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적 블랙 펑크, 저자의 죽음, 늙어 가는 문학의 찰나적 young함

[작가가 읽은 책]

21세기적 블랙 펑크, 저자의 죽음, 늙어 가는 문학의 찰나적 young함

헬레네 헤게만의 『아홀로틀 로드킬』

배수아

   “난 범죄자가 아니에요, 단지 지금 모양새가 좀 나쁠 뿐이지.”
 

– 헬레네 헤게만, 2010년 8월 팝쿨투어 잡지 《스펙스》와의 인터뷰에서   

2010년초 독일 문단에 커다란 스캔들을 불러일으킨 헬레네 헤게만의 소설 『아홀로틀 로드킬』은 – 지금껏 문학사에서 아마도 우리에게 알려진 것 이상으로 빈번하게 일어났었을 것이 틀림없는 – ‘훔친 깃털’로 치장된 소위 ‘표절 작품’이라는 것과, 10대 문학에 대한 기존 평단의 변함없이 상투적인 태도, 그리고 문학에 있어서 매번 얘기되어 오고 항상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던 모랄 해저드의 의미와 더불어 많은 파장과 토론을 불러있으켰고 그것은 아직 지속되는 중이기도 하지만, 단순히 고전적인 표절과 도덕의 문제를 넘어 인류와 문화의 미래에 대해 훨씬 더 많은 것을 암시하는 매우 이른 징후의 도래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래서 나는, 어쩌면 나 혼자만의 생각일지도 모르는 그 인상들을 가지고 한 편의 리뷰를 쓰기로 했다.
 
『아홀로틀 로드킬』은 타인들로부터 받은 개인적인 email, 인터넷 독자 포럼에 익명의 독자가 올린 감상평, 구글의 바다를 떠도는 정체불명의 현란하고도 포스트모던한 표현들, 무수한 록 음악의 가사, 살아 있는 인간의 피부를 벗겨내는 가학공포영화의 신scean, 말콤 로리, 데이비스 월레스, 특히 펑크 문학의 여왕이라 불리는 캐시 애커 등의 작품, 모리스 블랑쇼의 구절, 영화의 시나리오, 그리도 무엇보다도 블로그, 그중에서도 아이렌이라는 가명으로 알려진, 베를린 클럽 문화를 주로 다룬 블로거의 글을 상당부분 – 헤게만자신은 이렇게 인용된 부분이 13군데라고 한다 – 그대로 옮겨와 만들어진 일종의 패치워크에 가까운 작품이다. 매우 과격한 21세기형 펑크라고 할 수 있는 이 초현대식 문학적 리믹스 작품에는 심지어 초기 기독교 교부 케사레아 유비세우스의 지옥관까지 태연하게 등장하고 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금세 알아차릴 것이다. 오늘날 이 모든 다방면의 지식을 단편적 형태로 사냥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장소는 보르헤스의 도서관이 아니라 구글이라는 것을. 그리고 1992년생이며 이미 15세에 단편영화 <토르페도>의 시나리오 작업을 해 본 경험이 있는 헬레네 헤게만은 이러한 구글의 노마드에 가장 적합한 작가 중 하나일 것임을.
 
1. 헤게만의 행위는 표절이다 아니다
2. 남의 글을 조금이라도 베껴 쓰는 행위는 문학에서 용납될 수 있다 아니다
3. 표절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마일드한 태도를 취하는 사람은 그 자신도 표절 행위를 하기 때문이다 아니다
 
