신은 ‘영원한 여자 형제’로 남아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필리아가 스스로를 넘어설 때다. 그것은 이미 경계를 넘어서려는 에로스적 열정에 의해 오염되어 있기 때문이다.

불가능성은 가족의 법인 필리아가 크레온의 정치적 법에 저항함으로써 죽음을 초래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만은 아니다. 필리아 자체의 내부적 분열을 초래하는 에로스가 근친상간이라는 형태로 필리아를 오염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분을 묻겠어. 그리고 나서 죽는다면 얼마나 아름다우랴? 그 분의 사랑을 받으며 나는 사랑하는 그 분 곁에 눕겠지.” 로버트의 지적대로 ‘오빠의 매장’이라는 필리아는 “그 분 곁에 눕는” 에로스와 겹쳐 있다. “고약한 자의 고약한 딸”이라는 코러스의 지적처럼 근친상간은 ‘갚아야 할 빚’으로 이미 안티고네를 사로잡고 있다. “친자식인 내 아버지와 불행한 어머니의 동침이여” “불행한 혼인을 하신 오라버니, 당신은 당신의 죽음으로 아직 살아 있는 나를 죽이셨어요.” 그러나 안티고네는 “제우스에게 갚아야 할 오이디푸스의 빚”을 오히려 배가시킨다. 근친상간의 산물인 안티고네 역시 근친상간의 산물인 오빠를 사랑함으로써 혼돈은 가중된다. 아버지와 아들 간의 ‘차이’에 기반한 가족제도는 아버지이자 오빠인 괴물과도 같은 존재에 의해 오염된다. 더욱이 근친상간 욕망은 “어떤 싸움에도 지지 않는” “인간이나 신들 모두가 벗어나지 못하는” 에로스에 의해 추동되고 있다. 로버트의 지적대로 사랑의 신 에로스에게서 시작되어 사랑의 여신인 아프로디테의 찬양으로 끝나는 코러스의 에로스 찬가는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에로스의 신적인 속성을 강조하고 있다. 경계를 넘어서는 파괴 또는 지나침으로 존재하는 에로스는 그것에 사로잡힌 자 모두를 ‘광기’로 몰아넣는다. “이 두 소녀 가운데 한 명은 방금 미쳤고 다른 한 명은 날 때부터 미쳤어.” “정신 나간 주제에 나를 가르치려 들다니! 후회하게 되리라.” 크레온에게 에로스에 사로잡힌 안티고네, 이스메네, 하이몬은 모두 미쳐 있다.

혼돈을 초래하는 에로스에 사로잡힌 안티고네는 ‘자연’에 안주하지 못한다. 그녀는 ‘길들여지지 않는 자연’, 끊임없이 자신의 경계를 넘어서는 자연, 자연과 문화의 대립구조로는 ‘사유될 수 없는’, 자연도 문화도 아닌 제3의 공간이다. 그녀는 크레온의 정치적 질서에 저항하는 자연 즉 친족관계(필리아)를 지시하는 동시에 근친상간(에로스)이라는 ‘친족관계 자체의 일탈’(버틀러) ‘스스로를 삼키는 가족’(데리다)이다. 레비스트로스의 말대로 근친상간 금기는 문화를 가능케 하는 조건이지만 스스로는 자연도 문화도 아닌 것으로 남아 있다. 그것은 금기란 점에서는 특수한 문화이지만 모든 문화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보편성을 갖는 자연이기도 하다. 안티고네 역시 오빠를 자연에서 문화로 이동시켜 주는 동시에 자신은 자연도 문화도 아닌 공간 속에 남는다. 그녀가 가족 속에서도, 남성들의 영역인 정치의 영역 속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자연도 문화도 아닌 제3의 영역은 자연과 문화의 순수성을 와해시키는 동시에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조건이자 기원이다. 자연과 문화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의미’는 모두 자연도 문화도 아닌 혼돈에 빚지고 있다. 근친상간은 친족관계의 단순한 위반이 아닌 ‘대리보충’이기 때문이다. 대체하기 위해 더해지는 대리보충은 친족관계 자체의 결핍을 드러낸다. 친족관계는 근친상간이란 혼돈을 배제할 때에만 가능한 이차적 체계일 뿐이다. 그러나 혼돈은 억압될 수 있을 뿐 온전히 제거될 수 없다. “체계의 토사물”인 혼돈은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괴물이나 유령의 형태로 다시 돌아오기 때문이다. “저기 저것은 무슨 해괴한 환영인가? 저 소녀가 안티고네임을 내 어찌 눈으로 보면서 부인할 수 있겠는가?”

