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하지 마라, 반응하라. 창조하지 마라, 연결하라 – 네번째

 

[에세이 테라스]

 

사고하지마라, 반응하라

창조하지마라, 연결하라

 

– 네번째

 

 

함성호

 

 

  

 

이 그림의 아래쪽에서 가시관을 쓰고 있는 사람이 넬슨 만델라입니다. 그는 남아공의 인종차별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와 싸웠습니다. 근대가 가지고 있는 인종주의적 편견들, 근대는 타자에 대한 태도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부작용을 낳습니다. 인종주의적 편견 같은 것들은 근대가 낳은 것으로 그 이전에는 서양에도 동양에도 없던 것들이었습니다. 결국에는 그러한 근대주의적 모더니티들이 정치적으로 악용되면서 제국주의가 성립되었고, 제국주의가 확산되면서 아시아에는 온갖 폐해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 사람들의 경계선 때문에 같은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다른 나라로 분리가 되고, 같은 민족들이 다른 나라로 분리되었습니다. 민족이란 개념은 근대 이전에는 없던 것이었습니다. 서유럽이 오스트리아 제국과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약화시키고, 그들의 지배하에 있던 지역들을 분리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개념이 바로 민족이란 개념입니다. 20세기 초의 민족주의의 발흥,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결코 피지배 민족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중에 제국주의가 물러나고, 힘의 공백상태에 놓인 독립국가들 사이에서 벌어진 피의 살육을 떠올려 보십시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 인도네시아, 미얀마에서 벌어진 참상을 말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완전히 물러간 것은 아닙니다. 이들은 다시 21세기에 신자유주의로 무장한 채 다시 아시아로 진출합니다. 이제는 제국주의 총칼이 아니라 막강한 금융자본으로 그들은 다시 아시아와 남아메리카로 진출합니다. 두바이가 세계금융자본을 위한 실물체로 쓰여지다 버려진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지요? 두바이는 금융자본의 추상적인 가치를 위해 쓰이고 보기 좋게 버려졌습니다.

 

 

인천 송도가 이렇게(이것은 건축가 렘 쿨하스의 송도 계획안입니다. 송도가 렘의 계획대로 되지는 않지만 지금 송도는 더 부정적으로 건설되고 있습니다.) 엄청나게 바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 세계금융자본이 개입 된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사실이지요. 송도는 두바이가 몰락했듯이 금융자본이 형성되자마자 곧 그렇게 될 겁니다. 왜냐하면 영국이나 미국의 금융자본주의자들은,(금융자본은 실물 경제가 아닙니다. 주식과 같은 것들로 돈의 가치를 서로 자신들끼리 경쟁하며 만들어내고 그 차액을 취합니다. 그런데 그 차액을 만들기 위해서는 근거가 필요합니다. 실물이 있어야 하고, 이것 때문에 지금 아시아는 아수라장이 되고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두바이는 이미 꺼져버렸습니다. 전 세계에서 두바이에 투자를 할 때 이미 금융자본주의자들은 이익을 취하고 다 빠져버렸습니다. 거기서 이익을 취한 이후에는 두바이라는 실물은 필요가 없어진 것이지요.) 송도라는 실물이 필요할 뿐 송도가 한국경제에 미칠 영향에는 관심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뉴욕 월가에 있는 자본가들이 이 그림처럼 송도를 만들어놓고 다 빼먹고 빠질 겁니다. 그러면 송도는 망하게 되는 것이지요. 아시아 모든 국가들이 다 외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다 자신들의 나라가 아시아의 허브라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만든 말도 아니고 아시아의 허브가 되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만든 말도 아닙니다. 다름아닌 금융 자본가들이 만든 말로, 너희는 아시아의 허브라고, 네가 세상에서 제일이야, 네가 제일 예뻐, 이렇게 말하고 다니는 것입니다. 거기에 맞춰 아시아의 모든 국가들은 거대한 자본이 들어오니까 이런 신도시를 만들고 아시아의 허브, 전 세계의 허브로 만들겠다는 환상에 가득 차 버립니다. 환상을 빼먹고 달아나는 사람들은 금융자본가들 밖에 없습니다. 아시아는 빨리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금융자본시장에 의해서 놀아나게 되면 이런 쓰레기만 양산하게 됩니다.

 

그래서 한국에는 정통성을 잃어버린 정권들이 전통에 기대기 위한 알리바이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건물들이 남아있습니다.

이것은 세종문화회관인데 이러한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종문화회관은 수직 기둥의 열주, 에밀레종의 비천상 문양, 한옥처마처럼 지붕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콘크리트 건물로는 아주 부적합한 구조입니다. 목구조의 양식을 전통에 기대기 위하여 콘크리트로 찍어내고 돌을 갖다 붙이고 난리를 피운 것이지요. 포스트모더니즘 클래시시즘으로 분류하기에는 정치권력의 의도가 너무도 적나라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음악가들, 공연예술가들이 제일 싫어하는 공연장이 세종문화회관입니다. 음향 안 좋고 분위기 어수선하고, 그래서 연주자가 집중이 안 돼, 가장 안 좋은 공연장으로 손꼽습니다. 그 다음이 예술의 전당입니다. 하나는 박정희 정권이, 다른 하나는 전두환 정권이 건축한 것입니다. 둘 다 군사 정권이고, 쿠테타로 힘을 잡은 다음 인민을 억압했습니다.

