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지는 밤

[작가가 읽은 책]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지는 밤

김성규

우리의 내부를
외부와 차단하기 위해선
노래가 없는 것으로
충분하다.

 

– 기유빅

‘시가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너무나 많은 내용과 방법을 동원해 설명해야 하는 질문이지만 동시에 어떤 말로도 풀 수 없는 화두이기도 하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각자의 가슴 속에 묻혀 있을 것이다. 그것을 꺼내 세상에 내보일 때, 언어를 통해 입술에서 발음될 때, 알 수 없는 이유로 그 해답은 공중에서 사라져 버린다. 마치 햇볕에 타버린 필름처럼 형상은 사라지고 알 수 없는 적막과 암흑만 남는 것이다. 어쩌면 시는 말할 수 없는 그 암흑과 적막의 순간인지도 모른다.
시는 스스로를 증명해 보인다. 위대한 시는 그것이 ‘아름다운가’ 혹은 ‘정당한가’라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읽는 순간 독자를 사로잡는다. 기유빅은 「노래」라는 시를 통해 그 순간을 이렇게 말했다. “티티새가 노래할 때/ 세계와 순간이/ 그들의 궤도를 그린다.” 시에 관한 수많은 해석과 설명이 있겠지만 아름다운 시는 그런 논의들을 모두 무화시킨다.

낯선 저수지 앞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지난 해 물에 빠져 죽었다는 그녀/ 어릴 적 고모네 가며 함께 걸었던 누이/ 그러고 두세 번 보았을까/ 시집 가 아이 둘 낳았다는 풍문/ 신랑과 별거해 호프집 한다는 풍문/ 어느 날 가게 문 닫고 나가 감감무소식이라는 풍문/ 그리고 며칠 뒤/ 단골 총각과 함께 저수지 위로 떠울랐다는 풍문을/ 신문 귀퉁이에서 읽었다/ 고모는 우세스럽다며 입을 다물었지만/ 풍문에 쫓겨 수몰되었을 누이의 로맨스를/ 나는 알 것도 같다/ 풍문이 밝히지 못한 단말마의 흐느낌을/ 누구든 생의 끝 진실은 풍문이 되고 말 것이지만/ 누이의 늦은 사랑은 아무래도 풍문이 아닐 것 같다/ 그게 옳다면 바보처럼 죽지만 말고/ 뭐라고 말 좀 해보라며/ 목이 멘 저수지 수면이 자꾸만 자꾸만/ 가슴을 쥐어뜯는다/ 나는 너무 늦게 이 저수지에 왔고/ 누이는 너무 늦게 사랑을 알았을 뿐

 

– 「풍문」전문

 
최영철의 시집 『찔러본다』는 일상의 순간을 소박한 언어로 그려내고 있다. 「풍문」이라는 시도 우리가 흔히 들어 온 이야기를 언어로 옮겨 놓은 듯하다. 지난한 삶을 헤쳐 오며 늙어 가던 누이가 사랑을 알았을 때 그 누이는 처음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고 타인과 함께 스스로를 사랑했을 것이다. 그런 누이가 죽자 주변 사람들은 그 감정을 저수지의 물로 수장하듯 너절한 풍문으로 덮어 버린다. 우리의 삶에서 진실이 훼손되는 순간은 비단 누이의 사랑이 추문으로 전락하는 상황에만 찾아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사랑의 감정이든 아니면 고통과 외로움의 감정이든 우리가 살아가는 매 순간은 타인의 시선에서 보면 풍문에 불과한 ‘감정의 소모’로 점철된 일상이다.
누이는 진실이 저속한 소문으로 변하는 순간 죽음을 택한다. 죽음을 통해 자신만의 진실을 강물 속에 수장시키고 누구에게도 꺼내 보이지 않음으로써 진실의 부패를 막은 것이다. 어쩌면 누이에게는 그것이야말로 편견과 악의로 가득한 타인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신의 진실을 오롯이 보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는지도 모른다. “가슴을 쥐어뜯는” 저수지 앞에서 화자는 이런 어긋난 인생의 한 단면을 쓸쓸하게 돌아본다.
그렇다면 죽은 자가 아닌 산 자들이 자신의 진실을 너절한 풍문으로 떨어지지 않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사내가 수레를 끌고 언덕바지를 오른다 사내의 비틀린 몸은 땀방울을 쥐어짜고 있다