 

 

2. 안티고네라는 불가능성

 

“하지만 내 목숨은 죽은 지 이미 오래야. 내가 고인들을 섬기도록 말이야.” “나는 죽어 있고 동시에 죽음을 욕망하고 있어.” 카프카의 주인공들을 연상시키는 이 말은 안티고네가 삶 속에 이미 들어와 있는 죽음, 그것도 살아 있는 동시에 죽어 있는 불가능한 죽음의 구현체라는 사실을 지시하고 있다. “무덤이여, 신방이여, 석굴 속 영원한 감옥이여.” 신방과 무덤이 같아지는, 삶과 죽음이 겹쳐 있는 석굴, 산-죽음의 형태로 생매장당하는 안티고네는 죽음 이후에 지속되는 삶, 삶의 잉여를 살고 있다. 데리다의 말대로 삶이 또 다른 이면을 갖지 않는다면 죽음이란 이미 삶과 함께 있는 것이다. 삶도 죽음도 아닌 산-죽음이 안티고네의 존재방식이다. 안티고네라는 존재의 불가능성은 바로 이 삶과 죽음의 중첩에서 생겨난다. 이 불가능한 존재가 나타났을 때 출현은 사건(event)이 된다. “저 해괴한 환영이 안티고네임을 내 어찌 눈으로 보면서 부인할 수 있겠는가?” 코러스의 말대로 불가능성은 출현/발생한다. 불가능성의 출현은 무-한성(in-finite)을 드러낸다. 그것은 유한성 속의 무한성, 유한성을 ‘중지’시키는 무한성이다. 불가능성은 이상적인 초월성도 경험적인 사건도 아닌 경험적인 것의 분열을 초래하는 틈으로 발생한다. 지젝의 말대로 안티고네의 동어반복이 그 예가 될 수 있다. 얼핏 보기와는 다르게 안티고네는 크레온의 폴리스의 법에 하데스의 법을 대립시키지 않는다. 그녀는 ‘나의 오빠는 나의 오빠다’와 같은 동어반복을 통해 크레온의 말을 ‘중지’시킬 뿐이다. 중지 속에서 돌아오는 것은 인격을 특징짓는 선하거나 악한 행동들이 아니라 추상적 보편성이나 특수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폴뤼네이케스의 특이성(singularity)이다. 윤리학이 지시하는 것은 선이나 악으로 재현할 수 없는, 구별 이전의 빈 공간, 특이성의 공간이다. 크레온에게 중요한 에테오클레스와 폴뤼네이케스의 구분이 안티고네에게 전혀 문제되지 않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살아 있는 동시에 죽어 있는’ 유령인 안티고네는 이번에는 새끼를 잃고 둥지가 비어 있는 것을 보게 된 어미새로 출몰하여 크레온의 인간중심적 담론이 갖는 이데올로기를 ‘중지’시킨다. 코러스의 ‘인간에 대한 송가’에서 보듯 “사람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다”. 그는 “파도 아래로 길을 열 뿐 아니라” “가장 신성한 신인 대지를 갈아엎어 경작한다.” 인간은 “들짐승들을 책략으로 제압하고 말을 길들여 그 위에 멍에를 얹는다.” 크레온은 하데스의 법으로부터 자유롭다. 폴뤼네이케스의 시신에 흙이 덮여 있는 것을 보고 신이 한 일일 수도 있다고 말하는 코러스를 반박하면서 크레온은 만약 그렇다면 “우스꽝스럽고 참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는 신을 온전히 지배하고 있고 그의 법은 신과는 관계없이 스스로 부여된 것이다. 그러나 크레온의 인간중심주의는 성차를 견디지 못한다. 여기서 성차는 단순히 억압적인 차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 체계 전체를 요동시키는 틈으로서의 안티고네를 말한다. 정신분석이 오이디푸스가 아닌 안티고네를 기원으로 삼았다면 어떤 일이 발생했을까? 라는 버틀러의 질문이 출몰하는 곳이 바로 여기다. 크레온의 체계는 모두 남성의 여성 정복으로 구성되어 있다. 신 역시 대지의 여신인 가이아이고 경작이라는 남성 질서가 그것에 상처를 낸다. 크레온은 안티고네가 자신의 명령을 어긴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내가 아니라 그녀가 남자”라고 말한다. 또 “내가 살아 있는 한 여인이 나를 지배하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계집에게 지느니 남자에게 지는 편이 낫다”고 하이몬을 설득한다. 그러나 크레온은 새끼들을 빼앗기고 비통하게 우는 새의 울음을 잠재우지 못한다. ‘길들일 수 없는 자연’으로 출몰하는 안티고네는 문화가 지배할 수 없는 자연으로 남아 크레온의 체계를 끊임없이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인간도 짐승도 아닌 비-인간, 안티고네라는 공간은 크레온의 인간중심주의를 가능하게 해주는 기원이다. 