 

홍콩 도시의 모습입니다. 공각기동대라는 일본 만화영화의 스케치로, 스텝이 홍콩에 가서 직접 해 온 스케치이니 실재와 거의 비슷한 모습일 것입니다. 이 공각기동대를 만든 오시이 마모루는 동경제대 철학과 출신입니다. 그 사람이 미래라는 것을 예측하면서 가장 디스토피아적인 미래를 찾은 것이 바로 홍콩입니다. 홍콩이 다른 도시들과 다른 점이 무엇일까요? 거기에는 분명 근대적 풍경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사는 사람은 전근대의 삶의 습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전근대적 삶을 싸고있는 근대적 외피,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혼재, 이것이 홍콩을 만드는 풍경입니다. 근대는 아직 전지구적인 문제가 아니다는 것이지요. 그것은 한국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전회에 서양의 유토피아를 보았지요. 이것은 안견이 그린 몽유도원도입니다. 이것이 바로 동양의 유토피아지요. 이 그림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좀 더 자세히 보십시오. 그러면 보는 사람의 시각이 붕 떴다가 내려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동양에서는 네 가지 시선이 존재합니다. 먼저, 고원법 : 눈높이 위로 바라보는 시선을 말합니다. 평원법 : 눈높이에서 바라보는 시선입니다. 심원법 : 산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보는 시선입니다. 부감법 : 완전히 공중에서 내려다 보는 시선입니다. 말하자면 새의 시선으로 그리는 것이 부감법이지요. 그런데 서양회화에서는 이것이 하나의 그림에 하나의 시선으로 고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동양화에서는 이 네 가지 시선이 동시에 공존하지요. 동양화는 항상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쭉 훑어보면서 내려가야 합니다. 이 그림을 그렇게 한 번 주욱 따라가 보십시오. 그러면 작가가 보여주는 시각들이 다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처음 오른쪽에서 만나는 복숭아밭은 눈 아래에서 펼쳐진 광경입니다. 심원법이나 부감법에 해당합니다. 조금만 더 왼쪽으로 나가 볼까요? 그림 중간의 계곡들은 정면에서 본 것이고 평원법이 적용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왼쪽 끝의 멀리있는 풍경은 위로 쳐다본 관경입니다. 고원법이 적용되었습니다. 하나의 사물을 바라보는 다각적인 시각을 추구한 사람들은 입체파들입니다. 그러나 동양화는 다른 사물들을 각각 다른 시선으로 처리하여 그것을 한 화폭에 담습니다. 아마 브라크나 피카소가 동양화를 봤다면 기절했을 겁니다. 보십시오. 그렇게 보니까 어때요? 마치 우리가 멋진 비행을 하고 난 다음 같지 않나요? 이 복잡한 시선을 통합하는 힘, 근대는 이 힘을 불합리하다고 말합니다.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실사를 찍은 사진이 아닌 바로크 시대의 조각입니다. 바로크 다음에 로코코가 나오고, 크게는 이것은 르네상스에 포함되는 개념이기도 합니다. 그 후 많은 사조들이 있지만 역시 모더니즘이지요. 그 다음에 가장 화려하게 데뷔하는 것이 지금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미니멀리즘입니다(이것도 한물 갔습니다만 여전히 현대미술에서 그 맥은 유지되고 있지요). 그런데 르네상스에서 바로크의 관능성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인간의 육체, 인간이라는 것에 함몰되었던 시대입니다. 인간이 이렇게나 아름답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바로크라는 것은 정말 찬란한 시대입니다. 이 바로크의 찬란함을 거부하면서 나오게 된 것이 장식은 죄악이라고 하는 모더니즘입니다. 장식은 죄악이라는 말을 아돌프 로스라는 사람이 했는데, 사회학자이자 건축가이기도 합니다. 이 말을 하기 위해서 이 사람은 교도소에 가서 범죄자들의 조사했습니다. 그랬더니 교도소에 수감된 사람들은 거의 다 문신을 가지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논리지요. ⓛ교도소에 수감된 사람은 다 문신을 했다. ②문신을 한 사람들은 다 죄인이다. ③따라서 장식(문신)은 죄다. 문신을 한 사람은 나쁜 사람이고, 나쁜 일을 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임으로 장식하지 말자, ‘장식은 죄악이다’라는 논리를 펼친 것입니다. 지금 보면 말이 안 되는 논리이지요. 그런데 이 말도 안 되는 논리가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통용이 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뭐 하나 사실 때도 세련된 걸 좋아하시잖아요? 우리가 세련되다고 하는 논리에는 모더니즘이 배경으로 깔려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서양에서도 이런 바로크의 생생함, 화려함, 관능에 휩싸였던 때가 있었다는 것이지요. 당연히 그 아름다운 시절(bell epoch)은 갔습니다.

 

《문장웹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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