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하지 마라, 반응하라. 창조하지 마라, 연결하라 – 마지막 회

[에세이 테라스]

 

사고하지 마라, 반응하라

창조하지 마라, 연결하라

– 마지막 회

 

함성호

 

 

 

 

 

 

  이 복잡한 도시, 뉴욕의 풍경입니다. 한국에서는 간판들이 시각 오염을 일으켜 지저분하다고 난리를 하는데 뉴욕 간판들은 더 복잡하고 지저분합니다. 그것이 또 그 도시의 풍경이지요. 그런데 왜 우리만 문제를 삼는지 모르겠어요. 우리나라는 임금이 간판을 내린 전통이 있었습니다. 서원에다 임금이 직접 글을 써 간판을 내렸던 (그런 서원을 사액서원이라고 하잖아요?) 간판의 나라입니다. 서울의 붉은 간판을 보고 외국인들이 놀란다고 합니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요. 하지만 누가 그런 괴담을 퍼뜨리는지 모르겠습니다. 뉴욕에는 붉은 간판들이 더하면 더했지 서울보다 덜하지 않습니다. 중국은 어떻습니까? 거긴 온통 붉은색 천지입니다. 그것이 중국의 특징인데, 우리는 왜 외국인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막대한 예산을 들여 간판 정비사업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간판이 무질서하다고 부끄러워합니다. 부끄러워하기 앞서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한강변에 늘어선 아파트는 사실 보기 싫지만 그 또한 우리의 풍경이라면 다시 한 번 애정을 가지고 접근해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개선하자고 해도 늦지 않잖아요.

 

 

 

그리고 식량도 문제입니다. 미국 농장에서 옥수수가 과잉생산이 되어도 미국 정부는 옥수수를 기아선상을 헤매는 빈민들에게 절대로 주지 않습니다. 전부 샌프란시스코 만에 가져다 바다에 처박아버림으로써 전 세계 옥수수 가격을 조절합니다. 그리고 아프리카, 방글라데시에서 굶주리는 이들에게는 굶어죽지 않을 정도로 줍니다. 이것이 유네스코나 빈민단체에서 하는 일입니다. 이 그림에는 이렇게 씌어 있습니다.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라. 죽으면 아무것도 팔아먹지 못한다.” 세계적인 빈민단체나 환경단체들은 다국적 기업과 일정한 관련을 맺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마냥 탓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니까요. 그러나 저는 그 현실 앞에서 천 원의 기부를 바라는, 당신의 돈 천 원이 이 굶주린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다는 논리를 부정합니다. 저는 좀 더 근본적인 문제에서 이 모순을 해결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제가 홍대앞에 한 출판사의 신축을 계획하면서 변해 가는 홍대 앞의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상업건물이 주택지역을 잠식해 들어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0년 전만 해도 홍대앞은 전형적인 주택가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다 카페로 변했습니다. ‘홍대앞’ 그러면 클럽이나 카페가 제일 많은 줄 아는데, 사실 홍대앞에서 제일 많은 업종은 부동산으로 200여 개가 넘습니다. 그만큼 홍대앞의 상권은 불안정하다는 얘기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다른 상권이 들어오고 있는 것은 그만큼 또 잠재된 상권이 존속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일산 신도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육 개월이 멀다 하고 새로운 점포가 들어서고 기존의 점포가 물러납니다. 무슨 얘기일까요? 이것은 우리 사회가 그만큼 빠르게 변하고 있든가, 아니면 불안정하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홍대앞과 일산은 좀 다른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홍대앞이 많은 유동인구를 바탕으로 상권이 형성되어 있다면, 일산은 새 가게로 상권이 형성됐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일산에서는 점포가 들어선 순간부터 새로움이 유지되는 불과 몇 개월 동안은 성황을 이룹니다. 그리고 그 기간이 끝나면 점포의 수명도 끝납니다. 공산품 매장은 그렇지 않지만 음식점들은 거의 예외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양상은 다르지만 홍대앞이나 일산 신도시나 돈 버는 사람들은 부동산 중개업자들입니다. 부동산업자들에게는 무엇인가가 자꾸 번성하고 번화하게 보이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아까 언급한 금융 자본가들과 똑같은 원리지요. 실체가 없는 겁니다. 한국의 부동산 자본주의의 폐해는 서민 경제를 위협하고, 우리 삶의 근간을 흔들어 놓습니다. 높은 지대는 높은 임대료와 높은 서비스료를 지불할 것을 요구합니다. 결국 소비자들의 주머니에서 그 돈이 나가지요. 그런데도 우리는 이 논리에 편승하지 못해 안달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수렁으로 스스로를 몰아넣어 갈까요?