수박이 실린 수레 뒤에서 배가 불룩해진 여자가 끄응끙 수레를 따른다 한쪽 손으로는 무거운 배를 안고, 한쪽 손으로는 수레를 밀면서

지난봄 사내의 넝쿨 끝엔 딸기와 외가 열렸었다 상하기 시작한 딸기를 자주 헐값에 팔아넘겨야 했었다

소아마비 뒤틀리는 사내의 몸속 굽이치는 무늬가 길을 휘감고 오른다 만삭이 된 수박 수레바퀴를 돌린다


 

-「스프링」부분

손택수의 시집 『나무의 수사학』은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살아가야 할 시간’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수레를 끌고 가는 부부가 등장하는 시 「스프링」에서 사내는 ‘비틀린 몸’으로 땀방울을 쥐어짜며 언덕을 오른다. 그는 가난과 장애라는 이중고를 겪으며 자본주의 사회의 변두리에서 살아가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큰 죄는 '가난'이며, 시 속의 사내는 수레를 끌고 날마다 언덕을 올라야 하는 ‘삶’이라는 형벌에 처해 있는 것이다.
장애를 지닌 사내와 만삭의 아내가 운명에 저항하는 방식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시에는 담담하게 수레를 언덕으로 밀어올리는 부부의 행위만 그려져 있을 뿐 다른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손택수의 다른 시들에 나타나는 인물들처럼 그들은 운명에 저항하기보다 수동적인 모습으로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견딤의 행위가 과연 운명에 저항하는 것일까.
하지만 시각을 달리해 보자. 가난하고 병든 이들이 가혹한 현실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무엇일까. 실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단지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견디는 행위뿐일 것이다. 견딤의 행위만이 다가오는 파고에 저항하는 그들만의 유일한 방법인 것이다.
물론 그 견딤의 행위는 그들의 삶을 변화시킬 수 없다. “수레바퀴”처럼 끝없이 돌고 도는 윤회의 순간처럼 손택수의 시들은 많은 부분 우리 삶이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체념적 세계관에 바탕을 두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그러한 체념적 행위가 오히려 강렬한 생의 의지를 발휘하는 역설적인 순간을 이 시는 보여준다. 시 속의 사내는 힘겨운 노동을 감내하며 자신의 몸속에 “굽이치는 무늬”를 만들어 낸다. 견딤의 행위를 통해 생으로 인한 고통과 체념을 생에 대한 강렬한 의지, 즉 “굽이치는 무늬”로 바꾸어 내고 있는 것이다. 수축되는 순간 이완의 힘으로 뒤바뀌는 스프링의 속성처럼, 체념의 순간에 “뒤틀리는 사내의 몸속 굽이치는 무늬가 길을 휘감고 오르”는 이 전도현상을 천천히 음미해 본다. 묵직한 감동이 내면을 울린다. 

아버지의 혁명은 아버지의 구식 혁명으로 끝나버리고/ 한 코 한 코 풀어지면서 새로운 혁명을 끌어내야 한다고 털옷은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장롱 속에서 나왔죠// 낡은 털실은 팽팽한 긴장감을 놓지 않으면서 혁명가를 계속 불렀지요/ 그 옆에서 소녀의 꽃무늬 혁명은 계속 줄기를 뻗어갔지요 // 풀어진 아버지의 혁명은 새 혁명의 넝쿨로 이어졌죠/ 소녀의 꽃무늬 혁명이 성공을 거둔다면 이 겨울도 이젠 춥지 않을 거라 믿었죠


 