일단 위와 같은 논쟁에 기꺼이 뛰어들기 위해서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밝힌다(나는 지구력이 요구되는 머리 아픈 토론을 아주아주 싫어하는 편이다). 그리고 내 주변에 있는, 아직 매우 엄격한 시각을 가지고 있는 다수의 진지한 사람들의 의견에 반대표를 던지고자 함도 아니다. 한 명의 젊디젊은 금발의 여성작가를 중심으로 사회적 논쟁이 증폭되는 현상을 내심 즐기고 있는 문학 미디어의 생태와도 전혀 관련이 없을뿐더러, 펑크나 록 문화라면 음악뿐 아니라 그런 방면의 문학에도 문외한이다. 즉, 특별히 옹호하고 싶어질 만큼 큰 애정이나 관심이 없다는 뜻이다.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가장 직접적인 계기는, 음악 전문잡지 《스펙스》에 실린 헬레네 헤게만의 인터뷰를 읽고 그녀의 글쓰기 방식이 인상적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전에, 독자들이 이 글을 도무지 알 수 없는 횡설수설로 판단하고 읽기를 포기해 버리기 전에, 문제의 책 『아홀로틀 로드킬』에 대해서 잠시 소개를 해 보겠다(보통 책 리뷰는 그렇게 진행되는 법이니까).
 
아홀로틀 로드킬은, 당연하게도, <아홀로틀>과 <로드킬>이란 별개의 단어가 어느 날 갑자기 떠오른 작가의 영감 덕분에 서로 합쳐져서 탄생한 제목이다. 아홀로틀이란 멕시코의 특정 호수에서만 서식하는 양서류인데, 평생 탈피를 하지 않고 올챙이 상태로 살아간다는 특성과 함께 아주 독특한 외모 덕분에 희귀 양서류 수집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로드킬이란 자동차에 납작하게 깔려 죽은 짐승의 시체다. 어린 시절부터 알코올 의존증이며 폭력성향인 엄마에게서 학대를 받으며 자라다가 엄마의 죽음 이후 배다른 언니 오빠와 살게 된 열여섯의 주인공 소녀 미프티의 과격하고 극단적인 틴에이저 시절을 묘사한 소설의 제목으로는 매우 적합한 듯하다. 소설의 무대는 독일 베를린. 미프티는 학교를 빼먹고 영화관과 테크노클럽으로 놀러 다니고 마약과 일탈에 탐닉하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프티, 한번 필을 받으면 아무도 당해내지 못할 만큼 무아지경의 장광설을 쏟아낸다는 특성이 있다. 어떻게 보면 이 소설은 미프티의 종잡을 수 없는, 그러나 미친 듯이 빛나는, 비일상적으로 빠른 속도의 ‘언어적 발광(發光 ,發狂)’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도 있다.
 

“글을 쓸 때 내 머릿속에서 빠르게 나타났다 금방 사라지는 찰나적 성질의 휘발성 떠오름, 그것의 속도에 뒤처지지 않기, 그 점이 내게는 참으로 중요하다. 나는 그런 생각들의 흐름과 거의 동일한 빠르기로 자판을 두드려야 한다. 어느 순간 그 생각들은 흔적도 없이 모습을 감추어 버리지만, 눈앞에는 내가 쓴 것이 놓여 있게 된다, 이런 식이다. 찰나적인 속도가 아니라면 결코 가능하지 않을 방식으로. 인간은 그런 식으로 어느 한때의 순간 그 자신이었던 존재와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미 그 순간의 생각이란 건 스스로의 길을 가버린 다음인데도.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자신이 써 놓은 글로 이루어진다고 하는 편이 맞으리라. 이 때 인간은 스스로의 생각이 나아가는 중간적 매개로서 존재하게 된다. 글을 쓰는 것은 이러한 경로를 체험하게 되는 멋진 일이다.”

 

  

 

– 헬레네 헤게만, 2010년 8월 팝쿨투어 잡지 <스펙스>와의 인터뷰에서

(그런데 인간의 그러한 찰나적인 떠오름은 어디에서 오는가? 헬레만의 생각뿐 아니라 우리 모든 글 쓰는 인간의 생각.)
 
얼마 전 모 대학의 문학강연에 간 나는 칠판에다 “문학이란…… 혁명적이다” 라고 쓰고 있다. 기존의, 상식의, 모든 통용되는 형태의, 전달 가능한 서술의, 무난하고 안정적인, 매끈한, 덜그럭거리지 않는, 모든 해석 가능한 언어에 저항하는 바벨의 혁명.
 
