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재의 궁극의 문화기행2-건축가 김원 편』

 

〈작가가 읽은 책〉

 

『이용재의 궁극의 문화기행2─건축가 김원 편』

 

이경자

 

 

 

 


건축가 김수근이 건축은 냉동음악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잘 이해하지 못해 질문도 못 했다. 하지만 건축이 냉동음악이라는 말을 잊은 적이 없었다. 특히 그분은 바흐의 음악을 들으면 그렇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무얼까, 바흐의 교향곡, 협주곡, 조곡 같은 것을 얼려 땅에 내려놓으면 그게 집과 같은 것이다, 이렇게 이해하면 무식한 걸까?

건축은 무엇이든 살기 위해 지어지는 공간의 틀이다. 그러나 건축이 그냥 틀로 존재할 때는 아직 건축이 아니라고 했다. 그곳에 숨 쉬는 무엇이 살 때, 그러니까 사람이 살면서 건축이 완성된다고 하였다.

사실 음악도 악보에 있는 것은 산(生) 것이 아니고 누군가 연주하고 감상할 때 살아날 것이다. 소설이 독자에 의해서만 살아나듯이.

하여간 잘 알지도 못하면서 건축은 이래저래 나와 인연이 깊다. 신춘문예에 당선한 소설의 주인공은 건축가이고 또 아주 잠깐 돈 맛을 보게 해준 연애소설 『혼자 눈 뜨는 아침』의 남자 주인공도 건축가다.

건축가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예술을 하면서 그 예술이 소설이나 시와 달리, 반드시 어떤 형태로든 있어야 하는 ‘주거 공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건축은 생활에 직접 접근한 예술창작품인 것이다.

오늘 소개하려는 책은 최근에 킥킥대며 읽은 건축가의 건축가에 대한 책이다.

글쓴이는 건축가 이용재다.

그의 이력은 대강 이렇다. 문학도를 꿈꿨지만 군인 아버지의 반대로 공돌이가 됨. 건축평론 전공. 건축 전문 출판사 설립하고 빚더미. 외환위기에 전 재산 날리고 감옥도 다녀옴. 건축현장 감리로 일하다 부실공사 유혹에 맞서서 결국 잘림. 현재 택시기사로 일함. 주말엔 가족과 건축답사 다니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

그가 낸 책의 제목은 『이용재의 궁극의 문화기행2─건축가 김원 편』이다. 나는 오랜만에 손에서 놓기 싫어서 눈만 뜨면 읽고 자다가 문득 깨면 머리맡의 전등 단추를 건드려 불을 밝힌 뒤에 이 책을 읽었다. 책의 내용도 그렇거니와 독특한 문체의 매력에 빠졌기 때문이었다.

 

 

나주.

 

고려시대 때는 전라도의 맹주.

 

오죽하면 전라도라는 명칭도 전주 ‘全’ 자와 나주 ‘羅’ 자를 합쳐 만든 합성어.

 

왜놈들이 들어오면서 광주는 상업도시로 뜨고 나주는 배나 파는 가난의 길로 들어선다.

 

면적은 서울과 같지만 인구는 달랑 10만 명.

 

재정자립도 15퍼센트.

 

사방이 온통 나주평야.

 

 

 

1866년 병인박해.

 

조금 맛이 간 흥선 대원군은 애꿎은 천주교도들의 참형에 나선다.

 

전국적으로 9명의 선교사를 포함해 8천 명이 이때 지구를 떠나고.

 

역공으로 프랑스 함대 강화도 상륙.

 

병인양요.

 

프랑스 장교 왈.

 

“뭐야, 이거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에도 책들이 쌓여 있잖아. 조선, 조심해야겠군.”

 

그때 프랑스는 외규장각에서 국보급 책 297권을 훔쳐 갖고 도망.

 

1993년 테제베 선정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이 『휘경원원소도감의궤』 달랑 한 권 들고 입국. (장난하냐?)