-「소녀의 꽃무늬 혁명」부분

이기인의 시는 고단한 현실 세계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대상을 관찰하듯 이야기하는 화법을 주로 사용한다. 그의 시에서 대상과 시적 화자는 쉽게 동화되지 않는다. 대상과 주체 간의 이런 거리는 세계의 모순과 쉽게 타협하지 않고 대결하려는 그의 시적 경향에서 기인하는 것이리라. 첫 번째 시집 『알쏭달쏭 소녀백과사전』 이후, 소녀들의 비극적 세계는 어떻게 바뀌어 가고 있을까. 두 번째 시집 『어깨 위로 떨어지는 편지』에는 시인 자신의 ‘곤궁과 고뇌’를 투영하는 시 세계와 지난 시집의 연장선에서 ‘아버지의 혁명’을 ‘소녀의 꽃무늬 혁명’으로 바꾸려는 의지의 시 세계가 서로 균형을 이루며 병행되고 있다. 시인은 어린아이, 노인과 같은 약한 존재들에 대해 따듯한 시선을 던지는 와중에도 “조용한 노인의 잠을 파먹기 위해 아악 입을 벌리고”(「공가」) 있는 굴삭기를 잊지 않고 곳곳에 배치시킨다. 현실의 모순을 때로는 선명한 이미지로, 또 때로는 유머러스한 어투로 그려내면서 그는 자본주의의 변두리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삶을 “동맥이 끊어질 듯 아프게 지저귀다 날아가는 새들”(「빗자루 이력서」)의 모습으로 형상화한다. 이기인의 시가 보여주는 뛰어난 성찰과 언어 조형술은 그동안 노동시가 쉽게 메우지 못했던 내용과 형식의 틈을 적절히 채워 준다. 한국 시의 한 영역을 묵묵히 개척해 나가는 이런 시도가 성공할 때 “부득부득 삶을 졸업하지 않았다고 우기면서 눈을 부릅뜨고 있는 깊은 비린내”(「파래가 나온 식당」)라고 할 이기인 시 특유의 냄새는 현실 세계의 비루한 풍경을 경유해 우리의 몸과 정신에 효과적으로 배어들 수 있을 것이다. 시가 세상을 바꾸고 자신을 바꾸게 되는 순간이 온다면, 정치적인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진정한 세계와 자아의 각성이 이루어지는 순간이 온다면, 이기인의 시가 말하듯 “새 혁명의 넝쿨”로 이어진 “소녀의 꽃무늬 혁명이 성공을 거둔다면 이 겨울도 이젠 춥지 않을” 것이다.
최영철, 손택수, 이기인의 최근 발행된 시집을 읽으며 나는 여러 번 감탄했고 동시에 나에게 묻게 되었다. “가장 나쁜 것은/ 무엇인가?// 노래할 수 없는 것인가/ 아니면 억지로 노래하는 것인가?” 「노래」 연작에서 기유빅이 말한 것처럼 시를 쓰고 읽을 때마다 나는 묻게 된다. 나의 시는 과연 감동이 있는가. 감동이 없다면 절실함만이라도 시 속에 묻어나는가. 이것이야말로 ‘시는 현실의 충실한 재현물이어야 하느냐’, 아니면 ‘시는 그 자체로 잘 짜인 독립된 구성물이어야 하느냐’라는 단순 이분법의 질문을 넘어서는, 시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일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시인들이 나처럼 스스로에게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지고 있을 것이다. 비록 그 질문이 무용한 것이라 할지라도…….
감동도 없고 절실함도 없는 시라면 내가 쓴 것은 무엇일까. 나 자신에 대한 두려운 물음 앞에 나는 겸허해진다. 시 속에 땀과 피가 묻어날 때 나는 비로소 나의 시로 인해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다. 시는 스스로를 증명한다. 바람이 나뭇가지에 부딪혀 자신의 몸을 부스러뜨리며 소리를 내듯 아름다운 시들은 스스로를 부수며 태어난다. 

《문장웹진 11월호》

* 기유빅의 시들은 『노래』(이학사, 강동권 옮김.)에서 인용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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