사실 헤게만의 언어가 방식이 완전히 새로운 것이라거나, 혁명 수준으로 실험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헤게만은 변태적인 묘사와 표현, 형이상학적 뒤섞음, 리믹스, 과감한 편집, 중첩과 혼돈기법, 이 글은 오리지널이 아니다 라고 역설로 주장하는 듯한 몸짓, 과장된 정처없음, 광기의 과시를 이용해 최대한 자신의 언어를 만들어내려고 무척 노력한 흔적은 분명히 보이지만, 그것이 모든 종류의 경계를 뛰어넘은 완전히 고유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런 점에 기인해 그녀가 천재와는 거리가 멀다고 비난하지만, 천재가 아님에 분명한 다른 수많은 작가들에게보다 유난히 그녀를 향해서 이 비난이 더욱 거세지는 것은 물론 그 유명한 표절 행위 때문일 것이다. 많은 소문과 오명에 휩싸인 『아홀로틀 로드킬』 이후 젊은 작가 헤게만은 아마 그 자신의 선언대로 다시는 소설을 쓰지 않을 수도 있다. 
 
『아홀로틀 로드킬』의 매력은 오직 모든 첫 번째 시도만이 가질 수 있는 영원한 영young함에 기인할지 모른다(이 부분에서 아홀로틀의 얼굴을 한번 떠올려 보자). 이 책의 번역자이기도 한 나는, 물론 표절 소동을 잘 알고는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역 작업 내내 주인공 미프티의 한없이 다층적이며 복합적인 목소리 속으로 깊이 빨려 들어갔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매우 개인적인 감상이지만, 수많은 록 음악적 재료들에 바탕을 두고 있는 미프티의 그런 목소리들을 번역하는 내내 나는 내가 무척 좋아하는 음악가 베른트 알로이스 침머만의 <어느 젊은 시인을 위한 레퀴엠>이란 작품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완전한 오페라도 아니며 성악곡도, 그렇다고 시 낭송극도 아닌 독특한 형태의 그 작품에서 침머만은 20세기라는 시대를 관통하는 수많은 텍스트를 인용, 목소리의 형태로 등장시킴으로써 하나의 음악곡을 완성했기 때문이다. 문학 텍스트뿐 아니라 아돌프 히틀러의 오리지널 연설, 인간의 권리를 선언하는 헌법의 조항, 마오쩌둥의 붉은 책까지도 음악속에서 낭독이 된다. 그리고 이 모든 현상에 대한 조문처럼, 염세 시인 콘라드 바이어의 한 구절, “다다를 수 있는 것은 오직 죽음뿐이다”까지.            
 
이런 생각이 든다. 어쩌면 헤게만은 줄리아 크리스테바와 롤랑 바르트의 ‘저자의 죽음’ 이후 탄생한  ‘조합된 저자’ 라는 새로운 문학 장르의 작품을 써낸 것일지도 모른다는. 그리고 『아홀로틀 로드킬』은 –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 그 유일한 작품으로 남게 될지도 모른다는. 

“나는 두 번 다시는 소설을 쓰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소설작업의 과정이 너무나 자폐적이고 너무나 단자적이기 때문이다. 내가 텍스트를 쓴다면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예술적 생산과정에 참여하는 다른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어떻게 행동하고 반응하는가에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시나리오 작가는 시나리오를 쓰면서 배우들이 이것에 어떤 리액션을 보일까 긴장감을 가진다. 왜냐하면 이야기라는 것은 다른 예술적 개인들이 그 안에 개입하여 각자의 사고를 더할 때 비로소 완성되며, 전체적으로 새로운 차원의 작품이 되어 재탄생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긴장감이야말로, 단순히 자기자신의 생각만 일방적으로 외치는 행위와는 달리, 나의 흥미를 자극하는 요소다.”


 
 

– 헬레네 헤게만, 2010년 11월 1일,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문장웹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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