 

 

 

산업혁명 당시 영국 빈민가의 모습입니다. 지저분하고 거지들이 득실거리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다산과 추사가 활약하던 시기였습니다. 당시 한양은 무척이나 깨끗한 도시였습니다. 서양 건축물에 굴뚝이 생긴 것이 언제인지 아세요? 18세기 이전까지 서양에서는 벽난로로 난방을 하면서도 굴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문학작품에는 집 안에 연기가 자욱해서 콜록대며 창문을 여는 장면이 심심치 않게 나옵니다. 화장실은 18세기 말, 19세기 초에 만들었습니다. 요강은 우리나라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서양에서는 집집마다 요강이 있어서 일을 본 후 창문으로 투척하였습니다. 까치에서 출간된 『풍속의 역사란』을 보면 거기에 대한 이야기가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18세기에 집집마다 굴뚝이 생기자 어린아이들을 굴뚝에 들여보내 청소를 시킵니다. 윌리엄 브레이크의 시 「굴뚝 소제부」에는 산업혁명 시대의 아동학대, 아동 노동력 착취가 잘 그려져 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적에 나는 아주 어렸었다.
아버지는 나를 팔아먹었다. 아직 내 혀가 ‘─ㄹ뚝! ─ㄹ뚝!
─ㄹ뚝! ─ㄹ뚝!’ 하고 겨우 외칠 수 있을 때,
그래서 굴뚝을 나는 소제하고 검댕 속에서 잔다.

꼬마 톰 데이커가 있었는데, 양(羊)의 등처럼 곱슬한
머리가 면도질당했을 때 그는 울었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조용히 해, 톰! 신경 쓰지 마, 네 머리가 대머리면 검댕이 흰 머리칼을
더럽힐 수 없다는 걸 너도 알잖아.”

그러자 그는 잠잠해졌다. 그런데 바로 그날 밤,
톰이 잠들어 있는데 그는 이런 광경을 보았다.
수천(數千)의 소제부들, 딕, 조, 네드, 그리고 잭,
모두가 검은 관(棺)들 속에 갇혀 있는 것을.

그런데 빛나는 열쇠를 가진 천사 하나가 곁으로 오더니,
관들을 모두 해방시켰다.
그러자 푸르른 들판을 날뛰며, 웃으면서 그들은 달려가
강에서 몸을 씻자 햇빛을 받아 빛난다.

그러고는 발가벗은 흰 몸으로, 모든 가방들을 뒤에 둔 채
그들은 구름을 타고 올라가 바람 속에서 장난치며 논다.
천사가 톰에게 말했다. 그가 착한 소년이 된다면,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있고 언제나 기쁨이 넘칠 것이라고

그러다가 톰은 잠을 깼고, 우리도 어둠 속에 일어났다.
가방과 솔을 들고 일하러 나갔다.
비록 아침이 차가웠지만, 톰은 행복하고 따뜻하기만 했다.
그래서 모두들 자기 임무를 다한다면 해(害)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 윌리엄 브레이크의 시 「굴뚝 소제부」-

 

유럽의 오늘날의 모습은 200년 동안의 이러한 비참함을 바탕으로 완성된 것입니다. 나는 적어도 이런 부정적인 면모를 일신하려 했던 그들에게 존경을 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무언가를 희생했습니다.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의 자유였습니다. 저는 다른 걸 모두 잃더라도 인간의 자유만은 잃고 싶지 않습니다.

 

 

 

에펠탑이 들어서던 1889년 당시의 모습입니다. 에펠탑이 들어설 때 프랑스는 찬성하는 목소리와 흉물이라며 반대하는 목소리로 혼란스러웠습니다. 에펠탑이 당시의 사람들에게 전해 준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자신의 도시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이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에펠탑은 위로 올라가게 되어 있고, 당시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도시를 이렇게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본 경험이 없었지요. 에펠탑에 올라가서 자신의 도시를 내려다본 사람들은 경악했습니다. 그들은 비로소 전지적인 시점에서 대상을 바라보게 된 것이지요. 서양의 도시는 산이 거의 없는 평지에 형성되어 있습니다. 반대로 한국은 반드시 산을 배경으로 도시가 형성되지요. 그래서 우리는 일찍이 인간이란 거대한 자연 속의 한 점으로 미미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지요. 산업사회를 맞으며 비로소 같은 뷰를 가지게 된 유럽에서는 전혀 다른 태도가 나타납니다. 그야말로 그들은 전지적 관점으로 인간의 의지를 확장합니다. 에펠탑은 그런 인간중심적인 실체를 제공한 것이지요. 엄청난 충격이었지요. 매일 눈높이에서만 보다가 처음으로 그것을 본 것입니다. 예술가들은 그 혼란을 찬양하거나 반대했습니다. 심지어 어떤 예술가는 매일 에펠탑 위에서 밥을 먹었답니다. 파리에서 에펠탑이 보이지 않는 곳은 거기뿐이라면서.

 

《문장웹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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