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문의 『검은 이야기 사슬』

[작가가 읽은 책]

정영문의 『검은 이야기 사슬』

이준규

문학사를 돌이켜보면, 아니 문학사라고 하면 지나치게 거창해 보이니 그저 나의 독서 경험을 되돌아보면, 장르라는 것은 하나의 편의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우리가 시라고 칭하는 것은 옛날의 시와 다르며 또 앞으로 올 시들은 어떤 모습을 하게 될지 예상할 수 없다. 사람이란 자신의 취향과 습관과 앎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을 쉽게 수용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조금만 특이한 문학적 행위조차 기존의 불확실한 잣대를 가지고 재단하려고들 한다. ‘시의 본질’, ‘정통’, ‘전통’ 따위를 운운하면서 말이다. 내가 볼 때 기준은 어디에도 없다. 그저 개인적인 선호가 있을 뿐이다. 많은 소설이나 수필이 시처럼 보이는 순간이 있고 많은 시가 수필이나 소설로 읽힐 수 있다. 다만 시라는 옷을 입고 서점에 등장할 뿐이고 소설이라는 이름으로 그럴 뿐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전형적인 장르의 옷을 입은 경우가 더 많고 그것을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믿는 게 맞을 것이다. 하지만 단 하나의 예외가 있어도 어떤 것의 진리성은 의심할 수 있는 것이고, 요즘의 사정은 단 하나의 예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온갖 종류의 예외와 특이성이 폭발하고 있는 국면이다. 실험적이라고 칭할 것도 아니다. 노골적으로 표 나게 실험을 들고 나오는 작가가 아니더라도 예전부터 문학의 실험은 꾸준했고 그 실험은 당대에 실험으로 인정받을 수도 있지만 오히려 나중에 가서야 그 실험성과 문학적 가치를 평가받을 수 있는 것이다. 최근에 한 출판사에 의해 조선의 문인 이옥의 전집이 번역되었다. 그는 소위 문체반정의 표적이 되어 곤란을 겪은 사람이고 그렇다고 그의 문체를 바꾸지도 않았다. 그는 온갖 잡스러운 것에 대해 썼고, 당시에는 금기시되던 육욕에 관한 글도 많이 남겼다. 얼핏, 오로지 잡다한 기호와 취미에 몰두한 것 같으나, 문학의 속성이 기존의 진리를 강조하고 강화하고 덧붙이는 것에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어떤 틈과 사이를 구현하는 것이라면, 그는 매우 선구적인 문학의 길로 이미 들어갔던 것이다. 이옥에 관한 얘기는 여기서 멈추자.

나는 정영문의 『검은 이야기 사슬』에 대해 말해 보고자 한다. 이 소설집이라는 이름으로 발간된 책은 물론 소설집이기도 하지만 내 판단으로는 시집이라는 이름을 주는 게 더 합당할 것 같다. 가령,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은 산문시집으로 분류되며 따라서 시에 속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그 속에는 소설이라고 할 만한 것이 많다. 지나치게 짧아 소설이 아니라고 할 사람들도 있겠으나 소설이 꼭 길이로 판단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소설의 길이가 정해진 것은 순전히 문예지 사정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소설의 길이는 시의 길이와 마찬가지로 자유다. 장편소설(掌篇小說)이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최근에 출판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손바닥 소설』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그 소설집 역시 하나의 시집이라 칭해도 무방할 것이다. 또 다른 예는 무수히 많다. 내가 최근에 다시 읽은 『미국의 송어낚시』는 훌륭한 소설이지만 동시에 훌륭한 시집이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장르를 넘나드는 책은 이제 한두 권이 아니다. 최근에 출간된 김태용의 소설 『숨김없이 남김없이』와 한유주의 몇몇 소설은 충분히 시로 읽힐 만하다. 또 나의 장시 「문」 역시 얼마든지 소설로 읽을 수 있다. 성기완의 시들은 또 어떤가. 그는 매우 감각적인 소설가라고 칭해도 되지 않을까. 그런데 이들은 왜 정해진 습관을 따르지 않고 애매한 경계에서 서성이는가? 이 질문은 매우 심각한 질문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쓰고 읽는 것이 무엇인가? 소설인가 시인가 아니면 그것과 다른 새로운 무엇인가? 나는 지금 이 곳에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쉽게 하고 싶지 않다. 앞으로의 내 삶이 그 질문에의 대답이 되기를 희망할 뿐이다.

정영문의 문제의 책은 45편의 텍스트로 이루어져 있다. 책의 포맷은 가로 13센티미터 세로 21센티미터다. 상당히 알맞은 책의 형태로 보인다. 우리가 이 책에서 연상할 수 있는 것은 많다. 나는 포, 베케트, 카프카, 앙리 미쇼, 『요재지이』 등을 떠올렸다. 다른 요소도 많이 감춰져 있거나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을 것인데, 나의 과문은 이 정도의 특징을 파악할 뿐이다. 포에서는 이상야릇한 광기가, 베케트에서는 언어의 문제, 달리 말하면 언어의 의미화에 대한 불신, 또는 불안이, 카프카에서는 부조리한 상황에 처한 화자의 어처구니없음이, 앙리 미쇼에서는 있을 법하지 않은 일의 과감하고도 그럴듯한 제시가, 『요재지이』에서는 환상적 상황의 현재화 따위 등이 이 문제작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우리가 이 책을 읽을 때 전에 있던 문학과 꼭 비교를 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런 요소가 연상되건 말건 우리는 이 책을 만질 수 있고 즐길 수 있다. 내가 처음 이 책을 읽은 것은 1998년인데, 나는 그의 문체의 깔끔함에 우선 놀랐다. 이런 문체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의 문체는 매우 차갑고 분명한 번역 투에 가깝다고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전래의 한글 문체에 흔한 모종의 토속성이 적극적으로 배제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한국 문단에서 흔히 얘기하는 미문의 투를 거의 의도적인 방식으로 보일 정도로 적극적으로 벗어나 있다. 그러니까 그는 매우 깔끔하고 아름다운 문체를 만들어냈음에도 기존의 한글문학이 갖고 있는 장점을 무시하고 있다는 말이다. 나야 정영문처럼 일부러 ‘고운 우리말’을 피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아무튼 나는 그의 문체로부터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그에게는 모종의 단호한 스타일리스트가 연상됐던 것인데, 그 문체는 기존의 어떤 ‘좋은 문장’과도 다른 것이었다. 나는 그의 그러한 문체가 번역을 통해 습득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그는 그의 번역 일을 통해 새로운 문체를 개발한 셈이다. 오해의 소지가 있어 말하는데, 그의 문체는 소위 말하는 번역 투와는 다르다. 우리가 보통 번역 투라고 칭할 때는 그 문장의 서툶과 딱딱함과 부자연스러움을 칭하기 때문이다. 그의 문장은 분명하고 깔끔하며 아름답다. 무언가 흔들리고 있을 때, 나는 정영문의 이 책을 종종 꺼내본다. 그러면 내가 가야 할 길 중 하나가 어렴풋이 떠오르는데, 나는 안개에 갇힌 듯 그 길에 갇혀 며칠 동안 방황한다. 그렇게 하고 나면 무언가 위기에서 벗어났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내가 그렇게 이용하는 책이 정영문의 『검은 이야기 사슬』 한 권만은 아니다. 아무튼 이 책은 나의 오랜 동반자다. 독자들의 일독을 권한다.  

 

《문장웹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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