 

이 인용문은 김원 건축가가 나주 순교성지를 짓게 되는 배경을 설명하는 글이다. 마지막, ‘장난하냐?’는 작가의 생각을 끝에 작은 글자체로 붙여 놓은 것이다.

이용재의 글은 대충 이렇다. 이런 문체로 그는 김원이란 건축가가 언제 어디에다 어떤 건물을 지었는가, 건축 의뢰인과 어떻게 만나고 어떻게 설계를 이해시키고 건축에 들어가는 자재며 비용을 어떻게 해결하는지, 건축의 기억 자를 모르는 사람에게도 이해하기 쉽게 썼다. 그뿐이 아니다. 나주 순교성지의 기념경당을 이야기하면서 독자에게 순교의 역사적 배경도 알게 해준다.

건축가 김원이 지금껏 해온 작업을 문화시설, 교육시설, 주거?업무 시설, 종교시설로 세분하고, 못다 한 김원 이야기, 그리고 김수근이라는 다섯 개로 나눈 단원을 읽다 보면 모르는 사이에 건축에 대한 이해를 얻게 된다.

문화시설의 첫 번째는 김원이 설계한 ‘조정래 태백산맥문학관’이다. 건축물을 소개하기 위해 이용재는 그 건축물의 궁극적 주인일 문학관 애호가와 문학관을 있게 한 소설가 조정래를 간결하게 탐색해서 율동이 감지되는 문체로 표현해 놓았다.

 

조용재.

 

1919년 열세 살 때 머리를 깎는다.

 

법명, 조종현.

 

나라가 망하면서 왜놈들이 주지를 임명하는 사상 초유의 사태 발생.

 

1920년 한용운이 ‘조선불교청년동맹’ 발족.

 

절은 냅둬라 왜놈들아.

 

조종현도 뛰어들었다.

 

왜놈들은 물러가라. 훌라훌라.

 

(중간 생략)

 

1943년 전라남도 승주군 선암사에서 4남 4녀 중 넷째 출산.

 

이 아이가 바로 우리 시대의 영웅 조정래.  

 

이후부터 작가는 조정래의 일생을 역사적 맥락에서 더듬는다. 그리고 그가 어떻게 『태백산맥』을 쓸 수밖에 없었는가를 이해하고 수긍하게 만든다. 이해와 수긍 사이에 건축가가 존재한다. 이해와 수긍이 머리와 가슴에 있는 것이라면 건축가의 이해와 수긍은 대지 위에, 자연 조건 속에, 그리고 ‘비용’과 ‘건축법규’와 함께 존재한다.

나도 벌교에 가서 문학관을 보았다. 하지만 이 글을 읽기 전엔 그 건축물의 보이지 않는 피와 땀과 정감을 알지 못했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건축이란 무엇인가 하는 상식적인 공부는 마치게 된다. 그리고 건축물을 설계하고 짓는 사람과 그것을 의뢰하는 쪽의 조건이 어떻게 절충되는가 아는 것도 재미있다. 더군다나 건축물이 들어설 자리의 자연조건과 다투거나 아우러지게 하는 건 순전히 건축설계자의 능력이며 의뢰인과의 상호신뢰에 놓여 있다.

 

지금은 이미 세상에 없는 건축가 김수근은 자신이 지은 어떤 건축물을 두고 사람들이 찬사를 늘어놓으면 미칠 것 같다고 했다. 자신은 그 건축물이 너무 부끄러워 그 앞을 지나가지 못하고 심지어 그 근처에 가야 할 일이 있으면 아주 멀리 돌아서라도 그 앞을 지나지 않는다고.

나도 싫거나 부끄러운 소설이 있다. 그건 목록에서 뺀다. 그리고 책꽂이에 꽂지도 않는다. 그런데 건축가는 자기 맘대로 허물지도 못한다.

장르가 다른 예술과 예술가를 이해하는 일은 역사를 읽는 것만큼 흥미롭다. 그 흥미의 핵심은 글 쓰는 이의 해박함이다. 건축평론가 이용재의 발견은 또 하나의 즐거움이어서, 행복했다.

 

《문장웹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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