그곳은 제거될 수 없는 원인, 제거될 경우 차이에 기초한 크레온의 공간 자체가 무너지는 전복적 장소다. 안티고네가 목을 맨 이후로 하이몬과 그의 어머니 에우뤼디케가 그녀의 뒤를 따르고 크레온 자신도 ‘산 송장’과 같아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안티고네는 그 자체로 분열되어 있다. 로버트의 말대로 Anti-는 대립되는 것을 뜻하지만 -gone는 genos 즉 친족 체계를 말한다. 그녀는 정치적인 것에 반대하는 친족관계를 대표하지만 친족관계 자체의 분열을 초래하는 내부적 틈이기도 하다. 외부적 차이(between)와 내부적 차이(within)가 겹쳐 있는 ‘사이’(in-between). 안티고네는 두 차이가 분리될 수 없음을 이야기한다. 다시 로버트의 말대로 그녀는 정치적인 공간 속의 가족관계, 남성적 질서 속의 여성, 근친상간이라는 산-죽음의 흔적으로 존재한다. 서로를 욕망하지 않기 때문에 안정된 평형성을 기초로 자연에서 문화로의 이동을 가능하게 해줄 것으로 생각되던 형제-자매 관계는 안티고네의 경우에서 보듯 이미 근친상간의 욕망에 의해 오염되어 있다. 헤겔에게 체계를 가능하게 해주는 요소는 데리다에게는 체계가 소화하지 못해 토해 놓은 배설물에 불과하다. 체계의 안이자 바깥인 형제-자매 관계가 체계를 가능하게 해주는 동시에 불가능하게 한다. 타협을 모르는 안티고네의 (순수한) 욕망은 이미 혼돈과 타협(오염)하고 있지 않은가? 안티고네의 위협에 대한 크레온의 해결책은 그녀를 ‘비밀스런 장소’(crypt)에 가두는 것이었지만 안티고네 자체가 이미 크레온의 세계 속에 있는 이해할 수 없는 비밀스런 장소이지 않은가? 무덤이 신방과 같아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녀에게 비밀스런 장소는 친밀하고도 낯선 곳, 삶과 죽음의 경계가 교차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거기서 그녀는 경계를 넘어서는 에로스로 존재한다. 로버트의 말대로 폴뤼네이케스의 매장을 지시하는 필리아가 죽은 시체에 대한 사랑(necro-philia)으로, “함께 눕는” 에로스적 혼돈으로 바뀌는 곳이 바로 비밀스런 장소다.

안티고네의 불가능성은 필리아와 에로스가 겹치는 불가능한 사랑을 통해, 또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방식으로 존재하는 그녀의 유령과도 같은 삶 속에서 실현된다. 데리다의 말대로 “비극이란 사랑하는 것을 배우는 것”, 불가능한 사랑을 긍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립구조의 불가능성을 긍정하는 행위, 불가능성이 보여주는 유한성을 인정하는 행위일 수 있다. 사랑을 배우는 것은 죽음 이후의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이다. ‘안티고네와 함께 살기.’ 이미 죽었지만 아직 죽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실 때 사랑의 윤리학이 시작된다.

 

《문장웹진 9월호》

 

 

 

 

참고 문헌

 

소포클레스. 『안티고네』. 천병희 역. 숲, 2010.

Derrida, Jacques. Glas. Trans. John P. Leavey and Richard Rand. University of Nebraska Press, 1990.

Leonard, Miriam. Athens in Paris.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5

Robert, William. Trials: Of Antigone and Jesus. New York: Fordham University Press, 2010.

Žižek, Slavoj. Enjoy Your Symptom.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 주은우 역. 한나래,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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